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괴패마존>
이서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때문에 장시우를 대신해 질풍검대를 꼼꼼하게 챙겼다. 다수의 적과 겨루느라 대다수 검대원들이 부상을 입거나 심신이 피곤한 상황이었다. 이서휘는 마침 강기찬이 바닥에 주저앉아 혼자서 붕대로 팔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막내라 눈이 자주 가는 강기찬이다. 또 다른 막내인 설주연은 애초에 검대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면서 의료인들과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강기찬이 들고 있던 붕대를 받아서, 강기찬의 왼팔에 감아주며 말했다.
“기찬아 어제 용감하던데?”
“하하.”
강기찬이 웃었다. 하지만 매번 티 없이 맑게 웃던 강기찬의 얼굴이 하루 만에 어른이 된 것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이서휘가 붕대를 감아주자, 강기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웠습니다.”
“무섭지. 당연한 일이다.”
“어제 세 명을 베었습니다.”
“베었다? 죽였다는 말이냐?”
“네.”
“그럼 죽였다고 하거라. 벤 자는 더 많겠지?”
“그렇습니다.”
“후후, 잘했다. 네가 죽이지 못했다면 다른 대원들이 더 위험해졌을 것이다.”
“그렇죠? 한데 밤새 잠을 못 잤어요. 제가 찔러 넣은 검을 맨 손으로 붙잡고 노려보던 눈빛이 생각나서요.”
이서휘가 붕대의 매듭을 지어주면서 생각했다. 사실은 강기찬이 넋을 놓고 있던 것을 이서휘가 우연히 발견하고 뒤에서 구해줬었다. 강기찬은 이서휘가 도와줬단 사실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서휘가 말했다.
“내가 낭인 출신인 건 알고 있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일까? 강기찬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네.”
“내가 어렸을 때 검을 가르쳐주시던 분이 있었다. 나이가 무척 많으셨지. 우린 줄곧 장 노야 혹은 어르신이라 불렀다.”
“고수였나요?”
“아니, 지극히 평범한 분이셨지. 장 노야께선 젊었을 때부터 제법 공부를 잘하셨던 모양이야. 고향을 떠나 홀로 지방 관리에 부임하셨는데 어느 날 고향이 마도 세력에게 짓밟혀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까지 몰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지. 평생 칼 한 번 쥔 적이 없으셨던 장 노야는 벼슬을 버리고 몇 명의 사람들과 칼을 쥐고 뒤늦게 고향으로 달려가셨다고 하더라고.”
이서휘가 평소 전혀 하지 않던 이야기를 시작하자 연무장에 앉아 있던 대원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그럴 만하셨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아니 출세하시겠다고 타향살이를 하셨던 거니까. 고향은 이미 잿더미가 되어 있었고 장 노야는 평생을 공부에 바친 것을 무척 후회하셨다고 하시더라고. 나중에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에게도 공부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더군. 벼슬은 이미 버렸고, 고향은 불에 타 없어졌고 꽤 오랜 세월 동안 장 노야는 낭인(浪人) 생활을 하셨다고 말씀하시더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그게 낭인인 게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이서휘가 강기찬의 검을 끌어당겨 뽑은 후 검신의 상태 등을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도인을 벨 때는 그런 부담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백도의 무인들이다. 힘이 있다고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진 않아. 우리가 베는 놈들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고 여인들을 강간하고, 피에 굶주려 아이들까지 서슴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러지 않은 자들도 있지 않겠느냐고? 아니다. 최소한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 놈들인지 빤히 알면서도 함께 하는 놈들은 죽어 마땅하다. 어제 셋을 죽였다고?”
“네.”
이서휘가 검집에 검을 넣어 강기찬에게 건네며 말했다.
“다음엔 더 많이 죽여다오.”
강기찬이 검을 받아 들더니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 부대주님은 몇 명 베셨습니까?”
“난들 알겠느냐? 하지만 어제 베었던 자들보다 앞으로 벨 자들이 더 많을 거다……. 장 노야의 고향을 불태운 자들과 저들이 뭐가 다르겠느냐? 기찬아, 넌 홍택 출신이지?”
“네, 그렇습니다.”
“군림맹이 무너지고 마도천하가 오면 홍택이 멀쩡하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제 죽인 놈의 눈빛 따위는 어서 잊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에 강기찬이 자신의 장검을 바라보다, 이서휘를 향해 대꾸했다.
“부대주님, 이미 잊은 것 같습니다. 한데, 그 장 노야라는 분이…….”
강기찬이 사정을 알겠다는 듯이 묻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장 대주님의 조부(祖父)시다. 형님과 내게 칼 잡는 법부터 가르쳐 주신 분이기도 하고.”
이서휘가 일어나 질풍검대를 훑어봤다. 조용히 듣고 있던 자들이 어쩐지 이서휘의 눈을 피하며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서휘는 강기찬과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 단우혁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둑 형제들을 데리고 마중이나 좀 나갈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단우혁 뿐만이 아니라, 단우혁을 훗날 사패로 만들어낸 청협문의 단의황이 있었으니까. 단우혁은 항상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강한 분인지 이서휘에게 종종 자랑을 늘어놓았었다.
이서휘가 외쳤다.
“건영아!”
“네, 부대주님.”
이건영이 달려오자 이서휘가 말했다.
“대주님 오시면 나는 검우 형과 청협문이 오는 길로 마중 좀 다녀오겠다고 말해다오. 검대는 네가 맡아서 신경 써주고. 대주님은 회의가 길어지시는 거 같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녀오마. 검우 형, 가시죠.”
근처에서 자신의 장검을 닦고 있던 검우 정천이 일어나며 말했다.
“청협문이 언제 온다고 하던가?”
“글쎄요. 명확한 시기는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마중을 나가보지요.”
그 말에 검우 정천도 이서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혹시 도중에 습격을 받은 게 아닐까? 아는 자가 있나?”
“네, 소문주와 전에 안면을 익혀놨습니다. 쉽게 당할 사람들은 아닙니다. 검우 형, 검풍객잔의 형제들도 데리고 가봅시다.”
“그러는 게 좋겠군. 한데, 자네 낭인 출신이었나?”
쉽게 묻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검우 정천은 편하게 말을 꺼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에 검우 정천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자네나 나나 돌아갈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군.”
“후후후. 왜 없습니까? 군림맹으로 오면 됩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하하.”
이서휘는 검우 정천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정을 먼저 묻지 않았다. 이미 일전에 유백과의 대화에서 정천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홍안정가(紅安鄭家)라는 검가(劍家)가 좋지 않은 일로 궤멸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
이서휘가 검풍객잔에 들어서자 도삼과 도이는 한적한 이 층에서 밥과 술을 먹고 있었다. 도삼이 외쳤다.
“오! 어서 오십시오.”
이서휘가 정천과 함께 계단을 오르자, 정천을 힐끗 쳐다본 도이가 도삼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이제 도사(盜四)가 된 느낌인데?”
“암, 그렇고말고. 절대 도일(盜一)이 될 수 없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막내야 저 사람은. 나이가 무슨 상관?”
이서휘는 귀가 밝아 도둑 형제들의 대화가 다 들렸다. 이서휘는 이 층을 살펴본 다음에 도둑 형제들의 탁자에 합석했다.
이서휘가 말했다.
“잘 있었나?”
“뭐 별 일 있었겠습니까?”
“은야는?”
“제 역량으로는 힘들어서 돈을 좀 주고 맡겼습니다. 조만간 소식이 올 겁니다.”
“후후.”
이서휘가 별말 없이 웃자, 도이가 빈정거렸다.
“여기 밥이나 사쇼. 술도 좀 사고.”
“그래야지.”
이서휘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슬슬 월야대로 두 사람을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객잔에 머물게 하면서 일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서휘가 객잔 안을 꼼꼼하게 살핀 다음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두 사람에게 중대한 얘기를 할 게 있는데 말이지. 월야대라고…….”
도이가 코를 후비적거렸고, 도삼은 눈을 껌뻑이며 말을 기다렸다. 이서휘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특작조 임무를 맡게 됐는데 두 사람에 대한 대우는 내가 섭섭지 않게 할 터이니 이제…….”
도이가 말을 끊었다.
“싫소.”
이서휘가 말했다.
“군림맹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독립 조직이라……. 아, 이거 좋은 건데 내가 왜 이렇게 말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지?”
도삼은 도이보다 반응이 괜찮았다.
“무림맹의 특작조인 광명대(光明隊) 같은 건가요?”
“맞아.”
그때였다. 검풍객잔의 문이 열리면서 희한한 소리가 들렸다.
“호오…….” 혹은 “오오…….”와 같은 감탄사가 연달아 터졌다. 난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도삼이 그 말소리에 일 층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헉!” 소리를 내뱉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무슨 일이냐?”
그 말에 도삼이 히죽 웃으며 아래층의 상황을 설명했다.
“우와, 실로 엄청난 미인이…… 이 도삼이 태어난 후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방금 보았습니다. 역시 인생은 아름다워. 그렇지 않습니까? 공자님, 아래쪽을 보시죠. 어? 아니네. 계단으로 올라오네요. 어? 잠시만요. 이쪽을 쳐다보는데요? 어? 왜, 왜, 왜 여기로?”
검풍객잔의 일 층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죄다 끌어 모은 미인이 계단을 올라와 이서휘가 앉은 탁자로 다가왔다. 이서휘가 여인을 보고 끄응 소리를 냈다.
화지련이었다.
이서휘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자 화지련이 정중한 자세로 이서휘에게 예를 올렸다. 도이, 도삼은 물론이고 정천마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하지만 놀란 것은 이서휘도 마찬가지.
“화 소저, 여긴 무슨 일로?”
그러자 화지련이 대꾸했다.
“대주님을 뵙습니다. 발령 받았습니다.”
도삼과 도이는 헉 소리를 동시에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삼과 도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월야대 이야기를 꺼내는 화지련은 정말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여자였다. 아니면 눈치가 엄청나게 느리거나.
이서휘가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이미 이곳에서 가장 감각이 뛰어난 자신이 이 층을 훑어본 상황이었기에 잔소리를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에 이서휘가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람들이 졸졸 따라왔다.
도삼이 이서휘를 보며 마치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듯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여기 좋군요. 자, 대주님, 하던 말씀 계속 하시죠.”
도이가 맞장구를 쳤다.
“대주, 본론부터 말하시오. 무슨 작전이오? 내 쌍필이 울고 있소.”
그 말에 이서휘가 물을 마시다가 사레에 들려 도이에게 푸악 하고 뱉어냈다. 도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을 닦아냈다.
“허, 참. 이런 식으로 대원에게 물을 하사하시다니, 그냥 내가 마시겠소.”
이서휘가 말했다.
“이 새끼들이 정말…… 아니, 그런데 화 소저는 진짜 발령을 받으셨다고?
“네.”
대답하는 화지련의 얼굴엔 어쩐지 심술이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보고 이서휘가 말했다.
“각주님 얘기로는 다른데 갔다가 보내신다 했는데……. 뭐 이렇게 빨리?”
그 말에 화지련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사정은 이랬다.
유백은 본래 다른 쌍각이나 수호전으로 화지련을 보내 훈련을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제 일 때문에 회의도 많고 처리할 일도 많아 화지련을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앞두고 있어서 화지련을 어디 넣기도 힘든 시기. 괜히 다른 세가의 눈에 띄었다가 신분 취조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화지련이 자꾸 귀찮게 하자,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서휘에게 떠넘긴 상태였다. 생각해보니 이서휘는 화지련에 대해 굳이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라는 말을 했던 터였다.
때문에 화지련의 표정이 굳어 있었던 것. 그 화지련이 도이와 도삼을 보다가 검우 정천을 보며 말을 꺼냈다.
“정천이라는 분이시죠?”
“그렇소.”
정천마저 화지련의 미모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여인을 좋아하는 도삼의 표정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무뚝뚝한 도이마저 화지련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화지련이 말했다.
“저는 유 각주님이 약해서 안 되겠다는 둥 쌍각으로 가라는 둥 변명을 잔뜩 늘어놓으셨는데 말이죠. 갑자기 등장해서 월야대로 들어가셨다는 분이 이 분이란 말이죠? 실례지만 실력이 궁금하군요. 한 수 가르침을 부탁해도 될까요? 이 대주님의 실력은 제가 잘 알고 있어서 월야대로 온 것입니다.”
그 뜬금없는 물음에 정천이 허허허 하고 웃어 버렸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도삼이 월야대라는 이름을 듣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자, 무슨 같은 대원끼리 비무입니까? 인사나 합시다. 화 소저, 안녕하십니까? 저는 월야대의 십삼초승천 초류황이라 합니다.”
그러자 도이가 진중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월야대의 절대쌍필 냉혈공자 냉혼이라 하오. 제가 둘째입니다. 초류황이 셋째지요. 정천이라는 분이 넷째입니다.”
그 말에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이 진짜…… 넣어준다고 할 때는 거절하고.”
“허허, 대주님, 조직을 그렇게 딱딱하게 운영하시면 안 됩니다. 농담 한 번 한 것 가지고. 안 그렇습니까. 도사 정천 나으리?”
그 말에 정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사라니? 검우 정천이오.”
“월야대 아니시오? 여기 공자님의 부하 아니오?”
도삼의 말에 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유 각주님에게 승인을 받았지. 이 대주와 함께 할 것이오.”
“그럼 도사(盜四) 맞소.”
이서휘가 세 사람의 중구난방 개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을 끊었다.
“그만!”
도삼이 대답했다.
“네, 대주님!”
도삼은 보면 볼수록 이서휘가 마냥 멋있었다. 어찌 이런 미인을 부하로 데리고 다니게 됐을까? 생각할수록 신비한 일이었다.
이서휘가 혀를 차며 일어섰다. 부하인 듯 부하 아닌 부하 같은 남녀들을 보며 말했다.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데 함께 마중이나 갑시다.”
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갑시다.”
이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풍객잔을 나섰다.
이서휘와 월야대가 검풍객잔을 나섰다.
월야대는 이로써 이서휘를 대주로 별다른 서열 없이 도이, 도삼, 정천, 화지련이 합류한 상태. 군림맹에서만 이서휘가 조금 위명을 얻었을 뿐, 무림에선 네 사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황. 아니 아마도 아는 자가 극히 드물 것이다.
적포 사내와 번뇌마존이 이서휘를 눈여겨봤으나 각각 이서휘와 남궁익현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이서휘가 이 네 사람을 돌아봤다.
‘도둑 두 명에 호승심 넘치는 남녀.’
도둑들은 재주가 많고 무공도 뛰어난 편이라 쓸 만했고, 정천과 화지련은 앞으로 얼마든지 강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서휘가 바라보자 도삼이 물었다.
“한데 대주님! 앞으로 저희는 어떤 활동을 하면 됩니까?”
도삼의 질문에 이서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들 알까?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일견 실망스러운 대답인데도 도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 옛날 공자(孔子)께서 진정한 앎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라 하셨지요. 과연 우리 대주께선 실로 군자(君子)의 도리(道理)를 아는 분이라 할 수 있소.”
졸지에 군자가 된 이서휘가 도삼에게 말했다.
“청협문이 올 만한 쪽은 어느 길이냐? 네가 전에 다녀왔으니.”
도삼이 대꾸했다.
“청협에서 군림맹까지, 잘 닦인 길은 하나입니다. 객잔 거리 벗어나서 왼쪽 길로 가면 되지요. 응천으로 가는 길로 쭉 나가시면 어디가 됐든 도중에 청협문도와 만나실 겁니다. 그들이 오고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죠.”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 내에 객잔이 나오느냐?”
“나오지요. 반 시진까진 아니고 용아객잔이란 곳이 도중에 있습니다.”
이서휘가 눈을 빛내며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잘 들으시오. 도사니 그런 장난치지 말고 월야대의 서열을 한 번 경공으로 정해보겠소. 내가 봤을 때는 정천 형, 도이, 도삼, 화 소저 순일 것으로 예상하오만 내가 멋대로 정했다고 납득하지 못할 게 뻔하니…… 본래 무공으로 가늠해야 할 터이나, 그것은 차차 논의하기로 하고. 오늘은 경공으로 겨뤄 봅시다. 용아객잔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임시 서열을 부여하리다. 도삼을 따라 가다가 재주껏 앞서 가시오. 나도 곧 따라 가리다. 아, 꼴등을 하는 자는 객잔서 차를 대접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도삼, 도이, 정천, 화지련이 제각각 콧방귀를 끼며 서로를 노려 보면서 몸을 풀었다.
도삼이 두 손을 맞잡고 이서휘에게 말했다.
“대주께서 다음 자리를 제게 주신다니 실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놀고 있네.”
도이가 되도 않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냉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검우 정천이 분위기가 조금 파악이 된 듯 세 사람을 하찮게 본다는 말투로 다독였다.
“거 아우들이 참 자신만만하시군. 나중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도착할 게 눈에 뻔한데 말이야.”
화지련도 기가 찼다. 경공이라면 그녀도 자신이 있었다. 이를 꽉 물었다가 외쳤다.
“누가 이기는지 봅시다.”
말과 함께 화지련은 팔과 각반에 달려 있는 끈을 조이고, 등허리에 달린 끈도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자 화지련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도이가 화지련의 자태에 “호오.” 소리를 내자, 도삼이 화들짝 놀라며 화지련에게 말했다.
“화 소저, 끈을 좀 느슨하게 할 수 없겠소? 그대가 우리 앞에 잠시나마 달리게 된다면 우린 심력이 급격히 소모되거나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는 노릇이오…… 정당하게 겨루는 게 아니외다. 이것은 심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터인데.”
그 말에 화지련이 도삼을 노려보며 말했다.
“입방정 그만 떠시죠?”
도삼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자, 갑시다.”
네 사람이 저마다 우드득 소리를 내면서 발목을 돌리거나 어깨를 풀었다.
이서휘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는 듯이 손가락으로 탁 소리를 튕기며 말했다.
“출발.”
파앗, 타앗, 스스스……, 스윽!
제각기 익힌 경신법이 다르기에 저마다의 특이한 소리를 내며 네 사람이 벼락 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이서휘가 그 모습을 뒷짐을 쥔 자세로 잠시 바라봤다.
‘묘하게 호승심이 넘치는 네 사람이란 말이야. 잘 이용하면 써먹을 곳이 많겠어.’
이서휘가 그리 생각하는데 앞서 나가고 있는 도이가 외쳤다.
“늦으면 막내 군자될 줄 아쇼!”
“흥, 놀고 있네. 막내 같은 소리 한다. 흐음……?”
네 사람의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도이와 도삼은 본래 경공이 특출날 정도로 빨랐고, 정천은 내공이 깊었다. 한데 북화 화지련도 만만치 않았다. 전생에 화지련의 도만화주법(蹈萬花走法)이 천하의 일절이라 불릴 정도로 특별한 점이 많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서휘가 점점 멀어지는 네 사람을 바라보다 숨을 들이마신 후 질풍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이서휘의 발끝이 돌을 튀기면서 타다다닥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암행표(暗行飇)를 시전하자마자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면서 불가사의하게 이서휘의 신형이 빨라졌다. 꽤 오랜 시간을 암행표로 내달렸던 이서휘는 속도가 붙자 암행표를 거두고 상체의 힘을 빼고, 단전 위쪽에만 미약한 힘을 실었다. 이내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두 발과 두 팔에 실은 다음에 발을 굴렀다. 타앙! 소리와 함게 이서휘의 신형이 두 줄기 먼지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 네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서휘는 그 뒤를 바짝 쫓으면서 속도를 약간 줄였다. 네 사람 모두 보기 드문 경공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제법이네, 다들.’
정천은 지친 기색이 없었고 화지련은 그야말로 야생의 육식 동물이 내달리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도삼과 도이는 보폭을 좁게 하는 특이한 발걸음이었는데 속도는 두 사람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이서휘는 그 순간에도 네 사람의 무공 수준과 내공의 깊이 등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먼저 도착하게 될지도 가늠한 상태.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서휘가 달리는 와중에 말을 내뱉었다.
“먼저 가 있겠소. 조심히들 오시오.”
“……!”
네 사람은 호흡을 내뱉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서휘가 달리는 와중에 네 사람을 바라보면서 실로 열이 받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재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애쓴다, 애써…….’
뭐 이런 표정이랄까. 이서휘는 네 사람을 한껏 약 오르게 도발한 다음에 질풍처럼 달려 나가며 네 사람을 제쳤다. 승부욕이 강한 자들일수록 자극하는 게 좋았다. 이서휘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 받으면 강해지던가.’
한편, 네 사람은 이서휘의 재수 없는 표정을 보고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재수 없어. 아, 재수 없어! 아! 열 받아! 아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는 속도를 유지해 달리다가 반 시진도 되기 전에 용아객잔 앞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나머지 네 사람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 ☆ ☆
“음?”
용아객잔 안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서둘러 밖을 나온 이서휘가 주변을 살펴봐도 인기척이 없었다. 용아객잔뿐이 아니라 듬성듬성 자리를 잡아 표국이나 여행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아 걸었거나, 텅 빈 상태였다.
이서휘가 불쑥 시선을 내려 바닥을 살펴봤다. 말발굽이 잔뜩 찍혀 있었다. 이서휘는 그것을 보자마자 자강검을 뽑아 객잔 기둥을 순식간에 그어 화살표를 새기고, 급하게 경공을 시전해 용아객잔을 지나쳐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
달리는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단문주와 단우혁이 있어서 쉽게 당하진 않을 터인데 적의 수가 문제로구나.’
직선 길을 무작정 달리던 이서휘는 드넓은 공터 쪽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리자 우측으로 꺾어서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우뚝 멈췄다. 언덕에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청협문도가 아니었다.
이서휘가 시선을 들어보니 주변보다 움푹 파인 분지(盆地)가 드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청협문은 분지 안에 완벽하게 포위된 채로 분전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섣불리 내려가지 않고 전체적인 윤곽을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마라월혼지망(魔羅月魂蜘網)…….”
마가에서 종종 사용하는 진법의 한 종류였다. 동서남북 방위를 사술(邪術)로 일으킨 마기로 포위해 희뿌연 달무리를 만들어내어 혼란을 주는 진법이다. 아예 분지에서 진법을 준비해 놓고 유인한 형국이었다.
이서휘도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으나, 직접 깨뜨린 적이 많았기에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생에서 두 눈이 멀었던 이서휘에겐 대다수의 착시 진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동료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었던 진법이다.
이서휘가 월야대원들이 오고 있을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깨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본진에서 기수를 다시 내보내거나 다른 진법을 준비할 수도 있었기 때문.
‘빨리 와라. 빨리!’
이서휘의 시선이 분지와 대로변을 바쁘게 교차했다.
‘혼자 갈까?’
청협문을 포위한 동서남북에 해골이 주렁주렁 달린 깃대가 바쁘게 움직이자 기다란 검은 천이 원을 그리면서 청협문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그 바깥에서는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된 거대한 천막이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이서휘에겐 조잡해 보였지만 저 안에 갇힌 자들은 진법에 갇혀 시야가 차단되고 적군이 불쑥 튀어나오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터.
이서휘의 눈에도 잔뜩 움츠러든 청협문이 자꾸만 뒷걸음을 치면서 한데 모이고 있었다.
‘저 중앙에 벽력탄(霹靂彈)이라도 터진다면…….’
마도의 수법을 잘 알고 있는 이서휘다.
‘제기랄!’
이서휘가 저 혼자 뛰어들 생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먼지가 피어오르면서 검우 정천이 먼저 도착했다. 이서휘가 외쳤다.
“검우 형!”
“이 대주! 뭔가? 싸움이 난 흔적이 있던데.”
“청협문이 포위당했소.”
“빨리 가서 구해야지 그럼!”
“검우 형, 저기 북서쪽에 기수 보이시오? 해골 매단 놈?”
“보이네.”
“저 새끼만 죽인 후에 다른 기수가 합류하지 않는지 살펴주시고. 빠져 나오는 청협문을 인도해서 저 사각 방위에서 벗어나 주시오. 그런 후에 검우 형, 북쪽으로 오시오. 날 도와줘야 할 것 같소.”
“알겠네.”
검우 정천이 그 말과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분지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도이와 도삼이 동시에 도착하고 이어서 숨을 헐떡이는 화지련이 꼴등으로 도착했다. 세 사람은 정천에 비해 지친 기색이 완연했으나 이서휘는 쉴 시간을 줄 수가 없었다.
“도이, 도삼. 지쳤느냐?”
“그럴 리가요? 허억! 허어업! 호흡을 고를 뿐이오.”
도이와 도삼이 호흡을 헉헉대며 고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검우 형이 북서쪽으로 갔다. 보이지? 너희 둘은 남서쪽의 기수를 죽이고 청협문을 빼내라. 다른 자 죽이느라 힘 빼지 말고 기수만 죽이면 된다. 가라.”
두 사람이 대꾸도 없이 쌍필과 철선을 뽑아 들고 내려갔다. 이서휘가 엄청나게 힘들어 하는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화 소저, 지켜보고 있다가 위험한 곳이 보이면 적당히 도와주시오. 위험하니 이곳에 있어도 무방하오.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대주님!”
이서휘는 어느새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서휘가 아예 훌쩍 공중을 솟구쳐서 언덕을 내려갔다. 바닥에 이르러 두 발에 내공을 주입한 이서휘가 다시 몇 번을 튀어 솟아오르다가 전방으로 질주했다.
……챙 ……챙 ……챙챙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직도 이서휘의 눈에는 넓은 평지에서 청협문도들이 두 배쯤 되는 흑의인들과 격렬하게 겨루고 있었다.
이서휘는 자강검을 우하단으로 늘어뜨리고 돌진했다. 그때 이서휘를 향해 암기가 쏟아졌다.
파바바바박! 소리와 함께 암기가 땅에 꽂히고, 이서휘는 이미 공중에 솟구친 상태였다.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이서휘는 괴한들의 등을 노리고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쫘아아악!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팔과 몸통이 공중으로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 이서휘는 포위당한 청협문을 무시하고 북쪽으로 질풍같이 뻗어 나갔다.
적의 본진도 문제였다.
아무래도 마가의 장로쯤 되는 우두머리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청협문의 피해가 막심할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서휘가 질풍처럼 내달리고 있는 곳에는 마교십존의 일원인 괴패마존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뭐냐? 저 녀석은……? 가 장로.”
“방금 내려가셨습니다.”
말과 함께 괴패마존은 옆을 돌아보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가 장로는 청협문주가 수하들을 엄청나게 베고 있자, 참지 못하고 내려간 터였다. 본래는 청협문도들을 다 죽인 후에 괴패마존이 직접 청협문주의 목을 베러 내려갈 심산이었다.
그 괴패마존은 서른쯤 되는 거한이었는데 특이하게 얼굴의 반이 자문(刺文, 문신)으로 가득했다. 괴패마존이 데리고 온 장로들은 전부 분지에서 청협문주와 겨루고 있을 터였다.
괴패마존이 땅에 꽂아둔 낭아봉(狼牙棒)을 쥐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으며 명령했다.
“저 미친놈은 그냥 오게 두어라.”
이서휘에게 시선을 뗀 괴패마존이 전황을 살펴보며 말했다.
“기수가 공격당한다. 교체해라.”
하지만 그 말을 내뱉자마자 옆에서 푸악 소리가 들리더니 괴패마존과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수하들이 뒤로 나뒹굴었다. 달려오던 이서휘가 암연심검의 파를 내지른 것. 괴패마존이 비명을 지르는 수하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이서휘에게 옮기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서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낭아봉을 쥔 자와 수하들을 흘낏 보면서 달려 나갔다. 미친 사람처럼 그대로 괴패마존에게 돌진할 것 같던 이서휘는 달려나가던 힘을 실어 중간에 불쑥 솟아오른 흙더미를 찍어 찼다.
팍, 휘이이익!
발차기에 실린 내공이 더해진 흙더미가 무시 못 할 기세로 회전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기엔 강도가 부족한 흙더미다. 그때, 흙더미가 적의 본진에 떨어질 때쯤 이서휘가 내보낸 암연심검의 파가 날아와 흙더미를 기세 좋게 터트리면서 공중에 먼지가 잔뜩 퍼지고, 검기는 그대로 날아가 괴패마존의 우측 끝에 서 있던 적들을 갈랐다.
파악, 쏴아아아――!
쐐애애앵!
모래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와중에 검기가 적들에게 밀려들어갔다.
“크악!”
쏟아지는 검기에 흑의인 대여섯이 피를 내뿜고, 가만히 기다리려던 괴패마존이 소리도 없이 솟구쳤다.
이서휘가 달려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솟구친 괴패마존을 향해 흑비도를 세 자루 뿌렸다.
타다당!
괴패마존이 공중에서 어렵지 않게 흑비도를 튕겨내고 내려서며 낭아봉을 휘둘렀다.
이서휘의 머리통을 부수려는 낭아봉이 강맹한 기운을 실고 날아왔다. 이서휘는 섣불리 자강검을 내밀지 못하고 가볍게 몸을 뒤로 날렸다.
그와 동시에 타앙! 소리와 함께 괴패마존의 신형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이서휘는 이번에도 정파 무림인들이라면 혀를 찼을 수법으로 일관했다. 이서휘는 마도인을 상대로 금기(禁忌)로 여겨지는 수법들을 개의치 않고 사용할 생각이었다. 무표정한 이서휘가 불쑥 발끝으로 흙을 올려 차고 동시에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강맹한 기세로 날아오던 괴패마존이 좌장으로 날아오는 흙을 튕겨내고, 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낭아봉을 휘둘러 검기를 흩어버렸다.
그 사이에 선수를 잡은 이서휘는 공격을 펼치지 않고 암행표를 사용해 느닷없이 적진으로 튀어갔다.
‘따라와라.’
심리전이 통하지 않으면 낭패였다.
이서휘를 잡아 죽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괴패마존이 미간을 좁히면서 즉각 경공을 펼쳐 이서휘를 쫓았다. 두 줄기의 신형이 기이하게 다시 마가의 본진으로 돌진했다.
이서휘가 훌쩍 솟구쳐서 서른 명의 흑의인들에게 뛰어들면서 검기를 내질렀다. 쫘아아악! 소리와 함께 서너 명이 튕겨나가고, 평소 쉽게 볼 수 없는 각종 기이한 병장기들이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챙챙챙챙챙, 푸욱!
이서휘는 병장기를 튕겨내면서 흑의인들의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한의 덩치가 크고 낭아봉의 궤적 역시 큰 편이었기에 일부러 흑의인들에게 포위되는 판단을 했던 것.
이서휘가 마치 제 집에 들어간 것처럼 자강검을 극히 짧게 내지르면서 미꾸라지가 빠져 나가듯이 적진을 유린했다.
푹푹푹!
어느새 쫓아온 괴패마존이 짜증난다는 듯이 외쳤다.
“비켜라.”
그 말 한마디에 괴패마존의 성격을 알고 있는 수하들이 이서휘가 뛰어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면서 좌우로 갈라졌다. 하지만 이서휘는 흑의인의 등에 자강검을 꽂자마자 흑의인을 방패삼아 옆으로 훌쩍 뛰었다.
쐐애애애앵!
흑빛 기탄이 쏟아지더니 미처 피하지 못한 흑의인들을 날려 버렸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사이에 이서휘는 몸을 숨긴 상태. 이서휘는 암행술을 사용해 괴패마존과 순식간에 멀어지면서 분지의 상황을 잠시 살폈다.
이서휘가 괴패마존의 수하들을 죽이고 있을 때……
예상 외로 도둑 형제들이 암살에 특화된 무공 덕분에 기수와 주변 보표들을 다 죽이고 청협문을 빼내고 있었다. 청협문 위에 자리를 잡은 희뿌연 연기도 함께 남서쪽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다음은 북서쪽이었다. 한 떼의 흑의인들과 겨루고 있던 정천은 느닷없이 적룡출두(赤龍出頭)를 날려 막아서는 자들과 기수를 함께 뚫어버렸다. 막아선 서너 명의 몸통과 팔에 사람의 머리통만 한 구멍이 뚫려 쓰러지고, 기수 역시 들고 있던 깃대와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정천이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베며 청협문도들을 향해 외쳤다.
“나오시오! 어서!”
정천의 외침에 희뿌연 안개 속에서 청협문 소문주 단우혁이 청룡도로 전신을 보호하듯이 휘두르면서 튀어나와 외쳤다.
“나와라!”
이를 악문 단우혁과 검우 정천이 몰려드는 흑의인들을 빠르게 베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단우혁이 빠져나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암행술을 풀고 분지 쪽으로 내려갔다. 수가 부족하더라도 청협문도가 모두 빠져 나오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괴패마존이 이서휘를 놓칠 리 없었다. 이서휘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괴패마존은 허리춤에서 혈고륜(血刳輪)이라는 무기를 뽑아서 이서휘에게 날렸다. 손잡이 외에는 둥그런 원형 검날로 된 무기였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병장기가 날아오자, 달리고 있던 이서휘가 급히 암행표를 시전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난생 처음 보는 병장기가 지나갔다.
괴패마존은 하도 이서휘가 설치는 터라, 이 순간만큼은 청협문을 까맣게 잊고 이서휘를 잡아 죽이기 위해 내달렸다. 그 뒤를 괴패마존의 수하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날아갔던 혈고륜은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괴패마존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마치 분지에서 벌어지는 싸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묘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이서휘가 도망치고 괴패마존과 그의 수하들이 쫓는 형국이었다. 경공이 이서휘에 못지않은 괴패마존이 어느새 이서휘를 따라 잡아 훌쩍 솟구쳤다. 이서휘는 등 뒤에서 괴패마존이 솟구치자마자 자강검을 좌에서 우로 크게 그으면서 자세를 돌렸다.
쐐애애앵! 하는 암연심검의 파가 쏟아져 괴패마존을 뒤따르던 흑의인들의 몸을 가르면서 지나가고, 공중에 솟구쳤던 괴패마존의 낭아봉이 이서휘의 머리통을 부수려는 듯이 떨어졌다.
순간, 이서휘가 기이한 속도로 검막을 펼침과 동시에 낭아봉을 향해 자색 빛이 진하게 차오른 자강검을 들어 막았다.
꽈앙……!
괴패마존의 낭아봉이 검막을 부숨과 동시에 자강검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이서휘를 수평으로 날려버렸다. 이서휘의 몸이 회귀 후 처음으로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날아가 땅바닥을 여러차례 굴렀다.
괴패마존이 “흥, 머리통을 으깨주마…….”라고 내뱉는 순간에 이서휘가 가볍게 일어섰다. 그 황당한 광경을 목격한 괴패마존이 그제야 이서휘의 정체를 물었다.
“너…… 누구냐?”
이서휘는 가슴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호흡을 내뱉어 겨우 억눌렀다. 검막으로 힘을 상쇄시키고, 정확하게 자강검을 내질러 막았는데도 밀려드는 괴패마존의 엄청난 힘에 날아갔던 이서휘다.
자강검의 강도가 약했다면 실로 위험한 순간을 맞이했으리라. 만약, 천양뇌단(天壤雷丹)으로 증가한 내공이 없었더라면 막는 순간에 내상을 입고 피를 토했으리라.
이서휘는 괴패마존을 옆에 두고 비스듬히 서서 전황을 바라볼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여전히 이서휘가 홀로 괴패마존의 합류를 막아서고 있는 꼴이었다.
어느새 몰려 나온 청협문이 흑의인들과 이제야 대등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단우혁이 도를 크게 휘두르면서 점점 흑의인들의 수를 줄여나가는 형국. 도이와 도삼도 날렵한 동작으로 흑의인들을 베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대꾸를 하는 대신에 전황을 잠시 살피던 이서휘가 비스듬히 선 자세에서 별다른 동작 없이 자강검을 가슴께로 들어 암연심검의 환을 토해냈다.
쐐앵!
파앙! 까앙! 까앙!
낭아봉이 검기를 튕겨내자마자 이서휘를 향해 밀려 들었다. 이서휘가 내공을 잔뜩 주입해 막아냈다. 자강검과 낭아봉이 불꽃을 튀겼다. 이서휘가 잇따라 삼검을 내지르다가, 불쑥 암연심검의 환을 내지르고 일검을 더 내질렀다. 그러자 괴패마존은 마기에 휩싸인 낭아봉으로 단 일격에 검기와 자강검을 후려쳤다.
콰앙!
이서휘의 몸이 또 다시 밀려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서휘가 공중에서 자세를 잡고 내려섰다. 괴패마존의 수하들은 이서휘가 아니라 괴패마존에게 죽을까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하고, 밀리고 있는 분지 쪽으로 합류했다.
이서휘는 괴패마존만 막아설 생각으로 좌우로 나뉘어 가는 자들을 그대로 뒀다. 생각보다 수가 많아 정천이 쉽게 지원을 오지 못하는 형국. 대신에 어느새 합류한 화지련이 청협문과 섞여 흑의인들을 베고 있었다.
문제는 두 명의 장로와 겨루는 청협문주 단의황과 괴패마존을 막아선 이서휘였다.
괴패마존과 이서휘가 또 다시 맞붙었다.
챙챙챙챙! 까앙!
두 사람이 불꽃을 튀기면서 맞붙다가 괴패마존의 힘에 이서휘가 튕겨 나가자 근접한 거리에서 괴패마존이 엄청난 속도로 혈고륜을 날렸다. 쐐앵! 하며 날아간 혈고륜이 이서휘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갔다.
감히 대응을 하지 못한 이서휘가 뒤로 공중제비를 돌면서 솟구쳤다.
방금 이서휘의 대응은 그야말로 악수(惡手)였다.
괴패마존에게 다른 암기가 있거나, 내력을 실은 낭아봉을 던지면 선수를 계속 빼앗기거나 최악에는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대처였다.
하지만 공중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 와중에 이서휘의 몸에 있던 흑비도가 모조리 괴패마존에게 쏟아졌다.
휙휙휙휙!
괴패마존의 머리, 배, 팔목, 허벅지를 향해 쏟아지는 흑비도.
일부러 타점을 나뉘어 던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 챈 괴패마존이 낭아봉을 빠르게 휘둘러 튕겨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땅바닥에 착지한 이서휘가 오히려 과감하게 괴패마존 쪽으로 달려 들면서 자강검을 쓰윽 내밀었다.
그 모습에 괴패마존도 낭아봉을 그대로 내밀었다.
까앙!
이서휘가 검을 내민 그 자세 그대로 밀려나갔다. 그때 검우 정천이 적룡검으로 내뿜은 검기가 괴패마존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콰앙!
괴패마존이 불쑥 쏟아지는 검기를 후려치자, 그와 동시에 이서휘와 정천이 두 자루의 장검을 휘두르면서 괴패마존에게 달려 들었다.
챙챙, 챙챙챙! 까앙!
괴패마존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검을 튕겨내다가 낭아봉으로 적룡검을 튕겨내고, 좌장으로 흑빛 기탄을 내뿜어 이서휘의 몸에 쏟아냈다. 정천이 이서휘가 날아갈 때처럼 바닥을 나뒹굴고, 흑빛 기탄을 튕겨낸 이서휘는 또 다시 불쑥 검을 들어 괴패마존의 배를 찔렀다.
그제야 괴패마존은 이서휘가 실로 이상한 강적임을 깨닫고, 침을 삼키면서 이서휘의 검을 튕겨냈다. 분명 자신보다 힘이 부족한 상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귀신에 홀린 듯이 괴패마존이 뒤로 물러났다.
‘이상하게 강하다. 조심해야 한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서휘 역시 알고 있었다. 현재 자신이 가진 힘으로 괴패마존을 죽이긴 어렵다는 것을. 칠흑검제 시절에 지닌 경험과 무위, 이서휘의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기이한 분위기가 괴패마존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방심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맞붙고 있을 때 사단은 오히려 청협문주 쪽에서 벌어졌다.
☆ ☆ ☆
청협문주 단의황은 분지에서의 싸움이 시작됐을 때부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노인 두 명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으며 달려 들었다. 평생에 걸쳐 이렇게 힘든 싸움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아들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평생의 절기를 모조리 쏟아내고 있는 단의황이었다.
물론 괴패마존의 후원인인 마가의 두 장로도 마찬가지.
균형이 깨진 것은 단우혁이 아버지를 돕겠다고 합류했을 때부터였다. 수는 맞았으나, 단우혁은 세 사람에 비해 무위가 부족했다. 삼십여 초를 겨뤘을 때 괴패마가의 가 장로가 장력을 쏟아내 단우혁의 어깨를 적중시켜 날려 버렸고, 동시에 찰나의 틈을 얻은 단의황이 금빛 도를 휘둘러 가 장로가 내뻗은 팔을 그대로 잘라내고 동시에 좌장을 내뻗어 고 장로라는 자까지 퍽 소리가 나도록 적중시켰다.
“크악!”
그때 청협문도들이 쓰러진 소문주를 발견하고 죄다 악을 쓰며 몰려들자 부상을 입은 고 장로가 인상을 찡그리며 가 장로의 뒷덜미를 붙잡고 훌쩍 솟구쳐서 몸을 빼냈다. 단의황은 급히 단우혁의 상태를 살피느라 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괴패마존은 두 명의 장로가 전선에서 물러나자 이서휘를 낭아봉으로 강하게 후려치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번뇌마존과는 달리 장로들에 대한 생각과 긴밀함이 남다른 괴패마존이다. 괴패마존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가 장로에게 말했다.
“가 장로, 괜찮으시오?”
팔이 잘렸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 장로는 잔뜩 미안한 기색으로 괴패마존에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방심했네.”
이어서 괴패마존은 아예 입도 열지 못하는 고 장로를 바라봤다. 장력에 당했는지 얼굴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괴패마존이 고개만 돌려 이서휘와 청협문 일행을 노려봤다.
전투는 잠시 멈췄건만 숨 막히는 긴장감이 분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괴패마존을 더 쫓으려던 이서휘가 냉정하게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주시했다. 단우혁은 부상, 단의황은 아들을 살피고 있고 청협문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자신이 홀로 괴패마존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천이나 도둑 형제들이 함께 덤빈다 하더라도 단우혁 꼴이 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단의황이 일어나는 게 가장 좋은 수였다. 하지만 이서휘가 잠시 살펴도 단의황은 단우혁에게 내공이라도 불어 넣고 있는지 청협문에 둘러싸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이서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괴패마존과 시선이 얽혔다.
두 사람이 복잡한 생각을 가득 안고 서로를 노려봤다.
괴패마존이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자, 점점 두 세력이 휴전을 한 것처럼 점점 거리를 벌렸다.
청협문은 단우혁과 단의황을 둘러싸고 있고, 그 청협문 앞에 이서휘가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다.
이서휘는 괴패마존에게 자신을 노출했다. 비록 말 한 마디도 섞지 않았으나 앞으로 괴패마존은 자신을 노릴 게 분명했다.
이서휘가 괴패마존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몰랐던 강자가 실로 많았구나……. 어려운 일이야.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이서휘는 거한을 마교십존의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군림맹으로 왔던 놈처럼 두 명의 장로를 거느린 우두머리였기에 분위기가 흡사했다.
괴패마존이라고 다를까?
젊은 이서휘를 보며 그 역시도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 괴패마존의 시선은 청협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서휘에게 더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등장하자마자 마라월혼지망(魔羅月魂蜘網)을 깨는 놈이 백도에 있었다니, 설마 군림맹의 허접한 놈들은 아닐 터……. 복장을 보아 하니 백검문(白劍門)은 아니고 설마 온마존(蘊魔尊)이 말한 검선(劍仙) 일행인가.’
온마존은 지난날 번뇌마존의 행각을 살피면서 중원전도에 인형 말을 두고 있던 마교십존의 일원이다. 괴패마존은 온마존의 말을 떠올리며 이서휘의 배경을 이리저리 추측하고 있었다.
때문에 괴패마존이 퇴각을 선택한 것은 장로의 부상도 있었으나,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서휘의 배후에 누군가 더 있을 거라는 지레짐작도 한 몫을 했다.
또한 이곳은 군림맹이 멀지 않은 곳이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번뇌마존으로부터는 별다른 연락이 오고 있지 않는 상황…….
수하들을 일사불란하게 뒤로 물리면서 종종 이서휘를 노려보고 있던 괴패마존은…… 눈 깜박할 사이에 이서휘가 모습을 감추자 코웃음을 내뱉으며 그제야 자세를 홱 돌리고 물러났다.
한편, 이서휘는 청협문 무인들 사이에 숨어 단우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력에 의한 내상을 입었기에 단의황이 직접 단우혁의 운기조식을 돕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말을 걸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서휘는 고개를 돌려 마도의 세력이 물러나고 있는 방향만 잠깐 확인했다.
그 사이에 청협문은 겹겹이 포위망을 구축해 단의황이 단우혁에게 내력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을 가렸다. 그러면서 어서 단우혁이 일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 사람들 틈으로 도둑 형제들이 이서휘에게 다가와 말했다.
“대주, 저희가 쫓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이서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희 둘이 가기엔 너무 위험하다. 다음에 저 낭아봉을 든 자를 만나면 둘은 일초반식도 섞지 말고 물러나라.”
여지껏 이서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도둑 형제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검우 정천과 화지련도 어느새 이서휘에게 다가와 말을 듣고 있었다.
이서휘가 무슨 생각에선지 어두워지는 하늘을 힐끗 보다가 말을 이었다.
“도삼아, 가서 흑의를 두 벌 정도 벗겨 와라. 비교적 멀쩡한 것으로. 밤공기나 좀 마시고 와야겠다.”
“알겠습니다.”
도삼이 다람쥐처럼 빠르게 물러나자 이서휘가 이번엔 도이를 보며 말했다.
“정교하지 않아도 된다. 내 얼굴 모습 좀 바꿔줄 수 있겠느냐?”
“뭐 어렵진 않으나……. 흠, 해보겠소.”
이서휘의 말에 도이가 곱추로 보일만큼 늘상 등에 매달고 다니던 봇짐에서 각종 인피면구 제작 장비를 꺼내 이서휘의 목 주변의 색깔부터 진하게 바꿨다. 그 다음에는 가죽 마개로 덮인 날카로운 손칼을 꺼내며 말했다.
“대주, 아예 눈썹과 머리도 좀 정리하시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마음대로 하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이가 중얼거리면서 이서휘의 얼굴을 묘하게 바꿨다. 눈썹을 날카롭게 정리하고 머리를 다듬었다. 그 사이에 손가락 사이에서 손칼과 붓의 위치가 바뀌더니 또 다시 이서휘의 얼굴과 목의 색이 다시 변했다.
정천이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대주, 추적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이렇게 늦장을 부리시는가?”
도이도 정천의 말에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며 말했다.
“맞소. 대주, 이렇게 해서 추적이나 할 수 있겠소? 벌써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소.”
“걱정마라.”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정천은 아직 이서휘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명확하게 모르는 상태였으나 도이는 이서휘가 기묘한 능력을 가진 자라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서휘의 말 한마디에 도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봇짐에서 붓통 같은 것을 꺼내 그 안에서 약품 처리된 동물 가죽을 한 장 꺼냈다.
시큼한 냄새가 퍼지자 이서휘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도이가 가죽을 이서휘의 얼굴에 붙이고 손칼로 대담하게 눈 코 입의 구멍을 뚫고 다듬었다. 가히 신기라 부를만한 재주가 펼쳐지자 청협문도들이 신기한 구경을 하듯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있었다.
도이의 붓이 그 후로도 한참을 춤을 추듯 움직였다.
이윽고 도이가 손가락으로 이서휘의 얼굴 곳곳을 누르고 이서휘의 머리 모양을 바꿔 윗머리를 얼굴 한 쪽으로 내리자 어느새 이서휘의 본래 얼굴과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도이가 말했다.
“잔뜩 찡그려 보시오.”
도이의 말에 이서휘가 얼굴을 찡그리자, 주름살이 박힌 곳으로 도이의 손가락과 붓놀림이 이어졌다. 그러자 어느새 이서휘의 얼굴은 삼십대 중년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도삼이 괴패마존의 수하가 입고 있던 것 중에서 비교적 깨끗한 흑의를 두 벌 구해오자 이서휘가 자강검을 내밀며 말했다.
“하나는 찢어서 내 검을 감싸라. 남는 천으로는 등에 묶을 것이다.”
“네.”
도삼이 흑의를 찢어내어 자강검을 휘감자, 이서휘가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잠시 고개 좀 돌려주시오.”
“왜요?”
화지련이 되묻자 이서휘는 길게 말하기 번거로워 그 자리에서 윗옷을 훌러덩 벗어 버렸다.
그러자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익은 화지련이 고개를 홱 돌렸다. 도둑 형제들이 재미있다고 낄낄 웃고 있었다. 이서휘는 하의까지 벗은 다음에 흑의로 갈아입고 등을 내보이며 도삼에게 말했다.
“내 검을 등에 묶어 다오.”
그 말에 도삼이 찢어진 흑의를 이용해 이서휘의 등 뒤에 자강검을 묶었다. 그러자 이서휘의 분위기는 어느새 중년미가 엿보이는 사파의 무인으로 탈바꿈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도삼이 박수를 두어 번 치면서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한데 저희 형제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길게 쫓을 생각도 없다. 하룻밤만 산책 다녀오듯이 갔다가 복귀하마. 검우 형, 청협문 여러분들과 함께 군림맹으로 복귀해주시오.”
“알겠네.”
“도이와 도삼도 데려가서, 장 대주님에게 제가 쓸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알아서 절차를 진행해 주실 겁니다. 저는 길게 쫓지 않을 겁니다. 적의 꼬리라도 살펴본 이후에 안전하게 맹으로 복귀할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아, 정말 표정들이 왜들 그러시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 걱정들 마시오.”
이서휘가 아직도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화지련을 보며 말했다.
“화 소저, 나 옷 입었소.”
그러자 화지련이 고개를 천천히 돌리더니 이서휘를 노려봤다. 무언가 한마디 톡 쏘는 말을 내뱉고 싶은데 갑자기 모습을 바꾸고 적을 추적한다고 하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불쑥 이서휘가 화지련과 도둑 형제, 정천을 보며 두 손을 맞잡았다.
“형제들…… 다녀오리다.”
형제들이라……. 묘한 표현이다. 시종일관 경박한 입을 놀리던 도삼과 도이, 정천과 화지련이 월야대주의 포권에 자신들도 두 손을 마주 잡고 예를 올렸다.
“조심하시길 빕니다.”
“무리하지 마쇼.”
“이 대주, 조심하게.”
“…….”
화지련은 끝내 아무 말도 못했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단우혁을 잠시 바라봤다. 술 한 잔 나누지 못하고 급히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비록 부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서휘가 차마 단우혁에게 무어라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대로 빠져 나왔다. 잠시 후 저도 모르게 이서휘가 뒤를 돌아보자 월야대 네 사람이 동시에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휘둘렀다.
정말 어지간히 감정 표현을 못하는 월야대다. 물론 이서휘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디선가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는 피 냄새가 이서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달빛을 쬐며 어둠에 잠긴 밤거리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 ☆
온몸에 흑의를 걸친 이서휘가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이서휘의 두 눈이 어둠을 주시하자 마음이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깜깜해진 밤길을 야행성 동물처럼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이서휘는 홀로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귀는 그 누구보다 먼 곳에서 들리는 작은 풀벌레 소리까지 감지하고 있었고, 코는 이따금씩 누군가 흘린 피냄새를 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절대감각(絶對感覺)을 수련하듯이 예민하게 오감(五感)을 다듬었다.
도삼의 말처럼 잘 닦인 길은 하나다.
적들은 응천까지 물러났다가 그곳에서 흩어졌으리라. 아니면 아예 응천에 머무르는 자도 있을 터. 이서휘가 지금 당장 얼굴에 어지럽게 자문을 그린 우두머리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훗날 군림맹과 함께 밀어버릴 수 있는 적의 거점을 발견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어둠 속에서 공기의 맛이 느껴졌다. 아직도 차가운 밤 공기에 비릿한 향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이서휘는 그 공기를 마시며 낭아봉을 휘두르는 거한의 무위(武威)를 떠올렸다.
맹주 남궁위나 청협문주 단의황이 지닌 무위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완성된 경지가 아니라 앞으로 완성시켜야 할 여지가 보이는 무공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했다. 마치 이서휘처럼…….
때문에 마교십존(魔敎十尊)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부 천마 위극신의 또래들이란 말인가? 이놈들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본래 이서휘의 전생에서 천마 위극신이 활동하는 것은 지금 시간으로 따져도 훗날의 일이다.
전부터 추측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군림맹으로 들어왔던 젊은 마존이라는 놈과 오늘 만난 거한의 모습을 보니 이서휘의 마음에 불쑥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 가득 찼다.
‘농락당하는 기분…….’
마치…… 마교가 무림을 대상으로 풀어놓은 젊은 야생마들의 활약을 지켜보다가 후계자를 고르는 작태가 아닌가.
그때였다.
이서휘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가 품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흑비도를 손에 쥐자마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일부러 잘 닦인 대로변에서 멀찍이 떨어져 걷고 있던 이서휘다. 별다른 것도 보이지 않건만 길을 우회해 돌아간 이서휘가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숲에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전방에 둘, 우측에 셋…….
잠복한 자의 기가 느껴졌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분노라는 감정에 빠져 있었음을 깨닫고 마음을 순식간에 가라앉힌 다음에 추적자를 끊기 위해 매복하고 있던 자들을 죽이지도 않고 그대로 귀신처럼 걸어서 지나갔다. 이서휘는 모조리 죽일까 하다가 오히려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 같아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응천으로 향했다.
어느새 이서휘의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유지되고 있었다.
☆ ☆ ☆
마가의 장로쯤으로 보이는 고수는 청협문주 단의황에게 팔이 잘렸다. 임시방편으로 치료를 했더라도 이서휘가 쫓을 수 있을 만큼 피 냄새가 짙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데, 그 피 냄새를 추적하고 있던 이서휘가 불쑥 걸음을 멈췄다.
피 냄새가 오히려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얘긴데…….’
이서휘가 기척을 완벽하게 죽이고 앞으로 이동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저 멀리서 누군가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렸다.
조금 더 다가가자 청협문을 습격했던 자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로 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두 병장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이서휘가 길을 우회해서 돌아간 다음에 천천히 다가갔다.
당대에서 천하제일살수를 다투는 자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이서휘의 암행술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이서휘가 회귀 전 장님이었기 때문에 다른 자의 기척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역으로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수법 또한 교묘하면서도 나름의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드넓은 공터의 좌측에 낭아봉을 쥔 자가 서 있었고, 그 우측에 낭아봉을 쥔 자보다 더 많은 흑의인을 이끈 자가 혈흔처럼 묘사된 붉은 얼룩이 수놓인 백의장포를 입고 있었다.
‘……!’
누가 보아도 두 세력은 호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서휘가 두 눈과 귀를 집중해서 상황을 살폈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이렇게 짜릿한 순간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백의장포 사내가 말했다.
[괴패야, 가까이 오너라. 둘만 얘기하자꾸나.]
괴패마존이 그 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죄다 긁어 모아서 왔구나. 그렇게 많이 데려와 놓고 둘만 얘기하자고? 네 놈 속이 시커먼 것이야 진작 알았다만…….]
괴패마존의 말에 상대방이 겁도 없이 홀로 앞으로 나서서 수하들에게 말했다.
[멀찍이 물러나라.]
그 명령에 우측에 있던 흑의인들이 뒤로 한참이나 물러났다.
[됐느냐?]
괴패마존도 왼손을 올리자, 그의 수하들도 한참을 물러났다.
두 사람은 병장기를 내밀어 겨룰 수 있는 거리까지 서로 다가간 다음에 말을 이었다.
대뜸 괴패마존의 욕설이 쏟아졌다.
[음마(淫魔) 이 새끼야……. 네놈 면상이 참 공교로운 순간에 등장하는구나. 이걸 내가 어찌 이해해야 할까?]
이서휘가 괴패마존의 말을 즉각 이해했다.
‘음마존…… 마교십존의 회동인가?’
음마존으로 추정되는 백의장포의 사내가 대꾸했다.
[번뇌(煩惱)가 죽었다.]
그 소식에 괴패마존이 쉽사리 대꾸를 못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 반응에 이서휘는 그제야 남궁익현에게 죽은 자가 번뇌마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기이하게 강하더라니…….’
침음성을 흘리던 괴패마존이 씁쓸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래서?]
[너랑 번뇌가 연합한 거 아니었느냐?]
[연합? 클클클……. 잡소리 집어 치우고 본론부터 얘기하자꾸나. 여자 엉덩이나 두드리던 놈이 어인 일로 여기까지 나왔느냐? 검선이라도 찾은 게냐?]
[아니. 여하튼 번뇌가 군림맹을 뒤흔들겠다는 작전은 이미 실패했다. 때문에 다른 놈이 번뇌가에 달라붙기 전에 우리 둘이 번뇌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미쳤느냐?]
[미친 것으로 보이느냐?]
[너와 내가 합쳐도 피해가 클 것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하지? 간 장로만 있어도 우리가…….]
[간 장로는 이탈하셨다. 번뇌가에도 돌아가지 않았고.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다. 때문에 번뇌가를 흡수할 시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얘기지. 다른 자가 손을 쓰면 우리는 두 손 놓고 구경을 해야 할 것이다.]
[이탈하셨다고? 간 장로가?]
[그래. 조금 더 솔직해지자꾸나. 제조법은 십가(十家)에 모두 주어졌다. 너도 재료가 더 필요하지 않느냐? 하나둘 잡아다가 실험을 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내 감옥을 다 채워도 며칠이면 동이 난다. 잊지 말아라. 번뇌처럼 행동하는 게 임무의 전부가 아님을……. 결국엔 누가 더 병기를 많이 만들어 내어 교주님을 흡족케 하느냐로 귀결되지 않겠느냐?]
괴패마존은 대꾸가 없었으나 이서휘는 병기(兵器)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직 마령시(魔靈屍)를 못 만들었단 말인가?’
마령시, 흔히 알고 있는 강시의 일종이다. 하지만 마도가 생산한 마령시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이성이 남은 강시들이었다. 때문에 무공을 익힌 무림인일수록 재료로서의 가치가 컸다.
이서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마령시에 필요한 재료……. 결국 인간이다.’
이서휘의 추측대로 음마존은 세력 판도를 조사하는 한편 마령시 제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날 음마존의 거처에 있던 감옥에는 마령시 개발에 사용될 무림인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마가(魔家)의 무인들까지 종종 껴 있었다. 하지만 점점 실종된 무인들을 찾는 자들 때문에 실험체, 즉 재료를 지속해서 공급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결국 음마존이 선택한 것은 수장을 잃은 번뇌가(煩惱家). 그곳을 괴패마존과 함께 쳐서 ‘재료’를 나눠 갖자는 말이었으니 이들의 간악함은 평범한 무림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서휘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마교십존에게 내려진 준엄한 임무들…….
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내부에서 와해시켜라.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중원 무림 침공 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마령시를 준비하여 적들의 거점 턱 밑에 숨겨 놓고 있으라.
후계자가 이 모든 것을 이끌고 무림일통에 나설 수 있도록!
음마존은 그 계획에 다른 마교십존의 세력까지 넣고 있었다.
괴패마존이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거절?]
[다만 간 장로의 허락을 얻어 와라. 간 장로가 묵인하면 다시 생각해보겠다.]
괴패마존이 더 말 섞기 더럽다는 듯이 자세를 돌리자 음마존이 싸늘한 말투로 경고했다.
[괴패야, 가란 말은 안 한 것으로 기억한다만…… 그리고 간 장로는 본래 번뇌가 출신이 아니다. 선배에게 물을 필요도 없단 말이다. 내 말을 가볍게 듣지 말거라.]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간 장로가 판단할 문제지. 그리고 네 놈이 언제부터 나를 오라 가라 할 수준이었느냐?]
갑자기 괴패마존이 자세를 돌려 낭아봉을 쥔 채로 음마존 세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마야, 자신감이 꽤 늘었구나. 한 번 시원하게 피를 뿌려 볼 테냐?]
[흐흐흐.]
[쳐 웃기는.]
괴패마존은 음마존의 말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수하들에게 돌아가며 외쳤다.
[가자!]
괴패마존이 물러나자 음마존 곁으로 두 명의 장로가 소리 없이 내려서고 수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장로 한 명이 말했다.
[마존, 치는 게 낫겠소.]
그러자 음마존과 함께 중원전도를 바라보며 인형 말을 두던 백발노인이 반대 의견을 밝혔다.
[마존, 돌아갑시다. 괴패의 성향상 협상의 여지는 없소. 이런 데서 쌍방이 피를 흘리면 득을 볼 게 누구겠소? 내 일단 간 장로를 찾은 후에 다시 날을 잡아보겠소.]
음마존은 대답 대신에 좌우를 둘러보며 어둠을 주시했다. 순간적으로 이서휘가 기척을 숨기고 있는 곳에도 시야가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음마존이 양손으로 경박한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자자, 이게 다 재료가 부족해서 이 고생들 아니요. 안 그렇소? 이런 달밤에 잠도 못 자고 이게 무슨 짓이오? 결국엔 재료 싸움이오. 재료 싸움. 명분이고 나발이고 승리란 결국 일을 성사시키는 자가 가지는 겁니다. 자자, 다들 복창하라. 재료 싸움!]
음마존이 두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재료 싸움!]
음마존의 미친 짓거리에 수하들이 어두운 숲 속에서 나지막이 합창했다. 음마존이 또 다시 선창했다.
[인간 재료!]
[인간 재료!]
음마존이 쩝 소리를 내더니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재미없네. 가자! 괴패랑 얘기했더니 기분도 찝찝하고 아랫도리에 피가 잔뜩 쏠리는 구나……. 완아.]
[네.]
[통통한 애로 준비해다오.]
[알겠습니다.]
음마존의 탄식이 길게 이어졌다.
[캬아……. 저 새낀 어찌 저렇게 한결같이 재미가 없을까. 사는 게…… 공손노야(公孫老爺), 안 그렇습니까?]
[후후후……. 괴패야 늘 한결 같았지요.]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내 말은!]
☆ ☆ ☆
이서휘는 괴패마존과 음마존이 물러난 이후에도 석상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도인들을 거리낌 없이 죽여왔던 이서휘다. 하지만 그들과 대화를 하거나, 대화를 엿듣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직접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마존이라는 자들의 정신세계를 엿보자 심력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이서휘다.
‘인간 재료…….’
이서휘가 그 말을 곱씹다가 이를 갈았다.
‘말종 새끼들.’
이서휘의 시야에서 좌우로 악(惡)이 물러났다.
쫓아야 할 자들이 늘어 버린 셈이다. 어느덧 곧 동이 터올 터. 이서휘는 두 세력이 물러나는 것을 보다가 음마존이 물러난 쪽을 택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서휘의 발걸음은 조금 더 짙은 악으로 끌리고 있었다. 괴패마존이 악당(惡黨)이라면 음마존은 악마(惡魔)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서휘는 악마를 따라 어느새 응천에 다다랐다.
잠시 후 천천히 음마존의 발자취를 뒤쫓던 이서휘는 어느새 응천의 불야성(不夜城),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응천은 객잔과 철장(鐵場, 대장간) 업이 꽤 발달한 곳이었다. 백 년 전부터 오가는 표사들을 상대로 객점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수십 년 전부터는 말 그대로 호황.
응천의 중심지에서 동쪽 길로 가면 군림맹, 북쪽 길로 올라가면 무림맹이었다.
그 중간에서 무기를 납품하기 시작해 무시 못 할 경제력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해 그 중 가장 큰 세력은 철호방(鐵虎幚)이란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이들은 이(利)를 추구하면서도 무(武)를 경시하지 않는 자들……. 철호방이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림에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자신들은 상인 출신임을 내세워 교묘하게 피해갔기 때문이었다.
세력 자체도 만만치 않는데다가 별다른 말썽도 피우지 않아 그간 무림 세력들의 시선에서 빗겨나 있었다. 그 철호방이 지금은 각 처에 수십 개의 철장(鐵場,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설마 철호방이…….’
음마존을 수행하는 두 장로의 무위가 신경이 쓰인 터라 멀찍이 쫓아왔던 이서휘다.
응천을 벗어나는 큰 길을 살펴봐도 이동하는 자들이 없었기에 이서휘는 그대로 응천을 샅샅이 뒤졌다.
늦은 시각에도 불을 밝힌 기루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거리에도 밤낮이 거꾸로 된 취객이나 여인을 유혹하려는 풍류객들이 가득했다.
때문에 흑의를 걸친 이서휘가 밤길을 거닐어도 이상하게 바라보는 자가 없었다.
이서휘는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자 결국 철호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새 돌아다녀도 이서휘는 철호방과 철호방을 끼고 있는 객잔은 살필 수가 없었다. 불을 밝히고 있건만 객잔은 이서휘의 출입을 거부했다. 철호방의 명패가 있는 자만 출입할 수 있는 객잔이라는 이유로.
그러다가 감옥이라는 말이 생각난 이서휘.
머리가 잠시 띵 하고 울렸다.
‘철호방은 쇠를 다루는 곳이다. 지하에 감옥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터.’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잠시 고민하던 이서휘는 철호방을 들쑤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찍 문을 연 객잔에서 국수로 끼니를 때운 이서휘가 다시 철호방을 찾아갔다.
입구에서부터 철공치고는 묘하게 긴장감이 서려 있는 일꾼들이 이서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수석 철공(鐵工)으로 보이는 사십 대의 중년인이 이서휘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떻게 오셨소? 못 보던 분인데.”
“제작 좀 맡길 수 있겠습니까?”
“어떤 제작이오? 뭐 못 다루는 게 없습니다만.”
이서휘는 등에서 문제의 유엽비도(柳葉飛刀)를 꺼냈다. 지난날 구화산에서 대도(大盜)가 들고 있던 것. 어쩌면 철호방이 유엽비도와 유엽비도의 정체를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대로 족했다.
이서휘는 유엽비도를 통해 철호방을 살펴보고 있었으니까…….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녹이면 요 정도 크기의 비도가 몇 자루 나오겠소? 실력이 자자하다고 하여 먼 곳에서 왔소. 값은 후하게 치를 것이오.”
“이걸 녹이시겠다고?”
철공이 묘한 눈빛으로 유엽비도를 살펴보고, 그 눈빛을 이서휘가 인피면구 안에서 예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유엽비도를 알고 있구나.’
이서휘는 호랑이 굴에 들어왔음을 깨닫고 있었으나 마음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중년의 수석 철공이 유엽비도를 건네받아 살펴보다가 이서휘에게 대뜸 물었다.
“이 자체로 훌륭하게 완성된 도 같은데…… 이거 어디서 얻으셨소?”
“밝혀야 하오?”
수석 철공의 표정이 순간 돌변하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일이 밀려 있으니 열 흘은 걸릴 것이오. 값은…… 노야에게 물어보고 답을 주리다.”
“열흘이나? 한데 물어볼 게 있소. 여기 손잡이를 보면…… 줘 보시오.”
이서휘는 말과 함께 중년인의 손에서 유엽비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왔다. 무공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능청스러운 동작…… 굳이 말하자면 도둑 형제들이 사용하는 궤도와 흡사한 행동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여기 말이오. 끝 부분에 호 자가 적혀 있었는데 어? 아닌가. 여하튼 혹시 이곳에서 만든 게 아닐까 예상했소만.”
“대체 뭔 소리오? 혹시 그거 장물(贓物) 아니오?”
“장물이라니? 나를 어찌 보는 것이오.”
이서휘가 대뜸 살기를 섞어 철공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철공들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말 그대로 이서휘의 살기 섞인 눈빛을 그대로 받아치고 있었다.
훑어보던 이서휘의 시선이 다른 철공들에 비해 유난히 어려 보이는 녀석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이서휘는 안색을 싹 바꾸고 씨익 웃었다.
“농담이오. 다들 눈빛들이 참 사납구려.”
“이 사람이 아침 댓바람부터 대체…….”
“어쨌든 열흘은 너무 길군. 다른 곳을 알아보고 오겠소.”
“뭐요? 이보시오!”
“허어, 장물이라니! 기가 차는군.”
이서휘가 싸늘하게 내뱉으며 철호방의 규모를 흘낏 살폈다. 이서휘가 철호방을 노골적으로 살펴보자, 철공들의 미간이 좁혀지고 있었다.
적당히 구경한 이서휘가 철호방을 빠져 나오자, 철호방의 철공들이 중년인에게 우르르 모여 들었다.
“저 새끼가 대놓고 죽여 달라고 하는군요. 여기 놈도 아닌 거 같은데 데리고 오겠습니다.”
“수상합니다. 멀리 가기 전에 쫓는 게 낫겠습니다.”
수석 철공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데리고 와라……. 환마가(幻魔家)에 납품한 도(刀)를 들고 와서 녹여달라고 하다니.”
“다녀오겠습니다. 가자.”
중년의 철공이 싸늘하게 말을 덧붙였다.
“생포가 어려우면 적당한 곳에 묻은 다음에 도만 가져와.”
“알겠습니다.”
☆ ☆ ☆
이서휘가 얼핏 살펴본 철호방의 규모는 과연 컸다. 수십 채가 넘는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원들만 꽤 많을 터. 더군다나 그 지하에도 병력을 숨기고 있다면…….
이서휘는 앞으로 정사지간이나 노선을 애매하게 걷는 세력들을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살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철호방이 거점 중 하나였을 줄이야.’
이서휘가 휘적휘적 걸으며 대로변을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철공들의 눈빛을 섬세하게 읽은 이서휘다.
철공들 대부분이 살기를 감추는 눈인데다가 몇몇은 희미하게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철호방이라는 곳에서 철공으로 머무르기엔 살기가 너무 짙은 자들이었다.
이서휘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안 따라오나?’
그럴 리가 없었다. 이서휘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겨우 십여 명이 뒤쫓아 오고 있었다.
추측이 확신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흑의인들이 흑의를 걸친 이서휘를 쫓는 형국이었다. 이서휘는 도망을 치려는 것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흑의인들이 속도를 더 높였다.
이서휘는 널찍한 공터로 유인하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 사이에 복면을 눌러쓴 흑의인들이 이서휘를 빠르게 포위했다.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손에 쥐고 말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뭐하러 복면을 눌러 썼느냐? 기가 차는 놈들이군.”
“……꼴에 우리를 유인한 것이냐?”
이서휘가 코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수석 철공이 너희만 보냈느냐? 미친놈이로구나. 제법 눈썰미가 있을 줄 알았더니.”
“킬킬킬, 미친 새끼…….”
철호방의 흑의인들이 직도를 쥐고 다가왔다. 그러자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유엽비도의 도신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떠엉……! 부르르르르.
흑의인들이 이서휘의 무위에 눈이 커지자마자, 이서휘의 선공이 펼쳤다.
쉭―!
일도에 한 명이 피분수를 뿜었다.
이서휘는 유엽비도를 다루면서 뜬금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들은 얘기다만 저 옛날 혈교(血敎)라 불리던 마도 세력은…….”
챙챙챙! 푸욱! 까앙!
이서휘가 유엽비도로 직도를 튕겨내다가 흑의인의 팔을 베고, 불쑥 옆에서 들어오는 직도를 튕겨냈다.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등장하자마자 무림의 공적이 되었다더군…….”
이서휘의 유엽비도가 흑의인의 목을 담갔다가 빠져 나왔다.
푸악!
빠져나온 유엽비도가 이어서 달려오던 흑의인의 눈을 그었다.
“크악!”
비명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이서휘가 염불을 외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육안에서 수만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푹푹……! 빠각!
이서휘는 두 명의 목을 찌르고, 발을 내밀어 한 명의 무릎을 꺾으며 말을 이었다.
“으악!”
“지주(池州)라는 지역을 시체로 뒤덮었을 때…….”
이서휘는 유엽비도를 왼손으로 건네쥐자마자 좌측에서 달려드는 흑의인의 목을 뚫고, 동시에 등 뒤에서 자강검을 뽑아 들어 수직으로 그었다.
전방에서 달려들던 자가 피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이서휘가 그 피를 피하면서 자강검과 유엽비도를 동시에 휘둘렀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실험을 위해서였다지. 들어본 적 있느냐?”
어느새 쐐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직으로 뻗어 나간 암연심검의 파가 쏟아져 전방을 갈랐다.
푸악! 하는 소리와 비명이 함께 터졌다.
대체 이서휘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이서휘는 가장 먼저 등을 내보이고 도망을 치려는 자에게 유엽비도를 던졌다.
휘익―! 푹!
도망가던 자의 등을 적중시켜 죽이고, 이어서 자강검을 휘둘러 흑의인들의 팔과 몸통을 갈라내며 말을 이었다.
“지주가 여기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야.”
이서휘의 서늘한 독백은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푹, 푹, 푹!
잠시 후 자강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어 납검을 한 이서휘.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흑의인이 직도를 내지르자, 이서휘가 손가락으로 날을 잡아서 깡! 소리와 함께 부러뜨렸다.
이서휘가 의도적으로 가장 무위가 낮은 녀석을 살려둔 셈. 독백이 아니라 애초에 이 녀석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이서휘가 어느새 공포에 질려 굳어 있는 흑의인에게 말했다.
“지주에 가본 적이 있느냐?”
흑의인의 눈빛이 대번에 흔들렸다가 질끈 감았다. 그때 흑의인의 의도를 읽은 이서휘가 손을 내뻗어 흑의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끅.”
이어서 이서휘는 흑의인의 혈도를 제압하고 입에서 독단을 꺼낸 후 복면을 벗겼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독단을 삼키라고 가르치더냐? 틀렸어. 그리고 네 놈이 독단으로 죽는 건 너무 편한 죽음이야.”
복면을 벗기니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이서휘가 철호방에서 눈여겨봤던 바로 그 어린놈이었다. 무위로 보나 나이로 보나 철호방에서도 막내 대접을 받는 놈일 것이다.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회수하고 시체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지주. 그래. 내가 지주 출신이거든. 어쩐지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하더라고. 뭐 그게 언제 일인지는 모르겠다. 얘기 해주는 사람도 모르더라.”
흑의인은 이서휘의 말이 반쯤 들리고, 반은 어떻게 도망을 칠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게 너희 탓일까 내 조상이 못난 탓일까. 세상 물정을 알기 전부터 심각하게 고민했지.”
이서휘가 흑의인 앞으로 다시 와서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누구 탓일 거 같으냐?”
아혈은 짚지 않았으나 흑의인은 대꾸가 없었다.
“…….”
그 눈빛을 노려보던 이서휘가 어조를 낮춰 말했다.
“내 탓이더라고.”
이서휘의 뜬금없는 대답에 흑의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게 왜 당신 탓이오……?]
그런 의아함이 눈빛에 섞여 있었다. 이서휘가 흑의인의 눈빛을 귀신처럼 읽었다.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결국 이것은 대화가 이뤄진 셈이었다.
이서휘는 앳된 청년의 눈빛에서 의아함을 읽고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아니라고? 그럼 네 탓이로구나. 네 놈 탓이야. 내가 가난했던 건 말이야.”
흑의인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게 또 왜 내 탓이오?”
“네가 철호방이니까.”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이제는 청년이 더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이서휘가 말을 덧붙였다.
“네가 마도(魔道)니까.”
“나…… 는 철호방이오. 그냥 철공이오. 평범한…….”
이서휘가 청년의 얼굴과 표정을 살피며 독심술을 펼쳤다.
“아니야. 넌 마도야. 마도 중에서도 혈교라 불린 놈들이나 했던 짓을 하는 악질이야. 안 그러냐? 네가 몰랐다고?”
청년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이서휘의 말처럼 어디선가 실험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이제 곧 죽겠구나 하는 심정뿐이었다.
청년이 겨우 입을 뗐다.
“어차피 다 무림인이었소.”
“허, 놀라운 얘기를 하는군. 무림인을 대상으로 그런 실험을 해도 된단 말이냐? 네 놈도 가담했군.”
“전 아닙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철호방이 널 거둬주고 재워주고 먹여줘서 고맙더냐? 돈도 제법 많이 줬겠지. 때 되면 여인도 품에 안겨주고 말이야. 거기까진 좋아. 힘을 가진 자들이라면 대부분 비슷하니까. 그렇게 시작하거든. 우리는 형제다. 안 그래? 한데 철호방, 아니지…… 마도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넌 알고 있으면서도 함께 했다.”
흑의인의 동공이 점점 커지자, 이서휘가 판결을 내리듯 선언했다.
“네가 죽어도 네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네가 마도에 속해 있다는 증거다.”
“슬퍼할 사람이 있습니다. 다 죽었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들이 있었으면 분명 슬퍼할 겁니다.”
청년은 말을 뱉어놓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미 이서휘가 말한 대로 철호방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한데 이서휘는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청년의 탓을 하고 있었다.
너 때문이라고.
청년은 반박하고 싶었다.
그건 아니라고, 왜 억지를 부리느냐고.
그러다 청년은 이 미친 자가 왜 나랑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까? 하며 생각이 뒤죽박죽 엉키고 있었다.
그때, 다시 이서휘의 말이 이어졌다.
“이름이 무어냐.”
“말하기 싫소.”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느냐? 주변인들이 다 죽었다고? 그럼 네 지인들이 철호방의 지하감옥에 감금되어 실험체로 쓰였을 것이란 상상은 해보지 않았느냐?”
청년이 발끈한 기색으로 이서휘를 노려봤다.
“무슨 소리오? 그런 일 없었소.”
“그래?”
이서휘가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그 찰나에 청년은 자신의 주변에 유난히 실종 사건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뛰놀던 친구도 여럿 사라졌고, 몸이 조금 아프던 주변인들은 하룻밤이 지나면 사라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청년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연이겠지.”
이서휘가 대꾸했다.
“오, 이상한 게 있긴 했나보구나. 뭐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리 생각해라. 우연일 것이라고. 네가 오늘 죽는 것도 다 우연이야. 운명은 아닐 것이다. 이런 걸 운명이라 하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겠느냐.”
이서휘가 무표정하게 등 뒤에서 유엽비도를 뽑아 청년의 목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남길 말은?”
아무런 후회가 없는 자라면 이서휘는 그대로 이 자의 목을 그을 생각이었다.
‘넌 희망이 있는 놈이냐?’
이서휘가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살려 둔 것도 기회를 준 것이다. 근성이나 뿌리까지 썩은 놈이라면 거짓말을 하다가 이서휘의 독심술에 들통이 날 것이고, 한 가닥 희망이 보이는 놈이라면 이서휘가 살려줘야 할 이유를 하나쯤은 이야기할 수 있을 터였다.
☆ ☆ ☆
청년은 눈을 껌벅이다가 대꾸했다.
“궁금합니다.”
“뭐가?”
“명우라는 놈이 있었습니다.”
“흥, 어디서 네 과거를 불쌍하게 포장하려고? 안 속는다.”
“아닙니다. 들어보십시오. 듣고 나서 죽여주십시오. 궁금해서 그럽니다. 그 명우라는 놈과 저는 본래 함께 철호방에 들어왔습니다. 두어 달 정도 지났을 때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습니다. 형님들이 어디 군림맹이나 이런 곳에 잡혀가지 않았을까 얘기를 할 뿐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천식이 있는 놈이었는데……. 얌전한 놈이었거든요. 저와는 어…… 어렸을 때부터 같이 고생을 많이 했었는데요……. 이제 철호방에 함께 와서 고생이 끝났다고 무척 좋아했는데 말이죠……. 아니겠지요?”
청년의 동공이 요동을 친다. 말은 어느새 존대로 바뀌어 있었고 끝 부분에선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이서휘가 청년의 마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어리다. 어…….’
이서휘가 나지막이 말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묻느냐? 넌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사람의 마음이란 형체가 없건만 상황이 주어지면 와르르 하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청년이 갑자기 명우에게 사과를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명우라는 친구가 청년의 마음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듯했다.
청년이 사죄하듯 말했다.
“아니오! 맹세컨대 몰랐습니다. 맹세합니다. 전 몰랐습니다.”
바닥엔 누군가의 직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청년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빠르게 손을 뻗어 집은 후에 어설픈 동작으로 이서휘를 찌르려 했다.
이서휘가 유엽비도로 청년의 직도를 날려 버리면서 말했다.
“누가 허락 없이 죽으라고 하더냐.”
청년은 자신이 죽으려고 직도를 내지른 것이었다. 청년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직도를 주워오더니 이서휘에게 두 손으로 올리며 말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죽여주십시오.”
“놀고 있네. 독단 하나 제대로 못 씹어 먹는 놈이.”
그 말에 청년이 직도로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내공을 실지 않은 공격으로 청년의 얼굴을 후려쳤다.
빡!
내공이 실리지 않았는데도 청년이 고개를 젖히고 뒤로 나뒹굴다가 대 자로 누웠다. 청년은 자신의 입가에 잔뜩 묻은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명우야, 아니다. 난 정말 몰랐다. 너는 내 말을 믿지?”
이서휘가 말했다.
“철호방으로 돌아가서 마령시(魔靈屍)나 돼라.”
청년이 누워서 중얼거렸다.
“마령시……. 그게 이름이었구나. 근데 어찌 마령시를 아십니까?”
“넌 뭐 하나라도 제대로 아는 게 있느냐?”
이서휘는 청년을 공터에 버려두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압니까…….”
청년의 눈가에 눈물이 뿌옇게 차올랐다. 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막막했다. 멀어지는 이서휘가 뭐라 중얼거리는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누워 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나 이서휘를 따라가며 말했다.
“철호방을 털어도 별 거 안 나올 겁니다. 거긴 그냥 소각장입니다. 거점은 철호방 반대편에 있는 진앙객잔입니다. 도박장 밑에……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다.”
이서휘가 군림맹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청년이 말을 토해냈다.
“절 왜 살려주신 겁니까? 제 탓이라면서요. 살려주셨으면 뭔가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네?”
이서휘가 코웃음을 내뱉으며 길을 걷자 청년이 악을 썼다.
“당신도 조금 전에 철호방 무인들을 열 두 명이나 죽였습니다. 철호방이나 당신이나 다를 게 뭡니까?”
이서휘가 자세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철호방으로 꺼지라고 이 놈야. 내가 언제 철호방 놈들과 다르다고 하더냐?”
“네?”
“내가 강해서 저 놈들이 죽은 거다. 거기에 뭔 의미를 부여해.”
“저도 약합니다. 왜 안 죽이십니까. 저도 죽이시지요.”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너는 정말 하늘에 맹세컨대 죽일 가치도 없이 약한 놈이라 살려줘도 무방할 듯싶구나. 정 그렇게 죽고 싶으면 철호방으로 가라. 언제가 됐든 칼에 맞고 죽거나 마령시가 되어 있을 테니.”
“그러니까 왜 살려주셨냐고요!”
이서휘가 청년에게 말했다.
“넌 철호방에서 그간 몇 명을 죽였느냐. 이유나 말해주고 죽였더냐?”
“뭐요?”
이서휘가 다시 걸어가자 청년이 그 뒤를 졸졸 따르며 말했다.
“명우가 그랬습니다. 몇 년만 일을 배워서 돈을 모은 다음에 우리도 철방을 하나 만들자고. 그때까지만 꾹 참고 일을 배워 보자고.”
이서휘는 대꾸를 않고 묵묵히 걷다가 마침 질풍검대 설진우 부대주의 말이 떠올랐다.
[서휘야, 난 군림맹에서 몇 년 구르다가 돈이 좀 모이면 고향에 내려가 무관(武館)이나 하나 차려서 예쁜 마누라 얻어서 살란다…….]
이서휘는 설진우의 말이 생각나 코웃음을 쳤다.
‘평생 무관 근처에도 못 가게 될 놈의 바람이었지.’
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어디 멀리 가서 철장 일이나 하면 밥은 빌어먹고 살겠죠. 살려준 이유를 안 알려주시니 물어보는 겁니다. 답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도 되는 것인지.”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이름이 무어냐? 두 번째 묻는다.”
“하후신(夏候迅)입니다.”
이서휘가 하후신의 얼굴을 눈빛을 찬찬히 본 다음에 덤덤하게 말했다.
“하후신, 가서 잘 살아라.”
“성함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알면 어찌할 건데, 강해져서 나 죽이러 올 테냐?”
“강해지면…… 제가 도와드리러 가겠습니다.”
“놀고 있네. 허접한 새끼가. 기대도 안 한다. 넌 그냥 칼 잡지 말고 조용히 살아.”
이서휘가 자세를 돌려 군림맹으로 향했다.
돌아서는 이서휘를 잠시 바라보던 하후신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이서휘를 향해 절을 한 번 올렸다.
하후신이 직도를 꽉 움켜 쥔 채로 군림맹 방향으로 가는 이서휘를 보며 중얼거렸다.
“잘 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왜 살려주셨는지 꼭 찾아내서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어쩐지 넌 약해서 죽일 가치도 없다는 말에 하후신이 두 눈을 부릅뜨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적어도 그곳은 철호방이 아닐 터였다.
☆ ☆ ☆
이서휘는 청년과 헤어지자마자 질풍처럼 내달려 경공을 시전한 다음에 군림맹으로 향했다.
괴패마존을 쫓다가 뜻하지 않게 음마존의 거점 하나를 발견했다.
‘철호방 반대편의 진앙객잔이라…….’
군림맹과 함께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거점일 것이다. 감옥이 있다면 갇힌 자를 풀어주리라. 실험과 관련된 증거를 군림맹이 발견하면 백도 세력 전체가 크게 경각심을 가질 터였다.
그러다 이서휘는 군림맹에 머무르고 있을 청협문을 생각했다. 단우혁은 부상을 당해 이서휘와 비무를 하긴 어려울 터. 대신에 청협문주 단의황에게 부탁해 청협문도들과 함께 진앙객잔을 쓸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름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터였다.
‘군림맹과 청협문이 손을 잡고 마도의 세력을 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서휘의 경공은 점점 빨라졌다.
청년과의 대화가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월야대로 거두자니 실력이 부족했고, 마도 출신인지라 군림맹으로 들어오라 할 수도 없었다. 괜히 독심술로 깨뜨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자신의 무위가 적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장 이서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지난날 월야대원들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정도로 빠른 속도.
이서휘는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내공의 한계치를 시험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군림맹으로 내달렸다.
‘강해지자…… 강해지자! 지금보다 더 압도적인 무위가 필요하다!’
달리는 이서휘의 턱에서 빠드득 소리가 들렸다.
☆ ☆ ☆
이서휘가 한참 후 객잔 거리를 지날 때쯤엔 아예 인피면구를 벗어 버리고 달렸다. 얼굴엔 땀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고, 온몸의 땀구멍으로 뜨거운 열기가 배출되고 있었다. 한데 미치도록 달릴수록 어쩐지 몸은 더 상쾌해지고 있었다.
‘음?’
천양뇌단은 양의 기운을 띄고 있는 영약이다.
이것을 복용하여 꽤 많은 극양의 내공을 단기간에 쌓을 수 있었던 이서휘다. 때문에 경공을 오랫동안 펼쳐도 온 몸이 뜨거워질 뿐 기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데,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쓰면서 온 몸이 뜨거워지자 단전에 있던 극음의 기운이 흘러나와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아마도 월단화로 취한 극음의 기운일 것이다. 전생에도 이런 일은 없었기에 달리는 와중에도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내어 암연심법으로 신체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보유하고 있던 음양의 기운이 이제야 섞인 것인가?’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평소보다 심법 운용에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던 이서휘다. 마음 가득 끓어오르는 분노와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떨치고자 펼쳤던 극한(極限)의 경공이 뜻하지 않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군림맹으로 돌아온 이서휘.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이서휘가 돌아오지 않자 슬슬 자신들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도둑 형제들이 어느새 이서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두 명 모두 히죽 웃는 품새가 심상치 않았다.
도삼이 말했다.
“대주님 이제 오십니까? 한참 기다렸습니다.”
도이가 자신의 코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아이고 땀 냄새야. 어서 씻으셔야겠소.”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청협문은?”
“캬, 청협문 말이오. 대주를 한참 찾았소. 뭐 잃어버린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
“왜?”
“왜겠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겠다는 게지. 아니, 뭐 대주 혼자 도왔소? 우리도 도왔는데.”
“하하.”
도삼이 말을 이었다.
“대주님 좋겠습니다. 청협문주님이…… 아닙니다. 일단 숙소로 가보십시오.”
“같이 가자.”
아무리 장시우 대주에게 보고를 했다지만 도둑 형제들이 아직 군림맹에 머무르기엔 불편할 터. 이서휘는 도둑 형제들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갔다.
이서휘는 “허어…….” 소리를 내며 감탄사부터 내질렀다. 그러자 도둑 형제들이 이서휘의 감탄사를 따라 하면서 탁자 위를 바라봤다.
“이게 대체 뭐랍니까?”
“부자 되셨소. 축하드리오.”
이서휘가 서신을 살펴보자 뜻 밖에도 그것은 청협문이 아니라 남궁익현으로부터 온 전공포상의 서신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검우 정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대주, 들어가도 되겠나?”
“들어오십시오.”
이서휘는 들어오는 정천에게 빙긋 웃은 다음에 서신을 마저 읽었다.
[……전공포상으로 주어지는 포상금과 월야대의 숙소, 월야대 인원들에게 지급할 무복, 장비를 마련할 돈까지 해서 조금 넉넉하게 담았네. 자네가 알아서 분배하게. 질풍검대 부대주의 신분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네. 쓰다 부족하면 문의하게. –수호전주 남궁익현]
이서휘가 서신을 읽는 도중에 정천도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게 대체 얼마란 말인가?”
이서휘는 본래 돈에 대한 욕심이나 감각이 전혀 없는 터라 서신을 내려놓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도삼이 탁자에 놓인 금은동화들을 살폈다. 금자(金子)만 대략 오십 개, 은자(銀子)는 백여 개, 통용되는 동화(銅貨)는 말 그대로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런저런 임무에 쓰라고 아예 다양하게 지급한 모양이었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너무 많은데? 나중에 잘 나눠드리겠소. 그리고 질풍검대 운영비로도 분배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들.”
“뭐, 이 대주 앞으로 떨어진 돈인데 어떻게 쓰던지 자네 마음이지.”
정천이 대꾸하자 도둑 형제들은 그저 돈을 보는 게 좋은지 연달아 “히야.” 소리를 내뱉으면서 금자와 은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도삼과 도이는 본래 도둑들이다. 도삼이 감탄사를 내지르며 말했다.
“이거 실례가 안 된다면 이런 말씀 드려도 될까요?”
“뭔데?”
“이제 저희 형제가 도둑질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네 놈들, 손 씻으라는 운명인가 보지.”
이서휘는 빙긋 웃은 다음에 씻으러 가겠다고 말하고 먼저 숙소를 비웠다.
한데, 이서휘에게 주어질 포상은 더 있었다. 청협문 역시 이서휘에게 고마움을 표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