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뿌렸던 도움이 돌아오다
해운잠은 깜짝 놀라서 귀자를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귀자는 이전처럼 공손하게 서 있어서 보는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생각한 해운잠은 원웅이 눈을 부릅뜨고 귀자를 쳐다보는 걸 보자 제대로 들은 게 맞단 걸 인지했다.
해운잠은 머리가 얼얼해서 관자놀이를 짚었다.
어떻게 안 거지? 황제가 알아차린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태감과 궁녀까지!
하지만 그냥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해운잠은 머리를 굴렸으나 곧 픽 웃고서 의자 등받이에 다시 몸을 기대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아무도 그런 말을 믿어주진 않을 거다.”
계속 이 몸으로 있을 거라면 신경이 쓰이겠으나, 황제도 아니고 저 두 사람은 두렵지 않았다.
황제라면 영빈을 괴롭힐 수 있지만 저 두 사람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 황제조차도 그걸로 영빈을 괴롭히진 못할 것이다. 자신은 오늘 이 몸을 떠날 테니까.
“오늘 그 몸에서 떠날 거라 태연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귀자가 이 말까지 할 때는 해운잠도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저 태감.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아는 거지?
영혼이 다른 거야 뭐 눈치껏 알아낸다고 쳐도, 오늘 떠날 계획이란 걸 아는 사람은 얼마 없지 않은가.
그건 심지어 황제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걸 아는 사람은 해운잠에게 이야기를 듣고서 해운잠의 시신을 약속 장소로 무사히 운반해주기로 한 영빈과 이 일을 진행해 줄 타천천, 그리고 자신. 이렇게 세 사람 정도였다.
그러면 영빈과 타천천 둘 중 누군가에게서 말이 새어 나갔나? 대체 누구지? 영빈은 아닐 텐데. 그러면 타천천인가?
해운잠은 귀자를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귀자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마마는 오늘 그 몸을 떠나니 무서운 게 없으시겠지요. 그래서 이리 태연하신가 봅니다. 하지만 남겨질 식구들 생각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귀자의 질문에 해운잠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듯하자, 더 빼는 대신 빈정거렸다.
“참으로 머리 좋은 태감이구나. 게다가 감히 협박까지. 하지만 머리 좋은 태감이라 해도 고작 태감이지. 태감 따위가 영빈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해운잠이 코웃음을 치자 원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천빈 마마’가 자신의 특징 같은 춤들과 남들은 모르는 사적인 이야기 등을 들려주는 걸 듣고서 ‘이분이 우리 천빈 마마다!’라고 믿긴 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 혹시? 설마?’ 하고 안 미더운 부분이 있긴 했다.
한데 해운잠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자 정말로 저 몸에 해운잠 귀신이 씐 게 확실하게 믿어졌다.
어쨌든 해운잠이 저렇게 태연히 나오면 곤란하다. 화한궁까지 옮기기 힘들어진다.
일단 억지로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조건 자기 의지로 가게 해야 하는데……!
그때. 뜻밖에도 귀자가 음산하게 주문 같은 걸 외기 시작했다.
“5천도 당서촌의 해후영, 장여강, 해만기, 해월임, 8천도 영루촌의 호곽곽, 해민민, 해서역, 해궐, 해춘보, 나흥의 양주토…….”
그것들은 마을과 사람의 이름들이었다.
이름이 이어질수록 낯빛이 창백해지던 해운잠은 심지어 자신의 형부 이름까지 나오자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만!”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귀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네가 어떻게 내 친정 식구들 이름을 아는 거냐.”
원웅도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입궁 전부터 천씨 가문에 있던 원웅이지만 해운잠은 해운잠이지 그녀의 친정 식구들에 관해서는 궁금해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제가 아는 게 그것뿐일까요, 마마?”
귀자가 웃으면서 묻자, 해운잠은 입술을 깨물고 귀자를 노려보다가 결국 “알았다! 가면 될 거 아냐!” 하고 외쳤다.
“화한궁으로 가겠다!”
해운잠이 외치자 궁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나갈 채비를 도왔다.
원웅은 해운잠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게 도운 다음, 그녀가 가마에 오르자 귀자에게 살짝 물었다.
“귀자, 넌 그런 걸 어떻게 안 거야?”
귀자는 대답 대신 “다, 수가 있답니다.” 하고만 대답했다.
자신이 그림자 출신이라 이런 데 도가 텄고, 천빈의 그림자가 되기 전 자연히 그 주위 인물들을 싹 다 조사했단 건 그 대상 중 하나인 원웅에겐 말할 내용이 아니었다.
“마마는 왜 갑자기 화한궁에 가시는 거야?”
“모르겠어. 하지만 원래도 제멋대로 하시는 분 아닌가.”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해운잠은 마지못해 화한궁으로 이동했다.
천비가 완전히 만삭이기에 혹시 몰라 뒤에는 다른 궁인들도 여럿 따라붙었다.
하지만 도착한 그녀는 이대로 넘어가자니 너무 화가 나서, 일부러 모두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여기서 황제 폐하와 약속을 잡았다고 귀자와 원웅, 너희 둘이 전해 주었지. 난 너희 말을 믿겠다!”
해운잠은 원웅이 부축하려는 것도 뿌리치고 다른 궁녀의 부축을 받아 가마에서 내렸다.
그 사이, 태감들과 궁녀들은 화한궁 안에서 그나마 가장 깨끗한 방을 골라 최대한 빠르게 정리했다.
해운잠은 다시 가마에 앉아 방이 정리되어 안에 들어가길 기다렸다.
배가 너무 무겁다 보니 서서 기다리긴 힘든 탓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안쪽이 정리되고 해운잠이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
해운잠은 누군가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감각을 느꼈고, 세상이 휘청 기울었다.
해운잠이 천비의 몸에 머문 건 그게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마!”
“세상에, 마마를 어서 안으로!”
“어의를!”
그러나 천비가 쓰러진 후부터 궁인들의 악몽은 시작이었다.
궁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다급히 외치면서, 쓰러진 천비를 막 정리한 방 안으로 옮겼다.
태감 하나가 어의를 부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하필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방이다 보니, 어의를 불려오려면 시간이 또 걸렸다.
원웅과 귀자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가까스로 안도했다.
해운잠을 조금이라도 늦게 설득했다면 그녀는 비연궁 안에서 쓰러졌을 테고, 화한궁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화한궁으로 오는 길에 쓰러져도 근처의 다른 궁으로 가야 했을 터이니 역시 화한궁에 오지 못했을 거다.
정말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나머지는 마마가 해주실 거야.”
원웅은 초조하게 귀자에게 중얼거렸다.
“잘하시겠지?”
“그러길 바라야지요.”
귀자는 어딘가 어설픈 천빈을 떠올리며 덩달아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얼마 뒤, 어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마마께서 또 쓰러지셨다고요?”
어의는 진료 가방을 조수에게 뺏듯이 들고서 안으로 들어갔고, 기절한 천비를 보자마자 울면서 가방 문을 열었다.
천비가 걱정되어서 운다기보다는 만삭 상태인 천비가 이렇게 되어 버리자, 일이 잘못되어 자기까지 휩쓸릴까 겁이 나는 듯했다.
어의는 훌쩍거리면서 진맥한 후 손목에서 흰 천을 치우면서 원웅에게 말했다.
“정말 어쩐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 상태입니다, 또 그 상태예요. 자꾸 이렇게 기절하시고 쓰러지시고 그러면 마마뿐만 아니라 복중 아기씨까지도 위험합니다.”
다른 궁녀가 덜덜 떨며 물었다.
“곧 해산할 시기이신데. 괜찮으실까요?”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에 효험을 본 약을 처방해 드리지요.”
탕 궁의는 자신이 직접 약을 짓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궁녀들은 천비의 몸에서 무겁거나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빼고, 옷의 끈도 여기저기 풀어 주었다.
그걸 보다가, 원웅은 ‘천빈 마마’가 사람들이 근처에 없도록 물려달라 한 걸 떠올리고서 말했다.
“너무 주위가 어지러우면 마마께 좋지 않을 거야. 우리는 다 나가 있자.”
그러나 평소라면 원웅의 말을 들었을 궁인들은, 오늘은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중 하나가 원웅에게 물었다.
“원웅 소저. 아까 마마께서 그러셨잖아. 여기서 폐하와 약속이 있단 말을 네가 전했다고. 폐하는 언제 오셔?”
원웅은 난처해서 귀자를 힐긋 보았다.
귀자 역시도 이건 생각하지 못한 일이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중요합니까? 일단 마마가 안정을 취하셔야지요.”
그래도 얼른 상황을 무마해보려 했으나, 천비가 만삭의 몸으로 쓰러지자 궁인들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상하니까 그러지. 너랑 원웅 소저가 마마를 둘이서 뵙고 난 뒤에 갑자기 마마가 화한궁으로 가겠다 하셨어. 마마는 너랑 원웅 소저가 폐하와의 약속을 이야기해서 가는 거라 하셨고.”
옆에서 다른 궁녀도 외쳤다.
“맞아. 그러다 쓰러지셨잖아. 그런데 폐하와 약속이 있지도 않다면 이건 너희 둘 탓인데, 확실히 해두어야지!”
상황이 아슬아슬하니 어떻게 해서든 책임질 사람을 만들어 두려는 것 같았다.
원웅과 귀자는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천빈’이 무사히 몸에 들어온다면 그들을 구명해 주겠지만, 만약 천빈은 오지 않고 아기씨만 잘못된다면…… 황제는 자신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둘은…….
“뭣들 하는 거냐.”
그런데 뜻밖에도 정말로 황제가 나타났다.
“주인이 몸져누워 있는데 앞에서 네 책임 내 책임 나누고 있느냐!”
황제의 호통에 궁인들이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천비는 안정을 취해야 하니 다들 나가라.”
황제가 차갑게 말하자, 궁인들은 겁먹고서 서둘러 나갔다.
원웅은 얼결에 따라 나가긴 했으나, 해운잠을 유인하기 위해 한 거짓말대로 정말 황제가 나타나자 오히려 더 얼떨떨했다.
그러다 원웅은 귀자가 따라 나오지 않은 걸 알아차리고 뒤돌아보았으나,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폐하한테 붙들렸나?’
원웅은 걱정스러워 발을 굴렀다.
하지만 귀자는 황제에게 붙들린 게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궁인들을 따라 나가지 않은 거였다.
귀자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황제가 ‘왜 너는 안 나가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꾸벅 인사하고서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금 대인.”
황제는 귀자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자의 추측처럼, 딱 맞는 시기에 나타난 건 연금이었다.
귀자는 쓰러진 천비의 옆모습을 한 번 보고서 다시 연금에게 물었다.
“천빈 마마께서 도움을 청하신 겁니까?”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귀자는 걱정스레 말했다.
“도움을 주신 건 고맙지만…… 이렇게 나섰다가 폐하께 진노를 살 수도 있습니다. 폐하의 허락을 받고 대역으로 있는 것과 허락 없이 대역으로 행세하는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대인.”
“마찬가지 아닙니까. 폐하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했던데요.”
“!”
연금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제가 여기 나선 건 일전에 ‘천빈 마마’의 도움을 받아 일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갚으려는 거지요. 그리고 폐하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요?”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우라는 폐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귀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안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정말 다 한 거군요. 남은 건…….”
그는 죽은 듯 누운 천비를 바라보았다.
“늦지 않게 일이 해결돼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