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4화 (4/43)

<4장. 출신>

이서휘는 천뢰각주 한신을 찾아갔으나 그도 부재중이라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서휘는 술이라도 한잔 살 겸, 저녁에나 천뢰각주 한신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연무장에서는 이건영의 통솔로 대원들이 수련하고 있었다. 이서휘가 다가오자, 대원들이 휴식을 기대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이서휘는 대원들의 눈빛을 무시하고 이건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계속.”

이서휘는 팔짱을 끼고 대원들을 노려봤다. 전날 질풍검대 대원들이 하도 웃고 떠들어서 오늘은 이건영에게 일부러 혹독하게 연습하라고 지시해둔 터였다. 대원들이 저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쉬었다 하자는 말이 저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으나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중지……. 오늘 왜 이렇게 분위기가 산만하냐. 자꾸 이러면 오늘 나랑 밤늦게까지 함께 하든가.”

대원들이 합창했다.

“아닙니다!”

“다시.”

이서휘의 말에 대원들이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이건영을 따라 검을 내질렀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연무장으로 들어오며 빈정거렸다.

“이야, 여기가 바로 비무전에서 우승하셨다는 이서휘가 속한 질풍검대인가? 그런데 어째 영 비실비실한 풋내기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는 거 같냐. 도저히 못 봐주겠네. 안 그러냐, 이서휘? 애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죽겠지, 지금?”

이서휘가 고개를 돌려보니 수염이 꺼칠하고 머리를 지저분하게 기른 거한(巨漢)이 연무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화룡검대의 또 다른 부대주인 유자광(柳子光)이라는 자였다.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시간에 나타난 셈이다.

이서휘가 보니 유자광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했다. 무슨 일로 온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서휘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유자광은 부대주들 중에서 독고극과 함께 고참 축에 속한다. 유자광이 말했다.

“빨리 복귀한다고 애를 썼는데 운이 없는지 좀 늦었구만. 그거냐? 자강검이라는 게.”

유자광이 턱 짓으로 이서휘가 들고 있는 자강검을 가리켰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자광의 마음이 어떨지는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이서휘다. 임무를 떠났던 부대주들은 비무전에 참가조차 할 수 없었으니 불만이 쌓일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검대가 훈련하고 있는 곳에 와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자광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웃었다.

“끌끌, 이런 좆같은 일이 다 생기다니. 누구는 자강검도 얻고 주목도 받고 누구는 씨벌……. 어? 소천이나 독고 놈이 가지고 간 것도 아니고 네가? 이게 뭔 일인지 설명 좀 부탁한다.”

“흐음, 지금 일과(日課) 중이니 조금 이따 얘기하시죠.”

“그래? 암, 그래야지. 일과 봐라. 대신 검이나 좀 구경하자. 줘봐라. 네 일과 끝나면 돌려주마.”

“유 형…….”

“누가 네 형이야?”

완벽한 시비다. 이서휘가 화를 참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따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집무실에서 고성을 들은 장시우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뭔 소란이야?”

장시우의 작은 눈이 더욱 가늘어져 있었다. 장시우는 화룡검대 유자광 부대주를 보자마자 왜 시비가 벌어졌는지 금방 알 것 같았다.

장시우가 말했다.

“유자광.”

“장 대주님, 오랜만이오.”

장시우가 인상을 그으며 대꾸했다.

“너 뭐하냐?”

“예? 아니, 그냥 이 부대주 검 좀 구경하러 왔수다. 뭐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도 한번 봐야 할 것 아니요? 가뜩이나 억울한데…….”

유자광의 말투가 장시우의 신경을 제대로 긁고 있었다. 이서휘는 장시우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 크게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장시우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평소에도 검대끼리의 관계나 다른 조직과의 융화를 중시하는 장시우다.

장시우가 숨을 길게 내쉰 후 말했다.

“후우우우. 건영아.”

“네.”

“대원들 데리고 공용 연무장으로 옮겨서 마저 해라.”

“알겠습니다.”

이건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대원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연무장에는 이서휘와 장시우, 유자광이 남았다.

장시우가 보기 드물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유자광, 이 새끼야. 그동안 고참 대접을 좀 해줬더니 나를 아주 개차반으로 보는구만?”

장시우의 말에도 유자광은 쌓인 게 많았는지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하이고 참 대주님도……. 새끼라뇨? 하여간 그런 거 아닙니다.”

“하여간 화룡검대는 지들이 무슨 귀족인 줄 아나,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니네 대주 어디있냐?”

“니네 대주라뇨? 장 대주님보다 훨씬 선배십니다. 말씀 거 좀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알만한 분이 왜 이러시나.”

기가 찬 장시우가 드디어 웃으며 유자광에게 다가갔다. 장시우가 손을 번쩍 들자, 유자광이 인상을 확 그었다. 그러나 장시우는 유자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지나갔다.

“그래 뭐, 부대주들 일은 부대주끼리 해결해라. 눈 감아 주마.”

“예예, 그러십쇼.”

무슨 생각인지, 장시우가 유자광을 그냥 지나쳐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런데 방향이 화룡검대 쪽이 아니라 대원들을 보낸 공용 연무장 쪽이었다. 이서휘가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장시우가 갑자기 품에서 묵직한 동전 주머니를 꺼내 이서휘더러 보란 듯이 흔들었다.

깜짝 놀란 이서휘.

‘어? 형님이 나한테 걸었었구만?’

이서휘는 황당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장시우를 불렀다.

“대주님?”

그러나 장시우는 대꾸를 하지 않고 엄지를 척 하고 올리면서 걸어갔다. 유자광이 고개를 획 돌리자 장시우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둥 휘적휘적 걸어서 공용 연무장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은 대원들 데리고 한 턱 쏠 터이니, 유자광은 알아서 하란 뜻이리라.

‘와, 저 너구리 같은 형님!’

이서휘가 고개를 돌리니 유자광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었다.

유자광이 말했다.

“야…… 이서휘.”

“…….”

“네가 양심이 있으면 니네 검대 설진우 새끼는 제외하더라도 나랑 곽진(郭震)이랑은 한 판 붙어야지. 그러냐, 안 그러냐.”

질풍검대 설진우, 비룡검대 곽진, 화룡검대 유자광 세 명은 이번 비무전에 참가하지 못한 부대주들이다.

유자광의 물음에 이서휘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럽시다.”

이서휘가 생각하는 군림맹은 이런 방향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자들을 실력으로 눌러줘야 한다. 무림의 압축판인 군림맹이 아니던가.

유자광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이서휘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럽시다? 하아. 참 세상 씨벌…….”

이서휘가 빙그레 웃었다.

‘자강검도 자강검이지만 새로운 검대를 만들면 대주 자리 놓칠까 봐 저러는 거였구만. 그런데 어쩌냐? 새로운 검대는 나중 일인데…….’

이서휘는 몸을 풀 듯이 어깨와 목을 돌려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눈과 귀는 연무장 주변을 살폈다. 천천히 연무장을 크게 돌면서 몸을 풀었다.

‘누가 봐도 뭐 이젠 크게 상관 없겠지. 그나저나 자강검도 새로 얻었겠다…… 익숙해지려면 비무가 최고다.’

이서휘는 마지막으로 유자광에게 기회를 줬다.

“유 형, 자강검은 제가 노력하여 잘 쓸 터이니, 겨루고 그러는 건 관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개소리 말고 검이나 뽑아라.”

이서휘는 병장기가 꽂힌 곳으로 걸어가서 목검을 툭툭 치며 대꾸했다.

“그럼 목검은 어떻겠습니까?”

“이런 미친 새끼가 아주 오늘 제대로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염불 외는 소리는 너네 검대가 절에 갈 때나 하고 좋은 말로 할 때 자강검으로 해라.”

“그러지요.”

‘그래, 충분하다. 이제.’

이서휘가 자세를 돌려 유자광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유자광이 미간을 좁혔다.

“뽑아.”

“뽑으세요. 요새 발검을 연습하고 있어서 제가 좀 빠릅니다.”

“클클, 가지가지 하네.”

유자광이 검을 뽑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서휘가 가만히 있자 유자광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검을 휘둘렀다. 유자광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이 새끼가!”

채앵!

이서휘는 왼손을 얹은 검집에 내공을 살짝 불어넣고 있었다가 그대로 발검을 하면서 쐐앵! 소리와 함께 유자광의 검을 튕겨냈다. 눈이 커진 유자광이 초식을 내뻗으려 하는데 또 다시 이서휘의 검이 날아와 방향을 틀었다.

채앵!

유자광이 자세를 잡고 물러났다. 이서휘가 암행표로 거리를 확 좁힌 다음 검을 찔러 넣었다. 유자광이 반격하려고 하자, 이서휘는 방향을 비틀어 다시 쳐냈다. 유자광이 초식을 펼칠 수도 없게 하려는 의도. 농락당한다는 것을 깨달은 유자광이 갑자기 내공을 끌어올리며 연달아 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챙, 챙, 챙챙챙! 파앙! 탁!

이서휘가 두 번은 유자광의 초식이 뻗어 오는 순간에 쳐내고 세 번은 공격을 퍼부었다.

유자광이 검을 세워 막아내자, 이서휘는 마지막 순간에 유자광의 검을 날려버렸다.

탁 소리는 유자광의 검이 날아갈 때 이서휘가 검집에 자강검을 꼽는 소리였다.

유자광이 이서휘를 바라봤다.

‘백리소천과 접전이었다고 들었는데 이건 뭐야?’

이서휘도 유자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사마초를 목검으로 팼을 때의 결과보다 어쩌면 더 잔인한 순간이었다. 애초에 독고극과 백리소천에 비해서도 약한 유자광이다. 유자광은 질풍검대가 우승했다는 걸 믿기 싫었을 뿐이다. 직접 와서 부딪쳐 봐야 답답한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걸 알기에 이서휘도 제대로 상대해줬다.

이서휘가 말했다.

“더 할 겁니까?”

유자광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주운 유자광이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이서휘에게 달려 들었다.

이서휘는 두 발은 땅에 붙인 채로 발검과 함께 암연심검의 파를 구사해 또 다시 장검을 날려 버렸다.

유자광의 장검이 핑그르르르 돌면서 땅에 떨어졌다. 이서휘가 유자광의 검을 부러뜨리기 싫어 일부러 밀어친 것이었다.

유자광이 대꾸를 하지 않자, 이서휘가 납검을 한 후 돌아섰다.

이서휘가 등을 돌리자 유자광이 이번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 들었다.

이서휘도 참을 만큼 참았다.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장력을 피하고, 오른손으로 멱살을 잡아 유자광을 땅에 꽂았다. 쾅 소리와 함께 유자광이 끄윽 소리를 내면서 잠시 몸을 비틀었다.

그때였다.

“이건 뭐야? 번외 비무전인가? 심판이라도 봐주랴?”

천뢰각주 한신이 비무장으로 들어오며 쓰러진 유자광에게 다가갔다. 유자광이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한 각주님…….”

한신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쓰러진 유자광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자광아 이번 임무,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내 나중에 술 한잔 사마.”

“네……?”

한신은 유자광의 등에 묻은 먼지까지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내 잠깐 이서휘랑 이야기하러 왔으니, 둘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고……. 가자, 이서휘.”

한신이 고갯짓으로 이서휘에게 빨리 따라오라는 듯 까딱였다.

이서휘도 유자광에게 별 감정 없이 말했다.

“유 형, 또 봅시다.”

유자광이 연무장에 멀뚱멀뚱하니 서 있고, 이서휘와 한신은 휘적휘적 걸어서 연무장을 벗어났다.

이서휘와 한신은 군림맹을 빠져나와 외곽 담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신이 말했다.

“……검대로 임무가 여러 개 전달되더구나. 들은 거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네가 말한 대로 해서 도박은 이겼다만,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너를 우승자로 점찍은 사람이…….”

“아마 저희 대주님일 겁니다.”

“장 대주가?”

“네, 저도 몰랐습니다. 백리소천에게 건 줄 알았는데……. 후후.”

한신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껄껄대며 웃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이서휘가 장시우에게 했던 것처럼 검을 반쯤 뽑아 내공을 주입했다. 희미하게 자색 빛이 감돌았다.

한신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보자.”

이서휘가 검을 넘기자 한신이 스릉 소리와 함께 검을 뽑더니 자신의 내공을 주입했다. 이서휘가 잡았을 때보다 진한 자색 빛이 감돌았다.

이서휘가 말했다.

“자강검의 내력을 좀 아십니까?”

한신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런 의미였나?”

“네?”

“안 그래도 자강검을 줘놓고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좀 알아봤다. 보고 관리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천라각주가 문서를 찾아서 보여주더군.”

한신이 품에서 한 장의 도감을 꺼내 이서휘에게 건넸다. 이서휘가 펼쳐보자 자강검의 그림 밑에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강검(紫強劍)

자색이 아니면 쓸모가 없으며, 자색이 차오르면 능히 날 수 있다.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부자무용(不紫無用)은 지금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내공이 강력해지면 만자능비(滿紫能飛)라……? 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검기를 쏜다는 것인가……?”

“그 밑에도 읽어봐라.”

“네.”

이서휘가 밑을 보니 조금 작은 글씨로 무어라 적혀 있었다.

나 신정후는 자강검을 얻었지만 능히 쓰진 못하였다. 내력을 알지 못해 자세히 적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은퇴와 함께 자강검을 보고에 기증하니 훗날 검대의 후배가 사용하길 바란다. 죽어가던 사람을 구하려 도왔다가 얻은 검이다. 그 자가 말하길 자신은 월하탕자(月下蕩子)라는 도둑이라 밝혔으나 주변에 물어도 아는 자가 없었다. 부자무용(不紫無用) 만자능비(滿紫能飛)라 중얼거렸는데, 그 자신의 무공은 일류에도 못 미쳐 쓸모가 없다 하더라…….

이서휘와 한신의 시선이 얽혔다.

한신이 말했다.

“신정후라는 선배도 무림을 진동시킬만한 고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습니까?”

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선배도 자강검을 제대로 활용 못했을 수도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뭐 내가 봤을 때는 검객들이 사용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는 검이다. 연습해서 네가 한 번 날아봐라. 검이 날든, 네가 날든. 만자능비(滿紫能飛)라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서휘야,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네.”

“유자광 뿐만이 아니다. 넌 앞으로 임무를 나가야 하지 않느냐. 자강검 정도면 꽤 시선이 모일 게다.”

“네.”

“조심해라. 그래도 군림맹의 기대주에게 보검이 주어졌는데 제대로 다뤄보기도 전에 뺏기거나 죽는다면 군림맹의 망신이 아니냐?”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혹시나 새로운 걸 알게 되면 곧 알려주겠다. 그리고 곧 천뢰각에서 비도를 전달할 거다. 임무 나가게 되면 챙겨가라.”

“감사합니다.”

이서휘는 고개를 숙였다. 한신은 업무가 바쁜지 그대로 손을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술은 다녀와서 하자꾸나. 돈도 땄으니 내가 한 턱 쏘마.”

“네.”

두 사람은 질풍검대의 외곽을 한 바퀴 돌며 이야기 한 셈이었다. 다시 이서휘와 한신은 군림맹으로 들어가 천뢰각과 질풍검대로 각자 발걸음을 옮기는데 조금 걷던 이서휘는 어정쩡하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그녀, 백리연이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서휘가 백리연을 바라봤다. 딱히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없었으나 일단 너무 예쁘다 보니 과거에는 말문이 자주 막혔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이서휘가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런 모습 때문에 차였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리라. 지금은 다를까? 모를 일이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오랜만이네?”

백리연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비무전 이후에 여러 사람들이 물어보더군요. 이서휘가 고백하지 않았냐고요.”

“아, 도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알아요. 누가 퍼트렸는지.”

“음…… 누구지?”

“오라버니가 목검으로 때린 사람?”

“그놈인가 역시.”

그 말을 끝으로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이서휘가 백리연을 멀뚱히 바라봤다.

‘아, 어색하다.’

이서휘는 또 보자, 하고 지나치려는데 백리연의 분위기는 어쩐지 그게 아니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음…… 소천이는 괜찮고?”

백리연이 대꾸했다.

“네, 덕분에요. 자강검도 놓치고 가주님한테도 혼나고 화룡검대에서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분위기가 답답해서 옆에 있기도 힘들어요.”

“아, 미안하네.”

“미안하면 차나 한 잔 사세요.”

“뭐? 아, 뭐가 아니라. 그래.”

이서휘가 눈을 껌벅이자 백리연이 말을 이었다.

“두 시진 후에 화양다루에서 봬요.”

“어, 그러자.”

백리연이 별다른 표정 없이 이서휘를 지나쳐 걸어갔다. 워낙 코가 예민한 이서휘라 백리연이 남긴 기분 좋은 향이 코 끝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멍해지는 이서휘.

‘화양다루가 어디였지? 그나저나…….’

이서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백리연이랑 차를 마시게 되다니……. 전에는 없던 일이다. 누가 보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다가 차였다는 소문을 없앨 수 있는 기회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백리세가가 혹시 자강검에 대해 아는지를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서휘는 잠시 자괴감에 빠졌다.

오로지 검…… 만을 생각하다가 머릿속이 이제는 검과 백리연으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생각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이자 길을 걷던 이서휘는 자신의 이마를 한 대 때렸다.

‘차 한 잔 마시는 거에 뭔 의미를 이렇게 많이 생각하냐…….’

이서휘는 다시 장시우를 찾아갔다.

☆ ☆ ☆

장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아직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유자광은?”

“별말 없을 겁니다.”

“예상은 했다만 그놈이 난리를 안 치면 누가 나서겠느냐. 설마 곽진하고도 붙어야 하냐?”

“곽진은 그럴 녀석이 아닙니다.”

“다행이고 그럼. 또 누가 있지?”

“또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걱정 마십쇼. 아, 한 각주님이 그러시는데 보고 관리자는 자강검에 대해 모른다는군요. 대신 이것을 주셨습니다.”

이서휘가 도감을 넘기자 장시우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펼쳐봤다.

“오호, 이게 뭐냐?

잠시 도감을 살펴보던 장시우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요약하면 좋은 검이라는 거냐? 내공이 문제네.”

“네.”

“네 내공으로는 어림이 없으니 형에게 파는 것이 어떠냐? 같은 질풍검대라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요?”

“한 판 붙어서 정하는 건 어때?”

“대주 자리 놓고 하죠 그럼.”

“와, 많이 컸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임무는 어떤 겁니까?”

“네가 일단 대완에 가서 설진우를 지원해라. 청양 쪽 임무는 내가 다녀오마. 대원들 모였을 때 다시 설명해주마.”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형님, 대완에서 일이 처리되면 휴가 좀 사용하고 싶습니다.”

설진우가 임무를 수행 중인 대완은 구화산(九華山) 근처에 있었는데 대완에서 하루쯤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이서휘가 눈을 잃었던 곳이다. 대완에 가는 김에 미리 답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 이서휘의 생각이었다.

장시우가 물었다.

“왜?”

“만년설삼(萬年雪蔘)도 먹고 영약도 먹고 유람 좀 하다가 은거기인(隱居畸人)에게 무공도 좀 전수 받고 대도(大盜)들이 찾고 있는 보고(寶庫)에도 좀 들렀다가 오겠습니다.”

이런 농담은 장시우가 시작했던 것이라 반응이 시큰둥했다. 장시우가 대꾸했다.

“만년설삼과 은거기인이 죄다 구화산에 있었구나, 바쁘네. 여자는 안 만나냐?”

“네?”

“뭐야? 왜 웃어.”

“만납니다.”

“그러시겠지.”

두 사람은 헛소리를 주고받으면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끝내 진지했다. 먼저 궁금해하는 자가 지는 거다. 이서휘와 장시우가 서로를 노려봤다.

장시우가 끝내 침묵을 깼다.

“휴가는 뭐하러 쓰게?”

“죽일 놈이 한 명 있어서요.”

“그렇군. 자, 그럼 오늘은 이따 술이나 한잔 하자.”

“저 약속 있습니다.”

“왜? 백리연이라도 만나느냐?”

장시우는 농담이었는데 이서휘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어흠…….”

이서휘가 일어서자 장시우가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해라. 오늘 거하게 한잔 쏴야지.”

“그러셔야죠. 누구 덕에 번 돈인데.”

이서휘가 장시우의 집무실을 나가는데 장시우가 궁금하다는 듯이 다시 외쳤다.

“야! 누구 만나냐니까?”

“백리연, 만나러 갑니다.”

장시우가 혀를 끌끌 찼다.

“놀고 있네.”

이서휘가 피식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이서휘와 백리연이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화양다루 이층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아 차를 마셨다.

백리연은 군림맹의 많은 남자들이 바라는 미인이다. 바라만 봐도 웃음 짓는 남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 미모 덕분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았던 백리연이다.

지금도 백리연의 얼굴엔 기쁨보다 근심이 많아 보였다.

과거에도 그랬다. 가주인 백리연의 아버지는 방계(傍系)인 백리소천에게 세가를 물려줬고, 백리연은 무림에서 잊혔다.

어쩌면 이때쯤이 아닐까? 백리한이 백리소천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나서 백리연이 무림을 떠나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것이…….

때문에 이서휘는 백리연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백리연은 이서휘의 얼굴을 보는 시간 보다 쓸쓸한 눈빛으로 자강검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백리연이 말했다.

“소천 오라버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떤?”

“아버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대성하면 자강검만 한 검이 없을 거라고…….”

“대성하면 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그런가요.”

그 말을 끝으로 백리연이 다시 침울하게 있자, 이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을 실수했나?’

이서휘가 무언가 말을 이으려다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무리가 요란스럽게 이층으로 올라오다가 이서휘와 백리연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백리연과 이서휘를 알아보고 빈정거렸다.

“비무전 우승자 이서휘와 백리연이라……. 기가 막히지 않냐? 우승했으니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건가? 재도전이야?”

“거 정말 어마어마한 무용담이네 그려…….”

“후후후…….”

“비켜봐! 누가 있다고?”

“백리연하고 이서휘가 있다니까.”

군림맹 수호세가의 공자들이 올라와 백리연과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날 천뢰각주 한신이 세가의 공자들과 어울려서 술이라도 마시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무리였다.

그때, 다른 공자들을 이리저리 밀치며 한 남자가 뚱한 표정의 얼굴을 드러냈다.

사마세가의 후계자인 사마준보였다.

사마준보는 이서휘가 목검으로 혼을 내줬던 사마초의 종형(從兄)이기도 했다. 사마준보는 한껏 불쾌한 표정으로 이서휘와 백리연을 번갈아 바라봤다. 마치 너희 둘이 왜 여기 있냐는 표정이었다.

사마준보가 말했다.

“연아, 여기서 뭐해? 이 녀석은 왜 여기 있고.”

이서휘가 그 사이 무리를 둘러보니 구양가, 모용가, 사마가, 독고가의 공자들이 모두 모여 있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분을 짙게 바른 여인들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백리가는 백리소천이 현재 두문불출(杜門不出)이고, 남궁가는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라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이들은 군림맹 수호세가 가주의 아들들로 군림맹 무인들에게 가장 골치 아픈 자들이기도 했다. 검대나 조직에 속하지도 않으면서도 누릴 것은 다 누리고 다니는 한량들이랄까. 수호세가 가주들은 무공이라도 뛰어났는데 이서휘가 검제로 활동하던 시절에 여기 있던 후계자란 놈들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이서휘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사마준보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라…….”

이서휘에겐 달갑지 않은 자들이다. 저들이 군림맹이 무너질 때 무엇을 했었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대부분 자신들의 세가로 돌아가 살아남을 궁리만 하던 자들이다. 차라리 검대에 지원한 방계의 인물이나, 세가 출신의 부대주들은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문제는 저런 자들이다. 혜택을 누리기만 하면서 사는 자들이다.

이서휘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맴돌았다.

‘쓰레기들이…… 누구한테 이 녀석, 저 녀석이야.’

“서휘 오라버니?”

이서휘와 백리연이 눈빛이 마주쳤다. 백리연은 이서휘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해 있자, 저도 모르게 이서휘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가요, 오라버니. 번잡한 건 싫어서. 오라버니!”

“어?”

“가자고요. 차도 다 마셨는데…….”

“아, 그래.”

그런데 그냥 보내줄 리 없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이서휘의 마음도 모르고 불을 지르는 자가 있다. 사마세가의 후계자인 사마준보다. 그가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어이, 이서휘 우승자 나리, 검이나 한 번 구경하자. 너희도 한 번 보고 싶지 않냐?”

“궁금하긴 하네,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 정도 검은 세가에 다들 두 세 자루씩은 있지 않나?”

“놀고 있네. 미친놈이. 자강검이 흔한 검이냐?”

“다 시끄러워!”

사마준보가 농을 치는 다른 공자들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백리연을 힐끗 봤다. 그 눈빛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백리연! 네가 왜 이놈과 함께 있느냐!’

그 뿐일까. 부대주 비무전에서 보기 좋게 자신의 종제인 사마초를 목검으로 팼던 놈이 이서휘다. 이서휘만 있었더라도 시비를 걸 판이었는데 백리연과 함께라니……! 사마준보는 이서휘를 어떻게든 망신을 주고 싶었다.

이서휘가 쓰윽 살펴보니 다른 공자들은 대부분 사마준보 편에 설 사람이다. 어쩌면 이중에도 백리연을 좋아하는 자가 더 있어, 사마준보의 망신을 바라고 잠자코 있을 녀석도 있으리라. 이서휘가 세가 공자들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가 백리연을 쳐다보는지를…….

……헌데 전부 백리연을 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핫핫핫…….”

“뭐야? 왜 웃어?”

이서휘가 이마를 붙잡고 큭큭 대다가 말했다. 괜히 다른 부대주들에게 괜히 미안해지는 이서휘다.

‘부대주 녀석들은 순수하기라도 하지…….’

이서휘가 일어나며 말했다.

“좋은 시간 보내시오……. 자리 피해 줄 테니. 가자, 연아.”

“네.”

연아라는 말에 사마준보의 이마가 불끈했다.

“부대주 새끼가 건방지게! 검 보여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사마초 녀석을 꺾었다고 나까지 물로 보는 건 아니겠지? 이서휘.”

백리연이 나섰다.

“오라버니들 싸우지 마세요.”

“연아, 넌 이쪽으로 와라. 자꾸 거기서 이서휘 편들지 말고.”

구양세가의 구양섭이 손을 흔들며 백리연을 불렀다. 그러자 한 여인이 구양섭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오라고 그래요? 저희끼리 차 마시러 온 건데…….”

저렇게만 말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속이 뻔한 말을 덧붙였다.

“……군림맹 절세미녀라 해서 기대 많이 했는데…… 난 잘 모르겠는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던가. 이게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일까. 그 말에는 동의 못 하겠다는 듯 다른 공자들도 여인을 보며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구양섭만큼은 여인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확연했다.

이서휘가 그 작태를 보며 혀를 찼다.

‘기가 찬다. 기가 차……. 이 새끼들아.’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세가의 공자들을 혼내 봤자, 좋을 일도 없고 해서 이서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흐음…… 검을 보여달라는 게 나와 친분이 있고 순수한 의도로 보자는 거면 건네겠소만 이렇게 무례하게…….”

사마준보가 발끈하며 다른 공자들을 쳐다보며 말을 끊었다.

“무례? 야, 무례란다. 말투가 왜 저러냐?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어디 뭐 무당산에서 도인 한 명 오셨나 했네. 야이 새끼야 무례는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무례고 인마!”

“와하하하하!”

“비무전 우승했다고 아주 기고만장이네!”

몇 명은 웃음을 터트리거나 빈정거렸고, 몇 명은 이서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부 세가의 가주들은 세가 사람들에게 늘 군림맹의 무인들을 존중하라고 배운 터였으나,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사마준보인지라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이서휘는 혹시 이 자리를 백리연이 유도한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백리연의 표정엔 사마준보를 향해 약간의 경멸과 불쾌함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기분이 상한 이서휘가 말했다.

“준보야.”

“뭐? 준보야?”

“우리는 그간 통성명도 없었는데 너는 반말하고 나는 존댓말을 하면 이상하지 않겠냐. 네가 내 상관도 아니고…….”

이서휘의 일리 있는 말에 사마준보의 인상이 일그러지고 공자 일행이 단체로 조용해졌다.

“이서휘, 이 새끼가…….”

이서휘는 갑자기 장시우에게 잔뜩 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휘의 속에서는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철없는 아이를 혼내듯 말을 이었다.

“준보야, 검대 부대주가 우스우냐? 너희 사마세가가 군림맹 수호세가라는 건 알겠는데 너랑 나랑 상하관계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동료일 뿐이다. 그런데도 검 하나 때문인지 네가 좋아하는 백리연 때문인지……. 이런 식으로…….”

“이런 개새끼가 어디서 훈계질이야?”

다짜고짜 사마준보의 일장이 바람을 가르며 이서휘의 얼굴을 향해 뻗어 나왔다.

이서휘가 의자를 하나 발로 차서 사마준보에게 날리자, 사마준보의 일장이 의자를 박살냈다.

그 사이 이서휘는 백리연의 손을 잡고 이 층에서 뛰어 내렸다.

무엇보다 이층은 공간이 좁았다.

사마준보만 다치면 모르겠는데 백리연이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리연은 저도 모르게 이서휘의 손을 잡고 일 층으로 내려섰다.

이층 난간으로 공자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그 앞에 사마준보가 성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봤다.

“이서휘, 거기 서라. 그…… 그 손은 뭐야? 안 놔?”

이서휘가 그제야 백리연의 손을 놨다. 백리연은 어쩐지 아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백리연이 살짝 눈을 흘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어쩔 거예요? 준보 오라버니가 성격이 불 같은데.”

“넌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거야?”

“준보 오라버니한테 이러는 사람 처음 봐서요. 울적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좀 사라지는데요?”

백리연이 보기 드물게 웃으며 사마준보를 올려다봤다.

“그렇죠? 준보 오라버니?”

“뭐?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들었으나 백리연이 웃자 사마준보도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표정이 조금 풀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쟤 원래 저렇게 망나니냐?”

사마준보가 보고 있는지라 백리연은 조심한답시고 이서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마 그럴 걸요.”

그 행동이 사마준보의 신경을 더 긁었다.

공자들과 몰려다닌 적도 없고, 엮인 적도 없는 지라 백리연보다 아는 게 없는 이서휘다. 잠시 이서휘는 맹의 대원과 세가의 공자가 붙으면 무슨 징계를 받는지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딱히 징계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질풍검대는 세가들의 지원도 없는 검대다.

시비가 붙으면 응징해줄 생각으로 이서휘가 말했다.

“연아, 나가자.”

“네.”

“거기 안 서?”

화양다루를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는 사마준보를 향해 콧방귀를 날린 다음에 화양다루의 문을 열고 나갔다. 사마준보가 욕지거리와 함께 일 층에 내려서서 화양다루의 문을 열고 이서휘를 쫓아갔다.

이서휘는 검제 시절에 일부 세가가 얼마나 비겁하게 굴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기분이 더 나빠지고 있었다.

화양다루 앞에서 이서휘와 백리연이 마주 보고 있었다. 백리연이 다시 이서휘의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그냥 가요…… 우리.”

백리연의 말은 오히려 이서휘의 발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왜? 가길 어딜 가. 나는 분명 자리를 피해주려고 했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사마준보의 생각이야. 검대가 세가의 부하는 아니잖아?”

“…….”

백리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서휘가 말했다.

“혹시 세가의 공자들은 항상 이런 식인가?”

“다 그렇진 않아요.”

이서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모처럼 차 한 잔 조용히 하나 했는데 미안하군.”

“미안하긴요. 준보 오라버니가 저러는 건 제 탓도 있을 거예요.”

“네가 왜? 너무 예뻐서?”

“그 말이 아니구…….”

이서휘가 노골적으로 묻자, 백리연이 눈을 흘겼다.

사마준보가 뛰어 나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어서 공자들과 여인들이 따라 나왔다.

사마준보가 말했다.

“거기 딱 서라, 이서휘.”

사마준보의 말을 무시하고, 이서휘는 여전히 백리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부대주인데도 이런 취급을 당하는군. 행여나 우리 대원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눈에 훤해.”

이미 이층에서 의자와 난간이 부서지고 고함이 들렸던 터라, 다루에 있던 누군가가 신명 나게 외쳤다.

“싸움 났다!”

그 소리에 대로변에 있던 다루와 객잔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순식간에 불어나고 있었다.

“검대의 복장인데? 저쪽은 사마, 구양, 모용 세가 공자들이 아닌가?”

“무슨 일이야?”

누군가는 흔히 보는 장면인지 이렇게 말했다.

“또 사마 공자인가?”

일부는 싸움이 나든 말든 백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경꾼들 중에는 술을 마시고 있었던 군림오검대 무인들도 제법 있었다. 화룡검대 소속의 무인과 천룡검대 소속의 무인이 서로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서휘랑 사마준보가 붙겠는데?”

“후후, 누가 이기든 볼만하겠다.”

“개박살 나라! 빌어먹을 새끼.”

“누가?”

“누구긴 누구야. 사마 새끼가 박살나야지.”

“야, 우리 부대주들이 들으면 섭섭해 하겠다.”

“웃기는 소리, 저 새끼 말 들어보면 그런 생각이 싹 들어갈 걸? 검대가 무슨 지네들 하인인 줄 아는 놈인데…… 아예 그냥 이서휘가 죽여버렸으면 좋겠다.”

“야, 이 사람아 말조심해.”

사마준보가 다가와서 말했다.

“검대 부대주 따위가 이렇게 건방질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서휘는 그제야 뒤를 돌아서 사마준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새끼를 죽일 수도 없고…….’

사마준보가 말했다.

“비무전에서 우승했다고 기고만장해진 것이냐?”

이서휘가 생각했다.

‘죽도록 패면 갱생이 되려나……?’

사마준보가 말했다.

“……아니면 자강검을 얻어서 이제 절세고수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것이냐.”

이서휘는 대꾸를 않고 생각에 잠겼다. 침묵하고 있는 이서휘를 보며 사마준보의 모욕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왜 말이 없어.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이서휘가 몰려든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앞으로 이 녀석이 군림맹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기억에도 넌 군림맹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나선 일이 없는데…….’

사마준보가 공자들과 일행으로 따라온 여인들을 돌아보며 독설을 이어나갔다.

“내가 말했었지? 이래서 낭인 출신 놈들이 우리 군림맹의 문제라고. 낭인 출신이라 백도맹은 못 들어가겠고, 어떻게든 칼밥이나 먹을까 하다가 군림맹에 굴러 온 놈들인 주제에…….”

사마준보의 말이 엇나가자 다른 공자들까지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사마준보가 선심 쓰듯 말했다.

“나와 세가의 공자들에게 네 무례를 사과해라. 그러면 관대하게, 없던 일로 해주마. 연아, 너도 이쪽으로 오너라. 왜 자꾸 거기 서 있느냐?”

사마준보는 검대의 부대주들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함께 있는 공자들도 전부 자신에 비해 아래라고 생각하는 자다. 은근히 자신의 무공 실력은 검대 대주들보다도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이서휘의 침묵을 자기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사마준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과하라고…… 이서휘. 내 말 안 들려?”

사마준보가 아무런 대꾸를 않는 이서휘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이제는 검을 뽑자마자 상대방을 벨 수 있는 거리다.

구경꾼들은 아무나 이기라는 식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구경하는 자들이 많아지니 사마준보는 더더욱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이서휘가 움츠러 들었다고 생각한 사마준보는 큰 의미 없이 스릉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한테 말해서 거지 같은 질풍검대 장시우 새끼부터 갈아치워야겠어. 기강이 아주…….”

그때였다.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자강검을 뽑아 이제 막 검을 뽑은 사마준보를 향해 휘두르고 다시 검집에 넣었다.

쐐앵! 탁!

한 줄기 바람이 사마준보의 머리카락을 휘젓고 지나갔다.

이어서 사마준보가 뽑아 든 장검의 검신이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면서 바닥에 툭 떨어졌다. 구경하던 자들이 동시에 탄성을 내지르자 사마준보가 부러진 검을 내팽개치고 달려들었다.

“이런 개새끼가!”

이서휘는 분명히 격차를 보여줬다. 사마준보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마준보의 사고 방식은 이서휘와 달랐다. 휙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장력을 내뿜었다.

이서휘는 암행표로 선 자세 그대로 물러났다가, 암연심검의 환을 구사해 사마준보의 손바닥을 찔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즉시 사마준보의 팔 전체가 마비돼가고 있었다.

“윽!”

이서휘가 사마준보의 복부를 발로 걷어찬 다음에 사마준보의 머리를 왼손으로 덮어서 틀어쥐고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쾅―!

제대로 싸워도 어려울 판인데 너무 이서휘를 쉽게 생각한 사마준보다.

다른 공자들이 달려들려고 하자 이서휘는 쐐앵 하는 소리와 함께 자강검을 뽑아 사마준보의 목을 겨눈 채로 말했다.

“이놈 말대로 난 낭인 출신이라서 말이지. 낭인 세계에서 이런 싸움은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데 말이야……. 세가 출신인 공자들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

구양섭이 외쳤다.

“이 부대주! 그만 합시다! 이렇게 피 볼 일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감정이 상해 그런 거 아니요?”

아무 말 없던 모용현강도 나서서 협박과 설득을 섞은 진중한 어조로 이서휘를 말렸다.

“이 부대주……. 준보가 말이 심하긴 했소. 우리도 불편하더구려. 그렇다고 죽여서야 되겠소? 군림맹이란 말이요. 이 부대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인데…… 이 부대주를 위해서도 검을 거둡시다. 준보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가 수습하리다. 모용가가 약속하겠소.”

이서휘가 말을 내뱉었다.

“군림맹……? 사마준보의 말에 군림맹 검대 부대주를 존중하는 말이 한 마디라도 있었던가?”

“준보의 말이 심했소. 우리가 사과하리다. 이 부대주…….”

백리연마저 공자들을 거들었다.

“서휘 오라버니, 검을 거둬주세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백리가도 중재하겠습니다. 아버님에게 잘 말씀드릴게요.”

이서휘는 싸늘한 눈빛으로 사마준보와 공자들을 노려보다가 검을 거뒀다.

“군림맹이 아니라 네 친구들이 살린 걸로 하자. 사마준보…….”

이서휘가 납검을 하고 돌아섰다.

그때 사마준보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검을 움켜쥐고, 동시에 내공을 주입한 왼손으로 바닥을 쳐서 강시처럼 일어나, 부러진 장검을 이서휘의 등에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독고세가의 후계자 독고비영이 엄지와 검지로 암기를 튕겨 발사했다.

타앙……!

그 보다 약간 느리게 구경하고 있던 중년인이 신형을 솟구쳐 이서휘와 사마준보 사이로 날아왔다.

이서휘가 등을 돌렸다고 하나, 귀로는 사마준보와 공자들의 움직임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이서휘의 눈빛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죽여주마…….’

☆ ☆ ☆

장님 시절……. 친절한 말로 안심시킨 후 암습을 가하는 자, 뒤에서 소리 없이 암습을 가하던 자들을 무수히 만났던 이서휘다.

그때마다 가차 없이 죽였다.

장님이기에, 적의 살기를 파악하자마자 단칼에 죽여야 이서휘가 살 수 있었다.

이서휘는 뒤에서 암습을 가하는 사마준보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중년인이 움직이는 것도 느꼈고, 암기가 발사되는 소리도 들은 이서휘다.

그 자들이 무슨 행동을 하든, 자신이 먼저 사마준보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서휘가 검을 휘둘렀다.

콰앙……!

난입한 중년인의 무공 수위는 이서휘의 예상을 깰 정도로 높았다. 경신법을 운용해 공중제비를 돌며 내려선 중년인이 이서휘와 사마준보 사이에 등장해 검집으로 이서휘의 자강검을 막아내고, 오른손으로 펼친 점혈 수법으로 사마준보를 멈추게 했다.

이서휘가 중년인의 웅혼한 내력에 밀려 발을 츠츠츠츠 끌면서 밀려나고, 사마준보는 부러진 검을 내지르는 동작에서 온몸이 마비가 되었다. 하나, 이서휘의 검을 막은 중년인의 왼팔도 부르르 하고 한 차례 떨리고 있었다.

쏴아아아악……!

그러다 보니 본래 사마준보의 부러진 검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독고비영의 암기가 중년인의 몸으로 향했다.

그 순간…….

타앙!

어디선가 날아온 여인의 머리 장식이 중년인에게 향하는 암기를 튕겨냈다. 머리 장식을 날린 사람이야 말로 중년인에 못지않은 고수였다. 중년인은 암기를 날린 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사마준보의 점혈을 풀어줬다.

사마준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숙부님…….”

중년인은 군사회의 부회주인 사마예(司馬睿)였다. 사마예가 엄한 눈빛으로 사마준보와 이서휘를 번갈아가며 노려봤다. 얼굴 가득 분노가 가득 담겨 있어 눈매가 떨리고 있었다.

☆ ☆ ☆

사마예가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고 말했다.

“암습을 가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냐? 넌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그것은 말 다툼 도중에…….”

사마준보가 변명을 하려고 하자 사마예가 노성을 터뜨리며 사마준보의 뺨을 후려쳤다.

“닥쳐라!”

짝 소리와 함께 사마준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사마예가 성난 눈길로 다른 세가의 공자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몰려다니면서 하는 짓들이 이런 것이란 말이냐! 그러고도 세가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거들먹거려?”

사마준보가 여전히 성난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숙부님! 저 건방진 놈이 먼저 저희를…….”

사마예가 사마준보의 뺨을 다시 후려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사마준보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제는 사마준보의 눈빛에도 증오와 반항이 섞이고 있었다.

“숙부님, 이건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뭐라고?”

사마준보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사마예의 신경을 계속 긁기 시작했다. 사마예가 분노에 사로잡혀 사마준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사마예가 일갈했다.

“검대 부대주더러 건방지다 했느냐? 사마초도 검대원인데 그 녀석한테도 이리 막대할 것이냐? 네 아버지가 검대원들을 그리 대하라 시켰느냐? 그랬다면 내가 가서 형님께 따질 것이다. 말해! 네 아버지가 그리 시켰느냐?”

“아닙니다.”

“나랑 돌아갈 테냐, 아니면 더 싸우겠느냐. 도와주지 않겠다. 아까 네 놈의 검이 부러질 때 이미 승부가 났다는 걸 모르겠느냐?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자! 내가 입회증인(立會證人)으로 결과를 보고하마. 자, 받아라.”

사마예가 자신의 장검을 사마준보에게 내밀었다.

“받아! 형님에겐 내가 말씀드리겠다. 사마세가 후계자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그래야 우리 사마세가의 훗날을 이끌어갈 가주가 되지 않겠느냐. 자, 어서! 자강검에 쉽게 부러질 내 검이 아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사마예의 말에 사마준보가 이를 빠드득 갈며 장검을 노려보다가 내뱉었다.

“싫습니다. 제가 죽으면 사마초로 가문을 잇게 하시려고요? 그렇겐 못하지요.”

다른 공자들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엇나가도 크게 엇나가는 것임을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었는데도 사마준보는 마귀에 쓰인 것처럼 고집을 부렸다.

사마예의 말투가 떨렸다.

“뭐…… 뭐라고?”

사마준보가 박차고 일어나 공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가! 술이나 마시러 가자. 못난 꼴을 보였다. 가자고!”

사마준보가 구경하던 자들을 밀치고 나가면서 손짓을 해도 다른 세가의 공자들은 그 자리에 서서 사마준보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마준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자들과 이서휘, 백리연까지 죽일 것처럼 노려본 후에 사람들을 밀치면서 사라졌다.

사마예가 한숨을 내쉬며 이서휘를 돌아봤다.

“이 부대주…….”

“네, 부회주님.”

사마예가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데 표정이 자못 쓸쓸했다.

“사마세가가 모두 이렇지는 않네. 내가 대신 사과하지.”

사마예가 포권을 취하려고 하자, 이서휘가 급히 다가가 막았다.

“아닙니다…….”

순간, 이서휘는 소름이 끼쳤다. 이서휘의 기억에는 사마예도 사마준보와 별반 다르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자다. 사마세가의 자세한 내부 사정이 어떤지는 몰랐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순수한 의도로 나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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