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심부름이나 하나 해줘
저게 무슨 말이야? 자기를 이용하라니? 내가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타천천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설명은 하지 않는다. 직접 알아보라 이건가. 좋아. 그럼…….
“나한테 건 제약을 풀어줘.”
“날 이용하라니까, 녕녕?”
“그러니까. 협박할 테니 제약을 풀어줘. 말만 이용하라 하지 말고.”
타천천은 내 말에 미간을 구긴 채 입꼬리만 올렸다.
“녕녕, 내 말 못 알아듣는구나.”
“협박하란 뜻 아니야?”
“그래도 두 번이나 연애한 거 같은데. 대체 어찌했을꼬…….”
타천천은 갑자기 영감님처럼 말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를 바보처럼 여기는 태도였다. 이게 아주 내 몸에 제약 걸어놓고 신이 났구나.
화가 나서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타천천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바꿔서 다시 제안했다.
“녕녕, 나랑 같이 밥 먹자.”
* * *
늘 먹던 밥을 왜 갑자기 저렇게 새롭게 말하나 했더니.
타천천은 나를 주방에 앉혀 두고서, 앞에서 뜬금없이 요리하기 시작했다.
무를 자르고 양파를 가다듬고 파를 썰고 고기를 다지는 둥 아주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꽤 요리에 능숙해 보였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감독관처럼 바라보고 있기를 한참. 문득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어 한숨이 나온다.
“널 이용하라더니. 요리사로 쓰란 거였어?”
“그게 네 속도면 네 속도에 맞춰 갈게, 녕녕.”
“내 속도라니?”
“굼벵이 속도.”
“!”
이 자식이? 왜 아까부터 미묘하게 시비인 거야?
내가 화가 난 걸 드러내기 위해 인상을 구겼으나, 타천천이 내 쪽을 쳐다보지 않으니 쓸모가 없다.
결국 구겼던 표정을 풀고서 계속 거기 머물기를 한참.
마침내 타천천이 요리를 마치더니, 이거 보라며 내 눈앞에 접시를 내밀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서 접시를 받아들었다.
“흥. 나한테 이런 걸 내밀면 내가 자존심을 부리느라 막 뿌리치고 접시 던지고 할 줄 아나 본데. 나는 그러지 않아. 네가 그런 걸 기대한다면 나는 반대로 행동해주겠다!”
“딱히 그런 걸 기대하진 않았는데.”
“아니. 난 네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어.”
“제발 그러길 바라, 녕녕.”
자꾸 시비를 거는 그에게 차갑고 냉랭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젓가락.”
“너 참. 이것저것 잘 요구하는구나.”
타천천이 젓가락을 건네준다.
나는 다시 한번 흥 코웃음을 치고서, 젓가락으로 야채와 고기를 볶아 만든 이름 모를 음식을 집어 입에 가져갔다.
“!”
“어때? 맛있어?”
“뭐야…… 이 담백하고 알짝지근하면서도 혀에 착착 달라붙는 음식은?”
젓가락질을 빨리하자 타천천은 흐뭇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구나.”
“젠장. 그럴 리가!”
하지만 단호하게 부정한 것과 달리 젓가락질이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요리를 잘할 수가. 얘는 이 실력을 갖추고서 왜 혼령술을 쓰고 있지?
나 같으면 혼령술이건 강시술이건 무공이건 다 때려치우고 당장 요리사가 될 거다.
이 실력이면 얼마 안 가 요리 실력으로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
얘는 길을 잘못 선택했어!
“하하, 녕녕. 맛있나 보네.”
“젠장! 넌 이렇게 요리를 잘하면서 왜 이런 이상한 짓이나 하는 거야?”
“난 네가 좋아하는 요리밖에 못 해, 녕녕.”
“뭐?”
“네가 뭘 가장 좋아하는지 다 알거든.”
뭐야…… 이 타변태. 왜 내 맞춤형 변태가 된 것처럼 구는 거야?
빈 접시를 든 채 인상을 구기고 쏘아보자, 타천천은 픽 웃고서 접시를 가져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걸 부정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녕녕.”
“양심이 있으면 모를 리 없을 텐데.”
“양심이 없어서 모르겠어 녕녕.”
“그럼 평생 모르고 살아.”
* * *
아니, 거기서 그렇게 ‘평생 모르고 살아!’ 외치고 나올 게 아니었구나.
밖으로 나와 산책 겸 돌아다니고 있자니 내가 한 섣부른 행동에 후회가 든다.
좀 더 말을 해서 캐내야 했어. 하지만 타천천이랑 대화하다 보면 모든 결론이 ‘난 널 좋아해 녕녕’으로 끝나버려서…….
어쨌든 배를 채웠으니 다시 힘을 내서 선황제 서신을 찾아다니자.
분명 어디 먼데다 감춰두진 않았을 거야. 고궐이 그랬잖아. 사하비단 안에서 봤다고.
어? 어…… 맞아. 고궐. 고궐은 이렇게 꽁꽁 감춰진 서신을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걸까?
고궐이 나보다 더 머리가 좋아서 찾아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고궐도 나와 같은 악적이니 공부할 시간이 없었을 거야.
그러면 나와 머리 수준은 비슷할 텐데. 대체 고궐은 무슨 수로 선황제 서신도 찾아내고 혼령술 비법도 찾아냈지?
고궐이 뭐라 했더라. 머리. 머리. 머리. 기능을 발휘해 봐. 머리!
-사하비단에서 혼령술 비법을 훔쳐내려 할 때, 거기서 선황제의 서신을 보았습니다.
머리가 기능을 발휘했다. 어렴풋하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맞아. 고궐은 분명 혼령술 비법을 훔쳐내려다가 선황제의 서신을 보았다고 했어.
그럼 선황제의 서신은 혼령술 비법을 감춰둔 곳에 있단 건가!
‘나 천재!’
순식간에 진도가 확 나가자 저절로 허공으로 주먹이 나간다.
기뻐서 왜가리 춤까지 추다가, 아예 나무 위로 올라가 수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서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혼령술 비법을 찾자. 그럼 혼령술 비법은…….
‘어디 있지?’
“…….”
젠장! 다시 원점이잖아?
급격하게 기뻐했던 마음은 급격하게 빠져나간다. 한숨을 내쉬고서 멍하게 나뭇잎 사이로 수풀을 쳐다보았다.
‘떡돌아. 네 머리를 좀 빌려줘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고서 떡돌이한테 마음으로 말을 걸었는데. 효과가 있던 걸까. 실제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고궐한테 물어보자!’
그런데 고궐은 어디 있지?
* * *
사자 친왕이 한 시진을 계속 앉아 있자, 이를 지켜보는 오원요와 승언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월요가 무릎을 꿇으라 한 건 아니지만, 무릎을 꿇은 상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자 친왕이 혼자 일어서긴 힘들 것이다.
월요는 사자 친왕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있다가, 한 시진이 지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사자 친왕은 어두운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으나,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는지 비틀거렸다.
평소라면 오원요나 승언이 붙잡아주려 하겠지만, 오늘은 그 둘도 사자 친왕을 부축해주지 않았다.
‘이거 참. 내 집에서 아주 냉대받고 있군.’
사자 친왕은 씁쓸하게 웃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월요는 큰 배신감에 잠겨 있을 것이다.
이복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가까웠던 게 사자 친왕이니까.
그런 사자 친왕이 한때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충격일 터인데. 사실 그것도 이쪽 입장이지 않은가.
월요 입장에서는 사자 친왕이 진심으로 고백하는 건지 아닌지도 믿기 어려울 것이었다.
“사자. 네가 안 좋은 생각을 했단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월요의 이 말은 사자 친왕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자 친왕은 놀라서 월요를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설마 사하비단과 손을 잡았을 줄은 몰랐지만.”
“폐하…….”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이리 구체적으로 행동까지 했을 줄도 몰랐고.”
딱히 행동이라 할만한 걸 한 적은 없지만, 이 와중에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사자 친왕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왜 그랬지?”
“송구하옵니다.”
“송구하단 말보단,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듣고 싶은데. 짐이 널 박하게 대한 적이 있던가?”
“……폐하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입니다.”
“그런 거라면 더 실망이군.”
사자 친왕은 힘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전에 폐하와 신이 나눈 서출과 적출에 대한 대화를 떠올리시면, 신의 사상이 폐하와 많이 다르단 게 기억나실 겁니다.”
월요는 화가 나서 ‘고작 생각이 다르단 이유로 날 배신하려 했다고?’라고 말하려다가,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사자 친왕과 자신의 우정이 가치관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되지만, 사자 친왕은 또 다를 수도 있긴 하니까.
“어쨌든 알려줘서 고맙군. 하지만 당분간은 얼굴을 안 보고 싶다.”
냉랭하게 선을 긋는 말에 사자 친왕은 군말 없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월요는 한숨을 내뱉고서 벽에 유달리 무겁게 여겨지는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했다.
천년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고, 그가 이복형제들 중 유일하게 진짜 형제로 여겼던 사자 친왕은 그를 배신할까 생각했다 하고.
사하비단은 황제의 시신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하고…….
“폐하. 어찌하실 겁니까?”
오원요는 그런 황제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월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폐하. 이것도 함정일 수 있습니다. 선황제 폐하의 시신을 파내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누군가 알게 된다면, 순식간에 폐하의 명성이 더러워집니다.”
승언의 말도 옳았다. 잘 묻혀 있는 선황제 시신을 꺼내 화장한다면, 대신들은 그를 패륜이라 몰아갈 수도 있었다.
“신도 염려됩니다, 폐하. 사자 친왕께서 천빈 마마 서신을 따로 가져온 것도 아니니까요. 천빈 마마께서 정말 시키신 일인지 아닌지도 결국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월요는 골치 아픈 이마를 감쌌다.
목에 생겼던 손자국은 거의 없어졌으나, 생각 없이 이마를 누르자 아직도 목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선택을 하긴 해야 했다.
이건 천년비를 믿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사자 친왕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 * *
‘천년비는 나타났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린 건가.’
개운호는 새벽녘 홀로 호숫가를 거닐며 생각했다.
갑자기 나타나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린 천년비.
사하비단과 손을 잡은 후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니더니, 요즘은 그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개원 역시도 갑자기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대체 다들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예전에는 형이 늘 생각만 많이 하고 갑갑하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도 형처럼 변해가고 있단 생각에, 개운호는 괜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때. 누군가 나룻배 위에서 그를 향해 물을 끼얹었다.
“누구냐.”
화가 난 개운호는 얼른 경공으로 배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고서 물을 끼얹은 이의 삿갓을 들치자, 뜻밖에도 천년비의 얼굴이 나타났다.
“너……?”
“나한테 은혜 갚는다 했지.”
개운호는 잠시 당황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했잖아. 내가 당과 사 먹는 데 찾아와서.”
“지켜주겠다 한 거 같은데. 왜 말이 그렇게 바뀐 거지?”
“지켜줄 필요는 없다. 넌 나보다 약하니까. 대신 심부름이나 하나 해줘.”
저 제멋대로인 악적 같으니라고. 개운호는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고서 물었다.
“그래. 무슨 심부름?”
“용화노 좀 찾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