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습격>
이서휘는 군림맹으로 돌아온 첫 날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밤을 술로 지새웠다.
술, 술 그리고 또 술이었다.
질풍검대주 장시우가 아직 복귀하지 않은 터라, 더더욱 이서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군림맹에 퍼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한신과 어울리면서 새롭게 창설되는 검대의 대주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까지 퍼졌을 정도.
‘차기 검대주라니……?’
이서휘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소문이 퍼진 어느 날, 이서휘가 술을 마시러 나가기 전에 책상 뒤에 걸린 부러진 장검과 유엽비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따라 기분이 묘했다.
이서휘는 책상에 앉아 일지의 백지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요주의 인물들…….”
군림맹에 숨어든 자가 누구인지 이서휘는 아직 모른다. 군림맹뿐만 아니라 한신과 자주 술집을 쏘다녀도 의심이 가는 사람 한 명을 발견하지 못한 상황.
‘누굴까?’
마교가 침투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이서휘가 경계해야 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적으로 돌아섰을 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세 명이었다.
[맹주 남궁위, 수호전주 남궁익현, 독고세가 가주 독고성.]
당장 겨룬다고 했을 때,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세 사람을 꼽으라면 이 자들이었다.
셋 중 일 순위는 물론 맹주 남궁위(南宮暐).
자타공인 군림맹의 최강자다. 맹주 자리를 놓고 다른 수호세가 가주들을 박살냈던 비무는 전설로 회자하고 있다.
연승 방식의 비무전이 아니라 수호세가 가주들이 남궁위에게 차례차례 도전하는 형식이었는데도 그랬다. 남궁위가 다른 가주들을 모조리 꺾는데 한 시진이 채 안 걸렸다고 하니…… 압도적인 무위를 지녔으리라.
이서휘가 그 남궁위를 생각했다.
‘군림맹의 은둔자. 무공에 미친 자. 맹주 일도 내팽개치고 수련에 몰두하는 자.’
맹주 업무를 보는 날보다 문파로 치면 폐관수련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시간이 더 흐르면, 칼을 갈고 있던 수호세가 가주들이 조금씩 군림맹 운영에 대한 불만을 표할 것이고 남궁위는 돌연 은퇴를 해서 무림에서 잠적하는 게 이서휘가 알고 있는 미래였다.
‘남궁위 맹주는 대체 어디에 쓰려고 무공을 익히는 건지……. 쯧.’
이인자는 수호전주 남궁익현(南宮翼顯).
맹주인 남궁위의 종제로 무공 수준이 남궁위에 못지않다고 알려진 남자다. 다른 수호세가가 남궁세가에 짓눌리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남궁위와 남궁익현 두 명 때문이었다. 수호전주라는 직책를 맡고 있으나, 사실상 부맹주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차기 맹주 자리를 노려볼 수 있었음에도 남궁위와 함께 물러났던 고수였다.
삼인자는 독고세가 가주 독고성(獨孤成).
사마준보와 어울리던 독고비영의 아버지이자, 훗날 남궁위가 은퇴하자 다른 수호세가들을 힘으로 누르고 군림맹 맹주에 오르는 자. 만약 이 세 명이 마교십존이라면 이서휘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이서휘는 세 사람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그들 보다 아래라 할 수 있는 군림맹 고수들을 떠올렸다.
‘모용, 백리, 사마 세가 가주들…… 한신, 유백, 송정후…… 검대 대주들.’
그때, 이서휘가 문득 숙소 바깥을 바라봤다.
천뢰각주 한신의 말이 들렸다.
“이 부대주, 가자!”
“어? 벌써 오셨습니까?”
이서휘가 일지를 덮고 일어서는데 기분이 여전히 묘했다. 손에는 이미 자강검이 들려 있었으나 이서휘는 벽에 걸린 유엽비도를 더 챙긴 후에 밖으로 나섰다.
☆ ☆ ☆
취연루.
자주 가던 검풍객잔이 아닌 취연루의 삼 층에서 천뢰각주 한신과 이서휘가 자리를 잡았다. 이서휘는 그날따라 기분이 이상해 한신에게 마교의 명맥의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얘기한 상태였다. 물론 장보도나 이서휘에 얽혀 있던 사연은 빼고 전했다.
한신이 이제 막 첫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다시 내려놓고 이서휘를 바라봤다.
“정말이냐? 마교가 확실해?”
“네.”
“허어.”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기녀 한 명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각주님, 찾는 분이 계신데요?”
“누가 날 찾아?”
“글쎄요. 옛 친구인데 여기 계시냐면서.”
“뭐?”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꾸하자 기녀가 움츠러들었다. 한신이 이서휘의 말을 자르고 대꾸했다.
“누군지 알아보고 다시 와라.”
“알겠습니다.”
한신이 말을 이었다.
“표정이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그때, 이서휘는 바깥의 상황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옛 친구라고?’
오늘따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한 각주님이 습격 받았던 시기는 이때쯤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서휘는 한신과 함께 있으니 누가 습격하든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서휘가 구화산에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마교십존의 존재와 그의 제자들이 무림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
이서휘는 한신에게 몸조심하라고 일부러 힘들게 얘기한 것이었는데 한신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후후후. 어쨌든 네 추측에 따르면 군림맹에도 이미 잔당들이 숨어 있다는 거 아니냐.”
“잔당이 아닐 겁니다. 수뇌부들이겠죠.”
또르륵 소리와 함께 한신이 술을 한 잔 마시며 말했다.
“네가 군림맹에 숨어든 마교십존이라 생각해봐라. 어떻게 하겠느냐?”
이서휘와 한신이 가상의 상황을 놓고 문답이 이어졌다.
“맹주님을 쳐야죠.”
“맹주님을 치려면 수호전을 뚫어야 한다. 뚫었다 한들 맹주님의 무위가 정확하게 어떤 수준인지 당대의 무림인들은 대부분 모를 것이다. 이미 전설로 회자 되는 분이니. 더군다나 워낙 두문불출하는 분이라 나조차도 어디 계신지 정확히 모른다. 가능하겠느냐? 차선책은?”
그렇게 물어보는 한신을 빤히 바라보며 이서휘가 말했다.
“군사회 혹은 쌍각의 우두머리를 암살합니다.”
“나구만? 그 다음은?”
“수호세가 가주를 한 명 유혹해도 좋겠지요. 다음 맹주에 오를 수 있도록 협조한다든가. 어쨌든 내부에 적이 있다면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들키지 않는 이상은…….”
“서휘야.”
“네.”
“나 같으면 말이야.”
“네.”
“백도맹과 관계를 불편하게 가져가서 싸움을 붙이거나, 사건을 조작해 흑도맹과 전면전이 벌어지는 계획을 짜보겠다.”
한신의 말에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후후, 역시 한 각주님…….’
한신은 실제로 벌어질 뻔했던 사건과 매우 흡사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실로 똑똑한 사내다. 술을 빼면 단점이 없는 자다.
‘이래서 더더욱 한 각주님이 군림맹에 있어야 한단 말이지.’
그때였다. 오늘따라 한신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이서휘가 한신에게 술을 따르다 말고 말했다.
“한데, 형님. 오늘따라 조금 피곤해 보이십니다.”
“요새 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닌데?”
“저야 항상 적당히 먹으면서 형님과 이야기나 나누려고…….’
이서휘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신의 안색을 살폈다. 한신의 낯빛이 어둡고 눈 밑이 거뭇했다.
“형님, 안색이……!”
이서휘는 속으로 철렁했다.
‘뭐지? 독인가? 난 멀쩡한데?’
“뭐?”
한신이 저절로 감기려는 눈을 애써 부릅뜨고 이서휘를 노려봤다. 혀가 점점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한신이 갑자기 어금니를 악물고 말을 뚝뚝 끊으며 내뱉었다.
“용정(龍井)…… 취(醉), 독(毒).”
한신의 눈이 거의 감겼다.
“형님!”
이서휘가 재빨리 한신의 상태를 살폈다.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손톱 밑이 까맣게 되어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게 무슨 독이였더라. 용정? 용정차? 차를 언제 드셨다는 거야!”
술과 섞일 때 퍼지는 독이었던가. 아니면 차근차근 쌓인 독이란 말인가.
“형님!”
그때 취연루 밑에서 우당탕 소리와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드드드 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빠져 나가고 들어오는 소리가 교차했다.
이서휘는 완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한신과 함께 있으면 누가 습격을 해오든 자신이 있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인가. 미래가 바뀐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이미 정신을 반쯤 잃은 한신이다.
시간은 벌써 축시(丑時, 새벽 한 시쯤)에 접어 들었다.
계단에서 누군가 쿵쿵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자, 이서휘가 재빠르게 상의와 흑룡화린갑(黑龍火鱗甲)을 벗었다. 한신의 옷을 벗기고 입히려다가 시간이 촉박한 것 같아서 한신이 입은 옷 위로 흑룡화린갑을 입힌 이서휘.
이서휘는 엷은 상의만 다시 입은 다음에 방문을 열었다.
이미 주변이 조용했다.
이보다 더 불길할 수 없는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자, 주변이 안개로 자욱하다. 근처에 호수도 없는데다가 평소에 안개도 거의 끼지 않는 곳이다. 이미 적들이 와있다는 얘기.
‘옛 친구라면 군림맹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인가.’
이서휘는 취연루 삼 층 창가에서 주변을 살피다가 군림맹으로 향하는 대로변을 바라봤다. 어둠에 쌓여 있었지만 이서휘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매복이 있다.’
반대편을 봐도 마찬가지. 아직은 불빛과 소란스러움이 가득해야 할 거리였으나 평소와 달리 적막함이 가득하다.
‘빌어먹을. 시우 형님, 동생 좀 살려주소. 뭐하고 있소.’
오늘 아니면 내일쯤 복귀한다던 장시우다. 질풍검대에 있는 이건영이 대원들을 데리고 몰려와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황.
흐읍, 소리와 함께 한신이 호흡을 한 차례 깊게 들이마신 후 내보내다가 푸악 하고 시커먼 토사물을 뱉었다. 악취가 이서휘의 코를 찔렀다. 조금 정신을 차린 한신이 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버텨다오…… 내공으로…… 몰아내겠다.”
“형님! 여기선 안 됩니다. 기다려 보십시오.”
한신의 손톱과 발톱, 온갖 땀구멍에서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거뭇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두드드드 하고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휘는 복도 끝의 계단을 주시하면서 자강검을 뽑았다.
‘온다.’
눈만 내놓은 흑의인이 발걸음 소리도 없이 밀려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까지 세던 이서휘가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렀다.
쐐애애앵!
푸아아아악!
달려오던 흑의인들이 몸통이 이서휘의 검기에 동시에 뚫렸다. 그러자 계단으로 올라오던 자들이 우뚝 멈췄다가, 다시 물밀듯이 올라왔다.
이서휘가 한신의 얼굴을 힐끗 봤다. 아까보다 안색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대신 온몸에 검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공을 엄청나게 소비하고 있는 듯 입술만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신의 내공이 웅혼하여 그나마 버티고 있는 상태.
한신이 말했다.
“서휘야.”
“네, 형님.”
“……미안하구나.”
“뭐가 미안해요. 살려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콰아아앙―!
굉음에 이서휘가 밑을 보니, 취연루 주변에 누군가가 더 짙은 안개를 터트려 놨다. 제 딴에는 이서휘와 한신이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이리라. 이서휘는 짙은 안개를 보자마자 싸늘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개새끼들아…… 안개 지옥을 보여주마.”
이서휘가 좌장으로 삼 층의 벽을 부순 후, 한신을 부축하고 안개 속으로 뛰어내렸다.
안개가 자욱하다.
한신이 이서휘의 팔을 꽉 붙잡고 있었는데 부들부들 떨렸다. 이서휘가 귀를 기울여 보자 희미하게 누군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휘 말고도 흑의인들을 베는 자가 있었다.
‘음? 검대원인가?’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신을 부축하면서 안개가 더 진한 곳으로 이동했다. 스스슥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살기가 느껴질 때마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서휘를 인지 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자들은 그대로 두고, 한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은 검을 휘둘러 베어냈다.
그때, 소란 속에서 누군가의 말이 이서휘의 귀에 들렸다.
[곧 군림맹이 온다. 빨리 잡아 죽이고 퇴각해야 한다.]
[삼 층 벽이 뚫려 있었다고 합니다.]
[흩어져 찾아라. 그리고 이 안개는 어떤 새끼가 터트린 거냐? 군림맹 밀려오면 쓰라 그랬더니.]
이서휘는 지시를 내리는 자의 목소리와 위치를 기억하고 유령처럼 이동했다. 그간 이 주변에서 술을 꽤 마셨기 때문에 건물의 위치를 꿰고 있는 이서휘다. 대로변 반대편으로 이동하면서 흑의인을 서넛 베었다. 더 멀리 벗어나면 안개가 사라지기 때문에 과감하게 대로변을 가로 질러서 반대편 객잔으로 들어갔다. 안개가 정말 절묘한 한 수였다. 텅 빈 객잔의 일층 안쪽에 한신을 앉게 한 다음에 이서휘가 말했다.
“형님, 여기서 운기조식을 하십시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한신이 이서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의 눈빛이 진하게 부딪쳤다. 이서휘가 한신 앞에 유엽비도를 내려놓았다. 한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자, 이서휘가 이를 빠드득 갈고 객잔 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갔다. 한신이 이서휘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 ☆ ☆
안개가 여전히 자욱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객잔과 기루가 밀집한 지역이라 근처에 있던 군림맹 무인들이 튀어 나와 겨루는 소리리라.
이서휘는 군림맹 쪽을 힐끗 바라봤다. 거리가 제법 있어, 최소 일완반시(一碗飯時, 밥 한 그릇 먹을 정도의 시간)는 버텨야 하는 상황.
‘어쩌면 군림맹이 지원 오는 길목에 매복이 있어 방해받을 수도 있다.’
이서휘가 객잔 문에서 조금 떨어져서 서 있다가 지나가는 흑의인들의 울대 부분을 간결한 동작으로 찔렀다.
푹! 푹!
근처를 지나던 흑의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절명했다. 그때였다. 또 다시 콰아앙! 소리가 들리더니 대로변에 안개가 더 퍼졌다.
이서휘가 피식 웃었다.
‘흐흐흐, 잘한다!’
취연루에 올라갔었던 흑의인들이 다시 우르르 내려와 흩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몰려와 한신이 있는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안갯속에 숨어 있던 이서휘가 제자리에서 검기를 뿌렸다. 동시에 네 명의 목이 날아가고, 부상을 당한 일부가 비명을 질렀다.
“여기 있…….”
그 자는 말을 다 내뱉지 못하고 못하고 눈을 까뒤집었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뽑아내고 이동하면서 객잔에 들어가려는 자들을 베고 다시 대로변 중앙으로 멀찍이 나왔다.
지금 이 순간, 이서휘는 안개에 숨어 있는 검귀(劍鬼)였다.
이서휘를 발견하지 못 하고 앞뒤로 지나가는 자들은 그대로 뒀다. 하나, 이서휘를 발견하거나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은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안개가 잠시 흩어진 순간에 다수의 흑의인들이 이서휘를 발견하고 다가오자, 이서휘는 서너 걸음을 도망가다가 암영술로 모습을 숨기고 다시 객잔 앞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선 너희가 장님이로구나.’
흑의인들이 이서휘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꽤 멀리 보이는 군림맹의 본영에서 파바방! 하면서 붉은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경각심을 일깨우는 신호탄이었다.
‘화룡검대로구나.’
자고 있던 다른 검대원들도 일어나 준비를 하고 달려올 것이다. 이서휘가 흑의인을 베는 도중 군림맹 무인 한 명이 빠져나가 신호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서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기세로 밀어내는 게 좋겠다.’
이서휘가 그때부터 빠르게 움직이면서 눈에 띄는 흑의인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면서 달렸다. 푹푹,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찌르고 훌쩍 솟아서 모여 있는 흑의인들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렀다. 쐐애앵! 소리와 함께 흑의인들의 팔다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갔다. 비명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여기다!”
흑의인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면서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는 달려드는 흑의인의 검을 두 동강 내면서, 그대로 어깨를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베어냈다.
죽일 시간도 아까웠다.
그대로 이동하면서 달려오는 흑의인들을 베어 넘기면서 이동했다. 푸악, 푸악! 소리가 연달아 터지면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서휘가 잠시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이서휘의 온 신경은 한신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객잔 쪽을 향해 있었다. 누군가 그 객잔으로 몰려가려고 하자, 이서휘가 경공을 써서 급히 달려갔다.
객잔 문 좌우로 흑의인이 도착했다.
이서휘가 공중으로 솟아서 우측에 서 있는 흑의인의 어깨에 올라타면서 자강검을 목에 박아 넣었다.
푸욱 소리와 핏물이 튀자, 이서휘가 어깨를 밟고 튀어 나가면서 공중에 거꾸로 솟아 좌측에 있는 흑의인의 정수리를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베고 땅에 내려섰다. 흑의인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안개가 조금 걷혔음에도 불구하고 대로변에 있는 객잔과 기루의 불이 다 꺼진 터라 주변이 제법 어두웠다.
대로변 중앙에서 누군가의 말이 다시 들려, 이서휘는 암영술로 이동해 대화를 들었다.
[곧 군림맹이 옵니다.]
[당장은 아니야. 어서 찾아라.]
[네.]
그때, 객잔 앞에 유난히 쓰러져 있는 시체가 많은 것을 확인한 적들이 횃불을 들고 점점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두 번의 칼질로 죽일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결국 이서휘가 적을 베면서 모습을 드러내자, 누군가가 외쳤다.
“여깁니다!”
흑의인이 점점 늘어났다.
슉슉슉슉슉.
암기가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이서휘는 내공을 아낄 생각으로 자강검을 두어 번 휘둘러 튕겨내고, 겨우 몇 보 움직인 것으로 암기를 모조리 피해냈다.
콰과곽 하는 소리와 함께 객잔 주변에 암기가 박혔다.
이서휘가 자강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흐음, 많구나.”
한 놈이라도 이서휘를 뚫고 객잔 안으로 들어가면 낭패다. 삼십 여명의 흑의인들이 동시에 병장기를 쥐고 달려 들었다. 이서휘가 어쩔 수 없이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러 전방의 적들을 동시에 베어냈다.
쫘아아아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허리가 끊어졌다. 동료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흑의인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이서휘에게 달려들고, 두 명이 방향을 갑작스럽게 바꿔 창문으로 달려갔다.
이서휘가 창문으로 달려가는 흑의인들을 향해 암연심검의 환을 내질러 목에 구멍을 냈다. 검기가 뚫고 나가, 옆에서 달리던 흑의인의 머리까지 관통했다.
동시에 휙휙휙휙 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이서휘에게 쏟아졌다.
스스스스―.
이서휘의 몸이 사라졌다가 달려드는 자들 위에 나타나서 쾌검을 펼쳤다.
푸욱, 챙, 푹푹푹, 챙챙!
검을 들어 막어내는 자들은 그냥 지나치고, 단 일검에 죽일 수 있는 자들만 골라 급소에 자강검을 찔러 넣고 뺐다.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 이서휘의 등에 도를 찔러 넣었다. 이서휘가 도를 밟고 핑그르르 돌면서 솟구치다 암영술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흑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때부터 이서휘는 죽이는 시간도 아까워 흑의인들의 발목 뒤, 목, 손목, 눈 등을 닥치는 대로 베면서 이동했다. 한 명이라도 부상을 더 입히려는 생각이다.
쨍그랑 소리가 연달아 울리면서 수십 개의 무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어서 이서휘는 타격만 줘도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급소만을 골라 찌르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흑의인들의 비명이 끔찍하게 울려 퍼지면서 이어졌다.
누군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검귀! 검귀가 있습니다!”
“닥쳐라! 쓸데없는 소리 내뱉는 새끼는 그 자리서 죽여라.”
푹, 푹, 푹!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는 부상자들을, 같은 편인 흑의인들이 검을 내질러 목숨을 끊어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적색 장포의 사내가 도착해 객잔 앞을 막아선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나 이대로 가다간 임무를 실패할 것 같아 씁쓸한 마음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적색 장포의 사내는 인피면구를 써서 얼굴에 생기와 표정이 전혀 없었다. 적색 장포 사내가 좌우에 대기하고 있는 네 명의 수하들과 함께 나서며 말했다.
“내가 저놈을 맡는다. 가라. 객잔 안으로.”
네 명이 동시에 직도를 뽑아들고 경공을 펼쳤다. 달려오던 두 명의 모습이 스슥 하며 사라지고, 두 명은 적색 장포 사내를 지나쳐 이서휘에게 달려왔다.
적색 장포 사내는 조금 늦게,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이서휘를 향해 다가왔는데 속도는 흑의인들보다 더 빨랐다.
이서휘가 처음으로 침을 삼켰다.
소리와 감각으로 파악하자, 모습을 숨긴 두 명은 객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색 장포 사내의 좌우에서 달려오는 두 명의 무위도 심상치 않았다.
이서휘가 전방에서 다가오는 세 명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렀다. 쐐애애앵 하면서 반달형의 검기가 날아갔다.
즉시 적색 장포 사내가 사라지고, 두 명의 흑의인은 공중으로 솟았다.
이서휘가 허리춤에 찼던 흑비도를 던져 공중에 솟은 사내 둘을 저격하고, 급히 자강검을 휘둘러 허공을 베었다.
깡!
어느새 다가온 적색 장포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자강검을 튕겨냈다. 이어서 적색 장포 사내와 이서휘의 접전이 펼쳐졌다.
챙챙챙챙챙! 까앙!
이서휘와 적색 장포 사내가 한 보씩 밀려나 동시에 같은 말 한마디를 목으로 삼켰다.
‘강하다.’
그때 콰앙! 소리가 나면서 객잔 문이 부서졌다. 이서휘가 놓친 두 명이 객잔 문을 부셨던 것. 이서휘의 고개가 아차 하면서 돌아가는 찰나에 붉은 장포의 사내가 휘두르는 검이 이서휘의 옷깃을 베어냈다.
스슥!
결국, 이서휘는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는 두 명을 저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싸늘한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풋슝 하는 소리와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가려던 두 사람이 허무하게 풀썩 쓰러졌다. 독침이라도 맞았는지 저마다 목을 움켜쥐곤 짧게 부르르 떨다가 동작을 멈췄다.
‘어?’
이서휘는 호흡을 가다듬고 붉은 장포 사내를 상대했다.
챙챙챙챙!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를 악문 이서휘가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하자, 자색이 진하게 차올랐다. 자강검에 부딪친 붉은 장포 사내의 검에서 서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장포 사내는 자신의 검이 허망하게 부러지자, 훌쩍 뛰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건물 지붕 쪽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뒤늦게 몰려오는 흑의인들을 향해 엄청난 빛을 쏟아내며 터졌다.
콰아아앙!
적색 장포 사내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서휘가 눈을 치켜뜨며 건물 위를 바라봤다.
‘어? 설마.’
그때였다. 이서휘가 서 있는 객잔 위에서 흑의인들의 목이 투둑 하고 떨어졌다. 이어서 흑의인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두 명의 무인이 소리 없이 내려섰다.
한 명은 내려서자마자, 이서휘 곁으로 걸어왔는데 한 명은 착지자세가 멋있다고 생각했는지 주변을 노려보면서 자세를 잠시 유지했다.
양손에 비수를 들고 있는 흑의인 한 명이 걸어오면서 경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복숭아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다른 흑의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도 먹고 싶다.”
도삼과 도이였다.
이서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이는 이서휘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뚝 서서 객잔의 문을 막아섰다.
이서휘가 도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개는 네 작품이었느냐?”
“후후, 그렇습죠. 후방에서 몇 명을 몰래 죽였더니 놈들 품에서 안개탄 같은 게 나오더군요. 공자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았습니다.”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간둥이로구나.”
“후후,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적색 장포 사내가 이서휘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또 보게 될 거다.”
이서휘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길 바란다.”
이서휘는 적색 장포 사내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적색 장포 사내가 대꾸를 않고 군림맹 반대편으로 경공을 펼치면서 사라졌다. 이서휘가 군림맹 반대편으로 빠지려는 적색 장포 사내를 보며 도삼과 도이에게 말했다.
“저 새끼, 조용히 추격해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다오. 혹시 들키면 그대로 물러나고. 무위가 상당하다.”
“알겠습니다.”
도이와 도삼이 물러나고, 이서휘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한신의 표정이 한결 밝았다.
이서휘는 한신이 운기조식을 마칠 때까지 자강검을 쥐고 소리 없이 서 있었다. 화룡검대가 도착했는지 말발굽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잔당이 있는 모양이었다.
과거, 한신은 근처의 객잔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은 비록 독에 중독되었지만 분전한 이서휘와 갑작스럽게 등장한 도이와 도삼 덕분에 위기는 넘긴 상황이다.
‘과거에도 독에 중독되어 당하셨단 말인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는 조금 답답했다.
그때, 한신이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이서휘가 검을 쥐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한신이 말했다.
“고생했다.”
이서휘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떠십니까?”
“공야 선배에게 가야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한신이 말한 선배는 공야청(公冶淸)이라는 자로 군림맹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난 수호전 소속의 사람이었다.
그때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거한이 검을 쥐고 나타났다.
화룡검대 부대주 유자광(柳子光)이었다. 일전에 이서휘에게 크게 당한 유자광이다. 하지만 한신과 이서휘가 무사한 것을 보자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 각주님, 이게 무슨 일이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어, 대체 어디 놈들이냐? 대주님과 소천이는 적을 추격하러 갔다.”
유자광의 말에 이서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깊게 가면 안 될 텐데요. 매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유자광이 인상을 그으며 말을 이었다.
“말을 내줄 테니 네가 각주님 모시고 맹으로 돌아가라. 나도 대주님과 소천이를 쫓아가야겠다.”
“예.”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챙긴 후 한신을 부축하고 일어서자, 유자광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준승아!”
“네, 부대주님.”
“다섯 명 추려서 입구까지 호위해라. 말 한 필 더 내오고.”
“알겠습니다. 가시죠, 각주님. 이 부대주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얼굴로 유자광이 멋쩍게 웃으며 이서휘의 어깨를 툭 쳤다.
“가라.”
이서휘가 한신을 먼저 태우고, 이어서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형님, 나중에 술 한 잔 합시다.”
“후후, 그래.”
겨뤘던 사이지만 앙금 따위는 없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갑니다!”
이서휘가 말을 몰아 군림맹으로 질주했다. 어느 정도 몸에 힘이 돌아온 한신이 중얼거렸다.
“너랑 술 먹기 전에 운룡회의 진사필과 차를 마셨다.”
진사필이라는 놈은 이서휘가 얼굴도 모르는 자였다. 이서휘가 대꾸했다.
“마시기 전에 냄새는 맡으셨지요?”
“물론이지. 무취(無臭)였다. 맛도 일반적이었고…… 소량을 탄 것 같다. 술과 결합할 때만 반응하는…… 들어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는구나. 자세한 건 공야 선배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으니 바로 수호전으로 가다오.”
“알겠습니다.”
한신이 말했다.
“고맙다. 서휘야. 네가 날 살렸구나.”
그 말에 이서휘가 더욱 긴장했다. 어두운 밤길이다. 더 이상 매복이 없길 바라면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대꾸했다.
“술 한 잔 사시면 되죠.”
“이놈아 맨날 내가 사잖아.”
“흐흐흐, 저보다 돈이 많으시니까요.”
“후후.”
그때 앞 쪽에서 두드드드 하고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이서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바라봤다. 희미하게 선두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질풍검대 이건영이었다. 이서휘가 외쳤다.
“건영아!”
“부대주님!”
이건영을 필두로 거의 대부분의 질풍검대가 말을 몰고 연달아 도착했다.
“괜찮으십니까?”
“어, 너희는 화룡검대와 합류하러 가는 것이냐?”
“네.”
이서휘가 이건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화룡검대 일부가 적을 뒤쫓고 있을 것인데, 네가 스무 명을 데리고 가서 화룡검대 후위를 살펴줘라.”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서 한 각주님을 호위하도록.”
“네!”
이서휘는 화룡검대 다섯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질풍검대와 복귀하겠다. 가서 유 부대주님께 고맙다고 전해다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의 호위를 받아 군림맹으로 질주했다. 잠시 후 정문에 도착해 바라보니, 군림맹 전체가 대낮처럼 밝았다. 이서휘가 초조한 마음에 말 위에서 공력을 실어 우렁차게 외친 후 그대로 정문을 돌파했다.
“정문 보초(步哨)! 문 열어라. 질풍검대 이서휘다!”
이서휘는 그대로 말을 몰아 한신과 함께 수호전으로 향했다.
☆ ☆ ☆
수호전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서휘가 말을 몰아 근처까지 다가서자, 수호전 무인들이 경계의 빛을 띠며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한신이 말 위에서 대꾸했다.
“천뢰각 한신이다. 중독된 상태니 공야 선배를 불러다오.”
“엇! 한 각주님. 알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른 무인이 수호전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수호전의 문이 열렸다.
이서휘의 눈이 커졌다.
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수호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서휘가 더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수호팔검(守護八劍)으로 보이는 무인이 좌우에 네 명씩 나뉘어 앉아 중앙에서 벌어지는 비무를 진중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수호전의 중앙에서는 두 명의 고수가 겨루고 있다가 갑자기 들어오는 자들을 보고 동작을 멈췄다.
이서휘는 기가 찼다.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비무란 말인가! 더군다나…….’
비무를 하고 있던 고수들은 군림맹의 맹주 남궁위와 수호전주 남궁익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서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한들이었다. 이서휘는 이 두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처음이었다. 본래 이렇게 불쑥 들어가는 게 예의가 아니었으나, 일단 한신의 상태가 더 급한 사안이었다.
이서휘가 급히 맹주와 수호전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 각주가…….”
남궁위가 한신을 힐끗 보더니 어느새 소리도 없이 이서휘 옆에 다가와 한신의 안색을 살폈다.
“신아, 중독됐느냐?”
맹주의 물음에 한신은 이서휘가 놀랄 정도로 아무런 격식을 갖추지 않고 대꾸했다.
“죽겄소.”
남궁익현은 느릿느릿 다가오면서 엄한 목소리로 한신에게 말했다.
“그러게 내가 호위를 붙여 준다 하지 않았느냐.”
한신은 어쩐지 남궁익현을 더 무서워하는지 다소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독입니다. 호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마침 여기 이 부대주가 있어서 살았습니다만.”
남궁위와 남궁익현이 동시에 이서휘를 바라봤다. 남궁위가 말했다.
“이 부대주, 고생 많았다. 요새 둘이 붙어 다니면서 술 축낸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그게 신이의 행운이었구나.”
“아닙니다.”
남궁위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뭐야? 무공만 수련한다더니 맹에서 벌어지는 일에 훤하잖아.’
남궁위가 말했다.
“공야 녀석은 불렀느냐?”
이서휘가 대답했다.
“아, 네.”
“비켜 봐라. 공야 녀석이 언제 올 줄 알고. 신아, 앉아라.”
“이러실 필요까진…….”
남궁위가 직접 내공을 쓰려고 하자 남궁익현이 끄응 소리를 내며 말렸다.
“맹주님, 당장 내일부터…….”
“괜찮다. 아무 말 말도록.”
남궁위가 한신에게 말했다.
“너도 입 다 물고 앉아.”
“네.”
남궁위가 두 팔을 걷더니 한신에게 내공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은 같은 내공을 수련했는지 주는 자도, 받는 자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수호팔검이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더니 남궁위와 한신을 지켜보며 둘러앉았다.
☆ ☆ ☆
수호전에서 벌어진 모든 장면이 이서휘에겐 나름 충격적이었다.
남궁익현이 이서휘에게 눈짓을 하며 수호전의 입구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을 걸었다.
“술을 작작 먹었어야지. 내 언제 저럴 줄 알았다.”
“후후.”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힐끗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분쟁이 있어 검대가 나갔다는 보고는 들었다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운룡회 진사필과 오후에 차를 한 잔 마셨다고 합니다.”
“그래? 처음 듣는 얘기군.”
남궁익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입구의 좌우에서 누군가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전주님.”
“이 시간 이후로 군림맹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통제하고. 특히 운룡회는 건물에서 한 명도 빠져 나오지 않게 포위해라. 그리고 천라각주 유백하고 운룡회주 송정후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남궁익현이 이서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습격한 자들은 누구냐?”
이서휘가 느낀 그대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살수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갖췄는데 좀 애매합니다. 흑도맹으로 보이기 위해 연기를 하는 티가 좀 났습니다.”
남궁익현이 이서휘의 말에 대꾸를 않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연창아.”
“네, 전주님.”
“군사회에 연락해서 흑도맹 동향 알아보고 보고하라 그래. 새벽이든 아침이든 상관 없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왜 남궁익현이 부맹주 대우를 받고 있는지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군림맹 무너질 때 두 분은 은퇴해서 대체 뭐하고 계셨습니까?’
이서휘가 갑자기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남궁익현이 인상을 썼다.
“뭐? 왜 그렇게 쳐다봐.”
“아, 아닙니다.”
남궁익현이 말을 이었다.
“장 대주는 아직 복귀 안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때 공야청이 수호전 앞에 등장했다. 잠을 자다 나왔는지, 차림이 엉망이었다.
남궁익현이 달려오는 공야청을 제지하며 말했다.
“맹주님이 살펴보고 있다. 끝나면 네가 한신을 살펴봐라.”
“독이라 하셨죠?”
“여기 이 부대주한테 물어봐라.”
그러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용정차에 섞인 무취 독으로 추정됩니다. 술과 함께 섞이자 독이 반응했습니다.”
공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효로취산인가? 누군지 몰라도 꽤 조심하면서 독을 썼군요. 어쨌든 한 각주가 술을 자주 마신다는 걸 아는 놈이…….”
공야청의 말에 남궁익현이 코웃음을 쳤다.
“저 녀석 술 마시는 거야, 군림맹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어쨌든 맹주님이 일어나시면 자네가 한 각주를 살펴보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맹주님의 상태도 살펴보게.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닌데.”
“알겠습니다.”
공야청이 물러나자 남궁익현이 수호전 바깥으로 나가며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부대주, 얘기나 하지. 자네랑 대화하는 건 처음이로군.”
이서휘가 문득 고개를 돌려 한신과 남궁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궁익현이 말했다.
“반 시진은 더 걸릴 게야.”
“네.”
이서휘는 한신 덕분에 뜻밖의 인물과 함께 수호전 앞을 거닐면서 대화를 나눴다. 무엇보다 한신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남궁익현과 대화를 하게 된 것도 이서휘에겐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평소에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격차가 심한 상급자였기 때문. 이서휘와 군림맹의 운명은 이런 식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이서휘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전주님,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비무를 하고 계셨습니까?”
이서휘의 물음에 남궁익현이 잠시 망설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맹주님이 약조했던 비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네?”
‘약조했던 비무라니, 군림맹의 맹주가 무엇을 증명할 게 있어 비무를 한단 말인가?’
이서휘가 과거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남궁익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