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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76화 (276/283)

##  276화. 천빈을 옮겨라

문을 열고 나가자 창가에 서 있던 관군이 인상을 구기고 나를 쳐다보았다. ‘진짜 왜 이래?’ 하는 표정이었다.

“왜요. 또 귀신이라도 지나갔습니까?”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여기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는 거 같아서.”

관군이 뭐라고 반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다시 물었다.

“폐하가 날 데려오거든 방에 붙잡아두고 절대로 근처도 돌아다니지 말라 지시했나?”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내가 창문도 못 열게 하고 밖에도 못 나오게 해?”

“그야, 그쪽은 악명 높지 않습니까.”

“그럼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그대로 전해도 되겠지?”

“전하다니?”

“지금 상황 전부. 데려와서 창문도 못 열게 하고 밖에도 못 나오게 하고, 항의했더니 나를 탓했다고.”

“!”

관군은 반박하고 싶은 얼굴로 우물거렸으나 결국 한 발짝 물러나기로 한 듯 뚱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알았습니다. 돌아다녀요. 하지만 절대로 멀리 가면 안 됩니다. 이 근처에서만 있도록 해요.”

관군이 한 발짝 물러나 주자마자, 나는 고맙다 인사하고서 비원의 흔적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비원이 내게 서신을 전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거야.’

그리고 예상대로 그리 오래지 않아 후원에서 비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비원은 내가 밖으로 나오자, 다급히 돌아와서 물었다.

“여기 이렇게 나와도 되는 겁니까?”

“멀리만 안 가면 된대. 그래서 말인데 비원. 전에 내가 도와준 은혜를 지금 좀 갚아줘.”

비원은 걱정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인상을 구기고 항의했다.

“그래서 영약 줬잖아요? 아주 귀한 영약으로?”

“그건 고마웠어. 은혜는 이걸로 갚아.”

비원이 썩은 사과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두 번 갚으라고요?”

“싫어?”

“보통은 다 싫어합니다.”

“알았어. 그럼 도와주는 거로 해. 나도 나중에 도와줄게.”

비원은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습니다. 뭘 하면 될까요?”

다행이었다. 이번 내 계획에서는 비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니까. 물론 다른 계획들도 모두 중요하지만.

나는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폐하께 전해줘.”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비원은 서신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가 물었다.

“이것만 전하면 됩니까?”

“맞아. 무슨 핑계를 대고 들어가도 좋으니 그냥 이것만 전해줘. 그러면 돼.”

“정말 그게 끝인 거죠?”

“그렇다니까?”

비원이 떠난 뒤. 그다음으로 내가 간 곳은 그리운 비연궁이었다.

어렵진 않은 일이었다.

천소여 몸으로도 몰래몰래 잘 다니던 비연궁을, 내 원래 몸, 심지어 타천천이 훨씬 강하게 만들어 놓은 원래 몸으로 못 들어갈 수가 없지.

그리고 비연궁으로 가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원웅과 귀자였다.

“원웅. 귀자. 잠시만 이리로 와 봐.”

마침 둘이 같이 있기에 숨어서 부르자, 원웅과 귀자는 영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헛것을 들은 게 아닌가 고민하는 듯했다.

한밤중이니 그러겠지.

“원웅. 귀자.” 하고 다시 부르자, 그제야 그들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다가 나를 발견하고 퍼뜩 놀랐다,

“뉘시오?”

“누구세요?”

당연하겠지만 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복장…… 혹시 그쪽이 폐하께서 마음에 들어 새로 데려왔단 후궁이요?”

심지어 나를 이렇게 의심하기까지 했다.

떡돌이가 무림 악적으로 유명한 나를 다른 이유로 데려왔단 소문이 여기까지 번졌나 보다.

하긴. 궁궐 안에서 소문 퍼지는 속도는 장난이 아니지.

“내가 아마 맞을걸.”이라고 하자 둘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특히 원웅은 나를 정말 싫다는 듯 쳐다보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로 악명이 많이 쌓여 있다 보니 그 이상 더 말을 하지는 않지만.

“여긴 왜 온 거죠? 뭐 염탐이라도 하러 왔나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웅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우리만 아는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나는 내 방식대로 원웅을 설득하기로 하고 두 팔을 벌리고서 한 발을 올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원웅은 멀뚱하게 날 보다가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건…… 천비 마마의 홍학 춤……!”

이어서 내가 최근 연습했던 왜가리 춤을 보여주자, 원웅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춤 추던 걸 멈추고서 원웅에게 차갑게 말했다.

“본궁은 양파 깔 때만 울어.”

그러고서 신이 날 때 허공에 주먹질하는 시늉을 해 보이자, 원웅은 더욱 뜨악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팔을 번쩍 올리고 물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요?”

당연하지.

“이제 마마가 된다고 넷이서 좋아서 만세를 불렀잖아.”

내 말을 듣자 원웅은 두 손으로 다시 입을 막았고, 귀자 역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귀자에게도 질문한 게 있지.

“귀자. 우리가 같이 배 탄 거 기억해?”

“저는 탔다고 말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타긴 탔잖아. 내가 널 의원에 데려다줬고, 너는 나한테 충성을 맹세했어.”

귀자는 내가 천년비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 내 모습을 한 가짜 천년비가 따로 있고, 진짜 천년비는 천소여가 무림에서 쓰던 가명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이 탓에 오히려 더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서 제대로 뭘 반응하지를 못했다.

반면 원웅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천비 마마……?”

“사실 난 천빈에서 멈췄어. 책봉식을 하다가 쓰러져서 이후론 내가 아니거든.”

귀자와 원웅이 더욱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이게 가능한 건가요? 세상에…….”

원웅의 그 커다래진 눈에서는 곧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는 있었어요. 천비 마마 상태가 영 이상해서요. 전 부성이 죽어서 마마가 상심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기억은 하도 자주 잃으시니까 그러려니 했고요. 그런데 마마가 마마가 아니었다니……!”

“지금 몸 안에 있는 건 해운잠이야.”

해운잠 이야기를 듣자 원웅은 더욱 기겁했다.

사가에서부터 따라왔다는 원웅은 해운잠에 대해 잘 알 테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문제는 해운잠이 곧 사라질 거란 거야. 해운잠이 사라지면 몸은 곧 죽게 돼.”

이번에는 귀자도 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원웅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해운잠이 빠져나가면 몸이 쓰러질 거야. 무슨 핑계를 대서든 몸을 동쪽 보서고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옮겨와 줘.”

“동쪽 보서고요?”

창고인 보서고는 동서남북에 있으니 동쪽 보서고는 동쪽에 있다.

그리고 후궁들의 구역 역시 동쪽에 있다.

즉, 원웅과 귀자가 천소여의 몸을 동쪽 보서고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기만 해도 일은 좀 수월해진다.

비연궁은 보서고에서 그리 가깝지 않으니까.

“할 수 있겠어?”

내 질문에 원웅은 일단 “네! 그럼요!” 하고 대답했다가 뒤늦게 겁이 나 물었다.

“할 수 있을까요?”

“못 하겠으면 미리 말해줘 원웅. 다른 방법을 빨리 찾아봐야 하거든.”

원웅은 입술을 씹으면서 고민했다.

귀자 역시도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결국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할게요, 마마.”

원웅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았고, 귀자도 한마디 했다.

“믿으세요. 뭔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에 계신 분이 제가 아는 그분이란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믿을게. 둘 다. 그리고 하나만 더. 축시 전에는 그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해줘. 되도록이면 자시 말부터.”

“네!”

이후 나는 몇 가지를 더 당부했고, 귀자와 원웅은 둘 다 똑똑하게 이해했다.

좋아. 그러면 천소여를 동쪽 보서고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운반하는 건 해결됐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난도는 확 낮아지겠지.

그러면 다음에는…….

‘타천천을 찾아볼까?’

* * *

타천천이 밤에 돌아다니진 않을 게 뻔했고, 내가 얌전히 황제를 기다리고 있단 것도 한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임시 거처로 돌아가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관군들이 가져다준 아침 밥상까지 제대로 먹은 후, 빈 그릇을 돌려준 다음 나가보았다.

하지만 예상한 것처럼 거리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타천천은 찾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럴 만도. 타천천 성격이라면 내가 자기를 시간 전에 찾아볼 거란 생각을 할 수 있을 거야.’

뭐. 어쨌든 나도 타천천은 못 볼 가능성까지 생각해 두었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에게 가봐야지.

시간 안에 비원이 떡돌이에게 무사히 도착해야 할 텐데.

* * *

원웅과 귀자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둘이서 만삭인 해운잠을 대체 어떻게 해야 동쪽 보서고에서 가장 가까운 방으로 옮길 수 있을지 토론했다.

“동쪽 보서고에서 가장 가까운 궁은 화한궁입니다. 마침 아무도 사용하지 않지요.”

“하지만 귀자, 그 궁전은 선황제 폐하 때부터 안 쓰고 있잖아. 보서고에 도둑이 들었을 당시 그 궁전에 있던 후궁이 유산해서, 아무도 거기 가고 싶지 않아 해. 몇십 년이나 안 써서 안도 엉망일 텐데. 해운잠이 거기 가려고 할까?”

“아무 말이나 지어내야지요. 어쨌든 천비 마마가 쓰러진 후에는 절대로 옮길 수 없으니, 쓰러지기 전에 제 발로 가게 유도해야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신중하게 생각하기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천빈 마마’는 오늘 해운잠이 그 몸에서 나갈 거고, 쓰러질 거라 했다.

언제 몸에서 나가는지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화한궁에 데려가는 수밖에.

두 사람은 조금 더 의논하며 대략적인 큰 줄기만 잡은 후. 해운잠이 쉬고 있을 때 그녀에게 찾아갔다.

원래도 두 사람이 늘 주위를 맴돌며 이것저것 챙겨주기에, 해운잠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차만 마시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원웅은 눈치껏 그녀를 보다가, 해운잠이 팔이 아픈 듯 두드릴 때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을 주물러주면서 말을 걸었다.

“마마. 화한궁에는 언제 가실 건가요?”

해운잠은 팔을 뻗은 채 하품하다가 되물었다.

“화한궁?”

“네.”

원웅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반년 전에 폐하와 약조하셨잖아요. 이 날짜에 화한궁에서 만나기로요.”

“그래?”

참 별 약속을 다 했네. 해운잠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런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해운잠이 그런 약조가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으니 원웅이 사기를 치는 거였다.

“얼른 채비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해운잠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약조했다 해도 지금 폐하는 황궁에 안 계시잖니. 가봤자 안 오셨을 텐데 가서 뭐 하겠어.”

귀자는 뒤에서 자기 이마에 손을 대고 소리 없이 신음했다.

원웅은 의외로 해운잠이 쉽게 넘어오지 않자 갑갑했으나 그래도 재차 권했다.

“혹시 모르잖아요. 예전에도 폐하께서 안 오실 거라 생각하고 약속 장소에 안 가셨는데, 폐하가 오시는 바람에 일이 생기기도 했고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니 함께 가봐요, 마마.”

참 별스럽게도 연애하는군. 해운잠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배가 너무 무겁고 좀 상태가 좋지 않게 여겨지자 다시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배가 무겁고 움직이기 어려워서 안 되겠다. 폐하께서도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

설령 이해를 못 하고 화를 낸다 해도 그때 이미 그녀는 이 몸 밖으로 나간 상태일 터이니 상관없었다.

그래. 언제 이 몸 밖으로 나가게 될지 알고 화한궁까지 간단 말인가.

그러다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황제가 영빈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너희 중 하나가 가 있다가 폐하께 말씀드리면 되겠구나.”

원웅과 귀자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쩌지?

그러다 원웅이 재차 시도해보려 하는 그때.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귀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마마가 마마가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에, 해운잠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다가 놀라서 도로 상체를 세웠다.

해운잠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귀자를 쳐다보았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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