<5장. 협상.>
다음 날 오후.
군림맹의 수뇌부들은 수호전에서 회의를 준비하다가 수호전주 남궁익현을 제외한 전원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님!”
“잘 있었나? 다들 오랜만이네.”
부상에서 얼마나 회복한 것일까?
약한 모습을 내보일 리 없는 남궁위가 마치 하루 정도 자리를 비웠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응천에서 복귀한 독고성이 침착한 눈빛으로 남궁위의 모습을 훑으며 대꾸했다.
“오셨소? 회복한 것으로 보이는군.”
“덕분에 괜찮네.”
남궁위가 독고성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 천뢰각주 한신을 바라봤다.
“응천은 벌써 다녀왔느냐? 수호전주로부터 대략 이야기는 들었다.”
남궁위는 말을 하면서 회의실에 참석한 인원 중 가장 막내라 할 수 있는 이서휘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이서휘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응천에 다녀온 한신의 말이 이어졌다.
“독고 가주님과 다녀왔습니다…….”
☆ ☆ ☆
전날 밤, 응천.
한신과 독고세가 독고성 가주가 이끄는 후발대가 응천에 들어섰다. 이서휘가 제안한 섬멸 계략은 천뢰각주 한신이 다듬어 인원 배치 등의 세부적인 사안을 결정했었다.
유백이 섬멸전을 지휘하고, 한신이 독고성과 함께 응천으로 향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이서휘가 수호전에서 청협문주에게 청협비수를 받고 반 각을 더 머무르고 나올 때 이미 진앙객잔에 대한 정보는 한신에게 건넨 상태.
한신과 이서휘 사이엔 이런 말이 오갔었다.
[한 각주님, 응천에 도착하기 전에 싸움이 일어나면 응천 거점은 이미 퇴각했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혹시 모르니 독고 가주에게 부탁해 보마.]
이서휘는 응천에 도착하기 전에 결전이 벌어질 경우 응천 거점은 퇴각했을 거라 예상했다.
음마존과 그의 수하들이 전멸 당하는 동안 철호방의 일부 인원들이 그 곳에서 군림맹을 기다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
실제로, 한신과 독고성이 도착했을 땐 응천 곳곳이 화마(火魔)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철호방 뿐만 아니라 철호방의 분점 격인 철방들 세 곳과 진앙객잔, 음마존이 머무르던 일획절화(一畫折花)라는 기루와 공손일엽이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운영하던 일엽(一葉) 다루 등이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이서휘에게 나름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철호방의 청년, 하후신이 알고 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던 셈.
물론 건물만 불탄 것은 아니었다. 죽여야 할 자와 살려야 할 자, 데려가야 할 자를 칼로 구분했다. 때문에 불타는 화염 속엔 꽤 많은 자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채로 불꽃과 함께 구천을 떠돌게 되었다.
☆ ☆ ☆
한신이 보고를 끝마치고 있었다.
“…… 때문에 응천 지역에 지부를 설립하는 것을 제안 드립니다.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이야기가 응천 지부 설립에 대한 것으로 흐르자, 이서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판단이 아니었다. 저대로 응천을 그대로 두면 군소방파가 자리를 잡거나 흑도맹의 세력이 뻗쳐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지부를 설립하고 세가의 인원을 차출하는 등의 이야기는 이서휘가 참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반각 후에는 검대주들과 함께 수호전을 빠져 나왔다.
월야대로 돌아온 이서휘는 홀로 대주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맹주 남궁위와 천뢰각주 한신…….
두 사람이 군림맹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서휘는 지난날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남궁위는 맹주로서 군림맹의 중심을 잡을 것이고…….
군사회가 없더라도 한신의 지략이면 쉽게 휘둘리지 않을 터였다. 남궁위의 엄명에 술을 줄였을뿐더러, 이제는 호위까지 달라붙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서휘가 그 진가를 알지 못하던 천라각주 유백은…… 묘하게 격동적인 사람이었다. 검대주들을 휘어잡고 있으면서도 위험한 일에는 꼭 유백이 스스로 나서고 있었다.
거기에 워낙 말 수가 적은 사람이라 속을 알 수 없었으나 독고세가 가주 독고성이 예전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덧붙여 청협문과의 동맹까지…… 이것은 동맹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점점 다른 세력으로 시선을 돌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이 생각만큼 쉽게 되진 않을 터였지만…….
☆ ☆ ☆
이서휘는 결국 군림맹을 안정시키고 다시 월야대의 연공실로 돌아가 수련에 몰두했다.
칠 일에 한 번 정도 나와서 월야대와 함께 검풍객잔에서 거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 대외 활동의 전부. 월야대도 군림맹도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이서휘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쌍각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무림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서휘는 수련에 몰두하면서 가끔씩 도삼을 통해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연공실을 나올 만큼 특이한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다, 이서휘가 월야대를 이끌고 세 번째로 검풍객잔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이서휘는 그간 암연심법으로 인한 성과가 컸고 식사도 거르지 않은 상태라 예전처럼 보기 좋게 날렵한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피부는 지난날 구화산의 석실에서 나왔을 때처럼 매끄러워진 상태였다.
이서휘는 이 층의 한적한 장소에서 예전처럼 거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술까지 마시고 있었다.
그 이층의 구석 자리엔 말끔하게 차려입은 서생 한 명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도삼이 술을 한 잔 들이키다가 신경이 쓰인다는 듯 서생을 흘낏 보며 말했다.
“공자님, 저 사람…… 저번에도 있었습니다.”
그 말에 이서휘를 비롯한 월야대가 독작(獨酌)을 하고 있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복장으로 보나 얼굴로 보나 문사(文士)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남자치곤 하얀 피부, 여자 꽤 홀렸을 것 같은 잘생긴 얼굴까지 전체적으로 훤칠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한 소매 부분에 먹물이 약간 묻어있는 잿빛 의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의복의 모양이 근방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이 있어 도삼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종종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이십 대의 사내였다.
병장기 하나 없이 탁자 위에 엷은 부채가 올려져 있고 술을 제법 잘 마시는지 조촐한 나물 안주 옆에 여러 개의 술병이 놓여 있었다.
이서휘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검우 정천이 뜬금없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괜찮으시면 독작 마시고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이서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으나, 서생은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꽤 듣기 좋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마묵연(司馬黙然)이라 합니다.”
사마묵연은 포권을 쥔 자세로 좌우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제형(弟兄)들에게 사과를 올립니다. 실은 지난번에도 지켜봤습니다. 말을 걸까 했는데 용기가 없어 술만 들이켰군요.”
이서휘가 여전히 침묵을 하자, 검우 정천이 그의 말을 받았다.
“사마 형제셨구려. 어인 일로 우리에게…….”
사마묵연은 탁자에 빈자리가 있건만, 선 자세로 말을 이어나갔다.
“군림맹 여러분들이 아니신지?”
“맞소.”
“하여 인사를 한 번 드릴까 했지요. 제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그때까지 이서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무언가 불안한 마음을 느낀 정천이 이서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동생, 어떤가? 여기 사마 형제의 이야기나 들어보는 것은.”
외부인이 있으면 이서휘와 정천은 그냥 호형호제를 하기로 한 상태. 이서휘는 사마묵연이라는 자를 훑어봤으나, 말 그대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어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럽시다.”
사마묵연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다가 화지련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실로 미인이시오.”
그 말에 화지련이 자신의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지련이라 합니다.”
“반갑소. 화 소저…….”
사마묵연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의 예의 없는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아버님이…….”
사마묵연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유언을 남기셨는데 제가 평생 글이나 읽다가 죽거나 술을 마시다가 죽을 것 같으시다고 서신 한 통을 가지고 군림맹으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든 검대 말석의 자리든 가리지 않고 일을 하라 그러시더군요.”
이서휘는 불쑥 서찰을 한 번 보자고 하려다가 말을 거두고 잠자코 있었다.
사마묵연의 말이 이어졌다.
“군림맹에 와보니 서찰을 받으셔야 할 사마가의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죄다 세가로 돌아갔더군요. 문전박대를 당하다시피 쫓겨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벌써 보름 넘게 술만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서휘가 말했다.
“사마가의 누구를 찾으셨소?”
“군사회 소속의 사마종이라는 어르신입니다만.”
“모르겠소. 다만 사마가는 돌아간 지 좀 되었소. 일부 검대 인원들을 제외하면…….”
“그렇다 들었습니다.”
사마묵연은 탄식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한 잔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검우 정천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실례지만 무공은 배우셨소?”
“아버님이 어렸을 때부터 집에 머무르시던 식객 몇 분을 사부님으로 모시라 하여 잡다하게 몇 수 익혔습니다.”
정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사마가면 장강 이남에서 무공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가문이오만 어째서 식객들에게?”
“아버님은 네…… 젊으셨을 때 무공을 잃으셔서.”
“그렇군. 실례했소.”
“아닙니다.”
사마묵연이 씁쓸한 낯빛으로 화지련을 잠시 바라보다 이서휘에게 시선을 옮겼다.
끝내 이서휘가 별 말을 하지 않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잠시 정적이 감돌자 이서휘가 손님을 쫓으려는 듯이 말했다.
“혹시 사마가의 인재를 입맹시킬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리다. 어디에 머무르고 계시오?”
“물론 이곳입니다. 군림맹 여러분들이 많이 오시는 곳이라 하여 옮겼지요.”
“알겠소.”
“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사마묵연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더니 숙박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삼 층으로 올라갔다. 사마묵연이 사라지자 그제야 이서휘가 월야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자로군.”
도삼과 도이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서휘에게 한마디씩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뭐가 재미있소? 실로 재미없는 자더군. 언제 일어나나 기다리고 있었소.”
이서휘와 도삼은 방금 만난 사마묵연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도이, 화지련, 정천은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서휘가 도삼에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더냐?”
“허? 다들 못 보셨습니까? 저 사마묵연이라는 자 말입니다. 삼 층에 안 들리겠죠? 으흠, 말을 하면서 화 소저를 네 번인가 다섯 번은 쳐다봤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척 했지만 제가 듣기에는 화 소저에 대한 묘한 구애로 보일 정도였단 말입죠.”
도삼의 말에 이서휘를 제외하고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정천이 말했다.
“그랬나? 잘 모르겠던데. 정중해 보이지 않았나?”
정천의 말에 도삼이 화지련을 보면서 말했다.
“화 소저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화 소저, 어떠했소?”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화지련에게 모였다. 화지련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자주 쳐다봤습니다.”
“거 보시라고요. 내 말이 맞았죠? 요새 검풍과 객잔 거리에 화 소저 한 번 보겠다고 아주 난리입니다. 지금도 일 층 한 번 가보십시오. 내려가자마자 사내놈들의 고개와 눈빛이 그냥…….”
“후후.”
이서휘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 식사는 이만 합시다. 다들 먼저 복귀하시오.”
“공자님은요?”
도삼의 말에 이서휘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요새 생각할 게 많아서 난 좀 있다가 가야겠다. 술은 많이 안 할 터이니 걱정 말고 가거라.”
도이가 빈정거렸다.
“허이고, 분위기 엄청나게 잡으시네. 우리 가면 왜 어디 기루로 빠지시려고?”
“도이야.”
“말씀하쇼.”
“조만간 비무 한 번 하자.”
“하이고, 내가 무서워 할 것 같소? 좋아, 한 번 붙어 봅시다. 준비 좀 하고 있겠소.”
그 말에 이서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이뿐만이 아니라 다들 준비하고 계시오. 조만간 한 번씩 비무를 할 터이니.”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이서휘는 네 사람의 무공을 조금이라도 다듬어줄 생각이었다. 이서휘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라 저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군림맹으로 돌아갔다.
월야대가 모두 빠지자 이서휘는 홀로 검풍객잔에 남아서 독작을 했다.
삼 층에서 저 사마묵연이라는 자가 내려올 때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어쩐지 사마묵연이라는 자가 내려올 것 같았다. 이서휘가 그렇게 막연한 기대감으로 반 각을 홀로 술잔을 들이키고 있을 때 계단에서 사마묵연이 조용히 내려왔다.
물론 저 사마묵연은 새벽녘에 군림맹으로 향했던 마교십존의 일원.
사마묵연은 홀로 술을 마시는 이서휘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이 대협, 같이 한 잔 하시겠소?”
이서휘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건만, 사마묵연은 이서휘의 성에 대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여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앉으시오.”
검풍객잔.
해시(亥時, 오후 9시) 무렵에 이서휘와 사마묵연이 마주 보고 앉았다.
어찌하여 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을까?
아마 두 사람 이외에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이서휘가 사마묵연을 불러낸 것일까?
아니었다. 사마묵연이 이서휘를 기다리게 만든 것이었다.
사마묵연은 이서휘가 기다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서휘가 사마묵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묵연(黙然)이라…….”
묵연,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는 뜻이다. 사람의 이름이라 하기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묵연, 차라리 살수(殺手)의 이름이라면 어느 정도 어울렸다. 살수에게 당한 자, 시체는 입을 다물고 말이 없을 테니까.
사마묵연이 이서휘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이름이 이상하오?”
어느새 사마묵연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정중했던 말투는 사라지고 이서휘와 대등한 입장에서 건네는 말투가 나왔다. 그런 태도 변화에도 이서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그렇소. 묵연이라니, 고승(高僧, 덕이 높은 승려)들이 쓸 법한…… 아니면 살수(殺手)들이 쓰는 이름 같소.”
사마묵연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너무 극과 극 아니오? 고승 아니면 살수라니.”
“그렇게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오.”
“어떤?”
“죽음에 초연한 자들이라는 점에선 구도자(求道者)와 같은 면이 있지…….”
“살수를 구도자의 반열에 올려놓다니 재미있는 표현이오. 물론 극히 수준이 높은 살수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러면, 나는 살수란 말이오? 보다시피 승려는 아니잖소.”
“모르겠소.”
이서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대화였으나 이서휘의 마음엔 폭풍이 지나간 듯 했다.
사마묵연, 쉽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이서휘가 내내 독심술을 사용해도 사마묵연은 굳건해 보였다. 오히려 이서휘를 자극하고 있었다.
첫째, 사마묵연은 손쉽게 도삼을 속였다.
화지련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풍겼다. 궤도를 익힌 도삼이다. 속임수라는 영역은 도삼도 꽤 수준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묵연에게 홀라당 솎아 마치 사마묵연이 화지련에게 관심이 있어 접근한 것으로 도삼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둘째, 사마묵연은 정천의 이목도 쉽게 끌었다. 어찌 된 노릇인지 홀로 독작을 하고 있는 모습은 정천의 마음을 움직였다. 정천 자신이 홀로 떠돌다가 이서휘와 연을 맺고 월야대로 합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천이 사마묵연에게 느낀 것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었다.
셋째, 사마묵연은 화지련도 건드렸다. 다만 사마묵연이 몇 번의 미소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화지련은 어찌 된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자들도 지켜본 바였다.
넷째, 우습게도 도이는 눈치가 가장 느렸다. 하지만 도이는 사마묵연의 정체도 모르면서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같이 있기 싫다는 표현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서휘…….
사마묵연이 던진 표현들을 모조리 간파하고 객잔에 홀로 머물고 있었다.
다만 그가 적인지 아군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사마묵연은 실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긴장감을 감춘 상태에서 사마묵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한 자다.’
이서휘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말수를 줄이고 있었다. 적이라는 판단이 들어야 공격을 펼칠 터인데 그렇게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다.
흔한 장검 한 자루도 들고 오지 않은 사람이다. 더군다나 일행도 없다. 적이라면 이보다 더 배짱이 두둑할 수는 없으리라.
이서휘의 표정을 살피던 사마묵연이 말했다.
“왜 그렇게 긴장하셨소?”
“하하.”
이서휘는 웃어 버렸다. 사마묵연, 이서휘만큼이나 사람 마음을 잘 읽는다. 때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신 때문에 그렇소.”
“군림맹이 지척인데 이 대협이 긴장할 필요가 있겠소?”
이서휘는 사마묵연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던졌다.
“내가 왜 대협이오?”
사마묵연은 대답 대신에 웃었다. 사마묵연은 이서휘 당신이 더 잘 알면서 뭘 물어보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서휘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사마묵연이 사마가 어쩌구 했던 말들을 싹 무시해버리는 이서휘다. 사마묵연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생각보다 군림맹이 굳건하길래 흥미가 생겨 구경삼아 온 것이오.”
“굳건하다?”
노골적이다. 이때부터 이서휘가 사마묵연을 적으로 간주했다. 이서휘의 눈빛이 바뀌마자마자 사마묵연이 경고했다.
“섣불리…… 행동하지 마시오. 그대가 궁금해서 온 것이지 그대를 죽이려 온 게 아니니까.”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하하하! 귀여운 면이 있는 사내였군. 똑똑하고 무공도 제법 고강하고. 어찌 자네와 같은 사람이 군림맹에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야.”
어느새 사마묵연의 말투가 또 변했다. 이서휘가 살기를 담아 노려보아도 사마묵연은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서휘는 기분이 더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털이 곤두서는 긴장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표적이 된 느낌이랄까.
이서휘가 살기를 품고 있자, 사마묵연이 히죽 웃었다.
“왜? 꼭 그렇게 검으로 확인을 해야겠소? 내가 당신을…….”
쌔앵…… 깡!
어느새 이서휘가 빼 든 자강검의 검 끝이 사마묵연의 목으로 향했고, 사마묵연은 쥘부채로 검 끝을 막아냈다.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강자로구나.’
사마묵연이 신명 난 얼굴로 말했다.
“빠르구나, 이서휘.”
그때였다. 사마묵연의 목재 쥘부채가 쩌저적 소리와 함께 갈라지더니 묵빛 철선(鐵扇)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마묵연이 주입한 내공을 이서휘가 어느 정도 뚫어낸 것이리라. 그 모습을 보고 사마묵연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강하기까지…….”
사마묵연이 내공을 주입해 이서휘의 검을 파앙 소리가 나도록 튕겨내며 말했다.
“내 말을 더 듣는 게 나을 것이다…….”
이서휘는 자강검이 심상치 않은 내공에 튕겨 나오자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마묵연이 술을 한 잔 따라 마시며 말했다.
“서휘야, 네가 설령 날 죽일 수 있더라도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광기가 서린 말이 아닌데도 이서휘는 그냥 지나쳐 들을 수가 없었다. 이서휘의 마음에도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 이 사마묵연이란 놈은 거짓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바로 쥘 수 있게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음 왼손으로 술을 한잔 따라 마시며 말했다.
“왜지?”
“궁금하지? 궁금할 거야. 자네 눈빛을 보아 하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니까 말이야.”
이서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사마묵연은 이서휘가 자주 사용하는 독심술로 받아치고 있었다.
무공과 심계(心計)가 대단한 자였다.
사마묵연이 말했다.
“좋아. 잘 참고 있군. 술을 나눈 벗인데 이 정도는 말해줘야겠지.”
또 도발이다. 이서휘가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마도(魔道)에 벗을 둔 적 없다.”
“백도(白道)의 뒷방 늙은이들이 할 법한 말은 집어치자고 우리.”
사마묵연이 자신의 철선을 좌라락 피자 이서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나, 공격할 의사가 없는지 사마묵연이 철선에 그려진 중원전도를 이서휘와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손을 우측으로 뻗었다.
“이유를 설명해주지. 이 중원전도에 아직 자네 이름은 없다네. 하지만 자네가 나를 죽이면 이서휘 이름 석 자가 중원전도에 오르게 될 거야. 그게 어떤 의미일까? 먼저 자네 주변이 모두 죽는다는 얘기지.”
“뭔 개소리냐?”
이서휘는 중원전도를 운운하는 사마묵연의 말이 얼핏 이해가 갔으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는 얘기에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 사마묵연에게 넘어간 상태.
사마묵연이 말을 이었다.
“자네 똑똑하잖아. 다 알아들었으면서 뭘 그러나? 말 그대로야. 자네 이름이 적힌 인형, 장기말이라고 할까? 이서휘가 전장에 등장하는 거지. 그 후로 자네를 노리는 건 물론이고 화지련, 정천, 장시우, 도둑들…… 하나하나 다 죽일 거야.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거든.”
“뭐?”
탁!
사마묵연이 부채를 접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직 자네의 이름은 전장에 등장하지 않았단 말씀이지. 아슬아슬한 시기란 말이야. 날 죽이고 한 번 확인해보겠나? 뭐,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성공하면 자네 주변은 파멸(破滅)할 걸세.”
이서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마묵연의 말대로 이서휘 한 몸은 어떻게든 살아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은 아니었다. 작정하고 노리면 이서휘가 보호해줄 방법이 많지 않았다.
이서휘가 사마묵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사마묵연이 이서휘의 마음을 읽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니까. 내 수하들에겐 자네 이야기를 해뒀네.”
사마묵연을 죽이고 나면 자신의 이름이 전장에 오르게 되고 이후 마도의 표적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 주변 사람들까지…….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사마묵연은 왜 이런 사실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일까.
이서휘의 눈빛에 의혹이 감돌자 사마묵연이 말을 이었다.
“그래. 이해했나보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궁금하겠지.”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며 왼손을 들었다. 독심술에서 졌음을 인정한 것. 이서휘는 독심술의 패배를 인정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궁금하다.”
그 말에 사마묵연이 자신의 잔과 이서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한 잔 하세.”
이서휘가 술잔에 담긴 술의 빛깔과 냄새를 확인하자 사마묵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독은 없어. 독은 내 취미가 아니거든. 드시게.”
이서휘는 잔을 들고 끝까지 냄새를 확인하다가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사마묵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와 나는 공통점이 있네.”
취기가 오른 이서휘가 편하게 대꾸했다.
“뭔가?”
사마묵연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란 말일세.”
이서휘가 대꾸했다.
“더 해보게.”
“자네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아니, 알아냈다고 할까? 캐면 캘수록 나와 비슷하더군. 백도와 마도가 전부 등을 돌려도 변하지 않는 사실…… 자네와 나는 어떻게든 정점에 오를 자들이야. 아니지. 이렇게 얘기해야지. 정점에 오르는 순간 죽을 것이야.”
‘뭐야 이 새끼는?’
마치 이서휘의 전생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검풍객잔의 인기척을 살폈다. 떠드는 자, 잡음을 일으키는 자 한 명 없었다.
사마묵연이 말했다.
“다 재웠네. 잠을 자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지.”
죽였다는 말인지 미혼약으로 재웠다는 말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으나 이서휘는 잠자코 있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우리 둘이 무얼 할 수 있지?”
아마 사마묵연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일 것이다. 그 말에 사마묵연이 대꾸했다.
“자네는 나와 함께 하세.”
“함께 하자고?”
“군림맹의 미래가 빤히 보이지 않는가? 갈가리 쪼개진 백도 세력이 하나로 뭉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마도 세력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나? 나는 경쟁자들과 다른 사람이네. 군림은 하겠으나 살육자는 아니란 말이야.”
“다른 경쟁자라…….”
“그래.”
사마묵연은 스스로 마교십존(魔敎十尊)의 일원임을 이서휘에게 밝히고 있었다.
사마묵연은 이서휘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심계를 품고 있었기에 다른 마가(魔家)를 제치고 십존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가 내뱉는 저 달콤한 말에 이서휘마저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서휘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마교십존, 벌써 둘이 죽었다.”
그 말에 사마묵연이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 여태 내 말을 어떻게 들었나? 자네가 죽이지 않아도 언젠가 다 죽어.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결과가 정해진 놀이란 말일세.”
“후후.”
이서휘가 서서히 눈을 빛냈다. 사마묵연이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배포가 이 정도는 아니겠지? 마도와 백도를 초월하여 같이 발버둥 쳐보세. 안 그러면 자네나 나나 미래가 없어. 마도는 오랫동안 준비했네. 마치 추수를 하듯이 뿌려놓은 것을 거두기만 해도 되는 지경에 이르렀네. 자네가 잠시 시기를 늦춘다 한들 변하는 건 없어. 그들만의 세계야. 나는 칼에 맞아 죽거나 독에 중독되어 죽겠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심계가 뛰어나니 독 같은 건 쓰지 않을 것이고 아마 칼에 맞아죽던가 불에 타 죽겠지. 하지만 우리 둘이 손을 잡으면 바꿀 수 있네.”
이서휘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전생, 그리고 회귀한 지금 생애를 통틀어 사마묵연이라는 사람만큼 이서휘를 놀라게 하는 자가 없었다. 저 흔한 말로 이 사람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는 일종의 천재(天才)였다.
어쩌면 예언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마도에 속해 있기에 미래가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마도 세력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궤도도 아니고 독심술도 아니었다.
진실을 쥐고 교묘하게 말을 던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마음마저 움직일 정도로 순수한 악(惡)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이서휘는 당혹스러움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힘들구나…….’
사류곡에서 천마에게 죽었던 끔찍한 순간…….
그 쏟아지던 장대비…….
아수라의 사당의 먼지 냄새…….
눈을 감은 이서휘…….
동료들의 목소리마저 차례차례 끊기고 비를 맞으며 도망치던 순간들…….
천마 위극신의 목소리…….
그리고 죽음…….
그 이후 무림은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이서휘가 상상하자, 당장 떠오르는 단어들이 죄다 살육, 학살, 화마, 강간 등이었다. 마도가 직접 자행했던 일이니까. 그렇게 짓밟으면서 다녔으니까.
말로 형용하기 힘든 참혹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이서휘를 알던 자들이 하나둘 죽었으니까…….
그것을 막겠다고 다시 살아가는 이서휘다.
‘흔들리는 마음을 따라가지 않겠다. 회귀하여 품게 된 숙명(宿命)을 완수할 뿐…….’
어쩌면 회귀한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 사마묵연의 말에 넘어 갔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마묵연은 실로 강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반격에 나설 시간이었다.
이서휘가 사마묵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깃한 제안이야.”
“그럴 것이야.”
“마도의 본거지를 밝히고 나와 함께 하세. 자네의 공포심을 벗겨내주겠네.”
“묘한 말을 하는군. 본거지라는 게 대체 어디 있나? 고개 한 번 돌리면 마귀들 천지인 세상에서…… 이 세상이 본거지일세. 선(善)이 있기에 악(惡)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둠 곳곳에 머무르고 있네.”
“그래. 너희는 정녕, 악이로구나…….”
“자네만 조금 더 오래 살아남아서 무얼 하겠나? 넓게, 크게 생각하게.”
이서휘와 사마묵연이 눈빛을 부딪쳤다.
이서휘가 생각했다.
내가 전장에 이름을 올리면 주변인들이 다 죽는다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라, 라는 심정이었다.
대신에 이서휘와 동료들이 죽은 다음, 이 세상을 누군가가 살아갈 만한 세상으로 남겨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기꺼이 제물이 돼주마.’
마음을 우뚝 세운 이서휘.
옳은 마음을 담은 신념이 이서휘의 눈빛에 깃들었다.
마음을 굳건하게 다잡은 이서휘가 눈을 빛내며 위험한 말을 툭 던졌다.
“자네…….”
“말하게.”
“위극신(韋克神)이 그토록 두렵나?”
“……!”
조금 전의 이서휘만큼이나 사마묵연의 표정이 흔들렸다.
기이함으로 물들었다.
당혹스러움이 눈빛에 담겼다.
그 반격에, 사마묵연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 알지? 자네가 위극신을…….”
“이름 석 자 아는 게 그토록 대단한 일인가? 아니면 자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자의 이름이라서 놀라는 것인가?”
사마묵연이 표정을 급히 숨기느라 양손을 맞잡은 상태로 턱을 괴고 이서휘를 노려봤다.
“내 이름도 알고 있나?”
이서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했다.
‘네 이름 따위를 알게 뭐냐. 죽은 자는 말이 없을 것인데…… 넌 계속 묵연이다.’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후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눈치군. 자네 이름은…….”
이서휘의 손이 자강검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갔다. 동시에 사마묵연이 찰나의 차이로 묵빛 철선으로 손을 뻗었다.
까앙!
사마묵연이 가까스로 자강검을 튕겨내자마자 이서휘가 연달아 다섯 번을 찌르고, 그것을 일일이 튕겨내는 사마묵연.
챙챙챙챙챙!
철선으로 막아내던 사마묵연이 좌장을 내질렀다. 앉은 자세에서 이서휘 역시 내공을 더 끌어올려 좌장을 내밀었다.
콰앙――!
이서휘와 사마묵연이 동시에 밀려났으나, 사마묵연은 일부러 천근추의 수법을 쓰지 않고 이서휘의 장력을 이용해 그대로 난간을 뚫고 나가 일 층에 내려섰다.
이서휘가 공중으로 솟구쳐 일 층으로 내려서며 질풍지로 동작에 암연심검의 환을 실어서 자강검을 내질렀다.
사마묵연이 철선을 좌라락 펴서 마기를 주입해 막아냈다. 또 다시 꽈앙 소리와 함께 사마묵연이 검풍객잔 밖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사마묵연의 목소리는 전혀 떨리는 구석이 없었다.
“하하하. 서휘야, 협상 결렬이 거칠구나.”
타닷! 소리와 함께 사마묵연이 군림맹의 반대편으로 경공을 펼쳐 질주했다.
그러자 이서휘가 맹렬하게 뒤를 쫓으며 하늘에 뜬 달의 밝기를 힐끗 살펴봤다.
먹구름이 달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사마묵연을 쫓으면서 당연하게 드는 생각.
‘매복은 아니겠지. 설령 있더라도…… 이런 날에는 내가 야왕(夜王)이다.’
두 사람의 신형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군림맹의 지역을 벗어났다.
사마묵연의 경공은 이서휘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이서휘가 암행표를 시전하자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달리던 이서휘가 자강검을 내뻗어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었다.
쐐앵……!
사마묵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비틀자, 순식간에 따라잡은 이서휘가 자강검을 내밀었다.
까앙! 챙챙챙챙챙!
급히 몸을 뒤튼 사마묵연이 철선을 휘두르면서 자강검을 튕겨냈다.
검과 철선이 부딪칠 때마다 적막한 대로변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불꽃이 튀어 올랐다.
이서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사마묵연을 압박했다.
‘십존이라는 새끼들은 어찌 이렇게 죄다 거만한 것일까. 설마 위극신도 그런 놈인가?’
사마묵연은 이서휘의 내공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힘들어 잠시 초식으로만 상대했다.
순식간에 삼십여 초를 교환한 두 사람.
사마묵연은 직접 병장기를 부딪치고 나서야 이서휘가 실로 무서운 존재임을 깨닫고 있었다.
본래 음마존을 찾아 가서 협상을 통해 동맹을 맺으려던 사마묵연이었다.
사마묵연…… 아니, 이제 묵연마가(默然魔家)의 가주인 묵연마존(默然魔尊)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묵연이라는 이름에 군림맹을 희롱하려는 뜻으로 사마 성을 붙였을 뿐이었다.
실로 대담한 자였다.
이서휘는 자강검으로 묵연마존의 눈을 노리고 찔렀다.
묵연마존이 뒤로 피하거나, 고개를 숙여 반격을 가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서휘는 검을 내지를 때 이미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묵연마존을 찍어 버릴 수 있도록 살초를 숨기고 있었다.
묵연마존이 이서휘가 안에 받쳐 입고 있는 흑룡화린갑 부분만 공격할 수 있도록 틈을 내줬기 때문.
묵연마존은 휙 소리가 나면서 다가오는 자강검을 이서휘의 의도대로 고개를 숙여 피한 후에 철선을 내밀었다.
‘걸렸다.’
이서휘가 손목을 비틀어 자강검의 검 끝을 돌리는데 묵연마존의 철선이 몸통으로 들어오지 않고, 불쑥 이서휘의 손목으로 솟구쳤다. 이서휘의 속이 철렁했다.
‘아차.’
까앙!
가까스로 자강검을 당긴 이서휘가 손바닥을 펴서 검병으로 묵연마존의 철선을 막아내고, 동시에 검병을 잡으면서 좌각을 내뻗었다.
퍼억!
내공이 가득 실린 이서휘의 발차기를 묵연마존이 좌장으로 받아치다가 뒤로 날아갔다.
휘익……!
날아가던 묵연마존이 몸을 비틀면서 땅에 내려서고, 즉시 쫓으려던 이서휘는 좌장에 맞은 발이 잠시 움직이지 않아 허탈한 심정으로 잠시 묵연마존을 노려봤다.
묵연마존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내뱉었다.
“미친놈처럼 강하구나. 서휘야. 하지만 발이 얼얼할 것이다. 움직일 수 있겠느냐? 하하.”
그 말에 이서휘가 천천히 묵연마존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너희 마가(魔家)까지 쫓아가 주마.”
그 말에 묵연마존이 철선으로 일으킨 바람으로 얼굴을 식히며 말했다.
“좀 쉬엄쉬엄 하자꾸나, 이 새끼야.”
이서휘가 신형을 움직여 다가오자 묵연마존이 허공에 철선을 흔들어 마기를 흩날리더니 모습을 감췄다.
휙……!
이서휘는 자강검을 내질렀다가 묵연마존이 모습을 감추자, 고요한 동작으로 팔을 거둬서 자강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먹구름이 달을 벗어날 때까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서휘는 자강검을 수직으로 세운 자세에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
풀벌레 우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이 고요함은 묵연마존이 아직 이서휘의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아무리 은신술을 쓰더라도 이서휘의 귀를 속일 수는 없는 노릇.
이서휘의 예상대로 묵연마존은 어둠에 숨어서 눈을 감고 있는 이서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저런 어린 나이에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하는 판단을 하는 것일까? 신기한 놈이로다.’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하지 않을까.
걸음이라도 옮기면서 주변을 둘러보지 않을까.
그렇게 예상했던 묵연마존이다.
이서휘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둠을 틈 타 충분히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묵연마존은 은신술을 사용하느라 내공만 소모되고 있었다.
묵연마존은 침도 삼키지 못 하고 그대로 이서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눈을 감은 채로 자신의 기척마저 지울 기세였다.
스슥― 스슥―.
그때였다. 살쾡이로 보이는 검은 물체가 어둠 속에서 뛰어나와 대로변을 가로 질러 이서휘와 묵연마존 사이를 지나갔다. 이어서 새끼 살쾡이들이 뒤를 따라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한데 한 마리가 은신술로 모습을 숨기고 있는 묵연마존의 발목에 영문도 모른 채 툭 하고 부딪쳤다.
까앙―.
이서휘의 자강검이 순식간에 뻗어와 철선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후다닥 소리와 함께 살쾡이들이 도망가는 가운데 이서휘와 묵연마존이 다시 맞붙었다.
챙챙챙챙챙챙챙!
철선으로 자강검을 튕겨내던 묵연마존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지.’
등줄기가 오싹해진 묵연마존이 강맹한 내공을 실어 사방팔방으로 마기를 쏟아내는 흑투파장(黑妬波長)을 내뿜은 다음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은신술로 이동했다.
그러자 검막으로 흑투파장을 튕겨낸 이서휘가 묵연마존의 발소리를 들으며 귀신처럼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서휘가 정확하게 자신의 뒤를 밟자, 묵연마존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은신술을 풀고 경공을 펼쳐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줄기 호흡도 아까운 상황이라 묵연마존은 치밀어 오르는 욕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망할 새끼가!’
이서휘가 묵연마존의 뒤를 바짝 쫓았다.
물론 묵연마존의 반격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반격뿐만이 아니다. 묵연마존이 펼칠 수 있는 심계도 모조리 깨부술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잡아서 고문이라도 해서 거점을 몇 군데 알아내서 박살내고 싶은 이서휘였다. 물론 잡기가 어려우면 가차 없이 벨 생각이었다.
두 줄기 신형이 대로변을 질주했다.
순식간에 응천까지 접어든 두 사람.
묵연마존은 갖은 수를 써서 반격을 펼치고 속임수도 써보고, 때때로 숨어 봤지만 이서휘에게 통하는 수법이 전혀 없었다.
이서휘는 질주하는 광인(狂人)이었다.
이서휘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을 포기한 묵연마존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경공을 펼쳐 한 시진 동안 내달렸다. 다시 반 각이 흘렀을 때 아예 두 사람 모두 걸음이 지쳐서…… 뛰는 둥 마는 둥 하며 걷고 있었다.
그때, 숨을 몰아쉬던 묵연마존이 겨우 입을 열어 이서휘를 설득했다.
검풍객잔에서 떠들었던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이야기했던 것.
하지만 대답 대신에 검이 날아왔고, 묵연마존은 무거운 발을 다시 움직여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선풍표국까지만 가자…….’
선풍표국은 묵연마존이 세운 거점 중 하나였다. 묵연마존은 실로 당황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서휘에게 쫓기면서도 자신이 왜 쫓기는지 명확하게 모를 지경이었다.
무공의 차이는 사실 극히 미세했다.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묵연마존은 심정적으로 이서휘에게 밀리고 있었다.
묵연마존이 너무 똑똑한 탓이었다. 계략을 쓰면 통했고 심계를 발휘하면 적이 무너졌다. 그게 묵연마존의 방식이었다. 한데 이서휘는 그냥 미친놈처럼 보였다. 그래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가끔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고 자세를 돌리면 이서휘가 도무지 빈틈이 보이질 않는 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묵연마존에게 남은 수는 많지 않았다.
일단 그가 지닌 묵빛 철선.
묵철로 만든 철선이기에 그 어떤 보검과 부딪쳐도 쉽게 부러질 일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일부러 날붙이 병장기를 수월하게 부러뜨릴 수 있도록 철선의 머리 부분에 검신이나 도신을 끼워 넣을 수 있는 파검혈(破劍穴)을 만들어 놓았다.
이서휘가 검을 내지를 때 철선의 파검혈로 맞받아쳐서 내공을 주입한 손목으로 튕겨내면 이서휘의 검을 부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날의 예리함과는 상관이 없는 비장의 수였다.
검신을 부러뜨리는 것이었으니까.
묵연마존은 자신의 내공과 이서휘의 내공이 격돌하면 그 정도는 충분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묵연마존이 단내가 나도록 달려 나가면서 그렇게 회심의 한 수를 준비했다.
‘그래. 이제 남은 것은 파검혈 뿐이다…….’
그때였다.
도망가던 묵연마존은 순간 이서휘의 발 소리가 들리지 않고 기척마저 사라지자 그대로 내달리지 못하고 우뚝 멈췄다.
사방이 어둠이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순간 묵연마존은 이서휘처럼 두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해볼까 하다가 괜한 짓인 것 같아서 가까스로 자제했다. 대신이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하고 넘어갔다.
그때였다.
쐐앵……!
전방에서 검기가 날아왔다.
‘제기랄!’
묵연마존이 철선을 내밀어 검기를 막아내자, 어느새 불쑥 이서휘의 검이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묵연마존이 고갯짓으로만 이서휘의 검을 피하다가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나갔다.
묵연마존이 촤라락 소리와 함께 철선을 폈다가, 흑투파장을 내보냈다.
콰앙……!
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묵연마존은 이서휘가 기가 막히게 튀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극도의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묵연마존 앞에 이서휘의 검이 불쑥 튀어 나왔다.
승부다!
이서휘의 검이 묵연마존의 눈을 노리고 들어왔다.
묵연마존 역시 내공을 가득 실은 철선을 내밀어 파검혈에 자강검의 검 끝을 정확하게 끼워 넣었다.
철컥――!
기묘한 쇳소리와 함께 자강검이 철선의 파검혈에 단단히 물렸다.
그 순간, 묵연마존이 혼신의 힘을 다 해 철선을 위로 꺾었다.
자강검이 그야말로 고래 등처럼 휘어지자, 이서휘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내공을 잔뜩 주입했다.
위잉――!
자색 물결이 퍼지면서 휘어졌던 자강검이 제자리를 찾았다. 반면에 자강검에 심상치 않은 빛이 맴돌자, 검기나 검강으로 착각하고 화들짝 놀란 묵연마존이 급하게 철선으로 내공을 내보냈다.
팅――! 드드드드드득――!
두 사람의 내공이 병장기를 통해 맞붙었다.
암연심법으로 내공이 한층 깊어진 이서휘다. 묵연마존도 이를 악물고 온 몸의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하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면서 불꽃을 튀겼다.
말도 내뱉지 못하는 상황!
내공을 쏟아내고 있어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이서휘가 흘낏 검 끝을 바라봤다. 파검혈에 물린 자강검이 빠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이서휘의 내공이 부족했다면 벌써 부러졌을 자강검이다. 하지만 이서휘도 자강검도 끈질기게 버텨내고 있었다.
이서휘가 조금의 여유라도 있었다면 등에 꽂은 유엽비도를 꺼내 묵연마존의 목을 벨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자강검이 심하게 휘었던 상태에서 내공을 급히 주입한 터라 두 사람의 힘은 백중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자강검은 이서휘의 내공과 묵연마존의 내공까지 주입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한 자색을 내뿜고 있었다.
이서휘는 자강검의 색이 아예 거뭇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자능비(滿紫能飛)?’
이 순간에 왜 그 말이 생각났을까.
자강검이 내뿜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서휘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묵연마존은 내공이 고갈되기 전에 승부를 걸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짜내어 손목을 다시 한 번 비틀었다.
우웅――!
자강검이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서휘가 동시에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폭발시키듯이 자강검에 밀어 넣었다.
그때……!
이서휘가 검을 쥔 자세에서 암천세(暗天勢)를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묵연마존이 무언가 서늘한 분위기를 느끼고 손목을 땅 쪽으로 꺾었다가, 재빠르게 다시 하늘을 향해 튕겼다.
까앙!
자강검의 검신이 중간에서 뚝 부러지면서, 부러진 중간 지점에서 돌돌 말려 있던 것으로 보이는 물체가 공중으로 솟았다.
그와 동시에 부러진 자강검에서 위력이 다소 줄어든 암천세가 쏟아지고, 동시에 철선으로 내보내고 있던 묵연마존의 내공이 공중에서 맞붙어 굉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각기 날려버렸다.
콰앙……!
휘이이이잉……!
이서휘는 날아가는 도중에도 자강검의 검신에서 솟구친 정체불명의 물체를 눈으로 확인했다.
‘뭐냐?’
하지만 각도 때문에 묵연마존의 뒤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서휘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땅에 내려서자마자 묵연마존을 향해 튀어 나갔다.
한편, 묵연마존은 이서휘의 암천세를 미처 다 막지 못했다.
한 모금의 피를 왈칵하고 뿌리면서 날아갔다가 땅바닥을 여러 차례 구른 후에 일어나서 휘이익―!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물체를 올려다보고 즉시 튀어 나가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마침 묵연마존이 쉽게 잡을 수 있게 날아오고 있었다.
보검이 부러지자마자 그 속에 들어있던 정체불명의 물체라니!
묵연마존의 눈이 뒤집힐 만했다.
묵연마존이 왼손을 내뻗어 돌돌 말린 물체를 낚아채고 땅에 내려서자마자 등 뒤로 바람 소리가 일었다.
묵연마존이 신형을 돌려 철선을 내뻗자 깡!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겼다.
챙챙챙챙챙챙!
이서휘가 어느새 부러진 자강검을 그대로 검집에 꼽은 후 좌수에 쥔 유엽비도로 묵연마존의 철선을 튕겨내고 있었다.
묵연마존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대체 뭐 하는 새끼냐.’
말 그대로 좌수(左手)로 도를 펼치고 있다.
심지어 그 좌수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니라 도(刀)였다.
한데, 이서휘의 공세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자강검에 이어 유엽비도마저 철선에 비해 전혀 강도(剛度)가 뒤처짐이 없자, 묵연마존은 속으로 욕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개새끼가…… 어디 대장간 출신인가 무기가 왜 이리 많아.’
이서휘가 지치지도 않는 다는 듯이 유엽비도에 내공을 가득 실어 묵연마존을 베자, 철선을 들어 막아내던 묵연마존의 몸이 콰앙 소리와 함께 멀리 날아갔다. 땅바닥을 여러 차례 굴러가던 묵연마존은 이서휘가 다가오기 전에 얇은 재질의 양피지를 손에 들고 외쳤다.
“……더 다가오면 양피지를 가루로 만들겠다.”
“그래라. 네가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서휘가 호흡을 고르면서 묵연마존에게 다가갔다.
묵연마존은 마음 가득 끌어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담아 양피지를 움켜쥐자, 그제야 이서휘가 걸음을 멈췄다.
이서휘로서도 양피지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묵연마존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대결이었다. 양피지를 내줄 테니 우리의 협상은 다음으로 미루자. 더 덤비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네 놈이 나한테 오기 전에 이건 가루가 될 것이다.”
묵연마존이 왼손에 쥔 양피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보고 싶지 않은가? 본래 자네 것이야. 난 물욕이 없는 사람. 이거 받고 협상은 다음으로 미루자.”
묵연마존이 양피지를 가루로 만들 것처럼 움켜쥐었다. 묵연마존의 내공이면 양피지를 가루로 만드는 것쯤은 사실 쉬운 일이었다.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던져라.”
묵연마존은 양피지를 내밀 때 시선을 움직여 양피지를 살폈으나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이나 기름, 피 같은 것을 묻혀야 볼 수 있도록 약품이 처리된 양피지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가져가서 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이서휘의 무공 수준과 심계가 뛰어나 떨쳐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서휘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곱게 내 놔라. 가루로 만드는 순간 너도…….”
그때, 묵연마존은 내공을 실어 이서휘의 머리 위로 던져 뒤편으로 훌쩍 날려버렸다.
양피지가 휙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위로 지나가 뒤에 떨어지자 슬쩍 바라보던 이서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여간 이 쓰레기 같은 마도 새끼들은…….”
대로변이라 그대로 두고 가면 사라질 위험이 높았다.
이서휘는 잠시 묵연마존과 양피지를 쳐다보며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묵연마존이 슬금슬금 걸음을 뒤로 옮기면서 이서휘를 향해 말했다.
“지긋지긋한 새끼……. 어쨌든 축하한다. 그런 보검에…….”
묵연마존이 말을 하다 말고 경공을 펼쳐 질주했다.
이서휘는 묵연마존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이서휘가 양피지로 뛰고, 묵연마존이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타다다다다닥!
이서휘는 양피지를 줍자마자 품에 넣고 묵연마존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어차피 자신의 암천세에 부상을 입은 묵연마존이다. 곧장 따라 잡아서 죽이면 그만이었다. 이서휘의 단전에서 월단화를 취해 얻은 극음의 내공이 이서휘의 전신에 퍼지고 있었다.
저 멀리 앞서 나가던 묵연마존은 이내 무척 지친 듯이 헉헉 대다가 결국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인 채로 땅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하아, 여름눈……. 카악 퉤! 이서휘 이 개 같은……. 후우.”
열기는 가라앉았으나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건 이서휘도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동이 틀 것 같았다.
밤새 달리면서 겨룬 두 사람이다.
이서휘는 묵연마존이 동료들을 죽일 거라는 얘기를 한 터라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서휘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묵연마존에게 다가갔다. 그때 전방에서 일찍 표행길에 나선 선풍표국 사람들이 묵연마존을 발견하고 외쳤다.
“표국주님!”
묵연마존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하고 들어 표국 사람들을 보며 외쳤다.
“기 표두! 정 표두!”
“여기서 뭐 하십니까? 저 자는 누구입니까?”
“죽여라. 후우, 어서 죽이라고!”
그 말에 표두와 표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이서휘를 포위했다. 이서휘는 포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비켜라. 죽기 싫으면.”
그 말에 묵연마존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막아라! 죽기 싫으면!”
이서휘가 신형을 움직이면서 유엽비도를 휘둘렀다.
챙챙챙챙챙! 푸욱! 쐐앵!
대여섯 명의 병장기가 손에서 날아가고 정면에서 막아서던 자의 목이 뚫렸다. 이서휘는 암연심검의 파를 내보낸 다음에 푸악 하고 솟구친 누군가의 팔에서 검을 낚아 챈 후에 그대로 묵연마존에게 던졌다.
쐐애애애앵!
등을 돌렸던 묵연마존이 자세를 돌려 이서휘가 던진 검을 튕겨내는 찰나, 이서휘가 좌수로 던진 유엽비도가 연달아 날아와 묵연마존의 어깨를 꿰뚫었다.
푸욱!
묵연마존이 그대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허리춤에서 청협비수를 뽑아 쥐고 쓰러진 묵연마존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