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저 여자는 누굽니까?
대체 이 비는 언제까지 내릴 건가.
멍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며, 까만 구름 사이로 손톱만큼만 제 존재를 드러낸 겨울 달에 홀려 있을 때였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타천천과 나눈 대화를 하나하나 다 짚으며 분석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싸우지 않고 누군가와 대화한 건 처음이어서 기뻤다.
거봐. 내가 악적이라던가, 사술을 사용할 거라던가, 그런 편견에서만 벗어난다면 나도 잘 대화할 수 있다고.
게다가 내 얼굴엔 빛이 난다잖아. 빛나는 얼굴!
“히히.”
혼자 얼굴을 만지면서 웃다가, 너무 채신머리없어 보일까 봐 나는 손을 내리고 정색하면서 타천천에게 말했다.
“안 웃었어.”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자나? 나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타천천이 가부좌를 튼 채 있던 곳을 보았다.
“타천천!”
그곳엔 타천천이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황급히 그쪽으로 가서 똑바로 눕히는데, 살이 닿은 곳이 뜨거웠다. 열이 나고 있었다.
열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지? 따뜻하게 해줘야 하나, 아니면 열이 빠지도록 해줘야 하나?
나는 당황해서 허둥대다가, 그가 수통 얘기한 게 떠올라서 일단 수통을 꺼냈다.
그걸 타천천의 이마에 대줄 생각이었다.
‘없어!’
하지만 수통에는 물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타천천은 이렇게 추운데도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타천천. 타천천! 정신 차려 봐! 타천천!”
외쳐보지만 타천천은 아예 의식이 없었다.
온 이마와 눈을 구긴 채 끙끙거릴 뿐. 나는 수통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난 의술에 대해 아는 게 전무했다. 다치면 그냥 몸으로 이겨냈고,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낼 뿐이었다.
“젠장!”
일단 물을 좀 받아오자 싶어서 나는 수통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여기 오면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호수를 본 걸 떠올리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호숫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받아 오두막으로 돌아온 다음 그걸 타천천의 입에 조금씩 조금씩 주었다.
수통의 열이 그의 열기를 식히도록 이마에는 수통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도 효과는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
혹시 약이 있나 싶어 그의 가방을 뒤져 보았으나 약도 없었다.
그러다가 변화를 느끼고 귀를 기울여보니, 아까 그렇게 퍼붓던 비가 그사이에 그쳐 있었다.
며칠 내내 내리던 비가 이제야 멈춘 것이다.
나는 타천천과 가방, 창밖을 번갈아 보다가, 가방을 싼 뒤 어깨에 걸고 타천천을 안아 들었다.
타천천은 의식이 가물가물한지 내게 안기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를 안은 채 오두막 밖으로 나가서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의원! 의원한테 가야 해!’
산길은 며칠 간의 비로 미끄러웠고, 나보다 키가 크고 무거운 남자를 안아 들고 그런 산을 내려가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무슨 정신인지, 가까스로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밤이라 작은 마을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도 의원집은 따로 지붕에 표시를 해두기에, 나는 그 표식만 보고 무작정 뛰어갔다.
초록색 등불을 걸어둔 집 앞에 가서 “의원! 의원!” 하고 외치자, 방 안쪽에서 소리가 나더니 곧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뉘시오?”
의원은 내가 안은 타천천을 보자 대번에 상태를 눈치채고서 외쳤다.
“이리로 오시오!”
의원이 안내한 방 안에 타천천을 뉘자 그가 맥을 짚어 보더니 끙 소리를 내며 타천천의 상의를 벗겼다.
두툼하게 맨 붕대를 본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명령했다.
“붕대를 풀어 주시오! 얼른!”
붕대를 푸는 사이, 의원은 밖으로 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다가 다시 들어왔다.
다시 들어올 때는 손에 온갖 약들과 깨끗한 새 붕대, 작은 칼, 바늘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의원은 상처투성이인 타천천의 상체를 보고 꽥 소리 질렀다. 날 쳐다보길래 나는 다급히 말했다.
“내가 한 거 아니다! 자기가 혼자 입힌 상처라 그랬어.”
의원은 황당하단 투로 말했다.
“낭자를 의심하지 않았소. 하지만 이건 혼자 입은 상처가 아니오. 상처 방향을 보시오.”
“상처 방향?”
“혼자 내는 상처와 남이 내는 상처는 방향이 다르오. 얼핏 비슷하게 내더라도 자세히 보면 힘이 들어간 부분이 다르지. 하지만 이 소협 상처는 남이 낸 거요.”
“정말이냐?”
“그리고 여럿이 낸 거로군. 혼자서 낸 게 아니야.”
나는 당황해서 타천천을 보았다. 그런데 왜 자기가 스스로 낸 거라고 말한 거지?
그러고보니 그래. 타천천은 왜 거기에 계속 있던 걸까? 이런 큰 상처를 입고서? 바보 같다.
왜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상한 것투성이인데?
의원이 타천천을 능숙한 솜씨로 까맣게 변한 살을 조금 잘라내고 약품을 바르고 붕대를 새로 감는 동안 나는 멍하게 그의 혈색을 쳐다보고 있었다.
“낭자, 낭자.”
의원은 치료를 마친 뒤 어지러워진 방을 정리하며 나를 불렀을 때. 뒤늦게 나는 돈이 없단 걸 떠올렸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주저하다가, 나는 타천천이 입은 옷을 보여준 다음 그가 깨어나면 돈을 낼 거라 말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의원이 꺼낸 건 돈 얘기가 아니었다.
“낭자도 다쳤소.”
“어?”
“여기저기 많이 다친 거 같은데.”
내가 다친 걸 어떻게 알았지? 의원의 시선이 아주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내 옷이 아주 엉망이었다.
산을 급하게 내려오며 넘어지느라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그 사이로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를 봐주겠소.”
의원이 말했으나 나는 고개를 젓고 일어났다.
타천천의 치료비는 타천천이 깨어나면 어찌어찌 낼 거다.
하지만 나는 치료 받을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타천천이 내 치료비를 내게 할 수도 없었다.
“난 안 다쳤는데.”
“내 눈은 멀쩡하오.”
“나는 괜찮다. 저, 저자나 계속 봐줘. 저자가 깨어나면 치료비를 낼 거다.”
나는 다급히 말하고서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났다.
지붕 위로 올라간 다음 납작 엎드려 아래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의원이 타천천을 쫓아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후로부터 며칠 동안 나는 의원의 집 주위를 돌아다니고, 우리가 내려온 산 입구로 가서 망을 보길 반복했다.
여러 명에게 동시에 공격당했다는 걸 보니 타천천도 나와 처지가 비슷한 것 같은데.
혹시라도 타천천의 적들이 그가 약해진 틈을 타 또 쳐들어올까 걱정되어서였다.
그가 멀쩡해지는 걸 보아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번씩 의원의 집 앞에서 의원과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의원은 쯧쯧 혀를 차고서 내게 뭔가 먹을 걸 내밀었다.
주춤거리면서 받아 가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약을 만들어 방 안으로 가져갔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여기 이 옷! 타천천의 옷입니다!”
산 입구를 어슬렁거리는데 누군가 타천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서 있었고, 그중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린 옷자락을 들며 외치고 있었다.
“이쪽으로 간 게 분명합니다!”
‘타천천을 해치러 온 거야.’
생각을 마치자마자 나는 그들 쪽으로 달려들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발로 찬 다음, 옆 사람이 빼낸 검을 밟고 나아가 타천천의 옷을 든 이의 멱살을 잡고 무릎으로 가슴을 걷어찼다.
“누구냐!”
“잡아!”
“적인가?”
“반은 저쪽으로 간다!”
하지만 적들은 간교했다. 그들은 미리 반을 뚝 떼어서, 반은 마을로 달려가고 반은 날 가로막고 섰다.
“넌 누구냐.”
그들이 날 향해 물었으나, 나는 대답 대신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강하다.’
하나같이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교한 데다 잘 훈련된 이들 특유의 기세가 느껴졌다.
힘보다 속력 쪽에 더 치중해서, 내 길을 막은 그들을 치우는 쪽에 집중했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없애고 갈 때가 아니었다.
“막아!”
“저쪽을 노린다!”
적들도 그걸 눈치챘는지, 최대한 내 발을 잡아 이동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들을 뿌리치고서 의방으로 뛰어가는 데 성공했다.
낮이라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추격전을 벌이는 나와 무림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대로 가면 의원에게 실례겠지.
하지만 타천천을 잡으려는 이들이 앞서 그쪽으로 갔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의방에 도착해보니, 어느새 타천천은 문 앞에 나와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그의 적들은 그를 둘러싸고 험악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도착하자 다들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두말없이 적을 향해 뭉뚝한 단도를 던졌다.
그걸 시작으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으나, 이번 싸움은 아까보다 힘들었다.
아까는 그들을 막아두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그들이 타천천과 의원을 공격하진 않을까 신경 쓰면서 상대해야 하다 보니 까다로웠다.
“타천천. 도망가!”
그러다가 틈이 났을 때, 나는 타천천에게 외치며 아까 그에게 소리를 질러대던 이를 걷어찼다.
그가 저기 있으니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얼른!”
그러나 타천천은 도망가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오히려 멈추어 선 건 다른 쪽이었다.
내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주춤주춤 무기를 거두었다.
나와 상대하는 이도 점점 무기 휘두르는 힘이 약해지기에, 나도 이상함을 느끼고서 싸우던 걸 멈추었다.
그러고서 돌아보니, 타천천의 적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타천천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건 타천천을 납치하거나 죽이려는 이들이 지을 표정이 아니었다.
그 사이. 내가 얽매어 두었던 아까 무리들이 도착해서 숨을 헐떡였다. 나와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뭐야. 왜. 이러고. 섰어?”
개중 하나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묻자, 먼저 의원으로 달려왔던 이 중 하나가 “그러게.” 하고 중얼거리더니 타천천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굽니까 도련님?”
도련님? 내가 세상사에 무지하다지만 자기가 죽일 적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는 건 잘 알았다.
어리둥절해서 타천천을 쳐다보니, 타천천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그리고 산에서 방금 막 뛰어온 무리를, 그리고 먼저 도착한 무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걸 보자 안심이 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물었다.
“타천천. 이 사람들, 네 적이 아니야?”
질문하면서도 답은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타천천이 대답하기를 멀뚱히 서서 기다려준다.
억지로 끌고 가거나 공격할 태세가 아니었다.
의원이 약을 들고나오다가 이 모습을 보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민망해서 웃었다.
그 순간. 타천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여자야.”
그 말을 하는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멀뚱히 타천천을 쳐다보았다.
물론 우리는 모르는 사이가 맞긴 하지. 서로 이름 정도만 아니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는 꼭…… 우리가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하네?
타천천을 둘러싼 무림인들은 나를 힐긋거리며 자기들이 더 당황해 물었다.
“도련님. 진짜 모르는 사람 맞습니까?”
“우리를 적으로 알고 막아주려던 거 같았는데…….”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타천천은 재차 대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야. 왜 저러는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