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대도>
이서휘가 엄청난 속도로 도둑을 따돌리고 석실 앞에 도착했다. 귀를 기울어 보니, 도삼은 아직 중턱에도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서휘는 도삼 일행이 이 장소를 알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면서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이서휘는 도삼이 오기 전에 석실 안에 들어가 호리병에 석수를 담았다. 훌쩍 뛰어서 복숭아를 하나 따서 입에 물고, 다시 석실 문을 닫아 소나무 근처에 걸터앉아 복숭아를 먹었다.
달이 흐릿해 제법 어두운 날이다.
이서휘가 큼지막한 복숭아를 씨만 남기고 쪽쪽 빨아먹고 있을 때쯤 아래쪽에서 도삼의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기를 쓰고 달려오던 도삼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자꾸 돌부리와 나뭇가지에 걸려 고꾸라졌다.
온몸에 흙을 묻힌 도삼이 헉헉 대며 걸어왔다. 켁켁 하는 소리와 함께 침을 내뱉었다.
“캬악, 퉤!”
이서휘는 도삼을 무시하고 쩝쩝 소리를 내며 입에 물고 있던 복숭아씨를 절벽 아래로 내뱉었다.
도삼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복숭아나무를 찾겠다고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복숭아! 킁킁! 복숭아! 더 없소?”
이서휘가 도삼을 멀뚱히 바라보며 말했다.
“없는데?”
“진짜 댁의 인성이 시커먼 것을 보니 과연 칠흑공자라 불릴 만하오. 내 인정하리다. 칠흑공자님.”
도삼이 포권을 취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졌소. 이 도삼이 패배를 인정하겠소. 어디 소속이요? 사파겠지? 아니다. 당신 정도면 흑도맹의 간부쯤은 되겠군. 암, 그래야지. 사람을 이렇게 잔인하게 괴롭히다가 결국 죽이겠다 이거지? 좋아. 좋아. 갈 데까지 가 봅시다. 곧 대도께서 날 찾아올 터. 흥! 대도께서 오시면 흑도맹주가 와도 못 당할 것이오. 농담 같소? 일단 내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대도께서는 당신부터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오. 두고 보시오.”
“말 다 했느냐?”
“다 했소.”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가 호리병에 담은 석수를 꿀꺽꿀꺽 마셨다.
“꺼억…….”
호리병에 아직 물이 남은 듯 출렁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이서휘가 절벽 아래 펼쳐진 구화산의 산세를 쳐다보며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좋구나.”
도삼이 충격을 받았다.
도삼은 저도 모르게 호리병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무어라 사과는 해야겠는데 하도 강한 말들을 내뱉어서 그런지 머리가 잠시 작동하지 않았다.
목은 타들어 가고 말은 안 떠오르고…….
어쩌면 해약보다 물이 더 시급한 상황. 도삼의 목에서 꿀꺽 하는 소리가 퍼져나가 구화산을 울리는 것 같았다.
도삼이 무릎을 꿇어,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이서휘를 바라봤다.
도삼은 이서휘를 바라보며 형님으로 모시겠다, 남자답게 다시 한 판 붙자, 차라리 죽여라 등등 오만가지 말을 떠올리다 가까스로 삼켰다. 습관적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던 궤도를 거두고, 이서휘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졌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시종일관 경박했던 목소리가 도삼의 본래 목소리인 묵직한 중저음으로 바뀌었다.
이서휘가 도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일어섰다.
☆ ☆ ☆
이서휘는 도삼에게 일단 패혈단을 먹인 상태다. 해약을 이서휘가 쥐고 있는 한 도삼은 꼼짝도 못하는 상황.
도삼이 익힌 궤도도 박살냈으나, 도삼에 대한 의심은 풀지 않고 있었다. 다만 도삼은 이서휘가 알지 못하는 세력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도삼을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서휘가 호리병을 들고 도삼에게 다가갔다.
“입 벌려라.”
도삼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이서휘가 호리병의 물을 따라주다가 도삼의 혈도를 짚었다.
“윽.”
그 와중에 도삼은 입으로 떨어진 물을 겨우 삼켰다. 이서휘가 말했다.
“네놈들 정체가 뭐냐?”
도삼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서렸다.
“우리 둘 다 끔찍하게 죽을 거요. 나더러 대체 어쩌란 말이오? 차라리 날 죽이고 공자라도 몸을 피하는 게 좋겠소.”
이서휘가 도삼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서휘가 다시 소나무 아래로 되돌아가며 말했다.
“어차피 너도 죽는다. 털어 놔라. 살 방법을 궁리해보게. 만약 내가 당한다면 죽기 전에 해독약을 벼랑 밑으로 던질 것이다. 네가 먹은 패혈단이 꽤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겠지.”
도삼이 생각에 잠기고, 잠시 이서휘도 조용히 소나무 아래서 호흡을 골랐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도삼은 이서휘가 찍은 혈도를 풀려고 애를 써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 마음을 정리한 도삼이 눈을 감고 있는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반로환동한 고수였으면 좋겠소. 그래서 날 살려줬으면 좋겠소. 나도 살고 싶소. 사랑하는 여인이 있단 말이오.”
그 말에 이서휘가 눈을 떴다.
“네가 죽인 흑도맹의 무인들도 네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흑도맹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공자께서 정말 흑도맹이란 말이오?”
“말했지 않느냐 칠흑공자라고.”
이번에는 도삼이 웃지 않았다.
“일단 날 좀 소나무 뒤로 데려가 주시오. 농담이 아니고 대도, 아니 대사형이 이리로 올 가능성이 높소.”
그 말에 이서휘가 무릎을 꿇은 채로 굳어 있는 도삼을 한 손으로 들어 소나무 뒤에 놓았다. 이서휘도 소나무 뒤로 돌아가 도삼을 마주 보고 앉았다.
이서휘가 물끄러미 도삼을 보자, 도삼이 작게 속삭였다. 거짓이 없다는 듯이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살려 주실 거요?”
“살려 주겠다.”
“어떻게 믿소?”
“넌 이제 나 말고 믿을 사람이 없다.”
그 말에 도삼이 한숨을 푹 내쉬다가 말했다.
“후우우, 대도가 사부의 유일한 제자요.”
“사부의 이름은?”
도삼의 말투가 점점 정중해졌다.
“그건 정말 모릅니다. 대화도 나눠보지 않았지요. 우리는 대사형이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무공, 궤도, 도둑질 전부 대사형에게 배웠습니다. 임무도 대사형으로부터 받습니다. 대사형이 항상 ‘사부님의 뜻이다.’라고 종종 말을 시작하시기 때문에 저희도 사부라 할 뿐입니다.”
“저희라 함은 누구를 말하느냐.”
“제 위로 도이(盜二)라 불리는 사형이 한 명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저와 같은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삼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흔들렸다. 거기까지 들은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진실은 없었으나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이야기였다.
“털어 놓은 김에 다 말해라. 더 있는 눈치구나.”
도삼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네, 그러나 지금부터는 전적으로 도이 사형과 저의 추측입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삼이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사부라는 분은…… 마교(魔敎)입니다.”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라고?”
“네.”
당대 그 어느 무림인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서휘다. 칠흑검제 시절에 싸우던 무리는 천마 위극신이 이끄는 천마교였다.
그런데 마교라니?
이서휘가 조용히 대꾸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저희는 마교가 아닙니다. 심지어 대사형도 아직 마교에 입교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부님 홀로 마교의 사람입니다.”
이서휘가 도삼의 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으나 동공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독심술로 도삼을 살펴봐도 그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제야 이서휘가 호리병을 내밀어 도삼의 입에 다시 들이부었다. 도삼이 꿀꺽꿀꺽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이서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교(魔敎)는 이서휘가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한 세력이다. 무림사 이래 혈겁(血劫)이라 불렀던 사건들은 대부분 마교가 일으킨 것이다.
이서휘가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혈겁은 마교와 무림맹, 양측이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처절하게 분쇄된 옛날 일이다.
‘천마교가 아니라 마교라고? 내가 아는 천마교를 말하는 게 아닌 것 같군.’
마교의 총본산에 살아남은 생명이 없을 정도로 처절했던 일이라고 들었다.
목을 축인 도삼의 말이 다시 이어지자, 이서휘는 침착하게 경청했다.
“마교는 총 열 명입니다. 강자존 약자멸(强者存 弱者滅)이라 부른 피의 축제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지요. 열 명이 남을 때까지 죽고 죽이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대도의 사부가 그 중 한 명입니다. 사형인 도이가 어렸을 때…….”
이서휘가 눈을 빛냈다.
“잠시만, 마교가 열 명뿐이라고?”
도삼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이서휘가 도삼의 말을 막았다.
“…….”
이서휘는 조용한 동작으로 품에서 해독약을 하나 꺼내 도삼의 입에 넣었다. 패혈단은 해독약 한 알로 해독할 수 없는 독이었으나 도삼은 잠자코 해독약을 꿀꺽 삼켰다.
이서휘가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조용히 있어라.]
이서휘는 도삼을 끌어당겨 소나무 아래에 약간 땅이 패인 공간에 앉혔다.
사방이 고요했다.
도삼도 높은 수준의 궤도를 익힌 도둑이다. 때문에 도삼의 귀와 감각도 보통 고수들에 비해 훨씬 예민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이서휘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도삼이 의아해하건 말건 이서휘는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 ☆ ☆
잠시 후 사각사각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이서휘가 눈을 떴다. 도삼의 눈빛이 여러 의미로 떨렸다. 그도 이제야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던 것.
그런데 이 칠흑공자라는 자는 대체 언제부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도삼은 혈도에 찍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데다가 소나무가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로 눈알을 굴리던 도삼은 문득 이서휘를 다시 쳐다봤다가 눈동자가 커졌다.
이서휘의 몸이 어둠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암영술을 이용해 어둠 속으로 숨었다.
한 남자가 석문 근처로 다가와 조용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적힌 글을 읽고 있었다.
이서휘는 잠자코 남자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누구지? 대도라는 놈인가?’
전신을 흑의로 두른 남자가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봤다. 그러다 다시 석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서휘가 생각했다.
‘설마 문을 열 줄 아는 건 아니겠지?’
흑의인은 석문이 있는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바닥에 떨어진 흙을 손가락으로 비벼 보더니, 이곳에 석문이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흑의인이 등에 멘 봇짐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 속에 든 무언가를 석문을 향해 뿌렸다.
가루가 날아가더니 치지직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놀랍게도 석문의 틈새가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드러났다. 이후에는 빠른 몸놀림으로 석문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흑의인은 어느새 봇짐에서 죽통 같은 것을 꺼내 석문 근처를 일일이 쳐대고 있었다.
퉁, 퉁, 퉁…… 퉁, 퉁, 퉁…….
소리가 다른 곳이 있는 알아보는 행동이었다. 이서휘는 흑의인이 하는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봇짐에는 무슨 도구가 저리 많은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길이를 재고, 불을 붙였다가 약물을 뿌렸다. 그래도 꿈쩍을 하지 않자 석문 근처를 장력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래도 문이 열리지 않자, 흑의인은 석문에서 물러나 무릎을 꿇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백의를 걸친 남자가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 흑의인의 뒤에 섰다.
“둘째야, 죽고 싶으냐?”
둘째라 불린 남자는 도이였다. 도이가 무릎을 꿇은 채로 대꾸했다.
“오셨소, 대사형…….”
백의 남자는 대도, 그 사람이었다.
대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막내는 어디 있느냐?”
“혼자 왔습니다. 막내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기가 차는 노릇이군. 나도 못 열었는데 네가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대사형!”
“닥쳐라.”
도이가 여전히 석문을 바라보는 자세로 말을 이었다.
“정녕 손을 쓰셔야 겠습니까? 대사형도 사부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할 것입니다. 어차피 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언젠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누가 교에 들어가겠다 하더냐.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대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느냐, 아님 발악이라도 해보겠느냐.”
도이가 대답 대신에 앉은 자리에서 뒤로 솟구치며 비수를 대도의 목에 들이밀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도삼이 펼치던 궤도와 흡사한 기도가 느껴졌다.
챙챙챙챙!
대도는 도이가 펼치는 비수를 튕겨 내면서 비웃었다.
“제법 늘었구나.”
어느새 대도의 손에는 유엽비도가 들려 있었다.
도삼의 눈빛이 요동쳤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서 이서휘가 자신을 바라봐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불안한 눈빛을 내보냈다.
이서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 바라보자, 도삼이 입모양으로 급하게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제발.]
[왜?]
도삼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거의 우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대도뿐만 아니라, 설마 도이까지 이곳에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도삼이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형입니다.]
[형이라고? 친형제?]
[네, 살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서휘가 불꽃을 튀기며 겨루고 있는 대도와 도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어차피 대도는 죽일 생각이었다. 이서휘는 본래 두 명이 싸워 한 놈이 죽으면 그때 나설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희미한 달빛에 대도의 얼굴과 무기가 드러났다.
삼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대도의 입은 개구리처럼 컸고 특이하게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어?’
지켜보던 이서휘가 말 그대로 잠시 얼어붙었다.
이서휘가 눈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의 입이다.
과거에는, 저 자가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아 목소리를 알 수가 없었다.
눈과 코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피면구를 썼었거나.
그러나 저 비웃는 입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서휘의 장검을 부러뜨린 무기도 유엽비도였다.
‘저 새끼였구나!’
대도의 정체를 확인하자, 이서휘의 눈에 화등잔 같은 불이 켜졌다. 가슴이 요동쳤다.
‘내가 너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가 암행표를 시전해 벼락 같이 튀어 나갔다.
☆ ☆ ☆
이서휘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푸악, 소리와 함께 도이의 팔뚝에서 피가 솟았다. 대도가 달려 들어 도이의 목을 향해 비도를 찔러 넣었다.
파앙!
어느새 다가온 이서휘가 자강검으로 대도의 비도를 쳐냈다. 도이가 물러나고 순식간에 이서휘와 대도가 십여 합을 겨뤘다. 까앙! 하는 소리를 내며 대도가 이서휘의 자강검을 쳐내고 말했다.
“웬 놈이냐?”
대체 무어라 대꾸해야 할까? 너 때문에 칠흑 속에서 살았던 자라고 할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을 리가 없을 터. 이서휘는 자신의 운명을 바꾼 자를 노려보다가,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도이에게 말했다.
“도이라 했느냐? 소나무 뒤로 가봐라.”
“뭐요?”
도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달려가보니 도삼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형님.”
“다친 곳은?”
“일단 좀 일으켜 주십시오.”
두 사람이 목소리를 작게 해 대화를 나눴다.
대도가 도삼의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도삼이도 있었느냐? 잘 됐군. 오늘 다 죽여주마.”
대도가 유엽비도를 쥔 채로 뒷짐을 지고 이서휘를 노려봤다.
“참으로 이상하군.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설마…… 흑도맹이냐? 정파 쪽은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이서휘가 말했다.
“궁금하느냐?”
“실로 궁금하구나. 어떻게 여기에 와있지? 도삼은 네가 제압했느냐?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제법인가 보구나.”
“…….”
이서휘가 달빛을 등지고 아무 말 없이 귀신처럼 서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도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대도를 습격했다.
챙, 챙챙챙챙챙챙!
대도가 웃음을 터뜨리며 도이의 비수를 막았다. 대도의 무위가 실로 대단했다. 이서휘가 과거에 두 눈만 잃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만큼. 도이가 합공을 펼치자는 듯이 공격하자, 이서휘가 도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넌 빠져라.”
도이가 대꾸했다.
“함께 칩시다.”
이서휘에게 어서 도우라는 식으로, 도이가 대도에게 덤벼 들었다.
이서휘가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비키라고, 이 새끼야.”
이서휘가 대도와 도이의 허리를 동시에 끊어낼 수 있을 정도의 검기를 벼락같이 쏟아 냈다.
쐐애애애앵!
대도와 도이가 화들짝 놀라면서 동시에 공중으로 솟았다. 이서휘가 공중으로 솟아 대도의 비도를 쳐냈다.
깡! 챙챙챙챙챙!
두 사람이 초식을 겨루면서 땅에 내려서서 싸움을 이어나갔다.
대도가 사용하는 유엽비도(柳葉飛刀)는 한 자 두 치에 약간 모자라는 길이(약 35cm)였으나 날카롭기 이를 데 없어 수많은 검을 두 동강 냈던 병장기다. 대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이서휘의 검을 동강 내겠다는 듯이 유엽비도를 강하게 휘둘렀다.
깡!
그러나 자강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깜짝 놀란 대도가 이서휘를 노려봤다. 이서휘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미소에 대도도 함께 웃었다.
챙챙챙챙챙!
이서휘는 지금 꿈에 그리던 대결을 하고 있다.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전력을 내보였다. 그 전에는 질풍검대 이서휘였다. 이서휘가 일부러 그리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귀 후 옷깃 한 번 베인 적이 없는 이서휘다. 지금은 다르다. 억눌렀던 모든 것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희미한 달밤, 그렇게 이서휘는 과거의 칠흑검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도가 이서휘의 내공이 부담스러워 자강검을 튕겨 내자, 이서휘가 득달같이 달려 들었다.
깡깡깡깡깡!
내공을 잔뜩 주입한 두 병장기가 밀리지도 않고 맞붙었다. 벼락이 부딪치듯 싸웠던 두 사람이 거리를 벌려 잠시 서로를 노려봤다. 대도가 눈을 부릅떴다.
“강적일세……. 뭐 하는 놈이냐? 왜 네가 우리 사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장보도를 퍼뜨리고 살인을 일삼는 게 너희 일이냐? 정신이 나간 놈이로구나.”
“후후후. 도삼이 이 새끼가 별 얘기를 다 했구나.”
기습, 유엽비도의 날카로움, 의표를 찌르는 궤도. 상대방의 예상을 뛰어넘는 내공의 깊이로 승승장구 했던 대도다. 그러나 난생 처음 보는 애송이가 유엽비도를 전부 받아내면서도 검마저 부러지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의 표정을 살펴보던 대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 날 아는 놈이었구나?”
대도가 궤도를 사용하려고 하자,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개소리 늘어놓지 말고.”
“낄낄낄. 안 통하는 것을 보니 네 녀석은…….”
대도가 말을 다 하지 않은 채로 유엽비도를 휘둘렀다. 도삼을 통해 궤도를 어느 정도 파악해놨던 이서휘가 침착하게 대응했다.
깡깡깡깡깡!
스스스스―!
연달아 유엽비도를 휘두르던 대도의 몸이 사라졌다.
“흐흐.”
이서휘가 조소를 날리며, 자강검을 땅바닥에 늘어뜨리고 잠시 서 있었다.
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대도가 이서휘의 머리 위에서 나타나 유엽비도를 수직으로 그었다.
휙!
부웅-!
대도가 허공을 그으며 바닥에 내려섰다. 마치 공격을 되돌려 주겠다는 듯 스스스 하고 이번에는 이서휘의 몸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도가 유엽비도를 꽉 쥐고 어둠을 주시하다가, 호흡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
주변이 어두워 이서휘가 어디서 등장할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서휘의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지자, 대도가 유엽비도를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부웅……!
“어?”
그때 느닷없이 대도의 등으로 자강검이 들어왔다. 대도가 공중으로 솟으며 소매를 휘둘러 독침 십여 발을 던졌다.
쉬익! 타다다다닥!
독침은 쓸데없이 바닥에 꽂히고, 이서휘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
바닥에 내려선 대도가 처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혹시 은야(隱夜) 선배요? 선배시라면 내 사과하리다. 아우들을 데리고 물러나겠소.”
쐐애애앵!
대답 대신에 어둠 속에서 반월 형의 검기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대도가 유엽비도로 검기를 튕겨 내자, 이서휘가 질풍처럼 달려와 자강검을 내밀었다.
채앵! 챙챙챙챙챙!
이서휘가 쾌검을 펼쳤다. 암행표가 더해졌다. 이서휘의 몸이 기이하게 빨라졌다.
채앵! 채앵! 채앵!
대도가 일부러 내공을 깊게 실어 유엽비도를 크게 휘둘렀다.
부웅!
이서휘가 대도를 농락하듯이 암영술로 숨었다가, 불쑥 등장해 대도의 등을 찌르며 다시 쾌검을 이어 나갔다.
그때부터 대도의 숨이 거칠어졌다.
‘빌어먹을, 얕봤다. 수법이 왜 이리 우리랑 비슷하지?’
대도는 밀리기 시작하면서 이서휘의 정체를 생각하느라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구화산 주변에서 이런 무위를 지닌 자를 자신이 모를 리가 없는데 하는 심정이 들었다. 대도는 이를 악물고 유엽비도를 휘둘렀다. 이내, 깡 소리와 함께 자신의 유엽비도가 방향을 잃고 튕겨 나자, 슬슬 다음 수를 준비했다.
챙챙챙챙챙!
날아오는 이서휘의 검을 후려치는 동작에 이어서, 유엽비도의 손잡이 끝에 있는 암기를 발사했다.
푸슝!
얇은 은침이 이서휘의 눈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이서휘는 손잡이 부분에서 갑작스럽게 독침이 하나 날아오자, 숨도 쉬지 않고 독침을 허공에서 반으로 갈았다.
툭.
타다닥―!
곧장 달려든 이서휘의 검이 연달아 뻗어 나갔다. 대도가 연달아 뒷걸음을 쳤다.
파앙, 파앙!
서로 내공을 쏟아내고 있어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불꽃을 튀겼다.
‘밀리면 진다!’
대도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유엽비도로 이서휘의 손목을 노렸다. 타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유엽비도를 튕겨 내자, 대도는 차르륵 소리를 내면서 유엽비도를 손에서 떠나 보냈다.
휘리리릭!
얇은 쇠사슬이 뻗어 나오고, 유엽비도가 뱀이 공격하는 것처럼 튀어 올라 이서휘의 얼굴로 날아갔다.
깡!
이서휘는 그것마저 어렵지 않게 쳐냈다.
대도는 탁 소리와 함께 쇠사슬 끝을 붙잡고, 유엽비도를 빙빙 휘두르면서 던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휙휙휙, 탁!
주변이 어두운데도 이서휘는 날아오는 유엽비도를 일일이 피해내며 눈은 줄곧 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점점 대도의 마음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대도가 왼손으로 쇠사슬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유엽비도를 쥐었다.
‘물러나야 하나?’
대도는 사부로부터 마교의 무공을 전수 받고 있어 그가 활동하는 지역에서 적수가 없을 것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송이처럼 보였던 놈이 정말 뜻밖의 강적이었다. 무엇보다 궤도로 몸을 숨기고 암습을 가하는 방식이 전혀 통하질 않았다. 자신이 몸을 드러내는 순간에 이미 이서휘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도는 이서휘가 거의 자신과 동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흑도맹 간부인가? 아니면 은야 선배일까.’
대도가 생각하는 은야(隱夜)는 자신처럼 마교십존(魔敎十尊)이 키우고 있는 고수였다.
‘사부로부터 십존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진짜였단 말인가…….’
이서휘의 내력이 도대체 짐작이 되질 않았다. 생각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는데 이서휘의 검이 다시 날아왔다.
‘저 검도 문제야. 왜 안 부러지는 것이냐?’
챙챙챙챙챙챙!
대도는 이를 악물었다.
‘은야 선배든 아니든 죽여야 내가 산다.’
대도가 유엽비도를 휘두르다가, 아직 사부에게 사용을 인가(認可) 받지 않은 마공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검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대도와 유엽비도를 감쌌다.
그런데 이처럼 황당한 일이 있을까?
대도는 정체불명의 고수가 마기를 보자마자 씨익 웃는 것을 보고 도무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서휘가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마기(魔氣)로구나. 진작 꺼내지 그랬냐?”
이서휘의 자강검에 자색의 물결이 퍼지고 있었다.
대도가 중얼거렸다.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글쎄다. 그 정도는 일성의 성취도 못 이룬 것 같구나. 마치 먹물을 처바른 닭백숙이라 해야 할까?”
“개 같은 주둥이로구나!”
대도가 마기를 두르고 달려들자, 이서휘의 자강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대도와 이서휘가 맞붙었다.
이서휘의 자강검은 군림유하검으로 시작해 암연심검으로 이어지다가, 둘을 섞은 초식에 이어 월야휘검이 튀어 나왔다. 이서휘는 암행표로 신형을 움직였다가 대도의 마기가 뻗쳐 나오면 이내 암영술로 사라졌다.
깡!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서휘는 적이 가장 곤란해하는 부분으로 공격을 펼치면서 몸을 드러냈다. 대도가 숨 한 번 크게 못 쉴 정도로 공세를 이어나갔다.
챙챙챙챙챙!
대도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마기가 갑자기 소용돌이를 치며 전방으로 와락 뻗어 나갔다.
좌라라라락!
이서휘는 선 자세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뒤로 물러나, 소용돌이 형태의 마기를 피한 후 자강검을 검집에 꼽았다.
거리가 벌어졌다.
‘뭐 저런 경공술이…….’
대도의 입이 벌어졌다. 이서휘가 납겁을 하자, 대도가 그제야 거칠었던 호흡을 잠시 가라 앉혔다.
이서휘가 말했다.
“좀 쉬었느냐?”
“뭐?”
이서휘는 왼손에 쥔 검집에 내공을 불어넣고 있었다. 자강검의 검집이 뜨거운 열기로 요동쳤다. 더 주입하면 터져나갈 듯이 부풀어 오른 순간……!
쐐애애앵!
암연심검의 파가 쏟아지면서 타앗! 소리와 함께 이서휘가 질풍지로(疾風指路)를 시전해 검기를 따라갔다.
☆ ☆ ☆
대도가 날아오는 검기를 피하려고 공중으로 솟았다. 이서휘가 질풍지로로 어둠을 가르며 대도를 추격했다.
자강검과 유엽비도가 부딪쳤다.
떠엉!
대도가 혼신의 힘을 다 한 유엽비도로 막았다가, 그대로 석문 근처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쾅!
하지만 이내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고 대도가 모습을 감췄다.
이서휘가 어둠을 주시하자, 대도가 성명절기라도 썼는지 짙은 마기에 휩싸여 걸어 나왔다.
이서휘가 말했다.
“마기도 제어하지 못하는 놈이 그 따위…….”
“환세(幻世)를 정화시킬 천마여 강림(降臨)하소서. 제물과 함께 저를 바치나이다…….”
대도가 이상한 주문을 읊자, 대도의 몸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의 안개가 쐐애애액 소리와 함께 이서휘를 향해 쇄도했다.
대도의 몸에서 계속 검은 안개가 흘러나와 이서휘의 시야를 가득 덮었다.
이서휘가 쇄도하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다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해 암연심검의 환을 펼치면서 손목을 비틀었다.
파앙!
한 줄기 엷은 빛줄기가 회전하면서 검은 안개 속으로 쇄도했다.
쏴아아아악!
자강검이 내뱉은 비틀린 검기가 검은 안개를 흩으면서 대도에게 뻗어 나갔다.
푸욱…!
대도의 왼쪽 어깨가 검기에 뚫렸다.
검기 때문에 흩어진 안개 사이로 이서휘와 대도가 눈을 마주쳤다. 대도는 이서휘가 손을 쓰지 않아도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처럼 보였다.
대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마지막 수를 준비했다.
대도의 몸 전체가 마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곧 다시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안개에 의해 두 사람의 시야가 가려졌다.
대도가 비릿하게 웃었다.
‘같이 죽자꾸나.’
슉……!
마기에 휩싸인 대도의 몸이 땅바닥으로 사라져 검은 안개가 되어 이서휘의 뒤로 돌아갔다.
이서휘는 검은 안개가 뻗어오자 호흡을 멈췄다. 이서휘는 대도가 마기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기 전에 자신과 함께 폭사할 생각임을 알고 있었다.
이서휘가 눈을 감은 채로 기다렸다.
선수(先手)를 내줬다.
앞이 됐든, 뒤가 됐든 대도가 다가오는 순간에 검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 순간, 누가 이서휘보다 더 냉정할 수 있을까. 이 냉정함도 수 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던 실전 경험에서 얻은 실력이다.
대도가 형체를 드러내며 이서휘의 뒤에서 덮쳤다.
대도는 이서휘의 검이 날아오면 팔 하나, 몸통 몇 군데쯤은 베이고 덮칠 생각으로 유엽비도를 앞세워 돌진했다. 마기를 믿고 양패구상을 노리는 대도.
싸아아악!
이서휘가 암행표로 피하고 슬쩍 바라보자, 대도의 몸이 좌라락 소리와 함께 다시 사라졌다가 이서휘의 앞에 나타났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크게 휘둘렀다.
부웅!
대도가 물결처럼 휘어지면서 이서휘의 등으로 이동해 유엽비도를 찔러 넣었다.
이서휘는 자꾸 도망가는 대도를 붙잡기 위해 유엽비도를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다.
떵――!
유엽비도가 흑룡화린갑에 막혔다.
“……!”
대도의 눈이 부릅떠지며, 유엽비도가 갈라놓은 이서휘의 옷 사이로 드러난 용린갑으로 향하는 찰나.
이서휘가 뒤로 몸을 돌리면서 오른손에 쥔 자강검을 그었다. 오로지 속도에만 집중한 검이 뻗어 나갔다.
서걱, 소리와 함께……
붓을 갈기듯 뻗어 나간 자강검이 좌우로 움직였다.
대도의 목이 날아갔으나, 마기는 여전히 요동쳤다.
자강검이 인(人) 자를 그었다.
슉슉.
마기에 휩싸인 대도의 몸이 쪼개지고 유엽비도가 떨어졌다.
이서휘는 기어코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러 잔해들을 다시 한 번 갈라놓으면서 천(天) 자를 허공에 적었다.
파아아앙!
투두두두둑…….
검은 안개가 사라지자, 그제야 이서휘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후우우우.”
그때였다.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도이가 달려들었다.
“실례하겠소. 해약만 가져가겠소.”
“형님! 안 됩니다!”
동시에 도삼이 소리쳤다.
☆ ☆ ☆
도삼에 비하면 참으로 고지식한 성격의 도이다. 굳이 말을 던지고 기습한다. 제 딴에는 대도와 겨룬 이서휘가 탈진 상태에 빠졌을 것이라 예상한 셈이다. 도이가 이서휘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으로 목 뒤의 요혈을 노렸다. 흑룡화린갑이 보호하지 못하는 곳이다.
이서휘는 등에 눈이 달린 것처럼 단 일 보를 움직였다.
탁!
도이의 손이 이서휘의 목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이서휘가 어깨를 올려 손목을 쳐내고, 왼손을 내뻗어 도이의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우드드득.
“크악!”
도이가 비명을 지르자, 이서휘가 발에 내공을 실어 도이의 발등을 찍었다.
쾅!
악 소리와 함께 도이가 입을 벌리자, 이서휘가 품에서 패혈단을 꺼내 거칠게 처먹인 후 턱을 올려쳤다.
빡!
도이가 그대로 뒤로 한 바퀴를 돌며 기절했다. 도삼이 소나무 뒤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살려 주십시오!”
이서휘가 씁쓸한 말투로 내뱉었다.
“이 새끼들이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이서휘가 즉시 도이를 죽이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에 빠진 도삼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제가 패혈단을 먹었다고 했더니 해독약만 구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공자님, 전 말렸습니다. 제가 먼저 외쳤지 않습니까. 제가 몸이 자유로웠으면 기필코 말렸을 겁니다. 제발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공자님, 제 탓입니다! 제가 이제부터 공자님의 개나 말이 되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시끄럽다!”
이서휘가 소나무 뒤에 있는 도삼을 끌어내 혈도를 풀어준 다음에 도이 곁에 던졌다. 도삼은 혈도가 풀어지자마자 도이 곁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미 대도의 최후를 아는지라 반항할 생각이 싹 사라진 도삼이었다.
이서휘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는 터라, 호리병에 든 석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꿀꺽꿀꺽 마신 후 도둑 형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삼아.”
“네, 공자님.”
도삼이 이서휘의 검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이서휘 손에는 피가 잔뜩 묻은 자강검이 들려 있었다. 이서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자강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
어조는 평이했으나, 도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해십니다, 공자님. 저희 형제를 살려 주시면 앞으로 정말 쓸모가 많으실 겁니다……. 이 녀석들이 재간둥이였구나 하실 겁니다. 진심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하로 삼아 주십시오. 형은 제가 교육시키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도이보다는 눈치가 훨씬 빠른 도삼이다. 도삼은 이서휘가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챘다.
도삼이 대답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서휘가 자강검을 집어넣지 않고 도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도삼아.”
“네.”
이서휘가 뜬금없이 물었다.
“아까 복숭아, 먹고 싶었느냐?”
“네? 네.”
“하나 주랴?”
이서휘의 말에 눈치 빠른 도삼이 마치 살 길을 찾은 듯이 기쁘게 대답했다.
“네. 주시면 고맙게…….”
이서휘가 말했다.
“나중에 네놈 하는 거 봐서 맛보게 해주마.”
도삼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내가 사 먹고 말지. 뭔 복숭아로 그렇게 위세를 떠시나.’
그러다 이서휘가 독심술에 밝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급히 도삼이 대꾸했다.
“네. 꼭 맛보고 싶습니다. 제가 복숭아를 무척 좋아합니다.”
“조금 전 네 생각을 내가 읽었겠느냐, 못 읽었겠느냐?”
도삼이 땅바닥에 엎드리며 대꾸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너는 뼛속까지 반항기가 가득한 놈이로구나.”
“아닙니다. 속으로 구시렁거렸을 뿐입니다. 여하튼, 공자님이 먼저 약속하셨으니 나중에 꼭 맛보게 해주십시오. 씨까지 다 씹어 먹겠습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야지. 그런데 씹어 먹겠다고 말할 때 네 녀석 표정에 살기가 약간 묻어 나오는구나. 기분 탓인가?”
도삼이 재빠르게 대꾸했다.
“기분 탓입니다. 공자님.”
도이가 으으으 소리와 함께 깨어나자 도삼이 외쳤다.
“형님!”
“도삼아.”
“내 말 잘 들으시오. 우리 형제의 목숨은 이제 공자님께 달렸소.”
“왜?”
“이 눈치 없는 형님 새끼야 너랑 나랑 패혈단을 먹었다고! 패혈단을 먹지 않았어도 우리는 은혜를 갚아서 복숭아를…… 아니, 복숭아가 아니고. 아 씨벌, 말이 꼬이네.”
“복숭아?”
“시끄러워! 여하튼 내가 공자님에게 도와달라 요청을 했고! 그 말을 듣고 형님을 구해준 거란 말이다.”
도이가 잠자코 듣다가 이서휘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냐?”
“그럼 진짜지 가짜요? 패혈단 먹은 건 기억나오? 일단 그것만 기억하고 얌전히 좀 처 있으쇼. 차차 설명해 줄 터이니.”
“혈도는?”
“풀렸소. 정신 좀 차리시오.”
도이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듯 혈도가 풀린 도삼을 은근하게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합공할까?]
도삼이 눈빛과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지랄한다 진짜.]
도삼이 도이에게 말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쇼. 저 쪽에 대사형 조각나서 죽어 있잖소.”
이서휘가 말했다.
“시끄럽다.”
“네.”
이서휘가 형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부라는 자가 또 다른 제자를 데리고 있느냐?”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아마 없을 겁니다만 다시 키워낼 순 있겠지요.”
“어디에 머무르는지도 모르고?”
“네.”
이서휘가 뒷짐을 진 자세로 덤덤히 말했다.
“이 새끼를 어디 가서 찾아 죽이지.”
물론 당장 찾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대도의 무위를 보니 쉽게 꺾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것이다. 이서휘보다 훨씬 강한 고수이리라. 이서휘가 시치미를 떼고 대충 한 번 허세를 부려 본 말이었다.
하지만 이서휘의 말에 평정심을 잃고 있던 도삼이 부르르 하고 떨었다.
“혹시 공자님도 마교십존이십니까?”
“십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혹시 욕입니까?”
“이게 욕이냐?”
“아닌 것 같군요. 근데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이서휘가 달을 잠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운명이 바뀌었구나.”
“네?”
“아니다. 자, 일단 내려가자. 도이는 네가 업어라.”
“날 왜 업어?”
이서휘의 말에 도이가 벌떡 일어나다가, 악 소리를 내며 발을 부여잡았다.
이서휘는 잠시 그런 도이를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 새낀 좀 멍청한 거 같은데……?’
도삼이 도이의 발등을 살펴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합공을 하자고? 지랄한다. 진짜.”
“형한테 자꾸 지랄이 뭐냐.”
“닥쳐! 구화산에 버려두고 가기 전에.”
도삼이 여기저기 부상을 당한 도이를 업은 후 이서휘를 따라 나섰다. 도이를 업은 도삼이 중얼거렸다.
“뭐 이리 가벼워졌어?”
“그러냐? 난 잘 모르겠는데.”
대도의 유엽비도를 챙긴 이서휘가 형제의 얘기를 잠자코 듣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용해라, 좀. 구화산 뛰어 내려가기 전에.”
이서휘가 또 다시 경공으로 도망갈까 봐 도삼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도이가 또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하자 도삼이 버럭 화를 냈다.
“형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이미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어.”
이서휘는 본래 대도와의 결전을 되돌아보며 조용히 구화산을 내려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도둑 형제의 대화에 이서휘도 그만 실없는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반면에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면서 혼자 킬킬 대는 이서휘를 보며 도삼은 깊은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