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11화 (11/43)

<5장. 도전자>

이서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남궁익현이 이서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피곤한 일이지. 형님께서 맹주로 등극하신 이후로 무림의 고수들에게 여러 차례 도전을 받으셨다.”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남궁위가 맹주에 등극했을 당시는 이서휘가 입맹하기 전이다. 남궁익현의 말이 이어졌다.

“도전이 끊이지 않더구나. 결국 맹주님은 어느 날 생사비무를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면 도전자가 줄어들 것이라 예상하셨지.”

남궁익현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더구나. 맹주께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가 여럿 찾아와 생사비무가 벌어졌다. 그 중 한 명은 맹주님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고강했지. 말 그대로 생사비무였다. 맹주님이 이기신 것은 축하할 일이었으나 부상을 당한 그 고수는 며칠 후에 군림맹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공야청을 비롯해 근방에서 뛰어난 의원을 급히 데려와 그 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었다. 운이 따르지 않았지.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이였다. 맹주님은 그 이후로 모든 비무를 거절하고 은둔자처럼 지내셨다.”

“아…….”

이서휘는 그제야 남궁위가 왜 그렇게 두문불출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남궁익현이 말했다.

“그러니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그 자의 제자가 나타났으니 말이야. 더군다나 그날의 비무를 똑바로 지켜보고 임종까지 곁에 있었던 아이다.”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누군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남궁익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지련이란…… 소녀, 아니 이제 여인이 되었겠군.”

이서휘는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화지련이었어?’

화지련, 이서휘가 검제라 불리는 시대에 여중제일고수를 다투던 여인의 이름이다.

무림인들은 여중제일고수를 거론할 때 북화남옥(北花南玉)이란 말을 자주 썼다.

북화가 화지련(花持蓮)이었고, 남옥이 옥의림(玉懿琳)이다.

이서휘는 화지련을 생각하자 이가 갈렸고, 옥의림을 생각하자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화끈거렸다.

이서휘 역시 화지련과 큰 원한은 없다. 그러나 사사건건 이서휘를 심리적으로 괴롭히고 부딪쳤던 여인이다.

이서휘가 콧방귀를 꼈다.

‘이 녀석이 이런 사연이 있어 나한테 불만이 많았던 건가?’

북화남옥은 무공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부터 미모가 대단하여 많은 무림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북화 화지련은 성격이 괄괄했는데 많은 남자들이 떠받드는 것에 대해서도 무척 우쭐해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검제 시절에 알게 되어, 화지련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이서휘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성격 자체가 이서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옥의림은 다르다. 이서휘의 심정이 묘하게 요동쳤다.

화지련이 드세고 강한 여인의 선두 주자였다면, 옥의림은 정반대였다. 화지련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무공 실력을 갖춘데다가, 사근사근한 성격을 지닌 미인이었다. 이서휘가 회귀한 이후로 가장 만나고 싶어 했던 여인이 바로 옥의림이었다. 북화남옥 모두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나, 이서휘는 늘 옥의림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었다.

☆ ☆ ☆

남궁익현은 이서휘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마치 아는 사람의 이름을 들은 표정이구나.”

“아,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이지. 나와 맹주님도 화지련의 사부에 대해서는 평생 들은 바가 없었으니. 어쨌든 맹주님이 그 제자에게 질 까닭은 없으나 골치 아프게 됐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기지 못할 비무를 어찌…….”

“그녀가 사부의 병상에서 당당하게 약조하더구나. 자신이 십 년 후에 군림맹에 도전할 것이라고. 죽어가던 자가 어찌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느냐? 나도 잘 모르겠다. 제자의 발전을 바라고 그러라 한 것인지도…… 본인만 알겠지.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는 형식으로 진행하면.”

남궁익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문제는 여기부터다. 화지련이 맹주님께 도전한다는 얘기가 은밀하게 퍼진 모양이야.”

이서휘의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퍼졌다고? 화지련이 입방정을 떨었나.’

남궁익현의 말이 이어졌다.

“애초에 맹주님의 위신을 고려하면 까마득한 후배와 겨룰 수 없는 노릇이다. 한데 거절하기 어려운 여인이다. 맹주님은 생사비무를 여러 번 거절하신 상태고 말이야. 이보다 더 골치 아플 수 있겠느냐?”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점점 불길한 생각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남궁익현이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을 꺼냈다.

“서휘야.”

“네, 전주님.”

“수년 전부터 맹주님께 노골적으로 도전장을 보내던 자가 빈정거리는 서신을 보내왔다.”

남궁익현은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이서휘에게 넘기며 말했다.

“바로 엊그제 온 것이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우니 네가 읽어봐라.”

남궁익현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서휘에게 서찰을 넘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서휘마저도 조금은 의아했으나, 내용이 너무 궁금한 터라 냉큼 서찰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 ☆ ☆

보아라.

천하 영웅들에게 고하기에 앞서 마지막 기회를 주노라. 나는 기회가 날 때마다 남궁위를 일컬어 대단한 영웅이라 칭송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내가 왜 직접 보지도 않은 무위를 칭송하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는지 부끄러웠다. 때문에 나는 보잘 것 없는 무공을 몇 수 익혀, 남궁위에게 수차례 비무를 요청했다. 너희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뜻밖에도 정중한 거절을 몇 차례 받은 후에는 깨끗하게 마음을 접으려 했었다. 그러다 얼마 전 남궁위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영웅이라고? 우습도다. 누군가 영웅 남궁위가 어떤 자인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녀자의 검은 희롱할 준비가 되어 있고

영웅의 검은 모른 척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

그 이름도 거창한 군림맹의 맹주이면서

제일가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가주로다.

무림사 이래 이보다 더 훌륭했던 영웅은 없었노라.

남궁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천하 영웅들에게 이 부끄러운 행태를 고하고, 스스로 물러나라. 거절한다면 내 친히 방문하여 남궁위 이하 무인들을 모조리 꺾고 군림맹 부맹주 자리를 당당하게 요청하겠노라.

그대가 두려워하는 주양위(朱亮威)가 영웅이라 알려진 남궁위에게.

☆ ☆ ☆

이서휘는 서찰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북북 찢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이서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자 남궁익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님의 심정은 오죽하겠느냐. 겉으로는 껄껄 웃으셨지만…… 그래, 상대해주마……. 하셨다. 곧 주양위라는 자가 도착할 것이다. 그 전에 화지련이라는 여인도 올 것이고. 비무는 주양위와 벌이는 것이 치열할 것이나, 화지련에 대해서도 맹주님은 심력을 많이 소비하고 계시다. 아직까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까 말이야. 그런데다가 한신까지 이런 꼴로 왔으니 맹주님이 평정심을 되찾으실지 의문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궁익현은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서휘야.”

“네, 전주님.”

남궁익현이 처음으로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아마 그 화지련이라는 여인과 동년배일 것이다.”

“네?”

“네가 군림맹의 후기지수 자격으로 화지련을 상대해줄 수 없겠느냐? 어쩔 수 없는 은원 때문에 맹주님이 나서기엔…… 저 주양위라는 놈의 말처럼 너무 부끄러운 일이로구나.”

이서휘의 머리가 멍해졌다.

“제가요? 그녀가 바라는 게 아닐 텐데요.”

“물론 화지련이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네가 나서서 겨뤄준다면 맹주님이 헛된 오명을 얻지 않은 채로 주양위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패배하여 그 다음에 맹주님이 나서는 것은 하늘도 어쩌지 못할 일이다만……. 어쨌든 동년배 중에서는 네가 군림맹의 최강임을 얼마 전에 입증했지 않느냐? 꺾어주면 안 되겠느냐?”

이서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검제로 있던 시기에는 화지련이 맹주님과 비무를 했었다는 이야기인가? 그 젊은 나이에 맹주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면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겠지…….’

이서휘가 생각에 잠겨 있자 잠시 남궁익현도 아무 말 않고 이서휘의 대답을 기다렸다.

문제는 화지련이 아니라 남궁위와 주양위다. 이서휘는 주양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한데 얼마 전에 마교십존의 존재를 알았다. 만약 주양위라는 놈이 마교십존이라면, 남궁위가 훗날 은퇴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어쩌면 비무에서 이겼을 지라도 심대한 타격을 받아 정상적인 활동을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서휘는 남궁위와 주양위의 비무를 막고 싶었다.

그런데 막을 대의가 전혀 없다. 서찰을 읽은 이서휘마저도 속에서 온갖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않았던가. 이서휘가 남궁위였어도 나섰을 것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비무에 참석해 주양위라는 자의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서휘가 고심 끝에 대답했다.

“전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하게.”

“제가 화지련이라는 여인과 비무를 하겠습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남궁익현이 기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리 해준다면 네 부탁을 앞으로 얼마든지 들어줄 것이다. 말해 보아라.”

“다른 것은 아니옵고 저도 맹주님의 비무를 지켜봤으면 합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군림맹의 일원이기 전에 무림의 후배로서 견식을 넓히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남궁익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입회자가 한 명이면 내가 들어갈 것이고…… 그래야 비겁한 암수를 쓰더라도 내가 충분히 맹주님을 지킬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염두에 두마. 네 뜻은 충분히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전주님.”

남궁익현은 수호전 앞으로 천라각주 유백과 운룡회주 송정후가 오자, 손을 들어 잠시 제지하고 이서휘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오늘 나눈 대화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화지련이 오든 주양위가 오든 대다수의 군림맹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한신은 너무 걱정 말아라. 별일 없을 게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물러나려다가 퍼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전주님.”

“음?”

“한 각주님에게 입힌 용린갑은 쉽게 찾을 수 없는 보물입니다. 흑룡화린갑이라 불립니다. 제가 급한 마음에 한 각주님에게 입혔습니다. 혹시 모르니 맹주님께서 비무 때 사용하셨으면 합니다.”

다소 건방진 말이었지만 이서휘는 마음이 매우 절박했다. 남궁익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 나는 맹주님을 지키는 임무를 가진 자다. 무엇이든 얼마든지 권할 것이다. 참고하마.”

이서휘는 남궁위가 제발 흑룡화린갑을 입길 바라면서, 남궁익현에게 예를 올리고 수호전에서 물러 나왔다.

수호전을 나온 이서휘가 질풍검대로 향했다. 밤이 깊어 내일 아침에 객잔 쪽으로 나가보기로 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아직 남궁익현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고작 비무 두 번이다. 그런데 군림맹의 명운이 뒤흔들리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주양위라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가 설령 마교십존이라 하여도, 이서휘는 증거를 찾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놈들이다.

이서휘가 누운 채로 잠시 서찰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녀자의 검은 희롱할 준비가 되어 있고 영웅의 검은 모른 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이서휘가 너무나 억울한 심정이 들어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어떤 개새낀지 몰라도 손가락을 마디마디 부러뜨려 놓고 싶구나.”

격장지계(激將之計)임을 알면서도 이서휘는 너무나 분한 심정에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잠에 빠진 동안에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른 아침, 이서휘가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숙소를 빠져 나왔다. 질풍검대 일부와 함께 객잔 대로변으로 나갔다. 난장판이 되어 있을 터라 도리상 복구를 도와줘야 했다.

이서휘가 농담 한 마디도 안 하고 묵묵히 말을 몰고 가자 다른 질풍검대원들도 얌전히 뒤를 따랐다.

이서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통속일 것이다. 습격해서 요인을 암살하고, 비무 도전장을 던지는 놈들…….’

관련이 없었던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 결국엔 군림맹이 붕괴되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군림맹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도에 대항할 만한 세력들은 알게 모르게 이런 식으로 농락당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 둘 와해되다 보면 결국 그 자들이 결집하여 일어섰을 때 맞설 힘이 없게 된다.’

☆ ☆ ☆

이서휘가 전날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흑의인을 벴던 대로변에 도착해 질풍검대와 함께 복구를 도왔다. 다른 검대 인원들도 일찌감치 몰려나와 복구를 돕고 있었다.

시체를 치우는 자도 있고, 부서진 객잔을 복구해주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복구 도중에 이서휘를 알아보는 다른 검대 대원들이 수시로 이서휘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어? 이 부대주님.”

“고생 많다.”

“어제 엄청나게 활약하셨다면서요.”

화룡검대 소속으로 보이는 대원 한 명이 미소를 지었다.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지나갔다.

‘제대로 본 사람도 없을 텐데 무슨 엄청난 활약이냐?’

한데 제법 이서휘의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날뛴 자는 이서휘 홀로였고, 죽은 자는 여럿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떤 무인들은 천뢰각주님이 살아서 다행이라는 말도 종종 건넸다.

만나는 검대원들마다 이서휘에게 말을 걸거나 인사를 건네자, 곁에 있던 질풍검대 막내 강기찬이 탄성을 내질렀다.

“부대주님, 완전 유명인사 되셨는데요?”

이서휘는 얼떨떨했다. 강기찬의 말대로 어느새 군림맹의 무인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전령이 말을 몰아 급하게 도착하더니, 이서휘를 발견하고 외쳤다.

“이 부대주님.”

“무슨 일인가?”

“수호전에서 부르십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이서휘는 이건영에게 나머지 일을 맡기고, 군림맹으로 돌아와 수호전으로 향하기 전에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순식간에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구화산에 다녀온 이후로는 피부가 여인처럼 말끔해진 터라 제법 지체 높은 세가의 공자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수호전으로 향했다. 전달 받은 게 있었는지, 수호전 무인들이 즉각 이서휘를 안내했다.

“부대주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서휘는 수호전 무인의 안내에 따라 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을 돌아서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에는 맹주 남궁위와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누워 있는 천뢰각주 한신 곁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탁자엔 흑룡화린갑이 단정하게 접혀서 놓여 있었다.

한신의 꼴도 말이 아니었지만, 남궁위의 안색도 초췌해 보였다. 그 안색을 보니 이서휘의 마음이 더욱 뜨끔했다. 이서휘가 들어오자 한신이 반갑게 말했다.

“서휘야. 어서 오너라.”

“네. 맹주님, 전주님, 각주님을 뵙습니다. 각주님은 좀 어떠십니까?”

“회복 중이다.”

한신이 대꾸하자, 남궁익현이 엄한 목소리로 말을 받아쳤다.

“흥, 이제 당분간 금주라 죽을 맛이겠지.”

“끄응.”

한신이 대꾸 한마디 못 하자, 이서휘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남궁위가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얘기 들었다. 마침 화지련이 대청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다더구나. 함께 나가 보자. 신이는 나오지 말고 여기서 쉬거라. 넌 이제 당분간 수호전에 감금이다.”

한신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남궁위가 무표정한 얼굴로 흑룡화린갑을 들고 말했다.

“서휘야.”

“네, 맹주님.”

“이곳에서 네가 입고 나가라.”

“네?”

이서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남궁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쯤 되면…… 아니다. 어쨌든 네가 입거라.”

“알겠습니다.”

이서휘가 즉시 흑룡화린갑을 안에 받쳐 입었다.

☆ ☆ ☆

세 사람이 일어나 대청으로 이동했다.

대청에는 이미 면사로 얼굴을 가린 화지련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가복으로 보이는 사람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대청에 들어선 남궁위가 상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고 남궁익현과 이서휘가 좌우에 기립했다.

그러자 화지련이 면사를 벗어 가복에게 건넨 후 남궁위를 바라봤다.

남궁위와 남궁익현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허어……” 하고 놀란 남궁위다.

“흠…….” 하고 놀람을 감춘 남궁익현이다.

반면에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화지련을 바라봤다.

화지련의 미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덤덤한 이서휘도 검제 시절에 화지련을 따르던 정신 나간 무인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추앙 받을 만한 미모이긴 했군.’

그렇다. 화지련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인들한테도 추앙 받을 받을 만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검은 긴 생머리에 아주 엷은 연분홍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눈코입이 또렷하면서도 흠잡을 곳 없이 조화로웠다. 한 가지 흠이라면 다소 날카로운 눈매였는데 압도적인 미모에 묻혀 그 마저도 매력적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달라붙는 흰색 무복에서 보이는 골격과 자세가 훌륭해 훗날 여중제일고수가 될 만한 풍모는 확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남궁위와 남궁익현이 탄성을 지른 것이리라.

지난날, 검제 시절에도 화지련을 혼내주고 싶어 했던 이서휘다. 여인이기에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비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화지련이 이 비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었으나 이서휘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화지련의 호승심 넘치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화지련이 화난 것처럼 맞물려 있던 입술을 떼며 말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맹주님.”

남궁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만이로구나. 네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시간이 참 빠른 것이겠지.”

남궁위의 말투에서 어느 정도 친근한 느낌이 묻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원한에 의한 비무가 아니었고, 남궁위는 끝까지 화지련의 사부를 살리고자 애를 썼었기 때문이다. 결국 화지련의 사부가 죽게 되자, 그 어렸던 화지련을 붙잡고 진심어린 사과를 했었던 남궁위다.

화지련이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여인의 약조라 가볍게 보신 것이 아닙니까?”

“아니다. 그간 수없이 많은 비무를 거절했다. 너 때문에 금기를 깬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지련아. 내가 이런 말을 전할 입장은 아니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화지련이 대꾸하자, 남궁위가 뜬금없이 남궁익현에게 말했다.

“그것 줘보게.”

“네?”

“줘보라고.”

이서휘도 놀랐다. 아무래도 서찰을 달라고 하는 모양새다. 남궁익현이 끄응 소리를 내더니 서찰을 꺼내 남궁위에게 건넸다. 그러자 남궁위가 서찰을 살펴보지도 않고, 내력을 실어 화지련에게 보냈다. 서찰이 두둥실 뜬 채로 날아가 화지련 앞에 멈췄다.

화지련이 서찰을 낚아채며 말했다.

“이게 무엇입니까?”

“읽어 보거라.”

잠시 후 서찰을 모두 읽은 화지련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다 읽은 화지련이 입술을 깨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찌 이 이야기가 퍼졌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남궁익현과 이서휘는 잠자코 있었다. 남궁위가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과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니다. 저 따위 서찰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할 순 없다. 다만 주양위라는 자가 조금 의심스럽구나. 어쨌든 네 주변에서 누군가가 네 이야기를 듣고 퍼뜨렸다는 게 아니냐? 나는 지금 네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시다.’

그러나 화지련은 정말 영문을 모르는지 눈을 껌벅이다가 저도 모르게 옆에 선 가복을 바라봤다. 남궁위와 남궁익현, 이서휘도 가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복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덤덤하게 소개했다.

“저는 아가씨를 모시는 가복입니다. 들은 바를 누군가에게 전한 적은 없습니다.”

남궁위가 화지련에게 물었다.

“믿을만한 자냐?”

“네.”

남궁위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화지련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남궁익현은 가복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남궁위가 말했다.

“흐음, 어찌 됐든…… 이번 일로 내가 주양위라는 자와 우열을 가리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남궁위가 그때부터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본래 내가 너와 비무를 하는 것이 옳으나, 연달아 강적을 맞이하게 되어 심히 걱정이 되는구나. 너만 양해를 해준다면 우리 군림맹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에게 비무를 맡길까 한다. 네가 이긴다면, 나도 주양위를 이긴 다음에 너와 비무를 치르마. 우리 둘이 결승을 한 번 치러보자꾸나. 한 번 시기를 미뤄줄 수 있겠느냐?”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으나 남궁위는 진심을 담아 화지련을 달래듯이 말을 했다.

짧은 한숨을 내쉬던 화지련이 고개를 잠깐 숙였다. 이내 고개를 든 화지련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맹주님과 결승 비무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남궁위가 빙긋이 웃었다.

“고맙구나. 원한다면 우리가 자리를 피해줄 수 있다. 둘이서만 겨뤄도 된다. 특히 나는 이 비무를 보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구나.”

남궁위가 끝까지 화지련을 배려했다. 아무래도 마음 깊이 화지련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가득하여 그런 것이리라.

화지련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다 계셔도 됩니다. 부족한 부분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화지련은 사부가 임종하기 전에 화지련만 따로 불러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련아, 남궁위는 의외로 정이 깊어 보이더구나. 나를 이리도 신경 써주는 것을 보니…… 네 사부가 약해서 이리 된 것이니 복수할 생각은 말거라. 비무도 내가 요청했었느니라. 넌 앞으로 차라리 남궁위의 약한 마음을 파고 들어 그의 양녀가 되어라. 그 자는 후사가 없다고 하더라.]

[싫어요!]

[사부의 말을 거역할 셈이냐? 나보다 강한 자다. 네가 남궁위의 모든 것을 빼앗아 오거라. 그게 복수다. 그래야 내가 지하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

사부님의 말을 떠올리던 화지련이 잠시 눈을 감았다.

‘아니오. 이렇게 와서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게 어찌 복수란 말입니까?’

화지련이 총기 있는 눈을 번쩍 뜨더니, 이서휘를 향해 말했다.

“거기 계속 서 있을 건가요? 전 오늘 군림맹에 도전하러 왔습니다.”

이미 상대가 이서휘라는 것을 눈치챈 화지련이다. 이서휘가 남궁위를 바라보자, 남궁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가 훌쩍 뛰어서 화지련 앞에 내려섰다.

이서휘와 화지련,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순간, 화지련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다수의 남자들은 화지련의 미모를 가까이서 보는 순간 의례히 짓는 표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자는 대체 어떤 녀석일까?

화지련을 보고 시종일관 떫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깔보려는 표정도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이서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련아, 맹주님과 비무를 하는 것 이상으로 가르침을 내려주마. 그게 너에 대한 예의가 될 듯싶구나.’

화지련이 눈을 치켜 떴다. 남궁위가 보고 있는 터라 말은 정중했다.

“화지련이라 합니다.”

그러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질풍검대 부대주 이서휘요.”

“부대주?”

화지련이 갑자기 뒷짐을 지더니 대청 중앙을 잠시 거닐면서 생각에 잠겼다.

‘군림맹, 시건방지게 감히 부대주 따위를 비무에 내보냈다 이거지? 어차피 생사비무다. 팔 하나쯤 잘라도 누구도 말 못하리라.’

조금 떨어져서 걸음을 멈춘 화지련이 순백색의 검집에서 스릉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화지련이 왼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기자 떠엉 하고 맑은 소리가 수호전 대청을 울렸다.

짐짓 자신의 내공을 자랑하는 행동이었으나 남궁위, 남궁익현, 이서휘에겐 무어라 반응할 필요도 없는 수준인 것 같아 그저 잠자코 있었다.

화지련이 이서휘에게 말했다.

“준비 됐습니까?”

이서휘가 웃으며 대꾸했다.

“준비는 오래전부터 되었소.”

그 건방진 말에 화지련이 눈을 치켜 올렸다.

북화(北花) 화지련.

옥의림과 함께 여중제일고수를 다투던 여인이다. 번번이 사패에게 우열을 가리자고 했던 당찬 여인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서휘가 화지련을 노려보며 자강검을 뽑았다.

‘실력 좀 보자.’

화지련이 공격을 예고했다.

“조심!”

화지련의 선공으로 두 검이 부딪쳤다. 이서휘는 화지련의 검을 튕기며 검신을 흘낏 봤다. 자강검에 부러지지 않을 검인가?

마침 내공이 실린 두 검이 다시 부딪치자,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손으로 이름 모를 백검(白劍)의 강도가 전해졌다.

‘쉽게 부러지진 않겠군.’

이서휘는 마음을 놓고 화지련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에 맞춰 대응했다. 아무런 기교를 펼치지 않고, 화지련의 검을 막아냈다. 잠시 화지련에게 선수를 계속 내준 이서휘다.

챙챙챙챙챙!

이서휘의 방어가 굳건하자 화지련이 이서휘의 검을 후려치고 바람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릿결을 날리는 미인이 높은 수준의 동작을 펼치자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물러난 화지련이 야무진 표정으로 숨을 들이 쉬며 검을 고쳐 쥐었다. 검을 자주 고쳐 쥐는 게, 화지련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검법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서휘는 화지련이 무슨 행동을 하든 여유롭게 그대로 두었다. 화지련이 훅 하고 숨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달려와 검을 내질렀다.

챙!

화지련의 검이 이서휘의 검을 타고 미끄러져 올라가며 추가 공격을 펼쳤다.

타앙!

이서휘가 백검을 튕겨내자마자 화지련은 교묘하게 백검을 비틀어 이서휘의 눈을 향해 찔러 넣었다.

‘우연이겠지…….’

눈은 이서휘의 역린(逆鱗)이다. 이서휘가 백검(白劍)을 고갯짓으로 피한 후, 인상을 쓰며 화지련의 검을 파앙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순간 이서휘가 전신의 내공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화지련이 이를 악물었다. 이서휘의 수준이 보통이 아님을 뒤늦게 알았던 것. 화지련의 검 끝이 빨라지더니 쾌검이 펼쳐졌다. 이어서 지독한 살기가 담긴 공격 일변도의 석풍검(石風劍)을 쏟아냈다.

석풍검은 풍류객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전대의 여고수가 남긴 검법이다. 일반적인 검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면이 있는 검법이다.

챙챙챙! 하고 이서휘가 검을 튕겨내면 화지련의 손바닥에서 백검이 절묘하게 방향을 전환해 섬짓한 추가 공격을 펼쳤다.

때문에 화지련은 검을 잡고, 돌리는 순간마다 감탄사가 나올 만한 기예를 내뿜었다.

화지련은 젊은 나이에 이미 검병을 자유자재로 쥐고 다루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자도 화지련의 손을 보면 알 수 있을 정도. 악기를 연주하듯이 빠른 속도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다양한 파지법에 따라 검의 방향과 공격에 담긴 의미가 변화했다. 움켜쥐고, 뒤집어 쥐고, 당겨 쥐고, 손가락만으로 쥐었다가 방향을 돌렸다. 그에 맞춰 화지련이 마치 춤을 추듯 움직였다.

하지만 이서휘는 콧방귀를 꼈다.

‘그런 재주는 네 내공이 내 위에 있을 경우에 썼어야지. 검을 그따위로 쥐었다는 건 나에 대한 무시가 아닌가.’

이서휘의 자강검에 자색 빛이 차올랐다.

눈은 화지련의 하얀 손을 향해 있었다. 화지련이 검을 고쳐 쥐는 찰나에 이서휘의 검이 불쑥 뻗어 나갔다.

찰나를 파고들자, 화지련이 아차 하는 심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그러자 이번엔 이서휘의 검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덕분에 챙챙 하던 충격음이 까앙! 하고 울리는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지련은 이서휘의 내공에 놀라 눈이 커졌다. 어찌 또래로 보이는 이서휘가 자신보다 내공이 앞설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때 이서휘는 자강검을 쑥 내지르더니 손목을 뒤집어 화지련의 석풍검을 흉내 내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챙챙챙챙! 까앙!

조금 익숙해지자, 화지련이 했던 것처럼 이서휘의 손이 파지법을 바꿔가며 화지련을 압박했다.

그 기예에 놀라 감탄을 표한 것은 남궁위와 남궁익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이서휘, 잘하는데?’ 하는 남궁위의 표정에 남궁익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지련이 입술을 깨물며 방어했다. 어찌 이서휘의 의도를 모를까. 자신이 방금 펼친 검법을 순식간에 따라하자 가슴 가득 분노가 차올랐다.

화지련이 순식간에 검을 어깨 뒤로 당겼다가 회전을 넣어 내질렀다. 그러자 검 끝에 뻗어나간 서늘한 검풍이 이서휘의 어깨로 향했다.

석풍검의 비틀린 바람, 진풍(紾風)이다.

휘익!

이서휘가 왼쪽 어깨로 날아오는 진풍을 오른 손목만 비틀어 내지른 자강검으로 공중에서 허망하게 흩어 버리고, 왼발을 땅을 쓸어내듯이 빠르게 움직여 화지련의 종아리 안쪽을 툭 쳐냈다.

화지련의 몸이 이서휘의 공격에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 화지련은 자신의 검집으로 땅을 찍어 균형을 잡은 후 동시에 이서휘의 목을 향해 백검을 내질렀다.

탄성을 자아내는 화지련의 임기응변이다.

타앙!

이서휘가 날아오는 백검을 후려치고, 잠시 거리를 벌려 어깨를 우드득 소리를 내며 풀었다. 화지련에게 더 기회를 줄 심산이었다.

‘좋구나. 화지련! 네 성격만큼이나 강하다.’

이서휘가 비스듬히 서서 화지련이 내뱉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조심.”

거리를 벌린 이서휘가 그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암연심검의 파를 쏟아냈다.

쐐애애앵!

남궁위와 남궁익현이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더 놀란 것은 화지련이다. 느닷없이 검기가 날아오자 본능적으로 두 발에 힘을 쥐고 솟구쳤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순식간에 화지련보다 더 높게 솟구친 이서휘가 자강검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까아앙!

자강검을 겨우 막아낸 화지련이 엄청난 속도로 땅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몸을 휘리릭 뒤집어 착지한 화지련이 두려움을 느끼고 보폭을 좁게 해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후우우…… 흡.”

그 와중에도 화지련은 급하게 호흡을 가다 듬었다. 그때부터 화지련은 이를 악물었다.

‘저 녀석…… 아직 최선을 다 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이 정도로 물러날 화지련이 아니다.

화지련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생각에 검을 내질렀다. 이서휘는 화지련의 검을 후려침과 동시에 천천히 전진했다. 기세만으로도 충분히 화지련을 압박했다.

화지련이 경공을 펼치면서 도망가자, 이서휘가 무자비하게 검기를 내뱉었다.

쐐애애앵!

착지했을 때부터 오싹한 긴장감에 다리 힘이 풀린 화지련이 다시 솟구치지 못하고, 검을 수직으로 세워 내공을 주입했다. 죽음도 불사한다는 의지로 눈은 번쩍 치켜 떴다.

콰아앙!

화지련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츠츠츠츠……!

밀려나던 화지련이 발 끝에 힘을 꽉 쥐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실로 무시못할 여걸(女傑)!

그 고집스러운 기세에 이서휘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세는 가상하다만…….’

이서휘가 검의 변화를 줄이고 내공을 잔뜩 주입해 화지련의 검을 튕겨냈다.

챙! 챙! 챙!

화지련이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검을 휘둘러도 이서휘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조리 튕겨냈다.

그때부터였을까.

공격을 퍼붓는 화지련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화지련의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분하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비무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결과가 눈앞에 훤했다. 이런 식으로 패배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뼈를 깎는 수련을 했던 것이 아닌데 하는 심정이다.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많은데 하는 감정도 밀려왔다. 설마 자신이 또래의 남자에게 질 줄은 상상도 하지 않던 화지련이다.

화지련이 검을 휘두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잔인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이서휘일까 아니면 화지련의 운명일까. 아니면 이 험한 무림에 홀로 남겨 놓고 떠난 사부를 향한 말일까.

화지련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이서휘가 여전히 검을 휘둘러 화지련을 마음의 벼랑으로 내몰고 있었다.

화지련의 눈에 차올랐던 살기가 이내 체념의 빛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질 순 없어……. 죽는 게 낫겠어.’

싸늘한 마음으로 생각을 굳힌 화지련은 검을 고쳐쥐고 석풍검의 인연번뇌(因緣煩惱)란 초식을 내질렀다. 잘못된 인연으로 인한 번뇌를 끊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이다.

그토록 강해 보이던 화지련의 기도가 갑자기 죽을 결심을 한 여인의 기도로 바뀌어 이서휘에게 밀려왔다.

화지련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두어방울이 바람에 실려 뒤로 날아갔다.

풍류객이 방심을 하는 순간 화지련의 기도는 오로지 검으로 바뀔 터였다.

자신의 몸으로 적의 검을 받아내고, 쥐었던 검을 내지르는 무서운 절초다.

이서휘가 어찌 동귀어진 초식을 못 알아보겠는가?

검에 대해서는 천하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되는 이서휘도 그만 순간 당황했다.

화지련은 아무런 방비가 없어 보였다.

그러면 그 후속타는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

화지련의 상체가 먼저 밀려 온다. 마치 연인의 품으로 뛰어드는 자세다. 백검을 쥔 손만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제기랄……!’

이서휘는 급히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러 뱉어낸 일점(一點) 검기로 정확하게 화지련이 쥐고 있던 검병을 맞춰 날려버렸다. 타앙! 소리와 함께 백검이 뒤로 날아가자 상체를 앞세우고 날아오던 화지련이 그대로 이서휘의 품에 안겼다.

이서휘는 왼팔로 화지련을 품에 안고 핑그르르 돌다가 멈춰 섰다. 그러지 않으면 화지련을 안고 바닥을 구르게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형국이다.

이서휘가 화지련을 안은 채로 눈빛을 마주쳤다. 화지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기지 못해 억울했으리라.

인연번뇌 초식이 파훼 당해 허망했으리라.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비애가 몰려왔으리라.

모든 의도를 간파하고 짓밟은 남자에게 안긴 치욕감이 밀려왔으리라.

마지막엔 남자에게 살이 닿았다는 당혹감이 몰려왔다.

화지련이 이서휘에게 안긴 채로 그대로 혼절했다.

혼절한 와중에도 이 모든 감정이 담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서휘는 화지련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지 않게 잠시 그대로 안았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모를 여인의 체취가 이서휘의 코로 들어왔다.

그 미묘한 체취에 이제는 이서휘의 정신이 아찔했다.

미안하다는 감정에 앞서 손으로 감싸 안은 화지련의 살결이 너무나 부드럽다는 생각을 한 이서휘가 눈을 껌벅였다.

혼절한 와중에도 눈물을 흘리는 화지련을 보자 잔뜩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그냥 시원하게 겨뤄서 혼쭐이나 내주려 했건만…… 뭐야 이건?’

이서휘는 화지련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잠시 바라봤다.

그때, 혼절한 화지련을 바라보던 남궁위가 말했다.

“별 일 없을 거다. 우리가 지련이의…… 수호전주, 마땅한 방법이?”

남궁위가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당황하자, 남궁익현이 내공을 실어 안채 쪽으로 외쳤다.

“해연아. 이리 오너라.”

“네, 전주님.”

잠시 후 안채에서 공야청을 돕고 있던 제갈해연이 도착해 이서휘의 품에서 화지련을 부드럽게 건네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넓은 대청에 남궁위, 남궁익현, 이서휘, 화지련의 가복 네 사람이 남았다.

남궁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연스럽게 이서휘가 대청의 문을 막아서고, 남궁익현이 안채로 가는 길을 막아섰다.

남궁위가 일어나 가복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제법 눈치가 있구나. 움직였으면 익현이에게 죽었을 것인데.”

가복이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남궁위가 말을 이었다.

“한낱 가복 녀석이 이서휘의 검기를 봐도 놀라지 않고, 화지련의 동귀어진 수법을 봐도 놀라지 않으니 그저 우습구나. 어디서 놀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더냐? 아니면 수호전주의 눈빛에 내내 얼어붙었던 것이냐.”

그 말대로 가복은 진작 도망가려고 했었으나 남궁익현이 내내 노려보고 있던 상태라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복이 천천히 다가오는 남궁위와 안채로 가는 길을 막아선 남궁익현을 보다가 이서휘에게 벼락 같이 달려갔다.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라 예상했던 이서휘다. 하긴, 남궁위나 남궁익현에게 달려드는 것도 자살 행위일 터.

하지만 이서휘는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달려오는 가복을 노려봤다.

콰앙!

가복의 몸이 수평으로 날아가 대청 벽에 부딪쳤다. 어느새 몸을 움직인 남궁위가 손을 한 번 휘둘러 가복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날아간 가복이 벽에 부딪치자마자 모습을 감췄다. 남궁위가 죽일 생각이 없어 적당히 친 것이었으나 아직 가복은 도망갈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서있는 대청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남궁익현이 막아선 길목은 위로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잠시 후 남궁익현이 허공에 손을 내질러 가복의 발목을 움켜쥐고 땅에 내려쳤다. 끄으윽 소리와 함께 가복의 입에서 하얀 거품이 흘러나왔다.

남궁위가 덤덤하게 말했다.

“죽이진 말게. 문초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남궁익현이 말했다.

“연창아, 데려가거라.”

“네, 전주님.”

안채 쪽에서 삼십 대의 무인이 걸어 나와 혼절한 가복을 가볍게 들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제야 대청에 세 사람이 남았다.

남궁위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했다. 다행히 지련이도 너도 다치지 않았구나. 지련이가 자신의 사부처럼 운이 없을까봐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네, 맹주님.”

한데 남궁익현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쉽게 말을 내뱉지 않고 있었다.

남궁위가 침묵에 빠진 남궁익현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드디어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자네, 검선(劍仙) 진무결(秦無缺) 선배와 무슨 관계인가?”

“네?”

되묻는 이서휘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다. 죄 지은 것은 아니지만 대답할 말이 갑자기 궁색했기 때문이다.

남궁위는 검선을 모르는 눈치였다.

검선은 지금 시점에서도 당대의 고수라 불리기엔 애매한 전대의 고수였다. 무엇보다 활동이 없었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남궁위나 남궁익현은 충분히 알 법도 했다.

이서휘가 이 두 남자가 걸어온 길을 어찌 알겠는가?

대답을 고민하던 이서휘가 그나마 충실한 대답을 생각해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분이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전대의 고수라 들었습니다. 만나 뵙고 싶은 분이나 아직 인연이 닿지 못했습니다만.”

검선 진무결의 이름은 깨끗하다. 행여나 이서휘가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복된 일이다. 남궁익현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펼치는 검엔 검선 선배의 분위기가 묻어 있구나. 재미있어. 천운이 따라 방랑벽이 심한 선배를 만나게 되거든 반드시 붙잡고 가르침을 청하거라.”

이서휘가 급히 대꾸했다.

“어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남궁익현도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낸들 알겠느냐?”

“네?”

“지금도 검선 선배를 찾는 후배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제자로 받아 달라 떼를 쓰는 놈들이 한둘이었겠느냐? 수년간 시달리시더니 진절머리를 내곤 인피면구를 쓰고 돌아다니시는 걸로 안다.”

이서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눈을 잃고 만난 사부다. 사부가 이서휘 곁에 와서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알아볼 길이 없었다.

검선은 방락벽이 심하다.

우연히 연을 맺은 이서휘를 불쌍히 여겨 거둬준 사부다. 어디서 만나야 할지, 어떻게 알아볼지 난감한 게 사실이었다. 천운이 다시 따르지 않으면 만나기가 어려울 터였다.

남궁위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서휘야, 네가 내 비무를 보고 싶다 했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아직 남궁위는 결정하지 못한 눈치였다.

“왜지? 다른 이유가 있는 눈치던데.”

이서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임무 도중…….”

남궁위가 말을 끊었다.

“마교를 말하는 것이냐. 한신으로부터 들었다.”

“네.”

이미 한신을 통해 전후사정을 들은 남궁위와 남궁익현이다. 명분과 대의를 중요시 하는 백도 세력의 약점이 이것이다. 주양위가 마교로 의심되면 어떻게든 잡아서 문초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종종 탁상공론만 오간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계획한 마도 세력의 치밀함이 빛을 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서휘는 서찰 한 장에 비무를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궁위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가 수호전주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마교도 모습을 감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의심은 가지만 당장 그 자를 합공을 해 잡을 수 있는 명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놈의 명분, 흥.”

남궁위가 코웃음을 쳤다. 이서휘도 같은 마음이다. 그러자 남궁익현이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맹주님, 저는 이 서찰 내용에 큰 의미를 둡니다. 그 자가 이리 썼습니다. 남궁위 이하의 무인을 모두 꺾은 다음에 부맹주 자리를 요구하겠다고요. 이 얼마나 솔깃한 내용입니까? 제가 먼저 주양위를 상대하겠습니다.”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어라? 지난날에도 그리 했단 말인가? 설마, 두 분이 모두 패해 은퇴했던 것은 아니겠지?’

이서휘가 알지 못하는 일이라 섣불리 예상하기 힘들었다. 남궁위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흐음 서휘야, 오늘은 고생이 많았다. 주양위가 오면 네가 참관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 볼 것이다. 아마 가능할 것으로 본다.”

“감사합니다.”

“나는 수호전주와 이 일에 대해 상의를 조금 더 해야겠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때가 되면 부르마.”

“맹주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제 제가 화지련을 꺾었으니 주양위란 자가 이 일로 시비를 걸 일은 없을 겁니다. 하면, 맹주님의 비무를 비공개가 아니라 저희 군림맹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로 함이 어떨지요? 공개가 어렵다면 최대한 많은 관전자가 지켜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남궁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마.”

“네, 맹주님. 전주님, 그럼.”

이서휘가 예를 올리고 수호전에서 물러나왔다. 이서휘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물러나온 셈이었다. 운명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이서휘가 회귀하기 전 남궁위가 그토록 무력하게 은퇴했던 실상은 무엇일까?

그때도 수호전주 남궁익현이 먼저 비무에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주양위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주 외에 다른 자가 나설 것도 충분히 예상했던 주양위도 함께 온 자신의 사제를 남궁익현의 상대로 내보낸다. 이런저런 의견 충돌이 벌어진 이후에 결정된 것은 결국 삼 대 삼의 비무였다.

군림맹에서는 남궁위, 남궁익현이 나서고 의논 끝에 천라각주 유백이 나선다.

그에 맞서서 주양위의 사제와 아들이 추가로 비무에 참가한다. 그 결과로 남궁위, 남궁익현, 유백은 한 동안 무공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는다.

유백이 가장 온전한 편이었으나, 그 역시 나머지 일을 수습하느라 경황이 없게 된다.

그 와중에 천뢰각주 한신이 암습을 당해 허망하게 죽는다.

차라리 누군가 한 명 죽었다면 한신이 평소처럼 술을 마시며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비밀리에 부쳐 일을 진행하려 했던 맹주 남궁위의 판단이 상황을 계속 악화시켰었다.

이것이 이서휘가 눈이 멀었던 시절에 일어난 비사(祕史)였다. 이서휘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이 비공개 비무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시간 순서와 운명이 함께 뒤바뀌었다.

이서휘가 구화산에서 대도를 죽인 이후로 마도 세력이 계획을 바꿨다.

‘먼저 한신을 죽여 군림맹을 흔든다!’

그러나 이서휘의 개입으로 한신이 죽지 않았고, 남궁위는 화지련 때문에 심력을 소모하지 않게 됐으며, 주양위를 마도 세력으로 추측하고 경계하게 된 상황이다.

운명은 바뀌었고 군림맹은 아직 금이 가지 않은 상황이다.

☆ ☆ ☆

이서휘는 머릿 속을 정리해야 했다. 일단 화지련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은 상황이다. 남궁위가 더 이상 심력을 쏟지 않을 터였다. 이서휘에게 패배한 화지련이다. 남궁위에게 도전할 명분이 앞으로 전혀 없었다.

남궁위의 마음이 편해졌으리라.

남은 문제는 주양위다.

이서휘가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일전에도 수호전주님이 먼저 나섰던 것일까? 전주님이 패하고, 맹주님도 패했단 말인가? 폐관 수련이 아니라 요양이었다면?’

이서휘, 이 무심한 남자는 화지련에 대한 걱정은 한 번도 하지 않은 채로 객잔 거리로 나섰다.

도삼과 도이를 만나야 했기 때문.

어느새 한결 깨끗해진 객잔 거리에 도착한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백리연과 만났던 화양다루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등장하자 화양다루 점소이가 이서휘를 알아봤다.

“어? 부대주님!”

“아, 잘 못 왔군. 다음에 보세.”

혼자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 이서휘가 잽싸게 대꾸하며 화양다루를 빠져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비무를 한 터라 배가 꼬르륵 거리고 있었다. 이서휘가 서둘러 다른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음식을 잔뜩 주문한 후에 목이 말라 탁자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도중이었다. 이서휘의 등 뒤에 누군가가 걸어 나와 이서휘의 좌측 창가 쪽으로 가며 말했다.

“차라리 여기에 앉자. 이 층은 아직 청소도 안 해서 지저분하구나.”

물을 마시던 이서휘는 그 목소리에 느낌이 서늘했다.

‘이 목소리는?’

“준보 오라버니, 여기 앉을까요?”

그 말에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던 이서휘가 푸웁 하고 물을 앞으로 뿌리면서 켁켁 대기 시작했다.

‘아 젠장…….’

객잔에 사마준보가 어떤 여인과 함께 있었다.

☆ ☆ ☆

이서휘는 낮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붙잡았다.

‘아, 밥 맛 떨어지게 사마준보라니 일진이 좋지 않구나.’

이서휘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있는 입구를 노려 봤다. 애써 사마준보를 쳐다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떤 여인과 대낮부터 객잔에 있는지 궁금했으나 이서휘는 꾹 참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또 어느 집 여인이냐?’

사마가 후계자라는 것을 앞세워 이 여자, 저 여자 잘 만나고 다니는 사마준보다. 일전에 이서휘의 뒤를 기습해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었으나, 남의 애정사까지 간섭할 오지랖은 없었다.

하지만 신경질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팔자 좋은 새끼. 검대는 오전 내내 객잔 거리 복구하느라 땀을 흘렸건만…….’

사마준보도 객잔에 뜬금없이 이서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지금 함께 온 여인에게 공을 들이고 있는 터라 섣불리 아는 체를 하거나 시비를 걸 수 없었다. 이미 이서휘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서휘보다 음식을 먼저 시켰는지 사마준보 쪽으로 음식이 나왔다.

잠시 후 이서휘가 시킨 음식도 속속 나오고 있었다.

이서휘가 코를 박은 채로 음식을 먹었다.

사마준보가 여인을 앞에 두고 깔끔한 척 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사악한 마음이 든 이서휘가 쩝쩝 소리를 내며 먹었다.

마침 이러쿵저러쿵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같잖은 말들이 사마준보의 주둥이에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여인이 소곤거렸다.

[준보 오라버니. 저 사람 알아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너무 쩝쩝 거리는데. 밥맛이 뚝 떨어져요. 체할 거 같아. 아…….]

그 말에 이서휘가 “흥!” 소리를 낸 후에 밥을 먹다가 “꺼어어억!” 소리를 냈다.

참고 있던 사마준보가 버럭 외쳤다.

“좀 조용히 먹지 못하겠느냐?”

밥을 먹던 이서휘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사마준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어라 말은 안 했지만 눈빛만으로 충분히 뜻이 전달되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빛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준보야, 여자 앞에서 뒤지게 맞고 싶냐?]

사마준보와 이서휘의 눈빛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하지만 이내 사마준보가 꼬리를 내리고, 이서휘를 보며 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거 좀 조용히 먹자. 품위 없게 왜 그러느냐?”

그때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도이와 도삼이 거지꼴로 들어왔다.

대낮이라 두건은 벗은 상태였으나 도삼과 도이는 흙이 잔뜩 묻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거지꼴이다. 지난밤의 추격전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도이와 도삼이 한마디씩 하며 들어왔다.

“여기 계셨네.”

“한참 찾았소.”

이서휘가 급히 엄한 소리 늘어놓지 말라는 눈빛을 보낸 후에 말했다.

“앉아라.”

도이가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말했다.

“복숭아 빼고 다 있네.”

도삼이 피식 웃으며 앉았다. 지난 밤의 일과 이서휘가 시켰던 일에 대해서 함부로 늘어놓을 수 없는 노릇. 잠시 이서휘와 도삼, 도이가 눈을 껌벅이며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적막감이 잠시 흘렀다.

“…….”

침묵을 깬 건 이서휘였다.

“밥 먹자.”

“네.”

세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이서휘가 생긴 것과는 달리 음식을 엄청나게 맛있게 먹자, 도삼과 도이도 눈치를 보지 않고 입으로 마구 쑤셔 넣었다.

덕분에 쩝쩝쩝, 꺼억, 캬, 맛 좋네, 이것도 좀 드쇼, 저것도 먹어 봐라, 쩝쩝 소리가 끊이지 않고 화음을 이뤘다. 이서휘는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다. 도삼과 도이는 감탄사를 섞어 가며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즐겼다.

도삼이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넣은 채로 말했다.

“우와, 푸…… 푸짐하게도 주문하셨네요. 마침 저희도 배가 고파서 죽을 뻔…….”

도이가 맞장구 쳤다.

“맞아. 일만 실컷 시키고…… 호…… 혼자 밥 먹고 있어. 완전…… 쩝쩝쩝 치사한 꺼억.”

사마준보와 함께 왔던 여인이 완전 토라진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나갈래요.”

“잠시만, 아 그래. 다른 곳으로 가자꾸나. 그게 좋겠지? 이 옆에 좋은 곳이 있다. 화양다루라고.”

“그냥 갈래요.”

“가긴 자꾸 어딜 가. 자, 잠시만.”

여인이 먼저 객잔 밖으로 휙 나가고, 사마준보가 눈을 부릅뜨고 이서휘와 도둑 형제들을 노려본 다음에 탕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돈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눈치 빠른 도삼이 우물우물 거리며 말했다.

“저 새끼 뭐에요? 세가 놈 같은데.”

“응. 세가 놈 맞아. 사마세가.”

이서휘가 대꾸하자 도이가 빈정거렸다.

“팔자 좋은 놈.”

순식간에 음식이 동이 났다. 그래도 모자라서 추가로 시킨 음식을 다 비우고서야 도삼과 도이가 배를 두드렸다. 이서휘는 진작 배가 불렀던 터라, 형제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다 먹었느냐?”

“네. 아주 잘 먹었습니다. 꺼억, 아이고 죄송합니다.”

“후후, 이보게! 여기 얼만가?”

이서휘가 점소이를 부르자 곰 같은 사내가 이서휘에게 다가왔다.

이서휘가 품에 손을 넣었다.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돈이 없었다. 객잔 복구를 돕다가 돌아갔을 때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 옷에 두고 온 모양이다.

이서휘가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뜻밖의 위기로다.’

두 손으로 몇 번 품을 훑어 대던 이서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외상 되는가?”

그 말에 소싯적에 거칠게 살면서 칼 좀 휘둘렀던 점소이가 인상을 그으며 말했다.

“뭐요? 음식을 그렇게 제멋대로 한참 시킬 때부터 기분이 싸하더니만. 바깥에 군림맹 지나다니는 거 못 보셨소? 기가 차서 원.”

도삼이 이서휘를 향해 말했다.

“공자님, 요즘 벌이가 시원치 않으신가 봅니다.”

도이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밥값도 우리가 내야 하는 거냐? 이건 사내대장부의 삶이 아니다. 도삼아, 이제 그만 합공을 해서 승부를 내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며 형제와 점소이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하하하하. 아, 정말 미안하네. 꼭 주겠네. 군림맹의 이서휘일세. 이깟 돈을 떼먹는 사람이 아니란 말일세.”

그 말에 점소이가 황당하다는 듯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서휘? 이야, 대단한 분 납셨네. 당신이 어제 밤에 여기서 수십 명을 베어 죽였다던 그 질풍검대 이서휘 나으리세요? 오전 내내 군림맹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린 그 이서휘세요? 이야, 영광이네.”

이서휘가 점잖은 목소리로 다시 주장했다.

“그래. 내가 바로 그 이서휘다.”

점소이가 콧방귀를 뀌며 근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내가 맹주 남궁위다. 소일거리로 점소이를 하고 있었다.”

도이가 점소이의 말을 받았다.

“여기서 맹주님을 뵙게 되다니 실로 영광이오.”

도삼이 쩝 소리를 내며 말을 내뱉었다.

“공자님 무전취식은 좀…… 그렇습니다. 돈이 없으면 없다고 하시던가요. 저희 형제가 이 정도 음식값은 있습니다. 뭐 우리가 얻어먹으려고 이 고생을 한 것은 아니지만은 꽤 섭섭합니다.”

도이가 거들었다.

“시끄럽고. 승부를 내자, 이제.”

이서휘가 도삼과 도이 형제를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내가 언제 너희를 무시했느냐. 진짜 오늘 옷을 갈아입다가 깜박한 것이다. 내가 사야지. 고생은 너희가 했는데…….”

그때였다.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마준보가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여인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서휘…… 너 이 새끼 진짜 가만 안 둔다. 질풍검대로 찾아 갈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아이씨, 원아! 어디가!”

이서휘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오, 뜻밖의 구원이로다. 다들 들었지?”

도삼과 도이 그리고 객잔의 점소이도 “오……!” 하며 뜻 모를 감탄사를 따라 했다. 점소이는 조금 감격한 표정이었다. 점소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나중에 주십시오.”

이서휘란 이름은 어제 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린 이름이다. 그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물론 돈은 없었지만……. 이서휘가 안도의 숨을 쉬며 편안한 마음으로 도둑 형제들과 객잔을 나섰다.

☆ ☆ ☆

세 사람이 객잔 거리를 빠져 나와 조금 한적한 길을 거닐었다.

도삼이 말했다.

“공자님, 오늘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십니다.”

도이가 말했다.

“돈도 없으시고.”

그 말에 이서휘가 대꾸했다.

“흥, 요새 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아 그리 됐구나. 그건 그렇고 어찌 됐느냐?”

도삼이 말했다.

“일단 대완부터 말씀드리지요. 심이환 표두라 했던가요? 거기 표국주 아들놈과 잘 지내더군요. 별 문제 없어 보였습니다.”

“좋아.”

“청협문은 저도 처음 가봤는데 위세가 대단하더군요. 소문주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문도들과 지나가는 것을 겨우 붙잡아 말을 건네고 공자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뭐라던가?”

“한참을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나중에 군림맹으로 오시겠다고 하더군요. 강자들과 겨뤄보고 싶으시다며.”

“후후.”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적포 사내는?”

“저희 꼴을 보십시오. 꽤 멀리 쫓아갔었습니다. 누군가 따라온다는 것을 눈치 챘더군요. 험한 길로 다니면서 일부러 저희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추적을 포기했습니다.”

“뭐라고?”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빙글빙글 돌더군요. 멀리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 때문에 어딘가를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아예 길을 되돌아가서 여기저기를 살폈습니다. 기루가 밀집한 곳과 도박장이 밀집한 곳이 있었습니다. 형과 나누어서 기다리고 있었읍죠.”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어찌 되었느냐?”

“새벽녘에 기루 한 곳으로 들어가더군요. 간판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잘했다. 어디냐?”

“설부루(雪膚樓)입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설부루? 어쨌든 잘했다. 한데, 부탁 좀 하나 더 하자. 오늘따라 좀 미안하구나.”

도삼이 피식 웃었다.

“말씀 하십시오.”

“인피면구를 하나 제작해서 가져다 다오. 내가 쓸 것이다.”

도삼은 이서휘의 의도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도이 형님, 준비 좀 해주쇼.”

그 말에 도이가 품에서 줄자 같은 것을 꺼내 이서휘의 얼굴 윤곽과 눈코입을 이리저리 쟀다. 도삼이 말했다.

“얼굴은 어떻게 할까요?”

이서휘는 설부루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설부는 미인의 살결을 이르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가 말했다.

“돈 많은 귀공자 한량이 좋겠구나.”

“지금도 그래 보이시는데요?”

도삼의 말에 도이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돈. 아까 봤잖아. 이름 팔아서…….”

이서휘가 피식 웃자, 도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다른 자의 얼굴을 흉내 내는 게 아니니까 금방 준비 해드립죠. 그리고 앞으로 만날 객잔을 한 군데 정하시죠. 찾느라 고생했습니다.”

“다음엔 검풍객잔서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은야(隱夜)라는 자는 조금 더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네요.”

“오, 알았다.”

이서휘가 새삼 두 형제를 바라보니 정말 재간둥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서휘가 도이와 도삼을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도삼이 재빨리 손을 들어 이서휘의 말을 막았다.

“공자님 표정에 그야말로 감탄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어허! 말씀하지 마십시오. 낯부끄러운 말은 서로 하지 맙시다요. 저희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래.”

이서휘가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걸음을 옮기다가 이서휘는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아이고, 큰일이로구나. 이 녀석들하고 정들게 생겼으니…….’

☆ ☆ ☆

이서휘는 질풍검대로 복귀했다. 주양위가 언제 도착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서휘는 이건영을 잠시 불러 양해를 구한 다음에 숙소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건영에게는 숙소 주변으로 대원들이 오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 상태.

이서휘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단 적색 장포의 사내를 추적해 정체를 밝히거나 죽이는 일이 있다. 마교십존의 제자로 추정되는 은야라는 자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맹주의 비무다. 최악은 피해야 했다.

‘개입해야 하나?’

이서휘는 당대의 그 누구보다 마인들과 많이 겨뤘던 무림인이다.

‘욕을 먹더라도 대의가 중요하다.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다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직하게 밀어붙이자.’

마음을 정리한 이서휘가 잡다한 생각을 멈추고 자신의 신체를 돌아봤다. 내공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대주천을 한 번 해야 할 것인데…… 그래야 암천세(暗天勢)와 같은 경지에 있는 무공들을 활용할 수 있다.’

내공 소모가 심한 무공들었으나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최소한 다시 검막(劍幕) 정도는 활용해야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전에서 검막을 뿌려도 내공이 쉽게 고갈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효율인데……!’

검막은 공격만 펼쳐도 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잘 사용하지 않던 무공이다. 검막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암연심검의 검막은 독특했다. 이서휘가 장님이었기에 그에 특화된 검막을 훈련했던 것.

검막이 운신을 방해하면 안 된다.

검막을 뿌림과 동시에 이서휘의 몸이 자유롭게 검을 펼칠 수 있어야 했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검막과 내공, 내공과 검막…….”

현재 보유한 내공을 더 효율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대주천이다. 물론 그 위의 방법도 있다.

벌모세수(伐毛洗髓).

하지만 외부의 도움 없이 지금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이서휘는 월단화를 취해 쌓인 내공을 바탕으로 암연심법을 이용해 지금보다 정제된 내공을 쌓아 대주천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서휘는 숙소에서 암연심법(暗嚥心法)을 운용했다.

언제 대주천을 할 수 있는 정순한 내공을 쌓을 수 있을 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효율의 문제였다.

이미 한 번 걸었던 길이었기에, 이서휘보다 효율적으로 심법을 운용할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이서휘는 차근차근 신중하게 지금의 경지를 뚫고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원들이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무렵에야 암연심법을 멈추고 호흡을 편하게 내뱉었다.

이때쯤이면 연무장도 한가할 것이다.

이서휘는 달이 뜬 밤에 자강검을 쥐고 연무장으로 나섰다.

‘검막(劍幕)을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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