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6화 (6/43)

<6장. 성장>

이서휘는 회귀하기 전 단우혁의 최후가 어땠는지 모른다. 이서휘가 그랬던 것처럼 단우혁도 천마교의 사천왕까지는 능히 상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마 위극신의 무위를 떠올려 보면 단우혁도 오래 버티진 못했을 것이다. 이서휘는 단우혁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속으로 되새기며 대완으로 향했다.

‘단우혁,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한다……. 이 정도가 한계라고 느꼈을 때 그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일전에는 사패들 앞에서 힘을 되도록 감췄던 이서휘다. 하나, 훗날 다시 만나면 어떻게든 사패의 서열을 제대로 정립하리라 이서휘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야 경쟁이 될 것이고, 그래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길 것이다.

이서휘는 대완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부에 대완표국이 있어 이서휘는 곧장 말을 달렸다. 어찌 보면 급한 일이다. 과거에도 이서휘가 합류해 결말을 지었던 일이니까.

겉으로 보이는 문제는 대완표국의 물품이 자꾸 강탈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사정은 다르다. 대완표국의 총표두가 흑도맹의 꾐을 받아 군림맹을 배신하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총표두가 죽고 대완표국마저 산산이 부서져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은 군림맹이었다.

배신자를 색출하겠다고 대완에서 오래된 표국 사업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이 사건이 끝나고 마지막에 웃은 자들은 흑도맹이었다.

현재 질풍검대 설진우 부대주는 조사 끝에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으나, 총표두 일당과 승부를 내기 힘들어 겉으로는 계속 사건을 조사하는 척 머무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설진우는 직접 군림맹으로 연락하지 않고, 은밀하게 하오문을 통해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대완표국의 총표두이자 표국주 대행인 장중호(張仲虎)도 이서휘가 지원을 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대완표국 정문에 도착해 말에서 내렸다.

정문 좌우에 표기(鏢旗)가 휘날리고, 무인 몇 명이 긴장한 모습으로 이서휘를 바라보다 말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군림맹. 복귀 중에 잠시 인사나 할까 하고 들렀소.”

이서휘는 일부러 지나가다 들른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무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 그러시군요. 혼자 오셨나 봅니다.”

무인이 자신의 상관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길게 늘어놓자, 이서휘가 말을 끊고 물었다.

“장 표두는 어디 계시는가?”

“네, 안에서 마침 석별연회(惜別宴會)을 열고 계시는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무인이 총총 걸음으로 앞장서더니 굳게 잠겨 있는 문으로 향했다. 그 사이 마땅히 보여야 할 일꾼들이 전혀 보이질 않고 있었다.

안에서 누군가 살피고 있었는지 저절로 문이 열렸다.

이서휘의 눈에는 호랑이의 입이 쩌억 하고 벌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날에는 이곳에서 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사파로 위장한 보표들에게 급습을 받았었다.

이서휘가 잠시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설마 늦은 건 아니겠지?’

문이 열리자마자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는 자리에 앉아 있던 군림맹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기립했다.

“부대주님!”

“형님!”

“서휘야!”

설진우의 순박한 표정에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반가움이 감돌았다. 이서휘도 활짝 웃었다.

질풍검대의 맞은편에서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 보표(保鏢)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너무나 반가워하는 질풍검대원들과는 달리 긴장한 표정 혹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봤다.

상석에 앉아 있던 대완표국 총표두 장중호가 일어섰다. 장중호는 다른 보표와는 달리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설진우의 외침 때문에 이름은 들어봤는지 장중호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이서휘 부대주셨구려. 어서 오십시오.”

이서휘가 장중호에게 다가가 말했다.

“장 표두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서휘입니다.”

“앉으십시오. 마침 질풍검대가 돌아간다 하기에 석별의 잔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서휘는 자연스럽게 설진우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서휘가 힐끗 보니 다들 우물쭈물 하면서 진수성찬을 건들지도 않고 젓가락으로 깨작대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을 꺼내며 설진우와 검대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잘 있었느냐?”

“네!”

이서휘와 설진우의 눈빛이 오고 갔다. 과거에는 연회가 시작하기 전에 만나 의견을 나눴던 두 사람이다. 지금은 장중호가 쳐다보고 있어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빛만 봐도 충분했다.

설진우는 눈빛으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었고, 이서휘는 씨익 웃을 뿐이었다.

장중호가 말을 꺼냈다.

“이 부대주께서는 어인 일이십니까? 온다는 기별도 받지 못했습니다만.”

이서휘가 대꾸했다.

“장산에 일이 있어 내려왔다가 들렀습니다. 마침 여기 설 부대주의 복귀도 늦어지는 터라…….”

“그러시군요.”

이서휘는 장중호를 바라봤다. 벌써 대완표국에서 십 년째 총표두를 맡고 있는 사십 대의 무인. 한 자루의 직도(直刀)를 잘 다뤘는데 비무 때보다 실전에서 훨씬 강하다고 알려진 고수로 무공 수위가 검대 대주들에 못지않다고 알려진 자였다.

이미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이서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실은 장 표두께 물어봐야 할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시선이 이서휘에게 모였다. 설진우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했는데도 이서휘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장 표두께서 다른 세력에게 협박을 받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순수하게 군림맹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시는 겁니까. 제 기억에는 군림맹이 대완표국에게 섭섭한 행동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보표들이 눈이 좌우로 요동쳤다. 그러나 장중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허허, 이 부대주께서는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장 아무개가 아둔하여 쉽게 이해가 되지 않소이다.”

그러자 이서휘가 쉽게 말했다.

“지난 십 년간 장 표두께서 표행에 실패하거나 표물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거래처도 대부분 군림맹의 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표물을 잃으셨다고요. 장 표두의 칼날이 무디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를 군림맹이 어찌 이해를 해야겠습니까? 급하게 오는 터라 설 부대주와 이야기를 못 나눠봤습니다만 설 부대주의 얼굴을 좀 보십시오. 저와는 친구 사이입니다만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법은 알지 못하는 녀석입니다. 자네가 알아낸 것을 이 자리서 얘기해주게. 나도 듣고 장 표두께서도 듣는 게 좋겠네.”

장중호가 표정을 숨키느라 턱을 괴고, 이서휘는 설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서휘의 말 대로였다. 설진우는 영악한 여우 같은 자가 아니다. 이서휘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헛기침을 하던 설진우가 말을 꺼냈다.

“표물은 멀리 가기 힘드오. 보내는 사람이 있고 받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작은 물건 하나를 추적하다 보면 꼬리가 밟히는 법. 일이 잘 안 풀려서 하오문을 통해 몇 가지 물건을 찾아 달라 했더니 흑도맹 분타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언을 최근에 들었소.”

설진우가 알아낸 진실이다. 이서휘가 말을 받았다.

“흑도맹? 정말인가?”

설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흑도맹이라면 조금 이해가 가오. 대완표국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오. 헌데…… 정녕 흑도맹에게 표물을 뺏겼다면 여기 계신 표사들이 어찌 살아 계신가 하는 점이요. 물건만 훔치고 보내주는 건 산도적들도 그리 하지 않소만.”

장중호가 입소리를 내며 웃었다.

“후후후, 잘 보셨소.”

장중호는 입구를 향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끼이익 하며 보표들에 의해 입구가 닫혔다.

장중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민이 많았소. 갈팡질팡하던 참인데 그리 자세히 알고 계시니 다들 살려보내기 힘들 것 같소만…….”

이서휘가 씨익 웃자, 고참 표두로 보이는 삼십 대 후반의 사내가 짙은 눈썹을 치켜뜨며 한 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장 표두! 정녕 이러셔야겠소?”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이 자였구나……!’

모두가 배신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이서휘는 누가 끝내 대완표국이 흑도맹에게 돌아서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지 알지 못했었다. 대완표국 내에서도 다툼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됐었기 때문. 이서휘는 장중호가 끝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방금 탁자를 내려친 표두에게 대완표국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갈림길이다. 장중호, 어쩔 것이냐?’

이서휘가 바라보자, 장중호가 말했다.

“사람은 늘 선택을 해야 하지요. 흑도맹에 가입하기로 한 것은 순수하게 내 결정이외다. 대다수가 따랐지요. 내가 궁금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찌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그것이 궁금하오. 시선이 두려워 좀 한적한 곳에서 일을 벌일까 했소만.”

이서휘가 말했다.

“그것이 장 표두의 선택이오?”

장중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직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내 선택은 항상 이것이었소. 군림맹은 지금까지 키운 세력을 지키기도 힘든 상황. 반면에 흑도맹은 더욱 커질 것이오. 군림맹과 백도맹을 삼킬 것이오. 무림인은 힘을 좇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지요. 저는 항상 이것을 믿었습니다.”

이서휘는 끝까지 기회를 주려 했다. 하나, 장 표두를 대신할 자를 찾아낸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질풍검대원들이 검으로 손을 뻗쳤다.

이서휘가 말했다.

“장 표두, 당신 혼자 대완표국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생각하면 큰 오만이오. 여기 있는 표두, 표사, 일꾼과 함께 만들어낸 것이 대완표국이 아니요?”

장중호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죽을 자가 무슨 말이 그리 많소?”

이서휘는 장중호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곱씹고 있는 고참 표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 이해하셨소?”

이서휘의 노골적인 무시에 장중호가 직도를 쥐고 이서휘를 향해 내려쳤다.

깡!

이서휘가 자강검을 뽑지 않은 채로 장중호의 직도를 막았다. 장중호의 공격을 보자마자 질풍검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장중호에 동조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무기를 들자, 고참 표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경거망동 하지 마라! 정녕 흑도에 투신하려느냐?”

고참 표두의 외침에 몇 명의 표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사이 장중호에게 동조하는 표사들과 질풍검대가 고함을 지르면서 맞붙었다.

장중호가 아직 마음을 돌리지 못한 자들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이서휘는 공격을 퍼부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장중호는 이서휘부터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내공을 가득 실은 직도를 내려쳤다.

깡깡깡!

이서휘는 내려치는 직도를 막은 후에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발검을 하면서 장중호의 목을 노렸다.

챙챙챙!

장중호가 급히 직도를 거둬서 자강검을 막아낸 후 섬광도법(閃光刀法)을 펼쳤다.

장중호가 아는 것은 섬광도법의 초반 오(五) 초식뿐이었으나 부단히 수련하여 나름 일가를 이룬 성취를 내보이고 있었다. 장중호는 속도와 강맹함을 중시한 섬광도법을 펼쳤는데, 이류의 무인들은 오 초식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나, 수년 전에 죽은 표국주로부터 후반부의 일곱 초식은 끝내 전수 받지 못해 완성된 도법이라 할 순 없었다.

챙챙챙!

이서휘는 직도를 튕겨내면서 초식을 기억했다. 내려치는 동작과 휘두르는 궤적을 다 살펴본 이후에 빈틈을 노리고 자강검을 내밀었다.

타앙!

장중호가 이서휘의 검을 쳐내고 손을 높게 뻗었다가 수직으로 떨어뜨렸다.

섬광도법의 초식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맹한 힘이 담긴 일도양단(一刀兩斷).

이서휘의 몸을 쪼개버리겠다는 장중호의 일념이 담긴 직도가 벼락같이 떨어졌다.

쐐애애액!

그러나 이서휘는 일도양단 초식이 떨어지기 전부터 동작을 예상하고 있었다. 대처할 방법은 많았다. 암행표로 피해도 되고 암연심검의 강맹함으로 대응해도 된다. 그러나 이서휘는 자강검의 예리함을 믿고 내공을 적절하게 나누어, 직도가 떨어지는 궤적에 내공을 주입한 자강검을 내밀었다.

깡!

직도가 허망한 소리를 내더니 반으로 부러지고, 내공을 아꼈던 이서휘는 막던 자세에서 그대로 암연심검의 환으로 찔어 들어갔다.

떠엉!

장중호가 급히 부러진 직도를 거둬, 이서휘의 검 끝을 막아내고 십여 초식을 방어에만 치중했다. 부러진 직도로 이서휘의 검을 연달아 막아냈으니, 장중호도 흔히 볼 수 있는 무인은 분명 아니었다.

챙챙챙!

장중호의 움직임이 시간이 흐를수록 방어적으로 흘러갔다. 공격을 하고 싶어도 도의 길이와 기세가 참으로 궁색했다.

이서휘는 공세로 전환한 후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철저했다. 장중호의 기세가 수그러든 것을 느끼고, 이서휘는 되려 자강검에 주입하는 내공을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장중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강검을 막아내다가, 문득 이서휘의 냉정한 눈빛을 쳐다본 이후로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까앙!

자강검과 부러진 직도에 불꽃이 튀겼다. 장중호는 이서휘의 검이 자색으로 점점 물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자강검의 특색이다. 착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장중호는 마음마저 흐트러지고 있었다.

‘부대주란 놈이 뭐 이리 강하단 말인가……?’

이서휘가 장중호의 일도양단을 흉내 내듯 내공을 가득 실은 자강검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상황이 뒤바뀌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자강검이 장중호를 향했다.

쐐애애액!

이어서 서걱 하는 소리와 푸악 하는 소리가 연달았다.

이서휘의 자강검이 가로로 막아선 직도를 다시 한 번 쪼개고 그대로 장중호의 팔을 베었다.

장중호의 비명이 터졌다.

“크악!”

이서휘는 떨어지는 장중호의 직도를 허공에서 낚아채 왼 편에서 질풍검대원과 겨루고 있는 표사를 향해 던졌다.

휘이이익!

떠엉 소리와 함께 표사의 도가 날아가고, 상대하던 질풍검대원이 표사를 빠르게 베었다.

이서휘는 자강검을 장중호의 목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멈추라 하시오. 저러다 다 죽소.”

장중호는 고통이 밀려와 큰 소리도 내뱉지 못하는 상황.

“그, 그만들 하게…….”

장중호의 말에도 표사들은 질풍검대원들의 검을 막느라 쉽게 무기를 거두지 못했다.

이서휘가 외쳤다.

“그만! 질풍검대도 무기를 버린 자는 공격하지 말아라.”

그제야 조금씩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몇 명은 팔이 잘린 장중호를 보자 대적할 마음도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대적하던 자들이 모두 바닥에 무기를 던졌다.

장중호는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서휘를 노려봤다. 이서휘는 장중호의 휘하로 보이는 표사에게 말했다.

“지혈하시오.”

표사가 뛰어오자, 이서휘가 고참 표두에게 말했다.

“표두께선 성함이 어찌 되시오?”

“심이환이라 합니다.”

“심 표두께서 수습을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와 겨룬 자들은 전부 포박해라.”

“네!”

이서휘는 잠시 대청을 둘러봤다. 일꾼 몇 명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고 대청 안쪽 기둥에서 고개를 내밀고 지켜보던 소년이 이서휘의 시선을 받고 급히 몸을 숨겼다.

그때, 심이환 표두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더니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부대주님!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명우야! 이리 나오거라.”

불러도 나오지 않자, 심이환은 대청 안쪽으로 급히 뛰어가더니 이내 열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을 데리고 왔다. 두려워한다기 보다는 잔뜩 성난 얼굴로 사람들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물었다.

“누굽니까?”

심 표두가 말했다.

“돌아가신 남궁 표국주의 아들입니다.”

“돌아가신 표국주가 남궁가였소?”

이서휘가 무엇을 궁금해하면서 묻는지 아는지라, 심이환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먼 방계일 것입니다. 군림맹의 맹주님과는 연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서휘가 소년을 바라봤다. 눈매가 제법 날카로워 강단은 있어 보였으나 표국을 운영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심 표두는 어쩌자는 셈인가?’

심이환이 이서휘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국주께서 명우에게 섬광도법을 모두 전수한 것으로 압니다. 군림맹이 오 년만…… 우리 명우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럼 명우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겁니다. 장 표두에게도 내내 설득했었던 일인데 그는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이서휘는 심이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국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인가……?’

심이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명우라는 소년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삼 년.”

좌중의 시선이 소년에게 모였다. 남궁명우가 말했다.

“삼 년입니다. 그때까지 섬광도법을 모두 익히겠습니다. 아저씨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게요. 부탁드립니다.”

내공이 얕은 상태에서 가전(家傳)으로 내려온 도법만으로는 험난한 강호를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림맹에 보고해서 도와드리겠소.”

어차피 소년의 곁에는 표국 일을 맡기려고 했던 심이환이 있다. 장중호 같은 무리와는 다를 것이다.

이서휘가 소년을 위압적인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삼 년 후 남궁명우의 섬광도법을 한 수 배우러오겠다. 자신 있느냐?”

소년은 영특한 구석이 제법 있는지 이서휘가 일부러 기를 누르려는 것임을 알고, 이서휘의 눈빛에 지지 않으려는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가지고는 안 돼. 여기 이 꼴을 봐라. 하마터면 네 아버지가 동료들과 평생 노력하여 쌓은 대완표국을 통째로 넘길 뻔 했다. 군림맹이 보살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게 노력가지고 될 일이냐?”

명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죽기 살기로 수련하겠습니다.”

“그 뿐이냐?”

이서휘의 물음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명우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당차게 말했다.

“표사, 표두 형님들의 말씀도 항상 잘 듣겠습니다. 장 표두처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전 표국주 아들의 말을 듣고서야 장중호에게 동조했던 자들의 표정에 안타까움과 후회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녀석이네.’

“여기 심 표두께도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

“네.”

이서휘가 소년을 통해 슬쩍 떠보자, 심이환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표국주의 은혜를 갚으려면 멀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명우를 단단히 훈련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 사이 질풍검대원들이 표사들을 포박하고, 지혈을 하고 있는 장중호를 살펴 보다 이서휘에게 말했다.

“형님, 이 자 살리실 겁니까? 의원에게 데려가야겠습니다.”

이서휘가 말했다.

“심 표두에게 맡겨라. 알아서 해주시오.”

이서휘는 심 표두를 따르는 자들의 수를 세고 설진우에게 말했다.

“진우야, 우리는 가자.”

설진우가 무어라 대꾸하려고 하자, 이서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다는 것임을 눈치 채고 설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휘가 심이환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심 표두, 군림맹에 지원을 요청하고 질풍검대 일부를 며칠 표국 주변에서 머무르게 하겠소. 수습은 심 표두가 맡아주시오.”

심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서휘가 질풍검대를 이끌고 대완표국을 나섰다.

잠시 후 대로변에 나오자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이서휘를 따라나선 설진우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녀석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지?’

일전에는 엎치락뒤치락 했던 사이다. 그런데 못 본 사이에 이서휘 홀로 훌쩍 성장한 느낌을 받았다. 설진우가 생각에 잠겨 있자 이서휘가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작게 속삭였다.

“진우야.”

“어?”

“표국 일도 잘 마무리 되었는데, 오늘 술 한 잔 할까?”

“그래도 될까? 네가 사는 거냐?”

“오늘은 내가 사야지.”

“뭐야? 정말? 네 놈이 웬 일로?”

“후후후. 다들 이리 와봐라. 할 말 있다.”

이서휘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대원들을 불렀다. 대로변에서 갑자기 대원들이 이서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였다. 대완으로 임무를 나와 있던 대원들이 모두 모이자, 그 중심에서 이서휘가 작게 말했다.

“지금부터 중대한 소식을 전한다.”

“뭡니까?”

잠시 한쪽 손을 감추고 뜸을 들이던 이서휘가 입을 열었다.

“이 형님께서 부대주 비무전에 우승했노라.”

이서휘가 자강검을 척 하고 내밀었다.

“우와아아아! 이게 뭐야!”

질풍검대원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한 번만 만지겠다느니, 뽑아보겠다느니 하는 소란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대원들이 자강검을 뺏으려 하자, 이서휘가 으하하하 웃으면서 대로변을 질주했다. 그 뒤를 질풍검대원들이 도둑을 추격하듯이 이서휘를 잡겠다고 기를 쓰며 달려 나갔다.

“거기 서요! 형님 잡아라!”

☆ ☆ ☆

질풍검대와 조촐한 술자리를 함께 한 이서휘는 다음날 홀로 떨어져 나와 구화산(九華山)으로 향했다.

대완표국 임무는 설진우의 주도로 마무리 되어야 할 일…… 이서휘는 질풍검대 장시우 대주에게 부탁했던 대로 휴가를 받아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동남제일산이라고도 불리는 구화산(九華山). 본래 구지산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이태백에 의해 구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그 곳.

검이 부러지고 두 눈을 잃었던 곳이다.

어찌 이서휘가 잊을 수 있을까.

때문에 두 눈이 형형히 빛나고 있는 이서휘의 발걸음은 아홉 개의 봉우리 중 가장 산세가 험하다는 천대봉을 오르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이서휘는 구화산이 험하다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짐을 최대한 간소화했다. 자강검과 목을 축일 술이 담긴 호리병 하나가 전부였다.

이서휘가 질풍검대주 장시우에게 농담으로 만년설삼(萬年雪蔘)도 먹고, 은거기인(隱居畸人)에게 무공도 좀 전수 받고 대도(大盜)들이 찾고 있는 보고(寶庫)에도 좀 들렀다가 오겠다고 했었다. 만년설삼과 은거기인은 농담이었지만 보고에 다녀오겠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었다.

구화산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과거, 군림맹과 백도맹이 도착하기 전 누군가가 먼저 기연을 얻어갔을 수도 있는 곳이다. 두 눈이 멀쩡해도 비밀을 풀기 어려운 장소였을 것인데, 하물며 두 눈을 잃었던 이서휘는 구화산의 보고가 두고두고 생각에 남았다.

운명일까, 우연일까, 아니면 이서휘의 빛나는 직감이 시킨 것일까.

이서휘는 일부러 술을 챙겨서 이 장소에 도착했다. 한편으로는 술이 빠지면 이태백이 섭섭해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서휘는 일부러 해가 질 무렵에 출발했다. 인적이 드문 몇 개의 사찰을 지나 천대봉이 숨겨 놓은 장소에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엔 서서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적을 만나더라도 천대봉이 어둠에 휩싸이면 이서휘를 쉽게 상대할 수 없을 터. 더군다나 지금은 자강검과 함께였다. 강적을 만나 검이 부러질 수 있는 변수도 완벽하게 차단한 상태로 이서휘는 구화산에 올랐다.

“드디어 왔구나.”

이서휘가 도착한 장소는 장정 백여 명이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터였는데 드문드문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이서휘가 바라볼 수 있는 절벽엔 굵은 넝쿨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엉켜 있었다. 반대편에는 천길 낭떠러지가 있고, 그 너머에 구화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장소였다.

문제는 이 장소가 무림인들을 혹 하게 할 만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군림맹과 백도맹이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장소를 표기한 장보도(藏寶圖)가 너무 그럴 듯했기 때문이었다. 이서휘는 절벽을 거칠게 뒤덮고 있는 넝쿨이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울창한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서휘가 천천히 절벽과 공터를 둘러봤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절벽으로 향했다. 이서휘는 절벽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확신했다. 문제는 입구를 여는 것이다. 이서휘는 넝쿨이 감추고 있는 절벽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장보도에 적혀 있던 글자를 발견하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가볼까?”

이서휘가 술병을 바위 한 쪽에 내려놓고 자강검을 뽑아 절벽으로 달렸다. 타앗 소리와 함께 훌쩍 솟은 이서휘가 자강검을 휘둘러 글씨를 가리고 있던 덩굴들을 잘라내었다.

휙휙휙휙휙!

이서휘는 벽을 차면서 자강검을 휘둘렀다. 떨어지려는 찰나에 오른발로 벽을 차고 공중제비를 돌아 내려섰다. 이어서 잘린 덩굴들이 하나둘 툭툭 떨어지면서 가리고 있던 글자를 드러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다른 세상이로되 인간 사는 곳은 아니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일전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던 이서휘다. 훗날에 알아보니 이태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란 시에 거론된 문구였다. 그러나 그 속풀이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서휘는 시구가 적힌 아래쪽을 꼼꼼하게 살폈다. 석벽이 있다면 이곳이리라. 그러나 한참을 살펴봐도 별다른 것이 없었다.

“흐음.”

어느새 달이 밝게 떠 있었다.

혹시 아무 것도 찾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있었다. 이서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잠시 달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공터를 돌며 생각에 잠겼다.

“이태백, 달 그리고 술…….”

그러다 이서휘는 이태백이 지은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에서 기억나는 문구를 뒤죽박죽 제 멋대로 몇 개 읊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달 아래 홀로 마시는 술이라…… 함께 할 사람 없어 혼자 마시다…… 잔을 들어 달을 모셔오고 내 그림자까지 셋이 됐구나……. 달은 본래 술을 못하고 그림자는 흉내만 낼 뿐이니…….”

이서휘는 술기운이 올라와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속은 것일까? 애초에 장보도가 가리키는 보도는 없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절벽에 누가 저런 문구를 적어 놓았단 말인가.

이서휘는 넝쿨을 베면서 느낀 것이지만 절벽에 새긴 글씨도 날카로운 보검으로 적은 것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칠흑검제 시절의 무위를 되찾아도 저 정도는 힘들어 보이는데. 누가 새긴 것일까.”

천마 위극신이 중원 무림을 거의 집어삼켰을 무렵에도 그러한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었다. 이서휘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흐흐, 설마 천마 놈이 홀라당 먹은 보고는 아니겠지?”

술이 약한 이서휘다. 이미 얼굴이 새빨갛게 익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술병을 툭툭 쳐보니 아직 묵직하다. 다 마시려면 한참을 더 들이켜야 했다.

이서휘는 자연스럽게 휑한 공터를 둘러보며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았다.

마침 큰 소나무 아래 반질반질한 바위가 있어 이서휘가 걸터앉았다. 우습게도 사람이 편히 앉을 수 있게끔 살짝 파여 있는데다가, 큼직한 소나무 덕에 비 오는 날에 앉아 있어도 젖지 않을 만큼 아늑한 자리였다. 누군가 이곳에서 술을 마셨다면 반드시 이곳에 앉았으리라. 달이 보이고 어둠에 잠긴 구화산의 봉우리들이 어슴푸레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바위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 밖에 없다. 술을 마시면서 별세계(別世界)를 구경하고 내 그림자를 벗 삼으며 달을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너란 말이다.”

이서휘가 일어나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부수기도 어렵고 들기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바위다. 달빛이 비추는 바위를 내려보던 이서휘가 자강검의 검집으로 바위를 이리저리 쿡쿡 눌렀다. 바보처럼 한참을 그렇게 꾹꾹 눌러대던 이서휘가 다른 곳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반질반질한 곳을 자강검으로 눌렀을 때였다.

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움푹 들어갔다.

이어서 그그그그그 하는 소리와 함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고 적힌 아래 공간에서 석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제야 이서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술이 깨고 있었다.

이서휘가 찾은 것인지 술이 찾은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기연(機緣)이었다. 아니, 아마도 가장 근접하게 말한다면 술에 취한 이서휘가 찾은 것이리라.

☆ ☆ ☆

이서휘가 석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강검을 뽑아 내공을 주입했다. 은색의 검신에 자색이 은은하게 맴돌자 희미한 빛이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이서휘는 통로를 지나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몇 걸음을 옮겼다가 열려 있는 석문을 바라보고 다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자 눈이 먼저 적응되더니 자강검이 가리키는 곳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살펴보던 이서휘는 발 밑에 튀어나온 돌을 주시했는데, 표면의 느낌이 소나무 아래에 있던 바위와 똑같았다. 이서휘가 내공을 주입해 누르자 석문이 먼지를 피어대며 그그그그 소리와 함께 닫히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구부러진 길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기기 전에 감각을 집중했다. 소리와 냄새로 인기척이 없는지 확인하고, 영물(靈物)이 머무르고 있진 않을까 경계했다.

그러나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제야 이서휘는 자강검을 쥐고 신중한 발걸음으로 통로를 빠져나갔다. 삼십여 걸음을 걷자 점점 통로가 밝아지고 있었다.

‘뭘까?’

드디어 통로 끝에 이르자,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질렀다.

“아……!”

천장이 뚫려 있는 장소였다.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이 천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속세와는 경지가 다른 별세계(別世界)였다.

무림인이 만든 장소일까? 아니면 구화산이라는 자연이 수만 년에 걸쳐 만들어낸 우연의 일치일까. 그 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자, 서늘한 달빛을 머금은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별이 쏟아지는 중앙과는 달리 이곳은 마치 달빛을 쬐기 위해 만들어진 아늑한 방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동굴을 살펴보니 높게 솟은 바위 위에 고고한 꽃 한 송이가 달빛을 쬐고 있었다. 막연했던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월단화(月丹花)?”

꽃이 아니라 달빛을 쬐는 여인과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서휘의 사부였던 검선이 제자의 내공을 늘려줄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거론됐던 것들은…… 세 가지였다.

공청석유(空靑石乳), 천연주과(天然酒果) 그리고 월단화(月丹花).

행여나 눈이 먼 제자가 기연을 만나더라도 스쳐 지날까 두려워했던 사부는 입이 닳도록 세 가지 영약에 대해 설명해줬다. 시각적인 것을 제외한 정보는 모두 이서휘의 머리에 담겨 있었다. 때문에 달빛을 쬐는 여인의 자태를 가진 꽃을 보자마자 이서휘는 월단화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음의 기운을 가졌다고 들었다. 먹으면 이서휘가 견뎌낼 수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 월단화를 보고 그냥 돌아가겠는가. 더군다나 이서휘는 사부로부터 월단화를 취하는 방법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서휘야, 월단화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순간에 꽃이 독기를 머금는다.]

[어찌 해야 합니까?]

[방법은 네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가르쳐 줬었느니라.]

이서휘는 사부의 말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월단화는 이서휘가 알고 있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초식으로 꽃을 줄기에서 분리해내어 즉시 섭취해야 한다.

이서휘는 자강검을 들어 내공을 주입하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암연심검을 익혔던 것처럼…….

자강검이 자색으로 물들자 이서휘는 호흡을 가다듬고 암연심검의 환으로 월단화의 줄기가 끝나는 곳을 정확하게 찔러 검 끝에 월단화를 올려놓았다.

이어서 이서휘가 조심스럽게 검을 들었다.

검 끝에 있던 월단화가 자강검을 타고 내려왔다. 이서휘는 검신을 타고 내려오는 월단화를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삼켰다.

즉시 입 안에 과일을 먹은 것처럼 달콤한 맛이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잘 익은 천도복숭아의 맛이 나더니 꿀꺽 하고 삼킬 때는 좋은 차를 마신 것처럼 코끝에 향이 맴돌았다.

이서휘는 그 자리에서 즉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이어서 암연심검을 펼치기 위해 배웠던 암연심법(暗嚥心法)을 운용했다.

‘준비됐다. 시작하자.’

월단화의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이서휘는 침착하게 단전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한 서늘한 기운으로 막혀 있던 임맥과 독맥을 타통해 순식간에 소주천(小周天)을 마쳤다.

신체는 막혀 있었으나 이미 길을 알고 있던 이서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서늘한 기운이 이서휘가 본래 지닌 진기(眞氣)에 섞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이서휘는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눈을 떴다. 온몸이 노폐물을 내보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이서휘는 부대주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내공을 얻은 셈이었고, 아직 칠흑검제 시절보다는 못 미치는 무위를 펼칠 것이라 냉정하게 예상했다. 하나, 이 정도도 충분했다.

자강검을 쥐고 일어난 이서휘는 어디선가 흐르고 있는 물소리를 듣고 천천히 이동했다. 확실히 이서휘의 오감은 전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이서휘가 물소리를 추적하면서 따라가 보니, 동굴 한쪽에 사람이 두어 명 정도 몸을 담글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고여 있었다. 어찌나 맑은지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했는데, 그 물은 다시 동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서휘는 옷을 훌러덩 벗어 물속에 몸을 담갔다. 이빨을 딱딱 부딪치게 하는 냉수였는데도 이서휘는 전혀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고개만 내놓고 있던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후우우우……”

잠시 후 그야 말로 번쩍 하고 눈을 뜬 이서휘.

잠에서 깨날 때마다 미약하게 느끼던 피로감이 전혀 없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까지는 아니었으나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이서휘는 석수가 범상치 않음을 깨닫고 아예 머리까지 담갔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이서휘가 몸을 담갔던 곳은 이내 새로운 물이 채워져 다시 맑아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양팔을 뻗어 큰 대(大)자로 만들어 온몸을 개방하는 마음으로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흐르는 석수는 이서휘의 피부에 쌓였던 노폐물을 깨끗이 씻겨냈을 뿐만 아니라, 본래도 동안이었던 얼굴과 피부를 갓 스물이 된 청년처럼 맑은 기운을 머금게 만들었다. 아마 면경이라도 있었으면 이서휘는 놀라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어느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서휘는 다시 중앙으로 되돌아와서 경신법을 써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에 매달려 있는 복숭아를 여러 개 따서 내려왔다. 이서휘는 껍질 채 한 입 베어 물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서휘는 연달아 세 개를 입에 우겨 넣고서야 배를 두드렸다. 삽시간에 갈증도 풀리고 배까지 채운 터라 시원한 트림이 터져 나왔다.

“꺼억…….”

옷을 홀라당 벗은 채로 과일을 먹으니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제천대성이 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비인간(非人間)이라는 것인가?”

이서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스스로 뼛속까지 무림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숭아 주변에 천연과주가 고인 곳이 없을까 살펴봤다.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질 않자, 이서휘는 미련을 끊고 다시 옷을 입었다.

대체로 서늘한 곳이라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이서휘는 바람이 불지 않는 적당한 곳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신선이 될 팔자는 아닌가 보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도 이서휘는 문득 자강검을 뺏으려고 달려들던 질풍검대의 동료들이 생각나 피식 하고 웃었다. 속세에 뜻이 없다면 이곳에서 평생 과일로 배를 채우고 때때로 석실을 열고 나가 사냥을 하면서 지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월단화를 취한 이서휘는 어느새 천마 위극신을 떠올리며 그와 겨루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이서휘가 자강검을 스릉 소리와 함께 뽑아내며 말했다.

“부자무용(不紫無用) 만자능비(滿紫能飛)…….”

이서휘는 자강검을 쥐고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월단화로 인해 한층 깊어진 내공을 자강검으로 쏟아내었다. 잠시 후 자강검이 진한 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서휘의 팔이 불가항력으로 부들부들 요동쳤다. 검병에서 시작한 자색의 물결이 검신의 끝에 다다랐을 때 이서휘는 하늘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시전했다.

쐐애애애앵!

자강검 끝에서 뻗어 나간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쏟아지는 별들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검기를 내보낸 이서휘는 얼어붙은 것처럼 잠시 하늘을 봤다. 아직 어두운 밤이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이서휘는 자신이 검기를 사용했다는 것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내공만 충분하면 이보다 더 한 무위도 펼칠 수 있었으니까. 이서휘가 놀란 것은 자색의 검기가 천장으로 향할 때 불쑥불쑥 드러나던 표면이었다.

“설마…….”

이서휘는 다시 자강검을 우하단으로 늘어뜨렸다. 고개는 살짝 삐딱하게 천장에 난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자…….”

아직 암천세(暗天勢)를 펼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한 이서휘가 내공을 끌어올려 다시 한 번 암연심검의 파를 준비했다.

바닥에 닿은 자강검의 검 끝이 두두두두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어서 이서휘의 팔이 자강검과 함께 크게 허공을 갈랐다.

쐐애애애앵!

“밝혀라!”

이번에는 이서휘가 일부러 벽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탕탕탕탕탕탕!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벽을 수십 번 부딪치다가 사라졌다. 돌멩이가 떨어지고, 먼지가 피어오르면서 우웅우웅 하는 진동음이 이어졌다.

이서휘는 자색 검기가 벽에 부딪칠 때마다 눈을 번뜩였다.

아직 어두운 밤이라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검기가 튕기면서 보여준 표면은 분명……

“……누군가 뚫어낸 것이다.”

이서휘가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서휘는 칠흑검제 시절, 자신의 무위를 떠올려 보다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사부인 검선의 웅혼한 내공에서 뻗어 나온 검기를 상상하다가 역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시다. 천마, 그 자면 가능하려나?”

이서휘는 자신이 펼친 암천세와 부딪치던 천마의 성명절기를 머리에 그려보다가 천장을 바라봤다.

“그 역시 불가능하다.”

이서휘는 검을 쥔 자세 그대로 동이 틀 때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그렇게 서서히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동이 트면서 빛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그제야 움직였다.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다가 가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서휘는 천장을 바라볼 수 있는 정중앙에 서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이서휘가 서 있는 곳도 원형으로 패여 있었다. 몸을 씻던 동굴과 과일을 먹었던 장소가 보이고, 조금 들어가서 월단화를 취했던 입구도 명확하게 보였다.

장보도에서 연유한 장소라 막연히 이곳이 보고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곳이 어찌 보고일 수 있을까.

빛이 환하게 들어오자, 이서휘는 이곳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연공실(硏功室)이었구나.”

누군가가 자신의 무위로 뒤덮고 있던 천장을 뚫어낸 것이다. 이서휘가 검기를 날리자마자 목격했던 것은 부자연스러운 표면이었다. 돌풍이 휘몰아쳐서 뻗어 올라간 것처럼 회오리 결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동이 틀 때까지 이서휘가 생각한 것은 대체 어떤 무위를 지녀야 천장을 뚫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신이 아닌 이상, 한 번에 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야 말로 초절정한 무공을 완성한 순간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년, 아니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익혀 완성한 무공으로 벽의 흔적들을 단 한 방에 지우면서 천장을 뚫어냈을 것이라 상상했다.

이서휘는 그제야 자신이 이 연공실의 주인이 된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은 극양의 내공을 운용하는 고수에 의해 점점 내려앉았을 것이고, 무공을 수련하다 지치면 가장 먼저 석수에 몸을 깨끗이 씻어낸 후에 과일을 먹고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월단화는?’

이 정도 무위를 펼치는 자가 월단화가 내뿜는 음의 기운이 필요했을까? 아마도 극양(劇陽)의 무공을 수련하면서 때때로 취한 것이리라.

‘월단화가 필 정도로 서늘한 장소에서 극양의 무공을 수련하다가 때로는 석수에 몸을 담그고……. 자, 그럼 쉴 때는 무엇을 했을까?’

천장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동굴로 뻗어 나가자 이서휘는 걸음을 옮겼다. 벽에 새겨진 글자는 없는지, 누를 수 있는 기관장치는 없는지 둘러봤다.

설마 하는 생각이었지만……혹시 이 장소의 주인이 아직도 살아 있어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이서휘는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순간이었다.

‘백도의 선배이길 바랄 수밖에…….’

한편으로는 석문 위에 글씨를 새긴 무위가 이해되고 있었다.

“천장도 뚫었는데 글씨 몇 자 적는 것쯤이야.”

단순히 비급 몇 권으로 이해하고 따라 잡을 수 있는 신공은 아닐 것이다. 사부가 거론했던 공청석유, 천연주과 그 이상을 먹어도 불가능해 보였다.

만년설삼을 대체 몇 뿌리나 먹어야 가능할까.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후후후.”

이서휘는 넓은 석실 안을 다 돌아본 후 다시 중앙으로 되돌아왔다. 석문 위에 적힌 필체로 봤을 때는 문무를 겸비한 고수로 보이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연공실 안엔 별다른 게 없었다.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가 하나 더 있었지만 절벽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뚫려 있는 곳이었다.

이서휘는 아쉬웠다.

무공을 훔쳐보겠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이곳의 주인이 대체 누구인지, 그 이름 석 자라도 알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무공을 익혔으며 무림에선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궁금해 미치겠군.”

그러다 이서휘는 이곳의 주인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곳 주인은 아주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무공은 중앙의 연공실에서.

술은 소나무 아래 바위에서 달을 구경하며.

만약 집필을 했다면 그에 어울리는 곳에서 했을 것이다.

이서휘는 선배 고수에게 빙의한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마땅한 장소는 어디냐?”

이서휘는 석실 안을 돌다가 다시 바깥이 뻥 뚫려 있는 장소에 도착해 잠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이 장소도 검기로 뚫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흔한 가구 하나 없었지만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움푹 파인 곳이 있었다. 그곳에 앉으니 구화산의 산세가 훤히 보였다. 촛불 흔적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석실의 주인은 해가 뜨면 일어나고 달이 뜨면 잠에 드는 생활을 반복했으리라.

이서휘가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벽을 살폈다. 아무 것도 없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자강검 검집으로 벽을 긁었다. 툭 하고 덩어리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먼지가 풀풀 피었다. 이서휘는 초식을 전개하듯 검을 빠르게 휘둘러 방에 묻어 있던 것들을 떨어뜨렸다.

드러난 것은 검으로 새긴 흔적들이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이서휘는 마음이 좀 안정됐다.

이 선배 고수도 사람이긴 했구나, 하는 심정이 들었던 것. 이서휘는 벽에 새긴 검의 흔적들을 살피다 무슨 뜻이 담긴 건 아닐까 하고 뚫어지게 바라봤다. 일단 그려진 검의 궤적이 너무 많았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휘두른 느낌.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자강검을 뽑았다. 갑자기 호승심이 일었다. 어차피 벽에 새겨진 의미도 모를 바에야 나도 한번 따라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이서휘는 가벼운 마음으로 벽에 새겨진 흔적들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휙휙휙!

따라 긋다 보니 어떤 것은 깊게 패여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서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휘두르다가 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천(天)?”

이서휘는 동작을 멈췄다가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낸 후 검 끝으로 천 자를 그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고, 다음엔 사람 인 자를 긋고, 끝으로 조금 비뚤어지긴 했으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었다.

휙휙휙휙!

자강검이 네 번을 그은 셈. 느낌이 묘했다. 천 자를 떠올리고 벽을 바라보니 뜻밖에 몇 글자가 다시 눈을 사로잡았다.

“천(天)…… 일(一)…… 인(人)…… 이(二)……?”

결국 천 자에 모두 담긴 글자들이다. 방향과 크기가 다양하고 워낙 많은 흔적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결국엔 천 자를 그린 것이다.

이서휘가 선배의 기술을 떠올리며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암연심검을 대입해봤다.

“결국 암연심검의 파를 네 번 구사하면 되는 것인데…… 기의 발산을 의도적으로 늦추거나 응축할 수 있다면 천 자가 그려진다는 얘기로구나.”

이서휘는 암연심검의 세(勢)를 떠올렸다. 적을 뒤덮는 검기다. 세에서 발전시킨 것이 이서휘의 성명절기였던 암천세(暗天勢)다. 이 역시 즉발기이자 폭발기다.

헌데, 선배 고수는 검기를 응축시켰다.

검제였던 이서휘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자였다.

그뿐이 아니다. 내공의 수준은 칠흑검제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아 보였다.

이서휘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보라, 저 벽에 새겨진 완성된 천 자를…… 그 수만 족히 수천 개였다.

이서휘는 다시 해가 질 때까지 그 곳에서 천 자를 그리는 수련을 하다가 짚이는 바가 있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암연심검의 파를 네 번 긋는다. 검기로 발산하지 않고 내공을 그대로 몸에 응축해 놓는다. 암연심검의 환으로 적을 조준하면서 검기를 내뱉는다.”

이서휘는 점점 미쳐가는 중이었다. 광인이 된 것처럼, 검의 구결 같아 보이기도 하고, 헛소리 같기도 한 말들을 주절주절 내뱉었다.

우우우우웅!

이서휘가 자강검에 내공을 주입해 벽을 향해 휘둘렀다.

쐐앵! 쐐앵! 쐐앵! 쐐앵!

검기가 나가지 않았다. 암연심검의 파로 내뱉을 검기를 그대로 갈무리하고 있던 이서휘가 환을 내뻗으면서 기를 배출했다.

“아니다. 아니야!”

이서휘가 내뱉은 말과 함께 평범한 검기가 뻗어 나갔다. 동작도 무려 다섯 번이다. 무엇보다 속도가 뒷받침해야 할 텐데, 너무 느렸다. 그러다 이서휘는 네 번에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즉시 검 끝으로 벽을 그었다. 이 자체로 적을 공격하는 초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쐐앵! 쐐앵! 쐐앵!

벽을 베자, 돌이 튀는 느낌이 이어지고, 마지막 일 자를 그을 때 이서휘는 오른손으로 쥔 검병을 끌어당겨 내공을 주입한 왼 손바닥과 충돌시켰다.

파앙!

그 동작과 동시에 이서휘는 울컥하고 피를 토했다.

“쿠에에엑, 허억, 허억……!”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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