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15화 (15/43)

<2장. 섬멸>

군림맹 본영에서 벌어질 대결의 승패는 이미 이서휘에 의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서휘의 전생에서 시기가 언제였든 간에 처절하게 무너졌던 군림맹이다.

부상을 입고 회복되지 못했었던 남궁위의 은퇴, 그는 잃었던 공력을 회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었다. 그 사이 다른 세가 가주들의 불만이 팽배해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숨어 있던 간자들의 활약도 한 몫을 했다. 운룡회라는 조직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운룡회가 어떻게 처리되느냐도 군림맹의 역량을 살펴볼 수 있는 일이 될 터였다.

세가들의 불협화음은 지난 생애에도 이서휘가 회귀한 지금도 여전했다. 이 모든 것들이 물 밑에서 마도의 계략이 섞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과거에 비해 바뀐 것은 사실 하나도 없었다.

딱 하나, 이서휘를 제외하곤…….

한신을 살리고, 남궁위를 보호하고, 간자들을 추적하고, 마도의 계략을 맞받아칠 준비를 해놨다.

구화산에서부터일까.

아니면 이서휘의 눈이 멀지 않았을 때부터일까.

이서휘는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애를 써서 해냈다. 적포 사내를 추적해서 격파했다. 그 결과, 냉철함을 잃은 번뇌마존이 성급한 계략을 짜서 몰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힘과 힘의 대결이다. 군림맹을 둘러싼 계략은 서서히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 ☆ ☆

군림맹의 들뜬 분위기가 정리되기까지는 약 이각이 소요됐다. 질풍검대가 운룡회를 포위하자 그나마 눈치는 무척 빠른 사마예가 발 빠르게 협조해 이서휘와 함께 간자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서로 간자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대여섯 명이 제 풀에 놀라 불쑥 운룡회를 빠져 나가려다 그대로 질풍검대 대원들에게 척살당하거나 사로 잡혔다.

질풍검대는 장시우의 판단 하에 그대로 운룡회를 포위한 채로 잠시 남아 있었다.

이서휘는 장시우와 귓속말을 나누고 그대로 운룡회를 빠져 나와 질풍검대와 수호전, 쌍각을 오가는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제가 연락책을 맡는 게 낫겠습니다.”

장시우는 이서휘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시우가 보기에도 그간 이서휘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질풍검대의 부대주로 두기에도 아까울 정도. 장시우는 그제야 아끼는 동생이라고 여기고 있던 이서휘가 얼마나 성장한 것인지 직시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장시우 자신이 너무 현실에 안주해 발전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통렬히 반성을 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해야 할 몫이 있을 것이다.’

장시우가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장검을 불끈 쥐고 운룡회의 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간자가 더 있을 수도 있었기에 아예 운룡회 건물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밀어넣은 상황이었다.

또한 사마세가의 의중을 몰랐기에 사마예도 끝까지 주시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운룡회는 질풍검대의 포위로 개미 한 마리도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이 상황에서 다른 자에게 판단을 맡길 수가 없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닐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수호전에서는 누가 가짜 청협문을 마중 나갈 것인지 협의해 결국 천라각주 유백으로 결정되었다. 유백은 일월쌍도를 챙긴 후 천라각의 무인들과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반 시진이 흘렀다.

☆ ☆ ☆

군림맹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누구든 마음껏 들어오라는 기백이 넘치고 있었다.

이서휘는 무척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군림맹의 상황을 직접 챙겨보고 있었다.

어느 검대가 어디에 매복해 있는지 어느 검대가 군림맹 바깥으로 나갔는지 눈대중으로 익혀 놓은 다음에 정문에 와있었다. 약속을 해놓고 버려둔 검우 정천이 생각났기 때문.

검대 대주들은 어둠에 숨어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인원들이 살기를 내뿜고 있었기에 경험이 많은 대주들은 작은 목소리로 일일이 대원들에게 기척을 숨기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자 군데군데 이글이글 타오르던 살기마저 검대주들의 단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정문에 도착한 이서휘는 군림맹이 뿜어대는 살기가 신기하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내심 군림맹의 잠재력을 다시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 나쁘지 않다.’

눈이 먼 상태에서도 수많은 낭인들을 거느리고 마도와 겨뤘던 이서휘다. 때문에 적을 기다리면서 살기를 숨기는 군림맹의 저력에 내심 불안했던 마음이 잦아 들고 있었다.

척후병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적들이 언제 도착할 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날이 이미 어두워져 가짜 청협문이 군림맹으로 바로 오든, 객잔 거리에 자리를 잡든 간에 척후를 통해 곧 기별이 올 터였다.

그때 검우 정천이 이서휘를 기다리다 지쳐서 다시 군림맹의 활짝 열린 정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경비 무인들이 나서기 전에, 이서휘가 정천을 불렀다.

“검우 형, 여깁니다.”

“자네, 아직도 여기 있나? 곧 올 것 같더니만.”

“빨리 들어오십시오.”

“무슨 일이야? 뭐가 이리 조용한가.”

이서휘가 정천을 잡아끌며 말했다.

“일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그러세.”

“혹시 객잔에 도삼, 아니 그 두 사람 있었습니까?”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나눴다. 이서휘가 도삼과 도이의 행적을 묻자 정천이 대답했다.

“초류황은 없고 그 누구냐, 냉혈공자? 그 자만 있더군.”

이서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객잔 주변에서 혼전이 벌어져도 두 사람은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는 도둑 형제들이다. 도삼은 은야를 알아보러 간 후에 아직 복귀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서휘가 운룡회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곧 청협문이라는 세력을 빙자한 적들이 올 것 같습니다. 군림맹 전체가 매복 중입니다.”

그 말에 정천이 정적이 감도는 군림맹의 전경을 훑었다.

“이게 매복 중인 상태라고? 정말인가? 허, 감쪽같군.”

“네, 어떻습니까?”

“허어, 말을 듣고 봐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오는데? 아, 아까 검대원들로 보이는 무인들이 우르르 나가더니만. 그게 이 때문이었나?”

“네.”

“대단하군. 군림맹을 치는 놈들이라면 흑도맹이나 마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럼 나도 합류하겠네.”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형은 일단 질풍검대와 함께 계시는 게 낫겠습니다. 오늘 입맹한 터라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에 질풍검대 대원들은 아까 비무를 봐서 전부 형을 알아볼 겁니다.”

“그러겠네. 그런데 대체 누가 겁도 없이 군림맹으로…….”

이서휘는 운룡회로 가서 정천을 장시우에게 소개하고 질풍검대와 함께 운룡회 주변에 머무르도록 했다. 그렇게 해놓으니 이서휘는 마음이 더 놓였다. 검우 정천의 실력은 누구보다 이서휘가 가장 잘 알기 때문.

정천에게 사마예 부회주를 눈여겨 보라고 이른 다음에 이서휘는 운룡회를 빠져 나왔다.

이서휘가 잠시 후 군림맹 중앙대로를 거니는데 객잔 거리 멀리서 새카만 인파가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뭐야? 뭐 이렇게 많은데?’

이서휘의 예상보다 수가 많았다. 하지만 군림맹은 운룡회와 군사회의 일부를 제외한 전체 인원이 대기 중이다.

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응집된 힘으로 마도의 세력을 잘라내는 것이니, 얼마든 더 오라는 심정이었다.

그때, 일전에 나갔던 척후가 말을 몰아 정문을 지나쳐 그대로 수호전 쪽으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잠시 후에 천라각주 유백이 천라각의 무인들을 대동하고 빠른 걸음으로 정문으로 이동했다.

유백이 중앙대로에서 거닐고 있는 이서휘에게 말했다.

“서휘야, 손님 준비는 잘 했느냐?”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잘한 것 같습니다.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후후, 가자꾸나.”

유백은 무슨 자신감인지 겨우 삼십여 명을 대동한 상태였다. 유백이 장포를 휘날리며 앞으로 나서자 이서휘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어느새 군림맹 정문 앞에 청협문의 깃발이 펄럭였다.

드디어 손님이 도착한 것이다. 이십여 명이 나란히 들어올 수 있는 정문에 청협문의 문주를 선두로 무인들이 밀려들어왔다. 이 가짜들은 정문에서 많은 수의 무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제지할까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어느새 전원이 중앙대로에 가득히 자리를 잡았다.

천라각주 유백은 아예 저 가짜들이 모두 들어올 수 있도록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었다.

양일우와 번뇌마존이 말에서 내리고 둘을 수행하는 백여 명의 무인이 겨우 삼십여 명이 마중 나온 천라각의 사람들을 보며 다가왔다.

양일우가 저 초라한 환대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안녕하시오? 너무 늦은 시각에 방문했구려. 미안하오.”

천라각주 유백이 무표정하게 양일우와 소문주로 변장한 청년을 번갈아 보며 대꾸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천라각주 유백이라 합니다. 시간이 늦어 제가 마중을 나왔으니 양해하십시오.”

참으로 능청스러운 유백이다. 굳이 이런 문답이 필요 없는데도 유백은 마치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적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었다.

반면에 양일우는 기분이 좋은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최소한 수호전주가 마중을 나와야 하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양일우는 예의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유 각주셨구려. 위명은 익히 들었소. 청협문의 단의황이라 하오.”

“후후. 소문의 단문주셨군요. 반갑습니다.”

“자자, 그래도 맹주님이나 전주님께는 인사를 드리고 싶소만? 함께 들어갑시다. 안내해 주시오.”

“그러시겠습니까?”

천라각주 유백은 그야말로 대담했다. 이서휘를 포함해도 겨우 삼십여 명이다. 하나, 두 배가 훨씬 넘는 청협문도들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 감쪽같은 연기에 양일우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구구궁 소리와 함께 정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닫혔다. 어쩐지 청협문으로 가장한 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백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본래 문을 개방하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여러분들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매우 지체했군요.”

“그렇소?”

그때부터 양일우은 무언가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 슬쩍 번뇌마존의 눈치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번뇌마존은 마중나온 자들 중에서 이서휘의 얼굴을 즉각 알아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번뇌마존이 미간을 좁히며 이서휘를 노려봤다.

‘저 부대주 새끼는 여기 왜 나온 거지?’

이서휘 역시 단우혁으로 분장한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리한 이서휘의 눈빛이 청년의 목 부분을 훑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그 누구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이서휘다.

이서휘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네 놈…… 인피면구로구나.’

그러다 번뇌마존과 이서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일전에 눈빛과 검을 교환한 사이다. 이서휘는 즉각 번뇌마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가 보이느냐?]

이서휘가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었구나.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이서휘는 즉각 소문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겨우 눈빛만 보고 말이다. 이서휘는 소문주로 위장한 놈이 주양위의 아들 행색을 하던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 번뇌마존이 군데군데 불이 밝혀진 군림맹을 살펴보다가 다시 또 다시 이서휘와 눈이 마주쳤다.

번뇌마존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놀랍게도 먼저 말을 내뱉었다.

“흐흐흐, 이거 준비를 제대로 하셨구만……. 어찌된 일이지? 군림맹이?”

대뜸 번뇌마존이 그리 말하자 양일우는 물론이고 함께 왔던 자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양일우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번뇌마존에게 흰소리를 늘어 놓았다.

“하하, 그게 대체 무슨 말…….”

그때, 군림맹 곳곳에 밝혀진 횃불들이 춤을 추듯 일렁였다. 잠시 후 시커먼 어둠이 몰려나와 백여 명의 가짜 청협문도들을 완벽하게 포위한 채로 진형을 짰다.

그러자 천라각주 유백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와하하! 여러분, 군림맹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크하하하하하.”

번뇌마존이 얼굴을 감싸여 웃다가 제 성질에 못 이겨 자신의 인피면구를 확 뜯어 버렸다. 번뇌마존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양 장로.”

“네.”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을 깨고 군림맹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 수가 대체 몇 명일까? 스릉, 스릉-! 하며 검집에서 검이 빠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끊어지지 않는 그 소리에 맞춰 번뇌마존이 헛웃음을 날렸다.

“크크큭…… 크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던 번뇌마존이 불쑥 안광을 빛내며 이서휘를 노려봤다.

“거기 너…… 부대주라는 놈. 이번에도 네 짓이냐?”

그야말로 특이한 감각을 지닌 번뇌마존이다. 군림맹이 이리 만전을 기한 것을 보더니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직감만으로 이서휘를 지목했다.

군림맹에 휩싸이고도 아직 번뇌마존은 홀로 당당했다. 마치 예전처럼 어떻게든 제 한 몸은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듯 했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이서휘는 이미 검집에 내공을 불어놓고 있었다.

‘그래, 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새끼야.’

이서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였다.

마치 축포가 터지듯이 화룡검대주 백리풍이 검기를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개전을 알렸다.

쐐애애애앵!

“크아아악!”

순식간에 한 사람의 목과 두 사람의 팔이 잘려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양일우가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씨발! 다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가라!”

양일우의 전신이 좌라락 소리와 함께 흑빛의 마기로 휩싸이고, 청협문도 행색을 하고 있던 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군림오검대와 맞부딪쳤다.

양일우가 몰려드는 검대원들을 향해 마기를 내뿜으며 외쳤다.

“마존! 제 불찰입니다. 물러나십시오.”

“……까는 소리 마시고, 양 장로. 하나라도 더 죽일 생각이나 하고 뒤지쇼.”

욕설을 내뱉은 번뇌마존이 느닷없이 이서휘에게 달려 들고, 양일우는 느닷없이 덤벼드는 천라각주 유백의 공격을 튕겨냈다.

유백이 일월쌍도를 휘두르자 쐐앵,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근접한 상태에서 양일우를 향해 두 개의 날카로운 예기가 뻗어 나갔다.

양일우가 청협문주를 흉내 내겠다고 들고 온 거대한 도를 들고 맞받아쳤다.

콰아아앙!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는 채로 밀려나더니 어느새 꽝 소리와 함께 다시 맞붙었다.

번뇌마존은 이서휘를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이 개새끼야……. 용무가 바빠서 딱 너만 죽이고 난 물러나마.”

번뇌마존의 신형이 검은 안개에 휩싸였다가 이서휘 앞에서 드러나며 불쑥 비수를 내질렀다.

챙챙챙챙챙!

이미 이서휘의 무공 수준을 알고 있는 번뇌마존이다. 온 힘을 다해 이서휘만 죽인 다음에 몸을 내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무공 수위가 한층 달라져 있었다. 이서휘는 번뇌마존의 비수를 모조리 튕겨내며 말을 섞지 않았다.

까앙!

번뇌마존의 강맹한 공격을 튕겨낸 이서휘가 자강검으로 번뇌마존의 목을 섬짓하게 그었다.

휙!

깜짝 놀란 번뇌마존이 신형을 뒤로 물리는 순간에 이서휘가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이 검 끝에서 암연심검의 환을 내뱉었다.

쐐애애애앵!

화들짝 놀란 번뇌마존이 비수를 가로로 눕히고 왼손을 뒤에 받쳐 내공을 주입했다.

쩌엉!

‘이 새끼는 대체 뭐야?’

아무리 봐도 부대주라는 새끼의 공력은 자신보다 아랫길에 있었다. 그런데 공방의 수준은 미치도록 높았다. 번뇌마존은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내고 코웃음을 내뱉은 다음에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가 싸늘한 표정으로 자강검을 쥐었다. 그때, 공중을 가로지르며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 이서휘를 지나 번뇌마존의 비수를 튕겨내며 말했다.

“내가 상대하마.”

남궁익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번뇌마존과 맞붙었다.

이서휘의 판단은 무척 빨랐다.

‘음?’

어차피 군림맹과 마도의 싸움이다. 마치 장기 알을 놓는 것처럼 마교십존으로 추청되는 놈을 남궁익현에게 맡기고, 즉시 튀어 나가 검대와 어우러지고 있는 마도인들을 베기 시작했다.

‘이게 더 효율적이겠군.’

푹, 푸악! 쐐애애앵!

이서휘는 아예 원형 방진을 짜서 버티고 있는 마도인들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날리고 미친 사람처럼 뛰어 들었다.

쫘아아악!

팔다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어느새 날아온 이서휘가 자강검으로 마도인들의 목을 찔러대면서 파고 들었다.

이서휘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 몰려 있는 마도인들의 진형을 살펴보고 그 자리에서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쐐애애애애앵!

투두두두둑!

직선 형의 검기가 나란히 서있던 마도인들의 목과 얼굴, 눈과 어깨 등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그때 또 다시 원형 방진을 이룬 마도인들을 향해 검기가 쏟아졌다. 화룡검대주 백리풍과 천룡검대주 독고마량이 직접 뛰어들어 번뇌마가 무인들을 베기 시작한 것.

두 사람은 함께 싸운 나날이 오래되어 서로의 등을 지고 마도인들을 갈라내고 있었다.

푸악, 푸악 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게 이서휘와 두 명의 검대주가 전장 중앙에 파고 들어 적들을 낙엽 베듯이 쓸고 지나갔다. 검대원들은 미처 공을 세울 수도 없을 정도의 폭풍이 지나가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지옥을 묘사한 것 같은 난전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때 천뢰각주 한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작전 지시를 하는 외침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화룡검대와 천룡검대가 대주들의 명령 하에 점점 물러나더니, 엄청난 기세와 싱싱한 기백을 내뿜는 비룡검대와 운룡검대가 검대주를 앞세어 밀려들어왔다.

다수가 소수를 포위해 상대하는 데도 차륜전이라니?

하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천뢰각주 한신은 그렇게 명령을 내렸고, 검대주들은 군말을 하지 않고 즉각 호응했다.

마도인들의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으악!”

번뇌마가의 정예 무인들이라 제법 저항이 거셌는데도 마도인마다, 대여섯 개의 장검이 동시에 쏟아지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크아아악!”

“커억!”

하지만 도망을 치는 자들도 없었고, 도망치라 명령을 내리는 상급자도 없었다. 그저 백도의 무인들을 베다가 이 자리에서 죽을 생각들이었다. 마도를 제외하고 이런 기백을 내뿜을 수 있는 현 세력은 아마도 흑도맹이 유일하지 않을까? 군림맹의 무인들은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이면서도 마도의 저력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아니, 이번 전투야 말로 느슨했던 군림맹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씨벌, 더럽게 잘 싸우는 새끼들이구나! 죽어라! 죽어!’

말단 검대원들조자 이를 꽉 물고 덤벼들고 있었다.

유백과 양일우가 여전히 승부를 내지 못하고 부딪치고 있었다. 유백의 쌍도가 춤을 추듯 양일우를 덮쳤다. 하나, 양일우는 일월쌍도를 일일이 쳐내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유백과 겨루고 있었다.

챙챙챙챙챙! 까앙! 끼이이익!

양일우는 온 몸에 서늘한 마기를 두르고 있어 평범한 무인들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

이서휘는 힐끗 남궁익현과 유백 쪽을 살피다가, 빠르게 마도인들의 목을 베면서 다시 돌아왔다. 이제 이서휘의 움직임은 군림맹 뿐만이 아니라 마도인들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만했다. 이서휘의 무공의 근간은 마도인을 척살하겠다고 익힌 검이다.

마도인 한 명이 검을 들어 이서휘를 내려치자, 이서휘는 마도인의 검과 목을 동시에 베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솟구쳤다.

이서휘의 자강검에 자색 빛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연달아 세 명의 무인을 검과 함께 갈라 버렸다.

깡! 하는 소리와 서걱! 하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면서 저 훈련이 잘 된 마도인들도 뒷걸음을 치면서 다른 상대를 찾는 것처럼 물러나고 있었다. 이 마도인들의 가슴 한구석에도 공포심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 ☆ ☆

천뢰각주 한신은 마치 검대원들을 실전 훈련에 투입시키는 것처럼 또 다시 전열을 교차시켰다. 이번에는 천룡검대주에게 더 멀찍이 물러나서 군림맹 곳곳으로 분산시켜 내보냈다. 변수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소름끼치는 비명이 한 차례 길게 울려 퍼졌을 때 척후 한 명이 한신에게 달려왔다.

“각주님! 외곽에서 비룡, 화룡, 천룡의 부대주들이 이끄는 인원들이 적들과 맞붙었습니다. 적의 수는 대략 사 백. 군림맹으로 몰려오려는 상황입니다. 이곳 보다 수가 많아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그 보고를 듣자마자 한신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비룡대주! 운룡대주! 외곽을 지원하라. 정문 열라 해라. 구완아.”

“네, 각주님.”

천뢰각원이 대답하자 한신이 곁에 있는 다른 각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오야.”

“네, 각주님.”

“질풍검대 전력이 고스란히 운룡회에 있다. 먼저 장시우의 판단을 물어라. 그가 승낙하면 천뢰각 무인들로 운룡회 감시를 교체해라. 여기는 곧 정리될 것이다. 장 대주는 질풍검대 전원을 이끌고 외곽을 지원하라 이르라.”

“알겠습니다.”

그 사이에 이십 여명의 최정예 마도인들이 남아서 분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선두에 나선 화룡검대 백리풍 대주에게 하나둘씩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보던 한신이 유백 곁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유 각주……!”

유백은 양 장로와 접전을 펼치느라 대꾸도 하지 못하는 상황. 한신은 그 모습을 보고도 유백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마치 전장을 살피는 군사처럼 다른 곳을 살펴보다 내공을 실어 외쳤다.

“유 각주, 나중에 구시렁거리지 말거라! 화룡대주!”

한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쪽으로 와서 유 각주를 지원하게.”

그 말에 마도인을 베고 있던 화룡대주 백리풍이 즉각 몸을 빼내고, 신형을 날려 한신 곁으로 달려오다가 말도 않고 유백이 상대하고 있는 양 장로에게 달려들었다.

챙챙, 깡!

무시 못 할 기운이 실린 한 자루의 장검이 양 장로의 몸에 쏟아지자, 양 장로가 이를 악물고 오른손에 쥔 도에서 마기를 쏟아냈다. 동시에 양 장로는 좌장에서 외기발현 장력을 쏟아내 유백을 공격했다.

콰아아앙!

유백이 쌍도를 교차해 막아내고, 화룡대주 백리풍이 선 자세 그대로 밀려났다. 하지만 화룡대주 백리풍은 제자리에서 검을 허공에 휘둘러 범상치 않은 검기를 내뱉었다.

쐐애애앵!

그 기세에 양 장로가 공중으로 훌쩍 솟았다. 그때, 발 구르는 소리와 함께 솟구친 천라각주 유백이 공중에서 일월쌍도를 휘둘러 양 장로의 가슴을 찌른 후 쩌저정 소리와 함께 광음노기(光陰怒氣)란 초식으로 양 장로를 네 조각으로 분리시켰다.

쫘좌작!

땅으로 내려서던 유백이 흥분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썅! 백리대주, 누가 합류하랬나!”

욱한 성질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화룡대주 백리풍이 맞받아쳤다.

“한 각주님에게 성질내십시오!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어허, 그만!”

한신이 다가와 유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성질내지 말고 전주님에게 가자.”

그때였다.

질풍검대 장시우 대주를 선두로 질풍검대 전원이 두드드드 소리와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정문을 빠져 나갔다. 그 말미에 검우 정천이 뒤따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질풍검대를 힐끗 본 한신이 외쳤다.

“본영은 화룡검대가 정리하고 나머지는 질풍검대를 따라서 검대 부대주들을 지원해라.”

그 소리에 시체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있던 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정문으로 이동했다.

한편, 이서휘는 검우 정천이 질풍검대의 후미를 지켜주리라 믿고, 남궁익현 쪽으로 서둘러 갔다.

번뇌마존은 남궁익현에게 몰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싸움이 길어졌을까? 둘이 백중세여서 그런 것일까? 아니었다. 남궁익현은 수준 높은 마도인과 겨뤄본 경험이 없었다. 일전에 간천과 잠깐 겨룬 것이 전부였을 정도. 때문에 공력이 낮은 번뇌마존이 갖은 수를 써가며 이제껏 남궁익현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기를 쏟아내도 남궁익현은 웅혼한 내력으로 흔들림 없이 버티면서 우직하게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사이 쌍각의 각주와 화룡대주 백리풍, 이서휘가 원형 진으로 번뇌마존을 둘러쌌다.

한신마저도 감히 남궁익현이 겨루고 있는데 합세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남궁익현이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남궁익현은 번뇌마존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이서휘는 남궁익현이 펼치는 무공을 살펴보는 것보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피해는 어느 정도 있겠지만 오늘 일은 모습을 드러낸 마도(魔道)와 백도(白道) 세력이 본격적으로 맞붙은 일로 거론될 것이다. 각주님들에게 이야기해서 전 무림에 파발을 내보내시라 해야겠다.’

한데 그 생각은 이서휘만 하는 게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던 한신도 이서휘와 거의 같은 생각을 하며 마도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두주불사 한신은 멀쩡한 정신으로 이서휘와 같은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서휘와 군림맹의 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십 여초가 다시 흘렀을 무렵이었다.

푸욱!

“끅!”

남궁익현의 검이 드디어 번뇌마존의 가슴을 관통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죽음인가?

번뇌마존은 무어라 한마디 군림맹을 저주하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그대로 남궁익현의 검에 목이 저 멀리 날아갔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이서휘가 신형을 날려 양일우가 타고 왔던 말에 훌쩍 올라탔다. 이서휘는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질풍검대로 합류하겠습니다!”

월야대주이지만 외부에는 여전히 질풍검대 부대주인 이서휘가 말을 몰아 질풍검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서휘는 말을 타고 군림맹 정문을 쏜살같이 벗어났다.

앞서 지원을 나간 무인들이 저 멀리 보였기에 이서휘는 그 길을 그대로 쫓았다. 어느새 마음속에는 질풍검대 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어리고 실력이 부족한 녀석들이 많았기에, 이서휘는 초조한 마음으로 말을 몰았다.

챙…… 챙…… 챙…….

어디선가 미약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질풍검대가 가는 곳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가 상체를 한껏 숙인 채로 말을 몰아 달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간다. 기다려라.”

질풍검대가 합류한 전장(戰場)이 드디어 이서휘의 눈에도 보였다.

이서휘는 새삼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에 감사를 드렸다. 일전에는 마도인의 기를 느끼고 단 일검에 죽이고 돌아다니는 것이 이서휘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마도인들에게 칠흑검제라는 이름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검제 시절에도 못내 가장 아쉬웠던 일이 있었다…….

이서휘는 마침 전열에서 이탈한 흑의인에게 공격을 받고 있던 검대원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내달렸다. 이서휘는 말도 섞지 않고 달려가 흑의인의 목을 날려버리고 지나갔다. 이서휘가 지나가자 검대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전선으로 달려가며 이서휘에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부대주님!”

……그것은 누군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 돕는 일이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시끄럽게 섞여 있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눈이 먼 채로는 누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채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잃었던 동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서휘의 두 눈이 전장을 훑어봤다. 이서휘가 질풍검대를 발견하고 그대로 말 위에서 솟구쳐서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내며 내려섰다.

촤아악! 소리와 함께 일렬로 밀려들던 대여섯 명의 신체가 그대로 분리됐다. 이서휘가 등장하자 마도인들을 막아내고 있던 질풍검대원들이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저마다 환호성을 내질렀다.

“부대주님!”

“형님!”

검대의 누군가가 호통을 내질렀다.

“어딜 보는 거냐! 정신 안 차려?”

이서휘가 합류했다. 이서휘가 검을 휘두르면서 이건영에게 외쳤다.

“건영아! 장 대주님은?”

이건영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흑의인의 가슴에 장검을 푸욱! 찔러 넣었다가 뽑아내며 말했다.

“가장 앞 쪽에 계십니다!”

이서휘는 자강검으로 몰려드는 흑의인들을 베며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 형님은 대체 어디까지 가신 거야?’

이서휘가 마치 길을 열 듯이 흑의인들을 베며 밀고 들어가자, 질풍검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뒤를 쫓았다. 그때, 서너 명의 신체가 투다닥 소리와 함께 동강이 나더니 검우 정천이 적룡검을 쥐고 나타나 누군가에 물었다.

“너무 많은데? 추가 지원은 없소?”

정천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서휘가 앞에서 외쳤다.

“검우 형, 지원이 곧 올 겁니다. 계속 후미를 맡아 주시오!”

“알겠네!”

이서휘는 계속 전진했다. 장시우는 가장 공방이 격렬한 최전방에서 다른 검대원들을 돕고 있었다. 어느새 질풍검대와도 약간 멀어지고 있었음을 모르는 눈치였다. 검신에 시뻘건 피가 잔뜩 묻어 있고, 얼굴도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서휘가 검을 내지르면서 등장해 말했다.

“형님! 뭐 이리 무리 하십니까? 대원들과도 떨어지셨습니다.”

“비룡 부대주를 부상 입힌 놈을 쫓다가 여기까지 왔다.”

장시우의 목소리가 멀쩡한 것을 듣고서야 이서휘는 안심했다.

군림맹은 아직까지 수적 열세였다. 매복을 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모여 군림맹으로 몰려가려는 형국이었기 때문. 이들은 아직 군림맹 안으로 들어갔던 자들이 모조리 죽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군림맹에 불길이 치솟지 않는 것을 보고 군데군데 숨어 있던 자들이 모여 정문이라도 뚫어낼 생각이었던 것.

다행히 이서휘가 합류하자 질풍검대의 사기가 올랐다. 최전선에서 장시우와 이서휘가 흑의인들을 점점 밀어내고 있었고, 후방에서 검우 정천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밀리던 전선을 질풍검대가 다시 우뚝 멈춰 세우고 있었다.

이서휘는 최전선에 장로 급의 마도인이 있으면 장시우와 합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 봐도 어쩐지 마도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푹푹푹!

연달아 삼 검을 내질러 적들의 목에 피분수를 일으킨 이서휘가 장시우에게 말했다.

“형님, 나 잠깐 깊숙이 다녀오겠소.”

“오냐.”

이서휘는 이런 전장이 익숙하다. 질풍검대는 선두에서 장시우가, 후미에선 검우 정천이 돌봐주고 있어 안정적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심리적으로 몰리고 있던 다른 검대로 불쑥불쑥 합류해 검을 내지르고 다녔다. 그때부터 이서휘는 전쟁터의 광인(狂人)이 된 것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흑의인들을 베면서 돌아 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저 옛날 조자룡이 청홍검을 쥐고 적진을 누비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서휘의 눈에 위급한 상황에 처한 아군이 보이면, 꽤 먼 거리에서도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러 흑의인의 목을 뚫어냈다.

파앙!

“끅!”

검대원의 등 뒤에서 기습을 가하려던 흑의인이 영문도 모른 채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렇게 살려 놓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전장의 분위기는 질풍검대와 이서휘가 확 뒤바꾸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방에서 천룡검대가 쏘아 올린 화전포(火箭包)가 공중에 터지면서 검대주를 앞세운 추가 병력이 도착했다. 마도인들의 사기가 완전히 박살나고 있었다.

전장은 드넓었다. 퇴각로도 많았기에 도망치는 자들이 점점 생기고 있었다. 밀려나던 군림맹이 어느새 적들을 몰아붙이면서 추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날은 군림맹의 저력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흑의인들이 물러나려는 길목에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도인이 외쳤다.

“뒤에도 적이 있다. 포, 포위당했다!”

그 소리를 들은 마도인들이 몸이 대번에 굳어지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적들을 베고 있던 이서휘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자, 저 멀리서 살벌하게 마도인들을 베는 고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도에 이서휘마저도 탄성을 내질렀다.

“허어, 독고(獨孤) 가주…… 가 여기에 잠복했었다니.”

독고세가의 독고성(獨孤成)이 적들을 베어 넘기면서 이서휘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서휘마저 감탄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위!

공중에 솟구치는 것도 아니고, 동작을 크게 펼치는 것도 아니었다. 독고성은 그저 깃털처럼 가벼웠다. 심지어 고함을 지르거나 지시를 내리기 위해 입을 여는 법도 없었다.

적을 벤다, 이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는 간략한 움직임.

달려드는 자는 적당한 곳을 찔렀고. 누군가 다가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뭉쳐 있는 곳으로 가서 검을 찌르고 다녔다. 별다른 기예도 화려함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이서휘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마도인들을 베고 있던 이서휘가 잠시 서서 독고성의 검법을 잠시 구경했다.

검의 기예와 초식을 모조리 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단순했다. 그것은 마치 식칼을 든 요리사가 숙련된 동작으로 무심(無心)하게 닭의 목을 치는 행동과 닮아 있었다. 칼질 한 번에 목이 하나씩 날아갔다. 다만 너무 높은 수준에서 펼치는 칼질이라는 게 특이할 뿐이었다. 때문에 흑의인들은 더 큰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훈련을 받을 때 전해 듣던 백도의 무인이 아니었던 것.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이서휘가 검을 휘두르면서 마도인을 베면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때, 독고세가 장로 두 명이 이서휘를 지나 독고성에게 다가갔다. 장로 한 명은 검 끝에 누군가의 목을 꽂아 넣고 있었다. 아마도 흑의인들을 이끌고 있던 마가의 장로일 터였다. 독고세가 장로들은 시킨 일을 처리했다는 듯 단조롭게 말했다.

“가주, 적의 목을 가져왔습니다.”

독고성은 적을 베느라 장로들의 보고를 듣고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독고세가의 최고수들로 일찌감치 독고성과 함께 적이 있을만한 곳을 샅샅이 뒤져서 척살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게 군림맹 외곽에서 번뇌마존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마도인들은 군림맹의 검대와 독고세가의 포위작전에 말려 들어, 말 그대로 섬멸(殲滅) 당했다.

독고성은 검에 묻은 피를 한 번 털어내더니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이서휘를 흘낏 보고 그대로 지나갔다. 군림맹은 새삼 전선에 등장한 독고세가 가주 독고성의 무위에 혀를 내둘렀다. 이서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전생에서, 남궁위가 은퇴하자 다른 세가들을 누르고 맹주가 됐던 독고성이다.

이서휘가 알기로는 남궁위, 남궁익현, 독고성이 군림맹의 최강자였다. 하지만 직접 무위를 살펴보니 과연 독고성을 남궁익현 밑으로 봐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독고성은 이서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세가의 무인들과 또 어디론가 훌쩍 사라진 상태였다.

☆ ☆ ☆

그날 밤, 군림맹은 밤새도록 불을 밝혔다.

적들은 잘 물리쳤으나 논의할 게 많았다. 부대주들의 통제 하에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 깨끗하게 정리되고 있었고, 군림오검대의 검대주들과 쌍각의 각주는 수호전에 모여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다가 돌아갔다.

다음 날도 회의는 계속 됐다. 그 와중에 한신은 회의와 상관없이 붓을 들어 백도 무림으로 보내려고 작성하고 있던 서신을 마무리 지었다.

……청협문으로 가장한 마도가 모습을 드러내 군림맹과 접전을 펼쳤으며 군림맹이 적들을 섬멸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마도 세력의 일부일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됐든 간에 추후 백도 세력은 힘을 모아 마도의 본거지를 찾아내고, 과거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마외도의 무리를 중원 무림에서 쫓아내야합니다……. 사안이 급해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중원무림의 영웅들에게 이 소식을 먼저 간략히 전합니다.

군림맹 천뢰각주 한신.

한신은 무어라 길게 쓰려다가 그냥 붓을 놓고 이를 수호전주에게 보여준 다음에 천뢰각으로 전달해 각 지역으로 파발을 보내라 전했다. 군림맹은 백도맹에 속한 방파는 물론이고 군소세력에게까지 소식을 전할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회의는 계속 됐다.

전공 포상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핵심은 운룡회와 군사회에 대한 처리였다.

군림오검대주의 불만은 전날부터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들의 항의에 쌍각의 각주들마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잠자코 듣고 있던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결국 칼을 빼들었다. 맹주에게 최종 보고는 올려야 할 테지만 오검대주가 이리 나오니 더 이상 미룰 방법도 명분도 없어 보였다.

남궁익현이 말했다.

“군사회가 수행하던 일은 쌍각이 나누어서 맡고 군사회, 운룡회는 해체하는 안을 건의하겠네. 단, 해체하기 전에 두 조직에 대해 심도 있는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오검대주들도 잘 협조하게. 당분간 내실을 다져야겠어.”

검대 대주들이 그제야 우렁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땅한 결정이십니다.”

두 각주들은 얌전히 있었다. 자칫 자신들이 이끄는 쌍각으로 힘이 집중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호전주 남궁익현은 검대 대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맹주의 허가를 받아 군림맹 조직을 싹 뜯어 고칠 생각이었다. 그 여파로 군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제갈, 사마세가가 군림맹을 탈퇴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궁익현도 군사회의 존재 가치가 유명무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운룡회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없애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그리고 그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간자가 섞인 오(五)의 세력보다 내실을 다진 삼(三)의 세력이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

남궁익현은 시급한 사항이 정리되자 회의를 하고 있던 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규모로 전공포상(戰功褒賞)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공을 세운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포상금을, 그리고 전투에 참여한 모든 대원들에게도 월봉(月俸)에 육박하는 포상금을 지급할 것이라 말했다. 남궁세가가 지닌 재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전공포상금을 가장 많이 받아야 할 사람은 질풍검대의 이서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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