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가까이 있는 님을 보지 못하고
약속 시각을 딱 맞추어 가기에 일각은 놓치기 쉬울 만큼 짧다.
정확히 타천천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나는 자시부터 타천천이 오기를 기다렸다.
놀랍게도 타천천은 축시를 알리는 나무패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나타났다.
젠장. 왜 여기서 계속 기다렸는지 모르겠네!
“미리 말하지만 녕녕. 아직 난 화가 풀리지 않았어.”
어쨌든 타천천은 못 보던 새 화가 좀 풀렸는지 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른 다가가 그를 안아 들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내린 명령 탓에 그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녕녕?”
“천소여 몸은 저기 옆에 있는 화한궁에 가져다 뒀어. 얼른 거기로 가자.”
결국 말로 하자, 타천천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 말했다.
“녕녕. 나는 여기 온 것만으로도 큰 모험을 한 거야. 우리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여기라고.”
“그래서 여기서 만났잖아. 이제 이동을 하자니까?”
“난 분명 천소여의 ‘몸’을 여기로 가져오라고 했어.”
“저 옆에는 가져다 뒀어.”
너무 초조해서 나는 담벼락을 부쉈다.
“젠장, 빨리 가야 해. 안 가면 우리 계란이가 죽는단 말이야!”
그래도 타천천은 내가 부순 벽 옆에 기대고 서서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웃었다.
“난 이미 너한테 큰 실망을 했어, 녕녕. 그런데 왜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지?”
“일각 기다려준다며! 일각 안에 다른 데로 옮겨도 상관없잖아?”
내가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했으나 타천천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걸 왜 네가 멋대로 해석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옆의 담벼락도 부쉈다.
사실 생각 같아선 타천천의 저 조동아리를 꼬집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 건 몰라도, 말로 누군가를 설득하는 건 그리 자신 없었다.
결국 내 상처일 뿐이라 되도록 덮어 두었던 일을 다시 끄집어냈다.
“너도 나한테 큰 실망을 줬잖아. 나는 널 지키려고 했는데 너는 날 모른 척했잖아. 그때 네가 나한테 준 실망감이 내가 네 서신을 찢은 거보다 못할 게 뭔데?”
“들인 시간?”
“그건 그래! 젠장!”
십 년 넘게 모은 거라 했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자니, 타천천은 픽 웃는 소리를 내고서 담벼락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니 한 번 가볼게.”
“정말이야?”
“그래. 하지만 명심해. 일각 지나면 바로 돌아갈 거야.”
그가 신신당부했다.
“그럼 얼른 뛰어와!”
하지만 나는 속이 타 죽겠는데, 타천천은 고의인지 느긋하게 굴었다.
“이 모습으로 갈 수는 없잖아.”
“몰래 숨어들어 가면 돼.”
“사방이 눈이야. 숨어 들어갔다가 못 빠져나오면?”
성질을 더 내려는데, 뜻밖에도 타천천이 나무 위에서 보따리를 꺼냈다. 웬 보따리?
너무 생뚱맞은 물건인지라 황당해 보고 있자니, 타천천이 보따리에서 옷을 한 벌 꺼냈다.
“어의 복장?”
어의들이 입고 다니는 옷이었다.
저건 언제 준비한 거야? 입을 벌리는 사이, 타천천은 겉옷을 벗은 다음 어의들이 입는 옷을 위에 걸쳤다.
겉옷은 아까 그 보따리에 넣어 도로 나무 위로 올렸다.
“그건 언제 준비했어?”
“혹시 몰라서.”
타천천의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그가 내 계획을 읽은 걸 기분 상해해야 하는 걸까?
아니다. 나와 타천천의 생각이 같다는 건 나도 타천천만큼 머리가 비상하단 증거다.
그럼 기분 상할 필요는 없겠어.
“좋아. 얼른 이리로 와.”
나는 얼른 그를 재촉했고, 타천천은 그제야 빠르게 화한궁으로 뛰었다.
“폐하께서 부르셔서 왔소.”
의원 복장을 한 타천천이 문 앞으로 가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두고 보았다.
어쨌든 그가 시선을 끌어준 덕에 내가 창문으로 침실에 들어가긴 쉬웠다.
방 안에는 내가 원웅과 귀자에게 부탁한 대로 아무도 없었다.
침상에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누운 천소여의 몸 외에는.
그 몸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배를 문질렀다.
배에 귀를 대어 보는데,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해 겁이 났다.
“빨리. 빨리.”
의연하게 굴려 했는데. 더 견디기 힘들어서 나는 타천천을 재촉했다.
“얼른!”
“좀 침착하게 굴어.”
“네가 일각 지나면 가버린단 말 안 했으면 침착하게 굴었어!”
“알았어. 일각 반 정도는 있을게.”
“그래도 빨리해! 계란이가 위험하잖아!”
“네가 허둥대는 건 나랑 관련 없는 거 같은데, 녕녕.”
말다툼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하라고 손을 마구 젓자, 타천천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그게 뭐?”
“열어봐.”
다급히 상자를 꺼내 열자 안에 들어 있는 건…… 뭐야. 이거 전에도 본 적 있는데.
“이거 용고 조각 아냐?”
“바로 알아보네. 꽤 인상 깊었나 봐, 녕녕.”
“이걸 나한테 왜 줘?”
내가 용고 조각을 들고 쳐다보자, 타천천이 동그란 의자를 가져다 걸터앉으며 아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녕녕. 너 정말 다시 천소여 몸에 들어갈 거야?”
이번에는 일부러 시간을 끈다거나 놀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정말 신중하게 물어보는 분위기였다.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타천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녕녕. 네 몸에 먼저 들어갔던 아유정 영혼은 내가 뺀 게 아니야. 아유정이 네 몸으로 너를 부르는 주술을 쓰고 그 부작용으로 몸에서 나올 수 있던 거야.”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너는 지금 네 몸 안에 있는 거라 그런 식으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어.”
“잘 못 알아듣겠어.”
“내가 네 ‘빈 몸’에 아유정 영혼을 넣을 수 있던 건, 아유정 영혼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었지. 내가 천소여 몸에 널 넣으려면 네 영혼이 필요해. 하지만 네 영혼은 지금 네 몸에서 보호받고 있어.”
나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타천천이 좀 더 쉽게 얘기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이론을 꼭 들어야 해? 반은 이해 안 가는데.”
“네가 사람이라면, 네 영혼을 빼내기 위해 네 몸을 죽였을 거야. 하지만 네 몸은 강시 몸이라 쉽게 죽지도 않아. 이게 문제지. 알겠어?”
그의 말은 이해가 가면서도 가지 않았다.
내가 멍하게 쳐다보자, 타천천은 손으로 자기가 내게 준 그 용고 조각 상자를 가리켰다.
“이걸 먹으면 강시가 된 몸이 무너져. 네 영혼은 밖으로 나올 거고, 나는 천소여 몸에 널 넣어줄 수 있어.”
“진작 그렇게 얘기하지 그랬어. 이제 이해가 가.”
“잘 들어, 천년비. 중요한 건 이제 말하는 거니까.”
“?”
“네 몸이 사라지면 이젠 네 영혼을 불러올 방법은 없어.”
“!”
“몇 번이나 난 너를 살리려 애썼지. 하지만 이젠 이게 끝이야. 천소여 몸이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타천천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 비 오는 날 밤 오두막에서 보여준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전에도 누누이 말했다시피, 내 혼령술은 불안정해. 그러니까, 어느 날 천소여의 몸에 갑자기 부작용이 일어나서…… 그냥 그대로 이 몸이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넌 돌아오지 못해. 네 몸을 없애 버리는 거니까.”
“…….”
타천천이 물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하지만 너무 말이 길어서, 나는 그냥 용고를 먹어버렸다. 대답은 용고 조각을 씹으면서 했다.
“응 괜찮아.”
그러고서 꿀꺽 삼켰다. 타천천은 멍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신음했다.
“정말…… 행동하기 전에 최소한 고민이란 걸 하라니까. 끝까지 넌.”
* * *
뭐라고 말하려던 천년비의 몸은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타천천은 완전히 몸이 엎어지기 전 손을 뻗어서 천년비의 몸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 상태로 한동안 가만히 앉아 천년비의 얼굴을, 그가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인정조차 해주지 않던 사랑해 마지않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천년비란 이름을 떨치며 새로운 세상의 돌풍이 되어 주길 바랐는데, 녕녕.”
그는 손을 들어 천년비의 뺨을 쓸었다.
“너는…… 미풍이었나 보다. 사람 사이를 맴돌고 싶어 하던 바람이었나 봐.”
타천천은 천년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비볐다.
눈에서 눈물이 고이다 천년비의 창백한 얼굴 위로 떨어져 구르자, 마치 천년비가 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천년비가 우는 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은 양파를 깔 때만 운다고 주장했으니까.
타천천은 그 모습 그대로 조용히 흐느꼈다.
“내가 그날, 널 모른 척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까.”
하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깨어나서도 대답을 거부할 것이다.
그가 천년비에게 받아본 따스한 눈동자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 천년비는 그에게 절대로 좋은 대답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천년비가 그가 모은 자료들을 찢어버렸을 때 실망감이 커서 이젠 마음이 다 떠난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나 보다.
타천천은 천천히 흙으로 변해가는 천년비의 몸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잘 가 녕녕.”
그는 천년비의 몸이 완전히 사라진 뒤 남은 영혼을 천소여의 죽어가는 몸 안으로 넣었다.
영혼이 들어가자 천소여의 숨은 좀 더 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타천천은 몸을 돌렸다. 이젠 정말 이별이었다.
설령 깨어난 천년비와 다시 만날 수 있다 해도, 그 사람은 그가 원하던 천년비는 아니었다.
* * *
“마마께서 수상한 남자가 들어와도 들여보내 주라 하셔서 들여보내 주긴 했는데…….”
귀자와 원웅은 마당에서 초조하게 서로를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
일이 축시에 벌어지리란 말은 들었으나, 축시 말이 되어가도록 들어간 어의는 나오지 않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걱정되었다.
“아까 그 사람, 어의 맞아?”
의아하기는 다른 궁녀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른 당직 궁녀 하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귀자는 얼른 나섰다.
“내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러고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안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마마?”
“마마!”
놀란 궁인들은 다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천비가 깨어난 채 배를 잡고 일어서 있었다.
“마마? 왜 일어나세요!”
“마마, 혼절하셨다 깨자마자 일어나시다니요!”
놀란 궁녀들은 천비를 눕히려 했으나, 원웅과 귀자는 일이 잘 풀린 건지, 들어온 게 해운잠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긴장했다.
그런 그들의 귀에 천비의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계란이가! 계란이가 아픈가 봐!”
일단 말투에서부터 ‘천빈 마마’가 돌아온 티가 났으나, 기뻐할 새도 없이 귀자는 어의를 부르러 뛰어야 했다.
“아까 그 어의는 어디 갔어?”
“몰라.”
“여기 귀신 나온단 소문이 있던데 혹시…….”
“그런 말 하지 마!”
원웅은 궁녀들이 소곤대는 데 웃지 않으려 애쓰며, ‘천빈 마마’에게 침상에 도로 누우라고 부축했다.
“마마, 일단 누우세요. 어쩌면 해산할 때가 된 건지도 몰라요.”
“벌써?”
그때. 어디선가 “황제 폐하 납시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목 다친 것 때문에 경공으로 뛰어올 수도 말을 타고 올 수도 없어서, 일단 ‘무슨 짓을 해서든 천년비를 도와라’라는 명령만 보내두고 뒤늦게 따라온 월요였다.
천비는 얼굴이 환해져서 문 쪽을 보았으나, 위풍당당하게 나타난 월요는 어의들에게 가로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폐하. 진통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하지만 짐의 반숙이가-.”
“방 안은 최대한 깨끗해야 합니다. 왕릉에서 이제 막 오지 않으셨습니까! 절대로 곁에 오시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