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모월 모일 모시
모월 모일 묘시말 (욕이 아니다).
나는 황후다.
지금은 황후가 아니지만 조만간 황후가 될 예정인 대단하신 몸이다.
그런 이 몸이 어째서 일기를 적고 있느냐.
계란이에게 내 옛날이야기를 해주려다가, 예전에 숨겨 놓고 까먹어버린 옛 일기장을 발견해서다.
'어떻게 이걸 까먹었지?' 생각하면서 일기장을 펼쳤다가 나는 기가 막혀서 죽는 줄 알았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이 거친 삼을 헤쳐나갔을까! 삼…… 삼이라 쓰는 거 맞나? 삶이었던가?
아. 귀자에게 일기장을 감추고서 "삼을 뭐라고 써?"라고 하자 “삼은 삼이죠?”라고 대답한다. 삼이 맞나 보다.
어쨌든 그 거친 일기장을 보고 나서 결심했다.
예전의 내 일기장에는 슬픈 이야기가 대다수였지. 하지만 나는 이제 양파 까는 천년비가 아니라 행복한 천년비다.
그래서 이젠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한 일기를 새로 적기로 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 계란이가 성장하면 ‘엄마는 이렇게 힘든 삼을 삶았지만 나중에는 행복한 삼이 됐어.’라고 말해줄 거다.
*
같은 날 진시말.
떡돌이가 내가 열심히 일기 쓰는 걸 보더니,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일기장을 보여줬더니, 무척이나 가엾어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반숙이는 행복한 삼이구나.”
웃으면서 ‘다 네 덕’이라 말했더니, 떡돌이는 감동 받아서 흐느끼다 돌아갔다.
사랑스러운 떡돌이…….
*
같은 날.
사랑스럽다는 거 취소다. 떡돌이 이 못된 새끼.
승언이 ‘삼이 아니라 삶’이라고 알려줬다.
이 내시보다 못한 황제 새끼.
*
같은 날 밤.
떡돌이는 내시보다 잘난 최고의 황제입니다.
나는 떡돌이가 참으로 용맹하고 위엄 넘치는 잘난 황제라고 생각합니다.
반숙이는 떡돌이만 사랑합니다.
*
모월 모일 묘시말 (욕이 아니다).
내가 어제 떡돌이 칭찬을 한 건 내 자의가 아니었다.
내가 목욕하는 틈에 내 일기장을 본 떡돌이가 삐져서는
“짐이 내시보다 뭐가 못하단 말이냐”
이렇게 징징대서 마지못해 쓴 글이다. 일종의 방성문이라고 해야 할까.
*
같은 날 오시초.
방성문이나 반성문이나 그게 그거지!
앞으로 일기장을 잘 숨겨 놔야겠다. 떡돌이가 자꾸 내 일기장을 훔쳐보고 틀린 글시를 찾을 때마다 놀려댄다.
일기 쓰면서 이렇게 피로하면 큰일이다.
내가 원하는 건 성장한 계란이에게 ‘엄마는 이렇게 행복했어’라고 알려주는 거란 말이다.
‘엄마가 글자를 잘못 쓰면 아빠가 시비를 걸어댔어’라고 알려주는 게 아니다.
*
모월 모일.
떡돌이가 계란이 이름으로 짓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사실 있었다. 아니, 아주 많았다.
우리 계란이가 얼굴이 아주 훤칠하니 이뻐서 그렇다. 계란이 얼굴을 보면 온갖 좋은 이름이 다 떠올라서.
그래서 이름을 커다란 종이 한 장 가득 쓴 다음 떡돌이에게 보여줬는데, 빌어먹을 떡돌이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이를 어쩌지. 적자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떡돌이는 “정해진 이름이 몇 개 있고, 적자들은 그 이름을 돌아가면서 쓴다”고 했다.
그럼 나한테 왜 물었냐고 물었더니, 그냥 물어본 건데 대답할 줄 몰랐단다.
나쁜 떡 같으니라고.
*
모월 모일.
계란이가 월겸이란 이름을 받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다.
* * *
“일기는 다 쓰셨어요, 마마?”
내가 붓을 내려놓자마자 원웅이 익숙하게 물었다.
“응.”
나는 턱을 들며 대답한 다음 일기장을 덮고서, 원웅을 재촉했다.
“이제 우리 계란이 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가 포대기로 싼 계란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휴 내 새끼 꼬물거리는 거 좀 봐!
“우리 예쁜 계란이. 엄마한테 오거라.”
“이름이 생겼는데도 계란이라고 부르시네요?”
“애칭이 있으면 좋잖아.”
계란이를 안아 들고서 찐빵 같은 뺨과 떡돌이를 쏙 닮은 코며 입을 보고 있자니, 원웅이 놀리듯 물었다.
“그러다 둘째가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계란 아기씨가 두 분이면 안 되잖아요.”
“둘째는 메추리라 부르면 되지.”
“네? 그럼 계란이랑 공통점이 없잖아요?”
“메추리알이라 하고 싶은데 길어서 알을 뺀 거야.”
“알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원웅, 귀자와 둘째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적당한 애칭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연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태감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연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겸이구나. 이모한테 와보련.”
들어온 연비는 늘 그렇듯 들어오자마자 나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계란이만 받아 들고서 귀엽다고 얼렀다.
“겸이는 참 순하구나. 우는 걸 거의 못 본 거 같다.”
“날 닮아서 그런가 봐.”
동의하기 싫은가 봐. 대답을 안 하네.
“예쁜 우리 조카. 아이 착하지?”
잠시 뒤. 연비는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계란이를 유모에게 넘기고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그제야 내게도 아는 척 말을 걸었다.
“너는 그 고생을 하고 와서도 여전하구나.”
그런데 말 거는 내용이 좀 이상해.
무슨 말인가 싶어서 멀뚱히 쳐다보자, 연비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돌아가는 정세에도 관심을 가지란 말이란다. 지금 조례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니?”
“무슨 이야기?”
혹시 나를 황귀비로 올리자는 이야기가 나오나?
“폐하께서 월겸이를 황태자로 삼겠다 하셔서 난리가 났다더라.”
연비는 내가 스스로 추측하긴 힘들 거라 여겼는지, 결국 직접 알려주었다.
나는 놀라서 연비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아?”
“조금만 귀가 밝아도 알 수 있지. 기밀이라면 알 수 없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어차피 모두가 알게 될 이야기잖니.”
그런데 왜 나는 몰랐지? 귀자와 원웅을 쳐다보자 둘 다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둘 다 몰랐나 보다.
하긴. 둘 다 나랑 내내 여기서 놀고 있었으니 알 리가 있나.
“언니가 똑똑하니 됐지.”
어쨌든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다행인가? 아니, 다행이고 뭐고 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걸 꼭 미리 알아야 해? 나중에 기쁘고 지금 기쁘고 할 얘기 아니야?”
연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지는 걸 보니 아닌가 보다.
눈치껏 입을 다물고 답을 기다리자, 연비가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다들 찬성하면 언제 기쁘든 기뻐하기만 하면 될 일이겠지.”
“다들 찬성을 안 해? 왜? 폐하 자식은 계란이뿐이잖아?”
“폐하의 보령이 많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황손이 줄줄이 태어날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이런. 대신들은 바보네. 폐하 나이가 젊다고 안심하면 안 되지. 가는 데는 순서 없는데.”
“!”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원웅과 귀자와 연비가 동시에 내 입을 틀어막는다.
눈썹을 최대한 위로 올리고 항의하자 손들을 치우긴 하지만 다들 표정이 불안 불안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차갑게 항의하자, 연비는 한숨을 내쉬고서 당부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특히 남들 앞에선.”
“알았으니까 내 입 좀 틀어막지들 마.”
구시렁거리고 있자니 연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의 보령도 보령이지만, 월겸이가 너무 어린 점도 반대 이유란다.”
“대신들은 나이를 엄청 신경 쓰네?”
“월겸이가 너무 어리니 아직 자질을 알 수 없어서 그렇대.”
“왜?”
“나중에라도 자질이 더 뛰어난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해지잖니.”
어쨌든 대신들은 떡돌이가 둘째 볼 걸 확신하고 있는 건가? 나는 아직 메추리를 낳을지 말지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설마…… 떡돌이가 다른 후궁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거라 기대하나?
그 생각을 하자 좀 기분이 상해서, 나는 일기 적기도 관두고 우리 계란이를 온종일 쳐다보기만 했다.
계란이에게서 비상한 자질과 두뇌를 미리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계란이가 똑똑한 게 만천하에 드러나면, 대신들도 다른 후궁에게서 둘째가 태어나길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계란이는 연비 말처럼 날 보며 순하게 웃기만 할 뿐 그리 똑똑해 보이진 않았다.
“날 닮았나…….”
아닌데. 나도 똑똑한데. 난 그저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인데.
하지만 계란이는 배울 기회가 많은데도 왜 이렇지? 그럼 대체 누굴 닮은 거지?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침 떡돌이가 저녁을 함께 들자며 찾아왔다.
그러고는 궁녀들이 음식을 나를 동안 계란이를 안고서 좋아했다.
“우리 계란이는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랑스러워지는구나. 빨리 컸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빨리 크면 이 모습을 더 못 보니 아쉽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아까 내내 궁금해하던 질문을 했다.
“폐하. 질문 하나만 해도 돼?”
월요는 내 질문에 잠시 흠칫하더니 씁쓸하게 웃고서 말했다.
“그래. 해도 좋다. 짐은 이미 오는 길에 각오하고 있었다.”
“벌써? 내가 무슨 질문을 할 줄 알고?”
의외라 쳐다보자, 월요는 픽 웃으며 말했다.
“짐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단다, 반숙아.”
“그렇구나. 그럼 물어볼게. 혹시 태후 마마도 공부 못했어?”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음식을 날라주던 궁녀가 다리를 삐끗해서 넘어질 뻔했다.
월요도 수묵화처럼 그윽하게 웃고 있다가 눈을 삐죽 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미 짐작하던 질문 아니야?”
“설마. 짐은 네가 조례 때 황태자 건을 물어볼 줄 알았다.”
“맞아. 내가 물어본 게 바로 그거야.”
떡돌이는 영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얘가 암기만 잘하고 응용은 못 하는구나.
나는 떡돌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수준을 맞추어 설명해주었다.
“대신들은 계란이가 자질이 뛰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잖아. 하지만 떡돌이 너는 머리가 좋고, 나도 머리가 좋으니 우리를 닮았다면 계란이는 머리가 나쁠 수가 없어.”
“……너도 포함인가?”
허벅지를 찰싹 치자 떡돌이가 미안하다면서 입에 볶은 고기를 물려주었다.
고기를 씹어 삼키고서 나는 말을 다시 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계란이가 좀 너무 순한 거 같은 거야. 순하게 웃기만 하고 별로 호기심도 없고. 그래서 계란이가 공부를 못한다면 누굴 닮은 걸까 고민하다가-.”
“모후를 의심한 거구나.”
떡돌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승언은 입을 열고 싶어서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내 말이 혹시 너무 기분 나빴을까 싶어서 나는 얼른 떡돌이에게 위로했다.
“괜찮아. 태후 마마는 좋은 분이시잖아. 그리고 겉으로 볼 때는 아주 영민해 보이셔.”
떡돌이는 몹시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반박했다.
“모후께서는 부황이 황태자이던 시절부터 같이 학문을 논하셨고, 부황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후에게 의견을 자주 묻곤 했다. 모후는 당대의 대학자들 여럿과도 교류하셨지.”
“그게 무슨 소리야?”
원웅이 옆에서 작게 알려주었다.
“태후 마마께서는 아주 많이 무척 머리가 좋단 뜻이에요, 마마.”
아아. 그렇구나. 어쩐지. 후보가 없어서 의심하긴 했지만, 딱 보기에도 태후 마마는 영민해 보이긴 했다.
“그럼 계란이가 누굴 닮은 거지? 선황제 폐하도 아닐 거잖아. 그래도 일국을 다스린 분이신데.”
“…….”
나는 주저하다가 떡돌이의 귀에 대고서 물었다.
“혹시 내 친부모일까?”
그런데 뜻밖에 떡돌이가 “확인해보면 되겠지.”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니, 떡돌이가 방 안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서 말했다.
“실은, 네가 자꾸 너랑 계란이 둘만 가족이라며 짐을 빼놓기에 네 친부모가 누구일까 찾아보았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