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충격받은 영빈
순간 머릿속이 그야말로 하얀 백사장이 되어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파도 소리 같은 게 희미하게 들려올 뿐.
나는 쩔쩔매다가 단호하게 반박했다.
“아닌데?”
말하고 나니 평소보다 말이 좀 짧긴 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면서 나는 마차 바퀴를 굴리는 시늉을 했다. 아니, 이걸 허공에서 굴려서 어쩌려고!
결국 도로 마차 바퀴를 내려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사자 친왕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럼 그때 약속한 거. 지금 쓰지요.”
“뭐, 약속, 뭐?”
“내 생일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자, 사자 친왕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살랑살랑 내게 대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약속을 잡아두길 잘했지요?”
그래도 내가 놀라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자, 사자 친왕은 부채를 회수하며 덧붙였다.
“그렇게 고민 안 해도 됩니다. 어차피 나도 피차일반. 여기 온 걸 함부로 입 열 처지가 아니거든요.”
그건…… 그렇겠지. 사자 친왕이 떡돌이의 적진에 와서 며칠간 잘 있다 가는 건 수상한 일이니까.
그래. 듣고 나니 내가 사실은 천빈이었던 거나, 사자친왕이 여기에 온 거나 다 남에게 하기 어려운 말이긴 하다.
결국 망설이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자 친왕은 그것만으로도 잘 알아듣고서 놀라 물었다.
“정말입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이렇게 된 건가요?”
마부는 먼발치에 떨어져 있다가, 사자 친왕이 더 멀리 떨어지라고 하자 얼른 그쪽으로 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내가 아는 대로만 털어놓았다.
“모르겠어요. 나랑 천소여가 동시에 같은 방법으로 죽었는데. 이거 때문에 뭐 일이 벌어진 거 같아요.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아니, 언제부턴지 알겠습니다. 독을 먹고 죽을 뻔한 일이 있죠.”
“네. 어쨌든 그러고서 천빈으로 지냈는데, 천소여가 원래 몸에 돌아와서 쫓겨났어요. 그게 책봉식 날이었죠.”
사자 친왕은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인지, 나뭇가지와 돌을 이용해 영혼과 몸을 표현하며 물었다.
“하지만 마마가 마마로 있는 동안에도 천년비는 계속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어떻게 된 거지요? 물론 당시 천년비 평소랑 행보가 다르긴 했지…….”
사자 친왕은 말하다가 자기 스스로 깨닫고 뜨악했다.
“그건 또 다른 사람이었군요.”
“네.”
“이럴 수가 있나.”
사자 친왕은 완전히 뜨악해 중얼거렸다.
“믿기진 않군요. 사람 영혼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니.”
“그렇죠.”
나도 처음에 정말 혼란스러웠지. 지금은 몸이 바뀐 경력이 많아져서 그러려니 하게 되었지만.
사자 친왕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폐하는 이미 아시는 거 같으니 안 믿기도 힘드네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야? 떡돌이가 이미 알다니?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야 책봉식 이후로 폐하께선 천비 마마를 이전만큼 총애하지 않으시니까요. 다른 사람인 걸 알고서 안 총애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사자 친왕이 웃다가 물었다.
“응? 안 기쁘십니까?”
“내 연인으로는 기뻐요.”
안 기쁠 수가 있나. 내가 고양이가 됐을 때도 알아서 날 반견해준 연인인걸.
“연인으로는?”
“폐하가 그러면 우리 계란이가 입장이 이상해지잖아요.”
“!”
* * *
영빈은 천비가 부른단 말에 그쪽으로 가긴 했으나 표정이 심드렁했다.
연비는 황제가 뺏어간 고양이가 며칠 지나 또 죽어서 지금 시름시름하고 있었고, 천비는 연달아 두 번이나 쓰러졌다.
영빈은 처음엔 ‘천비가 계속 쓰러지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 만나지 못했고, 다음에는 해운잠의 장례식을 치르러 궁궐 밖에 나가 있느라 천비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몇 주가 흘렀는데, 갑자기 비연궁에서 사람이 와서 ‘천비가 영빈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보고 싶다고 하니 가긴 가는데…… 아무래도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다 보니 신경이 쓰였다.
영빈의 궁녀도 가마 옆에서 걸어가다가 의아해 물었다.
“왜 부르는 걸까요?”
“글쎄. 심심한 게 아닐까.”
“또 기억을 잃었단 말이 있던데. 정말일까요?”
“저도 들었습니다, 마마. 기억을 잃으면서 성격이 또 확 변했대요. 폐하께서 낯서신지 이전처럼 총애하지 않으신단 말도 돌아요”
“성격이 변하거나 말거나.”
영빈은 중얼거리면서 하품했다.
하지만 표정은 무거워져서, 측근 심복들은 영빈이 작은 마님 때문에 아직 심기가 불편하시구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궁녀는 영빈이 일부러 태연한 척 하지만 속이 괴로운 걸 알고서 더 말 시키지 않았다.
영빈은 가마 한쪽에 몸을 기댄 채 억지로 하던 하품도 멈추고 괜히 길가만 쳐다보았다.
천비가 부르니 가는 것이긴 했으나, 해운잠이 죽어서일까. 자꾸 입궁하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영빈이 천씨 가문에서 내내 천한 취급을 받을 때, 그녀의 힘이 되어준 두 명이 바로 친모인 해운잠과 연비였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은 급사해 버렸고, 지금은 친하지도 않은 천비나 보러 가야 하다니.
“도착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가마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영빈은 가마에서 내려 비연궁 안으로 들어서다가, 낯익은 냄새를 맡고 흠칫했다.
지금 비연궁에서 풍기는 향. 이건 해운잠이 좋아하던 향이었다.
‘왜 이 향이 여기서?’
공오부인은 이 향을 해운잠이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싫어해서, 이 향이 풍기는 곳마다 바로 다른 향을 꽂아뒀다. 부정한 걸 쫓아내야 한다고.
’설마. 천소여가 일부러 이 향을 들여왔나? 날 조롱하려고?‘
같은 집안에서 살던 천소여가 이 향에 대한 일화를 모를 리 없기에, 영빈은 분노가 치솟았다.
기억을 한 번 잃은 후로 좀 나아졌지만 집 안에 있을 때의 천소여는, 그야말로 영빈을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들어갔다가, 영빈은 더 놀랐다.
향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다 바뀌어 있었다. 무엇보다 천비 역시 분위기가 확 달랐다.
천비는 긴 의자에 몸을 반쯤 누인 채 간식으로 과일을 먹는데, 그 자태가 이전의 어벙한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다 영빈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 벌리고 다가왔다.
“보고 싶었다. 이리 오거라.”
말투는 왜 저러지? 영빈이 흠칫해서 뒤로 몸을 빼었으나, 천비는 그대로 영빈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주위 궁녀와 태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나가 있어라.”
궁인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영빈은 손을 뿌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미쳤어? 네가 왜 내 손을 잡아?”
천비는 그래도 여전히 미소 짓더니, 두 손을 영빈의 뺨에 가져다 대고서 웃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라, 영빈은 심장이 섬뜩한 느낌에 뒤로 물러났다.
“너…… 뭐야.”
천비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여야. 이제 염려 말거라. 엄마가 널 지켜주마.”
영빈은 눈이 커다래져서 화내며 언성을 높였다.
“너…… 진짜 미쳤구나?”
영빈은 참지 못하고 천비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혹시 우리 엄마 돌아가셨단 소식 들었니? 그래서 이래? 우리 엄마 흉내 내면서 날 놀리기라도 하고 싶어?”
천비는 그래도 태연히 말을 이었다.
“넌 대추를 좋아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몰라. 공오부인도 대추를 좋아하니까, 네가 싫어하는 척하는 거라는 걸.”
“!”
자신과 엄마 외엔 아무도 모르는 일을 천비가 말하자 영빈은 움찔했다. 하지만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천소여. 무슨 꿍꿍인지 모르지만 기분 나빠. 하지 마.”
“아가, 기억나니? 네가 입궁하기 전에 그랬어. 힘이 생기면 엄마를 꼭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고. 나는 네게 그랬지. 힘이 생기면 네 마음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영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도 안 된다 싶은데. 아무리 봐도 말하는 게 엄마였다.
영빈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천비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우여야. 널 위해서 엄마가 천소여 몸을 뺏었다.”
“!”
“천소여, 아니, 내가 가진 것들. 이제 모두 다 네게 주겠어. 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영빈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문을 박차고 나와 돌아갔다.
“마마?”
영빈의 궁녀들이 놀라 쫓아왔으나, 영빈은 파랗게 질린 채 걸으며 같은 질문만 속으로 반복했다.
‘뭐야? 저거…… 저거 뭐야?’
해운잠은 딸이 나간 자리를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긴 의자에 다시 앉았다.
지금은 혼란스럽겠지만 결국 받아들일 거라는 걸 알았다.
‘걱정 마라 우여야. 엄마가 모든 걸 네게 주마. 전부 다!’
그리고…… 해운잠은 먹던 과일을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공오부인. 너는 반드시 네 친딸 손으로 죽여주마.’
* * *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얼결에 사자 친왕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다.
사자 친왕이 ‘원래 천소여가 아니란 걸 폐하가 이미 아시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냐’고 설득해서 얼결에 타긴 했는데…….
막상 타고 가고 있자니, 가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아유정이 내 몸에 있을 때. 수도에서도 얼굴을 드러내고 온갖 행패를 부렸어. 대신들 중에 내 얼굴을 아는 이들이 있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떡돌이가 나를 다시 후궁으로 맞이한다고 말이라도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떡돌이는 색에 취해서 악적을 후궁으로 들이려는 앞뒤 구분 못 하는 황제 취급을 받을 거다.
나는 황제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떡돌이가 나를 연모하면 계란이 입지가 애매해지는 것도 좀 그렇고…….
“후우우.”
역시 괜히 따라왔나. 사자 친왕이 ‘생각은 나중에 마차 안에서 해라’고 하는 데 그만 넘어가 버렸어.
혀를 차고 있자니, 사자 친왕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싫습니까?”
“싫은 게 아니라 걸리는 게 많은 거예요. 내 얼굴 알아볼 사람이 많으니까.”
“우리 천 대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꿋꿋한 줄 알았는데요?”
“나한테 뭐라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계란이한테 뭐라고 하는 건 싫다.
입을 다물자 다시 마차 소리가 잘게 부서져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타천천한테도 아무 말 안 하고 나왔네. 괜찮나?’
이건 타천천이 만든 강시 몸이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타천천이 조종할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곰곰이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사자 친왕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안했다.
“그러면 우선 친왕부에서 지내지요. 그건 어떻습니까, 마마?”
나는 멍하게 있다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 집에 있자고요? 그래도 돼요?”
“됩니다. 안 될 건 없지요.”
“하지만 전하는 역심을 품고 있잖아요. 날 집에 들여도 되겠어요? 내가 전하가 역심을 품은 증좌 같은 걸 찾아내면 어쩌죠?”
역심 소리가 듣기 싫은가. 사자 친왕은 입을 벌리고 나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끙 소리를 내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진짜 증좌가 있어서 그래요?”
“그럴 리가요. 그런 증좌는 집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심도…… 젠장, 역심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반역자가 될지 말지 안 정한 거예요?”
사자 친왕은 얼굴이 하얘져서 손을 내저었다.
“누가 반역을 한다고요.”
“하지만 타천천이랑 어울리고 있잖아요.”
“그런 걸로 치면 그쪽도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있고 싶어서 있던 게 아닌데요.”
사자 친왕은 한숨을 내쉬고서 부채를 펼쳤다.
“나도 역심이니 반역이니 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증좌가 그자한테 있을 수도 있어서 그러는 거지.”
“증좌? 웬 증좌요? 그게 뭔데요?”
질문을 하자마자 저절로 답이 떠올랐다. 전에 용화노가 내게 말해준 거. 여러 가지 필체로 만들어져 있다던 선황제의 서신!
혹시 사자 친왕은 그 서신에 대해 아나? 그걸 타천천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