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도왕>
이서휘는 사마예가 마치 경극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보이고 있었다. 사마예가 이번에는 다른 공자들을 바라보며 다그쳤다.
“이 녀석들아! 검대원들과 분쟁이 일어나면 너희부터 말렸어야 하는 게 아니냐! 저게 뭐하는 짓거리냐!”
모용현강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회주님. 제가 가서 잘 달래 보겠습니다.”
사마예가 한숨을 쉬자, 다른 공자들은 가만히 있고 모용현강만 사마준보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아무 말이 없던 독고비영이 나와 사마예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됐다. 비영아, 너도 매번 입 닫고 침묵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일들 봐라.”
“네.”
공자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사마예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이 부대주.”
“네.”
“검대원들의 노고는 내 충분히 알고 있네. 오늘 일은 사마준보가 잘못한 것이니 괘념치 말게. 내 나중에 장 대주에게도 사과를 하겠네.”
“아닙니다.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마침 또 사마예는 부대주 비무전에서 이서휘에게 패했던 사마초의 아버지다. 사마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마초가 자네를 꺾겠다고 아주 벼르고 있다네. 내가 잘 가르쳐서 언제 한 번 질풍검대로 보낼 테니 한 수 가르쳐주게.”
“별말씀을…….”
“먼저 가겠네.”
사마예가 싸움을 이런 식으로 중재하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사마예 본인이었다. 덤으로 바닥으로 추락할 뻔 했던 사마세가의 명예도 가까스로 사마예가 지킨 셈이 되어 버렸다.
그때, 여인의 머리 장식을 날렸던 고수가 양쪽 팔에 여인을 끼고 경박한 말투로 말했다.
“흐흐흐, 재미있는 자야.”
“아이 참, 뭐가 재미있어요? 던지신 거, 비싸게 주고 산 거라고요.”
“어허, 그깟 장식 얼마나 한다고, 내가 하나 사주면 되지 않느냐?”
“정말요?”
여인들의 어조와 분위기는 분명 기녀들이 확실했다.
“오라버니 멋져요!”
“각주님! 정말 무공도 할 줄 아셨네요?”
고수는 천라각주(天羅角主) 유백(劉伯)이었다. 유백은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여인들을 끼고 다시 취연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뜻 모를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흐흥…….”
그때 유백이 한 여인을 간지럽혔는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군사회의 부회주와 천라각주 유백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때마침 이들이 없었더라면 변명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사마예의 대처가 참 인상에 남았다.
‘무서운 자다.’
“오라버니?”
이서휘는 그제야 백리연을 돌아봤다. 백리연이 말했다.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이서휘와 백리연이 자연스럽게 걸었다. 백리연이 말이 없는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내일은 뭐하세요?”
그제야 이서휘가 상념을 끊고 백리연을 바라봤다.
“내일은…….”
이서휘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일 해야지. 임무가 있어. 대완으로 가야 해.”
“아…….”
“넌?”
“저는 별일 없어요.”
이서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백리연은 물론이고 오늘 그렇게 난리를 피운 세가의 공자들은 내일 무엇을 할까……?’
좋고 싫음을 떠나 당장 내일부터 할 일이 있고 임무가 주어지는 자들이 검대 대원들이다. 이서휘는 백리연의 말에서 뜻밖의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백리연이 군림맹의 정문에 도착했을 때 입을 열었다.
“다녀와서 봬요. 잘 다녀오세요.”
그 말에 이서휘가 걸음을 멈추고 백리연을 돌아봤다.
‘전에는 없던 인연이다. 그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까…….’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서휘도 이런 일만큼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런 예상이 되질 않았다.
여자에게 말주변이 없고, 미인 앞에서는 더더욱 말주변이 없는 이서휘다. 참으로 멋없게, 참으로 밋밋하게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응. 또 보자.”
☆ ☆ ☆
다음 날 정오쯤이었다.
이서휘가 말을 몰아 군림맹을 벗어났다.
장시우가 대원들을 이끌고 청양으로 떠났고 이서휘는 이미 대완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설진우에게 합류하기 위함이었다.
이서휘는 상체를 감싸는 가죽띠에 천뢰각에서 지급받은 흑비도(黑飛刀)를 두르고, 등에는 천으로 감싼 자강검을 메고 그 위에는 잡다한 물건들을 담은 봇짐을 멘 상태였다.
어차피 군림맹에서 대완까지는 하루 만에 갈 수 없는 거리다. 해가 지면 근처 객잔에서 쉬기로 하고 전력으로 말을 몰아 질주했다.
이서휘는 말 위에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마준보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까…….
사마예라는 견제자 때문에 혹시 차기 가주 자리를 물려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세가의 다른 공자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수호세가들의 가주는 무공도 고강하고 무림에서의 위명도 제법 높다. 그러나 사마준보 같은 녀석들이 세가를 물려받으면 검대원들과 마찰이 더욱 커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군림맹에 균열이 생길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멀리 하고, 유능한 인재들과 함께 나아가려면 결국 이서휘가 강해져야 했다. 때문에 강해지기 전까지는 참으면서 견제를 해야 한다.
‘일단은 쌍각에 계속 힘을 실어줘야 한다.’
쌍각은 맹주 직속 단체다. 한신과 인연을 깊게 가져간 것은 그런 이유였다. 수호세가가 멋대로 날뛰면 군림맹이란 단체가 굳건해질 수 없다.
수호세가라는 자들은 남궁세가를 제치고 차기 군림맹주 자리를 차지하려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다른 조직들은 맹주를 보필하고, 군림맹을 위해 활동을 하고 있었다면 세가들은 맹주 자리 자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맹주 남궁위가 은퇴했을 때도 수호세가들은 맹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크고 작은 암투를 벌였다. 불필요한 일들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세가 외의 조직들이 굳건해야 한다는 게 이서휘의 생각이었다.
머릿속을 정리하던 이서휘는 해가 완전히 진 무렵에야 머무를 객잔을 찾았다.
비교적 한적해 보이는 객잔에 짐을 풀고 그날은 휴식을 취했다. 저녁에는 국수를 간단히 먹고, 다소 번잡한 거리로 나와 사람들을 잠깐 구경했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무림인과 평범한 상인, 술에 취한 자와 여자를 찾는 자……. 다양한 군상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서휘와 일부러 몸을 부딪치고 눈을 부라리는 왈패도 있었고, 그 순간을 틈 타 대범하게 이서휘의 품에 손을 넣는 도둑도 있었다.
이서휘는 도둑의 손을 잡아 내공을 주입해 밀었다. 그러자 도둑과 왈패가 동시에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길가에 쓰러졌다.
그것 외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해야 할 일도 없는 저녁……. 이서휘는 모처럼 여유롭게 홀로 길을 거닐다가 객잔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이서휘가 장산(長山) 근처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길 끝에 추하객잔(秋河客棧)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던 이름이라 이서휘는 말에서 내려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이미 시끌벅적했다.
이서휘가 들어서자 일 층에서 술을 마시던 자들의 시선이 이서휘에게 일제히 모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몇 명은 이서휘를 보더니 ‘군림맹인가…….’하며 소속을 추측했다. 이서휘의 복장이 유난히 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장산을 오가는 자들의 복장과 분위기만 봐도 소속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이서휘가 목부터 축이려고 자리에 앉아서 일 층에 있는 자들을 쓱 훑었다. 무림인이 제법 많았다. 기도가 범상치 않은 자들이 의아할 정도로 많이 보였는데, 슬쩍 살펴보니 대다수가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갔다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협도왕(靑俠刀王) 단우혁(段祐赫)……?’
청협도왕 단우혁(段祐赫).
청협문(靑俠門)의 소문주이자 훗날 이서휘와 함께 사패라 불린 사나이…….
청색 장포를 걸치고 긴 머리를 뒤로 몰아 하얀 끈으로 묶은 미남이다. 청협문에 입문하면 최초로 흰 장포가 주어지고 서열이 올라갈수록 청색 띠가 늘어나는데 단우혁은 소문주라는 위치 때문에 온통 청색인 장포를 입고 있었다. 다만 현재는 청협문이 무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시기였다.
어쩐지 청협문의 무인들은 보이지 않고 단우혁 홀로 천으로 감싼 도 한 자루를 탁자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서휘도 다른 자들처럼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도에 눈길이 갔다. 천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내민 손잡이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 보도(寶刀)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 과거에도 눈이 멀쩡했던 군림맹 시절에 만나 겨뤄봤던 사이다. 그때는 단우혁의 보도에 이서휘의 검이 부러져 비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내 검이 부러지지 않겠지?’
이서휘는 문득 천으로 꽁꽁 싸맨 자신의 자강검을 봤다. 단우혁은 대충 엉성하게 도를 싸맨 티가 확연했다. 자신과 단우혁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이서휘는 웃음이 났다.
자세도 확연히 달랐다.
이서휘는 거의 정자세로 앉아 있고 단우혁은 오른발을 탁자 위에 올리고 왼쪽 팔꿈치로 기대어 앉아 가끔 오른손을 뻗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상만사 다 귀찮다고 항변하는 자세 같았다.
지금은 단우혁이 이서휘를 모르는 상태라 아는 척도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신기하고 또한 반가웠다.
이서휘는 단우혁의 젊었을 때 모습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났다.
‘저 거만함은 대체 몇 살 때부터였던 거냐…….’
이서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시선을 돌려서 조용히 차를 마셨다. 물끄러미 차를 바라보던 이서휘는 돌연히 술을 주문했다.
‘이거 술을 마셔야겠구만 오늘은…….’
잠시 후 이서휘는 거만한 옛 친구를 바라보며 술을 한 잔 마셨다.
☆ ☆ ☆
두 명의 낭인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단우혁에게 말을 던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혹시 합석할 수 있겠소?”
벌써 이게 몇 번째인가? 단우혁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추하객잔의 문이 열리더니 몸이 빼빼 마른 중년인이 들어와 객잔 안을 살폈다. 얼굴은 칙칙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고 손에는 뱀 여러 마리를 꼬아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괴상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표정이 자못 험악하고 눈빛에 살기가 가득해 누가 보아도 정파의 인물은 아니었다.
이서휘는 그 자가 등장하자마자 구석에 있던 손님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흉살이괴(凶殺二怪)]
[갑시다. 공연히 소란에 휘말리지 말고.]
[혼자인데 우리가 왜 가?]
[흉살이괴가 따로 다닌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소만…….]
[가세나.]
중얼거리던 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한 명이 일어나자 의자 끄는 소리가 늘어났다. 헛기침과 되도 않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추하객잔에 머물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어느새 점소이도 사라지고 객잔 안에는 이서휘와 단우혁, 흉살이괴 중 사괴(蛇怪)라 불리는 중년인만 남아 있었다.
사괴는 쭈글쭈글한 눈을 잠시 치켜뜨더니 이서휘를 힐끗 바라보다가, 지팡이를 끌면서 이동해 단우혁 앞에 섰다.
사괴가 단우혁 앞에 앉으려는 듯 장포를 걷자, 단우혁이 말했다.
“앉으라고 한 적 없다.”
“클클클…….”
사괴는 그 말에 냉소를 터뜨리며 앉아 말을 이었다.
“분에 넘치는 보도를 가지고 있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내 동생이 자네에게 보도를 팔라고 할 때 얌전히 넘겼어야지, 애송이야…….”
“흥.”
단우혁은 별 말 없이 심드렁하게 술을 마셨다. 그러자 사괴가 홀로 남아 있는 이서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넌 나가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불쌍한 놈……. 날 보고도 얌전히 있는 것을 보니 이 건방진 놈처럼 외지인인가 보군.”
그 말에 단우혁은 코를 후비기 시작했고, 이서휘도 대꾸를 하지 않고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흉살이괴?’
이서휘의 기억에는 없는 자들이다. 별호도 그렇거니와 사파의 고수들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작은 뱀이었다. 지붕의 틈새에 빠져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뱀이 스슥스슥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서휘는 창문과 대문, 기둥, 바닥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뱀들을 데려온 것일까. 이서휘가 보는 곳곳에 크고 작은 뱀들이 사방팔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 단우혁을 바라봤다. 단우혁도 삽시간에 등장한 뱀들을 봤는지 고개를 돌려 이서휘에게 말했다.
“초면에 물어볼 말은 아니지만, 혹시 뱀술 좋아하시오?”
이서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단우혁이 자신의 청룡도를 손에 쥐고, 이서휘가 자강검을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뽑았다. 동시에 객잔의 천장이 부서지면서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떨어졌다.
이서휘가 아직 땅을 밟지도 않은 흑의인 세 명을 향해 암연심검의 파를 시전해 무릎 여섯 개를 잘라 내었다.
푸아아아악……!
단우혁이 청룡도를 휘둘러 사괴와 어우러지면서 이서휘의 무위를 보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좋소이다!”
깡깡깡깡깡!
단우혁이 호쾌하게 도를 휘두르고, 사괴는 뱀 지팡이를 들어 막아냈다.
그때 와지끈 소리가 나면서 동서남북의 벽이 뜯겨 날아갔다. 흉살이괴의 부하들로 보이는 흑의인들이 멀리서 갈고리를 던져 벽을 뜯어내고 있고, 족히 천 마리는 넘어 보이는 뱀들이 흑의인들이 멘 포대기에서 흘러나와 추하객잔으로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다.
깡깡깡깡!
사괴의 지팡이를 막아내면서 단우혁이 쳐다보지도 않고 외쳤다.
“이름이 뭐요!”
“이서휘!”
“난 단우혁이라 하오.”
이서휘는 자강검으로 흑의인의 목을 날리고 속으로 대꾸했다.
‘알고 있다. 이놈아…….’
우측에서 바람을 가르면서 갈고리가 슉슉슉 날아왔다. 이서휘는 자강검으로 갈고리를 쳐내다가 깜짝 놀라서 공중제비를 돌아 탁자 위에 올라섰다. 어느새 뱀들이 바닥에 가득 차고 있었다.
이서휘가 마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이거 좀 뱀이 많은데 어째야겠소?”
뱀과 겨뤄본 적은 없는 이서휘다. 어쨌든 이서휘가 없었더라도 단우혁은 이 사태를 홀로 해결했었다는 이야기인데…….
단우혁이 대꾸했다.
“모르겠소이다! 일단 죽이고 봐야지!”
이서휘가 외쳤다.
“이 뱀들을 어떻게 다 죽인단 말이요?”
단우혁이 사괴의 지팡이를 쳐내면서 대꾸했다.
“이놈 지팡이가 문제요! 뱀을 모으는 것 같소이다!”
이서휘는 탁자들을 껑충껑충 밟으면서 뛰어가 단우혁과 어우러지고 있는 사괴를 향해 솟구쳤다.
☆ ☆ ☆
이서휘의 검이 사괴의 등을 노리고 뻗어 나갔다.
사괴는 이서휘가 다가오자 급히 뱀 지팡이의 머리를 단우혁을 향해 대고 기관 장치를 눌렀다. 그러자 지팡이 끝이 벌어지면서 몸이 알록달록한 독사가 입을 벌리면서 튀어 나왔다.
단우혁이 경신법을 써서 뒤로 물러나며 뱀의 머리를 날렸다. 그 사이 사괴가 몸을 돌려 이서휘의 검을 막아냈다.
깡!
이어서 이서휘와 사괴가 어우러지고, 단우혁은 청룡도를 우하단으로 늘어뜨린 채 몰려드는 흑의인들을 향해 달렸다. 이어서 푸악, 푸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흑의인들이 몸이 갈라졌다.
이서휘는 사괴의 지팡이를 막아내면서 뱀들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동작이 흐트러지자, 잠시 단우혁과 합류할 생각으로 내공을 실어 사괴의 지팡이를 후려쳤다.
쩌엉……!
이서휘의 몸이 사괴의 내공에 튕겨서 밀려났다. 이서휘는 사괴의 힘을 이용해 뒤로 솟구쳤다가, 검 끝으로 바닥을 찍고 내공을 주입해 더 멀리 튕겨 나가면서 단우혁이 있는 곳으로 착지했다. 사괴는 이서휘가 물러나는 수법을 보고 인상을 썼다.
‘제법이다.’
이서휘와 단우혁이 등을 맞대었다.
단우혁이 말했다.
“술로 담기엔 너무 많군.”
이서휘가 대꾸했다.
“뱀술은 내 취향도 아니라서.”
그때였다.
추하객잔 앞에 한 떼의 흑의인들이 늘어나 사괴쪽으로 합류했다.
그 선두에는 사슬낫을 가진 괴인이 이서휘와 단우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으로 보이고 칙칙한 긴 머리에는 군데군데 희한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흉살이괴 중 하나인 무괴(霧怪)라는 자로 강적을 만나면 안개를 터뜨려 적의 시야를 방해한 다음에 기다란 사슬낫을 휘둘러 적의 목을 베어내는 자였다.
사괴와 무괴가 나란히 서서, 몰려드는 뱀들에게 둘러싸인 이서휘와 단우혁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사괴가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둘러 뱀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무괴가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흐흐. 이제 수가 맞는군.”
단우혁이 성난 얼굴로 외쳤다.
“맞긴 뭐가 맞아 이 새끼들아! 이 뱀들하고 네 놈들 수하는 셈에 안 넣느냐?”
“킬킬킬킬.”
“흥! 수로 나오겠다 이거지?”
단우혁은 그제야 탐탁지 않은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늘로 쏘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쳇, 아버님에게 혼나겠군.”
푸슝…… 펑펑펑!
하늘에서 푸른 빛깔의 폭죽이 터졌다. 이서휘는 그걸 보고 황당한 얼굴로 외쳤다.
“진작에 쓰시지 그러셨소!”
단우혁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걱정 마시오. 우리 둘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소. 저놈들의 수하들이 도망갈까 부른 것이오.”
단우혁은 몰려드는 뱀을 흩어버리기 위해 내공을 가득 끌어올린 오른발을 땅에 찍었다.
쾅――!
좌라락 소리와 함께 기파가 뻗어 나가면서 뱀들이 배를 까뒤집었다. 단우혁이 말했다.
“갑시다!”
단우혁은 흉살이괴를 향해 뛰어가다가 뱀들이 뭉쳐 있는 곳에서 훌쩍 솟아서 호괘한 동작으로 사괴를 향해 청룡도를 내려쳤다.
콰직 소리와 함께 사괴의 지팡이가 부러지자, 사괴가 깜짝 놀라며 순식간에 예닐곱 장(丈)을 뛰어 물러났다. 사괴 주변으로 흑의인들이 우르르르 몰려왔다.
이서휘가 뒤따라 붙어서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베었다. 푸아아악 소리가 나면서 흑의인들이 갈라졌다.
단우혁이 다시 경공을 펼치면서 사괴를 추격했다. 그때 달리는 단우혁 앞에 무괴의 사슬낫이 뻗어왔다.
휙……!
챙!
이서휘가 자강검으로 사슬낫을 쳐내면서 방향을 틀어 무괴에게 달려 들었다. 무괴가 경신법으로 뒤로 물러나고 또 다시 흑의인들이 좌우에서 몰려나왔다.
이서휘가 암연심검의 파를 시전에 세 명의 목을 동시에 날려버렸다.
푸악……!
단우혁이 사괴와 어우러지고 이서휘가 무괴와 어우러졌다.
이서휘와 단우혁은 약속을 한 것처럼 뱀이 모여 있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괴와 무괴를 몰아붙이면서 이동했다.
☆ ☆ ☆
무괴가 사슬낫을 직선으로 내뻗었다.
이서휘가 자세를 낮췄다가 자강검으로 사슬낫의 목을 쳐냈다.
챙!
낫이 휘리리릭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무괴의 안색이 굳어지면서 낫이 떨어진 쇠사슬을 빙빙 돌리다가 팔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앵!
이서휘가 천천히 다가가다가 무괴가 쇠사슬을 던지는 순간 암행표를 시전해 훌쩍 피하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뻗어 나갔던 쇠사슬이 부웅 소리를 내며 이서휘의 뒤통수로 다가오자, 이서휘는 바닥을 굴러 자강검으로 무괴의 무릎을 베었다.
무괴가 훌쩍 솟아서 피하자 이서휘가 품에서 흑비도를 두 개 꺼내 하늘로 던졌다.
휙휙 날아간 흑비도는 쇠사슬에 하나가 튕겨 나가고, 다른 하나가 무괴의 어깨에 푹 소리와 함께 박혔다.
이서휘가 전력으로 달렸다.
타다다다닥!
달려오는 이서휘를 보며, 무괴가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둥그런 구슬 모양의 연막탄을 꺼내 던졌다.
파바방! 소리와 함께 연막탄이 연달아 터지면서 안개가 자욱하게 퍼졌다. 그 모습을 본 단우혁이 사괴와 겨루면서 외쳤다.
“조심하시오!”
이서휘는 눈앞에 다가온 안개가 퍼지기 전에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후 뒤로 물러나려다 주춤했다. 뒤에는 뱀들이 있다.
‘독무(毒霧)인가? 아니군…….’
무괴는 시야만 가리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독성이 없는 연막탄을 던졌다. 혹은 본래부터 독무탄은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어쨌든 이서휘에겐 더 유리했다. 이 정도 안개는 이서휘에게 밝은 대낮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서휘는 안개 속에서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겼다.
무괴가 공격을 펼치려는지, 서서히 쇠사슬을 돌리기 시작했다.
휘잉…… 휘잉…… 휘잉…….
이서휘는 암행표를 시전해 쇠사슬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거침없이 달렸다.
‘뭐냐?’
무괴는 안개를 터뜨렸는데 이서휘가 속도를 멈추지 않고 달려오자 적잖이 당황했다. 안개 사이로 거뭇한 그림자가 보이자마자 쇠사슬을 던진 무괴.
휘이이익!
이서휘는 안개 속에서 뻗어오는 쇠사슬을 고갯짓으로만 피하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무괴의 배에 자강검을 찔렀다.
푸욱……!
안개를 터뜨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무괴가 방심을 하지 않았을 터. 안개를 거의 무시하고 달려오는 이서휘의 몸짓에 당황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깜짝 놀란 무괴가 왼손으로 자강검을 붙잡았으나 이미 늦었다. 이서휘는 검을 뽑아내자마자 무괴의 목을 날렸다.
파앙!
무괴는 죽는 순간까지…… 이서휘가 안개 속에서 왜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지 깨닫지 못했으리라.
이서휘는 자강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안개 너머에서 겨루고 있는 단우혁과 사괴 쪽을 바라봤다.
그때 한 떼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서 챙챙챙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백의를 입은 무인 십여 명이 등장해 도망가는 흑의인들을 하나하나 쫓아가 척살한 후에 되돌아왔다. 그 중 한 명이 단우혁에게 달려와 말했다.
“소문주께선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사괴는 지팡이가 부러진 이후로 단우혁에게 밀리고 있었다. 청협문도들은 섣불리 소문주에게 합류하지 않고 사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을 몰아 빙 둘러쌌다.
이서휘도 자강검을 다시 꽂아 넣고 단우혁에게 다가갔다.
깡깡깡!
사괴는 두 동강이 난 지팡이를 양손에 쥐고 단우혁의 청룡도를 막아내고 있었다. 청협문의 무인들이 사방을 포위하자 사괴의 손발이 더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까앙! 까앙!
사괴의 지팡이가 청룡도에 날아갔다. 빈 손이 된 사괴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단우혁의 도가 가차 없이 부웅 소리를 내자, 사괴의 목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자 청협문도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단우혁에게 예를 올렸다.
“소문주를 뵙습니다.”
“소문주를 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단우혁이 도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리며 대꾸했다.
“괜찮다. 아버님은?”
“장로님과 홍사방(紅蛇幫)으로…….”
“성격도 급하시지. 가자.”
“네.”
단우혁은 급하게 수하 한 명의 말에 올라타더니 이서휘를 향해 말했다.
“함께 가시겠소?”
“어디 가시오?”
“문주께서 홍사방을 부수러 가신 듯하오.”
이서휘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돕고 싶으나 처리해야 할 임무가 있어서…… 아쉽소이다.”
“아쉽군. 청성아…….”
“네.”
“내 벗에게 말 한 필을 내다오. 한 명은 걸어서 가든지 다른 자와 함께 타라.”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이 타고 온 말은 이미 사라진 터였다. 이서휘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단우혁이 말했다.
“후후,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소. 받지 않으면 내 벗이 아니요.”
단우혁의 성격이 그대로 나왔다. 이서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감사히 쓰겠소.”
단우혁은 말을 한 필 내주는 것을 바라보다, 묘한 눈빛으로 이서휘에게 말했다.
“소속이 어디시오?”
“군림맹이외다.”
“군림맹.”
단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린 청협문이오. 앞으로 우리 이름을 자주 듣게 되실 거요.”
“후후후.”
“어째 느낌이…… 우리는 또 만날 것 같구려. 그때까지…….”
단우혁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이서휘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봅시다.”
두 사람의 눈빛이 진하게 부딪쳤다. 이서휘와 단우혁이 그 자리에서 말을 몰아 추하객잔의 좌우로 말을 달려 사라졌다.
추하객잔 주변에 있던 뱀들이 꿀렁대더니 목이 없는 시체들을 지나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