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장. 도둑들>
이서휘의 몸이 갑자기 불처럼 달아올랐다.
그토록 이서휘의 사부가 경고했던 주화입마.
[서휘야, 더 들어가면 안 되는 선이 있다. 물러나야 한다.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손발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두 눈과 머리까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서휘는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 나가면서 옷을 벗어 제꼈다. 알몸이 되자마자 동시에 석수에 몸을 담갔다.
푸쉬이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제야 이서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자. 이서휘. 죽을 뻔 했다고!”
이서휘가 차가운 석수에 몸을 담근 채로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미 석실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취한 이서휘다. 남은 것은 수련이다. 하지만 십수 년이 걸릴 지도 모를 수련을 이곳에 갇혀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또한, 장보도에 의해 장소가 노출되긴 할 테지만 석실로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자는 없을 것이라 감히 예상했다. 과거에도 석실은 굳게 닫혀 있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라도 행여나 누군가 이 석실에 들어온다 한들, 복숭아나 몇 개 먹고 몸이나 씻다 나가는 게 전부이리라.
뚫린 천장과 검이 새겨진 수련실을 봐도 이서휘만큼 깨달음을 얻는 자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마음을 정리한 이서휘가 물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침 이 맑고 차가운 석수가 없었다면?’
이서휘의 몸이 부르르 하고 한 차례 떨렸다. 그뿐일까? 월단화를 먹지 않고 따라 했었다면 온몸이 불처럼 뜨거워졌을 때 그대로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마음에 이서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로소 천외천(天外天)이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쉽사리 닿을 수 없는 무공의 경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으로 이서휘는 만족했다. 과거의 칠흑검제는 물론이고 이서휘가 알고 있던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고수들보다 석실의 주인이 더 강할 것이다. 때문에 이서휘는 앞으로 추구할 목표를 천마의 무위보다 높게 잡았다.
훗날, 다시 이 장소에서 무위를 완성하면 이서휘가 천하제일인 자리도 넘볼 수도 있으리라.
이서휘가 두 손으로 뺨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선배의 무위는 앞으로 이뤄내야 할 목표로 삼자.”
이서휘는 다시 옷을 단정하게 입은 다음에 중앙 석실로 나왔다.
어느새 날은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석실에 들어와 많은 것을 얻었다. 첫 째로 월단화를 얻어 임맥과 독맥을 타통했다는 점. 둘 째로 추후 장보도가 퍼질 때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 셋 째는 이서휘의 사고(思考)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이서휘는 석문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정중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선배, 이 후배가 멋대로 들어와 월단화를 취하고 과일로 배를 채웠으며 석수에 몸도 씻었습니다. 선배의 무위를 구경할 수 있어 안목도 크게 넓혔습니다. 후배 이서휘, 앞으로 더 강해지더라도 약자를 도우는데 사용할 터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서휘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석실에서 물러 나왔다. 이서휘는 바깥으로 나와 소나무 아래에 있는 돌을 눌러 석문을 닫은 후 보는 자도 없건만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적힌 곳을 향해 다시 한 번 예를 취했다.
이서휘가 구화산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불쑥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단 하루를 머물렀을 뿐인데도 기분이 묘했다.
마치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석실 안에서 언제 깨달을지 모를 무공을 연마하기 보다는 지금 이 상태로 무림에 내려가 좌충우돌 활약하는 게 이서휘가 추구하는 삶인지라 후회는 없었다. 이서휘는 석실에서 조금 멀어지자 속도를 높여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화산을 비추는 달빛 아래, 한줄기 신형이 기이한 속도로 구화산을 가로 질러 내려갔다.
☆ ☆ ☆
거침없이 달리던 이서휘는 먼발치에서 색색의 불빛들이 가득한 거리가 보이자, 이내 탁한 기운을 느꼈다.
공기와 냄새부터가 구화산과는 달랐다.
‘후후, 고작 하루 있었건만 신선이 되었던 것처럼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다니.’
그때, 이서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처지가 우스웠다. 신선을 생각하던 와중에 꼬르륵 소리라니. 어제 오늘 먹은 것이라곤 복숭아가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서휘는 객잔을 찾으려고 길을 걸었다. 어느새 세상이 바뀐 것처럼 시끌벅적하고 요란했다.
이서휘가 두리번거리자 마침 특이한 악기를 하나씩 들고 있던 여인들이 저희끼리 뭐라 속삭이며 이서휘를 힐끗 보고 지나갔다. 이서휘는 마침 포목점 앞을 지나가던 터라, 가게 앞을 둘러보는 척 하면서 여인들이 속삭이는 말을 엿들었다.
[얼굴은 세가의 공자 같은데 옷은 동냥하는 거지꼴이다.]
[그러게요. 피부는 나보다 좋아 보이네. 얄밉게.]
[그래? 마음에 들면 네가 가서 옷 한 벌 사줘라.]
[그럴까요?]
[얘 좀 봐라?]
그런 이야기를 하며 저희끼리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휘가 자신의 옷을 바라보니 여인들의 말대로 허름 그 자체. 소주천을 할 때 지저분해진 것도 있고, 검을 휘두를 때 먼지도 잔뜩 뒤집어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서휘가 여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꼈다.
“흥, 거지꼴이라고?”
휴가 때가 아니면 그간 모아둔 돈을 쓸 기회도 없는 이서휘다. 저도 모르게 포목점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제법 괜찮은 백의(白衣) 무복을 갖춰 입고 나왔다. 손에는 쉽사리 볼 수 없는 자강검을 들고 있으니 누가 봐도 세가의 귀공자 같았다.
“자, 이제 배를 채우러 가보실까.”
지금 생각해도 침이 고일 만큼 석실 안의 복숭아는 맛있었지만 아무래도 뱃속에 기름기가 들어가야 기운이 회복될 것 같았다.
이서휘는 객잔 한 곳에 들어가 주변 사람들이 놀랄 만큼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맛으로 유명한 곳은 아니었으나 허기가 심한 터라 나오는 음식마다 진수성찬을 대하듯이 맛있게 먹었다.
누가 봐도 정신없이 먹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서휘는 때때로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서른쯤 낭인, 사파? 스물 대여섯, 역시 무림인…….’
이서휘가 후루룩 하고 국수를 먹으면서 또 한 번 객잔 안을 훑었다.
‘정체 모를 무인, 무위는 이류쯤인가? 아니다. 기도를 숨겼군……. 그 다음 자는 평범한…… 평범한…… 음?’
이서휘는 객잔 안의 사람들을 모두 기억했으나 한 사람을 계속 쳐다보게 되었다.
도무지 정리가 안 됐다.
긴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 역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이는 스물 중반인 거 같기도 하고 서른을 훌쩍 넘은 것 같기도 하고 표정과 인상은 아주 평범한데……?’
이서휘가 다시 시선을 돌려 음식을 씹다 보면, 그 잠깐 사이에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보다 오감이 뛰어난 이서휘다. 그런데 벌써 세 번째 쳐다본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서휘는 술을 들이키며 네 번째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 역시 이서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꺼억, 아이고, 살 것 같다.”
이서휘는 잘 차려입은 옷과 어울리지 않게 시정잡배처럼 트림을 하고 배를 두드리며 남자의 정체를 추측했다.
‘양상군자(梁上君子)로구나…….’
남을 속이는 수단, 즉 궤도(詭道)를 익힌 자다. 도둑들에게 추앙을 받는 양상군자들은 나름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궤도로 얼굴의 특징을 지워냈거나 수련을 통해 만든 표정을 지은 것이리라.
보통 사람들은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잊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서휘의 감각은 특이하고 특별하다.
누군가 무엇을 감추면 감출수록 이서휘의 감각이 되려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제법 수준이 높은 도둑 같은데…….’
이서휘는 다음으로 죽립을 눌러쓴 인간을 슬쩍 봤다. 최소한 정사지간의 고수이거나 사파 쪽의 인물인 듯 패도(覇道)적인 기운이 온몸에서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이서휘가 도둑이라 생각하는 자가 일어나더니 객잔을 빠져 나갔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잠시 머리를 긁으며 상황을 쟀다. 그러자 이어서 세 사람이 더 일어나, 급히 도둑을 따라 나갔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흐음, 재미있는 놈들이군.’
도둑은 예민한 놈이었다. 누군가 따라오는 걸 눈치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휘의 귀에는 누군가가 서둘러 달려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쫓는 자가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리라.
하면, 대체 누가 누구를 유인하는 것일까?
이서휘도 객잔에 값을 치르고 나와서 어둠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도둑의 궤도가 뛰어날 것인가 아니면 칠흑검제라 불렸던 이서휘의 감각이 더 뛰어날 것인가.
월단화 덕에 내공이 제법 깊어진 이서휘는 사류곡에서 천마의 수하들을 암습할 때 사용하던 무공인 암영술(暗影術)로 기척을 최대한 숨겼다.
어차피 큰 대로변이 하나 있고, 객잔이나 기루가 마주 보고 장사를 하는 곳이라 시끌벅적하다. 좌우를 살피자 금세 앞서 나가는 도둑이 보였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이 녀석들 냄새가 나는구나.’
이서휘는 도둑이 다니는 길로 도둑을 쫓아갔다.
☆ ☆ ☆
이서휘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암영술에 암행표를 섞으니 밤을 거니는 이서휘의 움직임이 마치 귀신같았다. 이서휘는 도둑을 쫓으며 생각했다.
‘도둑이 더 음흉한 놈 같은데…….’
이서휘의 감각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마치 싸움을 제법 잘 한다는 투견 세 마리가 범 한 마리를 쫓아가는 기분. 그렇게 따라오도록 만드는 것 자체가 도둑이 익힌 궤도(詭道)일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이서휘는 세 명의 고수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서휘의 계획은 도둑을 잡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행여나 도둑이 이서휘가 다녀왔던 석실의 비밀을 이용하려는 자라면? 이곳은 구화산이다. 염두에 둬야 할 일이었다. 장보도가 퍼진 이후의 여파는 이서휘가 충분히 겪어봤으니까.
이서휘가 두 눈을 잃은 것은 개인적인 불행이었고, 군림맹과 백도맹이 대립각을 지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석실 앞에서 백도맹과 군림맹이 야습을 받아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애초에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두 세력이 불편한 마음을 넘어서서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뻔히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이서휘는 알고 있었다. 장보도를 퍼뜨려 두 세력을 부른 후 누군가가 중간에서 조율했던 사건이었음을……. 이서휘는 그 음모를 분쇄할 생각이었다.
그 다음은?
이서휘는 아무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계획을 성사시킬 생각이었다.
군림맹과 백도맹!
두 세력은 본래 하나였다.
군림맹과 백도맹으로 나뉘어서 존재했던 역사보다 무림맹(武林盟)의 역사가 훨씬 깊다.
도둑을 쫓는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군림맹과 백도맹을 통합시켜 무림맹으로 만든다. 그 앞길을 방해하는 자는…….’
이서휘는 불쑥 솟구치는 살기를 억누르고 걸음을 이어나갔다.
무림맹……!
이것이 천마 세력에 대항하는 첫 번째 계획이었다. 천마교의 세력은 이서휘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백도(白道) 세력을 총결집시킨다.
만약 그 계획이 어긋난다면? 그때는 이서휘가 힘으로 패도(覇道)의 길을 나설 생각이었다.
도둑은 달리지 않았다. 쫓는 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서휘는 꽤 멀리 떨어져서 쫓고 있었으나 두 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도둑은 구화산 방향으로 가다가 우뚝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비교적 넓은 공터였다.
이서휘는 지붕에서 내려와 길을 우회하여 공터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숨을 죽였다.
일단은 지켜볼 셈이다.
도둑을 쫓는 자들도 도둑이 유인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리라.
도둑 대 세 명의 무림인이 드디어 공터에 마주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평범한 인상을 가진 도둑이었다.
“세 명뿐이냐? 흑도맹?”
세 명의 흑의인은 대꾸가 없었다.
“…….”
“내가 누군지 알고 쫓아온 겐가?”
누군가가 무어라 답변을 하려는데 도둑의 신형이 움직이더니 기습 공격을 펼쳤다.
푸악!
도둑의 비수가 핏물을 뿌렸다. 단 일격에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잿빛 장포 사내가 쓰러졌던 것. 그제야 나머지가 놀라 병장기를 빼 들었다.
그야 말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냉정한 술수!
순식간에 공방이 오갔다.
챙챙챙!
지켜보던 이서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와줄까 생각했던 이서휘는 흑도맹이라는 얘기에 합류를 자제하고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고함 소리가 터지면서 두 명이 무위를 뽐냈다. 잿빛 장포 사내는 도를 휘두르고, 죽립을 쓴 흑의인은 장력을 발산했다.
기도로 보건대 죽립을 쓴 사내가 우두머리였고, 잿빛 장포 무인들이 수하들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둑이 휘두르는 비수에 잿빛 장포 무인이 또 쓰러지고, 어느새 죽립을 쓴 흑의인이 도둑을 홀로 상대하고 있었다.
십여 초를 교환했을 때 기합을 내지르던 흑의인이 도둑에게 일장을 적중시켰다.
퍽 소리와 함께 도둑이 뒤로 나뒹굴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른 것은 흑의인이었다.
“크윽……! 이런 빌어먹을.”
흑의인이 두 세 걸음을 물러나더니 일장을 내지른 오른손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둑이 경박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 흑의인에게 다가왔다.
“흐흐흐흐, 이해가 안 되지? 너희가 왜 죽는지 말이야.”
“닥쳐라!”
도둑과 흑의인이 다시 맞붙었다. 도둑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푹푹푹 하는 섬뜩한 소리를 끝으로 흑의인이 무릎을 꿇었다.
이서휘가 나서기도 늦은 상황.
갑자기 도둑은 공터 한쪽의 무성한 수풀 쪽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들쳐 업고 다시 왔다.
이서휘는 도둑이 들쳐 업은 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시신인가?’
이서휘는 잠자코 바라봤다. 도둑은 자신이 죽인 세 구의 시신 곁에 들쳐 업은 것을 내려놓았다. 이서휘의 예상대로 시신이 맞았다.
도둑은 네 구의 시신을 적당하게 배치해 마치 서로가 죽인 것처럼 한참을 세세하게 배치했다.
팔 모양과 무기, 장력을 발산하는 자세 등등.
그러더니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흑의인의 품에 넣고 자신이 사용하던 비수를 수풀에서 가져 온 시신의 손에 쥐여 놨다.
이서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을 꾸며 놓고 양피지를 넣는다…….’
이것은 양피지가 흑의인 세력에 흘러가길 바라는 행동이 아닌가. 거기까지 바라보자 이서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도둑은 총 네 명을 죽였다.
서로가 죽인 것처럼 위장하고, 양피지를 한 사람의 몸에 숨겼다. 심상치 않은 도둑이라 생각해 쫓아온 것이었지만, 이서휘의 예상보다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았다.
‘구화산 밑에 떠도는 양피지라니…….’
만약 저 양피지가 석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서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되었던 일일까.
양피지를 확인해야 할까? 아니면 도둑의 정체를 확인해야 할까.
이서휘는 둘 다 확인할 셈이었다.
질풍같이 튀어 나가서 도둑을 상대할까 생각하던 이서휘는 잠시 숨을 죽인 채로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했다.
도둑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서휘는 그제야 흑의인에게 다가갔다. 왼손에는 슬며시 자강검의 검집에 내공을 주입하고 있었다.
시신 네 구까지 걸어간 이서휘가 흑의인의 품에 손을 넣으려고 하자,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도둑이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자신만의 궤도로 익힌 경공술을 사용하는지 괴이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스스스스스스―.
자강검의 검집이 이서휘의 내공으로 이미 부풀어 오른 상태. 도둑이 접근하자마자 이서휘의 발검이 이어졌다.
쐐애애앵!
“으악!”
자강검은 도둑이 내지른 비수를 두 동강 내고 이어서 도둑의 상체를 좌하단에서 우상단 대각선으로 갈랐다. 도둑의 비명과 함께 떠엉! 소리가 났다. 도둑은 상체에 용린갑이라도 입었는지 이서휘의 자강검을 막아냈다. 도둑은 화들짝 놀란 와중에도 허리춤에 꼽아둔 비수를 다시 뽑아 이서휘에게 덤벼 들었다.
챙챙챙챙!
도둑의 무위가 제법 높았다. 이서휘는 도둑의 비수를 튕겨내면서 이 자의 정체를 아예 다시 내려야했다.
‘일류 살수다.’
철저한 살인술에 기반을 둔 비수의 움직임이 펼쳐졌다. 거기에 상체에 입은 갑옷이 대단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과감한 공격을 연달아 펼쳤다. 때로는 아예 무방비 상태로 달려 들었다. 도둑이 익힌 속임수다. 앞선 죽립 흑의인도 이것에 당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서휘는 도둑의 수법과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이서휘가 암행표로 밤을 거닐었다.
쐐앵――! 챙! 쐐앵――! 챙챙챙!
증가한 내공 덕택에 이서휘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오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암연심검의 환으로 도둑의 명치를 찔렀다.
떠엉! 소리와 함께 나뒹구는 도둑이 일어나려는 찰나, 이서휘가 자색 검기를 날렸다.
쐐애애앵!
퍼어억!
도둑이 겨우 몸을 움직여 갑옷으로 검기를 받아냈으나 충격은 막을 수 없었는지 그 자리서 정신을 잃은 것처럼 혼절했다.
이서휘는 쓰러진 도둑을 향해 서너 걸음을 다가가다 우뚝 멈춘 후 말했다.
“개수작 말고 일어나라. 목에 칼 박기 전에.”
“…….”
이서휘가 도둑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흐흐흐.”
그러자 도둑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제기랄,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도둑은 이서휘가 다가오면 품에 숨겨 놨던 백광탄(白光彈)을 터뜨려 눈을 잠시 멀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자신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도망갈까?’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 번 해보든가.”
“야이, 개새끼야!”
벌떡 일어난 도둑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품에서 꺼낸 백광탄을 이서휘의 얼굴 앞에 터뜨렸다.
☆ ☆ ☆
이서휘는 도둑에게 알아내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도둑이 지닌 무위와 나름 경지에 오른 궤도(詭道)의 수준으로 보았을 때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때문에 도둑이 가진 수단과 방법을 모조리 봉쇄할 생각이었다.
도둑이 백광탄을 던지려는 순간, 이미 뻗어 나간 이서휘의 자강검이 도둑의 손등을 후려쳤다.
파앙…… 치지이이익!
“악!”
이서휘에게 날아가야 할 백광탄이 도둑의 눈앞에서 터졌다. 도둑은 백광탄에 잠시 눈이 멀고, 요란한 굉음 때문에 귀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백광탄이 내뿜은 빛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이서휘는 왼손의 소매로 적절하게 가려 눈을 보호하며 거짓말을 했다.
“비겁한 놈!”
이서휘가 자신도 백광탄에 눈이 먼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도둑은 고통에 휩싸여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 이서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흑의인의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양피지가 가리키는 곳은 구화산의 석실이었다.
‘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배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흑의인의 장포 안에 두 개의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이서휘가 주머니를 취해 각각 냄새를 맡아보니 하나는 흑도맹이 자주 사용하는 패혈단(敗血丹)이라는 독단(毒丹)이었고, 하나는 해독약이었다. 흑도맹이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복종시킬 때 종종 사용하는 독단이었다. 이서휘가 독단과 해독약을 품에 챙겨 넣는데, 괴로워하던 도둑이 갑작스럽게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이서휘가 공중으로 솟아서 도둑의 양 어깨를 두 발로 눌러 내공을 주입했다.
푹!
도둑의 하체가 무릎까지 땅 속에 박혔다. 이서휘는 다시 한 번 힘을 줘서 도둑의 허리까지 땅 속에 잠기게 만들었다. 도둑이 어깨 위로 장력을 휘두르자, 이서휘는 땅에 내려서 도둑을 향해 자강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슉슉슉슉슉!
도둑이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서휘가 벤 것은 도둑의 상의였다. 용린갑(龍鱗甲)을 입었기에 더 과감하게 휘둘렀다. 도둑은 기절 직전까지 몰렸다. 용린갑이 아니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상의를 검으로 베어 벗겨낸 이서휘가 말했다.
“그거, 벗어.”
“차라리 죽여라!”
도둑이 고개를 저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내가 어떻게 얻은 건데!’ 하는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서휘가 껄껄 웃으면서 자강검으로 도둑의 얼굴을 겨누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자색이 차오르면 검기가 날아가느니라.”
“뭐? 무슨 말이냐?”
“보면 알 게다.”
도둑은 무슨 뜻인지 몰라 이서휘와 자강검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러자 잠시 후 이서휘가 쥔 자강검의 검병에서 자색 빛이 감돌더니 검신으로 뻗어 나갔다. 이대로 검기가 발산되면 도둑의 얼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이서휘가 무표정하게 짧게 내뱉었다.
“잘 가라.”
우우우우우웅! 자색이 차오르는 찰나……!
도둑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시만!”
이서휘가 능청맞은 얼굴로 물었다.
“왜?”
“벗으리다.”
“귀찮게. 이제부터 묻는 말에 잘 대답해라.”
도둑이 죽고 싶다는 표정으로 용린갑을 벗었다.
앞뒤로 흑룡이 수놓인 용린갑은 곳곳에 용의 비늘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서휘는 알몸이 된 도둑을 노려보면서 백의 무복을 벗어 용린갑을 안에 받쳐 입은 후 다시 백의 무복을 입었다. 용린갑은 가볍고 얇았다. 이서휘의 검기를 맞고도 도둑이 멀쩡했던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보물이 확실했다.
이서휘가 말했다.
“꽤 좋아 보이는데? 이름이 있나?”
이서휘가 약 올리자 도둑의 눈빛에 살기가 담기고 있었다. 그러자 이서휘가 자강검을 들어 도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부자무용, 만자능비라……!”
도둑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도둑이 다급하게 외쳤다.
“흑룡화린갑(黑龍火鱗甲)!”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빈정거렸다.
“너 훌륭한 도둑이었구나? 이름 꽤 날렸겠어.”
“다, 닥쳐라!”
“칭찬을 해줘도 지랄이구나.”
도둑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하반신은 땅에 묻혀 있고 기력을 회복해 도망을 간다 한들, 이서휘의 무위가 심상치 않은 터라 자신이 없었다.
이서휘가 이번에는 양피지를 살펴보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취조를 시작했다.
“이곳은 어디냐?”
“모른다.”
이서휘는 도둑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갔다. 그때부터 이서휘가 도둑의 궤도를 박살내기 위해 독심술을 사용했다.
이서휘가 도둑의 눈빛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눈빛을 보아 하니 죽는 게 별로 두렵지 않나 보구나.”
“…….”
“……임무를 실패했으니 죽음을 면치 못하겠다는 생각 때문이겠군.”
도둑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도둑은 자신이 배운 궤도로 이서휘의 독심술(讀心術)을 방어하려 했으나, 도무지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었다. 생각을 하면 대부분 이서휘가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도둑의 궤도와 이서휘의 독심술이 다시 맞붙었다. 이서휘가 도둑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가 있군.”
도둑이 이번에는 적당히 대답할 수 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 어차피 대도(大盜)가 도착하면 당신과 나는 모두 죽은 목숨이야!”
“대도라…… 네 사형 격인 인물이냐?”
“흥.”
도둑이 코웃음을 치자마자 이서휘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대도보다 네 사부가 더 무섭다 이거지?”
“사부…….”
사부란 말을 내뱉자마자 도둑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사부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입에 담아서도 안 됐다. 이서휘의 화술에 말려 그만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게 됐던 것.
이서휘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도둑을 노려봤다.
“살고 싶으냐?”
“후후, 웃기고 있네.”
“거래를 하자.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면 네 목숨을 살려주마. 거절하면 내 손으로 죽여주마.”
“그게 무슨 거래냐!”
“네 목숨이 걸려 있는데 그럼 아니란 말이냐?”
이서휘의 눈빛이 도둑의 궤도를 삼킬 것처럼 압도했다. 도둑은 지지 않고 이서휘를 노려봤다. 이서휘의 예상보다 대도라는 자와 사부가 주는 공포심이 더 크게 도둑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셈이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불쑥 도둑의 울대를 쳐서 입을 벌리게 만들고 순식간에 흑도맹의 패혈단(敗血丹)을 먹였다. 꿀꺽 하고 독단을 삼킨 도둑의 표정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이서휘가 손을 뻗어 도둑의 목 부분을 내공을 주입해 누르며 말했다.
“삼켜.”
“켁켁켁, 이게 대체 무슨?”
“흑도맹의 패혈단이다.”
“이런 씨…….”
이서휘가 눈을 부라리자 도둑이 욕을 삼켰다. 그때 이서휘의 눈이 번뜩였다. 이서휘는 불쑥 손을 뻗어 도둑의 목 부분을 움켜쥐고 확 뜯어냈다. 순식간에 인피면구가 벗어진 도둑이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서휘의 예상대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과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를 꽤 밝히게 생긴 관상이었다. 도둑이 아니라 화화공자(花花公子)에 가까운 얼굴이다. 어쩌면 이 얼굴로는 여자를 유혹하고 다니는 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둑이 성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퍽!
이서휘가 즉시 머리통을 후려쳤다.
“악! 차라리 죽여! 죽이라고!”
“정말? 네 얼굴부터 손봐주마. 다시는 여자 못 만나게 해주마.”
씩씩거리던 도둑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공자, 농담이오.”
“공자?”
“공자님.”
“그래. 여하튼 네 놈 낙이 여자 만나는 것이었구나.”
도둑은 흑룡화린갑을 내놓을 때도 견뎠다. 패혈단(敗血丹)을 먹었을 때도 해독약을 먹으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인피면구를 들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궤도가 와르르 하고 무너졌다. 더군다나 얼굴을 상하게 한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무섭게 들리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일어나.”
더 이상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도둑이 양 팔에 내공을 주입해 불쑥 솟아났다. 도둑이 개소리인 줄 알면서도 내뱉었다.
“해독약부터 주시오. 첫 해약은 한 시진 안에 먹어야 한다고 들었소.”
“그래? 나머지 패혈단도 네가 다 처먹고 싶으냐?”
“쳇.”
“이름 말해.”
“이름? 도삼(盜三), 만용(蠻勇), 중곤(中棍), 화화공자 중에서 어떤 이름을 원하시오?”
이서휘는 도둑이 말한 이름을 생각하다 덤덤히 말했다.
“여자 희롱하다 잡혀서 중곤(중간 크기의 곤장)을 처맞던 도중에 네 사부 혹은 대도가 널 거둔 것이로구나. 만용은 무슨 뜻이냐? 아, 네 재주가 뛰어나 종종 듣던 얘기로구나. 도삼이면 네가 셋째냐?”
말로 이서휘를 희롱하려던 도둑이 입을 다물었다. 전부 도둑이 사용하는 이름이었고 이서휘가 말한 내용도 얼추 다 진실이었다.
이서휘가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자 도둑이 어쩌면 이 자라면 자신을 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정말 우리 대도를 꺾을 수 있겠소?”
그 말에 이서휘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네 놈만 넘기고 난 도망 가련다. 흑도맹에 가서 네 용모파기나 넘긴 후에 돈이나 챙겨야지. 네가 감히 흑도맹을 건드려?”
이서휘는 자신이 군림맹이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도둑이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뭐 이런 새끼가…….”
이서휘가 돌아보자 도둑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 놈 본성이 드러나는구나. 대도가 오면 네가 합류할 수 있으니 너부터 죽여주마.”
도둑이 대꾸를 하지 않자 이서휘가 말했다.
“도망갈 수 있으면 가라. 네 사부와 대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다만 흑도맹 본단을 공격해 해독약을 얻을 수 있다면 말이야. 네 모습을 보아 하니, 윗놈들도 똑같을 터. 과연 그럴 의리가 있는 놈들인지도 잘 모르겠구나.”
도둑은 아무 말도 못했다. 이서휘는 낚싯대에 중독된 미끼를 걸어 이번에는 대도를 낚을 생각이었다.
☆ ☆ ☆
이서휘는 뜻하지 않게 다시 구화산의 석실로 향했다. 어차피 이 자들은 석실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장보도를 흑도맹에 넘기려 했을까?
이서휘가 가설을 세웠다.
‘흑도맹도 이 자들도 석실을 끝내 열지 못했고, 장보도를 이용해 백도맹과 군림맹을 유인한 것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이서휘는 도둑의 정체가 실로 궁금했다. 대도라는 자와 이 자들의 사부가 누구인지도 궁금했다.
계략을 쓰는 꼴이 실로 음흉하지 않은가?
철저하게 숨어서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취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들이 흑도맹이라는 어부마저 희롱하려는 점이었다.
이서휘의 직감이 예민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자들은 무림의 혼란을 조장(助長)하는 놈들이라고.
이서휘가 어둠에 잠긴 구화산으로 향하자 도둑이 물었다.
“어디로 가시오?”
“장보도를 취하러 가야지.”
“무슨 소리요!”
이서휘는 잠시 자세를 돌려 도둑을 노려봤다.
“구화산은 내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 장소를 모를 것 같으냐?”
“알 수야 있지만…… 여하튼 난 가면 안 되오. 가란 얘기는 못 들었소. 가봤자 헛걸음이오.”
이서휘는 도둑의 말에 눈을 빛냈다.
‘알 수는 있지만, 석문은 못 열 것이라는 말인가? 저희끼리 석문을 열고자 애써 본 말투로구나.’
도둑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대도가 오시면 댁이…… 공자님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때문에 해약이나 내놓고 멀리 도망가시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외다.”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도둑을 노려봤다.
“넌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느냐?”
“죽이려면 벌써 죽였겠지.”
이서휘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든 죽일 수 있어서 살려두는 거라곤 생각 안 하느냐? 네 사부도 그런 사람일 텐데.”
도둑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서휘가 말한 대로 사부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서휘는 계속해서 은근슬쩍 도둑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널 이제 도삼이라 부르겠다. 대도라 하면 네 대사형쯤 되는 사람이겠지?”
이제는 도삼이라 불리게 된 도둑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렇소.”
“대단한 자냐?”
“상상할 수도 없을 거요.”
“후후, 오랜만에 무림에 오니 재미있는 녀석들이 꽤 늘었나보구나.”
“거 참,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도 하신 말투요.”
도둑은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서휘를 떠봤다. 그러자 이서휘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네 사부 정도가 와야 날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하하하.”
도삼이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이서휘도 슬며시 웃었다.
“후후후. 우스우냐?”
“우습소. 당신이 반로환동을 했어도 내 사부는 이길 수 없을 것이오. 쉽사리 움직일 분은 아니지만.”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도가 널 금방 찾을 수 있느냐?”
“마음만 먹는다면.”
“그래? 잘 됐구나.”
이서휘가 등을 내보이며 구화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도삼에게 무슨 수라도 써보라는 식이다. 그러나 도삼은 한참을 당한 터라 섣불리 덤빌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도삼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보통 놈은 아닌데 도대체 어디 소속이지? 설마 우리와 같은……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지.’
도삼도 이제 이서휘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인지 뒤를 따르며 물었다.
“공자님 이름은 뭐요?”
“나?”
이서휘가 몇 걸음을 걷다가 멈춰서 말했다.
“칠흑공자(漆黑公子).”
“풉.”
“웃어?”
“푸하하하하! 아, 공자님이 그래도 웃기는 재주가 있어 다행이오. 치, 칠흑공자…… 낄낄낄!”
“이따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
“뭔 소리요?”
“패혈단의 해약을 몇 시진 안에 먹어야 하지?”
“그거야 적어도 두 시진 안에는 먹어야…….”
“아까는 한 시진이라며? 고얀 놈이군. 네가 나를 놓치고 두 시진 안에 흑도맹의 해약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살고 싶으면 천대봉으로 와라. 반 시진 내로 도착하면 조건 없이 해약을 주마. 늦으면 그것이 네 운명이고.”
“저기, 뭔 소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말로 합시다. 이야기를 차근차근…….”
파앙―!
이서휘가 갑자기 구화산의 어둠 속으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순간 어리둥절한 도삼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경공으로 날 떨쳐내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도삼이 전신의 내공을 일으켜 경공을 펼치면서 이서휘를 쫓아갔다.
파앙!
두 줄기 신형이 먼지를 일으키며 구화산으로 돌격했다. 도삼은 본래 발이 빨랐다. 태생적으로 도둑이 되기 위한 조건을 타고난 신체다.
‘반 시진? 당장 따라 잡아 주마!’
타다다다다닥.
그런데 꽁무니가 빠져라 달려도 이서휘와의 간격이 좁혀지질 않았다. 도저히 도삼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깜깜한 밤이다. 그 시커먼 구화산의 산길을 질풍처럼 내달리는 이서휘를 보며 도삼이 이를 악물었다.
‘죽여주마! 죽여주마! 갈아 마셔주마!’
그런데 죽이려면 일단 쫓아가야 한다. 짜증이 밀려왔으나 소리를 내지를 내공도 아까웠다. 입에서 으으으 소리를 내뱉던 도삼이 다시 이를 악물고 이서휘를 쫓아갔다.
그런데 도삼은 이서휘보다 일단 속도가 느렸다. 그 뿐일까. 달이 흐릿한 밤이라 주변이 어두웠다. 미처 보지 못한 나뭇가지에 걸려 두세 바퀴를 떼굴떼굴 굴렀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서휘는 이미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삼이 이를 악물고 쫓았다.
잠시 후, 도삼의 입에 단내가 나기 시작하더니 호흡이 가파르게 차올랐다.
“허억, 허억 좀 쉬, 쉬었다가…….”
이서휘가 되돌아왔다.
“좀 쉬어 볼까?”
“가, 감사합니다. 허억, 잠시만, 예, 가, 감사합니다.”
“내가 누구라고?”
“치르공…… 아니 칠흑꽁…… 칠!”
“이 새끼가 발음 똑바로 안 해?”
“칠흑공자! 님!”
“발이 제법 빠르구나. 아까 객잔을 살펴 보니 흑도맹 소속의 무인이 더 있던데. 다시 내려가 그 무인을 죽여서 해독약을 얻는 게 어떠하겠느냐? 물론 해약이 있을지 없을지는 구화산의 신선도 모를 일이다만.”
숨을 몰아쉬던 도삼의 인상이 대번에 굳어졌다.
“아까 흑도맹이 더 있었다고…… 요?”
“뭐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갔겠지.”
“이런 썅…….”
“쓰읍, 이 녀석이 사람 되려면 멀었네.”
파앙!
이서휘가 다시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욕할 기운도 없는 도삼이 숨을 훅 빨아들인 후 이서휘를 쫓았다.
‘죽인다. 죽인다. 넌 내 손으로 죽인다. 일단 해독약만 구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