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남궁위>
검막(劍幕), 말 그대로 검으로 만든 막이다.
암연심검의 환(丸), 파(波), 세(勢)는 검기의 형태다.
무공마다 분류가 다양하고 저마다의 기준이 있지만, 암연심검의 검막은 검기의 상위단계를 차지하고 있다.
내공을 끌어 올려 검이 뜻하는 방향으로 내보내는 것이 검기라 한다면, 검막은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검이 지나간 궤적에 뜻을 담아야 한다.
검의 궤적에 흩뿌려 놓은 내공이 적절한 시간 동안 머물러야 한다.
적의 암기가 날아오는데, 그 암기를 튕겨내지 못할 검막을 펼친다면 내공만 소비되는 격이다.
따라서 검막의 범위가 좁거나, 엉뚱한 곳에 생성해도 실패다.
검막의 두께가 적절하지 않아도 실패다.
때문에 가장 최악의 상황은 내공을 소비해 검막을 펼쳤는데, 적의 공격이 뚫고 들어올 경우다.
내공은 소비되고, 목숨은 경각에 달린 것이니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이서휘는 검제 시절, 두 눈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검막을 활용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보지 못하니 감각으로만 적의 공세가 어느 정도인지 읽어야 했다.
검제 시절에는 눈이 보이지 않아 어려웠고, 회귀한 지금은 내공이 부족해 어려운 상황이다.
이서휘가 연무장에서 서서 이 모든 의미를 담아, 검막을 펼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연무장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적당한 달빛이 내려와 이서휘의 시야를 밝히고 있다.
딱 이서휘가 좋아하는 밤이다. 시원한 공기가 달게 느껴질 정도다. 이서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편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잠시 전신의 근육을 풀어준 후에 연무장을 한 바퀴 돌았다.
달리는 와중이다. 이서휘가 내공을 주입하지 않은 채로 검을 휘둘렀다. 몇 걸음을 더 달리다가 훌쩍 솟아서 검막의 궤적을 허공에 한 번 그려보고 내려섰다.
제자리에 선 이서휘가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검을 쥔 자세로 양팔을 벌렸다가, 두 팔을 가슴으로 오므렸다. 그런 뒤에 오른손은 아래로, 왼손은 위로 올리면서 원을 그렸다.
검신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검막이 생성되어 원을 그리며 이어졌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흥, 허접하군.”
이서휘는 다시 손과 몸을 가볍게 한 후에 내공을 주입하지 않은 채로 다양한 검막의 궤적을 허공에 그렸다.
다수의 암기를 튕겨낼 때 사용하는 검막.
일점에 실린 강맹한 힘을 막아낼 때 사용하는 밀도 높은 검막.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검기 종류를 막아내는 검막이다. 검기의 강맹함을 파악해 밀도, 즉 두께를 조절할 수 있어야 했다.
연습을 마친 이서휘는 실전처럼 검막을 펼쳤다.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해 휘두르자, 검신을 따라 엷은 막이 뒤따라 펼쳐졌다.
처음에는 진했고, 뒤로 갈수록 흐렸다.
이번에는 내공을 조절해 다시 한 번 펼치자, 처음이 흐리고 뒤로 갈수록 진했다.
이서휘가 자신의 검막을 구경하다가 눈이 커졌다. 아무리 봐도 보유한 내공에 비해 한 단계 높은 검막이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검기가 처음으로 분출될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희한한 검이야…….”
휑 한 연무장에 자강검의 궤적에 따라 생성된 검막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썩 마음에 들진 않군.”
이 정도 검막이면 활용 가치가 떨어진다. 그냥 검으로 쳐내는 것이 수월하다. 그래도 연습은 해둬야 했기에 이서휘는 한참을 달빛 아래서 검막을 뿌려댔다.
☆ ☆ ☆
다음 날 이서휘는 잠을 몇 시간 자지 않았는데도 몸이 개운했다. 전날 비교적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수련을 했던 이서휘다. 암연심법으로 정제된 내공 덕분인지 몸이 더 개운해져 있었다.
이서휘는 종종 시간을 내어 암연심법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전에는 별일 없이 일과가 진행됐다.
오랜만에 이서휘가 질풍검대원들을 통솔해 훈련을 마칠 무렵에야 드디어 질풍검대 장시우 대주가 청양에서 복귀했다.
이서휘가 입을 크게 벌리고 외쳤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러자 다른 대원들도 동시에 장시우를 발견하고 반겼다. 꺼칠한 수염을 잔뜩 기른 장시우가 연무장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잘들 있었느냐?”
“네, 대주님!”
“못 보던 녀석들도 있네?”
“안녕하십니까!”
지난날 이서휘의 체력 훈련에 호되게 당했던 낭인 출신의 신입들이 장시우 대주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장시우가 이서휘에게 다가와 말했다.
“서휘야. 별 일 없었고?”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렸다.
“참 많은 일이 있었지요. 따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형님은 어떠셨습니까?”
장시우의 입술이 군데군데 터져 있었다.
“피곤했다. 나도 이따 얘기해주마.”
장시우가 자신과 함께 임무를 다녀온 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내일 오전까지 휴식.”
“감사합니다!”
“오후 훈련은 이건영이 하고, 부대주와 나는 따로 일을 보겠다. 다들 점심 먹으러 가거라. 나는 입맛이 없어서.”
이내 임무 복귀한 대원들과 맹에 남아 있던 대원들이 섞여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씨익 웃던 이서휘와 장시우가 자연스럽게 질풍검대 외곽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외곽 길을 돌아 다시 질풍검대로 돌아왔을 때쯤 장시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장시우에게 벌어진 일을 털어놓은 이서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남궁익현의 말을 어긴 이서휘다. 일을 숨겨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게 이서휘의 생각이었다. 신중한 장시우의 성격상 더 퍼질 일도 없었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장시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비무는 언제쯤 진행될 거 같으냐?”
“주양위라는 놈이 도착하는 대로 수호전에서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장시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교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언제나 대단했다.
장시우가 말했다.
“흥, 청양에서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군.”
“무슨 일이었습니까?”
“흑도맹이랑 충돌했다.”
“네?”
‘이 시기에?’ 하는 심정이 든 이서휘다. 장시우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더 수가 많아서 다행이었지. 얼마 전에 우리로 치면 부대주급 인물이 한 명 죽은 모양이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모양이다. 복수는 확실하게 하는 놈들이 아니더냐.”
“그렇지요.”
대답을 한 이서휘는 속이 뜨끔했다. 어쩌면 도삼이 죽인 놈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면 도삼은 흑도맹 무인을 죽일 때 흑룡화린갑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 자신이 입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묘했다.
‘흑도맹이랑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면 우리만 손해인데.’
마도 세력이 중간에서 어떻게든 분탕질을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장시우가 무척 피곤한 표정으로 이서휘에게 말했다.
“어쨌든 나만 알고 있으마. 안다고 해서 우리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말이지. 복귀 보고를 하고 오마. 다녀와서 좀 쉬어야겠다. 다시 얘기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장시우가 군사회로 보고를 하러 떠나고 이서휘가 질풍검대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날까지는 별 다른 일이 없어 이서휘와 장시우는 저녁에도 은밀하게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그런 후에 시간이 남은 이서휘는 전날처럼 암연심법과 검막을 수련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삼 일이 지난 오후. 드디어 서찰을 보냈던 자가 단 두 명을 데리고 군림맹에 도착했다. 담이 크거나, 안하무인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터. 기도나 기백이 그야말로 남다른 자였다.
“하하하.”
군림맹의 정문에 웃음을 터트리는 무인이 갑자기 공중에서 내려섰다. 경공 내기라도 했는지 잠시 후에 두 명의 무인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아, 졌습니다. 사형.”
“졌습니다. 다음에는 더 늦게 출발하십시오.”
먼저 도착한 자는 주양위,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참을 뒤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와 청년을 앞질러 도착한 주양위다.
“이곳이 그 유명한 군림맹이로구나.”
누군가 신경을 쓰지 않고 슬쩍 바라보면 도가의 인물로 여겨질 만큼 담백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나이는 육십을 훌쩍 넘겼는데도 겉으로는 사십 대의 중후한 멋이 느껴졌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시원한 이마를 드러냈다. 두 눈 깊숙한 곳에 불을 뿜는 듯한 안광을 교묘하게 숨긴 자였다.
뒤이어 내려선 자들 또한 범상치 않은 기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주양위의 사제는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을, 주양위의 아들은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어 무척 대조적이었다.
정문 보초들이 외쳤다.
“누구십니까?”
세 사람은 정문을 살펴보다가 대꾸도 않고,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수호전의 무인들을 대동하고 정문에 나타났다. 전날부터 군림맹의 세력권에서 수상한 자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천라각의 보고로 들은 터라 대처가 빨랐다. 남궁익현은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천룡검대로 향하는 길목으로 이동했다.
주양위를 비롯한 세 사람이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군림맹을 구경하면서 걷고 있었다.
남궁익현이 주양위의 등을 향해 대뜸 말했다.
“수호전주 남궁익현이라 하오.”
주양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주 아무개요.”
“자, 수호전으로 들어가시지요.”
“뭐가 그리 바쁘시오? 군림맹 구경부터 좀 하겠소. 천천히 갑시다.”
주양위와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자 남궁익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남궁익현은 어느새 천룡검대 쪽으로 향하는 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 쪽이 아닙니다. 예의를 갖춰 주시지요.”
스스슥 소리와 함께 남궁익현 앞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놀란 얼굴로 남궁익현을 바라봤다.
주양위가 뒤늦게 등장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과연 수호전주답소. 남궁위라는 이름만 있는 게 아니었구려. 남궁익현 역시 명불허전이오. 내 잠시 장난을 쳐본 것이외다. 갑시다.”
남궁익현의 표정이 점점 불쾌함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서찰부터 무례하기 짝이 없어 불편해 했던 남궁익현이다. 하지만 직접 보니 서찰 이상의 무례함을 갖추고 있었다.
☆ ☆ ☆
수호전 무인이 질풍검대로 건너가 놀랍게도 대주와 부대주를 동시에 호출했다.
어찌 된 일인지 부대주급 이상은 전부 수호전으로 불러들이는 모양이었다.
장시우와 이서휘가 눈을 마주쳤다. 장시우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훈련은 건영이가 맡아서 해라.”
“네.”
이건영이 앞으로 나오자, 장시우와 이서휘는 서둘러 수호전으로 향했다.
이서휘가 말했다.
“드디어 왔나 보군요.”
“대체 어떤 놈들인지 구경이나 해보자.”
☆ ☆ ☆
이서휘가 수호전으로 향하자, 다른 검대에서도 임무를 나간 자를 제외한 대주와 부대주들이 수호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군림오검대의 고수들이 전부 도착한 셈. 천라각주 유백은 이미 수호전에 와 있었고, 운룡회주 송정후는 근신 중이라 참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군사회는 하는 일의 특성상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수호전에서 질풍검대 이서휘만 불러서 참관시키기엔 아귀가 맞지 않아, 참석할 수 있는 부대주급 이상의 인사들을 모조리 부른 것이었다. 이서휘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잠시 후 남궁익현이 방문자들을 이끌고 수호전에 들어왔다. 남궁위만 등장하면 되는 상황.
주양위는 수호전 안에 뜻밖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자 놀란 얼굴로 말을 꺼냈다.
“맹주와 비무를 하러 왔는데 어찌 다 나오신 게요?”
이미 말을 맞춰놓은 남궁익현이 말했다.
“비무지 않습니까? 후배들한테 견식을 넓혀준다 생각하십시오. 저희도 맹주님의 무위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습니다.”
주양위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소. 차라리 잘 됐군. 더 불러 오시오. 견식을 넓혀 드리리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후후후.”
주양위를 제외한 자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맹주 남궁위가 안채에서 걸어 나와 주양위를 보지도 않고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남궁위가 주양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남궁위요.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주양위와 남궁위가 눈을 마주쳤다. 주양위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남궁위는 딱딱한 얼굴로 주양위를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오늘 비무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 예감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맹주 남궁위의 무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대주급 인원들도 남궁위의 무위를 본 적 없는 자가 대다수다. 다른 세가의 가주들을 무참하게 꺾었다는 소문은 그저 전설로만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남궁위가 딱딱한 어투로 명령을 내렸다.
“유백 이하 맹원들은 모두 내가 있는 쪽으로 와서 서 있게나.”
“네, 맹주님.”
군림맹에서도 가장 드넓은 대청이다. 대체 무엇을 조심하여 그리 말한 것일까. 남궁위의 말에 군림오검대의 수장들과 천라각주 유백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궁위가 바로 비무를 시작하겠다는 듯 선뜻 일어서자, 주양위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 대청 중앙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기왕 여러분들이 나오셨는데 구경만 하셔야 되겠소? 마침 나도 사제와 아들을 대동해 왔소이다. 겸양 떨지 말고 자신 있는 자는 한 번씩 우열을 가려 봅시다.”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서휘가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위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남궁익현과 모든 상황에 대해 미리 입을 맞춘 남궁위다.
남궁위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오늘은 그대와 내가 느려지고 힘이 없어진 초식을 몇 번 교환하면 될 것이오. 그것으로 충분하오. 내가 거절했을 때 그대가 부맹주 이하의 무인들을 꺾는다 하지 않았소.”
남궁위가 거절하자 주양위의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흔히 볼 수 있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주양위는 이런 도발이 백도 세력에게 은근히 잘 통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양위가 말했다.
“허허, 뜻밖이로군. 화지련이라는 여인을 꺾어서 이제 자신감이 조금 생기셨나보구려?”
주양위가 드디어 서찰의 내용을 언급했다. 그러자 남궁위와 남궁익현이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남궁익현이 대신 대답했다.
“화지련은 여기 참석한 젊은 부대주에게 패배했소.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소이다. 지련이가 허락하면 내가 앞으로 그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생각이오.”
실로 깔끔한 대처였다. 주양위는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주양위가 모여 있는 검대 대주들과 부대주들을 쓱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 부대주에게 패배했소?”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는 주양위를 섬뜩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 건방진 작태에 주양위가 코웃음을 쳤다.
“흥!”
주양위가 이번에는 이서휘의 눈을 마주 노려보며 대꾸했다.
“젊으시구만. 마침 우리 아들과 연배가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어떻소? 여인의 검과는 다를 것이오만.”
이서휘는 의도적으로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실로 예의범절을 상실한 태도였다. 그 대처에 상황을 잘 모르는 검대 대주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예의? 그딴 건 개나 줘버려라.’
그때였다. 안채에서 무언가를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
“도저히 귀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네.”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화지련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군림맹의 고수들이 헉 소리를 내뱉었다.
“누구시오?”
남궁위와 남궁익현도 놀란 표정이다.
이서휘와 비무에서 패배한 화지련은 시도 때로 없이 떼를 써서, 남궁위의 비무를 구경하겠다고 조르고 있었다. 결국 남궁위가 안채 뒤편에 대기하고 있다가 비무가 시작되면 조용히 나와서 구경하라고 허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빤히 들리는 주양위의 말에 발끈해서 제멋대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곳에 모인 무인들은 모두 남자다. 화지련의 엄청난 미모에 놀라 잠시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화지련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지련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었기에 맹주와 화지련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지련이 눈썹을 치켜뜨고 주양위를 노려봤다. 그야 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격이다.
화지련이 말했다.
“흥! 내가 당신 아들과 한번 붙어 봅시다.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기가 차서…… 강우도 당신 부하죠?”
화지련의 말투가 실로 건방지다.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지련은 강우라는 자가 자신이 뽑은 가복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남궁익현에게 문초를 받아도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있었으나, 화지련이 느끼는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화지련이 갑자기 백검을 뽑아 들고, 주양위의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번 붙어 보자니까요.”
“지련아!”
남궁위가 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한껏 입이 삐죽 나온 화지련이 맹주 남궁위를 돌아봤다. 화지련은 남궁위한테도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맹주님!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서찰 내용도 개판이고. 대체 자기가 뭐라고 말을 저 따위로 한대…….”
지켜보던 이서휘의 얼굴에만 웃음꽃이 피었다.
‘잘한다. 화지련!’
화지련이 판을 흔들었다. 이제 흔들리는 건 오히려 주양위 쪽이었다. 주양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고, 이서휘는 감탄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북화 화지련. 네 성격은 정말 인정해줘야겠구나. 시원하다!’
이런 곳에서 주양위의 아들이 화지련과 겨룬다고 한들,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주양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됐소이다. 그냥 맹주와 나만 겨루는 것이 낫겠소.”
“뭐가 됐소이다 입니까? 붙어 보자고요!”
화지련이 앙칼지게 소리치자, 남궁익현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허, 그만. 이쪽으로 와서 비무나 구경하거라.”
공식적으로 비무를 볼 수 있게 배려한 셈이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터라 화지련이 “흥.” 소리를 내면서 마침 가장 끝에 서 있던 이서휘 쪽으로 걸어갔다. 화지련은 그제야 이서휘와 눈이 마주치곤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천라각주 유백이 옆으로 한 발 움직여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여기로 오시오.”
유백이 움직이다가 옆에 있던 유자광 부대주와 부딪치자, 유백이 인상을 그으며 턱짓으로 유자광을 옆으로 보냈다.
☆ ☆ ☆
드디어 맹주 남궁위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남궁익현의 조언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온전히 남궁위의 시간이다.
군림맹의 정점에 선 남궁위라는 남자의 인생을 보여줄 시간이었다.
남궁위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무엇으로 하시겠소?”
병장기의 우열을 가릴 것이냐, 장법 따위를 겨룰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남궁위 정도의 무위를 갖춘 자들이 겨루면 무엇으로 하든 위험하다. 오늘 비무에서 한쪽이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남궁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서 있는 저 남자, 주양위의 기도가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주양위가 말했다.
“자신 있는 것으로 하시오.”
남궁위는 그 말을 냉큼 받았다.
“주먹질이나 합시다. 요새는 검에 잠시 흥미가 떨어져서 말이지.”
주양위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냐, 검을 쓴다고 들었는데……?’
주양위는 무림에서 보기 힘든 보검을 챙겨 나온 상태. 남궁위가 어떤 검을 들고 나오든 비무 도중 부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주양위의 눈썹이 꿈틀대자 남궁익현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
‘맹주님, 이겨 주십시오. 여기까진 우리가 잘 준비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서휘도 눈을 부릅떴다.
과연 자신이 검제라 불리던 시대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강자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 차이가 있을 것인가? 무척 궁금했다. 비무를 보는 것만으로 시야가 넓혀지리라.
주양위의 사제가 다가가 주양위의 겉옷을 벗겨내고 검을 받아서 물러났다.
주양위가 양팔을 적당히 벌린 특이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시작합시다.”
“그럽시다.”
남궁위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대청 중앙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주양위도 마찬가지. 남궁위와 주양위가 대청 중앙에 마주 섰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기도가 대청 안에 휘몰아쳤다. 아마 부대주급 아래의 무인들이 대청으로 들어왔다면 그 압박감에 혼절할 수도 있었으리라. 실제로 기도가 가장 약한 운룡검대의 모용벽 부대주가 몸을 부르르 하고 떨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바뀌어 있었다.
주양위는 고요 속에 서 있었다.
반면에 남궁위의 몸에선 뼈가 맞물려 갈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극…… 그그그그극…….
어느새 남궁위의 전신에 백색의 뇌기(雷氣)가 감돌았다.
천라각주 유백과 남궁익현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에 놀라 남궁위를 바라봤다.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평소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남궁위는 몸에 난 머리카락을 포함한 전신의 터럭들이 한 올 한 올 공중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표정은 어느새 살벌함 그 자체로 변해 있었다.
남궁위의 천양육합신공(天壤六合神功)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
남궁위는 맹주로 등극한 이후 쌍각의 이름을 천뢰각과 천라각으로 바꿨다. 그 의미를 아는 자는 군림맹에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을 목격하는 자들은 알게 되리라.
남궁위가 가진 무공의 중심은 천뢰공(天雷功)과 천라공(天羅功). 천양육합신공(天壤六合神功)에서 비롯된 무공들이다.
각 무공이 서로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이뤄져 있었다. 남궁위는 각각의 무공, 즉 천뢰공과 천라공을 완성했을 때 각의 이름을 바꿨다.
천뢰와 천라.
결국 하늘을 뒤덮는 우레를 뜻한다.
남궁위의 전신을 휘감은 백색 뇌기는 천뢰공과 천라공의 조합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그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위를 구경하고도 주양위는 고요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의미 자체가 대청의 분위기를 더욱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대청에 서 있는 그 어떤 자들보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궁위가 처음으로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꽝 소리와 함께 남궁위의 앞발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주양위가 벼락 같이 달려 들었다.
하지만 남궁위가 주먹을 먼저 내지르고, 주양위가 우장을 평범하게 내밀어 주먹을 막았다.
찰나의 정적.
“……!”
이어서 대청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가 터지고, 주양위가 남궁위의 힘에 튕겨나 멀찍이 떨어진 대청 벽으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날아가던 주양위가 공중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여지 없이 벽에 부딪칠 것 같았던 주양위가 공중에서 우뚝 멈춘 후 광소를 터트리며 내려와 다시 남궁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불꽃을 튀며 부딪쳤다.
남궁위는 마치 소림승들이 처음 무공을 배울 때 익히는 자세를 잡듯이 엉덩이를 한껏 낮춘 자세를 유지하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꽉 쥔 주먹에서 어느새 기괴한 소리가 쥐어짜듯이 흘러나왔다.
스스슥.
걸어가던 주양위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남궁위의 앞에서 떨어지며 손날을 내려쳤다. 남궁위의 몸에서 흘러나온 백색 뇌기가 주양위를 휘감았다. 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았다.
파바바박! 소리에 이어 군데군데 쩌렁 하는 소리가 섞여 울렸다. 쩌렁 소리가 울릴 때마다 지켜보는 자들의 얼굴에 후끈한 바람이 불어와 부딪치고 있었다.
또 다시 모용벽 부대주가 전신을 심하게 떨자, 옆에 있던 운룡검대 모용천경(慕容天倞) 대주가 손을 내밀어 모용벽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벽아, 정신 차려라.”
천라각주 유백도 화지련의 상태를 살펴보며, 무언가 날아올 때마다 손을 휘둘러 막아주고 있었다. 화지련은 의외로 두 눈을 부릅뜨고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예 무아지경에 빠진 표정이었다.
비무는 남궁위와 주양위가 벌이고 있었지만 어느새 대청 안엔 죽음의 신이 찾아온 것처럼 불길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리를 순식간에 벌렸던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남궁위는 어슬렁어슬렁 주양위를 향해 걸어갔다.
주양위는 양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로 벌린 후 웃으면서 남궁위에게 다가갔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이 무척 오랜만에 재회하는 모습들 같았다.
그 여유로운 작태에 남궁위가 허연 이를 활짝 드러내며 주양위를 향해 걸어갔다. 웃는 것인지 분노한 것인지 모를 그 표정은 마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현세에 재림한 것 같았다.
금강역사와 귀신이 맞붙는 것처럼 두 사람의 신형이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대청 바닥이 쩌저적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어느새 주양위는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춘 상태였고, 남궁위 홀로 숨을 훅 들이마시더니 기괴할 정도로 두꺼운 사각 턱에서 빠드득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주양위가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 웃음 소리를 내뱉었다.
“후후…… 슬슬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소?”
주양위의 웃음 소리는 남궁위의 좌측에서 흘러나왔는데, 어느새 주양위의 신형은 남궁위의 우측해서 등장해 손끝으로 남궁위의 심장 부위를 찔렀다.
변화도 없는 단순한 초식임에도 불구하고 남궁위가 상체에 무게를 실어 양손을 교차해 주양위의 손끝을 막았다. 이내 쩍 소리와 함께 밀려난 남궁위의 발이 살짝 대청 바닥에 묻혔다.
순간 남궁위의 오른손이 갈퀴처럼 뻗어 나가 주양위의 목을 움켜쥐었다.
머리카락 하나 정도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주양위가 순식간에 뒤로 귀신처럼 물러났다.
그때 남궁위의 눈이 번쩍이더니 왼발로 땅을 내려찍으며 오른 주먹을 어깨 뒤로 당겼다. 이내 그그그극 하며 백색 뇌기가 휘몰아쳤다. 이어서 남궁위가 빠른 동작으로 주먹을 허공에 내질렀다가 우뚝 끊어냈다.
파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남궁위의 주먹에서 뻗어 나간 백색 뇌기가 비틀리며 날아가 주양위를 덥쳤다. 주양위가 침착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았다가 손바닥을 펼치면서 밀려드는 뇌기를 가볍게 튕겨냈다. 순식간에 콰직, 콰직 하며 잘려나간 뇌기가 대청 천장에 흩어지며 꽂혔다.
파바바바방.
대청 곳곳에서 굉음과 먼지가 피어올랐다.
남궁위가 그 순간 맹원들을 힐끗 돌아보며 다친 자가 없는지 살폈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다가온 주양위가 바람을 가르며 두 손을 연속해서 내뻗었다.
핏, 파앗, 푸앗 하는 소리와 함께 남궁위의 몸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하나, 그 와중에도 남궁위는 급소를 모조리 피하고 있었다. 연달아 타격을 받고 있던 남궁위의 왼손이 불쑥 나오더니 주양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어서 남궁위의 오른 주먹에서 그그그극 소리와 함께 뇌기가 뻗어 나왔다.
콰앙!
주양위의 몸이 충격을 받아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선 자세 그대로 땅을 끌면서 물러난 주양위.
그가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우고 남궁위를 노려봤다.
남궁위에게 잡혔던 오른 소매가 팔뚝까지 뜯겨 나가고, 손목에는 남궁위의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오른손 전체가 뜯겨 나갔으리라.
주양위의 표정이 여태껏 무표정하게 서 있던 자신의 사제와 흡사한 얼굴로 돌아가며 말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겠소.”
“동감이네.”
남궁위가 대꾸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맞붙어서 장력과 뇌기를 주고받았다.
뇌기가 해일처럼 일어나 쏟아졌다.
해일을 흩어 버리는 장력이 뻗어 나왔다.
찰나를 노린 장력과 그 장력을 튕겨낸 뇌기가 오고 갔다. 그런 식으로 백여 번의 공격과 방어가 펼쳐지는 동안, 남궁위와 주양위는 그 이상의 머리 싸움을 주고받았다.
그야 말로 구름 속에서 펼쳐진 용호상박(龍虎相搏)을 표현한 그림과 같은 장면이다.
그때였다. 한참을 정신없이 겨루던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적인 동작으로 접어 들었다.
남궁위가 평범한 정권을 내질렀다. 주양위가 손바닥을 내밀어 정권을 막았다.
그 뿐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이번엔 소리도 나지 않아 더욱 오싹했다. 남궁위가 천양육합신공(天壤六合神功)의 비기인 천장강림(天將降臨)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공을 끊임없이 뇌기로 전환해 내보내고 있었다.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무공이다. 주양위는 즉각 사태의 위험성을 깨닫고 내공을 끌어올려 남궁위와 내공의 우열을 가리기 시작했다.
☆ ☆ ☆
남궁위가 내공 싸움으로 몰아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이 그 의미를 모를까? 군림오검대의 고수들과 유백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이서휘는 남궁위가 내공 대결로 몰아가는 것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려 주양위의 사제를 살펴봤다.
‘이 새끼들이라면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서휘의 눈이 사제의 눈을 꿰뚫듯이 노려봤다. 이어서 이서휘의 눈빛이 번뜩이며 아들에게 향했다. 주양위의 아들은 적빛 줄무늬가 수놓인 잿빛 장포를 입고 있었다.
아들의 눈빛은 남궁위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화지련 쪽으로 향했다. 그는 천천히 군림맹의 고수들의 면면을 모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서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주양위의 아들이 이서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이렇게 말을 거는 듯 하다.
‘내가 보이느냐?’
그 이심전심에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보이는구나.’
그는 피식 웃으면서 이서휘에게 관심을 끄고 다시 비무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 짧은 순간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도(魔道)…….
이서휘의 본능이 그리 말해주고 있다. 마도(魔道)란 언제나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말 그대로 비정상적이다. 저 둘, 그러니까 사제와 아들이 주양위의 생명을 중요시할까? 아니면 남궁위의 죽음을 중요시할까.
후자겠지.
생명과 죽음.
그 두 개의 선택지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이 마도다. 이들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 따위는 무용한 것이다. 천륜은 지키지 않겠느냐고? 아마 군림오검대 대부분의 고수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보라! 아직 넋이 나간 모습으로 비무에 시선을 뺏기고 있다.
이서휘는 달랐다.
이 자들이 부자지간인지 사제지간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마도인데…… 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서휘는 비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불편해졌던 마음을 떠올렸다.
주양위의 겉옷과 검을 그의 사제가 와서 받아갔다. 그때 주양위의 아들이 짓고 있던 표정은 아마 이서휘만 알아봤을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았지.’
그럴 수 있다. 별일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서휘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 녀석, 잿빛 장포의 사내는 이 셋 중에서 지체가 가장 높은 놈일 수도 있다고. 무공의 높고 낮음을 떠나, 지위와 신분이 더 위에 있는 놈이라고.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왼손에 든 자강검의 검집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한 발을 내디뎠다.
본능이 시킨 짓이다.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이서휘를 바라봤다. 질풍검대 대주 장시우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서휘야, 뭐 하는 것이냐.”
맹주가 앉았던 상석 옆으로 군림맹의 고수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장시우가 부르던 말던 이서휘는 초조한 사람처럼 그 앞을 천천히 오고 갔다.
이서휘의 눈은 여전히 주양위의 사제, 주양위의 아들을 번갈아 노려 보고 있었다.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이 새끼들……. 반드시 움직인다. 맹주님을 죽이기 위해. 그러고도 남을 새끼들이야.’
이서휘가 장시우의 말도 무시하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자신들 앞을 왔다 갔다 하자, 나머지 고수들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자연스럽게 군림맹 고수들이 바짝 긴장한다. 반면에 이서휘가 앞으로 나오든 말든 아들이란 놈은 마치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웃고 있다.
천라각주 유백이 가장 먼저 깨달았다.
‘어? 이 새끼들 움직이나?’
군림맹의 고수들이 저절로 이서휘의 표정을 살폈다. 이서휘의 표정은 광인(狂人) 그 자체. 자강검을 쥔 왼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남궁위와 주양위가 벌써 한참이나 내공을 겨루고 있다. 꼼짝도 할 수 없다. 삐걱하는 순간에 상대방의 장력 혹은 뇌기를 뒤집어 쓰고 먼지처럼 분해될 것이다. 이미 두 사람의 머리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궁위가 입은 백룡포는 남궁위가 뿜어내는 기파에 쉴 새 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눈 한 번 껌벅이지 않는 이서휘의 눈이 벌겋게 변하고 있다. 심장도 요동치고 있다.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군림맹 고수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
이서휘의 눈에 귀신이 깃든 것 같다.
‘사제냐, 아들이냐? 아니다. 너희는 동시에 움직인다.’
이서휘의 미친 행동에 가장 먼저 천라각주 유백이 반응했고 뒤이어 질풍검대 장시우 대주가 제 자리에서 검을 뽑을 준비를 마쳤다. 이서휘와 형제 이상의 정을 나누고 있는 장시우다. 이서휘가 긴장하고 있다면 무조건 그 이유가 있을 터! 연달아 다른 군림오검대의 대주들도 잔뜩 긴장한 상태로 변했다.
그때였다.
구경하고 있던 모용벽이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찰나였으나 마치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쓰러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시선이 모용벽에게 향하는 찰나…….
주양위의 사제가 회오리가 뻗어 나가는 것처럼 신형을 움직여 남궁위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때였다. 주양위의 사제가 움직이자마자, 온몸의 내공을 검집에 집중시키고 있던 이서휘가 자강검을 뽑음과 동시에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렀다.
쐐애애애앵!
그 어느 때보다 진한 빛무리를 내뿜는 검기가 내공을 겨루고 있는 두 사람의 앞쪽으로 날아갔다.
감각적으로 날린 것이다.
이내 콰아아앙! 소리와 함께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서휘의 검기를 튕겨내느라 모습을 드러냈던 것.
“클클클…….”
이서휘의 검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낸 사제가 조소를 날리며 공중으로 훌쩍 솟아 군림맹 고수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정체불명의 흑빛 기탄(氣彈)을 쏟아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 기탄의 일부는 검대 부대주들을 그대로 적중시켜 날려버렸다. 부대주들인 구양운, 유자광, 사마초가 피를 내뿜으며 벽으로 튕겨 나갔다. 오히려 부대주들보다 빠르게 검을 뽑아낸 화지련마저도 겨우 검을 수직으로 세워 흑탄을 막아냈으나, 내공이 부족해 그대로 대청 벽으로 날아가며 피를 토해냈다.
이서휘를 제외한 부대주들과 화지련이 그 한 번의 공격에 전부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흑빛 기탄이 쏟아짐과 동시에 검을 뽑아든 검대 대주들과 유백, 남궁익현, 이서휘가 기탄을 튕겨냈다.
파바바바방!
하지만 기탄은 충격을 받아 터지자마자, 제각기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대청을 가득 채웠다.
푸쉬이이익!
주양위의 사제가 자신의 몸을 마기로 휘감았다.
“클클클클……. 군림맹의 힘을 구경하겠다.”
그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남궁익현이 검을 내려쳤다. 사제의 웃음소리만 듣고 순식간에 이동해 공격을 펼쳤던 것. 하지만 주양위의 사제는 어느새 주양위로부터 넘겨 받았던 검을 뽑아내어 남궁익현의 검을 막아냈다.
이어서 챙챙챙챙! 소리와 함께 남궁익현과 주양위 사제가 어둠 속에서 불꽃을 튀기며 맞붙었다.
실로 위험한 상황. 남궁익현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동시에 쌔앵……! 하는 소리와 함께 천라각주 유백이 일월쌍도(日月雙刀)라 불리는 한 쌍의 도를 뽑아들고 내공을 실어 허공에서 도를 마주쳤다.
쩌저저저정―!
이내 콰지지직 하는 뇌기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면서 검은 연기를 순식간에 흩어 놓았다.
시야가 확보되자 군림오검대 대주들이 뽑아든 검을 쥐고 남궁위를 지키기 위해 튀어 나갔다.
그때, 대주들 앞에 검은 불꽃이 날아와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동시에 검대 대주들이 내공을 밀어 넣은 검을 수직으로 세워 검은 불꽃을 막아내다가 벽으로 튕겨 나갔다.
“이야…….”
주양위의 아들이 감탄사를 내지르면서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이서휘도 암행술로 모습을 감췄다. 이서휘는 검대주가 튀어 나갈 때부터 눈을 부릅뜨고 주양위의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이 흐르고, 이서휘는 암행술을 펼쳐 귀신처럼 남궁위 주변에 도착해 있었다.
“후후…….”
남궁위를 죽이기 위해 다가왔던 주양위의 아들이 이서휘의 기를 알아채고 느닷없이 공격을 펼쳤다.
까앙!
이서휘가 검을 들어 막아내자, 주양위의 아들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연기가 흩어지자, 여전히 내공을 쏟아내고 있는 남궁위와 주양위가 보였다.
그때 이서휘는 흩어지던 연기가 누군가의 움직임 때문에 일렁이는 것을 보고 벼락같이 튀어 나가서 남궁위의 앞에 검막을 뿌렸다.
서걱…… 타다다다다닥!
수십 개의 흑침이 검막에 튕겨 나왔다. 동시에 이서휘와 주양위의 아들이 다시 맞붙었다.
챙챙챙챙챙챙!
“와…… 너 부대주라며?”
주양위의 아들이 손에 든 비수로 이서휘를 몰아붙이며 빈정거렸다. 이서휘가 대꾸를 하지 않자 이서휘의 검을 튕겨내던 주양위의 아들이 “흥!” 소리와 함께 마기를 좌라라락 내뿜었다.
콰아앙!
이서휘가 한 모금의 피를 뿜어내며 대청 벽으로 날아가고, 동시에 까앙! 소리와 함께 천라각주 유백의 몸이 광풍을 일으키면서 날아와 일월쌍도를 앞세워 주양위의 아들과 맞붙기 시작했다.
주양위의 아들이 유백의 쌍도를 막아내며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핫! 재미있구나! 군림맹이 이리 재미있는 곳이었더냐!”
☆ ☆ ☆
남궁위는 이서휘가 검기를 날릴 때부터 벌어진 소란 덕분에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겠다는 의지보다, 군림맹을 위해 주양위를 죽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묘한 일이다. 마도는 남궁위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 순간에 남궁위는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주양위를 노려봤다. 마도가 끼어들지 않으면 끝까지 내공 승부를 내려 했던 남궁위였다.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주양위도 못 죽이고 일이 틀어지겠구나.’
오늘의 이 생사비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궁위가 승부수를 쥐고 있었다. 처음부터 남궁위가 희생을 각오 했었기 때문이다.
남궁위의 승부수는 천장강림(天將降臨)을 사용할 때부터 띄워져 있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리라…….
남궁위는 주양위의 사제가 부대주들을 쓰러뜨릴 때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내공을 분리해 운용했다.
죽음을 앞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위험천만한 행동.
그러나 남궁위는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천장강림(天將降臨)의 의미였으니까.
단순히 내공을 내보내는 것으로 천양육합신공(天壤六合神功)의 비기가 될 수 없다.
남궁위가 내공을 겨루는 와중에 처음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준비를 마친 남궁위의 눈동자에 백색 뇌전이 깃들었다.
‘가보자…… 군림맹을 위하여…….’
주양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남궁위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나, 주양위도 방법이 없었다.
내공을 쥐어 짜낼 뿐이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주양위의 내공이 남궁위를 조금씩 밀어냈다. 이어서 남궁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남궁위의 얼굴이 주양위의 밀려드는 내공에 부르르 떨리고 있다. 내공을 분리해 운용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
주양위가 속으로 외쳤다.
‘이겼다!’
그와 동시에 마치 해일을 일으키듯 일어난 주양위의 장력이 굉음과 함께 남궁위의 전신에 쏟아졌다.
그에 맞춰 남궁위의 몸이 순식간에 백색의 호신강기로 휩싸였다. 남궁위는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만 사용해 호신강기로 돌리고 나머지 힘을 주먹에 모았다. 호신강기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남궁위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먼지가 피어오른다. 정신이 깨어 있던 모든 자들이 일체의 동작을 멈추고 귀를 막아야 할 만큼 끔찍한 소리였다. 굉음과 연기 속에서 남궁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강림으로 내뿜고 있던 백색의 뇌기를 잠시 갈무리했던 남궁위다. 결국 주양위의 장력을 온몸으로 받아낸 남궁위가 무뚝뚝한 얼굴로 주먹에서 백색의 뇌기를 내보냈다.
“……!”
주양위의 신형이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공중으로 솟았다. 그때였다. 주양위가 물러나는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백색의 뇌기가 회오리를 치며 뻗어 나왔다.
남궁위의 주먹을 키워 놓은 듯 한 뇌기다. 이윽고 하늘의 뇌기를 머금은 듯한 남궁위의 주먹이 무자비한 굉음을 내뿜으며 주양위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남궁위의 뇌기에 맞아 피를 내뿜은 주양위의 몸통이 대청의 벽을 뚫고, 이어서 수호전의 외곽 담을 부수고도 한참을 날아갔다. 차가운 바닥에 누운 주양위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하고 떨더니 이내 멈췄다.
동시에…….
툭―!
무언가 끊어진 듯한 불길한 소리가 들리며 남궁위가 주먹을 힘없이 늘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털석 소리와 함께 남궁위가 그 자세로 굳은 듯이 멈췄다. 양 주먹은 무릎 위에 놓았고, 눈은 감긴 상태다. 온몸이 찢겨나간 것처럼 보이는 남궁위의 상체는 주양위의 장력 때문에 군데군데 붉은 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외쳤다.
“맹주님!”
“형님!”
주양위의 사제가 남궁익현의 몸을 튕겨 내고, 대청의 구멍을 빠져 나가 쓰러진 주양위의 멱살을 붙잡고 어깨로 끌어 올린 후 껑충껑충 뛰면서 군림맹 바깥으로 순식간에 도망갔다.
그 와중에도 놀랍게도 주양위는 아직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었다. 사제가 자신을 업고 가는 와중에도 주양위는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사제…… 어찌…… 혼자 도망을…… 번뇌(煩惱)…… 는…….”
주양위의 사제가 싸늘한 얼굴로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알아서 오시겠지. 고귀하신 분인데 저런 포위망 하나 못 뚫을까?”
“그러지 말고 되돌아 가…….”
“말하지 마시오.”
주양위의 사제, 간천(簡天)은 사형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를 꽈드득 물었다.
☆ ☆ ☆
마교십존(魔敎十尊)의 일원인 번뇌마존(煩惱魔尊)은 천라각주의 쌍도를 튕겨낸 후 신형을 감추고 어둠에 숨어서 남궁위에게 다가갔다. 천라각주 유백이 외쳤다.
“맹주님을 지켜라!”
번뇌마존은 자신의 손으로 남궁위의 숨통을 끊어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다섯 개의 검기가 남궁위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쐐앵! 쐐애애앵! 쐐애앵! 쐐애애애앵! 쐐애앵!
담긴 힘도 모양도 제각각인 총 다섯 개의 검기가 무릎을 꿇고 있는 남궁위의 좌측, 우측, 머리 위를 향해 뻗어 나갔다. 군림오검대 대주들이 충격을 받아 튕겨 나갔던 벽 쪽에서 일어나, 남궁위 쪽으로 달려 나가며 뿌려댄 검기다.
이서휘가 은신술을 찾아내던 모습을 보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동시에 검기를 내질렀던 것.
콰앙! 소리와 함께 번뇌마존(煩惱魔尊)이 모습을 드러내며 검기를 막아내자, 타다다다닥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서휘가 질풍처럼 달려 들어 자강검을 쥐고 번뇌마존에게 돌진했다.
챙챙챙챙!
번뇌마존은 기가 찼다. 자신보다 내공이 훨씬 부족한 놈이 또 다시 다가와 악착 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기이한 놈이로구나.’
자강검을 부러뜨릴 생각으로 내공을 주입해 비수를 그은 후 마기를 내보냈다. 콰아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튕겨 나갔다. 하지만 비수는 여전히 자강검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달아 천라각주와 군림오검대 대주들이 달려왔다.
쐐앵!
천라각주 유백이 가장 먼저 도착해 쌍도를 교차해 휘둘렀으나, 이미 번뇌마존은 은신술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여전히 주양위의 아들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검대 대주들이 급히 수호전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벽으로 튕겨 나갔던 이서휘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다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 쫓지 마십시오!”
하지만 장시우를 제외한 대주들은 모조리 바깥으로 나간 상태였다.
소란을 듣고 온 군림맹의 무인들이 수호전 외곽을 모두 포위하고, 일부는 주양위의 사제를 추격했다. 일부는 경공을 펼치는 대주들을 무작정 쫓아갔다.
이서휘의 말을 듣고 우뚝 멈춘 유백과 장시우, 남궁익현이 남궁위의 상태를 살폈다.
이서휘가 가슴을 붙잡고 일어났다. 호흡이 거칠고 온몸이 욱신거리는 상태였으나 이곳의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라각주 유백이 말했다.
“내가 나가서 지휘해야 할 것 같다.”
그 소리에 이서휘가 다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각주님, 안 됩니다!”
유백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이서휘를 쳐다보자, 이서휘가 자강검을 쥐고 걸어오며 말했다.
“이 새끼, 아직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신술을 유지하면서 경공을 빠르게 펼칠 순 없습니다. 바깥에서 대주님들이 찾지 못했다면 근처에 있는 겁니다.”
그 말에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하고 싸늘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천라각주 유백이 일월쌍도를 움켜쥐고 어느새 조용해진 대청을 훑어 봤다.
“이곳에 아직 있다고? 그렇게 간이 클 수 있단 말이냐?”
이서휘, 장시우, 유백, 남궁익현이 남궁위의 동서남북에 자리를 잡아 호위를 펼쳤다.
천라각주 유백이 쌍도를 쥐고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며 남궁위의 표정을 살폈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서휘가 여태 보여준 행동에서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터라, 유백은 긴장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남궁위를 지켰다.
안채에서 제갈해연을 포함한 수호전 소속 의료인(醫療人)들이 몰려나와 대청 바닥에 쓰러진 부대주들과 화지련에게 나뉘어 다가갔다.
천라각주 유백이 공야청을 불러 말했다.
“맹주님이 지금…….”
어떤 상태이신가 하며 물어보려 했으나 공야청이 알 리가 없겠다는 생각을 한 유백이 침묵에 빠져 들었다. 남궁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비무 참관이 거절되었던 수호팔검 중 네 명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자, 유백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대체 어디 있다가 나오는 거냐?”
그러자 수호팔검 한 명이 대꾸했다.
“저희는 전주님의 명에 따라 천뢰각주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소동을 듣고.”
한신을 지켰다는 말에 유백이 끄응 소리를 내뱉으며 더 다그치질 못했다. 남궁익현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유 각주, 비무가 이리 될 줄 자네는 알았나? 검대주와 자네까지 있었는데 결과가 이리 되었네. 저들은 그냥 내 명령을 받아 물러나 있었을 뿐이야. 부상을 당한 한신 각주를 호위하고 있었네. 그만 하게.”
천라각주 유백이 화를 내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이서휘는 누가 화를 내든 말든 눈을 빛내며 대청 곳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이서휘의 말대로였다.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있던 번뇌마존이 남궁위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있고, 검대 대주로 보이는 자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천라각주 유백이 수호팔검에게 화를 내는 것도 다 지켜보고 있었다.
번뇌마존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이서휘를 노려봤다. 이서휘가 자꾸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노려보는 게 아닌가? 이서휘의 눈이 귀신처럼 빛나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남궁위 새끼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주양위의 아들로 신분을 내세웠던 자.
하지만 그의 정체는 교주에게 선택 받은 자…… 마교십존(魔敎十尊)의 일원인 번뇌마존(煩惱魔尊)이다.
번뇌마존은 결국 수호전의 대청을 그대로 빠져 나왔다.
번뇌마존은 무척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군림맹을 벗어났으나 마음은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 ☆ ☆
서늘한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다. 귀신처럼 움직이던 주양위의 사제는 사형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 못 버티겠군. 빌어먹을…….’
“사형…….”
“간천아.”
간천(簡天)이라 불린 주양위의 사제는 사방팔방이 고요한 숲 속으로 들어가 주양위를 눕혔다. 주양위의 몸은 전신의 근육이 끊어진 것처럼 흐물흐물한 상태였다. 한데, 간천(簡天)은 왠지 자신의 사형을 이렇게 만든 남궁위가 밉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실로…… 부끄러운 모습이 전혀 없는 무위를 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천은 기습을 선택했다. 자신이 나서서 남궁위를 죽이는 게 가장 좋은 상책이라 여겼다. 하지만 실패했다. 빌어먹을 백도의 놈들이 악을 쓰고 달려 들었다. 강한 놈도 약한 놈도 눈에서 불꽃을 뿜어내던 것을 간천은 똑똑히 봤다.
‘빌어먹을 벌레 같은 놈들이…….’
그 덕분에 근 오십 년을 함께 한 사형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찼다. 주양위도 죽음을 예감했는지 누운 채로 간천을 바라봤다. 간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주양위다.
“천아…… 부탁한다.”
“싫소.”
“부탁한다.”
“빌어먹을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 따위 부탁이오?”
“부탁…….”
그 말을 끝으로 주양위의 숨이 끊겼다. 간천이 황당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싫다고…… 사형! 죽은 게야?”
간천이 냉소를 터트렸다. 따지고 보면 번뇌마존(煩惱魔尊) 때문에 죽은 사형이다. 간천은 품에서 화골산(化骨散)을 꺼내 주양위의 시체에 뿌렸다.
간천의 입에서 알 수 없는 기괴한 웃음과 말이 흘러 나왔다.
“클클클…… 십존이라니……. 교주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네 덕분에 내 사형이 죽었다. 클클클…….”
간천이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도 없는 어둠을 잠시 돌아봤다.
“빌어먹을 번뇌야…….”
주양위는 자신의 가문에서 배출해, 마교 교주에 의해 십존으로 지명된 번뇌마존을 끝까지 보살펴 달라고 간천에게 부탁하고 죽어갔다. 아직도 간천의 귓가에 사형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간천의 입가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클클클……. 싫다니까.”
간천은 마교가 장악한 자신의 마가로 돌아가는 방향을 바라보다, 코웃음을 내뱉고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간천의 싸늘한 말 한마디가 화골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주양위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잘 가시오, 사형. 나는 내 갈 길을 가리다.”
이서휘는 장시우, 유백, 남궁익현과 함께 밤이 새도록 남궁위를 지켰다.
주양위의 장력을 몸으로 받아내고, 뇌기를 되돌려준 남궁위다.
이서휘는 마음이 씁쓸했다.
‘군림맹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맹주님이 마음 편히 비무에 임했을 텐데.’
남궁위는 자신이 서둘러 매듭을 짓지 않으면 다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다.
돌이켜 보면, 남궁위가 사라진 사건은 이서휘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후 구심점을 잃은 세력이 된 군림맹이 아니던가.
회귀한 후 나름 애를 쓰긴 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동이 틀 때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남궁위가 어서 깨어나기만을 바랐다.
어느새 추적에 나섰던 자들이 다시 맹으로 복귀했다. 일부가 수호전으로 왔으나 천라각주 유백이 일일이 돌려보냈다.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
남궁위가 웅혼한 내공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죽은 듯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남궁위는 아침 해가 뜰 무렵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숨을 토해내는 소리에 수호전에 머무르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맹주님…….”
남궁익현의 말에 남궁위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군림맹은?”
그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친 자는 없느냐, 죽은 자는 없느냐, 예기치 못한 일은 없었느냐 등등. 그 모든 걱정이 담겨 있는 물음이다.
남궁익현이 대꾸했다.
“무사합니다.”
남궁위가 말했다.
“그럼 됐다.”
어느 정도 기력이 섞인 말에 지켜보던 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스스로 일어난 남궁위가 주양위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남궁익현이 대답했다.
“주양위의 사제가 쓰러진 주양위를 업고 사라졌습니다.”
남궁위는 자신의 뇌기에 뚫린 벽을 바라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걱정 말아라. 살아날 수 없을 터이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궁위는 남궁익현과 모습을 감췄다. 당분간 맹주가 머무르는 장소는 극비에 붙여질 것이다. 아직 찾아내지 못한 간자(間者)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폐관수련에 들어가는 것처럼 맹주 남궁위는 종적을 감췄다.
☆ ☆ ☆
이서휘가 장시우와 함께 질풍검대로 돌아왔다.
장시우가 말했다.
“농락당한 기분이군. 세 명 다 살려보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네.”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낼 일이다. 이서휘는 과거에도 왜 이 일이 비밀에 묻혔는지 알 것 같았다.
이서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자가 마교 교주였다고 해도 죽었을 겁니다. 사제 놈이 시체를 감추고 도망을 쳤겠죠.”
이서휘는 마도가 잘 사용하는 화골산을 떠올렸으나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장시우가 말했다.
“마도 놈들이 맞겠지? 우리가 어렸을 때 말로만 들었던…… 그 마도 말이다.”
“네. 직접 보셨지 않습니까.”
그 말에 장시우가 대꾸했다.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아, 넌 아까 어찌 그렇게 눈치를 빨리 채고 날뛰었느냐?”
장시우의 물음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그 아들이라는 놈이요. 분위기가 내내 이상했습니다. 주양위의 사제보다 신분이 높아 보였고요.”
“그래? 난 전혀 못 느꼈다. 기도가 셋 중에서 가장 약해 보여서 말이지.”
그 말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더 이상했죠.”
장시우가 숙소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며칠, 훈련은 취소하고 경계나 강화하자.”
“네.”
“난 대주들이나 좀 보고 와야겠다.”
“다녀오십시오.”
장시우와 헤어진 이서휘는 숙소로 돌아와 몸 상태를 살폈다. 잠을 자거나 운기조식을 해야 했는데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있어 쉬이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도삼의 말이 떠올랐다.
[강자존 약자멸(强者存 弱者滅)이라 부른 피의 축제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지요. 열 명이 남을 때까지 죽고 죽이기를 반복…….]
“축제라…….”
유난히 축제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도삼의 말은 이서휘가 알고 있는 미래와 접점이 없었다. 무언가 놓치는 게 있는 기분이다.
이서휘가 도삼이 했던 말에서 중간을 쏙 들어내고 중얼거렸다.
“축제…… 죽고 죽이기를 반복…… 흥, 그러면 열 명이 아니라 한 명이 남겠군. 그게 천마인가?”
천마교의 구성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이서휘다. 하지만 검제 시절 전후에도 주양위라는 고수는 없었다. 주양위의 무위를 떠올려 보면 검제 이서휘도 천마교의 사천왕을 베듯이 쉽게 상대하진 못했을 터.
이서휘의 생각이 천마교 사천왕에 이르자, 불쑥 천마 위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좋구나.]
그 단 한마디의 어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이서휘다. 복잡해진 머리를 헝클며 대꾸했다.
“좋기는 개뿔이.”
이서휘는 천마 위극신의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한다. 목소리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이서휘다. 얼굴은 몰랐지만, 자신과 나이가 비슷할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문득 이서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들이 설마……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을 축제라 한 것인가?’
그럴 수 있는 놈들이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강자존 약자멸은 축제다. 그리고 그 축제에서 승리한 놈이 바로 천마 위극신일 터였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신에 만약 마교십존이 이서휘의 예상대로 서로 공을 세우듯이 분탕질을 벌이며 경쟁하고 있는 관계라면 이서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아질 터였다.
이서휘가 자연스럽게 사패를 떠올렸다.
‘하루라도 더 빨리 만나자꾸나.’
☆ ☆ ☆
서찰을 품에 넣은 무인이 객잔 지하에 위치한 도박장으로 내려갔다. 제지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급한 말투로 입을 열며 지나쳤다.
“나다, 비켜라.”
제지하던 자들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무인의 정체를 알아채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뿌연 연기와 초췌한 눈빛을 발산하는 사람들을 지나친 무인은 철문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두 번, 이어서 세 번 그리고 잠시 후에 한 번.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 위에 있던 공간이 열리면서 누군가의 안광이 드러났다.
“웬 일인가?”
무인은 서찰에 찍힌 문장이 보이도록 내밀었다.
철문이 곧바로 열렸다.
철문 안에는 수십 개의 감옥이 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불길한 적막감이 감돌던 감옥에 무인이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쇠사슬 끄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인이 빠른 걸음으로 걷자, 감옥 안의 누군가가 가래침을 퉤 하고 뱉으며 중얼거렸다.
“퉤! 음마 새끼들. 뒤져서 강시나 돼라!”
무인은 욕설을 무시하고 복도 끝에 도착해, 국방부 직할부대 및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 장치를 누르고 그그극 소리와 함께 다시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층마다 지하 감옥이 펼쳐져 있었다.
덜컹, 소리와 함께 최하층에 내려선 무인.
철문을 열고 나가자 상상 이상으로 드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드넓은 공간에 단 두 명이 중원전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십대 남자는 마교 교주의 후계자 후보로 선택 받은 마교십존의 일인.
마도에서는 이 남자를 음마존(淫魔尊)이라 불렀다.
그 옆에는 음마존이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무공을 직접 가르치고 훈육을 담당한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특이하게 서로 존칭을 쓰는 관계였다.
세가의 공자처럼 말끔하게 생긴 음마존이 무인을 보며 말했다.
“누구 소식인가?”
대기하고 있던 무인이 서찰을 두 손으로 올리며 대꾸했다.
“번뇌마존의 소식입니다.”
“살펴보마.”
무인은 말 한마디를 더 붙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물러 나왔다.
하지만 음마존은 서찰은 열어보지도 않고 백발노인과 한참동안 중원지도를 보며 목각 인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목각 인형이 지도에 놓일 때마다 따각, 따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도 바깥에도 조그만 상자에 다수의 목각 인형이 담겨 있었다. 어느 인형은 배에 죽을 사(死) 자를 붙이고 있었고 어느 인형은 불명(不明, 확실하지 않음)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있었다. 불명이라 적힌 인형들은 특수 제작된 것처럼 다른 인형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내려다보는 지도는 무척 특이했다.
장기판처럼 초나라(楚)와 한나라(漢)를 지칭하는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뉜 게 아니라 전국시대(戰國時代)처럼 군소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요 세력의 핵심 건물은 실제 모양과 흡사하게 전각되어 있었다. 그 건물 주변에 크고 작은 목각 인형들이 백, 적, 흑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백색은 백도.
흑색은 마도.
적색은 흑도맹을 포함해 어디에 붙을지 명확하지 않은 세력들.
백도 세력이 뭉쳐 있는 곳곳에도 드문드문 흑색 머리띠를 두른 인형이 놓여 있었다. 간자(間者)였다.
인형의 크기는 그야말로 제각각.
아예 존재감을 달리해 제작된 특수 인형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일에서 칠의 크기로 나뉘어 있었다.
각 크기는 무림인의 무공 수위를 추정하고 있었다.
맹주 남궁위를 비롯해 무림에 널리 알려진 주요 인사들은 실제 모습과 흡사하게 인형이 제작되어 있었다.
인형들이 펼치는 전황은 복잡했다.
일에서 삼의 크기를 지닌 이름 없는 인형은 백도 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사 이상의 크기를 가진 인형은 마도 세력이 더 많았다. 적색은 불쑥불쑥 중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때문에 전장은 혼돈 그 자체.
음마존은 마도의 수를 불리면서 백도를 암중에서 각개격파 하는 형국으로 인형 말을 이리저리 놓고 있었다.
음마존이 서찰을 보고 싶어 하는 백발노인을 향해 물었다.
“노야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남궁위가 죽었겠지요. 살았다 하더라도 은퇴.”
그 말에 음마존의 표정에 감탄의 빛이 서렸다.
“주 선배를 너무 높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백발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주양위와 간천의 인형을 집어 들고, 군림맹에서 독보적으로 큰 인형인 남궁위를 쳐냈다.
“주 선배, 혼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간천도 있습니다.”
음마존이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주양위와 간천의 인형을 살폈다. 마도 세력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음마존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그제야 서찰을 뜯었다. 자신의 속마음은 숨긴 상태.
‘과연 그럴까요?’
음마존이 기대된다는 듯 손가락을 경박하게 움직였다가 서찰 내용을 쫙 펼쳤다. 그야말로 간단하게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주양위 사망 추정.
-간천 이탈.
-남궁위 생사 불명.
음마존은 서찰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캬…… 이거, 이거!”
반면에 백발노인은 서찰 내용을 읽자마자 침음성을 흘렸다.
음마존이 말을 이었으나, 걱정되는 말투는 아니었다.
“돋보이긴 했으나 실로 무리였습니다.”
이어서 음마존은 주양위의 인형을 집어 들고 배 부분의 껍질을 벗겼다. 죽을 사 자가 드러나자, 음마존은 주양위의 인형을 지도 옆 상자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세상일은 알 수가 없어요.”
백의 노인이 안광을 빛내며 지도에 있던 번뇌마존 인형을 손에 쥐었다.
백의 노인이 감정이 섞인 말투로 인형의 오른팔을 뜯어내며 말했다.
“번뇌마존이 자기 손으로 주 선배를 죽음으로 내몰고…….”
이어서 인형의 왼팔을 뜯으며 말했다.
“간천을 내친 격이요……. 후계자가 된 들 누구와 거사를 치르겠습니까? 양 장로? 말이야 잘 듣겠지요. 출세하고 싶은 자니까.”
그 말에 음마존이 소리 내어 웃었다.
“후후후! 자, 노야께서 의견을 주시지요. 번뇌마존을 칠까요? 아님 계획대로 갈까요.”
“그 전에…….”
백발노인이 말을 멈추더니 중원전도에서 간천의 인형을 집어 음마존 진영에 놓았다.
“간천을 취합시다.”
노야의 계획에 음마존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잘 되겠습니까?”
“제 발로 보좌 자리를 내친 간천이 어디로 숨을 수 있겠습니까? 진행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음마존이 손가락을 들어 풋슝 하는 소리와 함께 번뇌마존 인형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러자 백의 노인이 목이 날아간 번뇌마존 인형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니지요. 너무 성급하십니다. 아직 인물이 많습니다. 교주의 안목을 그리 허술히 보시면 안 됩니다.”
음마존이 비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안목…… 믿지 않게 된 지 오래요.”
백의 노인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꾸를 하면 함께 마교 교주의 안목을 의심하는 꼴이 될 터였다.
그때였다.
음마존이 불명이라 적힌 특수 인형을 하나 뽑아내더니 인형 등의 십자 톱니를 드르륵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그러자 파르르륵 소리를 내면서 검선(劍仙)의 인형이 중원전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음마존이 다그치듯 말했다.
“좀 빨리 찾아봅시다.”
하지만 백의 노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한참을 인형을 만지면서 지도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 넓은 중원전도 어느 곳에도 아직 이서휘라는 이름이 적힌 인형은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군림맹에서 이서휘의 존재감이 달라졌다. 이미 이서휘는 부대주 비무전에서 우승한 바 있다. 부대주 급에서 최강이겠거니 생각하는 자들은 이미 많았다.
하지만 주양위의 사제인 간천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펼쳤을 때, 이서휘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다. 다른 검대 대주들과 대등하게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은신한 자들을 막아내고자 감각적으로 검기를 날린 것도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소문에 소문이 더하면 명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최소, 군림맹 내부에서는 이서휘라는 이름이 연일 묵직해지고 있었다.
군림맹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깊숙한 곳.
마치 구화산의 석실과 같은 장소가 군림맹의 비밀 거처에 마련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폐관수련을 하는 장소.
가부좌를 틀고 있던 남궁위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남궁익현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맹은 어떤가?”
남궁익현이 대답했다.
“평소와 같습니다. 각주들이 여러 보고를 올렸는데 이미 맹주님과 제가 나눈 계획과 비슷하더군요.”
“후후. 그런가.”
남궁위가 별 말을 하지 않자, 남궁익현이 말을 이었다.
“천양뇌단(天壤雷丹)은 복용하셨습니까?”
남궁위가 고개를 젓자, 남궁익현이 잠시 후 우측 방에서 천양뇌단이 담긴 석합(石盒)을 들고 왔다.
남궁위가 묘한 표정으로 천양뇌단을 바라봤다.
“몇 개 남았나? 제작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가 더 남아 있습니다. 지금 하나를 드시고, 오 할 정도의 공력을 회복했을 때 마저 드십시오.”
그러자 남궁위는 다시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하고 남궁익현이 바라봤다.
저 옛날, 다른 가주들과 군림맹주 자리를 놓고 비무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표정을 보는 기분이랄까.
남궁위는 천양뇌단에서 시선을 떼고 화제를 돌렸다.
“서류나 줘보게.”
남궁익현이 내민 서류를 천천히 읽어 보던 남궁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 둘의 잘못이 가장 크네. 그냥 운룡회주만 해임하고, 후임자를 찾아보게나.”
남궁익현이 씁쓸한 말투로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서휘는 각주들 의견대로 진행해보게.”
“알겠습니다.”
남궁익현이 대답을 하고 물러 나오려 했으나, 남궁위는 무어라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남궁위가 불쑥 웃으며 남궁익현을 불렀다.
“후후, 전주.”
“네.”
“하나 남은 천양뇌단(天壤雷丹)은 이서휘에게 전달하게.”
“네?”
남궁익현이 화들짝 놀라자 남궁위가 말을 이었다.
“일을 시키려면 제대로 시켜야지. 나름 위험한 일이 아닌가?”
“그래도 천양뇌단은 대대로 남궁가에…….”
남궁위가 한층 맑고 깊어진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주양위와 겨루고 있을 때도 내 눈과 귀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있었다네. 한신과 유백은 너무 노출됐어. 임무에도 어울리지 않고. 이서휘의 가능성은 충분히 봤네. 화지련의 일도 잘 처리해줬고 말이야. 내 기대가 담긴 선물일세. 그리고 자네도 이 결정에 한 몫 했음을 잊지 말게나.”
“제가 뭐라 했었지요? 별 다른 조언은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남궁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서휘를 보고 검선 선배를 언급한 건 자네야.”
“아…… 그렇습니다. 그랬지요. 하하.”
“검선, 그 자유로운 영혼이 일전에 백도 세력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게. 우리도 비장의 한 수를 만들어 보자고. 내 승부수일세.”
남궁익현은 남궁위의 결정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이미 한신과 유백에 의해 승진을 앞두고 있는 이서휘다. 거기에 남궁위가 전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이서휘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남궁익현은 궁금했다.
남궁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기왕 그렇게 결심하셨다면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제가 직접 가져다주겠습니다. 후후, 마치 형님과 제가 한창 활동하던 때가 떠오르네요. 녀석이 놀랄 표정이 눈에 훤합니다.”
남궁위는 피식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난 조금 더 준비를 하고 취하겠네. 이서휘도 회복할 시간을 좀 더 주게. 몸 상태가 좋아진 후에 취하는 게 나을 게야.”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남궁익현이 예를 올리고 물러 나왔다. 그의 손에는 남궁세가의 단약인 천양뇌단(天壤雷丹)이 담긴 석합이 들려 있었다.
전황을 좀 더 멀리서 내다보고 있는 남궁위다.
마치 음마존과 백발노인이 중원전도를 내려다 보며 인형을 여기저기 두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랄까.
남궁위는 본능적으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이서휘라는 수가 판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내다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얻은 예지력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 ☆ ☆
이서휘는 두문불출 하면서 부상을 빙자해, 운기조식을 하며 대주천을 준비하고 있었다. 며칠 후 전령 한 명이 이서휘의 숙소를 찾았다.
“이 부대주님, 천라각주님의 호출입니다.”
“유 각주님이? 곧 가보겠네.”
“네.”
암연심법으로 운기조식에만 집중하던 이서휘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 곧장 천라각으로 향했다.
천라각주 유백의 집무실은 한신과는 달리 천라각 꼭대기에 있었다.
이서휘가 각주실에 도착하자, 유백이 실실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 와라. 몸은 괜찮느냐?”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 각주님은 어떠십니까?”
유백이 대답했다.
“나는 문제없다.”
이서휘가 든든한 형제를 바라보듯 유백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유백이 누군가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들고 이서휘에게 말했다.
“질풍검대 이서휘 부대주.”
이서휘가 뜨악한 표정으로 잠시 자세를 고쳐 잡은 후 대답했다.
“네.”
이서휘의 행동에 유백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긴장할 것 없다. 중요한 것만 내가 읽으마.”
“네.”
“이서휘를 질풍검대 부대주 직위에서 해제한다.”
“네?”
이서휘가 되묻자, 유백이 말했다.
“끝까지 들어.”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새로운 검대 창설인가.’
유백이 말했다.
“새롭게 창설되는 조직의 대주로 임명한다. 임무 내용을 각주에게 듣고 활동 기안과 조직 이름, 구성원 계획을 제출해라. 인원은 쌍각의 각주들과 차차 상의하도록. 이상 남궁익현.”
이서휘의 속이 철렁했다.
‘뭔데? 당황스럽군.’
유백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말로 전하마.”
“네, 각주님.”
“서류 내용 그대로다. 임무는 넓게 말하면 무림의 동향, 마도의 동향 등을 외부에서 조사해 각주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 쉽게 말해 작전대다. 검대주와 동격이다. 필요한 인원은 네가 보고하고 충원하는 식. 다만 각주의 검토가 있을 것이다. 또한 임무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과 지원도 쌍각이 맡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각원들도 모른다. 한신과 내가 집행할 거니까.”
그야말로 파격적인 내용.
유백이 입을 열었다.
“실은 한 각주와 내가 상의해서 올린 보고를 승인하신 것이다.”
이서휘가 침음성을 흘렸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유백이 말을 이었다.
“한 각주를 중독시킨 진사필과 비롯해 군림맹 내에 간자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의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지. 다행히 넌 아직 무림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해 가나?”
“이해는 갑니다만.”
유백이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그대로 검대에 있으면 아마 가장 유력하게 차기 검대주가 될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차기 검대주가 아니라 간자가 섞이지 않은 조직이 모아 오는 정보다. 쌍각과 군사회도 배제한 조직 말이지. 때문에 넌 혼자서 출발해 믿을 만한 자로 인원을 점차 구성하면 된다.”
이서휘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질풍검대와 장 대주님은 그럼…… 부대주 자리도 비고.”
“후후. 별걸 다 걱정한다. 아쉬워서 그러느냐? 장 대주랑도 이야기를 마쳤다. 질풍검대는 이건영을 부대주로 승격시킬 예정이다.”
“그렇습니까?”
이서휘가 마음이 조금 놓인다는 듯이 대꾸했다.
유백이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질풍검대 부대주란 것을 잊지 말거라. 장 대주가 곧 장기 임무 파견으로 보고를 올릴 것이다. 이 점 신경 쓰도록. 그 서류는 천천히 작성해서 나중에 가져오거라.”
“알겠습니다.”
“연락 방법이나 그런 것은 추후 함께 논의해보자.”
“네.”
유백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어쨌든 축하한다. 이 대주. 그만 일 봐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서휘는 유백에게 예를 올리고 천라각을 빠져 나왔다.
☆ ☆ ☆
“당황스럽군.”
이서휘가 중얼거리면서 질풍검대 숙소로 돌아가는데 어느새 다가온 장시우가 이서휘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붙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이제 이 대주라 불러야 하는 거냐?”
“하, 하, 하…….”
이서휘가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마른 웃음을 짓자 장시우가 말을 이었다.
“진작 말해줬어야 하는데 두 각주님이 조심하라 이르셔서 말이지. 어쨌든 대원들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계속 이 부대주다, 서휘야.”
“알겠습니다.”
“일 봐라.”
장시우가 어깨를 두드리더니 씨익 웃으면서 멀어졌다. 한데 장시우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쓸쓸했다. 마치 자기 손으로 키운 새끼를 어디론가 보내는 기분이랄까. 또한, 맡은 임무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서휘라고 다를까?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검대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장시우의 등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실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일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정보를 모아 보고하는 것보다,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에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숙소에서 이서휘는 서류를 들고 고민을 하다가 자신이 이끌 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월야대月夜隊]
그렇게 이서휘는 은밀하게 군림맹의 월야대주로 승진을 했다.
어차피 불러줄 사람도 몇 없을 테지만…….
한신과 유백은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서휘의 기질과 무공을 살펴보고 내린 결정일 터.
군림맹이 수행해야 할 일을 가장 적합해 보이는 자에게 맡긴 셈이었다.
이서휘가 의자에 앉아 책상에 발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하아, 기가 막히군.”
놀랄 일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말도 없이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불쑥 들어왔다.
이서휘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전주님. 어찌 이곳에.”
남궁익현이 책상 위에 정체 모를 석합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직접 할 말도 있고 해서 내가 왔네.”
이서휘가 뜨악한 표정으로 남궁익현과 석합을 번갈아 바라봤다.
남궁익현이 말했다.
“이름은 정했나?”
“방금 월야대라 이름을 정했습니다.”
“월야대주, 맹주님의 부담스러운 선물을 전하게 됐군. 천양뇌단이라고 들어봤겠지?”
“네. 들어봤습니다만.”
“맹주님의 명령이니 이 자리에서 바로 복용하게.”
남궁익현이 석합을 가리켰다.
이서휘가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사레가 걸려 한참을 쿨럭 댔다.
그러자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놀렸다.
“자, 이제 월야대주님이 편히 드실 수 있도록 이 남궁 아무개가 바깥에서 경계를 서 보겠네.”
이서휘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아 자꾸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지금, 아, 제가, 어찌, 그, 전주님을.”
“항명을 하시겠다?”
“아닙니다. 그 말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게. 앞으로 맡아야 할 일은 천양뇌단보다 수십 배는 더 중요한 일이야. 이깟 단약 하나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안 그런가?”
이서휘가 남궁위의 말에 쉽게 대답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오래 걸리겠나?”
“네? 아, 아닙니다.”
남궁익현이 바깥에 있겠다는 데 대체 누가 걱정을 할 수 있을까.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아니, 남궁익현이 깜짝 놀랄 만큼 적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남궁익현이 이서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기다리겠네. 차분히. 알겠지?”
남궁익현이 나가자 이서휘가 즉시 책상에 있는 석합을 열었다. 이서휘의 입이 벌어졌다. 코가 예민한 이서휘다. 단약의 냄새가 스스로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천양뇌단(天壤雷丹)이다.
남궁세가가 보유한 최고품의 단약이다. 세가와 관련된 공을 세우거나 가주가 진심을 담아 사례를 할 때나 등장하는 단약인 것이다. 효능도 좋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이서휘, 너는 남궁세가와 연을 맺은 것이다 라는 암묵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서휘가 황당함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물론 드넓은 무림엔 천양뇌단보다 더 좋은 영약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천양뇌단만큼 이서휘에게 효율적인 영약은 드물 것이다. 천양뇌단은 남궁세가가 사용하는 무공과 연계되어 극양의 기운을 머금은 단약이다. 월단화를 취해 쌓은 내공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천양뇌단이 더해지면 순식간에 대주천까지 가능해질 터.
이서휘가 즉시 천양뇌단을 섭취하고 대주천을 준비했다.
“자, 가보자. 일전에도 뚫어냈던 그 경지로…….”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빛을 발하던 이서휘의 눈이 감기면서 자신의 신체 내부를 심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