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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67화 (267/283)

##  267화. 이거 내 건데

“초화야. 금해를 데려오거라.”

몇 시진 동안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연비가 지시를 내렸다.

금해는 영빈의 아래에서 일하는 궁녀로, 실은 연비가 해운잠을 경계하기 위해 심어 놓은 인물이었다.

“네, 마마.”

초화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금해를 데리러 갔다. 잠시 뒤, 금해가 주위 눈치를 보며 옆문으로 초화와 함께 나타났다.

“부르셨는지요, 마마.”

도착한 금해는 빠르게 인사를 올리고 의아한 눈으로 연비를 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해운잠이 죽은 후. 연비는 그녀를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돈을 보내오기에 ‘아직 내가 쓸데가 있구나’ 생각은 했지만.

그런 상황이기에 오늘은 연비가 무슨 일로 부른 건지 짐작 가지 않았다.

“최근 우여에게 이상한 일이 없느냐? 고민하는 일이라거나.”

첩자라고는 해도 연비가 그녀를 부르는 건 해운잠이 다녀갔을 때 일일 뿐이기에, 금해는 처음 듣는 질문에 당황해 눈을 굴렸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마마.”

영빈은 해운잠이 죽은 후 시무룩해 있다가, 지금은 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을 하고 나니 혹시 일부러 대답을 회피한단 오해를 살까 봐, 금해는 슬금슬금 연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군. 그럼 질문을 바꾸지.”

다행히 연비는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네, 네, 마마.”

“영빈과 천비 사이를 떠올려보아라.”

그 말에는 연비의 궁녀와 상궁도 어리둥절해졌다.

영빈이 다녀간 후 며칠간 연비가 고민에 잠기긴 했지만, 여기서 난데없이 천비는 왜 나온단 말인가?

“천비 마마요?”

금해도 당황해서 되묻다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더니 “아아! 네. 뭐가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전에 영빈 마마께서 천비 마마께 존댓말 쓰는 걸 보았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들어보려 했는데, 그땐 다시 원래대로 말씀하고 계셨지요.”

초화가 차갑게 물었다.

“잘못 들은 건 아니고?”

금해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똑똑히 들었습니다. 천비 마마가 아기씨를 낳고 더 귀한 몸이 될까 봐 미리 저러시나, 하고 옆에 다른 궁녀와 이야기도 나눈걸요.”

“그래. 수고했다.”

연비가 고갯짓하자 초화가 얼른 돈을 꺼내 금해에게 건넸다.

금해가 꾸벅 인사하고 물러나자 연비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치지도 않고서 책 표지만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그 태도가 영 이상해서 초화가 묻자, 연비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천비는 갑자기 날 멀리하고 영빈을 쫓아다니기 시작했지. 그런데 영빈은 천비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사용하고, 무언가 고민이 있어 보여. 그 세 가지가 뭘 의미할까.”

“그냥……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을까요?”

* * *

사자 친왕이 다녀간 지 며칠. 고민하던 월요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그를 믿기로.

“오원요. 승언. 일정을 변경해 부황의 시신을 몰래 꺼낸 다음, 화장하고 다시 묻도록 해라.”

“폐하!”

오원요가 놀라서 월요를 쳐다보았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일이 어긋났다가는 월요의 인망이 완전히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직접 눈으로 본 게 아닌 이상 강시니 혼령이니 하는 걸 믿지 않을 터.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다들 황제가 미쳤다고 할 테니.

“마음이 아프지만 사자 친왕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

월요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사자 친왕이 그를 배신할까 생각했다는 건 충격이지만, 그는 사람은 충동처럼 악한 생각이나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할 거라 생각했다.

그 역시 싫은 사람을 볼 때면 필요 이상으로 화풀이를 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사자 친왕이 생각을 최후까진 실천하지 않았단 점이었다.

사자 친왕은 먼저 마음을 돌렸고,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으며, 위험을 무릅썼다.

무슨 위험을 무릅쓴 건진 모르겠으나, 늘 단정하고 깔끔하던 그의 의복에 흙이 묻어 있고, 나갈 때 보니 머리카락에도 약간 피가 엉겨 있었다.

일부러 설명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천년비를 만나고 오는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게 분명했다.

월요는 사자 친왕을 믿기로 했다.

사자 친왕이 그를 속이는 거라면, 몹시 슬프겠지만 차라리 그땐 이 일로 고민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승언은 월요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위로할 말을 보탰다.

“이게 선황제 폐하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나을 겁니다, 폐하.”

오원요가 째려보자 승언이 얼른 덧붙였다.

“오 공공, 생각해 보십시오. 혼령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미 선황제 폐하의 몸엔 없을 거 아닌지요. 적들은 선황제 폐하의 몸을 이용해 이미 편안해진 폐하의 혼령을 뒤흔들려는 겁니다. 그걸 미리 막는 게 선황제 폐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지요.”

월요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말을 하고 보니 제법 그럴듯해서 셋 다 ‘그런가?’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선황제가 자신의 영혼과 몸을 다른 이들이 가지고 놀길 바라지 않을 건 확실하다.

그게 자신의 아들을 공격할 수단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결론을 낸 오원요와 승언이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하나 더.”

월요가 둘을 다시 불렀다.

“정보호에게도 오라 해라.”

* * *

며칠 뒤. 정보호가 부루퉁한 얼굴로 불려왔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 서자, 정보호는 승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서 얼른 공손한 미소를 지어냈다.

월요는 상소문을 천천히 넘기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억지로 공손한 척 굴 필요 없다.”

“억지로라니요, 폐하. 그럴 리가요.”

그 말에 정보호는 놀라 두 손을 내저었으나, 황제가 쳐다보지도 않자 속으로 욕을 하며 민망해진 손을 내렸다.

그러면서 정보호는 속으로 역시 그 괴상한 여자와는 엮이면 안 됐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나타나 자기 머리를 쟁반으로 내리치던 그 여자 말이다.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 여자가 알고 보니 후궁이고, 그 여자 옆에 있던 건 황제였는 줄?

야시장에서의 사건 후.

황제는 정보호를 잡아 오게 한 다음, 자기 후궁이 무림인 정보상인 정보호와 사이가 좋아 보인다며 꼬투리를 잡았다.

정보호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 여자에게 놀아난 건 그였고, 속은 것도 맞은 것도 그이지 않은가.

그런데 황제가 ‘왜 내 후궁과 친해 보이지?’라면서 눈에 불을 켤 줄이야.

정보호는 그 후궁과 아무 사이도 아니니 그 후궁도 자신에게 황제에 대한 정보를 요청한 거라고 거듭 해명했고, 결국 황제는 조건부로 그의 말을 믿어주었다.

-좋다. 그러면 네가 쓸모 있는 정보상이 맞는지, 나중에 한 번 확인해보지.

그러고서 풀어준 후로 아무 연락이 없기에 ‘이제 다 잊었나?’ 생각했는데. 설마 지금 와서 다시 부를 줄은 몰랐다.

“정보호. 넌 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상이라 하였지?”

“예, 폐하. 물론입니다. 모든 걸 다 알진 않지만 필요한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 하나를 찾고 있다.”

“사람 찾는 건 일도 아니지요. 쉽습니다.”

정보호는 황제의 말에 넙죽 대답하며 두 손을 모았다.

실제로 그는 황제가 어느 시골 마을 노인을 하나 찾아보라고 해도 얼른 대답할 수 있었다.

“천년비.”

그러나 황제가 찾으라 한 인물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예?”

“악적 천년비의 위치를 알아와라.”

“!”

월요는 ‘황제가 왜 악적을 찾지?’ 싶어서 눈이 동그래진 정보호를 보며 속으로 쓸쓸히 생각했다.

가까이 갈 수 없어도…… 이러면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그게 안 된다면 서신으로라도.

물론 찾게 되더라도 가까이 가진 않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

‘네가 없어도 난 혼자서 씩씩하게 살 수 있다’면서 웃은 그녀지만, 그게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인 뒤는 아닐 테니까.

월요는 마음을 다잡고서 위엄 있는 모습으로 승언에게 눈짓했다. 정보호가 왜 아직까지 여기 서 있는 거야? 내보내.

승언은 뒤에서 소리 없이 대답하고서 정보호에게 차갑게 말했다.

“명령을 들었으면 가자.”

그런데 뜻밖에도 정보호가 나가지 않고 당황해서 말했다.

“저, 송구하옵니다, 폐하.”

‘송구하다’는 말에 월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송구하다? 무엇이 송구하다는 거냐. 천년비를 찾을 수 없단 거냐.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상이라 자처한 건 말뿐이었나.”

그 낮으면서도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정보호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휴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신이 말하고자 하는 건 저…….”

정보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황제와 그의 두 부하의 눈치를 살핀 다음 작게 말했다.

“천년비라면 이 근방에 있습니다.”

“!”

월요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승언과 오원요도 정보호의 뒤에서 눈을 왕밤만 하게 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천년비가 이 근방에 있다고? 하지만 사자 친왕은…….

‘아니지. 사자 친왕이 돌아온 날로부터 이미 며칠이 지났으니. 그새 천년비가 이동했을 수도 있겠군.’

월요는 숨을 고르고서, 정보호 앞에서 너무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어디 있지?”

말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혹시 상태가 좋지 않을 수도 있나? 어디 다쳐서 치료 받기 위해 이곳에 왔나?

아니면 마음고생이 심해서 자신의 곁에라도 있고 싶어…….

“최근에 보았을 땐 혼자 뱃놀이하면서 당과 쌓아놓고 먹던데요.”

“…….”

승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정보호를 보다가, 힐긋 시선을 옮겨 월요의 눈치를 살폈다.

월요는 입을 꾹 다물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좀 서운한 모양이다.

승언은 자기가 다 민망해져서 다급히 오원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원요도 같은 마음인지 억지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년비가 황제의 연인이란 걸 모르는 정보호만이 ‘왜 저러지?’ 싶어 의아할 뿐이었다.

* * *

‘그래. 잘 지내면 좋은 거지.’

천년비가 근처에 있단 걸 알자, 월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승언에게 정보호를 따라가라 한 다음 자신도 변복하고 뒤따라 나섰다.

오원요와 승언이 펄쩍 뛰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으나, 월요는 절대로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듭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승언과 정보호가 저만치 앞에서 가고, 월요는 오원요의 부축을 받아 뒤에서 느릿하게 따라가는 식이었다.

걸어가는 내내 월요는 마음이 비탈길의 공처럼 굴러다녀 심란해졌다.

‘잘 지내면 좋지’ 싶다가도 ‘아니,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당과야 먹는 거니 그렇다지만, 이 와중에 뱃놀이를 하고 싶나?’ 싶은 쩨쩨한 마음이 일어났다.

‘네가 없어도 씩씩하게 잘 지낼 거야’라던 말이 진짜긴 하구나, 싶어서 괜히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그런 황제가 너무 이상해서, 정보호는 연신 뒤를 곁눈질하다가 승언에게 한 소리 듣기를 반복했다.

“앞만 보고 걸어라. 뒤를 보지 말아라. 자꾸 훔쳐보지 마라.”

“아니, 뒤에서 자꾸 저러고 계시니까…….”

“앞만 봐라.”

“그런데 대체 그 악적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신경 쓰지 마라.”

“신경이 안 쓰일 리가요. 높으신 분들은 모르겠지만, 그 악적은 악명이 어마어마합니다. 얼마나 성질머리가 더럽고 무서운데요. 그런 악적을 폐하께서 친히 보시겠다고 가시니…… 아! 혹시 그 악적이 최근에 도로를 뒤집고 다녀서 그럽니까?”

승언은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정보호의 입을 치고 싶은 충동을 몇십 번이나 눌렀다.

그때. 어디선가 무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보호는 그쪽으로 가는가 싶더니 곧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악적, 또 싸우고 있나 보네요. 이 소리는 저 악적이 싸울 때 나는 소립니다.”

그 말에 일행은 빠르게 골목길 안쪽으로 걸어갔다.

큰길에서 계속해 들어가자,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난 넓은 공터에서 일대 다수의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정보호는 그 중앙에서 사람들을 밟고 다니는 한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혼자서 여럿 상대하는 저 싸움꾼이 천년비입니다. 딱 보기에도 눈에 띄죠.”

잘 차려입은 정파인 여럿과 그 사이에서 남의 검을 뺏었다가 돌려주길 반복하며 적들을 가지고 노는 천년비.

바닥에는 천년비의 것으로 짐작되는 삿갓이 구르고 있었다.

삿갓은 많은 이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일행에게까지 굴러왔다.

월요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삿갓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서 허리를 올리는 순간. 그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이거 내 건데.”

“!”

두 사람의 얼굴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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