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자강검>
무림인에게 병장기는 목숨과도 같다.
승패가 병장기의 차이에서 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서휘는 칠흑검이라는 명검을 사용해봤기에 더욱 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대다수 무림인들은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좋은 병장기를 얻는 것은 그 수단과 방법 중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사안이 아니던가.
이서휘는 자신의 장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강검이 나오든 백룡검이 나오든 일단 내가 가진다.’
시간이 흘러, 군림맹 맹주 남궁위의 탄생 축하연이자 부대주들의 결전의 날.
그간 이서휘는 집중적으로 월야휘검이라 부르는 자신만의 검법을 연마한 상태.
이서휘의 지독한 수련이 점차 알려져, 다른 부대주들도 엄청난 수련을 이어갔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더군다나 우승자에겐 엄청난 보검이 주어질 것이란 과장된 소문이 퍼지고 있는 상황.
군림맹의 시선이 죄다 오검대의 부대주들에게 쏠리고 있었다.
맹주 축하연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맹주와 수호세가 가주들이 자리를 잡고 그 아래에는 각각 맹주 수호전, 군사회, 운룡회, 천뢰각, 천라각의 수장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아래 넓은 비무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둘레에 전, 회, 각의 사람들과 군림오검대가 자리를 잡았다.
무대도 컸고 사람 수도 많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천뢰각주 한신이 무대에 올랐다.
자연스레 시선이 한신에게 모였다.
한신은 술 마시러 나갈 때와는 다르게 단정한 의복을 갖추고 있었다. 사람이 달라 보일 만큼 훤칠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신이 내공을 적당히 실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군림맹 여러 선후배님들, 천뢰각주 한신입니다. 이제 곧 오검대 부대주들의 비무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한신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군림맹 전체가 환호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진작에 기대하고 있었다.
부대주들의 무공이 궁금했던 자들, 자신의 무공과 비교해보려는 자들, 부대주로 승진하고 싶어하는 검대원들까지.
빙그레 웃던 한신이 환호성을 자제하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잠시 후 한신이 무대의 계단을 가리켰다.
“먼저 이쪽을 보시지요.”
천뢰각의 무인이 비단 받침대에 올려진 검 한 자루를 두 손으로 받들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서휘는 무대 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온통 자색으로 빛나는 검이 좌중의 시선을 확 사로잡고 있었다.
‘자강검이군.’
이서휘를 비롯한 부대주들의 눈빛이 강렬하게 자강검에 꽂히고 있었다.
☆ ☆ ☆
한신의 부름에 이서휘를 비롯한 다른 부대주들이 무대에 올랐다. 한신이 손뼉을 치자 천뢰각의 무인이 가느다란 대나무가 여러 개 꽂힌 죽통을 들고 나와 한신에게 전달했다.
부대주들이 순번이 적인 대나무를 뽑아 대진 순서를 정했다. 참가 인원은 부상자와 부재중인 자를 제외하고 총 일곱 명이었다.
一 천룡검대 독고극
二 운룡검대 구양운
三 질풍검대 이서휘
四 비룡검대 사마초
五 천룡검대 진수한
六 화룡검대 백리소천
七 운룡검대 모용벽
이서휘는 두 번째 비무였고 상대는 비룡검대 사마초였다. 칠 자를 뽑은 모용벽은 운 좋게도 부전승이었다. 부대주들은 잠시 한신에게 주의할 점을 듣고 있었다.
“부대주들 잘 듣도록. 심판은 운룡회의 송정후 회주다. 비무전에서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군림맹의 손실이 아니겠느냐. 따라서 송정후 회주가 부상이 염려되면 개입할 것이다.”
한신이 말을 멈추고 잠시 부대주들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부대주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이자 한신이 말을 이었다.
“승패도 송정후 회주가 결정할 것이다. 생사를 걸고 하는 비무가 아니므로 이 정도는 부대주들이 이해하리라 본다. 다들 송회주의 실력은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요. 운룡회주님의 실력을 저희가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부대주들이 동의하자 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운룡회(雲龍會) 송정후는 군림맹에 들어오기 전부터 널리 알려진 사십 대의 고수로 군림맹 내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일단 운룡회 전원이 세가와 관련이 없는 자들이다. 일부는 백도맹을 탈퇴하고 온 사람도 있고, 검대에 들어가기엔 무림에서 위명도 제법 널리 알려진 자가 많았다.
한신이 좌중을 돌아보며 심판을 소개했다.
“심판은 운룡회(雲龍會)의 송정후 회주께서 맡겠습니다.”
송정후가 단상 위에서 그대로 솟구쳐 장포를 펄럭이더니 조용히 무대에 내려섰다. 차림새도 외모도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송정후가 말했다.
“천뢰각주의 요청으로 심판을 맡게 된 송정후올시다.”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자 송정후는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규칙은 간단하오. 승부가 나는 선에서 겨루면 될 것이고, 한쪽의 부상이 염려될 경우 직접 개입하겠소. 승패는 제가 결정할 것이니 양해 부탁드리오.”
한신이 나름 신경을 써서 배정한 심판이다. 세가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공정한 기준으로 승패를 정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다. 수호세가나 오검대에서도 공정한 인선이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로 돌아와 장시우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이서휘의 뒤에서 강기찬이 속삭였다.
“형님, 자꾸 비룡검대 부대주가 이쪽을 보면서 웃는데요?”
이서휘가 고개를 돌리니, 비룡검대 사마초가 히죽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도 뜻이 담긴다. 사마초의 얼굴은 마치 ‘서휘야, 네가 내 상대라서 다행이야.’라는 표정이었다.
이서휘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웃게 놔둬.”
막내인 강기찬이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아 괜히 내가 열 받네. 왜 웃어? 우리가 웃겨?”
이서휘가 자세를 돌려 강기찬을 노려봤다. 표정은 딱히 화난 얼굴이 아니었는데 말투는 엄했다.
“사마 부대주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네 친구냐?”
강기찬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잡생각 하지 말고 집중해서 비무를 봐라.”
이서휘가 살짝 인상을 쓴 채로 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동작 하나하나 빠트리지 말고 집중해서 봐라. 알겠냐?”
질풍검대 대원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대원들을 다그친 후 무심결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비룡검대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사마초가 때에 맞춰 고개를 돌리더니 이서휘를 보고 또 다시 씨익 웃었다. 노골적인 웃음이다.
이런 얄팍한 심리전에 당할 이서휘가 아니었다.
이서휘도 사마초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 표정을 본 사마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서휘는 코웃음을 치며 무대를 바라봤다.
시작부터 뜨거웠다.
우승 후보라 여겨지는 천룡검대의 독고극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독고극의 상대는 운룡검대의 구양운.
때문에 이 비무전에는 독고세가와 구양세가의 자존심도 걸려 있다.
이서휘는 무대에 오른 두 사람을 살폈다.
독고극과 구양운이 각자 인사를 하고 검을 뽑았는데 구양운이 말할 때는 군림맹에 이렇게 여인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여인들의 환호성이 크게 터졌다.
구양운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반반한 외모, 거기에 배경도 든든했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독고극의 인상은 차갑고 사나운 데다가 얼굴빛이 어두웠다. 환호성을 지르는 여인들도 그렇거니와 실실 웃는 구양운도 독고극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독고극은 성격이 거칠기로 유명한 자였다. 이서휘는 독고극의 불같은 성격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후후, 독고 형에게 제대로 혼나겠구만. 구양운 녀석.’
독고극과 구양운이 맞붙었다.
둘은 일전에도 붙었던 지라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송정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검과 검이 경쾌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챙, 챙!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장시우가 이서휘에게 말했다.
“누가 이길까?”
“독고 형이죠.”
“동감. 그런데 구양운도 제법이네? 전보다 훨씬 낫다. 많이 발전했는데?”
“그렇네요.”
독고극은 부대주들 중에서 가장 내공이 높은 편이라 일검을 내지를 때마다 묵직한 편이었고, 구양운의 검은 가벼운 대신에 변화가 많았다.
둘 다 자신들의 무공을 대성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장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위를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지켜보는 자들은 눈이 즐거웠다.
독고극은 큰 움직임 없이 반격을 위주로 검을 펼쳤고, 구양운은 독고극의 빈틈과 실수를 유도하려는 듯 빠르게 움직였다.
첫 대결부터 접전이 펼쳐졌다.
군림맹에 잡음이 사라지고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기합 소리, 발을 구르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점점 독고극에게 승기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독고극의 내공이 더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양운은 승기를 잡기 위해 공력을 쏟아부은 터라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물론 그 점은 구양운도 알고 있었다.
구양운은 독고극의 검을 튕겨내며 생각했다.
‘이대로 가면 너무 무난하게 진다. 승부를 걸자.’
지켜보던 이서휘가 인상을 찡그렸다. 초조하다는 마음이 드러날 정도로 구양운의 동작이 어색해지고 있었던 것.
구양운은 결국 무리수를 두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여 일검을 내질렀다. 이어서 비무전엔 어울리지 않는 살초가 연달아 펼쳐졌다.
승부를 건 셈이다.
독고극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올라갔다. 그의 눈에도 구양운이 승리에 눈이 멀어 살초를 쓰는 것으로 보였다. 독고극은 구양운의 공격을 막으며 차갑게 웃었다.
‘흥, 그렇게 나오시겠다?’
검으로 사는 자들의 비무다. 당연히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던 일. 독고극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구양운의 검이 잇따라 날카롭게 독고극의 목과 허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하나, 부상이 염려될 경우에 개입을 하겠다던 송정후는 그대로 팔짱을 낀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구양운의 실력이 독고극보다 낮다고 판단했던 것.
아무리 공격을 펼쳐도 독고극의 수비가 단단하자, 이를 악문 구양운이 승부를 내려는 듯이 장검을 내질렀다. 독고극은 구양운의 검을 눈여겨보다가 갑자기 자신의 검 끝으로 빠르게 반원을 그렸다.
독고극이 세가에서 배운 월행잔상(月行殘像)이라는 초식이다.
검의 잔상이 둥그렇게 만들어지면서 진격하던 구양운의 검이 방향을 잃고 튕겨 나갔다.
구양운의 팔이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챙,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운의 검이 날아갔다. 구양운이 저도 모르게 단말마를 내질렀다.
“앗!”
이어서 물 흐르듯이 독고극의 검이 뻗어 나가더니 구양운의 손목을 노렸다.
그때였다.
터엉! 소리가 나면서 독고극의 검이 가로막혔다.
지켜보고 있던 송정후가 어느새 검을 뽑아 독고극의 검 끝을 정확하게 막았던 것.
사람들이 탄성과 함성을 내질렀다.
송정후는 일부러 독고극의 검이 구양운의 손목에 거의 도착했을 때를 맞춰 막아내는 신기를 보였다.
송정후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부상이 염려되어 끊었네. 승부는 천룡검대 독고극 승리.”
송정후가 덤덤한 목소리로 독고극의 승리를 선언하자 천룡검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천룡검대! 독고극! 우승으로 갑시다! 부대주님 멋졌습니다!”
패배한 구양운은 씁쓸한 표정으로 장검을 줍더니 송정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주님.”
송정후는 대꾸를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송정후가 바로 다음 진행자를 호명했다.
“다음 부대주는 질풍검대 이서휘, 비룡검대 사마초. 무대 위로.”
이서휘와 장시우가 눈을 마주쳤다. 이서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형님, 동생 출전합니다. 뭐라고 한마디 안 해주십니까?”
“사마초는 이길 수 있지?”
“으하하하.”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리자 장시우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오른팔, 다치지 말고 내려와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이서휘가 무대로 훌쩍 뛰어 올랐다.
이서휘는 사마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같은 해에 부대주로 승격된 녀석이다. 유난히 이서휘를 깔아뭉개고 싶어 했던 놈이다.
‘이놈은 한 번 제대로 밟아줄 필요가 있는 놈인데.’
전에는 실력이 비슷해 꽤 고전했던 이서휘다. 그러나 지금은 사마초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새삼 오랜만에 마주하고 서서 바라보니 그저 웃음만 났다. 이서휘의 웃음을 보더니 사마초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웃어? 오늘 죽고 싶다 이거지?”
이서휘는 침착한 표정으로 사마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냐?”
“뭐가.”
“나 차였다고 소문낸 놈.”
“아닌데?”
“너 백리연 좋아하지?”
사마초의 얼굴이 빨개졌다. 거기까지였다. 저 근엄한 송정후 회주도 더 이상 이 유치한 대화를 못 듣겠다는 듯이 주의를 줬다.
“뭐하나? 빨리 시작하게.”
사마초가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오늘 한 번 죽어보자. 갈까?”
“가자, 이거지?”
“무서우면 진검으로 하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부대주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진검을 놔두고 목검으로 겨루는 것. 한마디로 상대방을 흠씬 두드려 패겠다는 말이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이서휘가 송정후 회주에게 말했다.
“저희는 목검으로 하겠습니다.”
송정후가 사마초를 바라보자 사마초도 고개를 끄덕였다. 송정후가 허락하자 목검을 가져와 사마초와 이서휘가 받아들었다. 송정후는 두 사람이 서로 다치지 않기 위해 목검을 사용하겠거니 하고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휘와 사마초는 목검을 받아들고 상대방을 흠씬 두들겨 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중앙으로.”
송정후가 이서휘와 사마초를 부른 후 말을 이었다.
“이 부대주, 사마 부대주. 준비 됐나?”
“네.”
“네.”
“시작하게.”
이서휘는 목검을 쥐고 사마초를 바라봤다. 비무전에서 종종 겨룬 적이 있어 사마초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마초도 마찬가지. 이서휘를 내심 깔보고 있었다. 사마초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간다, 이서휘.”
“후후, 와라.”
이서휘가 목검 끝으로 까닥까닥 했다. 이를 악문 사마초가 목검을 내질렀다.
따악!
이서휘와 사마초의 목검이 맞붙었다.
이서휘는 사마초의 내공이 자신에 비해 낮은 편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힘으로 사마초를 튕겨낸 이서휘는 너무나 손쉽게 공세로 전환했다. 이서휘의 목검이 평범하게 중단으로 뻗어 나갔다.
사마초가 어렵지 않게 막으며 코웃음을 쳤다.
“흥!”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사마초의 목검이 수비로 전환하자, 이서휘는 그 찰나에 다시 곧장 사마초의 허벅지를 찔렀다. 연속 공격이다.
사마초의 눈이 곧장 커졌다.
‘뭐지?’
이서휘의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막으면 다른 곳으로, 막으면 다른 곳으로 공격이 들어왔다.
이서휘가 목검으로 말했다.
‘계속 막아라!’
이서휘는 사마초에게 계속 수비를 강요할 생각이었다. 사마초가 다시 목검을 쳐내자 이번에는 더 빠른 속도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허리에서 목으로.
목에서 손목으로.
사마초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이서휘는 사마초의 손목을 찌르는 척하다가 불쑥 베는 동작으로 허리를 공격했다.
“쳇!”
깜짝 놀란 사마초가 뒤로 훌쩍 물러나자 이서휘는 질풍지로(疾風指路)라는 초식으로 발을 구르며 따라잡았다.
무대가 쩌렁대고 울리는 소리가 터졌다.
이어서 이서휘의 호쾌한 동작이 뒤따랐다. 쭉 뻗은 이서휘의 목검이 사마초를 향해 곡선을 그리며 추격했다.
또 다시 사마초가 방어를 포기하고 경신법을 펼쳐 훌쩍 물러났다. 사마초는 잠시만 기회를 달라고, 잠시만 쉬었다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이서휘의 호흡과 속도는 사마초가 생각하고 있던 수준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움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나, 이서휘는 사마초를 최단 시간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사마초의 반응을 머리에 그리면서 후퇴로를 예상했다는 듯이 똑같은 속도로 쫓아갔다. 더군다나 경공에 암행표를 섞었다. 사마초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목검으로 한 거 후회하게 해주마.’
수세에 몰린 사마초가 다소 흐트러진 동작으로 일검을 내지르고 다시 훌쩍 뒤로 물러났다. 이서휘는 귀신같이 쫓아가서 목검을 휘둘렀다. 두 목검이 맞붙자 그그그극 하는 마찰음이 터졌다. 내공도 이서휘가 위였다. 이서휘는 내공을 주입해 맞붙은 검을 밀쳐냈다. 누가 봐도 사마초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
사마초는 튕겨 나가자마자 흐트러진 기세를 바로 잡기 위해 두 발에 힘을 줘 후방으로 멀찍이 공중제비를 돌았다가 내려섰다.
이제야 거리가 꽤 벌어졌다.
사마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서휘는 천천히 다가가며 사마초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동작을 펼치든 잡아내겠다는 눈이다. 사냥꾼의 눈이다. 사마초는 사술에 걸린 것처럼 잠시 몸이 불편해졌다. 기세에서 눌린 셈이다.
찰나, 몸이 굳었던 사마초는 기합을 내지르며 다가오는 이서휘를 향해 공력을 잔뜩 주입한 일검을 내질렀다.
“하압!”
이서휘는 제 자리에서 별다른 움직임 없이 암연심검의 파(波)를 시전했다.
부우우웅!
내공이 충분했다면 그대로 사마초의 몸이 두 동강으로 쪼개졌을 법한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파앙!
시원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리면서 사마초의 목검이 공중을 날았다.
휘리리리릭!
“어어어어어?”
마치 반사운동처럼 군림맹 사람들의 고개가 동시에 하늘로 향했다. 사마초의 목검이 공중으로 한참이나 솟구쳐 핑그르르 돌고 있다. 깜짝 놀란 사마초마저도 아주 짧은 시간, 저도 모르게 하늘로 솟은 검을 올려다보다가 아차 했다.
이서휘는 목검에 적당한 내공을 주입해 사마초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빡!
“크악!”
사마초가 이마를 붙잡았다. 이서휘가 봐준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기력이 아직 많이 남아 장력을 쏟아내며 공격을 펼쳤다.
이서휘는 다시 목검으로 사마초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치고 윽 소리를 내고 있는 사마초의 머리통을 다시 한 번 내려쳤다.
퍽퍽빡!
사마초가 잠시간 서서 멍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송정후가 다가가 혼절한 사마초에게 내력을 약간 주입해 깨웠다.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던 터라, 사마초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표정이 가관이었다. 패했다는 사실은 알겠으나 도대체 왜 자신의 목검이 날아갔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사마초였다.
송정후가 사마초의 상태를 살펴 보다가 비무 결과를 발표했다.
“질풍검대 이서휘 부대주 승리.”
이서휘는 군림맹을 돌아보며 예를 갖춘 후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데 문제의 그 백리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백리연이다. 군림맹 대다수의 남자들이 고백했다가 차였다. 그 중엔 고백한 적도 없는 이서휘도 명단에 올라 있다.
이서휘는 갑자기 짜증이 몰려와 표정이 굳어졌다.
‘쳇, 예쁘긴 더럽게 예쁘구나.’
이서휘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질풍검대 대원들이 아주 신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서휘를 반겼다.
“질풍검대! 질풍검대! 이서휘! 이서휘!”
비룡검대 사마초가 노골적으로 비웃던 표정을 다들 봤던 지라, 대원들은 일부러 떠들썩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장시우가 호통을 내질렀다.
“아아, 이놈들아 시끄럽다! 제 자리로 가라.”
어디까지나 군림맹의 동료를 꺾은 것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이서휘도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대원들을 자제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이서휘와 장시우가 눈이 마주쳤다. 이서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저 잘했죠?”
“좀 하더라?”
장시우가 뒷 말을 흐리자 이서휘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많이 컸다고 인마!”
“흐흐.”
다음 비무를 치를 부대주들이 오르고 있었다.
우승 후보 중 하나인 화룡검대의 백리소천이 무대에 오르고 뒤이어 천룡검대의 진수한이 올랐다.
화룡검대와 천룡검대, 군림맹에 널리 알려진 맞수들이다. 천룡검대에서는 독고극이 우승 후보라 여겨지지만 진수한 역시 부대주들 중에서는 상위권이었다.
더군다나 진수한으로서는 이 비무가 나름 중요했다. 매번 백리소천에 패해 좌절했었기 때문. 근래 부대주들의 수련이 엄청나다는 소문에는 이서휘와 더불어 진수한도 있었다.
반면에 백리소천은 여유로웠다.
일부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그는 백리세가 가주에게 무공을 전수 받고 있었다. 이 비무전은 어디까지나 백리소천, 자신을 위한 무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심 우승을 예상하는 백리소천과 잔뜩 독이 오른 진수한이 맞붙었다.
이서휘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런데 함께 지켜보는 장시우의 표정도 사뭇 진지했다.
이서휘가 장시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우승 후보…… 백리소천에게 거셨죠?”
장시우가 눈을 껌벅이더니 입술에 갑자기 침을 바르며 대꾸했다.
“아니?”
“아니긴. 이마에 쓰여 있습니다.”
장시우의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허허, 아무래도 들리는 소문도 있고 해서 말이지. 지난번엔 독고극이 우승했다지만 이번엔 어림없지. 뭐 워낙 백리소천과 백중세였던 까닭도 있지만 우리 서휘가 또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허허허, 이거 참 흥미로운 대결일세.”
“대체 뭔 소리요, 형님? 그래서 결론은 제가 우승한다는 겁니까?”
장시우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형은 항상 널 응원하고 있었다.”
“근데 어찌 그렇게 매번 우승자를 맞춰서 돈을 따셨습니까.”
“응원과 도박은 엄연히 다른 일이지 않느냐 내가 돈이라도 따야 우리 대원들 술이라도 한잔 더 사고. 뭐 그런 거 아니겠느냐?”
“거 참, 말은 참 잘하시오.”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에 두 사람은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외쳤다.
“백리소천이 당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했는데?”
이서휘와 장시우가 급하게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백리소천과 진수한이 원수가 맞붙은 것처럼 격렬하게 겨루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백리소천과 진수한의 비무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예 팔짱을 끼고 일어나서 구경했다.
‘백리소천은 뭔가를 숨기고 있군. 진수한은 전력을 다하고 있고.’
공방전을 보니 백리소천이 밀리는 이유를 금방 알게 되었다. 진수한은 질 때 지더라도 백리소천에게 부상을 입히겠다는 일념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검을 맞댄 채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눈빛이 원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충돌했다. 진수한이 잔뜩 내공을 끌어올려 힘겨루기에 나서자 백리소천이 짜증난다는 듯이 진수한을 밀쳐냈다. 결국 백리소천은 숨겨뒀던 한 수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백리세가의 천위검법(天威劍法)이 펼쳐지자 구경하던 이서휘가 빙그레 웃었다.
‘진작 꺼냈어야지.’
백리소천의 검신에서 희미하게 우우우웅 하며 울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때부터 백리소천의 천위검법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보는 자들의 눈에는 전과 다름없는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진수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백리소천은 싸늘한 표정으로 진수한을 압박하고 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급기야 챙챙, 채앵, 쩌엉 하며 소리가 커졌다.
진수한은 힘을 짜내어 백리소천의 검을 튕겨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진수한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힘겨워 하는 진수한의 자세가 흐트러지자, 백리소천은 신형을 날려 진수한의 검을 날려 버렸다. 그러나 백리소천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송정후가 외쳤다.
“그만!”
그 소리를 듣고서야 백리소천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진수한의 몸에 닿기 전에 멈췄다.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시우에게 말했다.
“백리소천, 강하군요.”
장시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세가의 천위검법(天威劍法)이다.”
이서휘가 잠자코 있자, 장시우는 대원들에게 천위검법을 간략히 설명해줬다.
“검의 무게가 자주 변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검초가 이어진다. 우리 서휘가 독고극을 꺾는다면 천위검법을 상대해야 할…….”
이서휘가 장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독고 형부터 이기고 오겠습니다. 이따 마저 얘기해 주십시오.”
“어? 어, 그래.”
드디어 이서휘와 독고극의 차례였다. 이서휘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목을 한 차례 돌렸다. 우드드득 소리가 나면서 몸이 시원해지자 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준결승이었다. 반대편에서 독고극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이서휘는 독고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군림맹에서 유명한 강성(强盛)이다. 성격도 거친데다가 독설가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도 없는 자다. 그러나 이서휘는 독고극이 끝까지 군림맹에 남아 목숨이 다할 때까지 헌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서휘는 오랜만에 마주 선 독고극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예를 올렸다.
“독고 형, 잘 부탁드립니다.”
독고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내뱉었다.
“강해졌더군. 와라.”
웬 일인지 독고극은 별다른 독설이 없었다. 진지했다. 이서휘의 기억에 그는 항상 강했다. 성격이 나쁘든 말이 거칠든 이서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독고극은 순수한 무인이었으니까.
이서휘는 전력을 다하리라 마음을 먹고 검을 뽑았다.
‘이 시기엔 독고 형이 나보다 내공이 높았으니 전력을 다 해야겠군.’
독고극도 검을 뽑아 우하단으로 늘어뜨린 자세로 이서휘 주변을 호랑이처럼 어슬렁거렸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치고 이어서 검이 맞붙었다.
챙챙챙챙챙!
이서휘는 사마초를 몰아쳤던 방식으로 독고극을 검세에 가뒀다. 잠시 이서휘의 몰아치는 검세가 이어졌다. 이서휘는 자신의 실력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만한 상대였다. 검을 부딪쳐 보니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독고극의 내공이 이서휘를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서휘의 검이 춤을 추듯 움직이면서 독고극의 빈틈을 노리고 뻗어 나갔다.
챙챙챙챙챙챙!
독고극이 이서휘의 쾌검을 일일이 다 막아내더니 거리를 벌렸다. 독고극 특유의 자세가 좌중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독고극은 다시 검을 우하단으로 늘어뜨리고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이서휘를 노려봤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 이서휘의 등줄기에 짜릿한 감각이 찌르르 울렸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확실히 사마초와는 급이 다르다.’
이서휘는 강자를 만났다는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좋구나…….’
탐색을 벌이던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이서휘는 독고극의 강맹한 검을 막자마자, 부웅 하며 반격에 나섰다. 수비만을 강요하는 수법이란 것을 파악한 독고극은 검에 내공을 잔뜩 주입하고 있었다.
채앵!
독고극은 이서휘의 공세가 이어질 때마다 의도적으로 빗겨 막았다. 이서휘의 검이 조금씩 비틀리면서 공격을 주도하는 기세를 잃고 있었다.
이서휘는 깜짝 놀랐다.
‘멋지군.’
독고극은 이서휘의 검이 자신의 내공에 튕겨 나가는 것에 맞춰 추가 공격을 더해 나갔다. 자연스럽게 독고극이 공세로, 이서휘가 수세로 돌아섰다.
군림맹 전체가 고요해졌다.
이서휘는 독고극이 또 다시 내공을 실어 검의 방향을 비틀자 입꼬리를 올렸다. 멋진 한 수였기 때문.
‘독고 형, 역시 훌륭해.’
이서휘의 미소는 감탄의 의미다. 그러자 저 무뚝뚝한 독고극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강자와 강자의 만남. 사내와 사내의 부딪침이 두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이서휘, 정말 강해졌구나.’
독고극이 강맹한 공격을 퍼부었다.
챙챙챙챙!
처음으로 이서휘가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이서휘는 여전히 침착했다. 독고극이 전진하고, 이서휘가 물러났다. 내공의 힘이다. 이서휘는 수세에 몰리면서도 독고극의 검을 유심히 바라봤다.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빈틈을 찾는 중이었다.
‘내공이 있어야 뚫을 수 있는 빈틈 밖에 안 보이는군. 그렇다면?’
이서휘는 독고극이 가장 강맹하게 반격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검을 내질렀다. 독고극의 표정이 곧장 변했다.
‘건방지다!’
독고극의 눈빛이 사나워지면서 뻔한 의도로 날아오는 검을 강맹하게 후려쳤다.
파앙!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검과 팔이 튕겨 나갔다.
그때였다.
이서휘는 튕겨 나온 반동의 힘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어 질풍처럼 몸을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발검과 납검도 필요 없었다.
이서휘의 팔꿈치가 먼저 밖으로 나오고 뒤따라 이서휘의 검이 진격했다. 독고극의 내공을 교묘하게 이용한 터라 힘이 배로 실렸다.
검을 겨루는데 설마 이서휘가 등을 보이면서까지 초식을 구사하리라 생각했을까? 적어도 독고극에겐 아직 그런 경험이 없었다. 당황했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이서휘의 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독고극도 무시 못 할 군림맹의 기재(奇才)다. 독고극이 눈을 부릅떴다.
‘승부다!’
독고극은 찰나의 순간에 완벽한 월행잔상(月行殘像) 초식을 펼쳤다. 과연 독고극이다, 할 수 있는 기민한 움직임이다. 반원이 아니라, 완벽하게 둥근 보름달의 잔상이 펼쳐지면서 진격하는 이서휘의 검을 가뒀다.
이서휘의 검과 독고극의 월행잔상 초식이 맞붙었다.
쩌엉!
순간 독고극은 이겼다고 생각했다.
‘됐다!’
이서휘의 검이 방향을 잃고 튕겨났다. 독고극이 남은 힘으로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 찰나, 이서휘는 월행잔상에 부딪쳐 튕겨나온 힘을 고스란히 받아내어 공중으로 솟았다. 순간 거의 엎드려 누운 자세로 변했으나, 위치가 높아 독고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고극의 후속 검초가 뻗어 나왔다.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공중에서 예비 동작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암염심검의 환(丸)을 내뻗었다.
암연심검의 환(丸)은 한 점으로 기운을 모은 검기다. 상대방 얼굴에 난 점을 찌르라면 그대로 관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게 뻗어 나갔다.
쏴아아악!
쏴아아악!
독고극의 검과 이서휘의 검 끝이 만나는 듯 싶더니 아슬아슬하게 교차했다. 마치 검과 검이 맞붙어 이동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맞붙어 교차하는 두 검.
승부의 관건은 속도.
이서휘의 검이 더 빨랐다.
검 끝에 기운을 모았기에 전해지는 내공의 집중력도 더 좋았다. 이서휘는 자신의 어깨까지 내공을 주입해 내려찍듯이 검을 뻗었다.
떵! 하고 낯선 충격음이 퍼졌다.
이서휘의 검이 독고극의 검병을 찔렀던 것. 정확하게는 검신이 끝나는 부분, 격(格)을 찌른 것이었다.
“윽.”
독고극의 어깨로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이서휘와 달리 어깨를 보호할 수 있는 내공을 준비하지 않은 상태라 타격이 컸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검병 윗부분을 동시에 찌르고, 그 힘으로 조금씩 바깥으로 밀려났다.
독고극이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가볍게 땅에 내려선 이서휘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챙챙챙!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이서휘의 검을 막은 독고극은 그제야 욱신거리는 고통이 어깨로 밀려왔다. 이를 악문 독고극이 검을 내질렀으나 힘도 자세도 평상시와 달랐다.
이서휘는 독고극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누름과 동시에 반원을 그려내며 독고검의 검을 감싸는 힘으로 튕겨 냈다.
독고극의 검이 핑그르르 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독고극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튕겨 나간 자신의 검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서휘는 후속 공격을 펼치지 않고 검을 내리면서 말했다.
“독고 형…….”
이서휘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독고극이 왼손을 들어 제지하곤 바로 입을 열었다.
“졌다, 졌어.”
독고극은 오른 어깨가 탈골된 것처럼 욱신거렸다
지켜보던 송정후가 빙긋 웃으며 다가와, 이서휘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번 비무, 질풍검대 이서휘 부대주 승리.”
“오오오오오!”
“오오오! 이서휘 부대주가 이겼어!”
“질풍검대가 이겼어?”
“독고극도 떨어지다니 허 이게 무슨 일인가, 천룡검대가 다 떨어졌단 말인가!”
누군가는 저희끼리 하는 도박에 참여했었는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망했어. 독고극한테 걸었었는데.”
구경하는 자들의 웅성거림이 한참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독고극을 꺾고 내려오자 환호성이 터졌다.
질풍검대 대원들이 마치 자신이 이긴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서휘도 말문이 탁 하고 막혔다.
‘아, 녀석들 정말 좋아하네.’
장시우도 이번에는 말릴 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질풍검대는 공공연하게 군림맹의 꼴등 검대라 여겨졌다. 그동안에 쌓여 있던 각자의 응어리들은 이서휘와 장시우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준결승이 시작되자 장시우가 겨우 대원들을 자제시켰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앉아라. 서휘가 우승하면 그때 마음껏 발광하든 지랄하든 해라. 이것들아! 아직 우승한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난리냐? 앉아!”
장시우의 호통에 대원들이 히죽 히죽 웃으며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시작된 준결승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소천의 천위검법이 모용벽을 압박하고 있었다. 모용벽은 백리소천의 중검을 이화접목(移花接木)으로 되돌릴 방법을 생각하며 초식을 이어나가는 눈치였다.
이서휘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비무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장시우에게 말했다.
“형님.”
“응.”
“백리소천의 검법, 어떤 것 같습니까?”
“흐음, 저 정도면 천위검법의 중검(重劍)과 만변(萬變)의 묘리까진 얼추 흉내 낼 수 있겠어.”
“어떤 건데요?”
장시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과거에는 본래 이서휘보다 강한 자들이다. 갑자기 이서휘가 이들을 압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서휘는 잠자코 장시우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 연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백리소천의 검법을 설명하기 위해 장시우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이서휘를 쿡 찌르며 말했다.
“무겁게 찌르면 중검. 원리는 모르겠으나 이것과 자주 부딪치면 너의 내공이 먼저 바닥난다. 이해 가지?”
“네.”
장시우는 다시 이서휘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찌르는 순간에 손가락을 탁 튕겼다.
“가볍게 나가면 이처럼 후속타를 준비하는 것이고. 여기까지는 이해 가지?”
“네.”
장시우가 이번에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이서휘를 바라봤다.
“만변의 묘리는 검 끝이 세 개로 보일 거다. 보아하니 일성 정도의 성취니까.”
장시우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면서 손가락 세 개로 이서휘를 찔렀다.
“여기에 중검의 묘리를 섞는다. 그러면 셋 중의 하나는 무거울 것이야. 녀석이 철저하게 연습했다면 셋 다 무겁거나, 셋 다 가볍거나, 둘 중 하나만 무겁거나. 변화무쌍하겠지. 잘 대응할 수 있겠느냐?”
이서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백리소천의 천위검법을 어떻게 박살낼지 생각했다.
“…….”
실전에서도 임기응변을 펼치면 충분히 백리소천을 압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장시우의 설명을 묵묵히 경청했다.
잠시 후 이서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형님, 고마워요.”
“뭐야? 벌써 해결 됐어?”
“네.”
장시우가 눈을 껌벅이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려줘. 궁금하다.”
이서휘가 장시우에게 파훼 방법을 설명했다. 듣고 있던 장시우의 눈이 커지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가능하겠냐?”
“보여 드리죠.”
장시우는 이서휘에게 들은 방법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통할 것 같기도 하고.”
무대 위에는 이미 백리소천이 모용벽을 천위검법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승리를 거두고 내려간 상태였다. 송정후 회주가 잠시 휴식 시간을 갖겠다고 발표했다.
잠시 후 무대 위에 오르라는 명이 떨어지자 이서휘는 질풍검대를 바라봤다. 그렇게 웃고 떠들던 녀석들이 결승전이 시작되자 이제는 저희가 결승에 나가는 것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서휘와 대원들의 시선이 얽혔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이서휘도 대원들도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웃고 떠들던 시끄러움이 사라지자 대번에 쑥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지켜보던 장시우가 근엄한 얼굴로 판을 깼다.
“후후후, 드디어 결승전이군. 서휘야. 결승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다.”
장시우가 되도 않는 분위기를 잡자 이서휘가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라. 이서휘 부대주. 나의 오른팔! 무대에 올라 질풍검대의 명성을 군림맹에 떨쳐라.”
이서휘는 한숨을 내뱉으며 장시우의 말을 무시하고 질풍검대 대원들을 돌아봤다. 다들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서휘가 정말 멋없는 말투로 순박하게 말했다.
“질풍검대, 이 형님을 믿느냐?”
“네, 부대주님! 네, 형님! 믿습니다. 이기고 오십시오!”
“믿어라. 내가 이긴다.”
“믿습니다!”
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장시우가 흐으으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 믿느냐? 라니, 유치하지만 은근히 든든한 말이구나.”
이서휘가 어떻게든 좀 웃겨 보려는 장시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녀석…… 많이 컸다. 가라!”
이서휘가 무대로 향하는데 장시우가 끝까지 흰소리를 내뱉었다.
“후후. 내가 정말 저 녀석 인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원. 이제야 녀석이 제 몫을 다하는구나. 부대주 비무전에 결승까지 오르다니. 코 흘리던 거를 받아준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막내 강기찬이 순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주님이랑 부대주님이 같이 입맹하지 않으셨던가요?”
“시끄럽다.”
어떻게든 이서휘의 긴장을 풀어주겠다고 애쓰는 장시우의 말들이다. 무대로 향하던 이서휘가 낮게 웃었다.
“후후.”
그러나 장시우의 걱정과는 달리 이서휘는 긴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이서휘의 계산은 끝난 상태. 이서휘가 그리는 그림엔 이미 백리소천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 ☆
결승전을 앞두고 백리세가 가주 백리한도 백리소천을 조용히 불러 한마디를 하고 있었다.
“소천아.”
“네.”
“결승까진 생각대로 잘 올라왔다만…… 예상했던 결승 상대가 아니구나.”
“그렇습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보아하니 이서휘는 독고극보다 더 어려운 상대다.”
“네?”
백리소천이 놀라자 백리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독고극을 꺾을 때 이서휘가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이더냐?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망이로구나.”
백리소천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서휘와 독고극이 펼쳤던 비무를 잠시 생각해보니 가주의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접전을 펼친 것처럼 보였으나 이서휘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채로 독고극에게 승리했지 않은가? 자신과 독고극이 겨뤘다면 누가 이기든 분명 엄청나게 고생했을 터였다. 가주의 말대로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백리한이 말을 이었다.
“너보다 강하다고 생각해라. 침착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야. 자칫하면 네가 그토록 원하던 자강검이 질풍검대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신중하게 임해라.”
“네, 알겠습니다.”
백리소천은 백리한의 말에 잔뜩 긴장한 채로 물러났다.
☆ ☆ ☆
이서휘는 백리소천을 기다리면서 무대를 한번 둘러봤다. 이서휘를 호의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도 있었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도 있었다.
이서휘는 백리소천이 등장하자 그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봤다. 자신만만하던 표정을 지우고 신중해진 기색이 역력했다.
이서휘는 저 신중해진 기색마저 심리전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비무가 시작되었다.
다른 비무와 다르게 검을 쥔 두 사람의 탐색전이 다소 길게 이어졌다.
선공은 백리소천이 펼쳤다.
백리소천은 시작하자마자 천위검법의 중검의 묘리를 담아 휘둘렀다.
챙챙챙! 채앵!
이서휘와 백리소천의 검이 연달아 맞붙었다. 이서휘는 검을 부딪치자마자 손목이 찌르르 울렸다. 그런데 백리소천은 긴장한 상태라 후속 공격을 바로 펼치지 않고 다시 탐색전에 들어갔다.
이서휘는 속으로 빙긋 웃었다.
‘너무 신중한데?’
상대방의 의도를 읽은 이서휘.
‘장기전을 하자는 셈이군.’
이서휘는 백리소천이 중검으로 천천히 내력을 깎은 다음에 승부를 걸 것이라 내다봤다.
백리소천이 다시 공격을 펼쳤다.
두 번은 가볍고 한 번은 무겁다. 이서휘는 힘을 빼고 대응했다.
챙챙, 까앙!
이서휘의 팔이 젖혀지자, 백리소천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공은 비슷하군.’
신중하게 공격하던 백리소천은 백리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반면에 이서휘는 의도적으로 백리소천이 자신감을 되찾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야 백리소천이 중검을 자주 사용할 것이라 예상했다.
‘녀석이 중검을 펼칠 때 승부를 본다.’
이서휘가 그린 그림은 백리소천이 강맹한 중검을 내지를 때 완성된다. 이서휘가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자들은 두 사람이 평범하게 초식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리소천은 중검을 운용하면서 평범한 내공부터 강맹한 내공까지 섞어 이서휘를 찌르고 있었다.
챙챙챙!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떠엉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리고 두 남자가 뒤로 발을 끌면서 밀려났다.
백리소천이 자세를 바꿨다.
‘역시 중검만으로론 안 되겠는데.’
백리소천이 천위검법(天威劍法)을 펼치며 만변(萬變)의 묘리를 활용해 공세를 펼쳐 나갔다.
순간, 백리소천의 검이 세 자루로 변해 찔러 들어왔다.
촤르륵!
이서휘가 쾌검을 펼쳐 세 자루를 빠른 속도로 모두 쳐냈다.
휙휙챙!
그런데 두 번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마지막 검을 쳐낼 때야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부터 변수가 생겼다.
장시우는 백리소천이 천위검법의 일성을 성취했을 거라 내다봤었다. 그러나 백리소천의 성취는 그 이상이었다.
촤라락 소리가 펼쳐지면서 속도가 붙자, 백리소천의 검 끝은 세 개에서 여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이서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공력의 소비가 있더라도 전부 날려 버리자.’
☆ ☆ ☆
이서휘는 백리소천의 만변의 묘리를 암연심검의 파(波)로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파앙!
백리소천은 자신의 검이 무력하게 튕겨 나오자 화들짝 놀랐다.
‘사마초의 목검을 날려버렸던 공격이구나.’
백리소천은 그 순간에 만변의 묘리가 비효율적인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이서휘가 의도한 바였다.
장님으로 살았던 이서휘다. 백리소천의 현란한 초식을 눈으로 보자 욕심이 생겼다.
‘더 보고 싶다.’
눈으로 본 백리소천의 다양한 초식이 머리에 입력되고 있었다. 상대와 같은 수준의 내공을 가지고 검을 겨루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서휘는 악당이었다. 백리소천의 검을 구경하고 묘리를 빼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승부는 백리소천의 천위검법을 다 구경했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결정이 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서휘는 교묘하게 밀리는 척 연기를 했다.
‘숨겨라.’
이서휘는 컴컴한 어둠을 만들어 내어 의도를 숨겼다. 자타공인 군림맹의 최강자라는 맹주 남궁위나 수호세가 가주들까지도 속이고 있는 걸까? 그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서휘는 그들마저 속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움직였다.
반면에 백리소천은 슬금슬금 중검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공을 오롯이 실은 중검을 내뻗자 이서휘가 짐짓 대응하기 싫다는 식으로 후퇴했다. 그 후에도 이서휘가 지속해서 훌쩍 물러나거나 검을 부딪치지 않도록 대응하자 백리소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중검으로 승부를 본다.’
백리소천은 기회를 엿보며 일반적인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움츠렸던 이서휘가 다시 활기를 띄며 공세를 펼쳤다.
챙챙챙챙챙!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지고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다 백리소천이 만변의 묘리로 검을 내지르면, 이서휘가 사람이 달라진 듯 거센 반격을 펼쳤다.
때로는 쾌검으로, 챙챙챙!
때로는 암연심검으로, 파앙!
백리소천이 만변의 묘리를 사용하지 않은 묵직한 중검을 사용하면, 이서휘는 내공을 뺏기기 싫다는 듯 몸을 내뺐다.
이서휘의 연기에 백리소천은 자연스럽게 중검으로 승부를 끝내리라 마음을 먹었다.
백리소천은 자신감을 가지고 이서휘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한참을 겨뤘다. 이서휘는 천위검법의 묘리를 다 구경했다고 판단하자 서서히 미끼를 던졌다. 백리소천의 화룡검대와 백리세가에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이길 수 있다!’
반면에 질풍검대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백리소천이 강하긴 하구나.’
드디어 비무는 종국(終局)에 다다랐다.
순식간에 넓은 비무장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두 사람이 원을 그리면서 이동했다.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 경쾌한 울림이 군림맹에 가득했다.
챙챙챙챙챙챙!
공격하는 백리소천도 대단했지만 군림맹 사람들은 이서휘의 굳건한 방어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이때부터 백리소천이 이기기 바라는 사람들보다, 자꾸만 몰리고 있는 이서휘가 반격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서휘가 계속 물러나자 백리소천은 승부를 걸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끝내자.’
백리소천은 이서휘를 무대 끝으로 몰아세우며 생각했다.
‘반격을 조심하자. 독고 부대주도 그것에 당했으니.’
백리소천은 이서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훌쩍 솟구쳐서 과감하게 중검을 내질렀다.
이서휘는 막을 수밖에 없었다. 떠엉!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서휘의 검이 튕겨 나갔다.
‘좋다! 다시!’
백리소천은 이서휘의 반격을 기다리며 중검의 묘리를 준비했다. 제법 큰 공력이 들어가자, 백리소천의 장검에서 희미하게 우우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이서휘의 눈이 말 그대로 귀신처럼 번뜩였다. 도망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백리소천이 중검을 내지르자, 이서휘도 피하지 않고 암연심검의 파를 준비해 내밀었다.
힘과 힘의 충돌.
콰아아앙!
두 사람이 충격으로 간격이 벌어졌다. 백중세다. 백리소천은 마치 관성에 젖은 것처럼 다시 중검을 내질렀다.
이서휘가 지친 듯이 검의 높이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백리소천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또 다시 백리소천의 검과 이서휘의 검이 강맹한 힘을 내뿜으며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이서휘의 팔이 부르르 흔들렸다. 백리소천은 승리를 목전에 둔 것처럼 미소가 번지면서 검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준 채로 중검을 뻗었다.
‘끝이다. 이서휘, 무대 바깥으로 날려버려 주마!’
백리소천이 공세를 펼치면서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중검을 준비해 검을 휘둘렀다.
우우우웅!
이서휘는 무표정하게 암연심검의 파를 준비했다.
쉬이이익!
두 검이 격돌했다.
그러다 이서휘의 검과 백리소천의 검은 쩌엉……! 소리를 마지막으로 동시에 부러졌다.
“헉!”
지켜보던 자들이 동시에 외쳤다.
백리소천의 장검과 이서휘의 장검은 같은 대장간에서 만들어져 지급된 부대주 전용 장검이다. 두 검이 혼신의 힘을 다한 내공이 주입되어 부딪쳤다.
강도(强度)는 거의 같다.
이서휘는 두 사람의 내공과 검의 강도를 미리 계산해 충분히 부러질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고, 그 예상은 현실이 됐다.
이서휘의 예민함과 경험이 만들어 낸 결과였지 결코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장검이 동시에 부러졌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서휘는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의도한 바였고, 백리소천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는 점.
이서휘는 중검의 특징을 첫 비무 때부터 눈여겨봤다. 장시우에게 물어보기 전에 염두에 뒀던 일이다. 반면에 이서휘가 어떻게 할 것이라고 먼저 이야기를 들었던 장시우는 이 비무전을 지켜보면서 시야와 사고가 넓어지고 있었다.
백리소천의 시선이 불가항력으로 부러진 장검에 머무르는 찰나, 이서휘의 좌장이 귀신처럼 뻗어 나왔다.
백리소천은 아주 잠깐이나마 현실이 느려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서휘의 좌장은 비무가 시작되기 전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반면에 백리소천 자신은 어떤가?
검이 부러진 것에 당황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헛손질을 했다. 황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으나 힘이 제대로 실릴 리가 없었다. 백리소천은 그때 어처구니가 없게도 날아오는 이서휘의 장력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저거 아프겠는데?’
이서휘의 좌장과 백리소천의 좌장이 동시에 부딪쳤다.
콰아아앙!
모든 게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백리소천은 이서휘의 좌장을 받아치다 바닥을 우당탕 소리를 내며 굴렀다.
“내…… 자강검이…….”
백리소천은 무슨 말을 내뱉다 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송정후마저도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장력을 겨루는데 누가 이길 줄 알고 막았겠는가. 멀뚱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송정후는 어렴풋이 이서휘가 일부러 검을 부러뜨린 것임을 깨닫고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이서휘와 나가떨어진 백리소천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좌중이 잠시 고요했다.
그러나 그 정적을 깨며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놈!”
백리세가 가주 백리한이 저도 모르게 앉아 있던 의자 한쪽을 일장으로 부수고 일어났다. 다른 가주들이 쳐다보자 백리한은 끌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멍청한 놈! 자강검을 주겠다는 데도 못 먹는 놈이라니!’
자강검을 맹주에게 계속 추천한 백리한이 어찌할 줄 몰라 하자, 그 작태를 지켜보던 천뢰각주 한신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송정후 회주가 비무의 결과를 선언했다.
“부대주 비무전 최종 결과, 질풍검대 이서휘 부대주의 우승이오.”
이윽고…… 한참을 서로의 얼굴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보던 질풍검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무대로 뛰어나갔다.
지켜보던 장시우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서휘가 자신에게 설명해준 그대로 비무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대원들을 통제하는 것도 잊은 채 비무의 그림을 한참이나 되새기고 있었다.
☆ ☆ ☆
이서휘는 무대로 달려오는 질풍검대원들을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자 이건영이 대원들을 멈췄다.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눈빛과 입모양으로 이건영에게 전달했다.
‘올라오지 마라.’
질풍검대원들이 무대 위에 올라오면 이서휘를 축하하느라 호들갑을 떨 게 분명했다. 이서휘의 생각은 달랐다. 축하는 우리끼리 모였을 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대신 이서휘는 쓰러진 백리소천을 살폈다. 백리소천이 기절한 것은 이서휘도 뜻밖이었다. 내상을 입었다기 보단 너무나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백리소천이 놀란 것이라 생각했다.
이서휘가 쓰러진 백리소천에게 내력을 살짝 주입하자 그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서휘는 백리소천을 일으켜 세웠다.
화룡검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와 백리소천의 상태를 살피자, 이서휘는 화룡검대 무인들에게 백리소천을 넘기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부러진 장검을 주워 무대 아래 대기하고 있는 이건영에게 넘겼다.
“챙겨 다오.”
“네.”
의미가 있는 검이라서 보관할 생각이었다. 이서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대원들을 향해 씨익 웃어준 후 무대 주변을 돌아보며 예를 올렸다.
천뢰각의 무인이 자강검을 들고 무대에 올라 송정후 회주 옆에 섰다. 그러자 송정후 회주가 이서휘에게 자강검을 건넸다. 이서휘는 자강검을 공손하게 받아들고 다시 맹주 쪽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
송정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질풍검대 이서휘,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회주님.”
군림맹의 시선이 이서휘에게 모였다. 이서휘도 군림맹의 무인들을 돌아봤다. 호들갑을 떨면서 올라올 뻔 했던 질풍검대를 막은 탓도 있고 해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이서휘가 천천히 군림맹의 군웅들을 돌아보며 일일이 예를 올리자 그제야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가던 이서휘와 천뢰각주 한신의 눈이 마주쳤다.
한신이 아무 말 없이 씨익 웃었고, 이서휘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 ☆ ☆
밤이 되어서야 들떠 있던 군림맹의 분위기가 겨우 가라앉았다. 이서휘는 비무 이후에 진행된 행사를 마저 다 끝낸 후 질풍검대로 돌아오고서야 숙소에 홀로 남게 되었다.
책상에는 부러진 장검과 자강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마치 엇갈린 운명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서휘는 부러진 장검을 쥐고 문득 옛 생각이 나서 중지와 검지로 검신을 부러뜨릴 의도로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나 내공을 끌어올려 보아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서휘는 칠흑검을 얻기 전, 사용하던 장검이 군림맹 시절에만 세 번이나 부러졌었다.
한 번은 연무장에서 겨루는 도중 실수로 기둥을 내려쳐서 부러졌고, 두 번째는 훗날 이서휘와 함께 사패라 불렸던 도왕(刀王)과 겨루다 도왕의 날카로운 보도(寶刀)에 의해 잘려나갔다. 생사를 건 대결이 아니었기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훗날 사패가 되어 다시 만난 도왕이 이서휘를 놀릴 때 종종 꺼내는 이야기였다.
세 번째가 악몽이었다.
질풍검대가 구화산으로 임무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적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문제는 백도맹도 같은 제보를 받아 구화산에 와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이서휘의 검은 임무 수행 도중에 난입한 정체불명의 고수에게 부러지고 뜻하지 않게 백도맹과도 마찰이 있었다.
이서휘는 부러진 검을 보며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서휘는 부러진 검을 허공을 향해 쓱 내밀어 보았다.
휙……!
당시, 이서휘가 그 자의 얼굴을 노리고 장검을 찔러 넣었다. 그 자는 고갯짓으로 이서휘의 장검을 피하더니 내력을 주입한 검지와 중지로 이서휘의 장검을 부러뜨렸었다.
일대일의 대결이었다면 이서휘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그러나 질풍검대는 그 자를 잡지도 못하고 농락만 당했었다. 이서휘는 그때 두 눈마저 잃었다.
이서휘는 숙소를 드나들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되새길 생각으로 집무실 책상 뒤편의 장식대에 부러진 검을 올려놨다.
이서휘는 부러진 검에게, 두 눈을 잃게 만든 놈에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잊지 않으마.”
이서휘는 자강검을 바라봤다.
칠흑검이 묵직하고 서늘한 느낌이라면 자강검은 칠흑검에 비해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검집도 전체적으로 자색빛이 감돌았는데 금색 문양이 양쪽에 덧씌워져 있었다.
이서휘는 검을 뽑아 보았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듯 자강검이 검신을 드러냈다. 검신은 전체적으로 연한 은색의 빛깔이었는데 창문을 열어 달빛에 조금 반사해 보니, 아주 엷게 자색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서휘는 무엇보다 자강검이 가벼우면서도 다른 장검보다 한 뼘 정도가 긴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서휘는 왼손으로 검을 쥐고 오른 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겨봤다. 떠엉 소리가 나면서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검객이 검을 얻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이서휘는 자강검을 쥐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이서휘는 새로 얻은 자강검으로 연무장의 공기를 갈랐다. 손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군림유하검을 한 차례 펼쳤다. 자연스럽게 내공이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후에는 월야휘검을 펼치면서 부대주 비무전을 복기했다.
특히 백리소천과의 마지막 비무를 떠올리며 암연심검의 파를 휘둘렀다.
휘이이잉!
자강검이 바람을 가르며 뻗어 나갔다. 자강검이 검집에서 멀어졌을 때 이서휘는 내공을 주입해 손목을 비틀어 빠른 속도로 납검했다.
타앙 하는 소리가 적막한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잠시 이서휘가 멍하니 서 있었다.
‘뭐였지?’
이서휘는 다시 자강검을 뽑아 내리쬐는 달빛에 검신을 비춰보았다. 숙소에서 봤을 때보다 자장검의 검신이 미세하게나마 조금 더 진한 자색빛을 내뿜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이서휘는 검을 쥔 손에 내공을 주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순은의 검신에 자색 입자가 조금 더 모인 것처럼 색이 변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내공을 최대한 끌어내어 검을 쥐었다. 그러나 큰 변화가 없었다. 마치 네 내공은 여기까지다, 라고 자강검이 말하는 듯 했다.
저도 모르게 이서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강검을 검집에 꽂았다. 좋다는 소문만 알고 있을 정도였지, 자강검에 대한 내력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이서휘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 검의 주인이 누구라고 했더라……. 전대 고수 신명후? 시우 형님에게 한번 물어봐야겠군.’
이서휘는 지켜보는 자가 있을지 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숙소로 들어가 자강검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다음 날 오전부터 장시우를 만나기 위해 집무실을 찾았던 이서휘는 두 번의 걸음을 허탕 치고 세 번째가 돼서야 장시우의 집무실 앞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형님.”
“어, 서휘야. 자강검은 어때? 한 번 구경한다는 게 깜박했네. 계속 임무 배분 회의 때문에 불려갔었다.”
“네, 여쭤볼 것도 있어서요. 안 바쁘시면 잠시 얘기라도.”
장시우가 이서휘의 표정을 보니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는 것 같았다. 장시우가 몸이 찌뿌둥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네.”
“신명후?”
“네.”
“전대 고수라고만 들었지 나도 아는 바가 없는데……. 아마 우리가 입맹하기 전부터 보고에 있던 검일 수도 있지. 근데 왜?”
이서휘가 대답했다.
“검이 좀 특이합니다. 검신도 길고요. 어떤 검법을 사용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특히 가장 이상한 것은…… 색이 변합니다.”
“색이 변해?”
이서휘가 자강검을 반쯤 뽑아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이서휘의 말처럼 희미하게나마 자색이 짙어졌다.
장시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음.”
“특이하죠?”
장시우가 말했다.
“맹주님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은데, 아니다. 먼저 보고(寶庫) 관리자가 서류를 관리하고 있을 테니까 그쪽부터 알아보자.”
“알겠습니다.”
장시우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천뢰각주님에게도 여쭤봐라.”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장시우의 집무실을 나와 자강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정체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