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에 비친 달을 보다-2화 (2/43)

<2장. 수련>

이서휘가 강기찬을 노려보며 말했다.

“흐흐흐. 너 내가 백리연 얘기 하지 말라 그랬지.”

“예? 그랬나요? 금시초문입니다.”

이서휘는 뜨끔해서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하지 마. 앞으로, 알았어?”

“네.”

당시, 잠깐이나마 백리세가의 여식이 이서휘를 찼다는 소문이 도는 중이었다. 그저 몇 번 대화를 나눠봤을 뿐이지 사실이 아니었다.

이서휘가 멋쩍게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자, 시작하자.”

이서휘가 수련을 시작하자고 해도, 대원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놈들을 어떻게 정신을 차리게 한다?’

이서휘는 미소를 띤 채 질풍검대원들을 바라봤다. 서서히 침묵이 찾아왔다.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가라앉자 이서휘가 말했다.

“자, 군림유하검을 펼친다. 건영이 앞으로.”

“네.”

군림유하검을 가장 깔끔하게 펼치는 이건영을 앞으로 불러냈다. 이건영이 앞으로 나오자 이서휘는 오랜만에 이건영을 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질풍검대에서 이서휘가 가장 믿는 대원이다. 실력도, 인성도 좋은 대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들은 이건영의 최후는 무척 장렬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건영뿐만이 아니다. 군림맹 전체가 쓰러졌었으니까. 도망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었다.

이서휘는 속으로 건영이에게 인사했다.

‘건영아, 오랜만이다.’

이서휘가 말했다.

“자, 건영이의 호흡을 따라서 펼친다. 건영아 시작.”

“네.”

이건영이 장검을 쥐고 왼손가락 두 개로 결을 맺었다. 대원들이 급히 자세를 잡았다. 이건영의 손가락이 검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 대원들이 동시에 발 구르는 동작과 기합을 함께 내질렀다.

“핫!”

이어서 군림유하검이 동시에 펼쳐지고 이서휘는 팔짱을 낀 채로 대원들의 자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법 동작에 절도가 있다. 내공이 부족한 대원들은 검을 내지를 때마다 동작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조금만 더 수련하면 자세가 잡힐 듯싶었다. 그러다 아주 엉망인 두 사람을 발견한 이서휘.

‘그래, 이 녀석들이 문제였지.’

이서휘는 대원들의 군림유하검을 끝까지 지켜본 후 짧게 박수를 쳤다.

“잘했다. 다들. 아, 막내들 빼고.”

군림유하검은 무공이지만 일종의 군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료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질풍검대끼리도 맞춰야 하지만 다른 검대와도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쉽게 볼 일은 아니었다. 이서휘가 보기에 막내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서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 잠시 기찬이와 주연이만 남고 나머지는 개인 수련해라. 건영이가 통솔한다. 외출은 금지.”

“알겠습니다.”

대원들이 막내들을 놀렸다.

“기찬아! 주연아! 수고해!”

대원들이 남은 강기찬과 설주연을 보고 웃으며 난리가 났다. 대원들이 키득대며 흩어지자 이서휘는 강기찬과 설주연을 바라봤다. 강기찬은 입이 한 사발이나 나와 있었고 설주연은 큼직한 눈동자를 굴리며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기찬아, 주연아.”

“네.”

“네.”

혼내려는지 알고 강기찬과 설주연은 기가 죽어 있었다. 무엇보다 부끄럽기도 했다.

이서휘가 강기찬과 설주연을 향해 말했다.

“군림유하검은 뭐라고 그랬지?”

“질풍검대가 맡은 임무입니다.”

검법이 어찌 임무일 수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 임무나 다름이 없었다. 질풍검대 전체가 군림유하검을 펼치면서 다른 검대와 호흡을 맞춰야 했으니까.

개개인의 검법은 각자 사문에 따르든가 독문무공을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군림맹은 문파가 아니다. 세가를 중심으로 뭉쳐 흑도맹 혹은 마도 세력과 전면전이 벌어질 때를 대비한 맹이다.

군림오검대가 대규모 접전을 펼치게 되면 각자의 사명이 따로따로 있었다.

그 중 질풍검대의 임무는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다. 질풍검대 전체가 한 자루의 장검이 되어 적 진영을 질풍처럼 돌파하는 것이 임무다. 천룡검대, 화룡검대, 운룡검대 등도 각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검대 검법을 따로 익히고 있었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기찬아, 주연아. 잘 봐라. 천천히 펼칠 것이니.”

“네.”

강기찬과 설주연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직접 하신다고?’

그때 이서휘는 앞서 이건영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검결을 맺은 후 군림유하검을 펼쳤다.

과거의 이서휘는 이건영이나 다른 고참급 대원들에게 군림유하검을 펼치게 하고 본인은 대원들을 혼내거나 지적을 주로 했었다. 그랬던 이서휘가 지금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군림유하검을 펼치고 있었다.

두 막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서휘는 강기찬과 설주연의 눈이 커지든 말든 정신을 집중해 군림유하검을 펼쳤다.

더군다나 강기찬과 설주연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동작을 이건영보다 훨씬 느리게 펼치고 있었다. 대신 길고 짧은 것, 강할 때와 약할 때는 확실하게 구분해 펼쳤다.

본래 초식은 그 나름의 속도가 있어야 펼치기 쉽다. 지금 이서휘처럼 강제적으로 속도를 느리게 하면 공력이 빠르게 소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휘는 집중력을 발휘해 느릿느릿 군림유하검을 펼쳤다.

느리게 펼치는 게 더 힘든 일이란 걸 알기에 강기찬과 설주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이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휘는 마지막 초식까지 천천히 펼친 후 자세를 바로 잡아 호흡을 내뱉었다.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후우.”

진기가 꽤 소비되는 일이다. 이서휘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진기를 안정시킨 다음에 입을 열었다.

“잘 봤어?

“네!”

“더 느리게 보여줄까?”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부대주님. 잘 봤어요.”

이서휘는 강기찬과 설주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펼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라.”

“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오늘 벌로 군림유하검 삼십 회. 채우고 난 후에 점심을 먹는다.”

이서휘의 말투가 전과 다르게 단호하다.

“네?”

강기찬이 기겁하며 되물었다. 설주연은 강기찬과 동갑인데도 항상 누나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 장소에서 해라. 나도 옆에서 수련을 하고 있을 테니.”

이서휘는 연무장을 벗어나면서 청각에 집중했다. 녀석들이 뭐라고 하는지도 궁금했거니와 장님 때 익혔던 감각을 다듬을 필요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서휘가 조금 멀어지자 강기찬이 설주연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연아. 아무래도 부대주님이 실연당한 게 맞나 봐.]

못 들은 척 천천히 걸어가던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뒤를 홱 돌아봤다.

‘쓰읍, 저 새끼가 근데.’

그때 설주연이 ‘으이구’하면서 강기찬의 머리통을 한 대 딱 때렸다.

그 모습을 본 이서휘가 설주연을 보며 엄지를 척 하고 올려줬다. 그러자 화답하듯 설주연이 귀여운 미소와 함께 엄지를 척 하고 올렸다.

강기찬이 구시렁거렸다.

“아니 들으신 거야? 무슨 엄지야 저건! 이게 말로만 듣던 전음이라는 것이냐? 삼십 회를 언제 해?”

“헛소리 그만하고 연습하자.”

“어, 그래.”

강기찬이 설주연의 말에 껌벅 죽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이서휘는 둘의 대화가 자꾸 귀에 들려 웃음이 터졌다.

“후후.”

☆ ☆ ☆

하루하루 고된 수련을 마무리하고 잠이 든 어느 날이었다.

이서휘는 꿈에서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곳을 홀로 걷는 와중에 이서휘가 중얼거렸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잘하고 있다. 아직은.”

어둠 속에서 맹인이 한 명 걸어나오며 대꾸했다. 이서휘와 똑 닮은 중년의 맹인이었다. 양 눈을 가로지르는 검상이 깊게 패여 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과 주름이 조금 깊게 패인 것, 온통 새카만 검을 쥐고 있다는 게 달랐다.

칠흑검을 쥔 중년의 맹인, 칠흑검제 이서휘가 말했다.

“잊지 말아라. 내가 강했던 이유를. 그리고 적들은 더 강했다는 사실을……”

“잊을 리가 있나.”

“이제 다시 사부님과 연을 맺는 건 힘들겠군.”

“그렇겠군. 그때는 불쌍히 여겨 거둬주셨던 거니.”

“그래도…….”

“찾아뵈어야겠지. 걱정하지 마.”

“걱정은 무슨.”

칠흑검제 이서휘는 그 말을 끝으로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서휘는 새카만 어둠 속을 한참을 바라봤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왠지 가슴 한편이 아렸다. 그가 바로 이서휘 자신이었는데도 그랬다.

이서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꿈에서 깼다.

자기 자신과 헤어지는 느낌이라니, 기분이 아주 묘했다.

그러다 문득 이서휘는 자신에게 강력한 무공을 전수해준 사부님을 떠올렸다.

‘사부님은 어디쯤 계실까.’

맹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청각과 후각 등의 감각을 극한으로 수련했던 이서휘다.

그러다 천운이 닿아 만났던 사부.

전대의 천하십대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검선(劍仙).

검선은 이서휘를 불쌍히 여겼고, 또한 자식처럼 아꼈다.

사부가 없었더라면 칠흑검제 이서휘도 없었을 터.

‘어떻게든 다시 만나 뵙고 싶다.’

이서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 ☆

누군가 무공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으면 금세 소문이 퍼진다.

군림맹에는 명문세가의 자제들이 많았지만 출신이 좋지 않은 자들도 종종 들어온다.

실력이 곧 신분을 증명하는 시대. 군림맹은 세가와 그 세가의 식객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비교적 구성인원이 다양했다.

출세하기 위해 혹은 강해지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무공을 연마하는 자들이 군림맹에 있었다.

회귀한 후 한 달이 지날 무렵, 질풍검대 이서휘가 그런 자로 알려지고 있었다.

질풍검대의 부대주는 수련에 미쳤다고.

소문이 점점 퍼져, 맹의 다른 조직에서 퍼지고 있었으나 이서휘는 연무장에 틀어박혀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서휘는 오전 내내 질풍검대 대원들을 살피고, 오후부터 본격적인 수련에 임했다.

오전에는 군림유하검으로 몸을 풀고, 오후에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격한 수련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 이서휘는 수련 자체가 재미있었다.

내공, 검법, 감각, 비도.

두 눈을 뜨고 수련하니 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이다.

칠흑검제 시절 익혔던 암연심검은 눈을 감은 채로 익혔던 검법이다.

지금은 다르다.

암연심검의 동작이 보였다. 보였기 때문에 더 세밀하게 다듬을 수 있었고, 다듬어 발전시키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서휘는 내공이 부족해 주저앉을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내공이 부족해 휴식을 취할 때면, 감각을 다듬는 수련을 이어나갔다.

‘다음은 감각 수련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눈을 감고 청각을 예민한 상태로 두어 소리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련이 되었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은 후 점점 멀리 나아간다.

그렇게 조금씩 감각이 닿는 거리를 늘리는 방법이었다.

감각 수련은 맹인이었던 이서휘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생존법이다.

과거로 회귀한 지금은 이서휘만의 장점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검법 수련에 집중하다가 기력이 고갈되면 두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감각을 다듬었다.

무엇이 이렇게 이서휘를 몰아세울까.

다름 아닌 천마 때문이다.

그도 어디서엔가 수련을 하고 있을 터. 지금 이 순간도 절대로 허술하게 보낼 수 없는 경쟁의 시간이란 셈이었다.

때문에 이서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자신을 한계선까지 몰아붙였다.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마음속에 되새겼다. 한편에는 이런 마음도 있었다.

‘이래야 두 눈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두 눈을 잃었던 것에 대한 공포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이서휘는 진기가 새롭게 돌아오자 눈을 뜨고 검을 쥐었다. 당장, 자신보다 내공이 높은 자들을 상대로 검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에 대해 고민과 수련을 함께 해나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군림맹에서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질풍검대 연무장으로 질풍검대의 또 다른 부대주인 설진우가 걸어오며 말했다.

“서휘야, 얘기 들었냐?”

“무슨?”

설진우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쪽으로 물품을 실어오던 대완표국이 또 습격을 받았다고 그러네. 내가 또 가게 생겼다.”

“난?”

“그게 말이야. 대주님이 다른 임무도 전달 받으신 거 같다. 막내들은 맹에 남길 거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나서서 전력이 부족할 텐데.”

설진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서휘를 바라봤다. 이서휘는 무슨 임무인지 알고 있었으나 자못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인데?”

“몽성으로 가야 할 거다. 자세한 건 대주님께 들어.”

“몽성? 알았다.”

이서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으나 설진우는 잔뜩 불만 섞인 표정이었다. 지난 임무 때문에 부상을 당한 자들이 아직 복귀하지 않은데다가 연달아 질풍검대로 임무가 떨어지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검대마다 맡은 지역이 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서휘는 그간 충분히 준비를 했기 때문에 덤덤하게 받아 들였다.

‘드디어 임무로구나.’

☆ ☆ ☆

“몽성 지부요?”

“그래.”

질풍대주 장시우가 뒷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몽성의 지부장이 요청했다. 부대주급 포함해서 지원을 요청한다고. 일이 갑자기 몰리네. 인원도 부족한데…….”

“무슨 일로요?”

“몽성에 살인사건이 부쩍 늘었는데 지부에서 처리하기 힘든 놈인 것 같다. 괴이한 무공을 쓴다더라. 몽성 지부는 상회 일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질 않느냐. 이 용모파기(容貌疤記)를 봐라.”

장시우가 지저분한 책상에서 그림 한 장을 찾아 보여줬다. 이서휘는 아는 놈인지라 슬쩍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잡을까요? 아님 죽일까요.”

장시우가 손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하며 대꾸했다.

“죽여라. 지부장의 말로는 동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건영이 정도를 데려가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건영이요? 음,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몽성이 그리 멀지도 않으니.”

“혼자?”

“네, 건영이까지 가면 대원들 수련 시킬 사람도 없습니다. 임무도 임무지만 대원들 통솔할 사람도 부족하고.”

“나도 있는데 뭘.”

“형님, 여기저기 회의다 뭐다 자주 불려 다니지 않습니까. 건영이에게 맡기십시오. 건영이도 이제 그럴 실력이 됩니다.”

“그거야 흐음, 알았다. 네 말대로 하지.”

“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장시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요새 이서휘가 열심히 수련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시우다. 혼자 간다는 점이 걱정이 되긴 했으나, 이서휘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장시우는 지도를 꺼내 펼친 후 말했다.

“이것도 챙겨 가라. 지부에서 올려 보낸 지도다.”

몽성 남부 지역을 그린 지도였는데 군데군데 살인사건이 벌어진 출몰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서휘는 그러나 지도에서 비연객잔이라고 표시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장시우가 이번에는 서랍에서 뭔가를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올릴 때 퉁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묵직한 동전이었다. 이서휘가 장시우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건 뭡니까?”

“뭐긴, 써라.”

“따로 임무 비용이 나올 텐데요.”

장시우가 턱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쓰라면 써. 미안해서 그런다. 가서 맛난 거 먹고 더 좋은 숙박에서 자고. 임무 처리하면 술도 한 잔 하고. 그 전엔 금지다.”

딱히 허튼 일에 쓸 생각이 없는 이서휘인지라 별 생각 없이 주머니를 챙겼다.

“후후, 그럽시다. 쓰지요.”

장시우가 다시 한 번 주의를 줬다.

“무리하진 말고. 힘들 것 같으면 증원 요청을 해라. 위에서는 그저 색주가의 건달 잡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 정도는 아닐 거다. 이상한 무공을 쓰니까 지부에서 요청을 했겠지.”

그 말에 이서휘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뜻을 알고 있는 장시우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

둘이 속한 질풍검대의 위치가 그러했다.

세가에서 차출한 정예들은 대부분 천룡검대나 화룡검대로 배정을 받는다. 무림에서 후기지수로 명성이 있는 자들은 최근 들어 운룡검대나 비룡검대가 채간다. 급여가 일정해도 대우가 달랐다.

세가의 지원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세가의 지원도 없는 질풍검대는 잡다한 임무를 다른 검대보다 많이 배정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질풍검대는 지원자들에게 가장 마지막에 선택되는 검대였다.

이서휘는 걱정하는 장시우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준비해서 잘 다녀오겠습니다. 무리라고 판단하면 지부를 통해 지원을 요청하든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오늘은 좀 늦었으니 내일 출발해라.”

장시우의 말에 이서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예.”

“오늘도 밤늦게까지 수련하지 말고. 좀 이럴 때는 쉬어라.”

“네, 형님.”

이서휘는 장시우의 집무실에서 나와 걸으며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천뢰각에 가서 비도나 암기를 좀 챙겨놔야겠는데…….’

이서휘는 칠흑검제 시절에 익힌 무공 때문에 비도나 암기에 매우 익숙하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헌데, 이서휘는 암기를 챙길 생각보다 ‘천뢰각’이란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이 시기의 천뢰각주가 누구였더라…… 어?’

이서휘는 보고 싶었던 사람이 떠올라 급한 발걸음으로 천뢰각으로 향했다.

☆ ☆ ☆

이서휘는 천뢰각에 들려 비도를 받은 후 늦은 밤까지 넓은 군림맹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천뢰각주는 자리를 비운 상태라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네. 한 번 봬야하는데.’

늦은 밤, 순찰 무인과 야간 경비를 서는 자들을 제외하곤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걷고 있던 이서휘는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될까?’

암행표(暗行飇)를 사용할 생각으로 이서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칠흑검제 때 익힌 경공술로 보폭을 좁게 하고 방향 전환과 자세를 순식간에 변환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이서휘는 일부러 눈을 감았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아찔한 느낌이 다가왔다.

멀쩡한 눈을 감으니까 오히려 몸이 경고를 보내는 것처럼 익숙하지가 않았다.

‘적응이 더 필요하겠군.’

이서휘는 다시 눈을 뜨고 암행표를 펼치며 질풍검대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내공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펼칠 수 있는 한계치가 어느 선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검기를 뿌리는 것보다 내공 소모가 훨씬 적어 암행표는 실전에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보였다.

이서휘는 끝내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지급 받은 비도를 사용해볼 겸 해서 표적이 세워진 곳으로 이동했다.

콱, 소리와 함께 비도가 표적에 꽂혔다.

이서휘는 주변에 지켜보는 자가 없는지 잠시 둘러본 후에 이번에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비도를 던졌다.

이번에도 콱, 소리와 함께 표적에 꽂혔다.

‘기분이 묘하군.’

두 눈을 뜨고 던졌을 때보다 약간 중앙에서 멀어져 있었다.

‘역시 눈의 정확함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이번에는 비도 두 자루를 꺼내 검지와 중지, 약지와 소지 사이에 넣어 동시에 던졌다.

콰콱!

‘다시 한 번.’

이서휘는 눈을 떴다가 감다가를 반복하면서 비도를 던졌다.

그때였다.

“음……!”

이서휘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서휘가 느꼈던 기척은 조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서휘는 빙긋 웃으며 병장기가 진열되어 있는 곳의 어둠을 향해 말했다.

“누구십니까? 나오십시오.”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이서휘는 확신했다.

“나오십시오. 거기 계시잖습니까.”

어둠 속에서, 장삼을 걸친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어? 정말 들켰나? 어떻게 알았지?”

이서휘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 예를 갖췄다.

“천뢰각주(天雷閣主)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인 이서휘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군림맹의 고수들 중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스스로 이서휘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셨나 했더니 일찌감치 술 한잔 하셨군.’

“어, 그래.”

천뢰각주 한신(韓信)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휘에게 다가왔다. 저 옛날 유방의 수하였던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과 이름이 같은 천뢰각의 우두머리.

소탈한 태도를 갖췄으면서도 성격도 생김새도 시원시원한 남자. 다만 단점이 너무 큰 남자였다.

그놈의 술.

대체 어느 누가 술을 거하게 걸친 후에 은신술을 펼친단 말인가?

그런 자가 이서휘 앞에 서 있다.

천뢰각주 한신.

우습기도 했지만 그 또한 한신과 어울리는 일이기도 했다.

한신은 뒷짐을 진 채로 이서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가 요새 무공을 그렇게 열심히 수련한다며? 소문이 다 퍼졌어.”

“아, 그런가요?”

한신이 코끝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부대주 따위가 어떻게 내 기척을 읽었지?”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각주님, 술 좀 적당히 드십시오.”

“그 소리 오늘 세 번째 들었다.”

“그러니까요. 다들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걱정은 무슨. 나더러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은 말이야. 천라각주 놈에게 여자를 만나지 말라는 거나 마찬가지고 네 놈에게 수련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거야. 네가 할 수 있겠어?”

한신이 말한 천라각주(天羅角主)는 유백(劉伯)이란 자로 군림맹에서 한신과 더불어 쌍각의 우두머리다.

이서휘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흐흥. 거 봐라.”

천뢰각주 한신의 별명이 군림맹의 두주불사(斗酒不辭)다.

남들은 전부 무공과 관련된 별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남자의 별호는 줄곧 두주불사였다.

그리고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술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한신은 별호대로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녁엔 늘 취해있었다.

한신은 이른 나이에 급사하게 되는데 그 이유도 술이었다. 만취한 상태에서 사파로 추정되는 다수의 적들에게 야습을 받았던 것.

이서휘는 소식을 듣고 질풍검대와 현장에 도착했을 때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한신에게 죽임을 당한 정체불명의 시체가 십여 구. 그가 머무르던 객잔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늘 술이나 퍼마시는 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서휘는 그 현장을 보고서야 군림맹이 잃지 말아야 할 사람을 잃은 것이구나란 생각을 했었다.

‘이 정도 무위(武威)를 지난 자였다니.’ 하는 심정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

그나저나 그는 왜 그 장소에서 그렇게 무위를 떨치고 죽어야 했을까. 그를 죽인 자들은 누굴까. 왜 이렇게 보고는 늦게 와서 그를 구하지 못했을까.

질풍검대도 늦었고 다른 검대도 늦었다.

그를 호위하는 자들은 왜 없었을까. 또 다른 각이자 정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천라각(天羅閣)은 대체 무얼 했을까 등등.

꽤 오랜 시간 이서휘를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들이다.

그 후 한신의 뒤를 이어 천뢰각주를 차지한 자들은 비리에 많이 연루되어 잦은 자리교체가 있었다는 게 기억할만한 특징이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왔지?’

이서휘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무공 수련에 열중한 이후부터 전생에 만나지 못했던 자들과의 인연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는데 이런 점은 미처 이서휘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한신이 물끄러미 이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천뢰각에서 비도를 가져갔다며?”

이서휘가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한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웬 비도냐? 질풍검대에 비도를 쓸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잘 던지느냐?”

“나름 던집니다.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합니다만.”

“그래? 한번 구경해볼까!”

“네.”

☆ ☆ ☆

이서휘는 침착하게 비도를 던졌다. 던지는 비도마다 표적에 정확하게 꽂혔다.

이서휘가 비도를 던지는 모습을 한참 구경하던 한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너 이거 어디서 배웠어? 배운 티가 역력한데.”

“혼자 익혔습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이놈 봐라. 네가 지금 날 무시하느냐?”

“아닙니다. 각주님, 정말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습니다.”

“개소리. 요새 열심히 수련한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검이나 휘두르던 놈이 이렇게 능숙할 리가 없어.”

이서휘는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실은 정체를 밝히지 말아 달라는 은거 고수에게 몇 수 전수 받았습니다.”

“놀고 있네. 맨날 여기서 검이나 휘두르다가 임무나 다녀오는 놈이 무슨 은거 고수를 만나. 하이고 것도 말이라고. 됐다.”

이서휘는 참 이상했다. 한신,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내인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한신이 말을 이었다.

“그 비도 말이다.”

“네.”

“굉장히 허접스러운 거다.”

“알고 있습니다.”

이서휘의 말에 발끈하는 한신.

“이놈이 또 천뢰각을 무시하네?”

“아, 절대 아닙니다.”

“농담이다. 군림맹 무인들이 비도를 요청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말이지. 요청하면 천뢰각에서 비도를 제작해줄 것이다. 내 말해 놓을 터이니.”

“네? 아, 감사합니다!”

이서휘는 ‘두주불사 한신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하는 심정이었다.

한신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술은 좀 하냐? 부대주면 술도 좀 해야지. 응? 세가의 공자들이랑 어울려서 말이야. 너무 수련만 하면 뼈 삭는다.”

“어째 표현이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술은 적당히 마십니다.”

“적당히가 어디 있어? 이거 주도를 모르는 놈이네. 검 밖에 모르는 고리타분한 놈이야. 너 그렇게 해서는 절대고수가 절대로 될 수 없다. 명심해라.”

“하하하. 네. 명심하겠습니다.”

“농담 같으냐?”

“아닙니다. 제가 조만간 한잔 사겠습니다.”

“됐다. 네 놈 봉급으로 뭔 술을 사. 다음에 마음 단단히 먹고 말해라. 내가 거하게 한잔 사마. 간다.”

“네. 조심히 가십시오.”

멀어지는 한신의 모습을 보며 이서휘는 몽성에 다녀온 후 한신을 다시 찾아가리라 다짐했다. 이서휘의 기억에 그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또 다시 한신에게 위기가 찾아온다면 이서휘 자신이 나서서 막을 생각이었다.

‘군림맹 전체가 살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한신은 반드시 살린다.’

한신과 헤어진 후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다시 살폈다.

‘일전에 느낀 기척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군. 저번에도 지켜보지 않았었냐고 물어볼 것을.’

군림맹에서 이서휘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이서휘가 수련을 하고 있으면 은신술로 몰래 다가와 구경하고 가는 자들이 있었다.

이서휘는 나름 재미있었다.

칠흑검제 시절의 절대감각을 다듬고 있는지라, 이서휘를 지켜보는 자들과 마치 경쟁하듯이 은신술을 파악해내고 있었던 것.

이서휘는 어둠 속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분명 다른 기척을 가진 자가 더 있는 거 같은데.’

다음에는 기척을 잡아내리라 다짐하고 이서휘는 그날 수련을 마무리했다.

☆ ☆ ☆

“부대주님, 잘 다녀오십시오!”

“조심하셔야 해요.”

“저희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이서휘는 대원들을 돌아보며 대꾸했다. 질풍검대원들이 몽성으로 떠나는 이서휘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네는 중이었다.

이서휘는 질풍검대원들에게 일부러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

“건영이 정도면 데려가겠는데 나머지는 내가 못 믿겠다. 건영이 따라서 수련 열심히 하고 있어라.”

불현듯 이서휘의 말이 대원들의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그러나 대원들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서휘는 이건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건영아, 나도 없고 진우도 없으니 네가 좀 수고해줘야겠다.”

“알겠습니다.”

이서휘는 이건영을 끌어당겨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애들 풀어지지 않게 신경 좀 써주라.”

“걱정마세요.”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강기찬이 붙잡고 있는 말에 올라탔다.

“다녀와서 보자.”

“다녀오십시오!”

정오쯤 대완으로 출발해야 하는 설진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서휘야, 설마 당하고 오는 건 아니겠지?”

이서휘가 말 위에서 설진우를 내려다보니, 오히려 이서휘보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이서휘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일 없다. 너나 부상당하고 나서 비무전에서 빠진다고 그러지 말고.”

“비무전?”

“맹주님 축하연에 하지 않겠냐?”

“아, 그때까지 올 수 있을까 모르겠군.”

이서휘와 설진우가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조심해라.’라는 말이 마치 전음처럼 서로에게 전해졌다.

이서휘는 연무장 중앙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시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장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출발하란 듯이 손짓을 했다.

“간다.”

이서휘는 박차를 가해 몽성으로 출발했다. 이서휘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군림맹의 정문을 순식간에 벗어났다.

이서휘는 한 자루의 장검, 여덟 자루의 비도, 신호탄, 지도 한 장과 장시우가 건네준 비상금을 챙겨 나왔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가슴이 탁 트이고 속에서 호연지기가 샘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준비는 철저히 했다.’

이미 일전에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었던 이서휘다. 몽성 중심부에 있는 비연객잔 주변이 종착지이자 결전지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황.

이서휘는 몽성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 ☆ ☆

말도 지치고 이서휘도 휴식이 필요한 시점.

이대로 비연객잔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갈까하던 이서휘는 생각을 바꿔 진기를 가다듬을 생각으로 허름한 객잔에 들어섰다.

이서휘는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칠흑검제 시절에 익힌 운기조식 방법으로 일주천했다.

잠시 후 이서휘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한차례 짜릿한 전율이 감돌았다.

이어 이서휘는 청각을 다듬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허름한 객잔이라 방음이 거의 되지 않아 옆방, 아래층 등에서 떠드는 소리가 이서휘의 귓가에 들렸다.

‘조금 더 멀리 가보자.’

가깝게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객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면서 감각을 다듬었다.

‘음, 아직은 무리군.’

이서휘는 허름한 객잔에서 푹 휴식을 취한 후에 몽성의 중심지역에 있는 비연객잔으로 다시 이동했다.

다음 날, 이서휘는 정오가 되어서야 몽성의 비연객잔에 도착했다.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드는 것에 주력하느라 비교적 늦장을 부렸던 것.

비연객잔은 몽성에서 널리 알려진 장소다.

용모파기가 널리 퍼져 얼굴이 알려졌거나 악명을 떨쳐 유명한 악인들이 아니라면 비교적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객잔이다.

무엇보다 비연객잔의 주인이 그러기를 원했다.

비연객잔은 살인마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거점 중의 하나다. 과거에는 이곳저곳에 매복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다리면 이곳으로 온다.’

몽성의 살인마들은 취객이 많은 비연객잔 주변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취객도 많았지만 상권이 발달해 골목골목 기루나 객잔이 많아 범행을 저지르고 숨기에도 알맞은 장소였다.

이서휘는 비연객잔의 숙박층에 짐을 푼 후 비도와 장검을 챙겨 객잔을 나섰다.

☆ ☆ ☆

이서휘는 해가 질 때까지 비연객잔 주변을 살펴보며 밤을 기다렸다. 살인마나 이서휘나 밤에 활동하길 좋아하는 것은 마찬가지.

어쩌면 이미 근처 어느 객잔에 머무르면서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서휘는 몽성에 등장했던 살인마의 인상착의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엔 죽립을, 얼굴엔 새하얀 분칠을 했다. 눈 밑과 입술은 붉게 칠하고 너풀거리는 백의를 걸치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차림새였다. 한마디로 정신 나간 여인으로 꾸민 복장이었다.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다.

이서휘는 몽성의 건물과 풍경을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문제는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놈들이었다는 데 있었지.’

살인마들의 이름은 운수대통(運數大通)으로 훗날 몽성사귀(夢城四鬼)라 불리는 놈들이다.

첫째가 운귀, 둘째가 수귀…… 이런 식이다.

비연객잔 주변에서 마주했던 놈들은 대귀와 통귀였는데 네 명 모두 피를 흡수하는 마공을 사용하는 살인마들이었다.

드디어 해가 졌다.

날이 더 어두워지자, 이서휘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에 올라 도둑고양이처럼 주변을 살펴봤다.

추격전을 펼칠 경우를 대비해 골목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꼼꼼하게 살펴봤다.

이서휘의 기억에 운수대통 모두 경공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도 이서휘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밤에는 내가 더 빠르다.’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도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을 상대했던 이서휘다.

이서휘는 눈을 어둠에 적응시켰다. 조금씩 주변 사물과 지형이 밝아지고 있었다. 육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법한 현상이다. 그런데 이서휘의 느낌은 다소 기묘했다.

평소보다 더 밝은 느낌을 받았던 것.

‘왜일까?’

집중해서 쳐다보면 더욱 그랬다. 마치 지켜보는 지점에 엷은 빛줄기가 내리쬐는 듯한 현상이 짤막하게 발생했다.

이서휘는 그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절대감각이 육안에도 영향을 주는 건가?’

그러나 현상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고 그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다음 날.

이서휘는 숙소에서 나가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내공 수련에 전념했다. 어차피 살인마들의 습성을 알고 있던 이서휘다. 해가 지고 어두워질 무렵에서야 이서휘는 객잔을 나섰다.

밤새 비연객잔 주변을 조사하다가 새벽녘에서야 들어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서휘는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머물렀다.

‘인내심 싸움이군.’

그렇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지 오 일째 되는 날.

살인마를 잡으러 온 것인지 감각과 내공을 수련하러 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조금씩 장님 때 익혔던 감각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좀 더 멀리 있는 소리를 듣게 되고, 희미한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어두운 곳에서 사물의 윤곽을 전보다 더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육 일째 되는 날 밤.

드디어 이서휘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단말마를 내지를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생명이 꺼질 때 외치는 단말마였다.

이어서 둔기 같은 것으로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이서휘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렸다.

소리는 비연객잔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외곽에서 들렸다. 기루가 빽빽하게 늘어선 골목을 지나 조금 한적한 곳으로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길모퉁이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이서휘의 걸음을 멈췄다.

이서휘가 골목을 돌아서 보니 어두운 곳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고, 살인마는 피가 가득 묻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서휘는 덤덤한 표정으로 살인마의 복장을 확인했다.

‘죽립에 하얀 나삼이면 통귀인가?’

이서휘가 나타나자 살인마는 크게 놀라지도 않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너 혼자냐?”

그때 이서휘의 발 앞에 골목 사이로 뻗어 나온 달빛이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서휘는 두어 걸음을 물러나 어두컴컴한 곳에 자리를 잡은 후에 대꾸했다.

“혼자다. 넌?”

“뭐? 큭큭큭.”

살인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쉰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여자와 남자의 음성이 섞인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혼자면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말투네?”

죽립에 하얀 나삼을 걸친 살인마가 길모퉁이에서 걸어 나와 이서휘가 머물고 있는 어둠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리 안 나와?”

이서휘는 대답 대신에 검을 뽑았다.

스릉.

그러자 장단을 맞추듯 살인마가 도끼를 반대쪽 손에 쥐었다. 손잡이가 매우 짧은 도끼였다. 이서휘는 도끼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맡았다. 저절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서휘는 괜한 말을 던져 도발했다.

“넌 나 혼자 충분하겠다.”

“이 새끼가!”

살인마의 인상이 확 구겨지며 도끼를 쥔 채로 이서휘에게 달려들었다.

☆ ☆ ☆

챙! 챙!

이서휘는 두어 번 살인마의 도끼를 검으로 막은 후 거리를 벌렸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 경공을 펼쳤다. 미리 봐둔 외각 지역의 숲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살인마가 콧방귀를 뀌며 쫓아왔다.

“어딜 도망가려고?”

살인마가 따라붙었다. 이서휘는 지붕으로 솟구친 후 경공을 펼쳤다.

길모퉁이에서 살인마를 상대해도 나쁘진 않다. 그러나 주변에 적이 더 합류하면 곤란해진다. 때문에 이서휘는 비연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고 살인마는 그대로 쫓아왔다.

살인마는 어서 빨리 이서휘를 쳐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서휘가 새파랗게 젊다는 이유도 한 몫을 했다. 그저 애송이처럼 보였으니까. 이서휘는 경공을 펼치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자가 더 없는지 청각을 집중했다.

‘없는 것 같군. 일단은 한 명뿐이다.’

이서휘는 숲에 들어선 후에야 경공을 멈췄다.

충분히 어두운 곳이었다.

“벌써 지쳤느냐?”

살인마가 어느새 쫓아와 도끼를 빙빙 휘두르며 말했다.

이서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숲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통귀야, 오랜만이로구나.”

“허헛, 날 알아?”

“네 형들은 어디 있느냐?”

“푸하하하하. 미친 새끼. 너 뭐야? 행색은 정파 새끼 같은데 백도맹이냐? 아닌가…… 군림맹이냐?”

이서휘는 대답대신 피식 웃었다.

그러자 더 말할 것 없다는 식으로 통귀가 신형을 날려 도끼로 내려찍었다.

이서휘는 장검으로 도끼를 튕겨내면서 물 흐르듯 동작을 이어 통귀의 허리를 찔렀다. 순간 도끼와 검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통귀는 이서휘의 내공이 낮지 않음을 그제야 깨닫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무공을 펼쳤다.

“빌어먹을 놈이.”

그때 시야를 밝혀주던 달이 구름에 잠시 가려지고 있었다. 시야가 완전 어두워지자 통귀가 되려 움츠려 들면서 좌우를 둘러보며 몸을 조금 내뺐다.

그러나 이서휘는 어둠이 익숙하다.

“왜? 어두우니까 무섭느냐?”

이서휘는 빙긋 웃으며 천천히 통귀를 향해 걸어갔다. 이서휘가 갑자기 허점을 보이면서 다가오자 통귀는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고 있다가 도끼를 내질렀다.

일전에는 잔뜩 긴장했던 이서휘였으나 지금은 통귀가 휘두르는 도끼의 궤적이 뻔히 눈에 들어왔다.

이서휘는 사냥을 시작했다.

도끼가 이서휘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이서휘는 도끼를 검으로 막고 바닥을 구르며 살인마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핏물이 튀면서 살인마가 신음을 내뱉었다.

“윽. 이 개새끼가!”

살인마는 이서휘를 향해 도끼를 던진 후 거추장스러운 나삼을 벗어버렸다.

이서휘는 고갯짓으로 도끼를 피한 후 드러난 통귀의 나신을 보고 중얼거렸다.

“미친놈. 역시 적응 안 되는 놈이야.”

통귀는 그제야 가진 절기를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피를 취해 쌓은 생혈분공(生血噴功)이라는 마공이다.

통귀의 두 손에 핏물이 맺히기 시작하면서 치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통귀가 붉어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이 아까운 걸 네놈에게 써야 하다니.”

겨우 생혈분공의 일성을 성취한 통귀다. 많은 피를 모아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는 마도의 무공인지라 강적을 만날 때가 아니면 꺼내지 않는 무공이었다.

이서휘는 저 마공 때문에 몇 명의 목숨이 허망하게 잃었을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싸늘해졌다. 가만히 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죽이자.’

이서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통귀가 이서휘를 향해 장력을 발산했다. 통귀의 손끝에서 지독한 기운을 머금은 핏방울이 쫘악 소리를 내며 분출되었다.

이서휘는 통귀의 움직임이 똑바로 보였기 때문에 공격을 피한 후 자신의 장검을 통귀의 팔뚝에 찔러 넣었다가 뺐다.

푸욱―.

핏물이 튀고 통귀가 악을 썼다.

“찢어 죽이겠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통귀. 이번엔 손바닥에서 엷은 피의 안개를 내보냈다.

쏴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핏빛 안개가 이서휘를 덮쳤다.

이서휘가 콧방귀를 끼었다.

“흥.”

이서휘는 핏빛 안개가 도착하기 전부터 통귀의 공격로를 예상하고, 위로 솟구쳤다.

칠흑 같은 밤이다.

살인마는 눈앞에서 이서휘가 사라지자 짙은 어둠 속을 수차례 돌아봤다.

찰나, 싸늘한 정적이 감돈다.

통귀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때에 맞춰 이서휘가 살인마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며 장검을 수직으로 내려 그었다.

다급했던 통귀는 양 손바닥에 생혈분공을 주입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검을 양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역시 호락호락한 수준은 아니었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지자 통귀는 이서휘의 얼굴을 향해 입에 머금고 있던 핏물을 내뿜었다.

푸악!

‘소용없다.’

이서휘는 낮게 엎드림과 동시에 검을 비틀어서 빼낸 후 그대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공격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대처를 하자 양손에 피를 철철 흘리던 통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악을 썼다.

“너 이새끼 대체 뭐하는 놈이야! 어?”

“뭐하는 놈이긴…….”

통귀는 이서휘가 대꾸하자마자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핏물을 뿌린 후, 자세를 돌려 비연객잔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이서휘는 이미 조용히 자리를 옮긴 터라 핏물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이서휘는 즉시 경공술을 발휘해 달려가는 통귀를 쫓았다. 달려가던 통귀는 갑자기 내공을 실어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휘이이이익 하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자, 그에 화답을 하듯 곧장 비연객잔 쪽에서 누군가 비슷한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이익!]

통귀보다 훨씬 깊은 내공이 있는지 휘파람 소리가 더 진하고 날카로웠다.

이서휘는 휘파람의 음색과 공력의 깊이를 가늠해보자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대귀인가?’

통귀와의 싸움에서 공력의 소비가 많지 않았으나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대귀가 합류하면 곤란하다. 그 전에…….’

이서휘는 암행표에 내공을 실었다. 순식간에 앞서 달려가고 있던 통귀와 간격이 좁혀졌다. 이어서 이서휘는 등을 보이고 달리고 있는 통귀를 향해 품에서 꺼낸 비도를 힘껏 던졌다.

휘이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비도가 통귀의 등에 그대로 꽂혔다. 통귀는 단말마를 내지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컥!”

속도를 늦추지 않는 것은 이서휘도 마찬가지. 이번에는 연달아 비도 두 개를 던졌다. 푹푹 소리가 나며 통귀의 양 종아리에 꽂혔다. 그제야 통귀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서휘는 쓰러진 통귀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가갔다.

“다음 생애에는 인간답게 살아라.”

이서휘는 곧장 거리를 좁혀 사정없는 동작으로 통귀의 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통귀의 숨이 끊어졌다.

이서휘는 검을 꽂아 넣은 자세 그대로 잠시 전방을 주시했다.

이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고 있기에 일말의 자비심도 베풀 생각이 없는 이서휘다.

또 다시 이어지는 대귀의 휘파람 소리가 점점 숲을 향해 오고 있었다.

통귀에게 응답하라는 소리리라.

이서휘는 이미 숨이 끊어진 통귀의 몸에서 장검을 뽑아낸 후 조용히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오늘은 대귀까지만 잡는다.’

이서휘는 차가운 얼굴로 등장한 대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막내야! 이 새끼야! 대답을 해!”

새롭게 나타난 대귀는 그제야 차가운 땅에 쓰러져 있는 통귀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나타난 놈은 몽성사귀의 셋째인 대귀가 맞았다. 하지만 복장은 정파 무인이라고 봐도 될 만큼 깔끔한 상태. 통귀의 시체와 주변을 살펴보다 내공을 실어 외쳤다.

“나와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이서휘는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대귀를 바라봤다. 나이는 스물 후반, 하얀 얼굴에 눈이 살짝 찢어졌다는 것을 빼면 명문세가의 자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다.

통귀와는 달리 섭혼술로 여인을 꼬셔낸 다음에 범행을 저지르는 부류.

이서휘는 잠시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만약 지금, 대귀가 혼자라면 나서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혹시나 이서휘가 알던 미래와 틀어져, 주변에 운귀나 수귀가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몸을 빼내는 게 맞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구름이 지나자, 밝은 달빛이 숲을 비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귀는 섣불리 어두운 숲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고, 이서휘도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하면서 침착하게 상황을 재고 있었다.

‘없는 게 확실하다. 빨리 처리하고 벗어나는 게 낫겠다.’

결심이 서자 이서휘는 통귀의 시체 곁에 있던 대귀를 향해 질풍처럼 튀어 나갔다.

대귀는 이서휘를 발견하자마자 생혈분공을 일으켰다. 통귀와 다르게 대귀의 두 손이 즉각 붉게 물들었다.

이서휘는 대귀의 손을 조심하면서 검을 찔러 넣었다. 대귀는 날렵한 동작으로 이서휘의 틈이 보일 때마다 생혈분공을 주입한 손을 갖다 대려고 애를 썼다.

‘닿는 순간 녹는다.’

실전 경험은 이서휘가 훨씬 많다. 과거에 부족했던 것은 운수대통이 사용하는 생혈분공의 특성을 잘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귀에게 밀릴 수준이 아니었다. 실전 경험으로 치면 대귀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이서휘다.

이서휘의 눈에는 대귀가 펼치는 무공의 허와 실이 빤히 다 보이고 있었다.

다만, 만에 하나라도 운귀나 수귀가 합류할 수 있으니 그전에 대귀를 쓰러뜨려야 했다.

실전경험이 훨씬 풍부한 이서휘가 냉정하게 승부수를 띄웠다.

‘빈틈을 주마. 물어라.’

이서휘는 군림유하검으로 전환해 공수를 펼쳤다.

대귀는 이서휘의 초식을 몇 번 살펴보더니 오히려 짐짓 허리에 틈을 내보였다. 오히려 이서휘를 낚으려는 시도였다.

이서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당해줄까?’

이서휘는 오른손에 쥔 장검으로 대귀의 허리를 찔렀다. 공력도 거의 없는 허초였다.

휙!

대귀는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렸구나!’

일부러 보인 빈틈이었기에 방향을 전환해 이서휘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생혈분공이 주입된 손가락을 이서휘의 얼굴을 향해 찔러 넣었다.

비명 소리가 터졌다.

대귀는 잘려나간 자신의 손을 부들거리면서 바라봤다. 비명이 터졌다.

“으으아아아아아아!”

이서휘의 왼손에는 대귀의 피가 잔뜩 묻은 비도가 들려 있었다.

이서휘는 일부러 빈틈을 보인 후 대귀의 공격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허리춤에 있던 비도를 뽑아 쥐고 그었다.

고통의 비명이 흘러나올 때, 이서휘는 틈을 주지 않고 장검을 대귀의 배에 찔러 넣었다.

“컥.”

길게 이어지던 대귀의 비명이 거기서 뚝 끊어지고, 대귀가 부릅뜬 눈으로 이서휘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죽자…… 같이…….”

대귀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했다.

이서휘는 대귀의 변화를 보자마자, 검을 뽑아내어 그대로 대귀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후, 경공을 펼쳐 비연객잔으로 달렸다.

이서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도천하가 어떻게 세상을 참혹하게 만드는지 지켜본 이서휘다. 마인들을 상대하는 법은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의 이서휘는 무적이 아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 치고 빠질 때를 구분했다.

‘운귀와 수귀는 다음에 노리자.’

도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서휘는 장검에 묻은 더러운 피를 털어내고 탁 소리가 나도록 빠른 속도로 검집에 꼽았다. 생각보다 임무를 빨리 처리했기 때문에 비연객잔 주변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돌아가도 되는 상황이었으나, 이서휘는 미련을 끊고 비연객잔에서 짐을 정리한 후 말에 올라타 군림맹으로 향했다.

☆ ☆ ☆

이서휘는 몽성사귀의 무공 수위를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운귀와 수귀는 훨씬 강하다.’

행여나 내력 싸움으로 번지거나 협공을 당하면 이서휘도 위험에 빠질만한 상대들이다.

때문에 모험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세상은 넓고 악인은 많다. 강력한 내공을 갖출 때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이서휘는 밤새도록 말을 달려 군림맹으로 향했다. 다행히 비연객잔에서 충분히 쉬었던 터라, 말도 쉬지 않고 달려 나갈 수 있었다.

한참 후, 드디어 군림맹의 정문이 보였다. 경비를 서던 무인이 외쳤다.

“거기 누구십니까?”

이서휘가 대꾸했다.

“질풍검대 이서휘. 임무 복귀 중이다.”

“이 부대주님이셨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경비를 서던 자들이 예를 갖추자, 이서휘는 말 위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그대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시간이 너무 늦은 터라 이서휘는 숙소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잤다.

두 시진 정도, 눈을 붙인 이서휘는 끼익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가 이서휘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서휘야, 잘 다녀왔느냐? 새벽에 복귀했단 말을 들었다.”

“예, 형님. 들어오십시오.”

장시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잠이 덜 깬 이서휘를 보며 말했다.

“다친 곳은 없고?”

“없습니다.”

이서휘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장시우가 말했다.

“다행이다. 그래.”

“네, 잘 처리하고 왔습니다. 너무 늦어서 오늘 보고를 드리려고 했지요.”

“잘했다.”

장시우는 흐뭇했다. 무엇보다 이서휘가 다치지 않았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녀석, 요새 그렇게 수련을 열심히 하더니만.’

장시우가 말했다.

“어디서 찾았느냐?”

“비연객잔 주변에서요. 두 명을 죽였습니다. 같은 무공을 쓰더군요.”

“그래?”

“비연객잔 동남쪽에 숲이 있습니다. 그곳에 시체가 두 구 있을 겁니다. 지부로 연락을 취해주십시오.”

“그래. 지부로 연락해서 용모파기로 확인해보라고 하겠다.”

“네.”

장시우는 이서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쉬어라. 잠도 더 푹 자고. 훈련은 나랑 건영이가 진행하고 있으니까.”

“아닙니다. 정오까지만 쉬다가 나가보겠습니다.”

“나오지 말고 개인 시간 써라. 아, 천뢰각주님이 한 번 찾아오셨었다. 인사나 드리든가.”

“각주님이요? 네, 찾아뵙겠습니다.”

“쉬어.”

장시우가 씨익 웃으며 나갔다.

이서휘는 장시우가 나가자 잠시 그대로 침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묘했다.

일말의 불안감이 감돈다.

‘뭘까?’

이서휘는 불안감의 정체를 잠시 고민했다.

‘임무 때문인가?’

전생에는 실패했던 임무다. 이번에는 대귀와 통귀를 죽이고 무사히 복귀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생기지?’

이서휘는 냉정하게 몽성에서의 상황을 돌이켜봤다. 대귀와 겨룰 때, 그 자리에 운귀와 수귀가 느닷없이 합류했더라면 이서휘는 매우 곤란해졌을 것이다. 죽지는 않았을테지만 사류곡에서 도망 다녔던 것처럼 밤새 갖은 고생을 다 했을 수도 있었다.

불안감은 그 점에서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군림맹의 임무는 이런 식으로 계속 떨어질 텐데…….’

이서휘는 새삼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무리 칠흑검제의 무공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격차가 심한 고수를 만나면 이서휘도 위험하다.

최악의 상황에는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다시 두 눈을 잃을 수도 있다.

이서휘는 스스로 다짐하듯 일렀다.

‘방심하지 마라. 이서휘. 너는 지금 검제가 아니다.’

생각을 하다보니, 내공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었다.

그때, 이서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천뢰각주, 두주불사 한신.

‘잘 계시겠지?’

이서휘는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최대한 칠흑비도와 비슷하게 제작되게끔 도면 한 장을 그린 후 천뢰각을 찾아갔다.

☆ ☆ ☆

군림맹의 천뢰각과 천라각은 무척 특이한 건물이다.

일단 군림맹의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층으로 건설되었다. 그 쌍각이 우뚝 서서 군림맹을 지켜보고 있다.

그 쌍각의 사이로 군림맹의 중앙 대로가 이어진다. 그곳을 지나면 군사회 건물이 있고, 군사회를 지나면 맹주를 보위하는 수호전이 나온다.

부대주인 이서휘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딱 거기까지다.

이서휘는 쌍각 앞에 도착해 군사회 건물을 흘낏 바라보다가 천뢰각으로 들어갔다.

천뢰각에 처음 온 사람마다 당황하는 게 있다.

천뢰각에서 가장 넓은 일 층에 각주인 한신과 고참 무인들의 집무 책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괴짜인 한신은 신입일수록 가장 높은 층에 근무하게 했다. 완전 사고방식이 거꾸로 된 남자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고 물어봐도 한신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일 층이 편해.”

그 한신이 집무실 책상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서류를 읽고 있다가 이제 막 입구로 들어오는 이서휘를 향해 말했다.

“어이, 이 부대주. 오랜만이군.”

“안녕하셨습니까?”

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임무 갔었다며?”

“네.”

“표정 보니 잘 처리했나보군.”

“후후, 그렇습니다.”

“그건 뭐야, 비도 도면이냐?”

“네, 각주님.”

“줘 봐.”

한신은 이서휘가 가져온 비도의 제작 도면을 보더니 씩 웃었다.

“밤에 쏘다니는 거 좋아하느냐?”

그 말에 이서휘가 빙그레 웃었다.

“네.”

“손잡이까지 흑칠이라. 뭐 나쁘지 않네.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알아보고 적당한 수량을 제작해주마.”

이어서 한신이 누군가를 불렀다.

“중경아! 이리 와봐.”

“네, 각주님.”

한신이 도면을 건네며 말했다.

“도면대로 제작해서 질풍검대 이서휘에게 전달해라.”

이어 이서휘를 보며 한신이 말을 이었다.

“전달 받으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신이 손뼉을 한 번 탁 치더니 천뢰각 일 층에 있는 무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주목…… 너희 여기 이 부대주랑 인사들은 나눴느냐? 인사해라. 질풍검대 부대주 이서휘다.”

“에이, 알죠. 각주님.”

“알죠. 요새 이 부대주님 얘기 종종 합니다. 저희도.”

수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자 한신이 버럭 성을 내듯이 외쳤다.

“이 녀석들아 아는 건 아는 거고. 정식으로 인사 나눠. 이 부대주도 여기 각원들 얼굴이랑 이름 기억해놔라.”

뜬금없는 한신의 말에 이서휘는 일 층에 있는 무인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눴다. 한참이나 소개를 주고받은 후 이서휘는 그제야 한신에게 말했다.

“저 각주님, 제가 술 한잔 사도 되겠습니까?”

술을 사겠다는 말에 한신의 눈빛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네가? 그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부대주 봉급이 그리 작진 않습니다. 취연루 같은 곳에서만 안 마시면야 충분하지요.”

한신이 책상에서 발을 내리더니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핫핫하. 자, 그럼 오늘은 취연루다!”

천뢰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네?”

되묻는 이서휘의 얼굴에 웃음이 폈다. 아무렴 어떠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러시죠!”

“아, 맞다. 일 좀 마저 끝내고 보자. 이 부대주, 이따 술자리서 임무 다녀온 얘기나 좀 들려주라.”

“그러지요.”

“그래, 그래.”

이서휘는 정중하게 예를 갖춘 후 천뢰각에서 물러 나왔다. 한신은 이서휘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서휘는 오후에 대원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개인 수련을 하면서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서휘는 한신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잔뜩 있는 상태였다.

☆ ☆ ☆

이서휘는 한신의 복장을 보자마자 입이 쩍 벌어졌다.

이른 저녁, 이서휘와 술을 마시기로 한 천뢰각주 한신이 한껏 멋을 부리고 등장했는데 문제는 너무 과했다.

깨끗한 백의에 피풍의를 걸친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피풍의에 색색의 꽃문양이 가득하다. 매화가 활짝 폈다.

그뿐일까? 아니다.

한 손에는 부채를 펄럭이고 있었다. 피풍의에 부채라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이서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각주님, 더우세요?”

“이거?”

한신이 촤라락 하면서 부채를 폈다. 또 하필이면 부채에도 꽃문양이 가득하다. 한신이 부채를 펄럭이며 말을 이었다.

“호신용이지 뭐.”

“호신용이라고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꾸욱 눌러 참고 있다 보니 이서휘의 콧구멍이 볼록하게 커지고 있었다. 한신은 이서휘의 표정을 보더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비웃어?”

“아닙니다.”

“가자, 술 마시러.”

“그러죠.”

끝내 웃음을 참은 이서휘가 후우우우 소리를 내며 호흡을 뱉었다.

밤공기가 참 좋았다.

객잔 거리로 가는데 이름 모를 꽃향기가 기분 좋게 흘러나왔다. 그 향기를 맡은 건 이서휘 혼자가 아니었다. 한신이 걸음을 멈추더니 부채를 펄럭이며 서서 꽃향기를 맡았다.

그 표정이 참으로 천진난만했다.

한신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숨을 들이마신 후 중얼거렸다.

“흐음, 좋구나.”

“하하하.”

결국 이서휘의 웃음이 터졌다.

“녀석, 뭐가 그리 웃기냐?”

한신이 뭐 이런 놈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뒷짐을 지고 앞장서서 걸었다. 이서휘는 한신의 등을 보며 따라 걷으며 생각했다.

‘물어볼 게 많았는데…….’

이서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이다.

비무전에는 무슨 상품이 나오는지, 쌍각이 파악하고 있는 무림의 동향은 어떤지, 맹주님은 최근에 무얼 하시는지…… 등등.

그런데 더 궁금한 게 생겼다.

한신이다.

왜 저렇게 술을 많이 마실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그냥 술이 좋아서 저럴까?

이서휘는 불빛들이 새어나오는 대로에 들어섰을 때는 그런 생각마저 지웠다. 머리에 가득 차 있던 질문도 날려버렸다.

‘술이나 마시자.’

한신은 취연루를 스윽 지나치더니 검풍객잔이란 간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갔다.

이서휘가 말했다.

“어? 각주님, 취연루는 지나쳤는데요?”

“거기 말고. 여기가 더 낫다. 취연루는 유백이나 가는 곳이고.”

검풍객잔.

은퇴한 무림인이 만든 객잔이다. 한신이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척을 했다. 결국엔 객잔 주인까지 나와 한신에게 예를 올렸다.

“한 각주님, 오셨습니까?”

“편한 자리로 내주게.”

“올라오십시오.”

두 사람이 이층에 올라 자리를 잡자 점소이는 묻지도 않은 채 한신이 즐겨 마시는 술을 내왔다. 술을 내려놓고서야 안주를 무얼 하실 건지 묻는 점소이. 한신과 점소이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주가 결정되었다.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사라지자, 이서휘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참, 각주님과 오니까 일사천리군요.”

“내가 괜히 두주불사겠나. 뭘 봐? 마시자.”

“하하, 네.”

두주불사 한신은 자신의 별호만큼이나 술을 빨리 마셨다. 지금도 술잔을 냉큼 비우더니 불쑥 잔을 내민다.

이서휘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각주님, 천천히 드십시오.”

이서휘는 빙그레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연무장에서 수련을 할 시간이다. 그런데도 굳이 한신을 만난 이유는 명확했다.

이서휘는 한신이라는 사내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서휘라는 사람의 인생과 한신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연결할 생각이었다.

인연(因緣)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서휘가 술을 들이켰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더니, 곧이어 후욱 하는 뜨거운 기운이 다시 이서휘의 얼굴로 올라왔다. 한신은 대번에 얼굴이 빨개지는 이서휘를 보며 웃었다.

“술이 약한 친구군. 술이 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오늘은 적당히 마셔라.”

“각주님, 저번에는 적당히 마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너 같은 체질은 적당히 마셔도 된다.”

“후후. 혹시 각주님은 취기를 내공으로 뱉어내고 그런 거 할 줄 아십니까?”

“뭐? 하하하. 그리 하려면, 뭐하러 술을 마시느냐.”

“그런가요?”

이서휘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있으면 좀 배우려고 그랬죠.”

술잔이 이야기와 함께 오갔다.

이서휘는 한신에게 몽성에서 처리한 임무 얘기를 들려주고, 한신은 검대에 속해 있던 시절에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얘기들을 주로 화제로 삼았다.

그러다 이서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형님, 전 강해지고 싶습니다.”

취했으니, 각주가 형님으로 바뀌었다.

“그래. 왜? 왜 강해지려는 것인데.”

한신의 말에 이서휘가 곰곰이 생각했다. 할 말은 많았으나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봤으니까요. 겪어봤으니까요. 마도천하가 옵니다. 제가 알던 자들은 도망가거나, 죽습니다. 저요? 후후. 사패(四覇)라는 자가 있습니다. 꽤 강했지요. 검제니 검왕이니 도왕이니 거창했죠. 제가 그 중 검제였습니다만…….’

생각과는 다른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서휘가 말했다.

“강해지려는 데 이유가 있나요. 무림인이면 다 똑같죠.”

“각자 이유는 다르지. 누굴 죽이고 싶다거나 명예를 얻고 싶다거나. 천차만별이겠지.”

“그렇습니까? 저는 군림맹에 들어오기 전에는 예쁜 마누라 얻어서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지금은?”

“포기했죠.”

“크하하. 포기가 빠른데? 백리연한테 차여서 그런 건 아니고?”

“우와, 그 소문을 형님까지 들으셨습니까?”

“들었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 어디 가서 여자한테 차이고 다니는 그런 남자 아닙니다.”

이서휘도 씨익 웃었다. 이처럼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다 보니 알 것 같았다.

‘술을 왜 마시는지…….’

이서휘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이서휘는 부대주 비무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형님, 돌아오는 맹주님 축하연에 부대주 비무전을 하겠죠?”

“작년에도 했으니 올해도 하겠지?”

이서휘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혹시 올해 우승 상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신이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글쎄. 상품은 주로 맹주님이 결정하시는 거니까. 왜? 우승이라도 하게?”

“네.”

이서휘의 짧고 단호한 대답에 술을 들이키던 한신이 푸악 하고 이서휘의 얼굴에 뿌렸다. 이어서 터지는 한신의 호탕한 웃음.

“하하핫핫.”

이서휘는 소매로 얼굴에 튄 술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한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미안하다. 그나저나 네가 그 동안에 나한테 한 말 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그래. 그래라! 우승해라!”

한신이 엄지를 척 하고 올렸다.

“질풍검대도 한번 우승할 때가 됐지. 그런데 요새 천룡검대나 화룡검대 부대주들은 단체로 어디 임무 나갔냐?”

“아닐 겁니다.”

“어? 아니야? 그런데도 우승하게?”

“그럼요. 저 수련 열심히 한다는 소문 들으셨다면서요.”

“아, 그 수련들이 다 부대주 비무전의 우승을 위한 거였다?”

“뭐, 겸사겸사죠.”

이서휘가 미소를 지었다. 한신이 술잔에 술을 또르르 따르며 말을 이었다.

“후후, 그래도 나름 자신이 있는가 보네. 안 그래도 요새 너 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부대주들이 아주 맹렬하게 수련을 한다더구나.”

“그렇습니까?”

“핫핫핫. 아이고, 재미있는 놈들. 평소에나 잘하지. 무슨 비무전만 다가오면 수련을 한답시고.”

“이번에도 우승자에게 병장기를 상으로 내리시겠죠?”

한신이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 하나 맹주님이 보고(寶庫)에서 뭐를 고르실 지는 우리도 모른다. 맹주님 마음이지.”

이서휘의 눈이 빛났다.

군림맹에는 보고(寶庫)가 있다.

전대 고수들이 사용하던 병장기도 있고, 사마외도의 무리를 쳐서 얻은 병장기도 있다. 맹주가 참관하는 비무전이나 누군가 큰 공을 세웠을 때 종종 병장기가 상품으로 분배되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칠흑검이 없는 이서휘에겐 쓸 만한 병장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서휘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대주님들 그리고 각주님들까지 이 비무전이 벌어질 때마다 내기를 하신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재미가 아주 좋지. 승부를 맞추는 것도 일종의 경쟁이거든. 거기에 돈까지 걸려 있으니까. 후후. 재미있는 건 항상 의견이 갈린다는 점이야. 그래서 도박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나?”

“각주님은 그간 돈을 따셨습니까. 잃으셨습니까?”

“나? 비밀이다.”

이서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이번 비무전의 우승자는 저로 하십시오.”

한신이 이번에는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알았다.”

그 단호한 대답에 이번에는 이서휘가 술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컥.”

한신이 안주를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은 후 오물오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잘해라. 술값 좀 벌게.”

“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신이 무릎을 탁 쳤다.

“판 좀 크게 벌릴까? 너 말고도 다른 부대주들도 지금 아주 열심이란 말이지. 그러하다면, 쌍각의 주도 하에 비무전 무대를 조금 더 화려하게 준비해야겠다. 맹주님을 뵈면, 이번 비무전은 그리하여 그 격에 맞게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보고 드려야겠다. 그럼 보고에서 무기를 고를 때 조금 더 고민을 하실 거 아니야.”

이서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헌데 제가 정말 우승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 말에 한신이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대꾸했다.

“부대주 따위가 내 은신술을 알아챘으면 뭐 나름 꽤 하겠지.”

“그땐 술 냄새 맡은 거였다니까요!”

“웃기지 마. 내 은신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네가 개코야?”

한신의 막말에 이서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새벽녘, 두 남자가 비틀거리며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서휘와 한신이었다. 한신은 기분 좋게 취해 한쪽 팔로 이서휘의 어깨를 걸쳤다.

그러나 이서휘는 때때로 주변에 뒤따르는 자들이 없는지, 어디선가 암습하는 자가 저 어두운 골목에서 갑자기 나오지는 않을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이서휘는 한신의 비틀거림을 받아내느라 때때로 함께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 취객이 군림맹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군림맹.

평소처럼 일상이 흘러갔다.

이서휘는 무공 수련에 열중했고, 한신은 비무전이 일종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한신에게 부대주 비무전에서 우승하겠노라 호언장담을 한 이서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서휘는 자신에게 물어봐야했다.

과거에는 천룡검대와 화룡검대의 부대주들이 눈에 띄게 강했다. 이서휘가 그들을 따라잡았다고 느꼈을 무렵엔 잦은 부상이 많아 비무전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비무전의 결승에서는 대부분 천룡검대와 화룡검대의 부대주들이 만났다.

부대주끼리는 이 비무전을 서열전이라 불렀다.

서열이 높을수록 여섯 번째 검대가 창설될 때 대주로 임명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기의 질풍검대 부대주들은 중위권이었고, 다른 부대주들보다 명확하게 뛰어난 자들이 두 명 있었다.

천룡검대 독고극.

화룡검대 백리소천.

지금은 어떨까?

검제라 불렸던 생을 살다가 회귀한 이서휘다.

부대주들끼리, 내공의 높고 낮음은 큰 차이가 없을 터.

사실, 이서휘는 지금 당장 겨뤄도 군림오검대의 부대주들을 각기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서휘의 목표는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단순히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니다.’

이서휘는 비무전을 통해 검의 경지를 끌어올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밝은 달 아래…….

저녁을 먹고 다시 연무장에 들어선 이서휘가 몸의 긴장을 풀 듯 검을 휘둘렀다. 천천히 걸으면서 검을 좌우로 그으며 손목을 풀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푼 이후에 오른발을 쿵 소리가 나도록 찍으며 군림유하검을 펼쳤다. 덜한 것도 과한 것도 없는 명확한 동작이다.

한 차례 군림유하검을 끝까지 펼친 후 이서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진정한 수련은 지금부터였다.

이서휘는 군림유하검의 초식을 펼치면서 의도적으로 끝 부분에서 동작을 흐렸다. 변화를 준 것이다. 그 변화에 이어서 암연심검(暗嚥心劍)을 펼쳐 보았다.

‘쉽지 않다.’

이서휘가 잠시 검을 거두고 호흡을 골랐다.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도 이전의 버릇 때문에 암연심검을 펼칠 때마다 검기를 발산하려는 기도가 나왔다.

암연심검의 초식들은 대부분 검기를 내뿜던 동작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몸에도 긴장이 잔뜩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힘을 빼자. 검제 시절의 내공이 없으니, 없는 대로 적응해야 한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서휘는 바람을 맞으며 잡념을 지우고 검만을 생각했다.

‘다시 해보자.’

이서휘는 몸에 들어간 긴장과 힘을 뺀 상태로 발놀림을 가볍게 한 후 경쾌하게 다시 검을 내질렀다.

그때, 검 끝에서 파앙 하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터졌다. 속도가 만들어낸 소리다.

‘좋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을 잘 잡았다고 판단했던 것. 이번에는 군림유하검의 초식을 의도적으로 지워나가면서 쾌검을 펼쳤다.

처음에는 오히려 소리가 요란했다. 부웅 소리가 나거나 바람을 가를 때마다 휙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연습하다가 이서휘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자신이 하려 했던 행동들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내공이 부족하다고 해서 암연심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암연심검의 묘는 살리면 된다. 초식은 군림유하검을 사용해도 충분하다.’

이서휘는 잠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실마리가 잡힌다.’

이서휘가 다시 검을 쥐고 휘둘렀다. 초식을 지우려고 애를 쓰면서 동작을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반복했다.

이서휘는 검법을 펼치면서 사부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넌 눈이 보이질 않는다. 큰 단점이지. 때문에 적도 네 검을 볼 수 없게 해라.]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형(形)을 숨겨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적을 맞이해라. 그게 어렵다면 더더욱 형을 숨겨야 할 것이다. 네가 어둠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형을 숨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서휘야 넌 눈이 없다. 볼 수 있는 자들처럼 싸울 생각이냐?]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짧은 동작에 검기를 내뱉을 수 있도록 수련해야 한다. 때문에 넌 내공을 충분히 쌓기 전까지 다시 무림에 나갈 필요가 없다. 나가면 개죽음만 당할 뿐이야.]

[하지만…….]

[맹인 한 명이 가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네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검을 펼치던 이서휘가 동작을 멈췄다. 귓가에 사부님의 말이 생생하게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서휘야. 명심해라. 숨겨라. 숨길 수 없을 때는 너의 의도라도 숨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마음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심검(心劍)이다.]

연무장에 멍하니 서서 사부님의 말을 떠올리던 이서휘는 딱 한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숨겨라.’

그 말에서 다시 이서휘의 생각이 이어졌다.

‘검기를 운용할 수 없다면…… 발검(拔劍)과 납검(納劍)으로 형을 숨겨야겠다.’

발검과 납검의 수준은 이미 이서휘가 한참 전에 수련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상태다.

이서휘의 생각이 이어졌다.

‘거기에 암행표(暗行飇)와 어우러진다면?’

암행표를 실전에서 펼칠 수 있는 내공은 충분하다.

순간 이서휘의 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새로운 검법이다.’

☆ ☆ ☆

이서휘가 빠른 속도로 연무장을 누비고 있었다. 이서휘의 발아래 먼지가 피어오른다.

이서휘가 암행표를 사용했다. 가상의 적을 두고 방향이 급격하게 변한다. 이어서 순간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진다. 이서휘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가상의 적을 세워두고 벼락처럼 발검을 했다.

쐐앵 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린다.

다시 엄청난 속도로 납검을 하곤 암행표를 이용해 또 다른 가상의 적을 파고 들어 발검과 함께 목을 날렸다.

이서휘는 서서히 운영의 묘를 깨우치고 있었다.

‘발검에 이어서 암연심검의 환, 파, 세를 섞어봐야겠다.’

암연심검의 환, 파, 세는 검기의 형태다.

암연심검의 환(丸)은 한 점으로 기운을 모은 검기다. 즉 관통이다. 검 끝에서 발산되는 것이므로, 내공이 깊을수록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더해지는 식이다. 끌어올린 내공을 검 끝에 모아서 내뱉는다.

암연심검의 파(波)는 반월 형이다. 베는 동작에서 파생된다. 일렬로 서있는 적들의 허리나 목을 동시에 끊어낼 수 있다. 바닥에 휘두르면 반달 형의 자국이 남는다.

암연심검의 세(勢)는 적을 뒤덮는다.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러야 펼칠 수 있다. 당연히 가장 많은 공력이 소비된다. 쓰고 나서 적을 섬멸하지 못하면 후환이 대단할 수밖에 없다.

과거, 이서휘가 제천왕을 죽이고 나서 천마에게 당했던 이유는 이서휘가 펼친 암천세에 너무 많은 공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연무장에 쐐앵! 하는 발검 소리와 탁! 하는 납검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이서휘는 발검을 할 때마다 암염심검의 환, 파, 세를 섞었다.

이서휘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검기가 나가지 않아도 좋다.’

이서휘가 연무장에서 떠올린 검법은 연습을 할수록 활용할 여지가 많았다. 하나의 검법으로 다듬을 수 있을 정도의 묘리를 깨우친 셈이었다.

과거의 이서휘는 늘 어둡게 살았다.

별호도 칠흑검제였다. 무공의 초식마저 대부분 암(暗)이니 흑(黑)이니…… 어두운 것 투성이다.

두 눈을 잃은 장님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하나, 이번에는 밝게 살고 싶었다. 이서휘가 달을 올려다봤다.

달이 휘엉청 밝게 떠 있다.

이서휘는 장검을 내려다보며 검법의 이름을 잠시 생각했다.

지금은 달이 밝은 밤, 월야(月夜)다.

이서휘가 쥔 장검에도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서휘는 자신의 이름에서 빛날 휘(輝)를 따왔다. 그렇게, 아직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자신의 검법에 이름을 지어 주었다.

“월야휘검(月夜輝劍)이라 부르자.”

☆ ☆ ☆

이서휘는 월야휘검을 수련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눈은 감았지만 쉬이 잠이 오질 않고, 지난날이 떠올랐다.

맹주의 탄생일을 준비하는 분주한 움직임, 각처에서 몰려드는 군웅들.

군림맹의 귀족처럼 행세하는 세가들의 도착.

인사가 오고 가는 모습.

그리고 군림맹 맹주 남궁위(南宮暐)의 등장.

이서휘는 남궁위의 얼굴을 떠올리자 더욱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는 이서휘가 칠흑검제라 불리고 있던 시절에는 은퇴한 상태였다. 이서휘는 남궁위가 얼마나 강한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위는 자신이 한 때 맹주였던 군림맹이 쓰러지고 와해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심지어 전 무림이 초토화되고 이서휘가 사류곡에서 쫓기고 있었을 때도 남궁위는 어딘가에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어서 떠오르는 얼굴들은 세가의 가주들이었다.

군림맹의 장로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호시탐탐 차기 맹주 자리를 노리는 자들.

일부 가주들은 군림맹이 무너진 이후에도 세가라는 방패 안에서 안전을 도모했었다. 그 자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천마교는 다 찾아내어 죽였을 것이다.

이서휘는 과거를 돌아봤다.

군림맹이라는 집단의 견고함이 희미하게 금이 가기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가장 큰 문제였을까.

눈이 먼 이후에는 제 역할을 할 자신이 없어서 군림맹을 스스로 떠났던 이서휘다.

지금은 누가 군림맹을 와해시키려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볼 셈이었다.

☆ ☆ ☆

다음날, 군림맹에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어쩐지 천뢰각주는 이번 일을 크게 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대를 준비한다느니, 비무의 규칙을 새롭게 정한다느니 심판으로는 누굴 생각하고 있다느니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질풍검대 연무장.

질풍검대 장시우가 이서휘에게 다가왔다.

“서휘야.”

“네, 형님.”

장시우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들었느냐?”

“뭘요?”

“이번 비무전 상품 말이야. 대주들 사이에서 말이 많다. 꽤 괜찮은 것들이 거론되나 본데?”

“아십니까?”

이서휘도 궁금했다. 대체 어떤 병장기가 거론되고 있는지.

장시우가 말을 이었다.

“천룡대주한테 들었는데 일단 자강검(紫強劍)과 백룡검(白龍劍)이 물망에 올랐다더라.”

“자강검과 백룡검.”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요.”

“이게 괜찮은 정도냐? 대주들도 비무에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다. 지금.”

“건의해서 나오십시오.”

“햐, 이 녀석 봐라. 요새 자신감이 좀 늘었다 이거지?”

“아닙니다. 대주님들은 대주님들끼리 겨루셔야죠.”

“우리는 승진할 자리도 없는데 나오겠느냐? 너희는 후속 검대 대주 자리라도 노려볼 수 있어서 이리 난리를 피우는 거고.”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자강검과 백룡검을 떠올렸다.

일단 둘 다 좋은 검이다.

이서휘는 지금 평범한 장검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얻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검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터였다.

장시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자강검(紫強劍)은 군림맹의 검대주였던 신명후라는 전대 고수가 사용했던 검이라더라. 검을 보관한 지 꽤 오래됐는데 연고자가 없어 이번에 후배들에게 주기로 결정한 검이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서휘나 군림맹 부대주들이 얻을 수 있는 수준의 검은 확실히 아니었다. 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어렵거니와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소 피곤해질 수 있는 명검이다. 어쨌든 자강검을 얻게 되면 적과 겨루다 검이 부러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이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룡검은 실전에서 쓰기엔 애매하다는 평가가 있었잖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굉장히 예쁜 검이라더구나. 검이 예뻐서 뭐에 쓰겠냐만은. 그래서 다른 검대에서도 자강검을 원하는 눈치더라. 뭐로 결정될 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백룡검(白龍劍)은 지금 시점에서 널리 알려진 검은 아니다. 훗날에 이런저런 사연이 붙으면서 유명해지는 검이었다. 무림에 도둑들이 떠받드는 세 명의 양상군자(梁上君子)가 있다. 그 중 한 명이 군림맹에 침입해 한 자루 검을 훔쳐 도망가려다 맹주 남궁위에게 잡히는데, 그 도둑을 잔인하게 문초한 남궁위는 그 시점부터 백룡검을 자신이 사용하기 시작했었다.

여기까지가 이서휘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심상치 않은 검이라는 점은 분명한데…… 어쩐지 부담스러운 일에 휘말릴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시점에서, 백룡검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백룡검이 외관상 아름다운 장검임에는 분명하나 예리한 면에서는 다른 명검들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고 있었다.

장시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가 나오든 훌륭하지?”

“과연 훌륭하군요.”

이서휘는 얼떨떨했다. 어쨌든 판을 크게 만들자는 한신의 의도는 적중한 것이리라.

장시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분위기가 말이야. 맹에서는 어차피 독고극이나 백리소천에게 보검이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검을 내놓은 거겠지.”

장시우가 쩝쩝 거리면서 투박해 보이는 이서휘의 장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서휘는 장시우가 자신이 장검을 바라보자 피식 웃었다.

“왜요. 동생한테 괜찮은 장검 하나 사주고 싶으신 눈빛인데요? 하나 괜찮은 거 사주십쇼! 대주님!”

“뭐 인마? 내 장검도 날이 빠지고 있는데 그럴 돈 있으면 내 것부터 사지. 간다.”

“어딜 또 가세요.”

“대주들이 보잔다. 명검이 나온다니까 대주들도 술렁이는 눈치다. 부대주들이야 부대주들이고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불만들이 쌓이고 있다.”

이서휘가 씨익 웃었다. 걸어가는 장시우의 등에 대고 이서휘가 말했다.

“우승자 맞추는 내기하러 가시면서 거짓말 하지 마십쇼.”

장시우의 걸음이 우뚝 멈추면서 돌아봤다.

“들켰냐?”

“하이고, 형님. 그래서 누구한테 거실 건데요?”

장시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간 우승자를 맞추는 확률이 높았던 장시우다.

“아, 이번에 백리소천이 세가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다더라. 정확한 정보다. 뭐라도 몇 수 더 배웠지 않았을까?”

현재 백리세가의 가주인 백리한이 백리소천을 세가의 차기 가주로 염두에 뒀다면 세가의 비전(祕傳)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그나저나 이서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형님, 형님이 이끄는 질풍검대의 부대주가 우승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시는 거죠. 지금?”

“생각 중이다. 나 간다.”

“저한테 거십시오.”

“응, 그래.”

장시우가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손을 훠이훠이 흔들면서 사라졌다.

이서휘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가진 돈도 별로 없어서 푼돈으로 내기를 하는 장시우다.

‘알아서 잘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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