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광월야>
이서휘와 청협문주의 만남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밤을 꼬박 지새운 이서휘가 장시우 대주에게 응천에서의 일을 보고하고 숙소로 돌아와 기절하듯이 잠들었기 때문. 밤새 이서휘가 마도 세력을 추적했다는 이야기가 장시우를 통해 퍼진 터라 청협문에서도 서둘지 않았다.
어쨌든 이서휘가 이끄는 월야대가 청협문을 구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할 만큼 멋진 일이었다. 월야대의 활약에 덩달아 정천, 도이, 도삼, 화지련을 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호전주 남궁익현은 청협문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때문에 청협문을 이끄는 단의황은 연신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앞으로 군림맹과 어려움을 함께 하겠다며 동맹을 제의한 상황이었다.
☆ ☆ ☆
다음 날, 이서휘가 수호전 무인들의 안내로 수호전에 들어섰다.
수호전주 남궁익현과 천뢰각주 한신이 청협문주 단의황을 접대하고 있었다.
남궁익현과 한신이 이서휘를 보자마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와라.”
“잠은 좀 잤느냐?”
이서휘가 대꾸했다.
“네, 피로를 많이 풀었습니다.”
단의황이 몸을 일으키더니 이서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 대주, 이제 만나게 됐구려. 청협문 단의황이오.”
이서휘는 단의황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청협문주 단의황.
이서휘의 기억에 그는 보기 드문 괴짜였다.
청협문을 세웠을 만큼 무공도 고강했으나 천하제일인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들인 단우혁을 장차 천하제일인으로 만들기 위한 여정을 자주 떠났던 청협문주 단의황이다. 자신보다 오성이 뛰어난 아들이 훗날 절대 강자가 될 수 있도록 유명한 문파나 고수들을 찾아 끊임없이 비무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또한 유명한 영약을 백방으로 구해 단우혁에게 모조리 밀어주고 있었다. 오성까지 뛰어난 단우혁이다. 때문에 훗날 사패가 되어 만났을 때는 그 어느 누구도 단우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든 자가 바로 단의황이었다. 하나, 군림맹의 도움으로 많은 수의 청협문도를 비롯해 아들의 목숨까지 구하자 청협문주 단의황은 거만한 자세를 버리고 군림맹의 여러 군웅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단의황은 이서휘를 보자마자 자신의 아들과 나이가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다. 단의황 자신은 마가의 두 장로를 상대하느라 이서휘의 무위를 살펴보지 못했다. 하나, 청협문도들의 증언으로는 단의황은 이서휘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하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단우혁도 종종 군림맹에 이서휘라는 벗이 있다는 얘기를 했던 터라 단의황은 마치 양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이서휘를 보고 있었다.
“이 대주, 고맙다는 말만 하지 않을 것이오. 이 단의황, 평생에 걸쳐 원수와 은인(恩人)은 잊지 않고 살았소. 이 대주는 앞으로 청협문의 은인이자 벗이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은인이라니요. 벗이라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좋소.”
단의황은 자신의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품에서 패옥을 하나 꺼내 이서휘에게 살펴보라는 듯이 건넸다.
“이 단의황은 어렸을 때부터 방랑벽이 심해 무림 곳곳에 숨어 있는 기인이사들과 돈독한 우애를 다지고 있소. 그 패옥을 목에 걸고 다니거나 내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들이 언제든 이 대주를 도울 것이오. 물론 청협문은 말할 것도 없지!”
단의황의 호탕한 말에 이서휘가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문주님 감사합니다. 꼭 지니고 다니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겠소. 또 있소. 가져 오게.”
“네?”
청협문주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청협문도 한 명이 청색의 도가 전각된 목갑을 들고 왔다. 청협문도가 이서휘에게 목갑을 내밀자 단의황이 말했다.
“지난날, 도(刀)를 벼리고 남은 묵철(墨鐵)로 만든 청협비수요. 검을 쓰든 도를 쓰든 지니고 있으면 유용할 거요. 본래 이 대주를 비롯해 다섯 분이 도우셨다 들었소. 다섯 자루를 주려고 했으나 세 자루가 전부인 것이 못내 아쉽구려.”
목갑에 들어 있는 것은 세 자루의 청협비수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예기(銳氣)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이서휘가 들고 다니는 흑비도와 크기가 비슷했다.
이서휘는 비수를 보자마자 감탄을 내질렀다. 이서휘에겐 사실 전에 받은 전공포상보다도 이 세 자루의 비수가 더 값져 보였다.
이서휘가 비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천뢰각주 한신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한신은 자신이 비수를 선물 받은 것처럼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이서휘가 두 손을 맞잡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사양하지 않고 잘 쓰겠습니다.”
이서휘의 솔직한 대답에 좌중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단의황도 함께 웃다가 말했다.
“시원하군! 내 아들과 정녕 죽이 잘 맞겠소.”
“후후후.”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네, 죽이 잘 맞았었지요.’
남궁익현이 말을 꺼냈다.
“자자, 이 대주에게 자세히 들어봅시다. 밤새 마도를 쫓아갔던 일 말일세.”
이서휘가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응천까지 쫓았는데 철호방이라는 곳이 마도 세력의 거점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한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철호방이? 정말이냐?”
이서휘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일전에 마도 세력으로 추정되는 자를 죽이고 얻은 유엽비도를 들고 다녔는데 철호방에서 즉각 알아보고 저를 추적하더군요. 십여 명을 죽인 터라 아마 지금은 경각심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철호방을 그대로 둬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서휘의 보고에 남궁익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신에게 물었다.
“한 각주, 자네 생각은?”
“거점이라면 제대로 준비를 해서 쳐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한신이 빙긋 웃으며 이서휘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복안이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서휘가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단의황이 호기롭게 말했다.
“마도를 치는 일에 청협문이 빠질 순 없소. 일이 계획되면 우리도 지원을 하리다.”
그 말에 남궁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협문이 도와주신다니 제가 맹주님을 대신하여 단 문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후후후.”
이서휘도 이런저런 계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만 시기가 문제였다. 바로 검대를 이끌고 밀 것이냐, 혹은 시기를 뒀다가 다른 계책을 사용할 것이냐.
이서휘의 생각은 후자였다.
“제가 의견을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요?”
“뭘 그리 어려워하나? 말하게.”
남궁익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제가 바로 어제 분탕질을 좀 해놨기 때문에 경계가 삼엄해질 수도 있고 이미 수뇌부들은 거점을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군림맹이라 확신할 수 없을 겁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소문주께서 완쾌할 때까지 기다리시죠.”
“어째서?”
“청협문의 방문은 알려진 일입니다. 어쨌든 청협문으로 돌아가실 터인데 응천까지는 저희가 배웅하기 힘듭니다. 그 점을 노리는 겁니다. 군림맹의 정예고수들이 청협문도로 가장해 돌아가시는 일행에 섞여 있는 게 좋겠습니다. 마치 군림맹에 들어오려 했던 적들의 계책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지요. 인원이 적으니 적이 습격하기 좋을 것이고. 저희는 정예고수가 돕고 있으니 밀리지 않을 터. 그 사이 중간 지점에 검대를 배치했다가 신호와 함께 몰아치면 응천 지역은…….”
이서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멈췄다. 이서휘의 이야기를 들은 세 사람이 저마다 계획을 검토했다.
가장 먼저 한신이 대꾸했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었네. 다만 문주님이 수락해주실지가 걱정이 되어서…….”
그 말에 단의황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좋은 의견들을 가지고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오. 이 단 아무개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오. 마침 우리도 부상자가 많아 당장 도와드리긴 어려우니 이 대주 말대로 휴식을 취한 후에 진행하는 게 좋겠소. 더군다나 군림맹의 여러 영웅들이 청협문에 입문하시겠다고 하니, 단 아무개로서는 실로 영광일 따름이오.”
“하하하.”
“좋습니다. 소문주와 청협문도들이 회복할 때까지 조용히 세작을 내보내 살펴보면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어차피 청협문도의 복장도 제작을 해야 할 것 같고요.”
한신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는 그곳에서 반 각 정도를 더 머무른 다음에 수호전에서 물러 나왔다.
☆ ☆ ☆
며칠 사이 운룡회와 군사회가 해체되다시피 흩어졌고 불만을 품은 제갈세가와 사마세가의 일부 무인들이 맹을 탈퇴하고 세가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했다.
반면에 이서휘를 비롯해 전공포상이 주어진 자들과 일부 맹원들은 조직 개편 때 아예 승진 발령이 나 있었다.
이서휘가 월야대주로.
질풍검대의 이건영이 부대주로.
쌍각의 인원은 더 늘었고, 한신과 유백의 건의로 고참 급에서 부각주가 한 명씩 뽑혔다.
때문에 비공개 조직으로 운영하려던 월야대는 하는 일만 비밀에 부쳤을 뿐, 운룡회로 숙소를 옮겨 아예 정식 조직으로 인정을 받았다. 때문에 정천, 도이, 도삼, 화지련은 운룡회가 사용하는 숙소에 입주한 상태였다.
이서휘는 월야대주로 승진하면서 전공포상으로 받았던 막대한 상금을 장시우와 나눴다. 한사코 사양하는 장시우를 이서휘가 끈질기게 설득해 질풍검대원들에게 포상금이 더 돌아갈 수 있도록 안배했다. 그러고도 포상금은 많이 남았다.
이서휘가 계속 질풍검대 부대주 업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마음 한쪽이 섭섭한 이서휘가 고집을 부린 행동이었다.
그러고도 세 자루의 청협비수(靑俠匕首)가 남아 있었다.
이서휘는 새롭게 마련된 대주 집무실에서 도삼과 도이 형제를 불러 놓고 단의황으로부터 받은 목갑을 꺼냈다.
도이가 말했다.
“뭐요, 이게?”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열어 봐.”
그 말에 도삼이 목갑을 열자 세 자루의 청협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삼과 도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호오, 만져 봐도 됩니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삼과 도이가 한 자루씩 비수를 가져가 요리조리 살펴봤다.
이서휘가 하나 남은 청협비수를 손에 들고 살펴보며 말했다.
“하나 남은 건 내가 쓰마.”
“그러쇼. 뭐, 뭐요?”
“예? 저희 주시는 겁니까?”
이서휘가 대꾸했다.
“왜? 싫으냐?”
그 말에 도둑 형제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킬킬 웃었다. 도이는 비수가 썩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대주, 잘 쓰겠소.”
도삼은 딴 소리를 하고 있었다.
“햐, 이런 거 보니 또 손이 근질근질하네요. 공자님, 아니지. 대주님.”
“시끄러워.”
“아니, 말 좀 들어보세요. 제가 무슨 황궁을 털러 가자는 것도 아니고. 진짜 괜찮은 데가 있단 말입죠.”
이서휘가 말했다.
“뭐가 있는데?”
“모르죠. 모르니까 가본다는 거 아닙니까.”
이서휘가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너, 최고다.”
“별 말씀을.”
이서휘가 도삼의 말을 끊으며 이야기했다.
“빠르면 열흘 후에 늦으면 보름. 작전이 있을 거다. 그 전까지 난 주로 연공실에서 수련에만 몰두할 생각이니까 급한 일 아니면 찾지 말고. 알아서들 해.”
도이가 빈정거렸다.
“히야, 보름 동안 얼마나 강해지시려고 거 참 누가 들으면 폐관수련 들어가는지 알겠소.”
이서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허허, 비수가 마음에 안 드나 보구나. 안 그래도 내가 비수를 여러 자루 사용하는데 너희 생각해서…….”
도이가 재빠르게 비수를 품에 넣으며 대꾸했다.
“대주 실력이면 보름 사이에 환골탈태(換骨奪胎)가 가능하리라 믿소. 어떠냐 도삼아?”
도삼 역시 재빨리 비수를 품에 넣으며 대꾸했다.
“형은 대주님을 그렇게 하찮게 생각했소? 내 장담하리다. 보름 후에 대주님은 반로환동(返老還童)하셔서 나올 것이오.”
그 말에 도이가 크게 놀랐다.
“아니! 지금도 새파랗게 젊은 나이로 군림맹의 대주 자리를 꿰찼는데 네 말이 정녕 사실이란 말이야? 더 새파란 놈이…….”
도이가 말을 하다가 이서휘의 표정을 보고 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그만하리다. 모쪼록 좋은 수련 되시길. 용무가 바빠서 이만.”
이서휘가 빈정거렸다.
“바쁘긴 개뿔이.”
도삼이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초류황도 물러나겠습니다. 수련에 매진하여 조만간 십삼초승천이란 별호를 십이초승천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그래. 고생이 많다. 물러가라.”
이서휘는 무뚝뚝한 얼굴로 있다가 두 사람이 나가자 그제야 편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이서휘가 월야대의 연무장에 등장한 것은 한 달 후였다. 말 그대로 연공실에만 틀어박혀 암연심법에만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
이서휘가 연무장으로 나오자 도삼과 도이, 정천이 크게 놀란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이가 말했다.
“아니, 대주. 환골탈태나 하라 그랬더니 어찌 이렇게 뼈만 앙상해져서 나오셨소?”
도삼도 놀라긴 마찬가지.
“대주님, 괜찮으십니까? 밥을 가져다 드려도 안 드시는 날이 많아 걱정했습니다.”
“괜찮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천 형, 저 없을 동안에 수고 좀 해주셨다고요. 도삼이 가끔 와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수고랄 거 까지야. 자네가 집중할 수 있도록 잡무를 좀 처리한 거 밖에. 근데 어찌 한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마를 수가 있는가? 뭐 좀 먹으러 가세.”
세 사람의 걱정대로 이서휘는 피골이 상접했다. 처음 며칠은 배가 고파서 도삼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손을 댔었다. 하지만 오히려 운기조식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한 달이라니요? 보름 아닙니까?”
이서휘의 말에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도삼이 말했다.
“몇 번 지연이 됐습니다. 제가 가끔 가서 말씀 드리고 왔는데 못 들으셨나 봅니다.”
“한 달이라…….”
이서휘는 연공실에서 의도적으로 단전에서 음과 양의 내공을 조합시킨 후 임독양맥을 포함한 십사경맥을 차분하게 주천(周天)하며 내공을 쌓았다. 덕분에 월단화와 천양뇌단으로 쌓았던 내공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졌던 이서휘다. 전생에 두 눈을 잃었었기에 그 누구보다 내공을 깊게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이서휘다. 암연심법을 운용하는 방법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에 이서휘는 말 그대로 침식(寢食)을 잊고 운기조식에 매달렸다.
그 결과 세 사람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상태였으나 두 눈은 맑은 정기로 가득 찼고, 몸의 상태와 내공의 깊이가 한 달 전에 비해 한층 진일보(進一步)한 상태였다.
이런 형국에 한 달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운기조식을 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복된 일이었다. 월야대는 누가 무슨 일을 시키지 않아도 저마다 할 일을 찾아서 하거나 각자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선 꽤 죽이 잘 맞는 조합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도삼을 통해 종종 들었습니다. 곧 출발한다지요?”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이니까 아직 시간이 있네. 청협문 무복도 도착했으니 나중에 갈아입게.”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명이 빠진 것을 깨달았다.
“화 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그 말에 도삼이 대꾸했다.
“화 소저는 홀로 안채에 있는 연무장에 주로 있었습니다. 몰랐는데 대주님 못지않게 독하게 무공…….”
도삼은 말을 하다 말고 짧게 딸꾹질을 했다.
화지련이 안채에서 나오며 말했다.
“대주님, 나오셨습니까?”
“화 소저, 어서 오시오.”
화지련도 이서휘의 깡마른 모습에 적잖게 놀란 모습이었다. 반면에 화지련은 더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어쨌든 네 명 모두 잘 지낸 것 같아 이서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서휘는 화지련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이서휘는 월야대를 이끌고 객잔 거리로 향했다. 잠시 후 다섯 사람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그야말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이서휘가 첫 끼니부터 과식을 할 수 없어 적당히 먹은 후에 일어섰다.
“값 치르고 갈 테니 마저 먹고 오시오. 옷도 갈아입고 준비하고 있을 터이니.”
“다녀오십시오.”
“금방 다 먹고 따라가겠습니다.”
이서휘가 객잔 밖으로 나가자 네 사람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반로환동하고 나오라고 했더니 다 죽어가는 몰골로 나오셨네. 검이나 잡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도삼의 말에 정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들 마시게.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네. 보면 볼수록 이 대주는 보기 드문 기재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 말에 도이가 빈정거렸다.
“쳇, 난 앙상한 뼈 밖에 안 보이더니만. 며칠 도시락이라도 싸서 따라다니면서 먹여야 할 것 같소.”
“후후.”
정천은 이서휘의 달라진 기도와 맑게 변한 눈빛을 읽었을 뿐이었다. 정천 역시 내공을 중시하는 검가(劍家)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서휘의 발전이 어느 정도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도삼과 도이는 무공의 궤가 현격하게 달라서 그저 ‘왜 굶으셨을까?’하는 궁금증만 가지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월야대의 숙소로 들어가서 책상에 놓인 청협문의 무복을 바라보다 옷을 벗었다. 받쳐 입은 흑룡화린갑이 드러났다. 이서휘는 청협문 무복으로 갈아입고 가죽띠를 그 위에 걸쳤다. 유엽비도를 왼손으로 뽑을 수 있도록 주머니를 조정하고, 자강검을 오른손으로 뽑을 수 있도록 주머니를 하나 더 달았다. 등 뒤에 유엽비도와 자강검을 교차하여 매달고 허리춤에는 청협비수를 찔러 넣었다.
이서휘가 대주실을 나오는데 어둑해진 연무장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단 소문주.”
그곳에 청협문 소문주 단우혁이 서 있었다.
“이 대주.”
두 사람은 놀랍게도 서로 예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부름에 친근함이 묻어 있었다. 지난날 함께 흉살이괴(凶殺二怪)를 함께 척살하면서 서로의 성격이 어떤 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서휘는 존칭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으나 단우혁은 예의 따위를 무시하는 성격이었다. 한데, 이번만은 달랐다. 단우혁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야 이 대주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이 단우혁이 신세를 졌소.”
이서휘가 고개까지 숙이려는 단우혁을 급히 부축하며 말했다.
“단 형제, 이러지 마시게. 상처는 나으셨나?”
“대주께선 말을 편하게 하십시오.”
“하하.”
이서휘가 박장대소를 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어이가 없군. 매번 형 노릇을 하려던 녀석이…….’
이서휘가 웃음을 참고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지. 단 형제도 말 편히 하게. 형은 무슨 형인가. 서로 그냥 이름 부르세.”
이서휘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단우혁의 뻔한 반응을 오랜만에 기대했다. 단우혁은 씨익 웃으며 이서휘의 어깨를 팍 소리가 나도록 치면서 말했다.
“좋아! 그러세! 자네와 나는 실로 마음이 맞는군. 아니, 그런데 못 본 사이에 뭐 이렇게 말랐나?”
“하하하하.”
이서휘는 단우혁의 뻔한 반응에 오랜만에 배를 잡고 웃었다. 실로 천하에 보기 드문 성격을 가진 단우혁. 그 반가움에 웃은 것이다.
이서휘가 말했다.
“수련 좀 했네.”
그 말에 단우혁이 대꾸했다.
“술시(戌時, 오후 7시)에 출발한다고 하니 이따 보세.”
“준비하겠네.”
청협문이 군림맹을 벗어나 응천으로 향했다. 이미 한 달 동안 준비를 한 일이다. 일부 검대 인원들은 아예 바깥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식으로 빠져 나와 있었고 신호가 터지면 언제든 청협문과 합류를 할 터였다. 또한 청협문이 군림맹을 떠나기 삼일 전에 부대주들이 이끄는 화룡검대와 천룡검대가 응천과 군림맹의 중간에 있는 산 속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청협문의 선두에 단의황과 단우혁이 나란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관건은 청협문에 속한 군림맹의 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차출한다는 식으로 군림맹의 고수를 뽑아 배치했다. 한데, 점점 이상한 열기를 띄기 시작하더니 마치 이번에 뽑히지 않으면 군림맹의 고수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다. 반드시 청협문도로 위장하고 싶어 하는 군림맹의 고수들이 많았다. 나중에는 지원자가 많아 쌍각의 각주들이 나서서 인원을 제한시켰다.
일단 군림맹 본영을 지키는 운룡, 비룡 검대와 대주들을 제외하고 세 명의 검대 대주가 속해 있었다.
화룡검대주 백리풍.
천룡검대주 독고마량.
질풍검대주 장시우.
운룡과 비룡의 부대주들.
수호팔검 중 수호사검.
쌍각의 부회주들.
놀랍게도 천라각주 유백마저 청협문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독고, 모용, 백리 세가는 아예 세 명씩 자리를 내달라고 수호전에 압박을 넣어 합류한 상태. 때문에 본래 월야대 전원이 참가하려고 했던 계획이 어그러져 이서휘만 홀로 일행에 합류했다. 참여한 고수들이 너무 막강하니 이서휘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대신에 청협문이 습격을 받을 경우 가장 먼저 지원을 하러 갈 수 있는 후발대에 월야대의 인원들을 포함시켰다.
군림맹을 떠난 지 반 각이 흘렀을 무렵.
어느새 대로변 주변은 어두워지고 달빛이 쬐고 있었다. 적막감이 흐르는 가운데 청협문 소문주 단우혁이 낭랑한 목소리로 호방한 기운이 섞인 청협문답가(靑俠問答歌)를 선창했다.
“청협문답가를 시작해보자!”
그 말에 단의황이 탄식을 내뱉으며 아들을 말렸다.
“소문주! 그 또 잔망스러운 노래를 하필 이곳에서.”
“하하하! 아버님! 저희가 한 곡조 시원하게 뽑아 보겠습니다. 자, 내가 묻고 그대들이 답을 하시오!”
청협문답가(靑俠問答歌).
단조로운 곡조로 단우혁이 묻고 청협문도가 대답하는 형식의 노래였다. 단의황은 들을 때마다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나, 단우혁은 계속 문도들을 이끌고 부르면서 곡조를 다듬어가고 있었다. 노래를 모르는 사람도 한 번 들은 후에 대답만 따라 해도 되는 식이라 나중에는 군림맹의 영웅들도 신이 나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청협문답가는 단의황이 하도 여러차례 무용담을 늘어놓아 단우혁이 일부러 그 내용을 가사로 해서 만든 것이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의 단우혁이 선창했다.
“이십칠 세의 나이에 도 한 자루를 쥐고 강서오괴를 주살한 자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단의황이로다!”
단우혁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치며 박자를 맞추다, 추임새를 한 번 더 넣고 문답을 이어나갔다.
“젊은 영웅이로다! 단의황의 뜻을 이어 받아 사악한 무리가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올랐다가 가장 늦게 내려지는 깃발이 있으니 저 깃발에 적힌 두 글자가 무엇이더냐!”
“청협이로다!”
군림맹의 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본래 오글거리는 맛으로 부르는 노래였기에 단우혁은 신이 나서 선창을 이어 나갔다.
“한 자루 도가 남을 때까지 천하를 노려보고, 그 도마저도 부러질지언정 끝내 꺾이지 않는 협이 있으니 영웅들이 이를 무엇이라 부르더냐!”
이서휘와 장시우, 유백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다가 청협문의 대답을 우렁차게 따라 했다.
“청협이로다!”
“와하하하.”
청협문도들과 군림맹의 고수들이 한데 섞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응천에 이르지도 않았건만 청협문의 우측, 시커먼 어둠 속에서 단우혁의 문답을 따라 하듯이 누군가의 선창과 대답이 이어졌다.
“클클클……. 도 한 자루 믿고 허접스러운 실력 뽐내려 군림맹에 들렀다가 몰살당하는 종자들이 있으니 그 이름이 무엇이더냐?”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군. 크하하하.”
그 말에 좌측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대꾸했다.
“청협문 새끼들이로다.”
“크하하하!”
그 서늘한 웃음을 듣고 단우혁이 갑자기 내공을 싫어 산천초목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호쾌하게 웃어서 덮어버렸다.
“으하하하하하하!”
단우혁의 주변에 있던 자들이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단우혁의 웃음은 강맹하면서도 적의 기를 꺾어 버리는 기세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위당하자마자 단우혁이 웃음을 터뜨릴 줄은 과연 아무도 몰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적이 잠시 감돌았다.
마가의 장로 한 명이 황당한 기색으로 헛웃음을 길게 내뱉었다.
“허…… 허…… 허…… 허…… 헛!”
이서휘는 자강검을 뽑지 않은 채로 어둠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 몰려나온 인원은 과연 많았다. 청협문의 세 배는 족히 될 듯싶었다.
하지만 이서휘를 비롯해 청협문의 무복을 입은 자들은 포위를 당하자마자 저마다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우혁이 말 위에서 청룡도로 어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단우혁이다. 그대들이 되도록 많이 왔길 바란다.”
그 자신감에 마도 세력이 웃음을 터트리고, 단우혁의 호방함에 군림맹의 정예 고수들마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마도와 백도가 각자의 이유로 웃음을 섞어 버렸다. 마치 누가 더 호쾌하게 웃는 가를 경쟁하는 것 같았다.
훗날 이 싸움에 참여했던 자에게 누군가 그날 밤의 싸움이 어땠는지를 묻는 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리 쬐는 달빛마저 광기가 서려 있었다고.
이서휘가 등 뒤에서 자강검을 뽑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광월야(狂月夜)로다.”
비정(非情)한 밤이다.
백도와 마도는 광월야(狂月夜)에 취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서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 광월야에서 가장 비정한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언(斷言)할 수 있다.
이서휘다…….
누군가는 공을 세우기 위해 청협문도의 옷을 입었다.
단의황과 단우혁을 비롯한 청협문은 당했던 것을 되돌려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하지만 참으로 비정한 사람이 있으니…….
이서휘는 마도와 백도 세력이 이렇게 맞붙게끔 판을 깔았다. 이서휘 때문에 백도 세력의 계략이 음험해졌다.
그래, 이서휘의 탓이다. 이서휘가 음험한 까닭이다. 마도에 못지않은 계략가다. 마도에 못지않게 잔인한 자다.
이서휘는 앞으로 자신에게 떨어질 비난을 모두 감당할 생각이었다. 이보다 더한 계략도 얼마든지 쓸 것이다.
이서휘의 가슴에는 마도섬멸(魔道殲滅)이라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어찌 비정(非情)을 논하랴?
아마 전생에는 반대였을 것이다.
우린 백도니까. 우린 정정당당하니까. 우린 정의를 바로 세우는 자들이니까.
이서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이 전장에 외치고 싶었다.
부질 없다고……. 다 개소리라고…….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당한 백도 세력은 이서휘가 일일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지만 전생에서 겪은 바를 이 자리서 말로 외칠 수는 없는 법.
때문에 이서휘는 미칠 듯한 후회에서 비롯된 비정한 마음을 검(劍)에 담았다.
이서휘의 냉혹해진 눈빛엔 칼을 품은 맹세가 담겨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는 마도는 없을 것이라고…….
청협문 소문주 단우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오늘 너희 마도가 등을 보이는 자가 있다면 이 단우혁이 평생에 걸쳐 비웃을 것이다.”
“개소리 말거라. 크하하하!”
청협문 일행이 병장기를 동시에 뽑았다.
그때, 스릉― 스릉―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데 청협문도들의 무기가 이상하다. 유백이 뽑아 든 쌍도(雙刀)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한데 뽑히는 것마다 대부분 검(劍)이었다.
그렇다. 검이다.
청협문은 도문(刀門)이 아니던가.
적막한 어둠에 울리는 것은 분명 검명(劍鳴)이었다.
그 소리에 혈흔이 수놓인 백의장포를 입은 음마존(淫魔尊)이 좌우음마사자(左右淫魔使者)를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야, 준비 좀 했는가? 군림맹 종자들이 있구나.”
그 말에 백발의 노인, 음마가의 좌사자인 공손일엽(公孫一葉)이 말했다.
“얕잡아 보면 안 되겠소.”
음마존은 위기를 깨달았으나 싸늘한 말투로 비장하게 대꾸했다.
“공손노야, 적은 겨우 백 명도 되지 않소. 다 죽이지 못하겠으면 다들 이 자리에서 자결하시오. 우리 수준이 그렇다면 다른 자들과 경쟁할 가치가 없는 것이오! 그냥 죽어주는 게 낫소.”
“흥! 어찌 말을 그렇게 약하게 하십니까? 다 죽여버리면 될 것을! 마도천하가 올 것이오!”
곡도를 손에 쥐고 말한 장로는 음마가의 우사자인 추경(秋倞)이었다.
추경의 말마따나 겨우 백 명도 되지 않는 인원을 삼백 명의 인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도가 두려워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한데, 수장 격인 세 사람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 자체가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때, 마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야수의 정체를 확인하겠다는 듯이 암기 하나가 청협문 쪽으로 날아왔다. 마도 측에서 아무나 맞힐 생각으로 던진 것이나, 암기에 실린 내공만큼은 충분히 두터운 것이었다.
휙―! 타앙―!
군림맹의 화룡검대주 백리풍이 무표정하게 암기를 튕겨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청협문과 군림맹을 향해 각종 암기가 쏟아졌다. 세세하게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암기가 저마다의 파공성(破空聲)과 궤적을 만들어내며 날아왔다.
타다다다다다다탕! 위잉! 투두두두두둑!
이서휘가 자강검으로 검막을 그려 일제히 쏟아지는 암기를 꽤 많이 떨어뜨렸고, 청협문과 군림맹이 저마다 도와 검을 휘둘러 암기를 완벽하게 튕겨냈다.
그야 말로 완벽한 방어진―!
화룡검대주 백리풍이 마도를 향해 빈정거렸다.
“장난질은 이제 끝났느냐?”
백리풍의 빈정거림에 잠시 정적이 찾아들자 청협문주 단의황이 대도(大刀)를 치켜들고 내공을 주입시켜 우우웅―! 소리를 울렸다. 이 노련하고 노회(老獪)한 무인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피가 들끓고 있었다.
단의황이 말했다.
“자, 시작해도 되겠소?”
단의황의 당당한 개전(開戰) 알림은 죽여야 할 마도와 함께 싸워야 할 군림맹에게 동시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 말에 화답하듯 운룡과 비룡의 부대주들이 화전포(火箭包)를 공중에 쏘아 올리자 호쾌한 소리가 공중에서 터지면서 두 자루의 불꽃 장검이 하늘을 수놓았다.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청협문을 포위한 마도 세력이 창칼을 앞세워 밀려 들었다. 그 순간에 군림맹의 고수들이 튀어 나갔다.
일부는 공을 세우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일부는 당했던 것을 갚기 위해 휘둘렀다.
단우혁이 광인처럼 청룡도를 앞세워 적진에 뛰어들자 막는 병장기마다 청룡도에 부러지면서 피와 신체가 동시에 튀었다.
단의황은 어떤가? 단의황은 아무리 군림맹의 고수가 강하더라도 이 일행의 일인자는 자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음마존과 두 장로를 향해 도기를 뿌려대며 다가갔다.
실로 용감하면서도 저돌적인 선택!
그 성격을 알기에 단우혁이 청룡도로 몸을 감싸듯이 휘두르면서 단의황에게 합류했다. 그 사이 쐐애앵! 쐐애애액! 쏴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세 줄기 검기를 뿌려대는 검대주들이 음마존을 노리고 뛰어 들었다.
음마존, 공손노야, 추경이 세 줄기의 검기를 동시에 튕기자 전장을 뒤흔드는 굉음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앙!
스슥, 스슥, 스슥! 소리와 함께 좌우음마사자(左右淫魔使者)의 직전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 이 모든 굉음을 날려버리겠다는 듯이 어디선가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두드드드드―! 두드드드드!
실로 불길하다. 백 명쯤 되는 것일까? 아니 그 백 명을 또 다른 백 명이 만들어낸 울림이 덮고 있다.
대체 몇 명이나 몰려오는 것일까. 군림맹의 합류였다. 매복을 하고 있었던 군림맹의 검대원들이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부대주들이 기관장치가 달린 죽통에 담아온 섬광탄(閃光彈)을 쏘아 올렸다.
푸쉬이이이익! 꽈광! 꽈광!
잠시 하늘이 대낮같이 밝아지자, 자신들을 둘러싼 인원을 확인한 마도 세력이 대번에 얼어붙는다. 일부는 그 와중에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다. 이미 죽고 죽이는 것에 대한 미련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는 자들이었다.
“죽여라! 죽이고 또 죽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클클클―! 청협문이고 군림맹이고 죽이면 그뿐이다!”
두드드드드드!
화룡검대와 천룡검대의 검대원들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말발굽으로 흑의인들을 짓밟고 지나갔다.
처절한 비명이 광월야의 축가(祝歌)처럼 울려 퍼졌다.
무정한 검 한 자루 뽑아든―
이서휘의 눈이 전장을 살폈다.
다른 자들이 모두 튀어 나가 검과 피를 뿌릴 때.
이서휘는 휘몰아치는 폭풍을 준비하듯이 전황을 살피며 잠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음마존에게 달라붙은 고수들이 많은 것을 보고 이서휘는 적의 수를 줄여야겠다고 판단하고 자강검을 치켜 들었다.
암연심법에만 한 달 내내 매달렸던 성과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서휘가 오른손으로 치켜 든 자강검에 자색이 차올랐다.
우웅― 우웅―!
“보여다오, 자강검아……! 만자능비(滿紫能飛)라 하지 않았더냐!”
이서휘는 검기를 내뱉지 않고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파도처럼 몰아쳐 자강검에 주입했다. 이대로 자강검이 터져버려도 무방하다는 심정으로 쏟아냈다.
쏴아아아아아!
검명이 퍼진다.
이어서 가득 찬 자색의 물결이 검사(劍絲)가 되어 자강검의 검신에 스멀스멀 피어올라 휘감았다. 이서휘가 검사를 확인하자마자 몰려 있는 흑의인들을 향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뻗었다.
일직선의 검기에 검신에 휘몰아치던 검사가 함께 뻗어 나가 적들을 관통했다.
쐐애애액! 푸욱, 푸악, 푹, 푹, 타앙!
적들을 뚫고 나가던 검기가 마침 아군을 공격하고 있던 자의 병장기를 날려버리고 다시 뚫고 나갔다.
검기의 밀도(密度) 역시 진일보했다.
다음은 신체……!
이서휘가 자강검을 쥐고 흑의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몸이 기이하게 빨라진다. 암행표를 시전한 것이다. 흑의인의 목을 찌르고, 좌우의 사람을 베고 등 뒤에서 도 한 자루가 밀려들자 그대로 암행표와 암행술을 섞어서 순간 세 사람을 지나쳐 모습을 드러냈다. 베고, 찌르고, 몸을 회전시키면서 휘두른 자강검이 병장기와 신체를 가리지 않고 가르는 순간…….
이서휘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다시 네다섯 명을 지나친 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자강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쐐액! 푸악!
“끄아아악!”
그때 또 다시 군림맹의 후발대가 대로변을 가로질러 추가로 합류했다. 때문에 마도 세력 포위망이 세 곳에서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청협문 무복을 입지 못해 잔뜩 독이 오른 군림맹의 고수들이다. 그곳엔 정천, 도이, 도삼, 화지련이 속해 있었다.
정천은 아예 적룡파천(赤龍破天)으로 큰 구멍을 내듯이 쏟아내고 그 뒤를 청협비수를 들고 적의 무기를 무 썰듯이 썰어내는 도이, 도삼이…….
그리고 아직은 성장할 여지가 더 남은 한 여인…….
‘강해질 거야……. 아무도 날 무시 못 하게 할 거야.’
마음 속에 품었던 독기를 용기로 바꿔나가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화지련이 침착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월야대 네 명은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전장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이서휘를 발견하자마자 병장기를 뚫고 이서휘에게 다가갔다.
챙챙챙챙! 까앙! 푸욱!
도삼과 도이는 청협비수의 위력에 놀라는 중이었다. 평범한 도와 검은 그대로 썰어버리니 정천 못지않은 속도로 인파를 뚫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순식간에 다가온 월야대가 이서휘를 호위하듯이 자리를 잡고 검을 내질렀다. 도삼이 일부러 이서휘의 직위를 부르지 않고 예전처럼 불렀다.
“공자님, 누굴 죽여야 합니까?”
이서휘가 검을 휘두르면서 대꾸했다.
“죽지나 말아라. 죽이는 건 내게…….”
쐐앵―! 푸아아악!
세 사람의 몸통이 날아가자 이서휘가 말을 마쳤다.
“……맡기고. 보중(保重)해라.”
그때였다.
쩌저저저정!
유백의 쌍도가 어느새 짙게 퍼지고 있는 흑빛 마기를 흩어버렸다. 이서휘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세 사람의 마인이 뿜어내는 흑빛 마기가 청협문과 군림맹의 고수들을 휘감고 있었다. 더군다나 좌우음마사자(左右淫魔使者)의 직전제자(直傳弟子)들이 제법 강맹한 공격을 뽐내며 검대주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확인하자마자 이서휘가 공중으로 솟았다. 흑의인의 어깨를 밟을 때마다 자강검이 하단으로 궤적을 그렸다.
타다다닥! 푹! 푹! 푹!
콰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흑의인 한 명을 땅에 묻어 버린 이서휘가 자강검을 앞세워 몸을 비틀면서 뻗어 나갔다.
목표는 어둠!
짙게 퍼져 나간 마기에 휩싸여 당황스러워 하는 유백과 검대주들을 제치고 이서휘의 검이 정확하게 어둠을 뚫고 추경의 곡도로 뻗어 나갔다.
까앙!
챙챙챙챙챙챙!
이서휘는 추경의 곡도를 튕겨내면서 검은색 안개 속에서 전황을 살폈다. 자신의 합류로 음마존과 천라각주 유백이 맞붙고 있었다.
쩌저저정! 쩌정!
이를 악다문 유백의 쌍도가 불꽃을 내뿜었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노인, 공손노야는 단의황과 단우혁을 상대하면서 밀리지 않고 있었다.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청협문 부자를 감쌀 때마다 단우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청룡도를 휘두르다가 발로 땅을 구르면서 튀어 나가 발에서 터진 기파로 마기를 흩어 버렸다.
실력 그 이상의 패기가 돋보이는 행동을 단우혁은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아들의 무모함을 잘 알기에 단의황은 미칠듯한 합격을 이뤄내면서 공격과 수비를 신들린 것처럼 전환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공손노야는 미끄러지듯 후방으로 물러나 양 손에서 음마강살풍(淫魔剛殺風)이라는 외기 발현 장력을 끊임없이 내뿜고 있었다.
꽈과광!
그때마다 단의황은 음마강살풍을 흩어 버렸고, 강맹한 장력이 쏟아질 때마다 청룡도로 튕겨내던 단우혁은 몸을 수차례 비틀면서 날아갔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벌떡 일어나 다시 공손노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개…… 염병할 노마두로구나……!”
대도를 들고 미친 듯이 덤벼드는 청협문의 부자가 내뿜는 기세에 공손노야는 침음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추경은 본래 직전 제자들과 함께 검대주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형국이었다. 더군다나 추경이 푸슉, 푸슉 소리를 내며 좌장에서 섬뜩한 지풍을 내뿜고 있어 검대주들은 전신을 보호하면서 기를 파악해 검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뛰어든 이서휘가 모두의 예상을 깼다.
이곳의 그 누구보다 기를 파악하는 감이 뛰어나다. 순식간에 추경과 일대일의 접전을 펼치면서 지풍을 뱉어내기도 힘들 정도로 몰아붙이면서 추경의 곡도를 튕겨냈다. 그러자 검대주들은 십여 명의 직전제자들에게 맹렬하게 돌진하면서 검기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앙!
그그그그극! 쓰…… 까앙!
곡도와 자강검이 맞붙었다가 추경이 내공을 실어 이서휘를 튕겨냈다. 파아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이서휘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장시우와 맞붙고 있던 직전제자 한 명의 등을 자강검으로 꿰뚫고 뽑아냄과 동시에 좌수로 유엽비도를 꺼내 어느새 다가온 추경의 곡도를 튕겨냈다. 또 다시 파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팔이 균형을 잃고 엉뚱한 궤적을 그리자 장시우가 이서휘를 스쳐 지나가면서 추경을 막아냈다.
깡! 챙챙챙챙!
이서휘가 내공을 끌어올려 자세를 바로 잡자마자 질풍처럼 튀어 나가면서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쐐애애애애앵!
추경의 곡도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두 눈을 부릅뜬 장시우가 질풍처럼 튀어 나가 장검을 추경의 복부에 내질렀다. 순간 추경의 눈과 얼굴이 새빨간 기운으로 뒤덮였다.
폭사(爆死)……!
이서휘가 미칠듯한 속도로 위험하게 맞붙어 있는 장시우와 추경의 사이를 노리고 내공을 가득 주입한 자강검을 휘둘렀다.
☆ ☆ ☆
위이이이이잉――!
찰나의 순간에 추경의 몸이 폭사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이서휘가 뿌린 검막(劍幕)이 폭사를 막아냈으나 그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장검을 꽉 움켜쥐고 있던 장시우의 몸이 검막을 뚫고 나온 충격파를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이서휘가 화들짝 놀랐다.
“형님!”
장시우가 공중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이서휘가 꽈앙 소리와 함께 땅을 구르고 솟구쳤다.
다행히 장시우는 검막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한 상태.
장시우가 누운 자세로 날아가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이서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이서휘는 공중에서 장시우와 미소를 교환하고, 손을 내뻗어 서로의 손목을 맞잡았다.
순간,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누워 있던 장시우가 이서휘의 힘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그대로 앞으로 날아갔다.
휘―익!
이서휘가 공중에서 장시우를 뒤로 내보낸 힘으로 앞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면서 자강검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앵!
두 사람은 서로의 팔 힘을 이용해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그대로 내려섰다. 이서휘와 장시우는 서로를 살펴보지도 않으면서 자신 앞에 놓인 적들을 갈라내며 멀어졌다.
근처에 있던 정천과 화지련이 도착해 장시우 주변에서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푸악, 푸욱! 소리와 함께 내려선 이서휘의 좌우에 도이와 도삼이 내려섰다.
이서휘의 명령이 없어도 월야대는 이서휘의 마음을 읽고 나뉘어졌던 것.
도삼이 말했다.
“공자님, 이미 적을 압도하고 있으나 문제는 저…….”
도삼이 청협비수로 음마존과 백발노인을 가리켰을 때, 이미 이서휘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도삼과 도이가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었다.
‘후, 못 말리는 분이야.’ 이런 표정들이었다.
이서휘는 천라각주 유백과 맞붙고 있는 음마존의 뒤로 돌아갔다. 이서휘는 유백의 기세가 맹렬한 것을 보고 잠시 고개를 돌려 전황을 살펴봤다.
이미 전세는 청협문과 군림맹에게 기울고 있었다.
공손일엽의 직전제자들은 군림맹의 검대주들과 백리, 모용, 독고 세가의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때문에…….
음마존과 유백.
공손일엽과 청협문의 부자(父子).
이들의 혈전(血戰)만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를 비롯한 청협문과 군림맹의 일원들은 완벽한 포위망을 펼쳐 흑의인들을 베어 나가는 한편, 섬광탄을 다시 쏘아 올려 여러 겹의 방진(方陣)을 펼쳐 적의 수장들을 가둔 채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적의 수장들과 겨루는 군림맹의 유백과 청협문의 부자들이 만들어내는 병장기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이서휘는 청협문과 군림맹 일원들의 눈빛을 살피면서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서휘가 판을 짠 섬멸전이다.
섬멸전은 전투가 빨리 끝날수록 좋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한데 이서휘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적들을 도륙하고 저마다 눈을 빛내며 수장들의 혈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눈빛들…….
승리한 자들의 눈빛.
동료를 지켜낸 자들의 눈빛.
적을 가차 없이 벤 자들의 눈빛.
순간, 이서휘는 더 이상 군림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겠구나 예상했다.
이로써 명확하게 군림맹은 하나의 큰 고비를 넘겼다. 이로써 군림맹은 거듭났다. 이로써 군림맹은 강해질 터였다. 저 눈빛들을 보며 이서휘는 온몸에 전율(戰慄)이 일었다.
이서휘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서휘가 늘어선 군림맹 동료들의 눈빛을 보며 전율하고 있을 때.
사단(事端)은 먼저 유백과 음마존 사이에서 벌어졌다.
군림맹 검대주인 장시우, 백리풍, 독고마량은 유백의 자존심을 생각해 바로 난입하진 않고 있었으나, 상황에 따라 유백이 화를 내건 말건 뛰어들 생각이었다.
유백의 목숨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음마존을 베는 게 이 싸움의 목적이 아니던가? 때문에 검대주들은 저마다 장검을 불끈 쥐고 있었다.
이서휘라고 다를까? 이서휘 역시 자강검을 쥐고 언제든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대주들의 표정을 읽은 이서휘는 씁쓸하게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후, 이 명예롭지 않은 오명(汚名)은 내가 가져가겠소…….’
그때, 콰앙! 소리와 함께 유백의 몸이 음마존의 마기에 튕겨나가 날아갔다.
동시에 비정(非情)한 검 세 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백리풍이…… 장시우가…… 독고마량이…… 검기를 쏟아냈다. 음마존의 복부와 머리를 향해 검기가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쏴아아아!
쇄애애앵!
쐐애애액!
처절함이 감도는 미소를 띄고 있는 음마존은 백의 장포를 와락 소리와 함께 펼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공중으로 솟았다.
“이 개새끼들아…….”
그때, 소리도 없이 이서휘의 신형이 공중으로 솟았다.
청협문과 군림맹의 시선이 일제히 공중으로 향했다…….
공중에 솟은 음마존이 우장을 내밀어 음마강살풍(淫魔剛殺風)을 내뿜으려는 찰나…….
이서휘의 자강검이 서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음마존이 내민 우장을 지나쳐 음마존의 목을 지나갔다.
핏――!
자강검의 날카로움과 솟구친 이서휘의 속도 때문에 뼈와 살을 갈랐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섬뜩한 순간이었다. 이서휘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음마존의 머리가 떨어졌다.
“명천(冥天)아!”
‘명…… 천…… 아……?’
이런 순간에 불리는 누군가의 이름이라니…….
저 한 마디에 수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이 멍청아, 이 어리석은 놈아, 이 불쌍한 놈아…….
어찌 이 늙은이의 말을 듣지 않았느냐…….
음마존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백발노인, 공손일엽은 음마존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
그 심상치 않은 부름에 너나 할 것 없이 가슴 속에 한줄기 비애(悲哀)가 스며 들었다.
방금 죽은 저 자의 이름이 명천이로구나.
명천이라는 자와 백발노인의 관계가…… 남달랐구나.
이야기를 듣지 않았건만, 저 한 마디의 외침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백발노인만큼은 무정(無情)한 자가 아니로구나…….
그 숙연함 속에서.
……공손일엽이 목을 자른 이서휘와 함께 죽을 생각으로 순간 온몸이 흑빛 화염(火焰)에 휩싸여 청협문의 부자를 무시하고 이서휘의 신형을 쫓아 공중으로 날아갔다.
공손일엽의 성명절기인 환세강림화마(幻世降臨火魔)다. 지난날 구화산에서 대도(大盜)가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기가 담겨 있었다.
이서휘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세를 파악하고 암천세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때 환세강림화마 상태의 공손일엽이 솟구치자마자 등 뒤에서 단우혁의 도기(刀氣)가 쏟아졌다.
쾅!
공손일엽이 그대로 도기를 튕겨냈다. 단우혁의 도기가 날아감과 동시에 어느 평범한 장검 한 자루가 날아갔다. 군림맹에서 던진 것이었다.
탕!
장검마저 튕겨 나오자마자…….
이어서 연달아 내공이 실린 수십 개의 검과 도, 암기와 검기가 날아갔다.
쐐애애애앵! 파바바바바박!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날아가는 공손일엽의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날아간 무기들이 공손일엽의 몸에 연달아 꽂혔다.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말이다.
파바바바바박!
이서휘를 지켜주려는 자들이 저마다 무기를 내던져 공손일엽의 심상치 않은 절기를 그야말로 처절하게 분쇄했다.
이서휘는 자강검을 쥔 채로 암천세를 사용하려다, 이 비정하고 냉엄(冷嚴)한 풍경에 할 말을 잃은 채로 공손일엽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 고슴도치가 된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공손일엽의 몸이 이서휘에게 한두 발자국 다가가다 말고 고꾸라졌다. 아니, 허물어졌다고 해야 옳을까.
적막감이 흐른다.
누구 한 명 승리를 축하하는 자 없었다.
이서휘가 제안한 청협문과 군림맹의 포위 작전에 적들은 섬멸당했다.
승리를 만끽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했다.
마도 세력을 뿌리 뽑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었기 때문. 이곳에 선 무인들은 저 옛날에 벌어졌던 정마대전이 조만간 어떤 형식으로든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 침묵과 숙연함을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어쩌면, 명천(冥天)아! 라고 외쳤던 백발노인 때문이 아닐까?
명천아, 라는 외침에 담긴 수많은 의미가 무인들의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
승리하고도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 않는 백도(白道)의 무인들…….
검을 쥔 자의 숙명처럼 저마다 비정(非情)한 면이 있었으나……
결코 무정(無情)한 자들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비정하되, 무정한 자들은 아니다.
이 침묵과 숙연함은 그렇게 설명해야 할 터.
그것이 아마도 백도와 마도가 다른 점일 것이다.
상황이 뒤바뀌어 청협문과 군림맹이 전멸했다면 광월야 아래 음마존의 킬킬 대는 웃음이 울려 퍼졌을 터…….
타닥, 타닥.
불꽃이 춤을 춘다.
청협문과 군림맹은 대로변에 즐비한 시체들을 치울 의무가 있었다. 한적한 공터 곳곳에 시체를 모아 불을 피웠다. 군데군데 타닥, 타닥 소리와 함께 마도의 무인들이 불꽃으로 변하고 있었다. 꽤 많은 수의 검대와 군림맹을 지키던 검대가 추가 합류해 이서휘가 제보한 응천의 철호방으로 향했다. 그 무리의 우두머리들은 천뢰각주 한신과 독고세가 가주 독고성이었다.
이서휘가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 곁으로 월야대가 하나둘 다가왔다.
도삼이 말했다.
“대주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십니까?”
도이가 다가와 농을 쳤다.
“배고프쇼?”
그 말에 아무도 웃질 않았다.
이서휘가 침착한 표정으로 월야대를 돌아보며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군림맹은 강해졌네.”
“강하죠. 본래 강하지 않았습니까?”
이서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회귀 전의 일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 강해진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서휘는 도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했다. 정천 형, 도이, 화 소저도 다들 수고 많으셨소. 뒤처리는 검대에 맡기고 돌아가 쉬시오들.”
“대주님은요?”
“난 여기 남아서 상황을 좀 보다가 같이 마무리하고 가겠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색에다가 농담 한 마디 하지 않는 이서휘를 보며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이서휘는 등 뒤에 자강검을 꽂아 넣고 팔짱을 낀 채로 타오르는 불꽃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이서휘의 생각은 중원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군림맹 홀로 마도 세력을 분쇄할 수는 없는 일. 이서휘의 경험과 무위, 계략이 더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더 강력해지기 위해 어떤 수를 사용할까.
이름 모를 마도인들의 명복을 빌어주면서 이서휘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반대편에서 백도 세력을 전멸시키려는 천마 위극신, 혹은 마교 교주가 이서휘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예상하며…….
이서휘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군림맹으로 복귀하는 청협문의 후미에서 터벅터벅 걸었다. 청협문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 더 군림맹에서 머무를 터였다.
새벽녘.
타닥 거리는 불꽃도 어느새 꺼져 버리고.
타들어간 잔해 위에, 엷은 이슬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 서늘한 풍경에 서생 차림의 청년이 조용히 걸어왔다.
마교십존 중 세력이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 마존이었다. 그의 마가(魔家) 세력이 그토록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교 교주는 이 사내를 마교십존의 일원으로 임명한 상태. 다른 십존들과 교류도 하지 않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사내가 군림맹이 떠난 방향을 흘낏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마가처럼 마존을 수행하는 장로들도 대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마존이라 생각할 수 없는 평범한 서생.
그는 놀랍게도 음마존의 목을 벤 사내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음마존과 군림맹, 청협문이 맞붙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셈.
그 서생이 이서휘를 찾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