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다시 궁으로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마마.”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해 고생하던 해운잠을 돕겠다고 나선 건 태감인 귀자였다.
“네가?”
해운잠이 의심스러워 묻자, 귀자는 두 손을 모으고서 섭섭한 척 말했다.
“마마께서 몰래 놀러 다니실 때 늘 데리고 다닌 건 원래 소인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요.”
해운잠은 안도했다. 원래도 천비가 여기저기 잘 놀러 다녔구나.
어쨌든 그 덕에 외출은 그리 큰 의심을 받지 않고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래, 고맙다.”
해운잠은 그날 저녁. 귀자의 부축을 받아 궁궐 돌담에 난 작은 옆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일부러 중간까지만 귀자를 데려간 다음 그에게 지시했다.
“여기부턴 내가 혼자 다녀올 테니 너는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귀자도 해운잠이 완전히 은밀한 만남에까지 자신을 데려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겠습니다, 마마.”
귀자는 순순히 대답하고서 물러섰다.
해운잠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연거푸 그를 쳐다보다가, 몇 번을 돌아보아도 그가 제자리에 선 걸 확인하고서야 바쁘게 걸어갔다.
가려던 장소 부근에 도착한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한숨을 들이쉬었다.
‘여기 있을까. 있어야 한다. 반드시. 아니면 영빈이 죽게 돼!’
해운잠은 전에 본 그 남자가 이곳에 있길 바라며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남자만 없었다.
실망해 우두커니 서 있자니 점소이가 와서 싹싹하게 물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릴까요?”
해운잠은 급히 점소이를 붙들고 물었다.
“내가 며칠 전에도 여기에 온 적이 있는데.”
“어…… 죄송합니다, 손님. 너무 많은 분이 다녀가셔서요.”
점소이는 해운잠이 자신을 못 알아보냐 물을 거라 여겼는지 질색해서 말했다. 해운잠은 고개를 저었다.
“날 봤는지 묻는 게 아니다. 키가 한 이 정도로 굉장히 크고, 이마랑 콧대가 또렷해서 꼭 깎아둔 조각처럼 생긴 남자에 관해 묻는 거야. 웃는 상이고…….”
“죄송합니다, 손님. 모르겠는데요.”
“……그래.”
해운잠은 한숨을 내쉬고서 알겠다 대답한 뒤, 문이 내려다보이는 2층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해운잠은 그 남자가 다시 보이기를 기다렸다.
* * *
그로부터 며칠간 해운잠은 계속해서 그곳을 들락날락했으나, 그녀가 천비가 되도록 도와준 그 남자는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점소이가 그녀를 알아보고서, 그녀가 나타나면 “오늘도 늘 드시던 거로 드시겠어요?”라고 묻게 되었을 뿐이다.
해운잠은 그러라 하고서 늘 같은 2층 구석 자리, 가끔 누군가 그 자리에 앉는다면 그 옆자리에 앉아 문을 내려다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찾는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비 역시 기다리는 소식을 못 얻기는 마찬가지였다.
해운잠 귀신이 자기 동생에게 쓰인 것 같다고 말한 지 며칠.
황제가 무언가 행동해줄 거라 여겼으나, 연비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연비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식을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폐하께서 누구를 찾아?”
동생을 구해달라 했더니. 황제가 다른 여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천년비라고, 무림에서 아주 악명 높은 악적이랍니다.”
“무림인? 그 여자를 왜?”
“예전에 그 여자에게 은혜를 입은 게 있으니 갚겠다 하시는데…… 글쎄요. 폐하께서 무림인 여자에게 직접 나서서 갚아야 할 은혜 입을 일이 있을까요?”
소식을 전해준 궁녀는 입술을 삐죽였다.
“제 생각엔 그냥 새로운 여인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거 같습니다. 심지어 그 여자는 폐하께도 피해가 갈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닌 여자라는 걸요.”
연비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으나, 그래도 황제가 자신의 동생인 천소여만큼은 진심으로 연모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랑이란 건 쥐의 똥만큼도 쓸모없구나.”
“네?”
“고양이나 다시 길러야겠다. 고양이나 하나 얻어오거라.”
한숨 섞어 말한 연비는 제 고양이를 황제에게 뺏기고, 심지어 그 뺏긴 고양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일을 떠올리고 차갑게 덧붙였다.
“폐하는 모르게 구해와라. 관심도 없겠지만.”
“네, 마마.”
* * *
“폐하가 왜 천년비를 찾는 거야?”
“천년비가 악적이긴 하지만 무림인이잖아.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 아닌가?”
“천년비가 그 뭐야, 몇 달 동안 길 부수고 다녀서 그런 거 아닌가?”
“천년비가 혼자 부쉈나. 여럿이 부쉈지. 그 일 때문이면 딱 집어서 천년비만 부르진 않을 거 같은데…….”
“왜, 진짜로 폐하랑 무슨 연이 있을 수도 있지.”
“나 원 참. 무림에서도 있을 곳 없이 떠도는 천년비가 황제 폐하와 무슨 연이 있으려고. 우리 황제 폐하가 뭐 밖에서 떠돈 시간이 몇 달 된다거나 그러면 몰라, 그냥 궁궐에서만 지내신 분 아닌가.”
“혹시 함정 아닐까?”
“함정이라니?”
“은혜 갚겠단 건 그냥 하는 말인 거지. 폐하도 천년비가 거슬려서 잡고 싶은 거야. 하지만 무림과 관은 서로를 모른 척해야 한단 원칙이 있으니 대놓고 잡진 못해서 이렇게 둘러 방을 건 게 아닐까, 이 말일세.”
“그런가? 그래, 그 말이 제일 그럴듯하구먼!”
웃기지들 않네. 속으로 혀를 차면서 나는 죽립을 눌러쓰고 사람들 사이를 퍽퍽 밀치며 지나갔다.
요 며칠째 거리가 아주 술렁거린다. 이게 다 떡돌이 때문이다. 그가 나한테 은혜 갚을 게 있다며 찾고 있단 방을 붙여서.
내가 자기 옆에 나타나지 않고 천소여와 다시 몸이 바뀔 것 같지도 않으니 이런 수를 쓰나 보다.
하지만 아직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론이 난 게 아니기에 나는 떡돌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떡돌이는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수월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거야 타변태가 이 이상 내 몸을 조종하지 않을 때 일이고.
앞으로 타천천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내 몸에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어떻게 떡돌이 옆에 간단 말인가.
장공주는 뭐, 의지력이 약해서 소중히 여기던 제 동생을 공격했겠어?
아니지. 장공주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른 일이잖아.
어쨌든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외출해서 배를 타고 호수를 돌며 시간을 때운 다음 당과만 여러 개 사 들고 다시 개운호의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자기를 보면 불편해한단 생각을 해서인지, 개운호는 요즘은 먹을 거나 돈을 조금씩 두고 갈 때를 제외하면 집에 잘 오지 않아서 편했다.
민신도 내가 자기 생각처럼 꺼져주지 않자 반쯤 포기했는지, 이제는 그 집에 오지 않고.
그보다 민신 걔는 좋은 무가의 여식이라 들은 거 같은데.
왜 맨날 개운호 옆에 붙어 있는 거 같지? 아직 혼인도 안 하지 않았나? 독립을 개운호 옆으로 했나?
그런데 평소처럼 평상에 당과를 여러 개 펼쳐놓고 먹으려 할 때였다.
사람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몰리는 게 느껴졌다.
‘뭐지?’
설마. 내가 개운호 집에서 머무는 걸 들켰나? 어떻게? 절대로 안 들키게 행동하고 있는데? 이젠 죽립도 밖에선 안 벗는데?
하지만 대놓고 오는 걸 보면 날 죽이려고 접근하는 무림인들은 아닌 거 같기도 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평상 밑으로 몸을 굴려 들어갔다.
지붕 위로 도망가도 되지만, 그러면 내 위치가 발각되어 다시 쫓기게 될 테니까.
거기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문밖에서 “천년비는 나오시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났다.
어이쿠. 확실하게 무림인들은 아니시군. 하지만 무림인들에게 천년비가 여기에 산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고 있네.
대체 누구야? 누군데 이런 민폐를……이라고 생각하자마자 관부 사람들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네.
관부 사람들이 떡돌이 방을 보고서 날 잡으러 왔나? 하지만 관부 사람들은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데?
“천년비는 나오시오!”
구시렁거리는 와중에도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내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고 온 게 아니라, 아예 확신을 하고 와 부르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누군가 내 위치를 이들에게 밀고라도 했단 건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곧 문짝이 억지로 박살 나는 소리가 나면서 한 무리의 관군들이 우르르 집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천년비는 나오시오! 폐하께서 찾고 계시오!”
“해치려는 게 아니니 나오시오!”
떡돌이가 날 해치려 들진 않겠지. 지금 내게 피해를 주는 건 당신들 쪽이지.
그쪽들이 내가 여기서 지내고 있단 걸 고래고래 알려줬으니, 앞으론 무림인들이 천년비를 사냥하고 싶거든 바로 여기로 오겠는걸?
속으로 욕을 뱉어보지만, 무림 사정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신경 쓸 필요 없다 여기는 건지, 관부에서 나온 무인들은 계속해서 ‘천년비 천년비’ 외쳐대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저들이 돌아간 뒤에도 여기 머물 수 없을 거다.
결국 나는 평상에서 몸을 굴려 반쯤 나온 뒤 물었다.
“누구냐. 날 왜 찾아.”
누운 채 묻자 관군들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든다.
그들은 마치 길을 지나가는데, 쓰레기 형태와 비슷한 무언가가 말을 하며 튀어나온 걸 보았단 표정들이었다.
“내가 천년비다.”
어쨌든 재차 말해주자, 관군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말했다.
“실례하겠소.”
관군 두 명이 오더니 내 양팔을 잡고서 평상 밑에서 끌어내 주었다.
등이 바닥에 쏠리긴 했지만 옷을 입어서 괜찮았다.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일어나서, 관군 중 가장 높아 보이는 이를 쳐다보았다.
그자는 홀로 두루마리 같은 걸 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관군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참담한 표정을 띠었다가, 심호흡한 후에야 도로 눈을 뜨고 말했다.
“폐하께서 옛 은인인 그대를 황궁에 데리고 오라 하셨소. 천씨 가문 년비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당장 떠날 채비를 하시오.”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일부러 그런 건 분명 아니겠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저들은 머리를 잘 쓴 게 되었다.
그냥 가자고 했으면 무시하고 달아났을 텐데.
이자들이 내 이름을 고래고래 외쳐댄 덕에 수도에 그나마 생긴 내 피신처가 사라져 버렸거든.
이들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무림인들이 와서 날 마구 쪼아대게 생겼어.
지금 쫓기나, 이들을 따라갔다가 탈출해서 쫓기나 결과는 똑같다. 그렇다면…… 그래. 이들을 따라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떡돌이를 멀리서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알았다.”
마지못해 대답하고서 나는 흙 묻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가지.”
제일 직급 높아 보이는 이가 다시 물었다.
“갈아입을 옷은 없소?”
“있어.”
“그럼 좀 갈아입고 오시오.”
방 안에 들어가서 나는 흙 묻은 옷을 벗고 깨끗한 흑색 무복을 입고서 나갔다.
하지만 관군들은 내 새 옷을 보고서도 영 인상이 좋지 않았다.
“아까 그 옷 아니오? 흙만 털고 나왔소?”
“갈아입은 거다. 같은 형태 같은 색 옷이 여러 벌인 거야.”
그들은 방금 막 낚싯대에서 뗀 해삼을 보듯 날 쳐다보며 말했다.
“알았으니 따라오시오.”
따라오라면서 대다수는 내 뒤로 가서 자리를 잡네. 게다가 왜 무기에 손을 올리는지 모르겠어.
은인이 아니라 무슨 위험한 죄수를 끌고 가는 모양새잖아?
하지만 내 악명은 이 관군들도 알 테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관군들을 이곳에 부른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민신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관군들도 역시 대놓고 그녀가 날 밀고한 이라고 알려주었다.
“천년비 위치를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낭자.”
“아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민신은 마치 위험한 악당을 신고한 정직한 사람이라도 된 양 웃었고, 관군 몇 명이 그녀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걸어가며 민신에게 세 번째 손가락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