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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75화 (275/283)

##  275화. 마지막 내기

타천천은 ‘천비 마마’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계속 어느 가게에 드나든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면서도 굳이 해운잠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이젠 그쪽 일엔 별로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도 않았다.

천년비에게는 ‘실망했다. 이젠 관심이 사라졌다’고 했지만, 사실 그의 심경은 그보다 더 복잡한 탓이었다.

천년비는 사랑으로 시작해 그의 인생에 이정표가 된 사람이었다.

‘실망했으니 잊겠다’는 한마디로 갑자기 잊고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타천천은 멍하게 귤을 까 먹으면서 갑작스레 닥친 이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을 몰아내려 노력했다.

일부러 천년비에 대한 소식을 듣지 않으려 했고, 부하들에게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던 중. 천년비에 대한 소식이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천년비가 붙잡혔다고? 말이 안 되지 않나?”

“무림맹에서 그토록 뒤쫓아도 못 잡던 천년비를 대낮에 ‘천년비 나와라’ 하고 찾아간 관군들이 잡아갔다니. 에이, 난 못 믿겠네.”

“자네 둘이 못 믿으면 어쩌라고. 자네 말마따나 대낮에 잡혀갔는데.”

“그럼 잡혀간 게 아니라 제 발로 간 거겠지.”

“진짜로 황제랑 둘이 뭐 있는 거 아냐?”

“설마.”

“왜. 악적인 걸 모르고 보면 황제가 얼굴을 보고 반할 수도 있지. 외모만큼은 대단하지 않은가. 그 외모 때문에 오히려 눈에 띄어서 숨지도 못하지만.”

이게 무슨 소리야. 타천천은 천년비가 자주 사 먹던 당과를 습관적으로 사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떠들어대는 이들을 보았다.

한 무리의 무림인들로, 다들 잘 사는 가문의 자제들인지 옷차림이 번듯했다.

“그런데 천년비가 숨어 있던 곳이 개원 동생 집이라면서. 개원이 천년비를 죽였단 소문이 나더니. 혹시 말만 그렇고 둘이 계속……?”

“민신이 몰래 숨어들어 사는 걸 보고 신고했으니 그건 아니지 않을까?”

당과의 단맛이 놀랍게도 싹 사라진다. 타천천은 당과 먹기를 그만두고서 투덜거리면서 거기서 멀어졌다.

천년비를 관군이 잡아가? 말도 안 된다. 천년비는 수많은 고수들도 따돌리면서 살아왔다.

지금은 그가 만든 강시의 몸이 있으니 더욱 수월하게 고수들을 따돌릴 수 있을 터.

그런 천년비가 대낮에 사람들이 보도록 순순히 관군들에게 잡혀갔다면, 그냥 자기 의지라고 보아야 했다.

‘결국 황제에게 또 가기로 한 건가.’

기분이 더욱 나빠진 타천천은 빠르게 걸어가다가, 몸을 휙 돌려 한 다루 안으로 들어갔다. 해운잠을 만난 그 다루로.

다루 안으로 들어가 2층을 보자, 듣던 대로 해운잠이 보였다.

2층 가장 깊숙한 자리에 앉아 아래층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해운잠이 벌떡 일어났다.

타천천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해운잠은 본능적인 위기의식으로 그를 알아챈 듯했다.

타천천은 먹던 당과를 쓰레기통에 넣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해운잠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녀가 손을 덜덜 떠는 게 보였다.

“날 찾았다 들었습니다.”

타천천은 말을 하면서도 왜 자신이 여기에 온 건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떤 행동은 스스로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이루어지고 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해운잠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자 타천천은 곤란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일어섰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 얘기하지요.”

타천천은 해운잠을 방 안으로 데려갔다.

예전에 타천천이 해운잠과 만났을 때 사용한 곳도 방이었다. 대화를 아무나 듣게 할 순 없으니까.

해운잠은 타천천이 방문 닫는 걸 지켜보다가, 그가 맞은편에 앉기도 전에 애원했다.

“내 딸을 살려줘요!”

타천천이 해운잠의 만삭인 배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아이가 아니라, ‘내’ 딸을 살려달란 거예요.”

“난 의원이 아닙니다, 낭자.”

“황제가, 황제가 제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렸어요. 정확하게요. 의심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라고 그래요. 되돌리지 않으면 이 일에 대한 죄를 영빈이 받게 할 거라 그래요. 이 몸은 건드릴 수 없으니까 내 딸에게 벌을 내린대요!”

타천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천비’가 천년비가 아닌 건 황제도 당연히 알았겠지만. 해운잠이 천비가 됐단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하여튼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한때 천년비였던 천비를 데리고 있으면서 진짜 천년비까지 데려갔고.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타천천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해운잠이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뒤집었다.

안에서 작고 영롱한 보석들이 쏟아졌다.

“더 줄게요. 훨씬 많아요. 내 딸을 도와주면 전부 줄게요!”

타천천은 개중 금빛이 나는 손톱만 한 보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피며 물었다.

“어떤 식으로 도와달란 건지 모르겠군요.”

“원래대로 돌려줘요. 나를 내 몸으로.”

“그 몸은 이미 죽었잖아요?”

“괜찮아요. 이 몸에서 나가게만 해줘요. 그러면 폐하도 영빈에게 더 해코지하진 못할 테니까!”

“사실 죽은 몸도 살린 순 있습니다.”

이게 장난하나…… 해운잠이 울먹이다가 타천천을 노려보았다.

타천천은 빙그레 웃고서 보석을 전부 옆으로 치워놓았다.

“하지만 죽은 몸을 살리는 건 부작용이 있습니다.”

“부작용이라니요?”

“사람 몸은 아니지요.”

“!”

“그 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미칠 수도 있고, 몸이 부서질 수도 있고, 갑자기 이성이 사라질 수도 있고.”

“괜찮아요!”

해운잠이 그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타천천은 혀를 찼다.

사실 해운잠의 ‘죽은 지 얼마 안 된 몸’에 그녀를 도로 넣는 건 타천천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혼령술은 아직 실험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그러면 저 몸에 영혼이 사라지겠지. 천소여 몸에 영혼이 사라지고 빠르게 죽어갈 거다.

당연히 천년비가 자기 아이라고 우겨대는 저 애도 죽겠지.’

타천천은 천소여의 빈 몸에 천년비의 영혼을 넣어줄 수 있었다.

천년비 몸에 아유정을 넣었던 것처럼, 천년비가 그 과정에서 천소여 옆에 있으면 가능했다.

하지만 회임한 천비는 의식이 없어도 궁중 깊은 곳에 숨겨질 터. 그 일을 치르려면 그가 궁궐까지 가야 한다.

타천천은 천년비에게 실망했다. 그가 그런 모험을 해서까지 천년비를 위해 주어야 할까?

천년비는 그가 십 년 넘게 준비한 것들을 망치고 가버렸는데, 그는 천년비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나?

타천천은 웃으면서 일어났다.

“천비가 되살아날진 모르지만, 그쪽은 원래 몸에 넣어줄 수 있습니다. 낭자의 원래 몸 시신을 구해서 태안루 창고로 가져와요. 창고지기에게 ‘시신을 주기로 했다’고 하면 알아서 받아줄 겁니다.”

“그 외에는…….”

“그냥 기다리면 됩니다.”

밖으로 나간 타천천은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잠시 그 상태로 멍하게 있으려니, 은밀하게 그를 따라다니던 부하가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그냥 무시하려니 마음이 불편하다. 짜증나지만 마음이 불편해.”

“예?”

“내기를 한번 해볼까.”

“예?”

난데없는 내기 이야기에 부하가 어리둥절해 되묻자, 타천천이 지시했다.

“붓이랑 종이.”

부하가 작은 필첩을 내밀자 타천천은 자기가 세필을 알아서 꺼내더니, 종이에 무어라 쓴 다음 부하에게 건넸다.

“이걸 비원에게 전해라.”

* * *

떡돌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정확히는 떡돌이와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궁전에 왔는데.

사람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듯 지켜보는 가운데 관군들에게 둘러싸여 궁전 안에 들어왔는데.

막상 안에 들어오고 나니 떡돌이가 없단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어디 갔냐고 관군 하나를 붙들고 끈질기게 물어보며 놓아주지 않자, 관군은 기절하려 들며 대답했다.

“선황제 폐하의 무덤에 문제가 있어 급히 그쪽으로 가셨소! 제발 좀 놓으시오!”

관군은 내 손에 닿으면 자기 팔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어쩌면 떡돌이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니 내가 후궁이 될지도 모른다 여겨서 저러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정말로 떡돌이가 나한테 후궁이 되어 달라 그러면 어쩌지? 설마. 그러진 않을 거야.

이 몸, 언제 부작용이 올지 모르는 이 몸으로는 후궁이 될 수 없다.

후궁이 되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사나 규칙들이 있는데. 이 몸으론 절대 그럴 수 없지.

우리가 그나마 잘 지낼 수 있다면 그냥…… 승언이를 통해서 서신이나 주고받는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얼마나 멍하게 있었을까.

하늘에서 완전히 햇빛이 사라지고 어둑어둑한 까만 밤이 되었을 무렵. 창문 틈으로 접은 종이가 밀려들어 왔다.

‘뭐야?’

나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뜻밖에도 종이에 쓰인 건 비원이 쓴 편지였다.

-결국 원래 모습으로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하는군요. 궁금했는데. 하지만 단주님께서는 환상을 지키려면 안 보는 게 낫다고 합니다. 단주님하고 싸웠습니까?

놀라서 창문을 열었으나 밖에는 비원이 없었다. 옆에 선 관군만이 내게 멀뚱히 묻는다.

“왜 그럽니까?”

“방금 귀신이 지나갔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무서우니 하지 마십쇼!”

관군이 바락 외친다. 나는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서 비원이 쓴 편지 안에 들어 있던 또 다른 편지, 그보다 훨씬 작은 편지를 펼쳤다.

-내기하자 녕녕. 해운잠은 내일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거고, 천소여의 몸은 빌 거다.

그런데 안쪽에 더부살이처럼 끼어 있던 편지 내용이 생각보다 더 엄청났다.

게다가 말하는 걸 보니 타천천이 쓴 거다.

‘심지어 뭐? 지금 천소여 몸에 있는 게 해운잠이라고? 해운잠은 영빈 엄마 아냐?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해운잠 이름이 왜 여기서 등장해?’

-모레 축시 초. ‘천소여의 몸’을 가지고 동쪽 보서고로 와라. 거기서 딱 일 각 기다리겠어.

서신은 여기까지 끝이었다. 나는 서신을 내리고서 방 안을 초조하게 맴돌았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타천천…… 이 새끼는 늘 이래. 날 도와주는 건지 엿 먹이는 건지 모르겠어!

대체 이게 뭐야? 해운잠이 내일 자기 몸으로 돌아가는 건 정해진 거야?

그러면 계란이는? 천소여 몸은 비면 계란이는? 내가 동쪽 보서고에 천소여 몸을 가지고 오지 못하면 계란이는 죽는 건가?

해운잠이 빠져나가면 천소여의 몸은 빈 몸이 되고, 겉으로 보기엔 또 의식불명 상태겠지. 사람들은 난리가 날 거다.

천소여의 몸은 비연궁에 꽁꽁 감추어져서 어의와 궁인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텐데. 그 몸을 가지고 동쪽 보서고로 오라니.

심지어 거기서 딱 일 각 기다린대.

그러다 조금만 잘못되어도 나는 후궁과 황손을 동시에 해치려 한 몹쓸 사람이 되는 거잖아?

타천천 이 미친놈. 이 계획은 본인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궁 밖의 사람이 궁 안, 물론 보서고는 외진 곳에 있긴 하지만, 하여튼 궁 안에 침입하려는 것도 위험한데.

심지어 자기가 있는 쪽으로 쓰러진 후궁을 데리고 오라고? 자칫 잘못하면 나나 타천천이나 둘 다 엄청난 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운반 도중 계란이가 잘못될 일은 없어. 계란이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운반할 거니까.

하지만 내가 시간 내에 천소여 몸을 운반하지 못하거나 타천천이 잡히거나 해서 시간 내에 천소여 몸에 들어가지 못하면 계란이 역시 위험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죽긴 마찬가지다.

‘타천천, 진짜…… 애매하게만 돕는 새끼!’

차라리 떡돌이가 여기 있었더라면 천소여 몸을 자연스럽게 보서고로 운반해줄 수 있었을 텐데.

“젠장. 어쩌지.”

초조하게 생각하기를 한참. 내가 천소여 몸을 무작정 들고 뛰는 것보다 그나마 아주 조금 안정적인 방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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