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네게 실망이다
종이 묶음이 워낙 두껍다 보니, 종이를 찢었는데 종이 찢는 소리가 아니라 나무 가죽을 잡아 뜯는 묵직한 소리가 난다.
그래도 끝까지 다 찢은 다음 타천천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더 말리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내린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나였다. 이지가 사라지지도 않았고, 이성 없는 강시가 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성은 있는데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타천천 본인도 ‘이성 없는 강시’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정확히 어떤 상태로 변하는지 모를 거 아냐.
그걸 확인하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내려보았다.
손은 잘 움직였다. 손가락까지 하나하나 움직여보다가,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멀쩡한데?”
타천천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혼령술을 잘 못 다루니까. 몇 번이나 얘기하지 않았나?”
“어? 그럼 거짓말한 거였어?”
“그래.”
차갑게 대답한 타천천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내가 서신을 계속해서 죽죽 찢는 걸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뭐랄까. 평소와 아주 달랐다. 아니, 아까 전과도 아주 달랐다.
이전에 타천천이 나를 볼 때 보이는 시선이 타변태 같았다면, 지금의 시선은 그냥 타천천 같았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타천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실망이군, 천년비. 이제 넌 완벽해졌고 아무 약점도 없어졌는데. 고작 사랑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다니. 정말로 실망이다.”
나는 찢은 종이를 등롱 불에 하나하나 태우면서 대답해주었다.
“네가 실망하건 말건 상관없어. 네가 혼자 기대한 거니 실망도 너 혼자 하도록 해.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러지.”
타천천은 냉랭하게 말하고서 문 옆으로 비켜서며 지시했다.
“그러니 이제 떠나라.”
“떠나?”
“네가 평범한 사람이란 데 실망했다, 천년비. 이제 널 옆에 둘 이유가 없어졌어. 그러니 떠나.”
“…….”
“널 그냥 보내주는 건, 한때나마 내 환상 속에 있던 네게 바치는 마지막 예우다. 떠나.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 말을 하는 타천천은 어느 때보다도 건조한 시선이었다.
일말의 흥미조차 없이 무감동한 눈동자가 있다면 딱 저럴 거다.
“알았어. 이거만 하고.”
나는 작업을 마친 다음, 그가 원하는 대로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 완전히 그곳을 떠났다.
사하비단에 돌아가지도 않고, 곧장 수도로 올라갔다.
‘갈 데가 없네.’
하지만 막상 수도에 도착하고 보니 돌아갈 곳이 없었다.
궁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타천천이 내게 떠나라 했지만, 그가 내게 건 명령…… 월요에게 닿으면 그를 죽이려 드는 명령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나한테 화가 난 와중에 ‘떠나서 잘 살아’ 하고 그런 명령을 거두어주진 않겠지. 그 타천천이.
사자 친왕부로도 갈 수 없어. 그곳 사람들은 내 얼굴을 알잖아. 내가 황제를 습격하고, 그로 인해 난리가 난 것도 알지.
내가 사자 친왕부에 돌아가면 권력을 얻고 싶어 하거나 정의감이 강한 누군가가 나를 밀고할 게 뻔하다.
그러면 어쩐다? 개원이와 단둘이 지내던 그 동굴에 돌아가고 싶진 않은데. 그 외에 내가 갈 곳이 있을까?
“…….”
고민하고 있자니, 개운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독립해서 집을 구한 다음 열쇠를 주고 말했지. 언제든 거기로 오라고.
‘거기 갈까.’
* * *
“네가 여길 왜 와.”
개운호가 독립한 집 안에 들어가자, 연못에서 붕어 밥을 주던 민신이 차갑게 물었다.
날 보는 민신의 눈은 걸어 다니는 사람만 한 지네를 보는 것처럼 삭막하다.
“언제든 오라 해서.”
열쇠를 보이며 대답하자, 민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천년비. 네가 여기 오면 개씨 가문에 민폐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아?”
“왜 민폐야?”
“너 염치 없구나. 하긴. 염치가 있으면 개원이를 그렇게 망쳐 놓지도 않았겠지. 천년비. 네 존재 자체가 민폐야. 너 때문에 개씨 가문이 같이 공적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단 생각은 하지도 않아?”
“알았어. 내가 붙잡히면 네가 내 인생 최고의 절친한 친구이자 의자매라고 할게, 민 자매. 그럼 개씨 가문에 민폐 아니겠지?”
“야!”
민신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민신과 놀아줄 여력이 없었다.
요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강시다운 생활을 했더니, 정신이 지쳐 있단 말이다.
아무리 몸이 피로를 못 느끼면 뭐 해.
사람의 삶에 익숙해진 내 정신이 피로를 느끼는데. 내 방에 가서 좀 누워서 쉬어야겠다.
앞으로의 일은 쉰 다음에 생각해 보아야겠어.
“천년비. 내 말 무시해?”
“붕어 밥이나 줘 붕어 대왕.”
“야! 거기 서라고!”
* * *
영빈은 어렵게 구한 고판본을 만지작거리면서도 그 안에 새겨진 글자는 하나도 읽지 못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서 아무리 글자를 보려 해도 집중할 수 없는 탓이었다.
영빈의 머릿속은 며칠 전, 해운잠의 시녀와 나눈 대화를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날 누구를 만나러 다녀왔다고?
-네, 마마. 돌아오신 후에는 꼭 죽을 걸 미리 아신 것처럼 뒷정리를 싹 해두셨지요. 그래서 장례식 후에 다들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야기는 들었다.
-네. 워낙 묘한 일이니까요. 그 외에는 이상한 일이 없었습니다, 마마.
-어머니가 누구를 만났는지는 모르느냐?
-네. 도중까지 작은 마님을 모시고 간 건 맞지만, 중간부터는 따라가지 못했거든요. 마님께선 저와 가마꾼은 큰길에서 기다리게 하시고는 따로 어딘가로 가셨어요. 이후 한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돌아오셨고요.
-돌아오셨을 땐 어땠지?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지만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시녀는 그 이상의 일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영빈은 나무판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일부러 혼자 만났어. 그자가 어머니가 벌인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해. 확실한데…… 대체 어떤 식으로? 영혼이라도 바꾸어 주었단 말인가?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나?’
* * *
영빈은 그 이상 알아내지 못했으나, 해운잠은 영빈이 자신을 뒷조사한단 걸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녀가 영빈에게 다녀온 후, 마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전에 그녀를 마지막에 데려간 곳에 가서는 그 인근을 싹 돌아다닌 것이다.
그러더니 다시 입궐해서 또 영빈을 만났다.
미리 붙여둔 사람을 통해 이를 전해 들은 해운잠은 허탈해졌다.
‘그 아이는 내가 곁에 있는 게 그리 싫은가.’
자신은 우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곁으로 왔는데. 딸이 자신을 쫓아내고 싶어 안달이라니, 모든 게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처음의 목적을 잊고 젊고 아름다운 황제를 노리기라도 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황제도 그녀를 멀리했지만, 그녀도 황제를 멀리하고 있었다.
일부러 황제의 마음을 살만한 언행도 하지 않았고 늘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런데 대체 영빈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은 죽은 뒤라, 뭘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었다.
* * *
해운잠 귀신이 동생 몸에 빙의했다면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 도사라도 불러와야 하는 게 아닌가,
근심하던 연비는 영빈이 해운잠의 시녀를 연달아 부르고, 그 시녀를 통해 어느 길을 조사하고, 해운잠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가마의 가마꾼을 조사하는 걸 전해 듣고서 점점 더 자신의 짐작에 확신을 가졌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천소여는 자신이 해운잠이라 생각하고 있고, 영빈은 그걸 믿고 있다.
하지만 연비도 그 이상은 알아내기 힘들었다.
해운잠이 자신의 시비와 가마꾼을 따돌리고서 어디를 갔다 온 건지. 이게 중간에서 딱 막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탓이었다.
연비는 천비를 직접 불러서 이것저것 물어볼까, 은밀히 떠볼까, 여러 가지로 고심했으나 그러기에는 배 속의 조카가 걸렸다.
혹시라도 추궁당한 해운잠 귀신이 미쳐서 아기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귀신이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안단 말인가.
결국, 고민 끝에 연비는 월요를 찾아갔다.
“오 공공. 폐하께선 계시는가?”
“네, 마마. 안에 계십니다.”
“내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여쭙게.”
잠시 뒤. 월요의 허락을 받은 오원요가 나와서 연비에게 어실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 일렀고, 연비는 월요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월요는 천소여와 멀어진 뒤에도, 낙마 사고로 사자 친왕의 저택에서 요양을 하고 온 후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걸 제외하면, 산처럼 쌓인 책상 위 상소문들이라거나 그 중앙에 깔끔하게 고정된 종이라거나,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 올리는 연비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조차도 평소와 거의 흡사했다.
단 하나, 황제에게서 달라진 게 있다면 아마 방 안의 분위기일 것이다.
안 그래도 우중충하던 황제의 분위기는, 그가 사자 친왕의 저택에 요양을 다녀온 이후 더욱 어둡고 무거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요.”
황제는 그래도 연비에게 물러나라 하진 않았다.
“앉거라.”
황제의 지시에 연비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어디부터 말을 시작할지 잠시 골랐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몹시 터무니없다는 걸 알기에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귀신이 동생에게 씐 것 같다니. 자칫 잘못 들으면 일부러 멀쩡한 사람을 귀신 들렸다고 몰아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걸 생각하면서도, 연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의 동생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안으로 차를 가져다주던 오원요가 멈칫했다.
월요가 팔을 뻗자, 오원요는 그제야 월요와 연비의 앞에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이상하게 변하다니.”
월요도 연비의 예리한 질문에 놀라긴 매한가지였으나,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나 오원요의 반응만으로도, 연비는 다른 이들 역시 의아한 점을 느꼈단 확신을 가지고서 아까보다 좀 더 자신감 있게 말했다.
“원래도 그 아이는 용고를 먹고 기억을 한 번 잃었지요. 이후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책봉식 이후 짧은 기간에 두 번 쓰러진 뒤로는 또 기억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건 그냥 다쳐서 그러는 게 아닐까. 기억도 한 번 잃어버렸으니, 또 잃어버리기 쉬운 거겠지.”
월요가 바로 동의하지 않았으나, 연비는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제 두 동생이 모두 이상해졌습니다. 소여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을 모두 물리고, 저와도 거리를 두지요. 황후 폐하에게 듣던 수업도 그만두었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아프니까.”
“몸이 아프면 사람들을 전부 물리겠지요. 사람들을 물리면서, 오히려 그간 사이가 그리 좋지만은 않던 우여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갑니다.”
“친한 사람이 바뀐 거겠지.”
“절 잘 따르던 우여도 절 이전만큼 따르지 않게 되었지요.”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연비. 이렇게 들어서는 그냥 교류하는 사람이 변했을 뿐 아닌가.”
오원요는 월요가 딴청 부리는 걸 들으며 혀를 찼다.
월요는 절대로 ‘천빈’의 영혼이 바뀐 걸 아는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
그때. 연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말했다.
“궁녀들에게 들으니, 내내 소여를 편하게 부르던 우여가 갑자기 존댓말을 사용했다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여는 갑자기 죽은 해운잠을 뒷조사하기 시작했지요. 해운잠은 소여가 세 번째로 기억을 잃기 바로 전에 죽은 우여의 친모입니다.”
겉과 달리 속으로는 연비의 영민함에 감탄하던 월요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뭐라고……?”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폐하. 제 동생의 몸에 해운잠 귀신이 들린 것 같습니다.”
“해운잠?”
월요는 헛웃음을 뱉었다. 천소여 몸에 있는 게 심지어 천소여 본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