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에 비친 달을 보다
1-8권 完
-유진성
1권
<1장. 회귀>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에 한 중년의 사내가 대낮인 것처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칠흑검제(漆黑劍帝)라 불리고 있는 이서휘(李曙輝)였다.
그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누군가의 권고대로 세월에 모든 것을 맡기고 천마가 사라질 때까지 와신상담이라도 하면서 버틸 걸 그랬다.
아니면 정파연합 백도맹과 세가연합 군림맹이 대립했을 때 무슨 수를 썼어야 했다.
‘너무 늦었다.’
함께 명성을 드날리던 자들이 속절없이 무너졌을 때는 칠흑검제 이서휘도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천마.
마교의 한 갈래였지만 지금은 마도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라 평가 받는 세력이었다.
그 세력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천마 위극신이었는데 그도 사류곡 어딘가에서 수하들의 보고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천마는 개인의 무공도 절륜했지만 계략과 술책에도 뛰어나 세력을 와해시키는 것에도 능했다.
백도맹과 군림맹의 다툼이 그 증거.
맹에 가담하지 않았던 일부 세력은 각개격파를 당했다. 이서휘가 쓰러지면 천마는 이제 소림으로 향할 터였다.
중원 무림에 공포가 강림한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 천마교의 제천왕이 수하들을 잔뜩 이끌고 칠흑검제를 쫓고 있었다.
제천왕은 기가 막혔다.
자신들, 그러니까 천마교의 사천왕이 나서면 정파의 사패를 누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들은 그렇게 키워진 병기들이었다.
사천왕은 지금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사패를 추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제천왕은 저 어두운 사류곡에 숨어든 사패의 일원인 칠흑검제와 어이없게도 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천왕의 수하들이 모두 합류했는데도 그랬다. 이서휘의 수하들은 진작 죽여 없앴다. 그러나 사류곡으로 들어간 이서휘는 술래잡기를 하듯 천마교의 마인들을 죽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검제의 명줄이 꽤 길구나.”
제천왕이 중얼거렸다. 자못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말투였으나 제천왕 자신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제천왕의 목소리가 사류곡을 뒤흔들었다.
“검제께서 어디까지 도망치려고 하시오? 그만 마무리를 지읍시다.”
이서휘는 제천왕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다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추격은 집요했다. 이서휘가 도망치고 있는 사류곡 전체를 포위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었으니까.
제천왕의 말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
장대비가 건물의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이서휘는 근처에 사당이라도 있다고 판단해 경공을 펼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발길이 끊겨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끼어있는 곳이었다.
‘냄새가 왠지 익숙하군. 전에 제를 올렸던 아수라 사당인가.’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 몇을 베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오래 버텼다.’
이서휘가 들어간 사당에는 분노에 찬 얼굴, 올올이 위로 선 터럭에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석상이 이서휘를 지켜보고 있었다. 육도팔부의 아수라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서휘가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눈이 멀쩡했다면 마도천하가 이렇게 쉽게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윽고 사당 앞에 도착한 제천왕이 입을 열었다.
“검제, 여기 계셨구료.”
제천왕에 이어 귀마단의 정예들이 도착해 다 함께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서휘는 검병과 검신까지 온통 새까맣게 만들어진 칠흑검(漆黑劒)을 쥐며 말했다.
“나 하나 잡으려고 많이도 왔구나.”
제천왕이 조소를 날렸다.
“우리 방식은 익히 아시잖소?”
“…….”
“마무리 합시다.”
제천왕은 눈짓으로 귀마단을 내보낸 후 이서휘의 칠흑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놈의 검이 문제야.’
귀마단이 달려 들었다. 이서휘도 검을 휘둘렀다.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텅텅 소리와 함께 귀마단 마인들의 목이 사당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푸악 하는 소리와 핏물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마인들의 괴상한 비명과 섞였다.
비가 서서히 그치면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야가 밝아지자, 이서휘의 모습이 오히려 사신처럼 보였다. 검도 복장도 알려진 대로 온통 칠흑.
귀마단이 모두 쓰러지면 제천왕의 차례였으나 그러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서휘가 칠흑검을 휘두르며 귀마단을 말 그대로 도륙하고 있었기 때문.
구경하던 제천왕이 낮은 한숨을 쉬며, 온몸에 휘몰아치는 마기를 두르고 이서휘에게 다가갔다.
☆ ☆ ☆
천마는 사류곡의 사당에 이미 등장해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칠흑검제를 쫓는 제천왕의 뒤를 밟으면서 줄곧 함께 추격하고 있었다. 다만 기척을 숨겼을 뿐.
천마의 궁금증은 칠흑검제 이서휘가 자신의 기척을 알아차렸을까 하는 점이었다.
‘알아차렸다면 내가 지는 것인데.’
이제 막 시작한 제천왕과 이서휘의 결투를 어린아이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이서휘가 장님이었기에 숨어서 엿보지는 않았다. 천마는 상승의 무공으로 기척을 지운 상태에서 이서휘가 자신을 감지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을 뿐.
천마는 그 나름대로 이서휘와 무공을 겨루는 중이었다.
☆ ☆ ☆
제천왕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천마께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잊었던 자들의 말로를 누구보다 많이 지켜봤던 제천왕이다.
칠흑검제를 죽이는 게 제천왕이 사는 길이다. 쉬울 리가 없었다. 이서휘가 칠흑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기를 흩어놓았다. 겨루기 시작하고서야 제천왕은 이서휘가 자신의 천적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물러날 방도가 없었다. 동귀어진 초식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리기 시작했다.
천마는 제천왕이 끝내 동귀어진 초식을 구사하자, 수하를 구하겠다는 생각보다 이서휘가 어떻게 막을까하고 궁금해했다. 순수한 악(惡), 순수한 호기심이 천마를 지배했다.
‘어쩔 셈이냐?’
이서휘는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동귀어진 초식이라 판단한 순간에 들고 있던 칠흑검으로 십자 모양의 검기를 내뱉는 이서휘.
암천세(暗天勢)라는 비기를 내뿜었다.
방어를 포기하고 검과 함께 날아오던 제천왕이 네 조각으로 분리되어 이서휘의 뒤편으로 날아갔다.
천마는 괜찮은 대처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구나.”
제천왕의 죽음이 안타까웠으나 천마는 이서휘의 비기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 자못 만족스러웠다.
이서휘는 속이 철렁했다.
‘이자의 기척을 이제 알아채다니.’
이서휘가 또 다른 고수의 기척을 느꼈다면 앞서 제천왕을 죽일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서휘는 자신의 절기인 암천세에 공력을 쏟아 부은 상태였다.
이서휘가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쓰디쓰게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서휘는 천마가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건 무슨 무공이지?”
단순히 기를 숨기는 것만으로 이서휘의 감각을 속일 순 없는 노릇. 이서휘는 천마가 특별한 무공을 사용하고 있다고 추측했다.
천마가 덤덤하게 말했다.
“자네가 어둠 속에서 내 수하들을 죽였던 무공과 비슷한 거 아니겠나.”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갔으나 두 사람은 각기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서휘는 그 순간부터 말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반면에 천마는 여유로웠다.
“검제가 이렇게 재미있는 상대인 줄 알았다면 수하들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 점은 사과하지.”
천마는 이서휘가 대꾸하지 않자 웃음을 터트렸다.
“핫핫핫.”
천마의 장포가 펄럭이더니 자색의 안개가 흘러나와 천마를 휘감았다.
이서휘는 대답대신 잔뜩 끌어모은 공력을 칠흑검에 실어 휘둘렀다.
사류곡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지면서 천마와 칠흑검제 이서휘가 맞붙었다.
☆ ☆ ☆
천마는 기가 막혔다.
이서휘는 귀마단을 전멸시키고 제천왕을 죽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상대로 반 시진을 버티고 있었다.
‘사패 중 말석이라더니, 아니었네.’
천마는 이서휘가 제천왕을 죽였던 성명절기 암천세를 다시 펼치자, 저도 모르게 긴장한 상태로 자신이 보유한 절명기를 쏟아냈다.
콰아아아앙!
천마의 공격에 이서휘가 석상 곁으로 날아갔다.
천마는 이서휘가 쓰러졌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이서휘의 기세에 놀라 절명기를 쏟아냈다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천마는 헛웃음이 나왔다.
“괜찮느냐?”
이서휘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절명기와 함께 뻗어 나간 천마의 검은 이서휘의 배를 관통하고 뒤에 있던 아수라 석상의 배까지 뚫었다. 이서휘는 버둥거리면서 검을 뽑아내려했으나 기력이 다해 역부족이었다.
천마는 이서휘 옆에 놓인 칠흑검과 자신의 마검을 허공섭물로 취하더니 내공을 일으켜 두 검을 부딪쳤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마검이 부러지자, 천마는 미련 없이 부러진 마검을 내던졌다.
천마는 칠흑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잘 쓰겠네.”
천마는 뒷짐을 진 채로 사당을 둘러보며 유람 온 부호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제법 분위기가 있는 사당이로군. 자네랑도 어울리고. 사류곡의 살수들이 아수라를 신으로 모셨다더니만…… 저놈인가?”
둘러보던 천마는 문득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수라 석상을 발견했다. 천마가 보기에 아수라 석상의 표정이 자못 불손했다.
“건방진 놈이로고.”
천마는 손가락에 자색의 불꽃을 생성시켜 두둥실 띄워 보냈다. 불꽃이 넘실넘실 날아가 아수라 석상에 닿았다.
화르르르르.
자색의 불꽃이 아수라 석상을 휘감았다. 천마가 느긋하게 말했다.
“타올라라.”
천마는 흡족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사당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서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아수라 사당과 함께 활활 타오르거라.”
화르르르륵,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
지켜보던 천마는 장포 끝을 털어내더니 미련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천마가 사당 밖으로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포위 작전에 참가하고 있던 단주 한 명이 다가와 천마를 추켜세웠다.
“후후후, 축하드립니다. 검제가 예상 외로 오래 버텼군요…….”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사당 안에는 쓰러진 이서휘와 불에 휩싸인 아수라 석상이 있었다.
이서휘는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 입가에는 기침과 피가 섞여 튀어나오고 있다.
그의 끈질긴 생명력이 버티고 있는 걸까.
모를 일이다. 이서휘는 죽음의 순간에도 싸우고 있었다. 쥐어짠 내력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때 이서휘는 어떤 존재가 발산하는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뭐지? 누군가 있다.’
감각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서휘가 어떤 존재의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수라 석상이 지닌 형기(形氣)가 변하고 있었다.
순간 깎아낸 돌에 불과했던 아수라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아수라의 천안(天眼)이 밝혀진 것.
잔잔한 기파가 아수라의 몸에서 흘러나와 사당 곳곳으로 퍼졌다.
이어 아수라의 몸에서 푸른 기운을 머금은 불꽃이 흘러나오더니, 천마가 만든 자색의 불꽃을 몰아내고 있었다. 푸른 불꽃은 이내 활활 타올라 사당 전체를 감쌌다.
이어 이서휘도 푸른 불꽃에 휩싸였다.
분노한 아수라의 강림(降臨).
아수라의 천안(天眼)은 이서휘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천안이 살펴보기를 멈춘 시기는 이서휘의 두 눈이 멀쩡했던 시절…….
어느새 푸른 불꽃에 의해 고통이 사라진 이서휘도 꿈을 꾸듯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수라의 천안에서 푸른 불꽃이 엷은 빛줄기처럼 새어 나와 이내 사당 안을 가득 채우고 세상 밖으로 뻗어 나갔다.
이서휘는 자신의 정신이 아수라의 힘에 의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끼다가 의식을 잃었다.
군림맹(君臨盟).
세가 연합에서 출발한 세력이다.
그 군림맹에 소속된 질풍검대 숙소에서 한 남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잠에서 깨어났다.
이서휘였다.
잔뜩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껌벅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꿈인가, 아니면 사후세계인가. 나는 분명 사류곡에서…….’
그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있었다. 어찌 이곳을 잊을 수 있으랴.
기억에만 남아 있던 장소였다.
군림맹이다.
이서휘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장소. 추억과 고통이 함께 했던 곳.
이서휘는 자신이 군림맹에 와있다는 사실도 혼란스러웠으나 더 큰 충격은 모든 사물이 뚜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꿈이라 하기엔, 사후세계라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한 느낌.
이서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정확하게는 버릇대로 눈가에 있던 상처를 만져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매끈했다. 이서휘의 손이 두 눈을 오갔다. 양 눈을 가로지르고 관자놀이까지 뻗어 있던 검상이 깨끗하게 사라져있었다.
‘믿기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천마와…….’
이서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일어났다.
문 밖으로 나가려던 이서휘는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명패를 손으로 만졌다. 매끈한 촉감이 느껴졌다.
[질풍검대 이서휘]
저절로 목에서 꿀꺽 소리가 났다.
‘현실…….’
문득, 이서휘는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이서휘가 머무르던 사당 안에는 피비린내와 땀내음,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잔뜩 섞여 있지 않았던가.
그 냄새를 상상하자 이서휘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지면서 사당에서 벌어진 격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격전을 회상하던 이서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과거로 오게 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고통이 사라질 때쯤에 기현상을 느꼈고 누군가의 눈이 자신의 과거를 훑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정신이 잃기 전에 자신의 과거가 시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던 기억도 희미하게 있었다.
‘아수라의 사당.’
이서휘는 사류곡에서의 일이 다시 떠오르고, 기억은 이내 천마에게 닿았다.
‘천마……!’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서휘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바라봤다.
달이 떠 있었다.
“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서휘는 무언가를 볼 수 없는 사내였다. 달이란 것은 기억에만 남아 있는 것인데…….
그 달이 이서휘의 눈에 담겨 있었다.
달을 보고서야 이서휘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 꿈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아니, 두 눈을 잃은 채 살아야 했던 나날이 어느새 꿈이 되어 있었다.
달을 보며 벌써 수차례나, 이서휘의 몸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에 찌릿한 감각이 오르내렸다.
이서휘의 발이 저절로 밖을 향했다.
이서휘는 연무장에 한참 동안이나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무공의 기초를 닦았던 곳이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다시 보게 되다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쏟아지는 달빛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서휘는 오랜만에 바라보는 군림맹의 전경을 살펴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느낌.
나무 한 그루, 흔한 돌담마저 정겨웠다. 그렇게 천천히 군림맹을 돌아본 이서휘는 다시 질풍검대의 연무장으로 돌아와서 검 한 자루를 뽑아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살펴봤다.
검이 달빛을 반사하며 빛을 내고 있었다.
이서휘는 어린아이처럼 그 빛이 너무나 보기 좋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찬란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꿈이 아니다. 과거로, 군림맹 시절로, 두 눈이 멀쩡하던 시기로 돌아왔다…….’
☆ ☆ ☆
사방이 고요하다.
시원한 바람이 이서휘를 감쌌다. 이서휘는 그대로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하늘에 가득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던 시절로 돌아왔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무슨 일인지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모든 사물이 뚜렷하게 잘 보였다.
이서휘는 누워서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울었다.
서러워서 울고 기뻐서 울고 믿기지 않아서 울었다.
과거를 떠올렸다.
군림맹에 들어와 수련에 매진하고 임무를 수행하던 나날. 그러다 두 눈을 잃고 군림맹을 나와 사부를 만났던 나날. 마도 천하를 선언한 천마교에 맞서 싸우던 군림맹과 백도맹.
그리고 군림맹의 동료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서휘의 시간으로는 꽤 오래된 일이라 몇 명은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현실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숙소에 달려가 자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을 봐도 될 것이다.
‘참자. 감정조절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여기서 울자.’
이서휘는 검을 끌어당겨 보았다. 검을 만지는 순간 이서휘의 머리엔 ‘천마’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천마는 어떻게 생겼을까.’
목소리만 기억에 남은 자다. 천마를 떠올리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울컥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온몸에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암천세를 막았던 천마의 초식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무공이었을까. 제천왕 때문에 공력이 많이 소비되어서 졌던 것일까. 아니면 암천세가 아니라 다른 공격을 펼쳐야 했을까.’
이서휘는 천마를 생각하자 이가 빠드득 갈렸다. 평온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상태에서 겨룰 수만 있다면.’
이서휘는 검을 쥐고 일어나 천마가 자신에게 펼친 공격을 떠올려보며 검을 휘둘렀다.
‘암천세.’
그러나 이서휘의 검은 단조로운 궤적으로 허공을 벨 뿐이었다. 이서휘의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암천세가 나가지 않아?’
이서휘는 한참이나 멍하게 있다가,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눈의 상처도 없는 시절이다. 내공 또한 그 시절 수준일 게 뻔했다.
이서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
☆ ☆ ☆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내공을 보유한 거지?’
이서휘는 지켜보는 자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질풍검대 시절 자신이 사용했던 군림유하검을 펼쳐보았다.
지금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려면 검을 휘두를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리라!
내공은 확실히 부족했으나, 이서휘가 마음먹은 대로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군림유하검의 초식이 부드러웠다.
어쨌든 그는 검제라 불렸던 남자.
내공은 부족했으나 그가 알고 있던 지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서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검을 내지르다, 서서히 검제의 검법을 사용해봤다.
군림유하검과는 현격하게 분위기가 다른 검법.
암연심검(暗嚥心劍).
동작이 뚝뚝 끊어질 때마다 검 끝에서 검기가 발산될 것처럼 보이는 검법이었다.
형(形)을 감추고 실(實)을 추구하는 동작.
형(形)을 감추고 검기를 내뱉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검법이다.
그러나 내공이 부족한 지금은 검기는커녕 동작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군림유하검과는 다르게 몸이 낯설어하는 기분이랄까.
‘내공이 부족한 것이야 당연하다. 그러나 후반에 익힌 검법이 더 부자연스러워지다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한 이서휘는 서서히 속도를 올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누군가 봤으면 괴이하다 했을 것이다.
달밤에 미친놈처럼 검을 휘둘렀으니 말이다.
암연심검은 장님이 익힌 검법이다.
그때, 이서휘는 속에서 무언가 북받치는 느낌이 올라와 느닷없이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가슴이 시원해지자, 이번에는 쾌검을 펼쳐보았다. 먹이를 발견한 맹수가 달리는 것처럼 호쾌한 경공도 이어졌다.
널찍한 연무장을 빙글빙글 돌면서 가상의 적을 추격하던 이서휘는 적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듯이 검을 내질렀다.
허공에 천마라 생각하는 자가 마기를 내뿜고 있었고, 이서휘는 자신의 검으로 마기를 흩어놓고 있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더욱 가관이었다. 검을 내지르더니 훌쩍 뛰어나가면서 공중제비를 돌다가 돌담을 차고 그 탄력으로 솟구쳐 검을 내질렀다.
다시 천마를 생각하자 이서휘의 몸에 살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그때 야간 근무를 마치고 연무장으로 들어오던 질풍검대의 무인들이 이서휘를 발견하곤 저희끼리 속삭였다.
“부대주님 왜 저러시냐?”
“실연당했나? 미치셨나?”
“야밤에 뭐하시는 건가?”
질풍검대 무인들은 부대주에게 다가가려다 그 자리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멈췄다. 부대주 이서휘는 지금 누가 보더라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때 이서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다가 지켜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속이 철렁했다. 무엇보다 지금 펼치는 검법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이서휘는 저도 모르게 군림유하검과 암연심검을 연결해 보았다. 즉 초식은 군림유하검을 따르고, 검기를 내보내는 방식은 암연심검을 따랐다. 부자연스러웠으나 지켜보는 자들에겐 차라리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일검에 목을 꿰뚫고.
일검에 심장을 꿰뚫는다.
거뒀다가 휘두를 땐 적의 두 눈을 그었다.
몇 걸음을 내달리다가 이서휘는 훌쩍 솟았다.
구경하던 자들은 엄청난 높이로 솟아오르는 이서휘를 바라보다 휘영청하게 밝게 뜬 달을 번갈아 구경하고 있었다.
이서휘를 어미새처럼 따르는 질풍검대의 막내 강기찬이 감탄했다.
“와, 미쳤든 아니든 일단 우리 부대주님 멋지다.”
그때 함께 보던 질풍검대의 또 다른 부대주, 설진우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무공이 약간 이상한데? 너희 저런 무공 본 적 있느냐?”
“약간이 아니라 많이 이상한데요?”
세가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 군림맹이다. 같은 조직에 속해도 무공이 다를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질풍검대는 뒷배경에 세가가 없는 검대였다. 때문에 젊은 무인들은 사제지간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였다. 주로 연마하는 무공이 대부분 같았기 때문.
그런데 이서휘가 펼치는 무공은 질풍검대원들이 처음 보는 무공이다. 군림유하검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패도적인 무공이다.
기이한 검법이다.
마치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 같은 움직임이 아닌가?
검법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데도 이서휘는 악착같이 검을 휘두르고 있어 더욱 이상했다.
더군다나 이서휘는 지쳤다는 듯 서서히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려던 설진우가 질풍검대원들에게 말했다.
“주화입마가 아닐까? 가보자.”
“주화입마요? 에이, 설마요. 그런 게 우리에게 일어날 리가!”
기찬이 깐죽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설진우의 말에 질풍검대원들은 동시에 신형을 날려 이서휘에게 달려갔다.
이서휘는 다가오는 설진우를 발견하고는 마지막 절초를 내질렀다.
이서휘는 검 끝으로 돌담 앞에 서 있는 큼직한 나무를 가리켰다.
마치 내지른 저 검의 끝에서 검기가 발산될 것 같은 동작이었다. 당연히 검기가 나가리라. 그래야 하리라! 검기가 발산되어 나무가 박살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훅 하고 내지른 검 끝이 파르르 떨렸을 뿐이었다. 이서휘는 그 동작을 끝으로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물론 귀찮은 설진우를 염두에 둔 장난이었다.
하지만 달려오던 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설진우의 말을 농담이라 생각했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 이서휘를 둘러쌌다.
“형님! 이게 무슨 일이요!”
“부대주님!”
“서휘야!”
이서휘는 엎드려 누운 채로 빙긋 웃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온 설진우가 이서휘의 호흡과 맥부터 살펴봤다. 사람들이 시선이 설진우와 이서휘를 오고 갔다.
잠시 살펴보던 설진우는 느닷없이 이서휘의 머리통을 때리며 외쳤다.
“이 새끼가 장난하나? 깜짝 놀랐잖느냐!”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이서휘는 멀쩡히 일어나서 한 손으로 뒤통수를 비비고 있었다. 이서휘는 불현듯 이 시절에 설진우에게 머리통을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났다. 기쁜데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서휘는 몰려온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진우의 말마따나 이서휘가 주화입마에 걸려 쓰러진 줄 알고 달려온 터였다.
우습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다들 얼굴빛에 걱정이 서려 있었으니까.
이서휘는 대원들을 보다 씨익 웃었다.
‘아, 대체 뭔 말을 해야 하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약간 차오르자, 이서휘는 감정을 추스르고 설진우에게 말했다.
“진우야.”
“뭐? 왜 인마. 깜짝 놀랐잖아!”
이서휘가 비웃는 표정으로 설진우에게 말했다. 설진우가 가장 싫어하는 표정이다.
“주화입마는 개뿔이 주화입마냐? 내가 무림 십대고수라도 되냐? 주화입마에 걸릴 무공이 어디 있어? 이 녀석이 말을 막 던지네.”
항상 말로 설진우를 놀리는 이서휘. 항상 이서휘에게 놀림을 당하다가 폭력을 쓰게 되는 설진우.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지라, 이서휘의 말에 강기찬을 시작으로 대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웁, 푸흐흐하하하.”
설진우가 버럭 외쳤다.
“웃지마! 너희도 놀라서 같이 달려왔잖아.”
그 말에 대원들의 웃음이 벽력탄처럼 터졌다. 이서휘도 큭큭대기 시작했다.
“웃지말라 했다!”
그러자 아예 박장대소로 웃음이 번졌다. 이서휘도 주저앉아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한참 웃던 강기찬은 맞은편에서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속삭였다.
“형님들! 그만 웃으세요. 천하제일 잔소리 대회 우승하신 분 오십니다. 그만 웃으시라고요!”
그때 연무장으로 삼십 대의 무인이 다가오면서 혀를 쯧쯧 찼다.
“쯧쯧, 달밤에 미친놈들이 누군가 했더니 죄다 내 대원들이구나.”
푸근한 인상에 실눈이 특징인 질풍검대주 장시우가 대원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누가 밤에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엉? 야밤에 휘파람은 누가 불었어? 어?”
“대주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저는 안 불었습니다.”
장시우가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야? 왜 여기 다 모여 있어?”
강기찬이 진지한 얼굴로 상황을 정리하듯이 말을 꺼냈다.
“으흠, 그러니까요. 대주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저희는 숙소로 돌아가려는 찰나였습니다. 여기 이 부대주님이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계셨고, 이를 지켜보던 설 부대주님께서 어허, 저 자의 검법이 실로 이상하다. 어찌 저렇게 엉망일 수 있느냐, 저것은 혹시 주화입마가 아니겠느냐며 하셨습니다. 저희는 그럴 리 없다 여겼지만 바로 그때! 이서휘 부대주님이 픽 하고 쓰러지는 게 아닙니까? 놀란 저희가 득달같이 달려갔습죠. 과연 이 부대주님은 혼절을 하신 상태라 매우 위중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여기 설 부대주께서 이 부대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니 즉시 주화입마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이상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장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이런 개소리를 끝까지 들은 내가 미친놈이지. 자, 열을 세겠다. 눈앞에서 사라져서 숙소로 들어가는 시간. 하나, 두울…… 열까지 못 들어가면 내일 알지? 셋…….”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대주를 제외한 대원들이 예를 올리고 타다닥 소리를 내며 숙소 쪽으로 달렸다.
대원들이 우르르 하고 빠져 나가자 장시우는 설진우를 힐끗 보며 말했다.
“진우도 달밤에 미친 대원들이 없는지 좀 살펴보거라. 오늘따라 달빛이 아주 요망하게 밝다.”
“네, 대주님.”
대원들이 모두 물러나자 장시우는 이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놈이 무슨 일 있나?’
관찰력이 좋은 장시우다. 이서휘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부터 이서휘의 표정이 미묘했기 때문.
장시우가 이서휘 옆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뭔 일 있느냐? 웃는 거야, 우는 거야. 표정이 왜 그래.”
천마와 겨루다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이서휘가 손으로 눈가를 닦으며 대꾸했다.
“뭔 일 있긴요. 없습니다.”
뭔가를 감추고 있구나, 단박에 알아챈 장시우가 피식 웃었다.
“왜? 아까 초저녁부터 늘어지게 자더니만, 꿈에서 우리 질풍검대가 당하기라도 했더냐?”
이서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어려서부터 무공을 가르쳐주고 군림맹에 들어오게 해준 장시우를 바라봤다.
적당히 용감하고, 때로는 적당히 비겁했고, 때때로 이서휘를 짜증나게 만들었던 장시우.
그러나 이서휘가 눈이 먼 이후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다가 군림맹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 장시우.
그 장시우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오래오래 같이 갑시다.’
할 말은 많았으나 가슴 속에 묻어두고 이서휘는 일어났다. 엉덩이를 털면서 말했다.
“형님! 꿈이든 현실이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허이고, 그러냐?”
이서휘는 장시우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형님! 한번 안아 봅시다.”
“아아아, 뭐야. 저리 가라. 징그럽다. 술 마셨냐?”
“예, 한 잔 거하게 걸쳤죠. 형님! 접니다. 이서휘예요. 질풍검대 부대주!”
“이놈이 어디서 술주정이야?”
장시우가 귀찮다는 듯이 이서휘를 떼놓으며 말했다. 이서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 믿으시죠?”
“아아아, 믿는다. 믿어. 내가 우리 질풍검대의 왼팔인 이 부대주를 못 믿겠는가.”
“제가 오른팔입니다. 어찌 설진우 따위와 저를 견주십니까?”
“아, 그래. 그래. 너 오른팔 해라. 오른팔이나 왼팔이나.”
장시우는 이서휘가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해 표정이 진중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니다. 됐다. 알아서 잘해라. 내 오른팔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잘할 거지?”
“네, 잘할 겁니다.”
장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오늘처럼 수련도 좀 열심히 하고. 네가 웬일로 연무장에 있나 했다. 날이 이상해.”
“네.”
“나 먼저 간다.”
“네. 형님, 저 오늘까지만 좀 쉴게요. 내일부터 열심히 수련할 겁니다.”
“그리 하든지.”
장시우는 이서휘가 열심히 수련하겠다고 말해도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서휘는 장시우가 사라질 때까지 멀뚱히 바라보다, 장시우가 사라지자 그대로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 오늘까지만 쉬자.’
이서휘는 앞으로 지독하게 수련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누워서 하늘을 보자 이런저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중에는 친분은 있었으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이서휘가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도 기억이 났다.
‘어떻게 생겼을까, 그녀는…….’
목소리만을 기억할 뿐이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밤하늘을 보며 이서휘는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 ☆ ☆
늦은 시간이었지만, 숙소로 돌아온 이서휘는 자기 전에 질풍검대 일지를 살폈다. 설진우와 이서휘가 번갈아가면서 적고 있는 검대 일지다.
확인할 게 많았다.
지금이 어느 시점인지, 맹에 없는 대원들은 어디에서 무슨 임무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
이서휘는 일지에서 인명에 대한 부분을 천천히 살피다가 끝 부분에 이르렀다.
-몽성상회 분쟁 건으로 이서휘 외 3명 파견.
-몽성상회 분쟁 해결 후 이서휘 외 3명 복귀.
-심양표국, 강탈 사건으로 설진우 외 5명 파견.
-심양표국 임무 해결 후 설진우 외 5명 복귀.
-심양표국 임무에서 부상자 4명 발생.
몽성상회와 심양표국 모두 군림맹에 속한 사업들이다. 그 뒤로는 백지였다.
이서휘는 기억을 더듬었다.
“다음이 어디였더라. 몽성 근처에서 살인마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가? 맞는 것 같군. 그 다음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거 같고…….”
이서휘는 백지를 손 끝으로 찍은 채로 내려가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맹주님 탄생일이 이때쯤인가. 그 다음은 다시 대완표국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이서휘의 인생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일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몽성으로 가는 임무가 떨어지겠군.”
몽성 일대에서 사술을 익힌 살인마들 때문에 벌어진 사건들. 기억이 비교적 선명한 것은 그 임무에 이서휘가 파견됐었기 때문이다.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과거에는 실패했던 임무였다.
‘살인마가 한 명이 아니었지.’
돌이켜보면 여파가 매우 컸던 사건이었다. 사술과 마공을 익힌 자들이 몽성 일대에서 무분별하게 세를 확장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몽성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을 정도로 마공이 퍼져나간 사건이었으니까.
이서휘는 당시 상황을 머리에 떠올리며 수련에 임할 생각이었다.
‘싹을 잘라버려야지.’
더군다나 칠흑검제 시절처럼 내공이 고강한 시기도 아니었기에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했다. 이서휘는 한참이나 과거를 떠올리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서휘는 연무장에 모인 질풍검대 대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질풍검대에서는 이서휘와 설진우가 훈련 교관을 겸하고 있었는데 오전에는 주로 이서휘가 교관이었다.
이서휘의 시간으론 꽤 오랜만인지라 놀랍게도 얼굴이 가물가물한 녀석들도 많았다.
‘이것 참 낯설군. 낯선 것도 낯선 것이지만 다들 정말 애송이처럼 보이네. 휴우.’
후기지수로 기대를 받았거나, 후보생 비무전을 치러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녀석들도 있었다. 나름 저희가 속한 세상에서는 한가락 하던 녀석들인데 이렇게 모아서 새삼 바라보니 이서휘의 눈에는 한없이 평범해 보였다.
아마도, 이서휘가 한참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오랜만에 보니 감회는 새로웠다. 그러다 이서휘는 현재 질풍검대의 막내인 강기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 많은 막내놈은 여기 있고…… 귀여운 막내는 어디있지?’
이서휘는 강기찬과 동갑인 설주연을 찾았다. 질풍검대의 홍일점이다.
눈이 먼 이후에도 장시우와 함께 이서휘를 끝까지 챙기던 동생들이다.
질풍검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군림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기찬이와 주연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마도 천하를 선언한 천마교가 중원 무림에 등장했을 때쯤 소식이 끊겼던 대원들이 대다수였다. 죽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이서휘는 강기찬과 눈이 마주치자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어흠.”
이서휘가 한참이나 대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자, 보다 못한 강기찬이 입을 열었다.
“부대주님? 부대주님?”
“응?”
“백리세가 소저 생각하세요? 어제부터 정말 이상하시네. 주화입마의 여파가 있으신가요.”
강기찬의 말에 대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분위기 속에서 이서휘는 기억을 더듬어야했다.
‘백리세가 소저? 아.’
이서휘도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