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14화 (14/43)

3권

<1장. 반격>

수십 개의 병장기가 동시에 이서휘의 몸에 쏟아졌다.

이서휘가 검, 도, 창을 밟고 이어서 흑의인들의 팔과 어깨, 머리를 밟으며 귀신처럼 움직였다. 귀신이 자강검을 들고 허공을 떠다니는 분위기다. 그 귀신이 어둠을 가르고, 베고, 찌르고, 검기를 쏟아냈다.

솟구치는 것은 처절한 비명을 타고 오르는 핏물뿐이다.

도삼과 도이 형제도 무척 빠른 속도로 흑의인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휘가 흑의인들을 죽이는 속도는 그 이상이다. 흑의인 대부분이 일 검에 즉사하고 있었다. 도둑 형제는 물론이고 적을 베던 검우 정천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

휙!

어디선가 이서휘를 노리고 강침이 날아왔다. 이서휘는 보지도 않고 검을 뒤로 내질러 강침의 방향을 바꿨다.

탕!

“컥!”

튀겨나간 강침은 어느 흑의인의 몸에 박혔다.

이서휘는 튕겨나간 강침이 누굴 죽였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전방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그었다.

쐐애앵!

이서휘의 검에서 날아간 검기가 땅을 긁으면서 길을 만들어냈다. 그 길에 머무르고 있던 흑의인들의 신체가 좌우로 나뉘었다. 살려 보내봤자, 마공에 의해 의지를 잃은 살인병기로 다시 나타날 녀석들이다. 때문에 이서휘는 집요하게 흑의인들을 베면서 추호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있었다.

“허어…….”

도삼과 도이는 본래 이서휘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전보다 훨씬 강력한 무위를 펼치자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서휘에게 죽을 뻔한 자들이 아니던가.

‘저 검이 나에게 떨어진다면?’

흑의인을 베는 도둑 형제들의 마음이 이서휘 때문에 서늘해지고 있었다. 도둑 형제는 보면 볼수록 이서휘의 정체가 궁금했다. 젊고 강한 것이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친근하면서도 경외심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십존과 싸울 거라더니…… 정말인가?’

도삼은 이서휘와 함께 지낼수록 묘한 긴장감과 기대를 가지게 됐다. 이서휘와 함께라면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을 듯한 기대감이 들었다.

반면에 도이는 호승심이 강해 이서휘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괜한 분풀이를 적들에게 해댔다.

‘흥! 더럽게 강하네.’

냉혈공자 도이의 쌍필이 현란하게 움직이면서 적들을 찍어대며 지나갔다.

푹푹푹푹!

강자의 무위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견식이 넓어진다. 도삼과 도이 역시 예전보다 무공과 실전의 수준이 높아진 상태였다. 하나, 당사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삼과 도이는 그저 오늘따라 적들이 시원하게 잘 쓰러지는구나, 하고 철선과 쌍필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비명과 절규, 욕설과 고함이 한참 지나서야 후회와 애원하는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살려…….”

채 말을 내뱉지 못한 흑의인의 목에서 피가 솟았다.

“후퇴…….”

후퇴하자, 고 말하려던 흑의인의 머리통이 도삼의 철선에 맞아 으깨졌다. 아무 말없이 몸을 내빼려던 자의 허리가 뚝 끊어지면서 검우 정천의 적룡검이 피를 털어냈다.

검우 정천의 시선이 종종 이서휘에게 향하고 있었다.

‘스스로 검제라 소개하더니 기가 찰 정도의 실력이군.’

정천이 지금까지 봤던 젊은 고수 중 가장 압도적인 무위를 펼치고 있었다. 정천은 이 살육전이 끝나면 어떻게든 이서휘와 겨뤄봐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묵묵히 흑의인들을 베어 넘겼다.

☆ ☆ ☆

네 사람은 흑의인들을 전멸시켰다.

말 그대로 도륙이었다.

검우 정천은 단 시간에 이렇게 많은 적들을 베어 넘긴 적은 없었는지 정신적으로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서휘가 정천의 마음을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마음에 담으실 것 없습니다. 살려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들입니다.”

검우 정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가 물끄러미 전장을 둘러 봤다.

‘설부루를 거점으로 한 분타쯤 되는 곳인가?’

이서휘는 자강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납검했다.

이미 설부루에 들어가기 전에 검우 정천이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던 이서휘다. 정천이 자신의 무공을 숨기고 흑의인들을 베는 건 아닐까, 혹시 간자가 아닐까,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이서휘였으나 정천이 자신의 무공으로 흑의인들을 베어 넘기는 것을 보고 의심을 지운 상태였다.

대신에 이서휘는 다른 의미로 정천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긴장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월야대로 영입하면 도둑 형제 이상의 역할을 해낼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침 검우 정천의 얼굴에도 이서휘를 향한 감탄의 빛이 서려 있었다. 네 명 중 가장 많은 수의 흑의인을 처리한 이서휘다.

정천이 말했다.

“이 자들보다 그대들의 정체가 더 궁금하구려.”

이서휘, 도이, 도삼이 서로를 바라봤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소개할 말이 궁색하다. 굳이 말하면 복숭아로 엮인 사이랄까? 어쨌든 지금은 그저 냉혈공자 냉혼, 십삼초승천 초류황, 검제였다.

이서휘가 제안했다.

“오래 있을 곳이 아닙니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 합시다.”

네 사람은 군림맹 근처의 검풍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서휘가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월야대주라는 신분은 참 마음에 드는군.’

본래대로라면 맹으로 복귀를 해야 했으나, 월야대주라는 신분 덕에 이서휘는 마음 편하게 세 사람과 함께 검풍객잔으로 갔다.

이미 날을 꼬박 샌 다음 날 아침이다.

잠깐 눈을 붙인 네 사람은 정오가 돼서야 어슬렁어슬렁 밥을 먹으러 나왔다.

이서휘는 두 형제와 검우 정천의 입이 떡 벌어질만한 대접을 했다. 검풍객잔에서 가장 좋은 음식과 술로 어젯밤의 노고를 풀어줬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문득 이서휘와 도삼과 눈이 마주 쳤다. 도삼과 이서휘가 지난날 밥값 사건을 생각하며 동시에 피식 웃자, 도이가 뾰족한 것으로 이를 쑤시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웃소?”

이서휘가 도이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둘 다 고생 많았네. 가서 잘 쉬게나.”

여전히 검제가 초류황과 냉혈공자 냉혼에게 건네는 말투였다. 도삼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중얼거렸다.

“본좌는 좀 쉬었다가 오후에 은야나 보고 와야겠소.”

은야의 정체를 알아보러 간다는 뜻이리라. 옆에 있던 도이가 중얼거렸다.

“흥, 난 아무 것도 안 할 생각이오만?”

이서휘가 웃으며 경고했다.

“후후, 둘 다 군림맹 털 생각은 그만 하고 쉬시게.”

“흐흥.”

도이가 뜻 모를 콧소리를 내며 일어서자, 도삼은 이서휘와 검우 정천을 바라보며 묘한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자, 우리는 가보겠소. 두 분은 뜨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오.”

“뭐?”

이서휘가 대꾸하자 도삼이 킬킬 웃으며 나갔다. 아무래도 도삼은 두 사람이 맞붙어 자웅을 겨룰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 ☆ ☆

이서휘가 정천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명성을 숨기긴 어려웠을 터.’

겨우 서른 초반의 나이에 군림맹에 도전하겠다고 나선 자다. 허영심과 자부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이서휘는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내가 사부님에게 수련을 받고 있을 무렵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서휘가 덤덤한 말투로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검우 형, 이 아우는 군림맹의 이서휘라 합니다.”

“군림맹?”

검우 정천이 놀란 얼굴로 변했다.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정천이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알았기 때문에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검대 부대주입니다.”

“흐으…….”

놀람의 연속이다. 검우 정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대주라면 위에 검대 대주가 있을 것이고 그 위에도 고수가 잔뜩 있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부대주가 강한 것이 아니라 이서휘가 강한 것이다.

이서휘는 정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슬며시 터져 나오는 미소를 참아내며 진중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차피 군림맹에 도전하려는 정천이다.

비무는 비무대로 하되, 이서휘는 정천을 월야대로 끌어들일 계책을 생각했다. 검우 정천을 월야대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서휘의 화술과 실력에 달려 있었다. 어쩌면 정천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사건이다.

만약 이대로 정천이 이서휘와 인연이 맺어 지지 않는다면, 정천은 과거처럼 홀로 무림을 전전하다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마도 세력에게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이서휘는 인재에 대한 욕심으로 정천의 운명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천의 질문이 이어졌다.

“어찌 그대와 같은 사람이 부대주란 말이오? 실례지만 위로 몇 명이나 있소?”

이서휘가 말했다.

“제 위로 꽤 있지요.”

그러자 검우 정천이 이서휘가 놀랄 만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날카롭게 추측했다.

“아니요. 그럴 리 없소. 그대가 검대 대주들보다 약하단 말이오? 아마 백도맹처럼 특작조를 이끄는 사람일 것 같소만. 어떻소?”

이서휘는 속이 뜨끔했다.

‘허, 이 사람 참…….’

이서휘가 말을 슬쩍 돌렸다.

“그나저나 검우 형께선 아직도 맹주님께 도전할 생각입니까?”

검우 정천이 대꾸했다.

“흠. 부대주가 이 정도라면 솔직히……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군. 나와 한 번 겨루지 않겠소?”

“하하.”

이서휘가 웃자, 정천이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 아니오. 난 항상 틀어박혀 수련이나 하는 자들을 높게 보지 않았소. 무공의 경지는 직접 겨루면서 성장하는 것이라 믿고 있소. 아직 내가 가문의 무공을 완성하진 않았으나 직접 부딪칠 때라 생각하여 강호에 나선 것이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직접 겨루면서 익히는 게 적지 않지요.”

이서휘 역시 정천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정천과 비무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확고했으나 이서휘는 짐짓 거절의 뜻을 계속 내비쳤다.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형과 비무를 하겠습니까? 군림맹에도 고수가 많습니다. 검대 대주나 수호전, 운룡회의 고수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검우 정천은 이서휘가 군림맹의 고수와 비무를 주선하겠다고 하는데도 시큰둥했다. 이미 이서휘의 무공 수위가 궁금해진 마당에 누구와 겨룬단 말인가. 이서휘도 꺾지 못할 실력으로 군림맹의 고수와 겨뤘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일.

정천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겨룹시다.”

그 말에 이서휘가 진중한 기색으로 슬슬 본론을 꺼냈다.

“어찌 둘이 겨뤄 쓸데없이 힘을 소모한단 말입니까? 보셨다시피 마도의 무리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검우 형과 저는 백도를 추구하고자 검을 익힌 자들이 아닙니까?”

이게 대체 승낙을 하겠다는 말인가, 안 하겠다는 말인가. 정천이 답답한 마음에 드디어 조건을 내걸었다.

“그걸 왜 모르겠소? 이렇게 합시다. 승패와 무관하게 비무를 해준다면 내가 아우의 부탁이 무엇이든 하나는 반드시 들어주겠소.”

“그렇습니까?”

이서휘가 덜컥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꾸했다. 순간 이서휘가 기백을 내뿜었다. 심리전과 무공을 교묘하게 섞은 이서휘다.

“비무에서 패배하면 앞으로 저와 함께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는 형께서 예상하셨듯이 특작조의 임무도 수행해야 하는 맹원입니다.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검우 정천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비무를 해주면 부탁을 들어준다 했더니, 날 꺾겠다고? 하하하. 내가 지면 앞으로 아우와 함께 하겠소. 대신에 아우가 지면 군림맹은 차례차례 내 검과 우열을 가려야 할 것이오.”

이서휘가 정천의 눈을 보며 말했다.

“후후, 쉽지 않을 겁니다. 가시죠.”

“어디로?”

“군림맹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그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군림맹의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군림맹의 정문에 도착하자, 경계를 서던 자들이 막아섰다. 그러자 이서휘가 말도 없이 인피면구를 벗어 버렸다. 그러자 경계를 서던 자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서휘를 막아서던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정천에게 말했다.

“자, 군림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천은 예상 외로 드넓은 군림맹의 전경을 바라보다, 기죽지 않겠다는 듯이 어깨를 활짝 펴고 이서휘를 따라 나섰다.

이서휘는 정천을 데리고 질풍검대 연무장으로 향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쉽지 않은 비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서휘가 가진 모든 것을 발휘해서 상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경험에서 축적된 변칙 공격, 모습을 감추는 암행술, 흑비도와 유엽비도를 사용한 기습 등은 되도록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로지 손에 쥔 검 한 자루로 정천과 겨룬다.’

가능하면 검의 기예로만 꺾을 생각이었다.

또 한 가지.

이서휘는 천양뇌단을 섭취해 대주천을 마치고 내공이 증가한 상태다. 고수와 겨뤄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한계점이 어디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즉, 정천과의 이번 비무 또한 수련의 연장선이었다.

패배나 승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서휘는 지금 지닌 실력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했기 때문.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질풍검대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장시우 대주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서휘가 다가오자, 마침 오와 열을 맞춰 쉬고 있던 질풍검대 대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서휘가 대원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질풍검대.”

“네, 부대주님!”

“안녕하십니까, 부대주님!”

이서휘가 정천을 소개하며 말을 이었다.

“군림맹 입맹을 고려 중이신 검우 정천이라는 선배님이시다.”

이서휘는 졸지에 정천을 군림맹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자로 만들었다. 정천이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서휘를 이기면 될 일이었기 때문.

이서휘의 소개에 질풍검대 대원들이 동시에 두 손을 맞잡고 우렁차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검우 정천이 두 손을 맞잡아 좌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천이라 하오.”

이서휘가 깜박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검우 형, 혹시 공개 비무도 괜찮으십니까? 원치 않으시면 조용한 곳도 맹 내에 많습니다.”

그러자 정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 이리로 오신 게 아니오? 부족하나마 여기서 못난 실력을 보여드릴 터이니, 너무 엉성하다 웃지나 마시오, 질풍검대 여러분.”

정천의 겸양에 대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아닙니다.” 혹은 “견식을 넓혀주십시오!” 등의 말을 건넸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천과 대원들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질풍검대는 비무를 볼 수 있도록 넓게 퍼져라.”

그러자 강기찬과 설주연이 연무장의 끝으로 달려가고, 나머지 대원들이 그 사이에 넉넉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서휘는 질풍검대 대원들의 얼굴을 천천히 한 명씩 바라봤다. 정천이 있어 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서휘가 눈빛으로 대원들에게 전했다.

[잘 봐야 한다.]

이서휘는 새삼 대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렸다. 연습을 게을리 하는 놈들은 때려서라도 연습을 시키고 싶었다. 모든 걸 다 떠나서 강해지라고 하고 싶었다. 이서휘가 홀로 아무리 강해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시시각각 마도 세력이 일어날 시간이 다가온다. 이 녀석들 모두 제 한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이서휘가 등에 매달았던 유엽비도를 먼저 꺼내고, 이어서 품에 몇 개 남아있던 흑비도까지 꺼내 강기찬에게 건넸다.

“가지고 있어.”

“네, 부대주님!”

이서휘가 강기찬을 보며 씨익 웃은 다음 자강검만을 쥐고 연무장의 중앙으로 나섰다.

중앙에는 이미 적룡검을 허리에 찬 정천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질풍검대 대원들의 시선이 모두 이서휘의 등에 꽂혔다. 이서휘는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대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정천에게 말했다.

“검우 형, 잘 부탁드립니다.”

“시작하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선공하겠습니다. 뽑으십시오.”

“알겠네.”

정천이 진지한 기색으로 자신의 검을 뽑았다.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갑니다.”

이어서 이서휘가 발검을 하면서 질풍같이 달려 들었다.

깡! 챙챙챙!

이서휘는 암연심검을 되도록 늦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암연심검 위주로 싸우면 아직 수준이 낮은 대원들이 보고 배울 게 별로 없었기 때문.

적당한 속도로 십여 초를 주고받은 두 사람.

두 사람은 검을 교환하면서 굉장히 많은 말을 주고받은 느낌이었다.

‘검우 형, 몸부터 좀 풉시다.’

‘검의 기예를 먼저 겨뤄 봅시다.’

‘부상을 입지 않도록 서로 신경 쓰도록 합시다.’

검우 정천 역시 이서휘의 뜻을 검을 통해 모조리 이해했다. 이어서 또 다시 십여 초가 지나갔다.

챙챙챙! 깡!

마지막에 울린 깡!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잠시 거리를 벌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각자 몸을 약간 풀었다.

정천이 양쪽 어깨를 돌렸고, 이서휘가 양 팔을 벌려서 크게 기지개를 펴며 숨을 훅 내쉬었다.

이번엔 정천이 입을 열었다.

“준비됐네.”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우 형, 가 봅시다.”

“좋아.”

설레는 긴장감에 정천이 미소를 짓다가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는 현격하게 다른 속도와 힘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달려와 내지른 정천의 검을 이서휘가 튕겨냈다.

까앙!

그 속도에 구경하고 있던 질풍검대 대원들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 ☆ ☆

정천의 굵은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균형 잡힌 체격에서 뿜어 나오는 기도가 연무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제야 대원들은 이서휘 부대주가 뜨내기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강자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좌우로 흔들며 정천의 검을 막아내다가 하단을 쓸었다. 휙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거리를 벌렸다.

정천이 속도만으로 모습을 감춘 다음에 이서휘의 전면에 나타났다.

“헉!”

대원들의 놀란 외침에 이어서 방어에 나선 이서휘의 검이 기묘할 정도로 빨라졌다.

챙챙챙챙챙챙!

정천이 퍼붓는 공격을 이서휘가 모조리 튕겨냈다. 두 사람의 등줄기에 짜릿한 감각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정천이 내공을 한껏 주입해 적룡검을 대각선으로 올려쳤다.

까앙!

이서휘가 침착하게 자강검으로 막았으나, 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밀려나갔다.

연무장의 공기는 정천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밀려났던 이서휘가 잠시 검을 내리고 다시 몸을 풀었다. 그 행동에 정천은 순간 대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허? 이거 작정하고 대원들을 교육할 셈이었구나.’

이서휘는 정천에게 기백에서 밀리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다음은? 뻔하다.

이서휘가 갑자기 검을 꽉 쥔 주먹을 돌리자 손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이어서 이서휘의 눈에 기백이 담기더니, 그 기백이 이어서 서서히 이서휘의 전신을 휘감았다.

연무장을 지배하고 있던 정천의 기도가 어느새 반쯤 물러난 분위기였다.

질풍검대 대원들이 저마다 각자 연무장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분위기를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이서휘가 기백이 담긴 눈으로 정천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검우 형, 조금 강한 공격이 나갈 겁니다.’

정천이 슬며시 웃었다.

‘오시게.’

이서휘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던 정천의 기도를 뚫어내며 돌진했다.

기백이란 이런 것이다, 로 표현할 수 있는 동작이다.

이서휘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강맹한 힘을 실어 정천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챙챙챙챙!

어느새 이서휘가 지배하는 연무장이 되었다. 이서휘는 정천에게 공격을 퍼붓다가 눈으로 빈틈을 찾자마자, 자강검을 내밀어 정천의 팔목을 찔렀다.

까앙!

정천이 강맹하게 튕겨내자 이서휘가 그 힘을 받아내어 제 자리에서 질풍처럼 회전하면서 추가 공격을 펼쳤다. 이번엔 정천의 옆구리다.

챙!

정천이 튕겨내자 자세를 다시 바로 잡은 이서휘가 일보를 전진하면서 검을 내질렀다. 이어서 정천의 반격에 맞춰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이서휘의 공격이 이어졌다.

챙챙챙챙챙!

이서휘는 다섯 번의 공격을 펼치면서 일 보씩 전진하며 압박했다. 이렇게 이서휘가 선수를 잡고 압박하면, 어느 순간 정천이 호흡을 고르거나 전황을 바꾸기 위한 행동을 펼칠 것이다. 이서휘는 그것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정천이 이서휘의 검을 후려치면서 동시에 뒤로 훌쩍 물러났다.

‘기회!’

정천이 물러나는 순간에 이서휘는 제 자리를 콰앙! 하고 구르면서 질풍지로를 시전했다. 대원들이 허구한 날 연습하는 바로 그 초식이다. 제 딴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바로 그 초식이 이서휘의 몸에서 펼쳐졌다.

‘너희들의 질풍지로도 이런 수준이 되어야 한다.’

이서휘의 말이 대원들의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서휘의 몸이 왼발 구르기 한 번에 벼락 같이 뻗어 나갔다. 자강검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 정천의 목을 향했다.

까앙! 소리를 내면서 정천이 이서휘의 검을 쳐냈다. 하지만 정천은 선수를 다시 빼앗겼고, 또 다시 고생길이 열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연한 절차처럼 이서휘의 맹공이 펼쳐졌다.

챙챙챙챙챙!

이서휘가 공격을 퍼붓고 있을 때 정천이 이서휘의 빈틈을 발견하고 허리를 깊숙이 찔러 왔다.

이서휘가 정천의 검을 피하면서 춤을 추듯 발을 옮겨 정천의 옆으로 돌아가 팔꿈치를 내질렀다.

내공이 잔뜩 실린 공격이다. 그대로 몸에 맞으면 뼈가 부러질 터였다. 정천이 급히 왼팔에 내공을 실어 이서휘의 팔꿈치를 막아냈다.

퍽!

정천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정천은 그 힘을 이용해 땅을 구르고 일어나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휙!

그 뒤로 이서휘가 검을 앞세워 귀신처럼 지나갔다. 끝이 아니다. 이서휘가 뒤를 바라보지도 않고 솟구치면서 공중에서 몸을 돌려 정천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서휘는 솟구치는 힘이 검에 더해졌고, 정천은 피하는 와중이라 동작이 궁색했다.

챙챙챙! 까앙!

이서휘가 내밀은 검을 후려치던 정천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천의 모든 실력은 아닐 터. 떨어지는 순간에 몸을 뒤집은 정천이 절묘하게 내려서서 이서휘의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챙챙챙챙챙챙!

이서휘의 공격을 막아내며 정천이 이를 악 물었다.

‘이거 오늘 위험하겠는데…… 둘 다.’

정천이 적룡검에 내공을 잔뜩 주입해 이서휘의 자강검을 후려쳤다.

까앙 하고 이서휘의 발끝이 츠츠츠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 나가자, 정천은 본능적으로 적룡검을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그어 버렸다.

쐐애애앵!

“헉!”

대원들의 입이 벌어지고…….

정천의 검에서 튀어나간 검기가 이서휘를 덮쳤다. 멀지 않은 거리다. 피해야 하리라.

그때였다.

이서휘는 정천의 동작과 기도를 읽자마자 자강검으로 원을 그렸다.

위잉!

퍼어어어엉!

이서휘가 만들어낸 검막이 정천의 검기를 흔적도 없이 튕겨내버렸다.

“…….”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아니, 정확하게는 대다수의 질풍검대 대원들이 헉 소리를 내뱉었던 그 입을 그대로 벌리고 있었다.

정천이야말로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허허허…….”

이서휘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서 있었다.

정천이 힐끗 대원들의 표정을 살피자, 마치 자신이 한창 검에 미쳐 수련할 때의 표정들이다. 그제야 정천은 이 자리에서 검을 가르치는 것은 이서휘 뿐만이 아니란 걸 깨닫고 있었다.

‘오늘은 나도 이 자들의 스승이로구나.’

정천이 기가 찬다는 듯이 웃으며 이서휘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조금 더 제대로 해도 될 거 같군.”

이서휘가 대꾸했다.

“그럴까요?”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내공을 끌어 올렸다. 정천은 검의 기예로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서휘는 생각이 달랐다.

‘질풍검대, 차근차근 보여주마……. 잘 봐라.’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비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는 것처럼 어슬렁거리자, 정천이 거슬린다는 듯 쐐애애앵! 하면서 검기를 내뱉고 튀어 나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검기가 튀어나가면서 정천의 모습이 사라졌다.

검기를 내보내고 솟구친 것.

이서휘의 전방에서 검기가 날아오고, 공중에서 정천이 날아왔다. 피하면 선수를 내주는 꼴이다. 수준이 비슷해도 피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서휘가 특별한 동작 없이 제자리에서 훌쩍 솟았다.

‘걸렸다!’

정천이 쾌재를 부르면서 적룡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이서휘가 순식간에 검막을 펼치면서, 절묘한 순간에 다가온 적룡검의 기세를 상쇄시키고 자신의 검을 찔러 넣었다. 정천이 난생 처음 보는 반격이다. 정천의 적룡검이 검막과 자강검에 차례로 부딪쳐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어서 두 사람이 땅에 내려서면서 불꽃을 튀기며 검을 부딪쳤다.

소름이 끼치는 느낌…….

정천 뿐만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서휘의 공격이 다시 펼쳐졌다.

정천은 이서휘의 내공이 자신을 압도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서휘와 검을 섞을수록 믿을 수 없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 초식에 얽매이지 않는 느낌이 드는군.’

정천이 불끈 쥔 검에서 적룡파천(赤龍破天)이 벼락 같이 쏟아지고, 이서휘가 정천의 기도를 읽자마자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두 개의 검기가 호쾌하게 날아가 충돌하자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질풍검대 대원들의 눈에서 사라졌다가 공중에서 맞붙었다.

콰아아아앙!

어떻게 된 노릇인지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이 연무장의 끝과 끝으로 나뉘어 날아갔다.

정천이 공중에서 대여섯 번을 회전하면서 땅에 내려서고, 이서휘가 몸을 비스듬히 눕혀 내려서다가 단 한 번 자세를 비틀어 가볍게 착지했다.

반면에 잘 내려섰다 싶었던 정천은 착지자세가 살짝 흐트러지면서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온갖 의미가 담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허…….”

정천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천이 이서휘를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나이에 어떻게...'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이다. 비무에서 진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은 이미 패배감에 젖어 들고 있었다.

이서휘가 바로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때문에 정천은 방금 전에 일어났던 격돌을 떠올렸다.

적룡파천(赤龍破天)이란 강맹한 검기를 내뱉고 공중으로 솟구쳤던 정천이다. 하지만 자신의 검기는 이서휘의 검기에 상쇄되었고, 어느새 뛰어 오른 이서휘가 내공을 실어 정천을 후려쳤다.

그 뿐이다. 정천은 땅에 처박히지 않기 위해서 공중회전을 하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가 무너졌다.

하지만 이서휘는 무척 여유롭게 내려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씁쓸하구만.'

이서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정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비무가 이서휘의 승리로 끝난 느낌이랄까?

정천은 기분이 묘해지면서 손자병법의 말을 떠올렸다.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 선지선자야(善之善者也)라 했던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더니......'

비무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이서휘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승부의 방점을 찍어 버렸다.

납득하느냐, 아니냐는 정천에게 달려 있었다. 정천이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말했다.

"하아...... 곤란하군. 내가 졌네만 뭔가 아쉽군. 더 할 수는 없겠나?"

생사비무가 아니다. 각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초식도 백중세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이서휘가 조금 더 높은 내공과 검의 기예를 지니고 있었다.

정천의 생각이 그랬다.

아직은 아쉽다고.

반면에 이서휘는 가진 것을 모두 펼치지 않은 상태다. 이미 유엽비도와 흑비도 등의 실전 무기와 암행술 등의 폭넓은 무공도 사용하지 않은 결과가 이랬다.

정천이 이 비무의 결과를 이해하길 바랐다.

이서휘는 누군가 다칠까 두려웠지만 정천의 표정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정천이 패배를 인정하고 이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서휘는 회귀 후에 단 한 번도 펼치지 못했던 암천세(暗天勢)를 준비했다.

완벽하게 펼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암천세는 한계가 정해진 비기가 아니었으니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좋다,는 마음으로 이서휘가 다시 검을 쥐었다.

* * *

정천과 이서휘가 다시 맞붙었다. 태풍 전의 고요함이 흐르는 것처럼, 조금 전의 격렬한 공방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이서휘는 즉각 정천의 의도를 이해했다.

'검우 형도 비장의 한 수가 있나 보군.'

이서휘는 정천이 비기를 사용할 때 맞받아칠 생각이었다. 내공이 뒷받침되는 암천세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내공이 충분한 상태라면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검제 시절의 이서휘가 펼칠 경우 그 어떤 동작에서도 암천세를 쏟아낼 수 있었다.

이서휘의 의지에 따라 검아일체(儉我一體)가 되는 순간, 체내의 내공이 검기로 전환되어 쏟아지는 것이 암천세였다.

이서휘는 조마조마했다. 암천세가 실패하면 이서휘가 부상을 입을 터.

챙챙챙챙!

살얼음판을 걷는 눈치전이 오고 갔다. 서로의 비기가 무엇일지 예상하는 머리 싸움도 이어졌다.

이서휘가 철벽 방어를 펼치자, 정천이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이서휘가 기회를 줘서 더 겨루게 된 것이 아닌가?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지켜보는 자들에게, 자신도 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정천의 허영심도 섞여 있었다.

드디어 정천이 공격에 나섰다.

자세를 낮게 잡은 정천이 이서휘에게 불쑥 파고 들어 적룡검을 올려쳤다.

깡!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정천의 검을 누르면서 실로 위험한 근접전이 벌어졌다.

챙챙챙챙! 까앙! 까앙!

정천은 물러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내공을 가득 실은 공방전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백중지세(伯仲之勢).

지켜보던 질풍검대 대원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잘 못 되면 누구 한 명 크게 다칠 거 같은데?'

이서휘와 정천도 마찬가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맞붙는 검에 불꽃이 튀기고, 자강검과 적룡검의 강도 차이도 없어서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달아 펼쳐졌다.

이윽고 근접한 상태에서만 삼십여 초가 지났을 무렵에 정천의 기도가 확 변했다.

적룡검에서 검사(劍絲)가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마치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적룡검의 검신에서 날카로운 검사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검사를 확인하자마자 속이 철렁했다.

'위험하다.'

그때, 이서휘의 본능이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 남자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보유한 모든 절기를 뱉어내라고.

챙챙챙챙챙!

이서휘가 점점 뒤로 물러나다가, 정천이 그랬던 것처럼 내공을 가득 주입한 자강검으로 정천을 후려치고 뒤로 훌쩍 뛰었다.

다만 이서휘는 정천이 비기를 펼칠 것을 예상하고 곧장 암천세를 준비했다.

마침내, 정천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서휘가 뒤로 물러나자마자 적룡검에서 흘러나온 검사가 적룡검을 휘감았다. 정천의 턱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면서 마치 암연심검의 환을 내지르는 것처럼 일직선 상으로 적룡검을 내질렀다.

승부욕에 가득 찬 정천이 속으로 외쳤다.

'적룡출두(赤龍出頭)로다.'

쇄애애앵!

직선으로 내뻗은 검기 주변에 검사가 휘몰아치고 있다.

정천의 내공이 아직 완성된 경지가 아니라서, 용의 형상을 하고 있진 않았으나 그 기세만은 대단했다.

더군다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가 더해진 상태.

암연신검의 파로 대응하기엔 턱 없이 부족할 정도로 집약된 일직선 검기가 이서휘에게 몰아쳤다.

이서휘의 양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자강검을 어깨 뒤로 당겼다가 날아오는 검기를 향해 내밀었다.

십자형(十子形) 암천세다.

용의 형상을 띈 정천의 검기를 십자 형태로 분쇄한 암천세가 정천에게 쏟아졌다.

정천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적룡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콰아아앙!

지켜보던 질풍검대 대원들이 동시에 "헉!" 소리를 내뱉었다.

정천의 몸이 연무장 바깥으로 날아가고, 가진 내공에 비해 상위 무공을 쏟아낸 이서휘가 휘청거리다가 검 끝으로 땅을 찍은 후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행동이 묘하게 우스꽝스러웠으나 이서휘의 고집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정천은 자신이 펼친 적룡출두의 기세 덕분에 암천세를 맞고도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 가득 차오르는 패배감은 실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누운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 보던 정천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아... 빌어먹을... 그래. 너, 검제해라. 내가 인정한다."

중얼거리던 정천이 누운 자세 그대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정천이 졌네!"

지켜보고 있던 질풍검대 대원들의 요란한 환호성과 박수가 이서휘와 정천에게 떨어졌다.

"와아아아! 좋은 비무였습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두 분 모두 멋지셨습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천에게 다가갔다.

"검우 형, 많이 배웠습니다."

다가온 이서휘가 손을 내밀자, 정천이 숨을 크게 뱉어내며 이서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정천이 이서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정말...... 후우, 아닐세. 잠시 둘이서 이야기좀 하세."

"가시죠."

이서휘는 강기찬에게 유엽비도와 흑비도를 넘겨 받은 다음 이건영에게 질풍검대를 맡기고 정천과 잠시 군림맹을 거닐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검우 형, 솔직히 말해서 좀 위험했습니다."

"미안하네. 사과하지. 약속은 지키겠네. 앞으로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가 많이 남을 것 같아서 말이지."

내심 속으로 조금 열이 받아 있던 이서휘다.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검기를 날린 후에 공격을 퍼부었으면 손 쉽게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천이 미안한 기색으로 약속을 지킨다고 하니, 마음을 털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정천이 미안한 어조로 말을 능청스럽게 돌렸다.

"자네가 검대 대주들보다 약한가? 솔직하게 말해보게. 자네와 함께 하자는 제안은 이미 발아들일 마음이 있어. 하지만 대답 여부에 따라 검대 대주에게도 한번 더 도전해봐야겠네. 자네가 대주들보다 약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기때문이야."

이서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검대 대주들이라면 질풍검대 장시우 대주도 포함이 된다. 물론 지금 시점에선, 군림오검대의 대주들과 겨뤄도 이길 자신이 있는 이서휘다.

이서휘가 질풍검대 외곽 길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대답했다.

"검우 형."

"대답 잘 하게."

이서휘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저 역시 검대 대주의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특작조에 해당하는 월야대를 이끌고 있는 월야대주입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될까요?"

"허허, 자네 생각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군 그래. 묘하게 대답을 회피하고 있어."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검우 형,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목표는 꽤 높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검의 경지는 군림맹도 아니고 백동맹도 아니고 천하(天下)입니다. 아직 형과 제가 검을 익힐 시간은 무척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형과 제가 검을 함께 다듬으면 못 오를 만한 경지가 아닐겁니다. 천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될까요?"

이서휘의 패기 넘치는 대답에 정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하! 나야 말로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건만...... 나보다 어린 자네에게 이런 얘길 들을 줄이야! 좋아, 마음에 드네!"

"후후."

"그나저나 난 이제 자네 부하가 되는 건가?"

"제가 어찌 상급자가 되어 거드름을 피겠습니까?"

"후후, 그것 또한 교묘한 말이군. 월야대주라 하지 않았나? 함께 하면 내가 월야대가 되는 거 아닌가? 대주가 두 명일 리도 없고."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군림맹에 운룡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알고 있네. 세가 출신이 아닌 무림의 고수가 입맹할 때 주로 들어가는 곳이라지."

"네, 운룡회로 입맹하신 다음에 제 일을 도와주셔도 됩니다."

"뭐 그리 복잡한가? 그냥 월야대로 들어가겠네. 자네를 대주로 모시면 될 일."

이서휘는 정천의 표정을 살피다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리 하십시오, 그럼."

정천이 또 다시 이서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을 늘어 놓았다.

"흐흥, 월야대로 들어가면 다른 고수들과 비무 좀 해보겠네. 그것까지 막진 않겠지? 군림맹의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군. 너무 얌전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서휘가 기가 찬다는 듯이 고개를 젓다가 대꾸했다.

"하아, 정 그러시다면 제가 한 분 소개해드리죠. 입맹 절차와 월야대 문제도 처리해야 하니 겸사겸사해서요."

"오? 누군가? 기대해 보겠네."

이서휘는 정천을 데리고 천라각주 유백을 찾아갔다. 유백이 업무가 바빠서 당장 응해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서휘의 심정은 한 번 당해봐라, 라는 심정이었다.

* * *

천라각주 유백의 집무실.

이서휘의 소개로 정천과 유백이 마주하고 있었다. 유백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천라각주 유백이라 하네."

"정천이라 합니다."

"자네 사문이 어디인가?"

이서휘도 궁금한 사안이었으나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유백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천이 침울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아, 저는 홍안정가(紅安鄭家)라 불리는 검가(劍家)의......"

"정이량 협객과 무슨 관계인가?"

"아, 가주이셨던 백부(伯父)의 존함입니다."

유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유백은 정천을 보며 대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홍안정가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이서휘만 영문을 몰라 잠자코 있자, 유백이 정천과 비슷한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입맹 의사는 확실한가?"

정천이 이서휘를 보며 웃었다.

"네, 비무에서 지면 그리하기로 했습니다."

"비무를 했다고? 하하하."

유백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서휘를 바라봤다. 왜 정천을 데려온 것인지 그제야 이해를 한 유백이다.

"월야대에서 함께 활동할 자로구나. 홍안정가라니 실로 뜻 밖이다. 정이량 협객 이후에 대가 끊긴 줄 알았더니..... 잘 됐다. 혹시 운룡회나 그런 곳으로 넣어주길 바라나?"

유백이 살며시 운을 띄우자 정천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여기 이 대주와 함게 하겠습니다."

유백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 해준다면 좋고! 절차는 내가 처리하겠네."

"감사합니다. 한데, 이서휘 대주가 비무 주선도 해주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꼭 제가 하게 만드는군요."

"비무 주선? 누구랑?"

정천과 이서휘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앉아 있자, 유백이 말 뜻을 이해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이기면 천라각으로 와야 할 건데? 그럴 생각인가?"

"하하."

이서휘와 정천이 웃자, 유백이 선을 그어 버렸다.

"오늘은 바쁘고. 내일이나 모레쯤 기별을 할테니 연무장에서 딱 기다리고 있게. 홍안정가(紅安鄭家)라니 내가 더 궁금하군. 자, 나가서 일들 보게. 곧 수호전주님이 오실 거야."

이서휘와 정천이 일어나 예를 올렸다. 이서휘는 속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보면 볼수록 유백의 일 처리는 시원시원하다.

이서휘가 나가려는데 유백이 말을 덧붙였다.

"아, 곧 한 각주가 복귀한다던데 신나서 둘이 술 마시러 다니지 말고, 이 대주. 내 말 알아들었어?"

"아, 알겠습니다. 각주님."

"그리고, 이 대주."

"네."

"화지련 말이야."

"누구요?"

"화지련, 벌써 까먹었어?"

"아, 네. 화지련."

"수호전주님이 갑자기 화지련을 월야대로 보낼 수 없는지 물어보시던군. 완전히 군림맹에 눌러앉을 눈치야. 곤란하신가 보더군."

"화지련이요?"

"전주님의 말로는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면서.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일단 내가 거절할 생각이다."

"흐흐. 뭐 저는 크게 상관없습니다만 어찌 수호전주님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십니까?"

"전주님이 하라면 다 해야 하느냐? 어쨌든 화지련은 아직 약해서 안 돼."

"약해서요?"

유백이 눈을 빛냈다.

"약하고 말고! 어디가서 망신 당할 실력으로 월야대 일을 할 생각은 말아야지. 검대나 쌍각, 혹은 수호전에서 수련 좀 시킨 다음에 생각 해 볼테니까 그리 알고 있게. 정천, 자네도 기다리고 있어. 허접하면 검대원으로 보내 버릴 생각이니까."

유백의 말에 정천의 기세가 그제야 좀 수그러들었다. 이서휘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캬.....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주님."

이서휘는 유백의 일처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면서도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이서휘가 각주실을 나오며 정천에게 말했다.

"자, 이제 됐습니까?"

"후후, 기다려 봐야겠군."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온르은 일단 저랑 검풍객잔으로 갑시다."

"왜?"

"일 해야죠."

"무슨 놈의 일을 객잔에서 자꾸....."

그 말에 이서휘가 웃으며 무슨 말을 대꾸하려다 멈췄다.

두 명의 무인이 무슨 말을 나누다가 동시에 이서휘를 보자마자 시선을 피하고 말이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하지만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감이 있었다.

굳이 이서휘의 시선을 회피하고, 이서휘를 본 것만으로 살짝 경직된 것 같은 맹원들이라니.....?

복장이 제 멋대로인 것을 보니 운룡회의 무인들이었다.

마치 이서휘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서휘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랄까? 무인들이 지나가자 이서휘가 정천을 힐끗 보며 말했다.

"형님, 잠시만 검풍객잔에 먼저 가 계십쇼."

"왜?"

이서휘가 눈짓으로 방금 지나간 무인들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정천이 이서휘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서휘가 정천과 헤어지고 어슬렁어슬렁 운룡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느낌이 서늘하네?"

헛걸음일까? 아니면 운룡회의 간자일까? 이서휘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무인들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운룡회는 군림맹 서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이서휘는 운룡회의 무인을 멀리서 쫓다가 모퉁이를 돌아서 외곽 벽으로 이동해 암행술을 사용하여 두 사람과의 간격을 좁히면서 귀를 기울였다.

[청협문은 언제 온답니까?]

[오늘 밤에나 도착하려나.]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단우혁의 청협문이 온다고?’

먹구름이 짙게 깔린 날인데다가 해가 떨어지고 있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군림맹 외벽에는 군데군데 두 팔로 안기 힘든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이서휘가 암행술로 이동하면서도 몸을 숨기기엔 충분했다.

이서휘는 무인들이 청협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도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다. 이미 청협문이 온다는 사실은 도삼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

이서휘는 운룡회 무인들이 점차 멀어지자, 그대로 가게 두고 더 안쪽으로 이동해 운룡회의 연무장 뒤로 돌아갔다. 아직 중요한 단서가 나오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서휘는 연무장 뒤편에서 청각을 집중했다.

쫓고 있던 두 무인들은 운룡회 연무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거리가 꽤 멀어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서휘는 단서를 잡을 때까지 그곳에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다. 운룡회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걸음을 신중하게 옮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운룡회의 부회주인 사마예가 연무장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부회주님을 뵙습니다”

“부회주님, 오셨습니까?”

“다들 모여 보게.”

사마예의 말에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무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마예가 침통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전달 사항이 있네.”

사마예는 군사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마예가 운룡회의 후임 회주가 되지 않았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결정 났습니까?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우십니까.”

사마예가 말을 이었다.

“당분간 회주 자리는 공석이라 하더군.”

누군가 감정을 섞어 대꾸했다.

“네? 허허. 이거 완전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닙니까? 뻔히 부회주님이 계시는데 공석이라니요. 설마 다른 조직에서 뚝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섣불리 단정 짓기 말게. 말 그대로 이해하게. 당분간 공석이야.”

사마예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다른 말을 이었다.

“조만간 청협문이라는 문파가 방문한다고 하네. 문주를 비롯해 꽤 많은 수가 오는가 보더군.”

“청협문이요? 거기야 어디입니까? 뭐 이리 방문자들이 많아진 것인지.”

누군가 청협문을 아는지 말을 거들었다.

“거 왜 지난번에 홍사방(紅蛇幫)을 궤멸시켰다던 문파 말일세.”

“맞네, 거기가 청협문이었군. 언제 오는 겁니까?”

“조만간 오겠지. 우리는 나설 일 없을 것이네.”

듣고 있던 이서휘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뭐야? 청협문이 온다는 얘기를 지금 들은 눈치인데? 저 두 놈은 뭐지?’

이서휘가 쫓던 자들은 청협문이 오늘 밤쯤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식을 전달하는 사마예조차 시기는 명확하게 모르는 듯했다. 사마예의 무공 수준이 꽤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서휘는 암행술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곧 외곽 길을 돌아 빠져 나왔다.

사마예에게 전달이 됐으면 검대 대주들에게도 정보가 입수됐을 터. 이서휘는 질풍검대로 곧장 걸음을 옮겨 장시우 대주의 숙소로 들어갔다.

“형님, 계십니까?”

“들어와.”

문을 닫은 이서휘가 불쑥 물었다.

“형님, 뭐 전달 사항 없으십니까? 누가 방문한다던데요.”

“응? 아, 조만간에 청협문이 온다던데 그 쪽 문주가 군림맹 고수들과 좀 겨뤄보고 싶다고 한 모양이야. 분위기가 이런데 자꾸 비무를 하자는 자들이 늘어나는구나. 소문은 어찌 그리 빨리 퍼진 건지……. 한 각주님의 의견은 청협문의 소문주를 본 다음에 비슷한 또래가 나서서 비무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자는 의견이다. 나도 아까 들었는데 네가 어찌 아느냐?”

“청협문이 온다는 것이죠? 오늘 온다는 소리는 없었습니까?”

장시우는 이서휘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살피면서 되물었다.

“오늘?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어쨌든 청협문 소문주 또래라면 아무래도 네가 나서서 상대하는 것이 낫겠다……. 나이는 정확하게 모르겠다만.”

하지만 이서휘는 대꾸를 않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을 털어 놓았다.

“이상한데요? 운룡회 무인 두 명이 이미 사마예 회주가 청협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청협문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뭐야? 정말이냐?”

장시우는 즉각 이서휘의 말을 이해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시우는 이서휘가 어찌 운룡회 무인들의 말을 들었는지 의아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장시우가 장검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말했다.

“나가면서 이야기하자.”

“네.”

☆ ☆ ☆

군림맹으로 향하는 한 떼의 군마들과 무인들이 있었다. 그 선발대의 수는 대략 일백 명.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청협문(靑俠門)이라는 글자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또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후발대인 사백 명의 무인들이 전신을 흑의로 휘감은 복장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무척 대조적이었다. 군림맹 근처에 도착하기 전에 후발대는 산개했다가 다시 군림맹으로 모일 예정이었다.

청협문의 최선두에 두 필의 말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청협문을 아는 자라면 저 둘이 청협문주 단의황(段擬晄)과 소문주 단우혁(段祐赫)이라고 알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단의황과 단우혁의 나이만 대충 전해 듣고 급조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단의황으로 모습을 꾸민 거한의 중년인은 번뇌마가(煩惱魔家)의 또 다른 장로인 양일우(楊一旴). 그는 이번에 공을 세워 번뇌마존의 정식 후견인(後見人)이 될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양일우가 단우혁으로 꾸민 청년에게 말했다.

“군림맹까진 얼마쯤 남았습니까?”

“약 한 시진(2시간)이오.”

아비와 아들이 나누는 말투가 아니었다. 양일우 장로가 말했다.

“정문에 입성하면 후발대에게 객잔 거리를 초토화시키라고 이를까요?”

“신경 끄고 갑시다. 군림맹 본영만 노립니다. 설부루에서 잃었던 수의 딱 두 배, 아니지 세 배만 죽이고 물러납시다. 어차피 남궁위는 나타나지 못할 게 분명하니……. 실패하면 다른 십존들 볼 자신이 없소. 긴장합시다.”

지난날과 다른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청년의 목소리는 번뇌마존(煩惱魔尊),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다른 경쟁자들이 번뇌마존의 계획을 들었으면 평정심을 잃었다고 하며 비웃을 터였다.

마가에서도 반대가 심했으나 번뇌마존이 밀어 붙였다. 다행히 옆에 있는 양 장로가 지지하여 일이 성사됐다.

하지만 번뇌마존은 군림맹의 고수들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단 세 명이 들어가서 분탕질을 했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오히려 번뇌마존은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지난번의 분탕질은 스승격의 장로들인 주양위와 간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도, 번뇌마존은 자신과 양 장로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차피 군림맹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인 맹주 남궁위는 주양위(朱亮威)의 강맹한 장력을 고스란히 맞아 당분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테니까.

그뿐이 아니다.

운룡회에 심어 놓은 간자들이 때에 맞춰 내부에서 호응하면서 일부는 군림맹 곳곳에 불을 지를 것이다. 그 혼란을 틈 타 번뇌마존은 최대한 많은 수의 무인들을 죽이고 물러날 셈이었다. 승패가 나뉘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이것은 자존심 문제였다.

좌사자에 오를 주양위는 남궁위에게 죽었고, 번뇌마존이 수하로 부리던 설부루의 무인들도 누군가에게 전멸당했다. 바로 이서휘가 죽인 적포 사내였다.

심지어 자신이 후계자로 낙점 받았을 때 우사자에 오를 간천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춘 상태다.

다른 십존들이 비웃는 소리가 매일매일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흘러가면 번뇌마존은 일찌감치 후계자 전쟁에서 도태될 위험이 컸다. 도태되면 언제가 됐든 간에 훗날에 전권을 거머쥔 후계자에게 죽을 터. 강자존 약자멸의 세계다. 번뇌마존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계략과 힘을 이용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잡길 바라고 있었다.

때문에 청협문이 군림맹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자마자 번뇌마존은 끌어 모을 수 있는 자신의 수하들과 양 장로의 수하들을 청협문으로 변장시킨 다음 청협문보다 군림맹에 먼저 도착해 분탕질을 할 생각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쟁자였으나 종종 의견을 나누고 있는 마교십존(魔敎十尊)의 일원인 괴패마존(乖悖魔尊)이 번뇌마존의 계획에 호응할 예정이었다.

마교십존 괴패마존(乖悖魔尊).

잔인한 성정을 가진데다가 살육을 좋아하는 자. 괴패, 도리에 어긋나고 거스른다는 뜻이나 괴패마존은 자신의 이름 이상의 악명을 마가에서 떨친 자다. 청협문을 궤멸시킬 수 있다는 제안을 거부하진 못할 것이라 번뇌마존은 예상했다.

애초에 군림맹으로 향하고 있는 청협문의 규모를 살피고 포위 공격을 펼치면 되는 일이다.

번뇌마존은 마치 선심을 쓰는 것처럼 제안했다.

자신은 청협문으로 위장해 군림맹을 칠 테니, 괴패마존은 군림맹으로 위장해 청협문을 마중 나온 것처럼 하여 기습을 하라는 제안. 어차피 청협문의 모든 무인이 방문하는 것은 아닐 터. 괴패마존으로서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또 다른 마교십존인 괴패마존의 수락을 얻고 나서야 움직인 번뇌마존이다.

번뇌마존이 정예를 이끌고 들어가서 군림맹을 분탕친 다음에는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백 명의 수하들이 합세해 퇴로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그 사백 명도 적절하게 길목에 매복시켜, 추격해오는 일단의 무리를 향해 다시 한 번 역습을 가할 생각이었다.

군림맹을 초토화시킬 수는 없는 숫자였으나, 이 정도 계획이라면 충분히 군림맹의 위명을 바닥까지 추락시킬 수 있으리라 번뇌마존은 예상했다.

때문에 군림맹으로 향하는 번뇌마존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이서휘와 의견을 나눈 장시우가 급히 천라각으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천라각주는 가장 먼저 척후를 내보내는 것으로 즉각 대응했다.

천라각에서 수호전으로 의견이 전달되고, 동시에 천라각주 유백이 군림오검대 대주를 소집했다.

복귀한 천뢰각주 한신은 군림맹에 머무르고 있는 수호세가 가주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이후에 쌍각의 각주들이 짧은 회의를 마치고 수장들을 데리고 수호전으로 이동했다. 그 조용한 발걸음이 마치 태풍 전의 고요함 같았다. 근신 중인 군사회주 제갈현성을 제외하고 천뢰각 한신, 천라각 유백, 군림오검대 대주, 그리고 최초로 사태를 보고하고 의문을 제시한 이서휘가 수호전을 찾아갔다.

그때 수호전의 문이 열리면서 남궁익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호팔검은 맹주님이 계신 곳을 보호하겠다. 질풍검대 장시우는 운룡회를 포위, 감시해라. 이서휘는 간자부터 찾아내고.”

그 서슬퍼런 명령에 장시우와 이서휘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수호전 바깥에서 마치 마실을 나온 듯한 중년의 무인 한 명이 어슬렁어슬렁 수호전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남궁익현이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남궁익현이 존댓말을 건네자, 사람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독고세가의 가주 독고성(獨孤成)이었다.

“내가 가장 빠른 건가? 다른 가주들은?”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대다수의 검대 대주들이 예를 차렸으나 쌍각의 각주는 뻣뻣하게 독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독고성이 신경을 쓰지 않고 말했다.

“세가 무인들 지휘는 아들에게 맡겼네.”

이어서 모용가주와 백리가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자들을 제지하고 말했다.

“세세한 지휘는 쌍각의 각주와 검대 대주들이 하시게. 모용, 백리 가주님들은 수호전에서 대기하십시오. 독고 가주님은 뭐 알아서 하실 거라 믿겠습니다. 각 조직에서 연락책을 빼어 수호전과 연락을 취하게……. 누가 오는 것인지,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정리하겠소.”

남궁익현이 좌우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섬멸(殲滅).”

그 말에 독고성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섬멸, 좋군. 한데, 맹주는 아직인가?”

남궁익현이 대꾸를 않고 고개를 젓자, 독고성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빈정거렸다.

“그러게 뭔 비무를 그딴 비공개로 해서……. 끌끌!”

한신과 유백의 눈썹이 동시에 치켜 올라가서 독고성을 바라보자, 남궁익현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들 물러나서 자리 잡고 있게. 군림오검대는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라. 쌍각이 판단해서 바깥으로 빼낼 검대는 미리 군림맹 외곽으로 돌리게. 나가들 보게.”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남궁익현이 아무 말 없이 나가는 이서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이서휘의 제보라니 정말 공교롭구만. 이서휘보다 맹주님의 혜안이 더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날이 어두워졌다.

장시우의 지휘로 질풍검대가 느닷없이 운룡회를 포위해 밖으로 빠지는 자가 없도록 감시했다.

독고성은 마실을 나가는 것처럼 군림맹 바깥으로 세가의 무인들과 나가버렸다. 그 행동을 아무도 제지할 사람이 없었다. 모용세가와 백리세가는 수호전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펼치고 있었고, 질풍검대를 제외한 군림사검대는 흩어져서 외곽 벽을 중심으로 잠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군림맹이 손님을 기다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