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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71화 (271/283)

##  271화. 그걸 없앨 거야?

타천천에게 우리의 과거에 대해 짧게 들려준 다음, 나는 그의 표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빈정거렸다.

“이래도 내가 왜 네 고백을 안 믿는지 모르겠어?”

“모르겠어.”

“너 진짜 대가리 나쁘구나.”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 취급해 놓고서?

내게 첫눈에 반한 것 같으니 어쩌니 해 놓고서,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라고 태연히 말해 놓고서?

타천천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녕녕. 그때 내가 분명 그랬잖아. 강해지려면 혼자 있어야 한다고.”

“그 상황에서 혼자 둔다고 내가 강해져?”

“하지만 녕녕. 생각해 봐. 의방 앞에 오기 전과 의방에 도착한 후의 네가 얼마나 차이 났는지.”

“뭐?”

“의방에 오기 전에, 너는 너보다 훨씬 큰 무림인들을 모두 이기고 따돌렸어. 하지만 의방에 도착해서는 날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지. 모르겠어?”

“무슨 개애애애애소리야?”

“난 네가 강하게 있도록 도와준 거야, 녕녕.”

“뭐야?”

“내 말이 틀린 거 같아? 그럼 생각해 봐, 녕녕. 그토록 강하던 네가 왜 죽었는지. 개원 그놈한테 마음을 뺏겨서 죽은 거잖아. 혼자 있었다면 네가 그렇게 방심하고 쉽게 죽었을까? 아닐걸?”

“…….”

“이렇게 말해주는데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네 마음도 모르겠고 네 머리도 모르겠어. 내가 알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타천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 보였다.

“만약 네가 나한테 제한을 걸어두지 않았다면, 난 달려가서 네 머리통을 쥐어박았을 거야.”

타천천은 실망한 척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마 실망하지 않았을 거다.

저 인간이 실망이란 기분을 알기는 알까?

“어쨌든 녕녕. 네가 가장 위험할 때 구해준 것도, 뒤에서 늘 널 도운 것도 나란 걸 잊지 마.”

타천천이 여러 번 날 도운 건 맞기에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비록 꿍꿍이가 있어서 도왔다고 해도 도운 거니까.

하지만…….

“어쨌든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녕녕. 넌 네가 아니잖아. 그런데 내 마음을 왜 확신해?”

“내 마음이야. 네가 어떤 마음이든, 그게 내게 사랑이 아니면 그건 사랑이 아닌 거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뿐이란 생각은 안 해 봤어?”

“그 방식이 내 방식이 아니라니까?”

타천천은 말이 안 통한다 싶은지 한숨을 내쉬면서 식사에 열중했다.

나 역시 타천천과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어서 다시 젓가락만 쥐었다.

어쨌든 그와 있던 일은 아주 옛일이고, 이젠 그의 붉어진 귀 따위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단 걸 안다.

그건 그냥, 그렇게 쏟아지는 폭우 같은 일이었을 뿐이다.

그와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도. 누군가를 처음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던 마음도.

* * *

민신은 평소처럼 연못 앞에서 붕어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혹시 천년비 못 봤어?”

그러다가 개운호가 다가오며 묻는 말에 “못 봤어.” 하고 대답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민신은 붕어 밥을 끌어안고서 개운호를 보았다. 개운호는 홀로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민신은 그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다가, 붕어 밥을 내려놓고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천년비 언제까지 여기 둘 거야?”

개운호는 반쯤 열었던 문을 도로 닫고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천년비. 언제까지 여기에 둘 거냐고. 사람들이 알면 너도 걔랑 한패라고 할 텐데. 빨리 내보내야 하지 않아?”

개운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차피 최근에 계속 안 보이잖아.”

“네가 언제든 와서 지내라 했잖아.”

개운호는 민신이 내려놓은 붕어 밥이 옆으로 풀썩 엎어져서, 연못 쪽으로 알갱이들이 굴러가는 걸 쳐다보았다.

“너도 여기에 네 붕어들 데리고 왔잖아.”

“내 붕어들이 사람 죽이니? 붕어 기른다고 사람들한테 공적이 돼? 말이 되는 비교를 해.”

민신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개운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신이 왜 저러는지는 그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역시 한때는 천년비를 정말 싫어했으니까.

“난 천년비한테 빚이 있어, 민신. 그걸 갚고 싶을 뿐이야. 많은 걸 돕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머물 곳을 주는 것뿐이잖아.”

“천년비 때문에 원이는 집에도 못 돌아오고 있는데. 넌 원흉을 보살펴주고 싶어?”

“형이 집에 못 돌아오는 게 천년비 때문은 아니잖아.”

개운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민신은 쫓아 나가려다가 화가 나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천년비는 정파 무림인들이 모두 다 배척하는 공공연한 악적이었다.

미안하면 멀리서 돕든가 해야지. 그런 악적을 집에 들이다니.

그랬다가는 개씨 집안 전체가 천년비와 한패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인데. 개운호는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치는 건가?

* * *

‘생각을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천소여의 몸에 들어간 해운잠은 영빈이 또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자신의 방문을 거절하자, 섭섭한 마음으로 가마에 올랐다.

이전보다 가까운 곳에서 공오부인의 방해 없이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오히려 딸은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마음은 더 멀어진 듯했다.

이 와중에 몸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해운잠은 부른 배를 노려보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미래를 위해 이 몸에 들어오긴 했지만 남의 자식을 뼈아프게 낳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끔찍했다.

심지어 그 자식은 공오부인의 손주이자 천소여의 자식이 아닌가.

‘빨리 우여가 총애를 받아야 할 텐데…….’

황제라는 작자는 얼굴은 수려하고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후궁들에게 영 찾아가질 않는다.

그나마 황후와는 식사도 자주 하는 듯했지만 잠은 꼭 혼자 잤다. 후손을 많이 보는 게 황제의 의무 아닌가?

그때. 해운잠의 눈에 낯익은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 아이……?’

천씨 집안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였다.

그 시녀가 한 궁녀의 안내를 받아 뒷문으로 오월궁에 들어서고 있었다.

‘연비가 내 뒷조사를 하나?’

마음이 서늘해진 해운잠은 가마를 세우게 하고서 그 시녀가 들어간 쪽으로 따라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그사이에 시녀는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해운잠은 가까스로 시녀의 옷자락을 발견했다.

그 옷자락은 저 멀리 영빈의 처소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 * *

영빈이 해운잠의 시녀를 불러들인 일을 알아차린 건 해운잠 본인뿐만이 아니었다.

그 일은 영빈의 처소에 궁녀 하나를 매수해둔 연비의 귀에도 바로 들어왔다.

“해운잠의 시녀에게 뭘 물어보았는지는? 못 들었느냐?”

“네. 주위에 사람들을 모두 물려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마.”

궁녀의 보고를 들으며 연비는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갑자기 영빈을 가까이하고 연비를 멀리하는 천소여. 어느 날 기억을 잃어버린 천소여. 황제가 총애하지 않게 된 천소여.

천소여에게 존댓말을 사용한 영빈. 천소여가 깨어나기 직전 죽은 해운잠. 무언가를 연비에게 털어놓으려다 그만둔 영빈. 영빈이 불러온 해운잠의 시녀…….

연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혹시…… 해운잠 귀신이 소여에게 씌였나?”

* * *

며칠 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일부러 시신을 관찰할 만한 거리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장례식이 끝난 후 시신을 운반할 때 몰래 그 뒤를 쫓았다.

시신을 매장하는 공동묘지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냈다. 생각보다는 좀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위장 때문인지, 아니면 전혀 관련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치를 잘 확인해 둔 뒤.

그날 밤, 나는 공동묘지 안으로 홀로 들어가 그곳 건물을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이틀 만에 나는 어느 건물에 지하실이 있는 걸 알아내고, 그 지하실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 지하실 전체에는 수많은 책과 종이가 가득했다.

여기서 서신을 찾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 싶을 만큼.

하지만 반드시 선황제의 서신을 찾겠다는 각오로 나는 하나하나 서책을 확인하며 서신을 찾았다.

먹는 걸 좋아해서 꼬박꼬박 밥을 먹고는 있지만, 사실 이 몸은 강시의 몸이라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된다.

그 이점을 이용해서 나는 사흘 내내 여기에 틀어박혀 서신을 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냈다.

‘이거다.’

어째서 고궐이 혼령술을 찾다가 선황제 서신까지 같이 발견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혼령술 서책에 서신이 끼워져 있었다.

별로 궁금한 건 아니지만, 타천천이 혼령술을 아직도 완전히 익히지 못하고 연구를 거듭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전부 고어로 되어 있네.’

혼령술 책 자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자로 가득해서였다.

타천천이 해석한 부분은 밑에 깨알같이 작게 글씨를 써 두긴 했는데, 글씨가 있는 부분이 없는 부분보다 훨씬 적었다.

‘아니, 책 볼 때가 아니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그림으로 가득한 책을 덮은 뒤.

나는 꽤 양이 많은 선황제 서신을 뭉쳐 잡고서 양손으로 쥐었다. 찢어버릴 셈이었다.

그런데 서신을 찢기 전.

“그건 널 위해 준비한 것들인데, 녕녕.”

입구에서 타천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휙 돌아서 보니, 타천천이 지하실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너……?”

인기척이 없었는데? 어떻게 왔지? 놀라서 쳐다보자, 타천천은 짓궂게 웃었다.

“그 몸은 내가 만든 거란 걸 잊었어?”

공격을 못 하게 할 뿐만 아니구나. 타천천이 원하면 이 몸은 그의 기척도 느낄 수 없나 보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다시 서신의 양옆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찢기 전. 다시 타천천이 희한한 말을 꺼냈다.

“그 서신이 있으면 너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을 거야, 녕녕. 그래도 찢을 거야?”

그가 무언가 다른 말을 했으면 멈추지 않았겠지만, ‘너 같은 사람’이란 말에 행동을 멈추게 되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쳐다보자, 타천천이 무릎에 팔을 괴고서 웃었다.

“말 그대로. 그건 서신 몇 장일 뿐이지만, 녕녕. 우린 그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어. 그 서신 몇 장에 황족들과 대신들은 많이 휘둘리거든.”

“그러니까 그게 ‘나 같은 사람’이랑 무슨 상관인데?”

“녕녕. 이상하단 생각 해본 적 없어?”

“뭐가.”

“왜 관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면 안 될까? 왜 관과 무림은 서로를 모른 척해야 할까?”

“관례잖아.”

“그 관례가 이상하지 않아?”

타천천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무림인도 황제의 백성 아닌가? 그런데 다루기 어렵단 이유만으로 손을 떼고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야.”

“어린 소녀 하나가 지금까지와 궤가 다른 기이한 술법을 쓴단 이유로 온 세상에 쫓기는데. 그들이 무림인들이란 이유만으로 나라는 지켜보기만 해. 이상하지 않아? 정말 이상한 걸 모르겠어?”

“!”

“황제는 왜 무림인들을 무림인들이란 이유로 모른 척하지? 다른 백성들처럼 보호해야 하지 않아? 한 사람이 집중적으로 쫓기고 공격받는데 왜 그걸 모른 척해야 해? 그게 관례라서? 그러면 그 황제는, 그 황제가 통치하는 세상은.”

타천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전부 잘못된 거 아닐까?”

타변태는 늘 타변태였지만, 이 말을 하는 타변태는 평소보다 좀 더 정신이 이상해 보였다.

아주 똑똑해 보이기도, 좀 미친 것 같기도, 좀 허망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니, 타천천이 다시 물었다.

“녕녕. 그걸 없앨 거야?”

“어.”

내가 다시 손에 힘을 주려 하자, 타천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그래?”

그러더니 한걸음에 내 바로 앞으로 날듯이 뛰어와서는, 내가 쥔 서신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걸 없애면 넌 이지가 사라지면서 평범한 강시로 변해, 녕녕. 그럼 어때? 이번엔 고민해 볼래?”

“잘 있어, 타천천.”

더 말을 섞는 대신, 나는 서신을 한 번에 다 뜯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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