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59화 (259/283)

##  259화. 속고 속이고 속이는 사이

사자 친왕이 일을 망치고 있어. 아니, 안 그래도 찰거머리가 된 떡돌이 때문에 골치 아픈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더 망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사자 친왕이 내 시선을 피해 눈을 희한한 방향으로 돌려버린다.

그 상태로 사자 친왕은 나름대로 둘러댔다.

“백몽은 원래 이름이고, 청청은 제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폐하.”

“흐음…….”

“백몽은 저 아이완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아서요. 게다가 제 수하 중에 백명이란 아이가 있어서 헷갈리기도 하고요.”

잘 둘러대는구나. 그나마 거짓말을 잘해서 다행이야. 속으로 안도하면서 슬쩍 떡돌이를 곁눈질했다.

다행이다. 떡돌이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표정이잖아.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눌렀다.

사자 친왕은 그 틈을 타서 사근사근하게 떡돌이에게 달라붙었다.

“자, 폐하께서 찾으시던 이 사자가 여기 왔으니, 얼른 가십시다. 바둑을 마저 두어야지요.”

나는 사자 친왕과 떡돌이와 거리를 두고서 조금조금씩 따라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바둑 두던 장소에 돌아가자마자, 아까 내가 편지를 써두던 곳에 가보았다.

하지만 수풀을 뒤져도 편지는 이미 없었다.

‘누가 주워간 건가! 누가?’

내가 편지를 어디까지 썼더라? 다 완성하지 못했는데! 내가 그러니까…… 어디까지 썼냐면…… 잘 먹고 잘 지내란 말을 쓴 거 같아.

남장을 하고 잠시 다녀간단 소리는 못 썼어. 남장 이야기를 쓸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지.

뭐. 좋아. 아주 이상한 부분은 없던 것 같다.

내가 나란 걸 알만한 단서를 많이 남기지 않아서, 어쩌면 떡돌이는 아예 못 알아볼 수도 있고.

‘잘 먹고 잘 지내길 바란단 건 덕담이니 문제 될 요소도 없어.’

생각을 마치자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 다른 시종들 틈으로 갔다.

* * *

“이런. 오늘은 제가 이겼군요.”

바둑을 마친 사자 친왕이 만족스레 웃으며 바둑알을 치우는 모습을, 월요는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자 친왕은 바둑알을 담다가 그 시선을 느끼자, 괜히 도둑이 제 발이 저리듯 심장이 술렁거려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백몽 청청이란 시종.”

사자 친왕은 속으로 움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네, 귀여운 시종이지요.”

“내시라던데. 네 시종 중에 내시가 있었던가?”

“일부러 태관이 되려 한 건 아니고. 사고가 생겨서 그렇게 되었지요. 어릴 때 열병을 지독하게 앓고 나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내시인 건 확실한 거고?”

“그럼요.”

단호하게 말한 사자 친왕은, 말하고 보니 좀 이상해서 덧붙였다.

“제가 굳이 확인을 해본 건 아닙니다만…….”

사자 친왕은 바둑알을 천천히 주워 담으면서 월요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는 영혼이 나가 있는 것 같더니.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서 윤이 흐르고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눈치챘나?’

사자 친왕은 다 담은 바둑알 상자를 반듯하게 탁상에 두면서, 월요의 지독한 눈빛을 애써 감내했다.

하지만 월요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자, 저 시선을 모른 척하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 결국 대놓고 물었다.

“왜 그럽니까? 폐하, 혹시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월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아서 사자 친왕을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

열 번은 호흡을 했을 시간이 지난 뒤. 월요가 느릿하게 웃었다.

“아니다. 제대로 예법도 모르는 시종을 짐이 마음에 들어할 리가.”

“불편하시다면 다음에는 데려오지 않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다음에도 데려오거라.”

오늘 만난 이래 처음으로 웃은 월요가, 오원요가 들고 선 쟁반에서 귀한 과일을 두 개 집어 건네며 말했다.

“내기로 건 과일이다. 그리고 하나는, 무섭게 해서 미안하니 백몽이에게 주고.”

“말단 시종에게 이런 귀한 과일을 주시면 곤란합니다, 폐하.”

“짐이 내렸다고 전하거라.”

무슨 꿍꿍이일까. 뭘 알고 저러나 모르고 저러나. 사자 친왕은 답을 알 길이 없어 갑갑해졌으나, 일단 순순히 과일을 받아들었다.

알아차렸다면 이대로 보낼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알아차리지 않았다 하기엔 그 시종을 딱 집어 신경 쓰는 게 묘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내가 괜히 고생이로군.’

* * *

사자 친왕이 떠난 뒤로도 월요는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할 때마다 바둑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데, 가끔 빠르게 두드리다가 느리게 두드리길 반복하는 걸 보니 생각이 잘 되다가 안 되길 반복하는 듯했다.

월요의 속내를 알 수 없기는 측근인 오원요와 승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자 친왕의 시종이 수상한 암살자일 수도 있다며 보러 갔다 오더니. 왜 갑자기 저렇게 멍해지신 걸까?

오원요는 그 눈치를 보며 말없이 있다가,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기만 하자 결국 용기를 내어 먼저 그를 불렀다.

“폐하.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라.”

월요가 허락하자, 오원요는 품 안에서 엉성하게 찢은 종이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사자 친왕 전하께서 데려오셨던 그 이상한 시종이 잠시 들른 곳에서 이런 게 나왔습니다.”

“그 아이가 썼나?”

“모르겠습니다. 쓰는 장면을 본 건 아니어서요. 하지만 내용이 좀…… 암살자라 하기엔 이상합니다. 이상하게 보이도록 쓴 암호일지도 모르지만요.”

월요는 종이 조각을 받아 펼쳤다.

-밥 먹어. 많이 먹어. 푹 자고. 잘 지내. 아파하지 마. 걱정하지도 마. 나는 괜찮아. 나는 지금 남자

“?”

월요는 종이 조각을 빤히 쳐다보다가 품에 넣더니 밖으로 나갔다.

“폐하?”

“방으로 가겠다.”

건물을 옮겨 자신의 침소로 온 월요는 방에서 전에 천년비가 써준 서신을 꺼내 펼쳤다.

글자를 번갈아 본 월요의 이마에 주름이 생기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종이 조각에 쓰인 글씨는 불편한 자세로 쓴 탓인지 많이 삐뚤빼뚤하다.

반면 천년비가 쓴 글씨는 반듯하다. 하지만 몇 개 특징적인 부분만큼은 일치했다.

“폐하?”

월요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승언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월요는 서신과 종이쪽지를 내려놓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반숙이가…….”

“네?”

“내시 몸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오원요와 승언은 황제가 갑자기 ‘천빈마마였던 사람’에 대해 말하자 어리둥절해 하다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내시라니요?”

“확실한 건 아니다.”

냥빈 때는 천년비가 나서서 자신이 천년비라는 걸 열심히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시종은 행동거지가 천년비와 흡사했지만, 그와 단둘이 있는데도 자신이 천년비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시종의 행동에서 강한 기시감을 느낀 월요도, 그 시종이 천년비 같은 성격을 지닌 시종인 건지 아닌지 몹시 헷갈렸다.

천년비가 사람이 되었으면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저렇게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남겼을지도 모를 쪽지를 보자, 월요는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내시 몸에 들어간 게 신경 쓰여서 짐을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몰라.”

월요의 머리 흐름을 알지 못하는 오원요와 승언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월요는 초조하게 탁상을 두드렸다. 물론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본인이 저렇게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는 이상, 확신하기 힘들다.

게다가 이 쪽지 역시 그자가 쓴 게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이 쪽지를 쓴 게 다른 사람이라면? 게다가 이 쪽지를 그에게 쓴 게 아니라면?

이 쪽지를 받는 상대가 황제임을 추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폐하……?”

승언이 걱정스레 황제를 재차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사자 친왕에게 그 시종을 데리고 입궁하라 해야겠다.”

“예?”

“아니, 아니다. 만약 그 애가 천년비라면, 짐을 일부러 모른 척한 건데. 다음에 또 모른 척할 수도 있어. 아니, 어쩌면 도망갈지도 몰라.”

“예?”

“……짐이 직접 가야겠다.”

월요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만약 그 시종이 정말 천년비라면. 자기가 사내 몸에 들어간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를 피한 거라면?

앞으로 비밀은 없도록 하자고, 그렇게 둘이서 약속을 해놓고 그렇게 앙큼하게 앞에서 다른 사람인 척 굴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사내가 되었으면 사내가 되었다 말하고서 원래 몸을 되찾을 방법을 같이 찾아보던가 해야지. 왜 피하는 거란 말인가.

고양이가 되었을 땐 그렇게 당당하게 찾아와 놓고서?

아니면 설마. 그사이에 변심한 건가? 사자 친왕에게 ‘우리 전하, 우리 전하’ 하더니. 설마 사자 친왕에게 그새 마음이 옮겨 갔나?

아니, 아닐 거다. 아닐 건데…… 맞나? 월요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다가 옆으로 점점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승언은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믿기진 않지만, 그 시종이 천빈 마마라 해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폐하. 그 시종은 냥빈 마마와 다릅니다. 그냥 데려올 수도 없는걸요.”

“왜 없느냐.”

“예?”

월요의 입꼬리가 한쪽만 더욱 가파르게 올라갔다.

“냥빈이 짐을 가지고 놀았으니, 짐도 거기에 맞춰 주어야겠다. 누가 먼저 실토하는지 두고 보지.”

* *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궁전을 나와 밖으로 돌아가는 길. 마차 안에서 사자 친왕은 숨을 가쁘게 쉬다가 내게 물었다.

“뭐가요?”

“왜 폐하와 그런 괴상한 말을 주고받던 겁니까?”

“괴상한 말이라니요. 들었잖아요, 전하. 저는 그냥 걸어가고 있는데, 폐하가 쫓아오면서 마음대로 군 거예요.”

“천 소저도 안 해도 될 말을 많이 하던데요.”

“어떤 거요?”

“내가 천 소저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보이냐던가, 그런 말 말입니다.”

“폐하가 의심을 하잖아요.”

“아니, 폐하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폐하는 여기 한 이만큼 서 있는데, 천 소저 혼자 저만큼 달려가서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사자 친왕이 두 손으로 거리를 넓게 벌리며 설명한다.

떡돌이랑 바둑 둬서 졌다더니. 사자 친왕이 많이 화났나 보다.

굳이 흥분한 사람과 이야기할 필요는 없기에, 나는 말 없이 그가 떡돌이에게 받아서 건네준 과일을 까먹었다.

“그런데 폐하는 왜 저한테 이 과일을 전해주라 하셨을까요?”

전에 궁전에서 지낼 때 듣기론, 이거 외국에서 가져온 값비싼 과일이라던데.

“저도 모르지요. 말씀은 무섭게 해서 미안하다 하시지만…….”

사자 친왕은 부채를 펼쳐 부치다가, 한 번에 접으며 물었다.

“혹시 정체를 들킨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전하가 도중에 끼어들기 전까지 폐하는 제 정체를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는걸요. 폐하는 그냥 나랑 전하 사이를 자꾸 의심…….”

그때 마침 마차가 덜컹하며 멈추어 섰고, 몸이 흔들리는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아!”

“왜 그럽니까?”

“폐하가 제게 반한 거 아닐까요?”

“남장하고 있잖아요?”

“제가 남장한다고 이쁜 게 가려지나요?”

“잘 가렸으니 염려 말아요. 전혀, 한 올도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폐하 이상형은 딱 저란 말이에요. 제가 아무리 싸매고 감춰도 폐하는 저한테 반할 수밖에 없어요.”

“폐하 이상형이 마마라고요? 정말입니까? 폐하가 그러던가요? 아닐 텐데요?”

“폐하 이상형이 뭔지 알아요?”

“어릴 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요. 영민한 사람이 좋다 했습니다.”

“딱 나네요. 역시 나네.”

“…….”

사자 친왕은 썩어들어가는 표정을 짓고서 나를 쳐다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착각은 자유라고 하니까요.”

뭐 이 자식아? 발끈하려니, 사자 친왕이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상형으로 치자면, 그대는 내 이상형에 가깝습니다.”

“정말요?”

그 말에 반색하면서 이상형이 무어라고 물으려는데, 갑자기 마차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건들건들하게 빈정거렸다.

“거짓말도 잘하는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