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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73화 (273/283)

##  273화. 떡돌이는 반숙이가 있어야 해

해운잠은 무거운 배에 눌려 있다가 황제의 측근 태감인 오원요의 방문을 받았다.

“천비 마마. 폐하께서 마마를 부르십니다.”

황제가 무슨 일로 날 부르는 거지? 해운잠은 의아하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가 무슨 일로 불렀든 황제의 부름을 거부할 수는 없으니까.

“채비해야 하니 먼저 돌아가게, 공공.”

“밖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하시지요, 마마.”

하지만 황제에게 갈 준비를 하면서도 해운잠은 여전히 궁금했다.

몸이 바뀐 뒤로, 황제는 놀라울 정도로 그녀를 멀리했다.

화를 낸다거나 차갑게 대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만나는 일이 적었다.

그나마 복중 태아가 있는지라 몸 상태는 계속 신경 쓰고 있었지만, 이마저 없었다면 다른 후궁들을 대할 때와 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황제가 먼저 부르는 일도 없었다.

정 보아야 할 일이 있으면 황제는 지나가는 길에 차라리 직접 들르는 편이었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폐하께서 왜 날 부르는 걸까.”

옷을 갈아입으며 해운잠이 묻자, 원웅이 얼른 알려주었다.

“원래 폐하께서는 마마를 자주 부르기도 하시고 자주 찾아오시기도 하시고 그러셨어요.”

“내가 기억을 잃은 후론 그러지 않으셨잖니.”

“지금은 좀 멀어지셨지만 그래도 추억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원웅이 싹싹하게 말하고서 채비를 마쳐주었다.

밖으로 나가 가마에 올라탄 해운잠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걱정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우여가 더 싫어하는 건 아니려나.

천천히 나아간 가마가 황제의 궁전 앞에 멈추자, 해운잠은 원웅의 부축을 받아 가마에서 내렸다.

그 상태로 해운잠은 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실 안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해운잠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황제는 무표정하게 상소문을 내려다보고 있고, 곁에는 무슨 역할인지 모를 까만 복장의 사내가 서 있는데, 역시 표정이 싸늘했다.

뭐지? 그걸 보자 해운잠은 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달리 떠올릴 만한 안 좋은 일도 없는지라, 그녀는 배운 대로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천비가 의자에 앉도록 도와라, 원웅.”

황제가 지시하자 그의 심복으로 보이는 흑색 의복 사내가 옆으로 물러났고, 원웅은 가까운 의자에 해운잠을 앉혀주었다.

황제가 눈짓하자 흑색 의복 사내가 원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와 둘만 남게 되자 해운잠은 괜히 더 불안해졌다. 일이 낯설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운잠은 황제가 말문을 열기를 꿋꿋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상소문을 덮은 황제가 드디어 시선을 그녀 쪽으로 던지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자매가 모두 짐의 후궁으로 들어왔군.”

그런데 그가 던진 말은 영 뜬금없었다. 해운잠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정석대로 대답했다.

“폐하를 모실 수 있는 건 천씨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짐은 모녀를 후궁으로 들일 마음은 없는데.”

그러다 월요가 이 말을 하는 순간. 해운잠의 머릿속에 피어난 호기심과 의구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찬물에 머리를 담근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무슨 수를 쓴 거냐 해운잠.”

그러다 황제가 그녀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자, 해운잠은 기겁해서 벌떡 일어났다.

근처에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오원요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어쨌든 만삭인 몸이니 조산하지 않게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해운잠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부정해보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그 몸에 있단 건 원래 그 몸의 주인은 죽었단 거겠군. 황손을 품은 황제의 비를 죽였으나 그 황손을 여전히 태에 품고 있으니, 이 죄는 어떤 죄명을 붙여야 옳을까.”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떠보는 게 아니었다. 확신하고 있었다.

해운잠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질 뻔했다. 오원요가 그녀를 부축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앞으로 넘어졌을 것이다.

해운잠은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해운잠. 운이 좋게도 어쨌든 넌 그 몸을 차지했지. 짐의 하나뿐인 황손의 친모이니 해칠 수도 없어. 안심하라. 짐은 네게 벌을 주지 못한다.”

이 와중에 안심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벌을 주지 않을 거라는 데도 해운잠은 안도할 수 없었다.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아니면 다른 말을 덧붙일 것이다.

“벌을 받는다면 너의 하나뿐인 핏줄이 대신 받겠지.”

역시나. 황제가 영빈에 대해 말하자 해운잠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에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폐하, 안 됩니다, 폐하!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해운잠이 외쳤으나 황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황제는 해운잠을 건조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천소여는 뭘 알고 사라졌을까.”

“!”

해운잠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갑갑하고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운잠이 그 상태로 계속 그러고 있자, 황제가 새 상소문을 펼치며 지시했다.

“오원요. 천비를 데리고 나가라.”

“예, 폐하.”

이걸로 끝인가? ‘네가 해운잠인 걸 알았으니 그 대가는 영빈이 치르게 될 것이다’라는 통보가?

해운잠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오원요를 따라 나가다가, 뒤늦게 제정신을 찾고서 그를 뿌리치고 황제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제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영빈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폐하, 영빈은 폐하가 한때 총애하던 후궁이 아닙니까. 제발, 가엾은 그 애에게 이 잘못을 돌리지 말아 주세요!”

그래도 황제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가시지요, 마마.”

오원요가 모르는 척 해운잠을 마마라 부르며 또 부축하려 하자, 해운잠은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그녀가 여길 나가는 순간 영빈이 영문도 모른 채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해운잠은 오원요를 뿌리치고서 외쳤다.

“혜비, 혜비입니다!”

“마마, 가시지요.”

“혜비에게서 비원이란 자를 소개받았습니다!”

황제가 손짓하자 오원요가 그제야 해운잠을 부축하려 시도하길 멈추고 옆으로 물러났다.

황제는 상소문을 다시 덮으면서 지시했다.

“원래대로 모든 걸 되돌려라. 네가 할 일은 그것이다.”

* * *

“전에도 비원이란 이름이 나왔지.”

“예, 폐하.”

“우 귀인도 혜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

해운잠이 가마를 타고 돌아간 뒤. 황제는 그녀가 외치고 간 말을 되짚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도 ‘비원’이 대체 누구인가 찾으려 애썼으나 찾지 못했다.

사람의 이름은 아닌가 하였으나, 이런 일에 본명을 쓸 것 같진 않아 일단 가명으로 해석했다. 우 귀인 역시도 비원은 가명이라 했고.

물론 그러면서도 ‘비원’이란 이름을 가진 관리 몇 명을 살피긴 하였으나, 일단 의심스러운 구석은 다들 없었다.

그런데 또다시 ‘비원’이 등장했고 혜비가 등장했다.

전에 우 귀인이 혜비를 언급했을 때 그녀를 조사하였으나. 그녀 쪽으로는 조금의 실마리도 나오지 않았는데도.

월요는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혜비와 비원이란 자에 대해서 다시 조사해봐라.”

“예, 폐하.”

“그리고 정보호는? 아직 연락이 없나?”

“예. 천년비가 꼭꼭 숨었는지, 이번엔 잘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할 때마다 하소연입니다.”

“그래도 찾아내야 한다.”

천소여가 천소여 본인의 몸에 있는 거라면 상황이 복잡해지겠지만, 천소여 몸에 있는 게 해운잠이란 생판 남이라면…….

일 년 넘게 그 몸을 차지한 천년비가 다시 천소여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때 고민하던 월요가 갑자기 “오원요.” 하고 눈을 반짝이며 불렀다.

“네, 폐하.”

월요는 막상 불러 놓고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이래도 괜찮을까?’ 하고 생각하는 얼굴로 주저했다.

오원요는 황제가 다시 지시하길 꿋꿋이 기다렸다. 잠시 뒤. 월요가 예상하지 못한 황명을 내렸다.

“짐이 무림인 천년비에게 과거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보은하려 찾고 있다고 일러라.”

“예?”

오원요는 깜짝 놀라 황제를 보았다. 승언도 놀라 물었다.

“천빈 마마께선 목 조르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자기 악명이 폐하께 해가 될까 봐 일부러 곁에 오지 않으셨잖습니까, 폐하. 그런데 폐하께서 마마를 찾으시다니요?”

“천빈이 짐을 위한답시고 짐의 곁에 오지 못하니까 부르려는 거다.”

“폐하. 천빈 마마는 폐하의 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두 분이 함께 있는 건 폐하께 뿐만 아니라 그분께도 위험합니다!”

“붙어 있는 게 위험하다면 최소한 어디 있는지라도 알고 서신이라도 주고받고 싶다. 짐의 온기를 줄 수 없어도, 따뜻한 집은 줄 수 있지 않느냐.”

“!”

“짐이 곁에 있어 줄 수 없다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거처라도 주고 싶다. 궁이 갑갑하면 궁 옆에 있는 집이라도.”

“천빈 마마는 악명이 심합니다, 폐하. 궁을 주든 집을 주든 사람들은 폐하까지 이상하게 볼 겁니다.”

“어쩔 수 없다.”

월요의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반숙이는 떡돌이 없이 뱃놀이하면서 잘 살아도 떡돌이는 반숙이가 없으면 못 사니까.”

* * *

어떻게 해서든 영빈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해운잠은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마, 괜찮으세요?”

멀쩡히 황제를 보러 간 해운잠이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나오자, 원웅은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가 모시는 마마의 상태가 나빠졌다가 좋아지길 반복한 것만 해도 여러 번이었다.

얼마 전 친구인 부성은 죽었고, 천비는 지금은 회임 중이기까지 하다 보니 원웅은 좀 무서워졌다.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니, 의원을 부를 게 아니라…….”

해운잠은 멍하게 중얼거리다가 원웅에게 부탁했다.

“좀 나갔다 오고 싶은데.”

“어디로 모셔갈까요? 자주 가시던 청적에 가시겠어요?”

“아니, 아니. 궁궐 밖에.”

“네?”

원웅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마마. 예전에 자주 다니신 건 알지만, 지금은 만삭이시잖아요. 언제 아기씨가 나올지 모르는데 이럴 때 나가셨다간 정말로 큰일 나요!”

하지만 해운잠은 지금 천소여의 아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천소여의 아이를 위해 여기 남아 있다가, 그녀의 아이가 죽게 생기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가야 한다. 아주 잠시. 아주 잠시만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래.”

“마마……!”

원웅은 겁에 질렸으나 해운잠은 물러나지 않았다.

귀자는 이 모습을 보다가 은밀히 밖으로 나가 황제에게 알렸다.

월요는 잠시 생각해 보다 허락했다.

“몸을 바꿀 방법을 다시 찾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빠져나갈 수 있게 네가 해운잠에게 돕겠다고 해라 귀자. 그리고 은밀히 뒤를 쫓아라.”

“예, 폐하.”

“초한.”

“네, 폐하.”

“너는 지금부터 비연궁에 머물다가, 해운잠과 귀자가 나갈 때 따라 나가라. 혹시 귀자가 혼자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할 때 돕도록 해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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