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13화 (13/43)

<7장. 인피면구>

이서휘는 회귀한 후 처음으로 천양뇌단(天壤雷丹)과 월단화, 그리고 자신의 암연심법으로 대주천을 성공하고 숙소에서 나왔다.

남궁익현이 놀라며 말했다.

“벌써 마쳤느냐?”

“네.”

남궁익현이 탄성을 자아내며 이서휘의 기도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서휘라는 젊은 청년을 천천히 살펴보며 마주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일전에는 그저 어느 날부터 열심히 수련에 몰두해 부대주 비무전에서 운 좋게 우승을 거머쥔 후기지수라 여겼을 뿐이다.

한데 보면 볼수록 묘하다.

검의 성취가 남다르다는 것은 이미 목격했다. 그런데 내공심법에 대한 조예도 뛰어난 것에 대해서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익현은 그제야 이서휘에 대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혹시 검선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았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미 이서휘 본인은 검선을 만나지 않았다고 밝힌 터. 남궁익현은 자신의 추측을 가슴에만 담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 대주, 그럼 잘 부탁 하네.”

이서휘가 정중히 예를 올리며 다시 감사를 표하자, 남궁익현은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며 질풍검대를 벗어났다.

‘고비를 넘긴 기분…….’

이서휘는 어둑해진 주변을 바라보다 조용히 군림맹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군림맹도 이서휘도 초석을 다진 기분이다. 이서휘는 검풍객잔으로 향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마대전을 일으킨 시점에는 천마의 기치 아래 힘을 모았던 마도다. 어쩌면 천마는 백도맹, 군림맹, 사패와 군웅들로 나뉜 백도 세력을 치는 것이 마도 세력을 일통하는 것보다 쉽지 않았을까? 하는 게 이서휘의 생각이었다.

☆ ☆ ☆

마도 세력이 결집해서 정마대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따로따로 움직인 백도다. 오히려 흑도맹과 마도의 결전이 더 화끈했을 정도.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흑도맹의 분전.

천마는 흑도맹원들의 시체를 밟고 나서야 내분으로 와해, 분열된 군림맹과 백도맹을, 이어서 맹에 가담하지 않은 채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사패와 군소방파를 몰아냈다.

하나, 몰아내기도 전에 이미 간자로 인해 뜻이 모이지 않던 세력들이 많았으니 대체 언제부터 마도가 무림일통을 준비했는지는 마교 교주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패는 애초에 맹에 가담하지 않은 독립 세력이다. 이서휘도 군림맹을 벗어난 자였다.

검왕(劍王)이 이끄는 백검문(白劍門).

도왕(刀王)이 이끄는 청협문(靑俠門).

극제(戟帝)가 이끄는 벽천회(疈天會).

그리고 검선과 교우하던 자들과 이서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낭인들이 연합해 만든 낭혼련(浪魂聯).

그뿐인가.

백도맹에 가입하지 않은 수많은 방파들도 쓰러졌을 것이다. 소림, 무당, 화산, 점창, 곤륜 등과 불편한 관계였거나 혹은 그들의 괄시로 백도맹과 거리를 뒀던 형산파, 오선파, 천산파, 북망파, 소검방 등의 방파와 일엽, 철장, 소호, 적화 등의 정사지간의 세력도 마찬가지.

와해하여 각자의 세력으로 돌아갔던 세가들의 말로처럼 차례차례 흩어졌다.

이들이 무림맹이라는 기치로 모두 모였다면 정마대전은 이서휘가 알고 있던 미래와 다르게 펼쳐졌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교 교주와 여전히 힘을 한 곳으로 모을 생각이 없는 백도 세력이 맞붙은 결과가 이서휘의 죽음이었을 터.

따지고 보면 마교 교주 한 명에 필적할 만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검성이라는 존재가 천수를 다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서휘는 그렇게 추측했다.

검성이 하늘로 올라간 이후에는 백도 세력에 마교 교주처럼 길게, 끈질기게, 넓게 전장을 바라보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도는 일존(一尊)으로 결집할 때까지, 아니 일존이 남을 때까지 그들만의 사해(四海)를 피로 적셨다. 그 와중에도 후계자의 기준을 교묘하게 저울질한 마교 교주가 있었다.

백도의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십존이 공을 세우길 바랐고.

마도의 누군가를 죽이고 싶으면 세력 싸움을 조장했으며.

세력을 와해하고 싶으면 간자를 먼저 보냈고.

뛰어난 적장은 계략을 써서 적절하게 제거했다.

마교 교주는……

끊임없이 혼돈의 전장에 자신의 후계자들을 내보내 훈련을 시켰다.

살아남은 자에게 권좌를 내주리라.

마교 교주의 이름으로 무림일통이란 선물을 내리리라.

하니, 너희는 먼저 마도를 일통하라.

자신 있으면 내게 도전해도 된다.

하여, 그 시간이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걸려도 좋다.

마도일통이 곧 천하일통이 될 것이니…….

마교 교주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참으며 기다렸다.

모든 변수가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서휘가 검선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때쯤일까.

그 어느 시점에 무림의 별이 떨어졌을 것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채 백도 세력의 안녕을 바라던 자가 천수를 누리고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다.

마교 교주의 반대편에서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정마대전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던 존재가 사라졌음을…… 백도의 그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했으리라.

무림 역사 이래 유일하게 성자라 불린 자…….

이서휘가 회귀한 시점에도 이미 그의 나이가 구십 세에 이른 검성(劍聖)일 터였다.

그의 죽음은 이서휘의 이번 생애에도 예정된 일이다.

이서휘는 감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교 교주가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검성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구십 세의 노고수에게 무림을 지켜주길 바라는 생각은 실로 염치없는 일이었으니까.

때문에 이서휘는 자꾸만 처음으로 되돌아 가 군림맹부터 굳건하게 유지할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는 것도 중요했지만, 전장을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주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 ☆ ☆

오늘은 까먹지 않고 부대주로 모아두고 있던 돈을 두둑하게 챙겨 나온 이서휘다. 외상값도 갚아야 하고, 도삼과 도이에게 체면도 세워야 한다.

이서휘는 당분간 월야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굳이 누군가에게 떠들고 다니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검풍객잔.

이서휘가 아무리 객잔 안에 도착해 주변을 살펴봐도 도삼과 도이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세가의 공자와 낭인으로 보이는 놈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데, 누구지? 모용 놈들인가. 음?’

이서휘는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고, 일전에 거하게 밥을 먹었던 곳에 가서 밀린 외상값을 지불한 후 다시 검풍객잔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도삼과 도이가 나타나길 기다리느니, 혼쭐을 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이서휘가 대뜸 아까 봐뒀던 자들에게 다가가 무례하게 합석했다.

“같이 드시겠소?”

거만한 눈빛을 빛내며 덥지도 않건만 고고한 자세로 철선(鐵扇, 쇠부채)를 휘두르던 백포의 사내가 말했다.

“앉으시오.”

이서휘가 말이 없는 사내를 바라봤다. 입술부터 눈매까지 검흔이 길게 그어진 어두운 낯빛의 사내가 냉소를 날리며 손을 들어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뜻이리라.

백포의 사내가 부채를 펄럭이며 말했다.

“반갑소. 본좌는 육백 오십 팔년 전부터 내려온 신비문파 철선문(鐵扇門)의 제 삼십팔대 문주인 십삼초승천(十三招升天) 초류황이라 하오.”

이서휘가 침음성을 흘렸다.

“허어, 십삼초승천……!”

“후후, 사마외도의 무리를 하늘로 쫓아 버릴 때 십삼초를 넘기지 않는다 하여…… 과분하오.”

제 입으로 말해놓고 뭐가 과분하다는 것일까? 하여간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광을 빛냈다.

“십삼초 이내에 그대가 승천하지 않길 바라오.”

“허! 어디서 그런 망발을?”

그 찰나, 낯빛이 어두운 사내가 냉소를 머금고 있다가 이서휘의 말에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이 잠시간 커지는 것을 놓치지 않은 이서휘다.

이서휘가 날카롭게 바라보자 냉소를 날리던 사내가 서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흐흐흐, 노부는…… 아니, 본인은 크흠…… 잠시 두통이.”

사내는 두통이라고 해놓고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허망하게 놀라며 다시 이마를 붙잡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십삼초승천 초류황이 대신 소개했다.

“이분은 강호 출두 이래 패배한 적이 없는 절대쌍필(絶對雙筆) 냉혼이라 하오. 무림에는 냉혈공자로 더 알려져 있소만.”

“허어, 절대쌍필 냉혈공자셨구려……. 별호만 들어도 왠지 오금이 저린 느낌이오.”

냉혼이 포권을 취하며 대꾸했다.

“후후후, 과찬이오.”

“두 분은 어인 일로 발걸음을 하셨소? 아, 소생의 소개가 늦었구려.”

이서휘가 포권을 취하며 말을 이었다.

“불초 소생의 별호가 너무 과하다 생각마시오. 그저 벗들이 놀리느라 지어준 것이니…… 검제(劍帝) 궁휘라 하오.”

두 사람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초류황이 어쭙잖은 지식을 들먹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실로 무림사의 빈틈을 관통하는 별호요. 검왕은 대대로 저 고고한 백검문에서 배출했고 검선은 신선과도 같아 연이 닿아야 이을 수 있는 별호이며 검성은 너무나 위대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 남은 것은 검제뿐이구려.”

그러자 냉혼이 이죽거렸다.

“뭐 다 있어서 그냥 검제 한 거네, 아니 한 거구려.”

그때였다.

검풍객잔의 이 층에서 누군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세 사람의 대화를 맞받아쳤다.

“하! 십삼초승천과 절대쌍필, 그리고 검제가 만났으니 셋이서 군림맹이라도 무너뜨리려는 것이오? 그대들이 경청동지할 무위를 지녔다한들 고작 셋으로는 턱 없이 부족할 것인데…….”

그 말과 함께 이층에 있던 자가 신형을 날려 순식간에 탁자의 남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말했다.

“어떻소? 셋보다는 넷이 나을 터.”

이서휘는 속이 철렁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 맞춘 복장과 인피면구로 위장한 도삼, 도이와 농을 치는 와중이었다.

도삼이 십삼초승천 초류황.

도이가 냉혈공자 냉혼.

이서휘가 인피면구를 써서 곧 검제 궁휘가 될 터였다. 한데,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서휘가 뜨끔한 것은 불청객의 무위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도삼과 도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불청객의 무위를 눈치 챘을 터. 저 대단하신 도둑 형제들도 이서휘만 바라보면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로 잠자코 있었다.

이서휘가 불청객을 바라봤다.

‘누구지?’

나이는 고작 서른쯤 되었을까.

범상치 않은 기도와 눈빛, 과하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멋이 느껴지는 복장, 한 손에는 새빨간 검집에 검붉은 용이 검병에 전각된 검을 들고 있었다.

사패의 일원도 아닌데 고작 서른 초반의 나이로 어찌 이런 기도를 갖추고 있을까?

이서휘마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우리 셋의 소개는 들으셨을 테고 존함이 어찌 되시오?”

불청객은 무척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다 쓰러져 옛 영광을 잃은 이름없는 무가의 후계자요. 정천(鄭天)이라 합니다. 세 분처럼 거창한 별호는 아직 없지만 벗들이 가끔 검우(劍雨)라 부르고 있소.”

그의 입에서는 밝힐 수 있는 진실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중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이서휘가 하는 말은 대충 믿고 있으니 실로 엉뚱한 자였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검우 정천이시구료.”

실로 이상한 일이다. 이서휘가 들은 바 없는 이름이다. 정천이라는 자가 내뿜는 기도가 대주천을 마친 이서휘를 긴장케 할 만큼 뛰어났기에 더욱 의아한 일이었다.

적당히 농을 치다 자리를 옮겨서 도삼이 제작한 인피면구나 써보려고 했던 이서휘는 문득 검우 정천이라는 자가 궁금해 엉덩이를 붙이고 말을 이었다.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세 분과 목적이 같지 않겠습니까?”

“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천이 말을 이었다.

“군림맹에 도전하려는 것 아니오? 본가가 근처라 소식이 빨랐지만 남쪽에는 이미 맹주 남궁위가 비무를 다시 시작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소. 숨어 있던 기인이사는 물론 검으로 위명을 날리고자 하는 자들이 꽤 많이 몰려오고 있는 것으로 아오. 무릇 남에서 이름을 얻고자 하면 군림맹으로 가야 하고 북에서 이름을 얻고자 하면 백도맹으로 가야 하는 법. 불초가 두 곳에서 검을 겨룬 후 백검문에도 도전할까 하오.”

실로 패기 넘치는 대답이라 이서휘, 도삼과 도이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러자 검우 정천 역시 함께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이서휘의 속은 서늘했다.

‘아무래도 마도가 소문을 퍼뜨렸나 보군. 귀찮게 해서 맹주님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인가?’

이서휘가 말했다.

“백검문이 종착지셨구려.”

“아니오. 무릇 검을 잡은 자가 어찌 포부를 그리 작게 하겠소. 검을 쥔 자라면 마땅히 검선과 검성도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소.”

“두 분을 어떻게 뵈시려고?”

검선은 방랑객이고 검성은 나이가 구십 세에 이르러 은퇴한 지 오래된 고수다. 이서휘가 검제 시절에도 검성을 추앙해 감히 그의 별호를 잇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인데, 이 불청객은 검성을 만나겠다고 한다.

정천이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도를 자처하는 본인이 어찌 두 분과 겨루겠습니까? 그저 군림맹과 백도맹, 백검문 정도를 꺾으면 그래도 검에 대해 몇 마디 나눌 자격은 있는 아이로구나 하시겠지요.”

검우(劍雨) 정천(鄭天).

이서휘가 눈이 멀었을 시기에 무림에 등장해 활동하다가 이서휘가 검선의 적통을 이어 받았을 때쯤 십존의 일원인 화마존(火魔尊)과 그의 수하들에게 합공을 받아 죽은 자다. 이서휘가 무림에서 모습을 감췄던 시기에 활동했던 자였으니 이서휘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구화산에서의 사건 이후로 사람들의 운명과 자잘한 사건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시간도 변하고 결과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군림맹 근처에 오지도 않았던 검우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맹주 남궁위가 비무를 다시 시작했다는 소문에 천리 길을 한 걸음에 달려온 열혈남아였다.

이서휘가 신이 아닌 이상 검우의 과거와 미래를 알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 순간에도 과도하고 진중한 도전 정신을 품고 있는 정천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서휘가 검우 정천을 힐끗 바라봤다.

‘군림맹 분위기도 좋지 않은데, 괜히 비무를 하러 갔다간 혼쭐이 날 것이다. 이는 군림맹에게도 정천에게도 좋지 않은 일.’

이서휘가 조용한 말투로 정천을 설득했다.

“군림맹엔 나중에 가시는 것이 나을 것이오.”

“어째서 그렇소?”

“비무 보다, 더 중요한 소문은 듣지 못하셨소?”

검우 정천이 눈을 껌벅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마도 세력, 그러니까 옛 마교의 잔당이 나타났다는 소문이오. 군림맹은 이를 대처하느라 분주할 것인데, 이때 맹주를 불러내어 비무를 하자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외다.”

이서휘가 정색하며 말하자 무슨 생각에선지 검우 정천이 빙긋 웃었다. 이서휘는 자연스럽게 정천에게 말을 높여 이어나갔다.

“검우 형 뿐 아니라, 다른 방문자들도 문전박대를 당할 것이오.”

“마도가 나타났소? 사실이라면…… 그렇군. 실례가 되겠군.”

순간 이서휘는 검우에게 함께 설부루라는 곳으로 가자고 말을 할 뻔하다가 속으로 삼켰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법.

‘그냥 도둑 형제들과 가야겠다.’

이서휘가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을 반성하고 술병을 들었다.

“자, 한 잔 올리겠소.”

이서휘는 먼저 검우 정천에게 술을 따르고 이어서 도이와 도삼의 잔을 채워줬다. 술이나 몇 잔 마시고 검우 정천과는 일단 작별할 생각이었던 것. 마지막으로 자신의 술잔에 술을 또르르 따른 이서휘가 말했다.

“자, 만난 것을 기념하여.”

네 사람이 술을 들이켰다.

이서휘가 술을 들이키자 도이와 도삼, 그리고 검우 정천까지 이서휘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보아 하니 술도 잘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잘 마시는 척 하긴…….’

‘얼굴이 홍시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가 다시 두 번째 잔을 채우고 세 사람을 둘러보며 시원한 동작으로 입에 털어 넣었다.

검우 정천이 엄지를 들며 말했다.

“좋소. 이번엔 내가 따르리다.”

정천이 술을 돌렸다. 이미 이서휘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네 사람은 순식간에 잔을 세 번씩 비웠다.

얼굴이 벌게진 이서휘가 일어나며 말했다.

“검우 형, 훗날 또 봅시다. 일이 있어서 이만. 냉혈공자, 초류황! 자, 가세나.”

이서휘가 도이, 도삼에게 눈짓을 하고 일어서자, 검우가 의아한 낯빛이 되었다. 적당히 세상 이야기나 편하게 하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벗을 만났나 싶었는데 무엇이 급해 그리 빨리 가겠단 말인가, 하는 마음이다.

검우 정천이 말했다.

“세 분께선 군림맹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소?”

“이 동생들은 살펴볼 일이 있어서. 검풍객잔에 종종 올 터이니, 연이 닿으면 그 때.”

“좋소.”

검우 정천이 홀로 술잔을 따르며 호탕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검우 정천이라 하오. 다음에 볼 때는 세 분의 이름을 알게 되리라 기대하겠소. 바쁜 사람 안 붙잡겠소이다.”

이서휘가 검우의 말에 가볍게 예를 올리면서 씨익 웃었다.

‘묘하게 능청스러운 사람이군.’

☆ ☆ ☆

설부루는 지난날 한신을 습격했던 무리를 이끌었던 적포 사내가 몸을 숨긴 곳이다.

이서휘에게 ‘또 보게 될 거다.’라고 말을 남긴 적포 사내.

기다리면 언제가는 이서휘 앞에 나타날 터였다.

하지만 이서휘는 기다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서휘는 적포 사내를 죽일 생각이었다.

일종의 경고랄까.

질풍검대나 군림맹을 움직이면 간자 때문에 정보가 미리 빠질 수가 있었다. 마도가 한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이서휘는 똑같은 방법으로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치욕이란 선물을 더 얹어서 말이다. 마침 이서휘 일행도 셋이었다.

이서휘가 검풍객잔 앞에서 말했다.

“좀 걷자.”

“네, 설부루는 오늘 당장 가실 겁니까? 은근히 한가하신 모양이군요. 검대 소속이시라면서.”

“후후.”

이서휘는 걸음을 걷다가 불쑥 엉뚱한 것을 물었다.

“너희쯤 되면 도둑 세계에서 어느 수준이라 할 수 있느냐?”

도삼이 도이를 슬쩍 보더니 대꾸했다.

“민가나 적당히 터는 자를 삼류라 하지요. 장원 정도를 드나들면 이류라 합니다. 일류부터는 세밀하게 나뉩니다. 세가나 문파를 드나들 수 있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문파의 힘도 제각각이지 않습니까? 명문 정파나 유명한 사마외도의 본거지를 드나들 수 있는 도둑은 그야말로 추앙을 받는 존재죠. 저희는 일류에 발을 담갔으나, 아직 그런 수준은 못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이서휘가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군림맹은 언제쯤 털려고 했느냐?”

“에이, 저희가 어찌 군림맹을…… 농담이 과하십니다.”

그 말에 이서휘가 걸음을 멈추고 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미 이서휘에게 궤도가 박살났던 도삼이다.

실은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여, 답사도 하고, 구조도 살핀 다음에 이삼 년 안으로 군림맹의 보고를 털 생각을 하고 있던 도삼이다. 때문에 도삼은 이서휘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자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십 년이 지나도 군림맹은 너희에게 무리야. 너희 둘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다.”

“…….”

도둑 형제는 도대체 이 공자는 뭐 이리 아는 게 많아? 하는 심정이다. 반면에 이서휘는 추측하고 있던 것을 슬며시 낚싯대에 걸어 던졌을 뿐이었다.

궤도는 상대적이다. 속일 수 있는 자는 평생 속일 수 있고, 통하지 않는 자에겐 작은 것 하나 속일 수 없게 된다. 지금 이서휘와 도삼의 관계가 후자의 상태였다.

이서휘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너희 모습을 보니 설부루에 함께 갈 것 같구나. 맞지?”

“네, 함께 가시죠.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실력은 지난번에 충분히 보여 드렸잖습니까.”

도삼이 대꾸하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으로 가자. 먼 곳이냐?”

“아닙니다. 다만 낭인들과 사파가 종종 세력 다툼을 하는 지역이더군요. 여화 호수 주변의 번화가를 차지하려는 군소방파가 제법 몰려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군림맹이라는 것을 들키시면 꽤 곤란하실 겁니다.”

“그건 걱정 말아라. 적당한 곳에서 인피면구나 준비해다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설부루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느덧 어둑해진 밤이다.

도착해 보니, 설부루가 있는 곳은 꽤 오래된 번화가였다. 여화 호수라는 장소를 끼고 있어서 풍물을 구경하러 다니다가 들리는 뜨내기손님도 많았고, 상권이 제법 발달되어 있어 사파와 낭인들이 종종 세력 다툼을 하는 곳이었다.

도삼이 내리쬐는 달빛 아래에서 이서휘의 얼굴에 인피면구를 착용시켰다.

이어서 도이가 붓과 조그만 약품 상자를 꺼내 이서휘의 목과 얼굴에 무언가를 열심히 바르면서 세밀하게 다듬었다.

잠시 후 어느새 다른 얼굴이 된 이서휘가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

“따로 입장하자. 마침 세 명 다 복장이 제각각이구나. 일행 같아 보이진 않겠어.”

“네.”

이서휘가 도삼과 도이의 등에 멘 봇짐을 힐끗 보며 말했다.

“긴급할 때 사용할 만한…….”

말도 채 마치지 않았는데, 도이가 봇짐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이거를 무척 좋아하시더만요?”

“이게 뭐지?”

이서휘가 회색 빛을 띄는 원형 통을 바라보자, 도이가 입에서 꽈앙 소리를 내더니 길쭉한 모양의 원형 통을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입소리를 냈다.

“푸쉬이이익!”

말과 함께 도이가 두 손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장님 흉내를 냈다.

그 작태에 도삼이 큭큭대고,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흑의인들에 몸에서 찾아냈던 안개탄을 챙겨 놓은 모양이다.

이서휘가 안개탄을 받아 들고 말을 이었다.

“냉혈공자, 잘 쓰겠소.”

“별 말씀을.”

이서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적포 사내를 만나면 둘은 섣불리 덤비지 말거라. 내가 상대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한데, 공자님은 군림맹에는 지원 요청 안 하실 겁니까?”

이서휘는 군림맹에 간자가 있다는 말은 빼고 대답했다.

“안 할 생각이다. 그냥 기루면 어쩌려고? 살펴보고 나올 생각이다. 어차피 너희 둘도 언제든 몸을 내빼는 건 자신 있지 않느냐?”

“그럼요. 적당히 봐서 인피면구만 벗어도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어쨌든 나도 자신이 있다. 께름칙하면 너희 둘은 굳이 함께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그 말에 도이가 발끈했다.

“흥, 도발도 적당히 하쇼. 오기가 생겨서 더 가고 싶네.”

도삼이 철선을 휘두르며 말했다.

“본좌가 악의 무리를 만나면 십삼 초에…….”

이서휘가 말을 끊었다.

“닥치고.”

“네.”

“믿고 보낸다. 가라.”

“네, 알겠습니다.”

“만약 흩어지게 되면 다시 검풍객잔서 보자.”

도둑 형제가 대답하자, 이서휘는 고개를 들어 달을 힐끗 바라봤다. 습관처럼 달을 살펴보는 이서휘다.

그 모습에 도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공자님은 은근히 달을 자주 쳐다보시네요.”

그 말에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후후, 먼저 들어가라. 도이부터.”

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냉혈공자가 되어 휘황찬란한 등이 여기저기에 내걸린 설부루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도삼에게 말했다.

“일만 시켜서 미안하구나. 나중에 좋은 자리 마련해주마.”

월야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으나, 도삼은 별말 없이 웃다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이미 철선문의 문주라 쉽게 몸을 빼기 어렵겠소. 본좌는 일이 있어서 이만.”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도삼을 보냈다.

설부루가 아니더라도 기루와 도박장이 밀집한 곳이다. 근처의 여화 호수 때문에 엷게 안개가 끼어 있고, 번화가답지 않게 조용한 느낌이 들어 스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다만 달이 밝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그 곳에서 잠시 풍경을 구경하다가 슬슬 설부루로 걸음을 옮겼다. 이서휘가 건물을 쳐다 보면서 다니자 어디선가 호객 행위를 하려는 자들이 은근히 다가와 여자나 도박에 관심이 없는지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걷던 이서휘가 주변 지형과 특이점을 살피며 돌아왔을 때 설부루 앞 쪽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여인을 찾든 도박을 하시든 설부루만 한 곳이 근처에 없을 겁니다. 한 바퀴 도셨으니, 그만 들어오시죠.”

그 말에 이서휘가 다른 곳보다 훨씬 휘황찬란한 설부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가?”

“물론입죠.”

“한 번 보세.”

이서휘가 설부루로 들어가기 전에 어둠에 잠긴 골목을 힐끗 바라봤다.

‘음? 설마 여기까지 따라 온 것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이서휘가 설부루로 들어가자, 잠시 후 검우 정천이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서휘는 삼 층에서 여인을 끼고 술을 마셨다. 그러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었다. 얼마나 머물 것이냐, 망우초(忘憂草)는 필 것이냐, 술은 무엇으로 하겠느냐, 어떤 자태의 여인을 좋아하시느냐 등등.

이서휘의 입도 분주했다.

다 해서 얼마냐, 망우초가 무엇이냐, 술은 무엇이 있느냐 등등.

망우초는 아직 중원에 퍼지지 않은 연초였다. 하지만 설부루에선 망우초가 묘한 중독성이 있음을 알고 은근히 손님들에게 권해 망우초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하고 있었다. 시중을 들던 여인이 이서휘에게 필 것인지 묻지도 않고 목재 쟁반에 들고 온 망우초에 불을 붙이려고 하자,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며 제지했다.

“둬라.”

여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러나고, 연이어 술과 음식이 추가로 들어왔다.

쓸 데 없는 문답이 한참이나 오간 후에야, 이서휘는 스물쯤 되는 기녀와 단 둘이 남았다.

이서휘가 말했다.

“묘한 곳이야.”

“공자님, 설부루가 처음이신가 봐요.”

부드럽게 이야기하며 여인이 이서휘 곁으로 다가왔다. 분을 바르고 노출이 심한 여인이다. 풍만한 가슴이 주무기인 듯 자꾸만 머릿결을 넘기며 이서휘 눈앞에서 출렁 댔다.

이서휘가 여인의 냄새, 눈빛, 자세 등을 훑어봤다.

기녀가 맞는지, 무공은 익혔는지, 품에 다른 것은 없는지…….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기녀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어디를 그렇게 유심히 보십니까?”

“너.”

기녀가 미소를 짓자, 이서휘가 팔을 벌렸다.

“이리 오너라.”

기녀가 안기자, 이서휘는 무뚝뚝한 얼굴로 혈도를 제압해 술상 옆에 눕게 한 다음에 침구와 이불을 덮어 두 사람이 엉킨 것처럼 해놓고 술을 한 잔 마셨다.

“오늘 과음이로구나. 잠시 일 좀 보고 오마.”

이서휘는 문을 열고 나가, 살짝 비틀거리면서 복도를 걸었다.

걸으면서도 복도의 좌우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좌우로 방이 늘어서 있다.

다만 복도의 폭이 좁아 이서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양한 군상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박히고 있었다.

반대편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기억에 남은 목소리가 들렸다.

[또 보게 될 거다.]

적포 사내가 이서휘에게 건넸던 말이다. 그 어조와 흡사한 목소리가 굳게 잠긴 통로 끝의 문에서 미세하게 흘러 나왔다. 이서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소변을 볼 것처럼 문을 조준해 바지춤을 풀렀다.

그러자 복도 옆에 대기하고 있던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가와 이서휘를 말렸다.

“공, 공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되옵고. 이쪽으로.”

“어디? 여기 안 돼?”

“이 쪽으로, 오세요. 어서요.”

이서휘는 소변을 보고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적포 사내가 떠들고 있는 방의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많으면 대여섯일 줄 알았는데 거친 기도를 내뿜는 무인 스무 명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상석에 있던 적포 사내가 물끄러미 이서휘를 바라봤다. 적포 사내는 일전에 봤던 그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숙인 다음, 취한 목소리로 말을 흘리며 물러 나왔다.

“아이고오, 미안하오. 여기가 아니네.”

성급히 문을 닫고 복도를 걷는데 안쪽에서 적포 사내의 명이 떨어졌다.

[저 새끼 데려와.]

그 말에 복도를 걷던 있던 이서휘가 목관절을 우드득 소리를 내며 풀며 말했다.

“내가 곧 가마. 그 전에 난장판 좀 만들고.”

이서휘는 발검과 함께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좁은 복도다. 이서휘는 일부러 복도에 늘어선 방문들을 갈라낼 수 있도록 내질렀다.

쐐애애앵!

좌우의 목재 차단막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갈렸다.

콰콰콰콰콰콱!

목재 문들이 제멋대로 부서지면서 파편이 튀었다. 반달형의 검기는 십여 개의 문을 부순 후에도 한참을 뻗어 나갔다.

굉음이 터지자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거나 기녀와 엉켜있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튀어 나왔다. 기녀들은 오히려 침착했다. 벗어 놨던 옷을 손에 들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이서휘가 납검을 하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 틈에 적당히 섞였다. 이서휘가 삼 층에서 검기로 신호탄을 올리자 도삼과 도이도 슬슬 작업을 시작했다. 도삼과 도이는 계단 쪽에서 자리를 잡고 삼 층으로 올라가는 무인들을 베어 넘겼다.

이미 합을 맞춰 본 세 사람이다. 죽이 척척 맞는다는 이야기는 이런 때 쓰는 말이다.

도둑 형제는 이서휘가 적포 사내를 죽이기 쉽도록 난장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암행술을 시전해 사람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도중에 복도 반대편으로 왔다.

잠시 유령처럼 서서 맞은 편 문을 바라봤다.

소란이 커지자 적포 사내는 좌우에 수하들을 대동하고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이서휘는 어느새 복도 반대편의 어둠에서 적포 사내를 보고 있었다.

‘누구 인피면구가 뜯기는지 볼까?’

적포 사내는 수하들을 이리저리 보냈다. 이 층과 일 층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거세게 들리기 시작했다. 철선과 쌍필이 무인들의 몸에 꽂히면서 피를 내뿜고 있으리라.

적포 사내는 뒷짐을 지고 오고 가는 손님들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반대편 어둠을 노려봤다.

이서휘가 숨어 있는 곳이다.

적포 사내는 무표정하게 이서휘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느닷없이 소매를 휘둘러 기다란 은침 하나를 빠르게 날렸다.

휙!

이서휘는 호흡을 잠시 멈추고 아슬아슬하게 고개만 슬쩍 움직여 은침을 피했다. 은침이 이서휘를 지나 벽에 떵 소리와 함께 꽂히더니 부르르 떨렸다.

이서휘는 침착한 표정으로 적포 사내의 눈빛을 살폈다.

적포 사내는 잠시 싸늘한 표정으로 어둠을 주시했다.

잠시 후 적포 사내는 이서휘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침착한 동작으로 등을 돌리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서휘는 적포 사내가 유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저런 계책을 생각해내기 전에 이서휘가 순식간에 경공을 펼치면서 복도를 이동했다.

쐐앵!

경공으로 나아가던 이서휘가 적포 사내가 서 있을 곳을 예측해 무작정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파앙!

순식간에 벽이 뻥 뚫리면서 적포 사내가 황급하게 몸을 우측으로 피했다. 그대로 달려가던 이서휘가 목재 문을 장력으로 날려버린 후에 들어갔다.

서늘한 검기가 이서휘의 목 밑으로 날아왔다. 이서휘가 자강검으로 튕겨내고, 순식간에 적포 사내와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챙챙챙챙챙!

적포 사내의 예리한 눈이 이서휘의 자강검을 그제야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네 놈이었…….”

이서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적포 사내가 말을 내뱉는 순간에 적포 사내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까앙! 챙챙챙챙!

밀려나던 적포 사내가 왼발로 탁자를 쳐서 이서휘에게 날리고 순식간에 모습을 숨겼다.

이서휘는 날아오는 탁자를 내공을 주입한 검집을 내밀어 산산조각 냈다. 그 사이에 적포 사내의 인기척이 문 쪽으로 나가자, 이서휘가 스윽 하고 자강검을 허공에 내밀었다.

깡!

화들짝 놀란 적포 사내가 이서휘의 검을 쳐내고, 마침 입구에서 들어오는 수하의 멱살을 붙잡아 이서휘 쪽으로 내던지고 빠져 나갔다.

이서휘는 날아오는 무인의 면상을 검집을 쥐고 있던 주먹으로 그대로 후려쳤다.

빡!

날아온 무인은 공중에서 이빨 서너 개를 휘날리며 방향을 바꿔 벽으로 날아갔다.

이서휘가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나타난 도삼과 도이가 철선과 쌍필을 휘두르며 적포 사내를 막아섰다.

챙챙챙챙챙챙!

불꽃이 튀었다.

이서휘는 도둑 형제의 무위와 적포 사내의 무위를 적당히 계산해 속으로 수를 세면서 잠시 방 안을 살폈다. 기관장치는 없는지 특이한 것은 없는지…….

‘……일곱, 여덟, 아홉, 열…….’

열 둘까지 세다가 다시 밖으로 나간 이서휘가 적포 사내의 등으로 순식간에 뛰어 들어 자강검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자세를 뒤집은 적포 사내가 이서휘의 검을 튕겨내면서 오른발을 뒤로 내질러 도이를 퍽 소리를 내며 날렸다.

벌떡 일어난 도이가 다시 합세하려 하자, 이서휘가 자강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아래 좀 막아라.”

이서휘의 말을 즉시 이해한 도이가 합류하지 않고 쌍필을 쥐고 다시 이 층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계단으로 몰려오는 대여섯 명의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도이. 쌍필을 휘두를 때마다 푹푹 소리와 함께 무인들이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동작이 간결하다. 피하면서 찌른다, 로 압축되는 동작.

푹푹푹! 푸악! 하는 소리와 비명이 함께 솟구친다.

그 사이 도삼과 이서휘가 적포 사내를 협공했다. 그때였다. 적포 사내가 장포를 휘두르자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퍼지는 와중에 이서휘가 도삼에게 말했다.

“바깥에 지원 없는지 살펴라.”

그 말에 도삼이 대꾸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도삼은 철선을 휘두르면서, 삼 층으로 합류하려던 적포 사내의 수하들을 공격했다가 물러났다. 그러자 무인들이 도삼의 궤도에 홀리어, 하나 둘 수가 늘어나더니 우르르 소리와 함께 도삼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도삼이 일부를 바깥으로 유인했다.

이서휘와 적포 사내.

일전에는 서로의 내공이 비슷해 검이 부딪치자 한 보씩 밀려났던 두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이 천양뇌단으로 대주천을 마친 이서휘의 내공이 적포 사내를 앞서고 있었다.

몇 번 검을 부딪치자 적포 사내도 내공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이서휘는 연기 속을 무작정 걸었다.

발걸음이 급한 사람이 내는 소리를 세밀하게 듣고 쫓는 중이다. 이서휘가 기척을 느끼고, 내공을 실어 검집을 휘두르자 부웅 소리와 함께 연기가 흩어졌다.

그때, 적포 사내가 난간 쪽에서 튀어나와 검을 찔렀다.

까앙! 이서휘가 검을 튕겨내면서 적포 사내를 난간으로 몰고 갔다.

챙챙챙!

슬슬 적포 사내의 동작에서 도망가려는 기운이 감지되자 이서휘는 짐짓 빈틈을 내줬다.

‘도망가라.’

이서휘가 검을 허술하게 내지르자 까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검을 쳐내고, 적포 사내가 몸을 돌려 삼 층에서 뛰어내렸다.

휙!

꽤 높은 곳이다.

이서휘는 별 생각 없이 적포 사내를 따라 뛰어 내렸다. 그러자 적포 사내가 공중에서 장포를 휘둘러 품에 있던 은침을 한꺼번에 쏟아내고, 몸을 회전하면서 내려섰다.

휙휙휙휙휙!

이서휘의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 수 있는 은침이 밀려 들었다.

이서휘는 이미 떨어지는 와중…….

위잉!

이서휘는 공중에서 순식간에 검막을 펼쳐, 쏟아지는 은침을 모조리 튕겨내고 그대로 내려섰다.

적포 사내는 개구리가 화들짝 놀라 도망가듯이, 문 쪽으로 물러나서 다시 검을 쥐었다.

순간, 눈이 마주 친 두 사람.

이서휘가 별 다른 표정도 말도 없이 적포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 순간에 어지간한 적포 사내도 짜증과 함께 공포심이 깃들었다.

‘대체…….’

그렇다. 대체, 틈을 안 주는 이서휘다.

쐐앵, 하고 벼락 같이 검기를 날리고 이서휘도 함께 질풍지로를 시전하며 튀어 나갔다. 다급한 동작으로 이서휘의 검을 튕겨낸 적포 사내.

콰앙!

이서휘의 내공에 검이 부러지면서 설부루의 정문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갔다.

적포 사내가 쓰러진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울컥 하고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분명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냉혈공자 냉혼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도이는 혼자서 이 층과 일 층을 넘나들며 적포 사내의 수하들을 보는 족족 죽이고 있었다. 적포 사내와 함께 있던 수하들 외에도 설부루 곳곳에 흩어져서 경계를 서던 자들까지 베어 넘긴 터라, 그 수가 벌써 서른이 넘었다. 도이의 동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간결함 그 자체. 평범한 무인들은 대부분 단 일 초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서휘는 문을 나서서 중상을 입은 적포 사내를 바라봤다.

그때 주변에서 땅에 귀를 대고 소리를 살피던 도삼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어느새 도삼을 따라간 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은 모양이다.

도삼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동쪽에서 몰려옵니다. 말에 탄 자도 있고 대략 백여 명은 넘을 것 같은데요.”

“도이 데리고 먼저 가라.”

“공자님은요?”

이서휘는 그 말에 대꾸를 않고,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자강검이 뱉어낸 검기가 도삼의 옆을 지나, 도망가려고 벌떡 일어난 적포 사내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크악!”

비명과 함께 적포 사내가 풀썩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적포 사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자, 이서휘가 말했다.

“도망가기 싫으면 주변에 몸이라도 숨기고 있어.”

“알겠습니다.”

도삼이 사라지자, 이서휘는 자강검을 납검하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적포 사내에게 다가가며 등에 있는 유엽비도에 손을 뻗었다. 이서휘가 인피면구를 벗기기 위해 다가가자, 적포 사내가 강시처럼 일어나 어느새 빼 든 비수를 내질렀다.

푸욱.

이미 눈치채고 있던 상황인 데다가, 이서휘의 유엽비도가 더 길고 빨랐다. 적포 사내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배에 꽂힌 유엽비도를 내려다 봤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덤덤한 얼굴로 사내의 인피면구를 벗겨냈다. 얼굴이 드러났다. 눈과 코로 이어지는 검흔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얼굴이다.

이서휘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잘 가라.”

“빌어먹을 새끼…… 곧…….”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뽑아, 적포 사내의 목을 날렸다. 이서휘는 나중에 용모파기를 그리는 자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할 생각이었다. 회귀 전…… 한신을 죽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적포 사내의 목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드드드드……!

설부루의 좌우로 흑의인들이 몰려와 넓게 원을 그리며 이서휘를 포위했다. 거리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상황이고 이미 도삼과 도이도 몸을 내뺀 상태였다.

그나저나 참 많이도 몰려왔다.

오십 여명에서 팔십 여명으로 늘어나더니 얼추 백 명을 채웠다.

사파와 낭인들이 다투는 세력권이라면서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수가 몰려 왔단 말인가?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몰려든 흑의인들을 향해 적포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자가 너희 우두머리냐?”

“…….”

눈만 내놓은 흑의인들은 대답 대신에 병장기를 뽑았다.

그러자 이서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다.

“수 믿고 깝죽대지 마라……. 다 죽는 수가 있다. 여기 나 말고도 귀신이 세 명 더 있거든.”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킬킬킬…… 킬킬킬…… 킥킥킥…… 큭큭큭…….”

이서휘를 비웃는 웃음이 파도를 타며 이어졌다. 그 웃음 소리에 맞춰 이서휘가 함께 웃었다.

“후후후.”

이서휘가 품에서 안개탄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러자 가장 전열에 있던 흑의인들이 주춤 거렸다. 벽력탄(霹靂彈) 같은 것으로 오해한 모습이다.

이서휘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안개탄을 도로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아, 이건 위험할 때 써야지…….”

그 말과 함께 스릉 하고 자강검이 뽑히더니, 암연심검의 파가 쐐애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푸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말과 사람이 핏물을 뿌려대며 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절대쌍필 냉혈공자의 쌍필이.

십삼초승천 초류황의 철선이.

고요히 잠자고 있던 검우 정천의 적룡검이……

함께, 적들을 갈랐다.

그 와중에……

이서휘가 그 누구보다 높게 공중으로 솟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다…….

이서휘의 검에서 쏟아진 검기가 달빛을 머금고 뻗어 나가 어둠을 갈랐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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