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혼자 신난 타천천
“아니길 바라야지.”
월요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승언은 소름이 돋고 아찔해졌다.
무공을 조금도 모르던 장공주도 미쳤을 때 그 솜씨가 어마어마했는데. 천빈이 그렇게 변한다면……? 그 피해는 실로 막중할 것이다.
그뿐인가. 장공주는 죽었다 깨어난 인물인 데다 변화를 점진적으로 보았기에 황제가 마음의 정리라도 했지만, 천빈은 그렇지도 않았다.
천빈과는 한창 사랑을 키워나가는 중 아닌가.
이 와중에 천빈이 미치게 되고, 그런 천빈을 죽여야 할 상황이 된다면 황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
‘폐하는 괜찮을 거다’라고 확신하기엔, 이미 장공주가 처음 진짜로 죽었을 때. 황태자였던 월요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지 않은가.
그 생각을 하자 승언은 다시 사자 친왕이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전하께서는 폐하를 천빈 마마 일로 심려케 만든 다음, 흔들리는 대신들의 입지를 잡아둘 생각이십니까?”
“내가 아주 단단히 찍힌 모양이군.”
사자 친왕은 어깨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마를 내 곁에 두고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어.”
“사자.”
“폐하의 그림자가 저렇게 말하니 반박한 겁니다. 진심이 아니라요.”
승언이 갑자기 금창약 뚜껑을 덮고서 월요의 앞에 무릎을 꿇자, 사자 친왕과 월요가 모두 그를 보았다.
“왜 그러느냐.”
월요가 의아해 묻자, 승언은 월요를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애원했다.
“폐하. 비록 자신의 의지로 공격한 게 아니라 해도, 통제할 수 없는 몸이 된 이상 천빈 마마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절대로 곁에 두셔선 안 됩니다.”
월요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승언을 쳐다보았다.
승언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별개로 듣기 좋진 않았다.
“넌 천빈과 사이가 좋다 여겼는데.”
“물론 소신은 천빈 마마를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천빈 마마가 폐하 곁에 오는 걸 더 반대하는 겁니다. 천빈 마마가 폐하를 해치는 데 성공하면 폐하께서 잘못되시지만, 폐하를 해치지 못하면 마마가 죄인이 되니까요.”
“…….”
월요는 승언의 충직한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사자 친왕에게 물었다.
“천빈이 어디로 갔는진 아느냐.”
사자 친왕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릅니다. 전 싸우는 장면도 못 봤는걸요. 자다가 이제 막 일어났습니다, 폐하.”
“짐작 가는 곳은?”
사하비단. 대번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으나, 사자 친왕은 월요가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거짓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데서 일이 터졌더라면 이곳으로 올 거라 짐작했겠지만…….”
“천빈을 만나보고 싶다. 누이도 완전히 이성을 잃기 전까진 시간이 좀 있었지.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폐하!”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는구나! 승언은 기가 막혀서 외쳤으나, 월요는 사자 친왕을 쳐다보기만 했다.
승언이 이번에는 사자 친왕 쪽을 결연하게 쳐다보았다. 사자 친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만 폐하. 신 역시 지금 당장 마마를 만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고요.”
“놀랐을 거다. 많이.”
월요는 자신의 이마를 짚고서 눈을 반쯤 감았다. 그 목소리. 떨리는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고막을 두드렸다.
“마마를 위해서도 지금 당장 폐하를 만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또 사건이 터지면, 마마는 정말 못 견딜 겁니다, 폐하.”
사자 친왕은 승언과 다르게 천년비를 앞세워 월요를 설득해 말렸다.
일단 자신이 먼저 천년비와 타천천 등을 만나보아야 했다.
“하지만-.”
“서신을 써 주십시오. 제가 마마를 찾아 여기저기 다녀 보다가, 마주치게 되면 그걸 보여드리겠습니다. 혹시 저택으로 올지도 모르니 믿을 만한 사람에게도 서신을 남겨 두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차는 의견은 아니었으나, 월요는 승언의 간절한 눈길과 초조하게 움직이는 사자 친왕의 목울대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두 분을 위해 이게 낫습니다.”
사자 친왕은 얼른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먹과 벼루, 종이, 붓 등을 챙겨와 월요의 앞 탁자에 늘어놓았다. 승언은 먹을 갈기 시작했다.
월요는 붓을 들고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투명한 물이 검게 변해가자 붓끝에 그걸 찍어 종이에 가져다 댔다.
-반숙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걸 안다. 네 놀라고 두려운 표정이 눈앞에 선해 짐도 괴롭다. 다행히 아무 탈 없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
승언은 ‘아무 탈 없다’는 구절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사자 친왕이 팔을 툭 치고 고개를 젓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널 당장 만나고 싶은데,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우선 서신을 남기겠다. 서신을 받거든 사자를 말처럼 부려라.
“…….”
이번에는 사자 친왕이 인상을 찌푸리고서 반박하려는 걸, 승언이 슬그머니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네 사랑스러운 말과 우아한 손짓을 보는 순간부터 짐은 네가 너란 걸 알고 있었다. 네가 짐을 보면서 팔을 파닥거릴 때, 네 고운 뺨은 마치 복숭아……
사자 친왕과 승언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으나, 월요는 반숙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라도 표현해야 했다.
앙큼하게 본인을 내시라 속였던 점은 탓할 마음도 없었다. 실제로 속았기에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 순간. 열심히 팔을 움직이던 월요가 비틀하는가 싶더니, 곧장 책상에 쿵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폐하!”
“폐하!”
오글거리는 편지를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사자 친왕과 승언은 기겁해서 황제에게 달려갔다.
* * *
“목이 이 지경이신데 이렇게 고개 숙이고 서신을 쓰시니 쓰러지시지요!”
승언이 업어서 데려온 황보 궁의는 황제를 진찰하자마자 승언과 사자 친왕에게 화를 냈다.
“폐하를 말리지 않고 뭐 하셨던 겁니까! 폐하가 그나마 강골이시니 이 정도이지, 잘못하면 목이 뚝 앞으로 부러졌을 겁니다!”
사자 친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잔소리를 들었다.
월요가 하도 멀쩡하게 굴기에 거기에 넘어간 그의 실책이 맞았다.
당장 붓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일단 누워서 쉬라고 한 다음 나중에 서신을 쓰라 할 것을. 아니면 말로 전하라 하거나.
하지만 여기에도 장점은 있었다.
“그래도 서신을 쓰다가 쓰러지셨으니 다행이지. 마차나 말을 타고 궁전으로 오는 길에 쓰러지셨으면 정말 큰일 났을 겁니다.”
한숨을 내쉰 어의는 황제가 쓰다 만 서신에 이어서 약 재료를 적으며 말했다.
“이 처방대로 약을 만들어 하루에 세 번 식사 후 드시게 하면 됩니다. 약재가 희귀한 건 아니니, 아마 전하의 저택에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연고는 궁전에 들어가 가져와야 합니다. 그전까지는 금창약을 두루 바르시면 됩니다.”
“폐하는 괜찮으시겠나?”
“다른 상처가 있는 건 아니니 이대로 약을 잘 드시고 잘 바르시면서 푹 쉬시면 됩니다.”
“푹 쉰다는 건…….”
“보름은 머리를 되도록 안 움직여야 합니다. 침상에 누우셔서 최대한 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요.”
* * *
‘황제가 목이 졸려 다쳤다’는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기에, 결국 사자 친왕과 황보 궁의는 ‘폐하께서 말에서 떨어지셔서 목을 다치셨다’로 말을 맞추었다.
황보 궁의는 원래도 비밀스러운 처방을 담당하며 그림자들을 도맡아 치료하기에, 입이 무거워 이런 일에는 아주 적격이었다.
월요는 깨어난 뒤 황보 궁의에게 치하하고, 승언에게는 일거리들을 이쪽으로 가져오라 지시했다.
대신들 역시 급히 보고할 게 있으면 이쪽으로 오라 일렀다.
사자 친왕은 졸지에 황제에게 자기 침실을 빼앗기게 되자, 이런저런 계산을 해 보다가, 그냥 이참에 천년비를 찾아보겠다며 서신을 챙겨 저택을 나섰다.
‘사하비단으로 찾아가 보자. 마마도 그쪽으로 갔을 거다.’
사자 친왕은 말을 타고서 급히 성문을 빠져나왔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사자 친왕은 마음이 갑갑하고 매캐해졌다.
원래도 월요에게 정이 깊어서 타천천과 손을 잡을지 말지를 계속 고민하고 고민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얼결에 알게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 때문에 월요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그 충격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비록 자기가 꿈꾸는 세상에서 월요가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라 해도.
* * *
떡돌이가 괜찮은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데. 소란이 벌어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월요 주변을 둘러싸는 바람에 알 수가 없다.
승언이 어의를 업고 뛰어가고, 그 어의가 몇 시진 후 비교적 침착하게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몸을 숨겼던 나무에서 내려와 경공으로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인근 마을로 가서 말 한 필을 산 다음, 사하비단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얼결에 사자 친왕을 따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지리는 외워 뒀기에 돌아가는 게 크게 어렵진 않았다.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말 세 필을 바꿔가면서 이동한 끝에 나는 사하비단에 도착했고, 거기에 설치된 진을 넘어가 안으로 들어갔다.
타천천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마주친 단원들이 내게 영문도 모르고 꾸벅꾸벅 인사해 왔다.
그들에게 대꾸해주는 대신 나는 타천천의 방으로 달려갔다.
“타 변태!”
방문을 열면서 외쳤으나 타천천은 없었다.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타 변태 타 변태’ 외쳐댔더니, 결국 타천천이 소란을 듣고 먼저 나타났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뒷짐을 진 그는 혼자 여유로운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꼬리 흔드는 여우처럼 웃으면서 물었다.
“나들이는 잘하고 왔어, 녕녕?”
나는 이를 갈면서 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잘하고 왔을 거 같아?”
“아하.”
타천천은 허공을 움켜쥘 듯한 내 손을 보더니, 약 올리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새 황제까지 보고 왔구나, 녕녕. 바쁘게 놀다 왔네.”
손을 보여주며 화를 냈을 뿐인데. 타천천은 이미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이 가는 듯했다.
나는 타천천의 멱살을 잡고서 그의 귀에 대고 무섭게 윽박질렀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폐하를 보자마자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어. 어떻게 한 거야?”
타천천은 멱살을 잡힌 채로도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자 더욱 짜증이 나서, 나는 녀석을 밀어내듯 놓았다.
타천천은 자기 목덜미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설명했다.
“전에 황궁에 잡혀갔을 때 황제 머리카락을 몇 가닥 얻었거든.”
“그런데?”
“원래는 다른 일에 쓰려 했는데 잘 안 되길래 바꿨지. 네 몸이 황제를 목표물로 인식하도록.”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이걸 되돌릴 수 있는 인간도 타천천이 아니었다면, 인정사정없이 놈을 쥐어박았을 것이다.
“왜 그딴 짓을 해? 미쳤어?”
“그렇게 심하게 걸진 않았는데, 녕녕. 네 몸이 황제와 닿지 않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야.”
“!”
“더 심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참았어, 녕녕.”
타천천은 태연히 웃으면서 손바닥을 자기 키보다 높게 들어 올렸다.
“내 인내심도 한 이만큼 쌓였다고.”
“무슨 소리야?”
“녕녕은 내가 몇십 번 좋아한다고 말해도 몇십 번 다 까먹는구나.”
“그야 개소리니까. 이 거짓말쟁이야.”
“그럼 이젠 개소리가 아닌 걸 알겠지.”
빙그레 웃은 타천천은 내 바로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고서 웃었다.
“이젠 황제한테 못 가겠네. 개원한테도 못 가겠고.”
“……그게 무슨 소리야? 개원한테 못 가다니?”
아니, 당연히 안 갈 거긴 한데. 황제는 그렇다 치고. 여기서 개원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