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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54화 (254/283)

##  254화. 예리한 눈썰미

사자 친왕은 부채를 접으면서 떨떠름하게 말했다.

“낭자,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거 같소.”

“뭐라 들었는데요?”

“낭자가 날 보면서 한탄한 거 같았는데. 아니잖아. 그렇지?”

“어휴.”

“제대로 들었네. 내가 제대로 들은 거였어.”

황당해하는 사자 친왕을 두고 여자가 돌아서더니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자 친왕은 황당했다. 자신의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안 반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한숨은 왜 내쉬는 건가? 그것도 무척 한심하단 것처럼?

하지만 돌아선 여자는 계속 걸어가기만 할 뿐. 이젠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자 친왕은 다급히 그 뒤를 쫓으며 물었다.

“왜 날 보고 한탄한 거요?”

* * *

왜긴 왜겠어! 사하비단은 떡돌이 적인데, 떡돌이랑 친한 네가 여기 있으니 그렇지!

목구멍까지 치솟는 항의를 누르느라 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나는 이 몸으론 사자 친왕과 처음 만나는 건데. 여기서 항의해 버리면 그가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차라리 그와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자 친왕은 사하비단에 왔다. 그는 떡돌이와 대립하려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사자 친왕이, 떡돌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 나란 걸 알게 되면 그걸로 어떤 꿍꿍이를 부릴지 모르잖아?

궁전에 오래 있었더니 나도 참으로 똑똑해졌군!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

어쨌든 이 때문에 입을 다물긴 하는데. 그를 안내하기 위해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를 믿고 있을 바보 같고 멍청한 떡돌이가 너무 가여웠다.

정말 너무해. 떡돌이는 장공주 빼고는 형제자매 중엔 사자 친왕을 제일 좋아하는데.

“타천천이 안내자를 보낸 건지 암살자를 보낸 건지 헷갈리는군. 낭자가 날 자꾸 노려보는 거 같소.”

* * *

사자 친왕을 데리고 사하비단의 숨겨진 입구로 찾아가자, 이미 그곳엔 타천천이 나와 있었다.

이러면 직접 맞이하러 나가도 됐지 않나? 내가 째려보자, 타천천은 모른 척 유쾌하게 웃으며 사자 친왕에게 환영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시지요,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 보낼 때부터 눈치채긴 했지만. 타천천은 사자 친왕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눈치였다.

사자 친왕을 날 쫓아오는 동안 접었던 부채를 다시 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를 받다가, 슬쩍 내 쪽을 부채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고맙군. 그런데 저 소저는 대체 누군데 저리 무섭게 날 쳐다보느냐?”

타천천은 힐긋 내 쪽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별로이십니까? 전하를 위해 특별히 안내자로 보낸 건데요.”

“특별하게 노려보긴 했지. 오는 내내 노려보길래 그대가 암살자를 보낸 줄 알았다.”

타천천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서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저분은 전하께서 내내 만나고 싶다 하셨던 사람입니다.”

그 말이 나왔을 뿐인데, 사자 친왕은 대번에 내 정체를 알아맞혔다.

“이 낭자, 아니, 이 대인이 그럼 천년비?”

전에 사자 친왕은 내게도 ‘천년비’를 존경한다고 알려준 적이 있다. 내가 천년비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 말이지만.

그게 아주 빈말은 아닌지, 사자 친왕은 자기가 질문을 던지고는 자기가 웃으며 물었다.

“정말인가?”

하지만 곧 그는 더욱 떨떠름해져서 물었다.

“날 좀 싫어하는 거 같은데.”

타천천은 내 쪽을 힐긋 보며 사기를 쳤다.

“하하, 그럴 리가요. 우리 천 대인은 늘 표정이 저렇습니다. 저게 기본 표정이죠.”

* * *

사자 친왕이 다른 이의 안내를 받아 손님용 방으로 가자마자, 나는 타천천을 데리고 빈방에 들어가 따졌다.

“왜 사자 친왕이 저기에 있어?”

타천천이 내게 사자 친왕 안내를 맡긴 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사자 친왕이 여기에 온 그 자체였다.

타천천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그야 사자 친왕이 말이 제일 잘 통하는 손님이니까?”

말 잘 통하는 손님 웃기시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

타천천은 재차 미소 지으며 발뺌했다.

“이거 참, 녕녕. 내가 친구도 사귀지 못하게 하는 거야? 그대 독점욕이라면 괜찮아. 환영이야. 하지만 그런 게 아니면서 질문하면 곤란해. 그댄 사하비단 사람도 아니잖아.”

그래도 내가 눈에서 힘을 빼지 않자, 타천천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녕녕이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해. 녕녕은 이제 후궁이 아니잖아.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신경 써?”

왜긴 왜야.

“내가 후궁이 아니어도 황제가 내 아이 아빤 건 안 변해.”

그러니 평생 신경을 안 쓰고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타천천은 이제 궁에서의 일을 잊고 여기서 행복해지라고 하지만…… 당분간은 그러기 힘들 것 같았다.

“녕녕,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나는 타천천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뒤에서 그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 * *

사자 친왕을 왜 불러 왔는진 모르겠지만, 그가 타천천과 대화를 나눌 때는 몰래 엿들으러 갈 수가 없다.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엿보려 시도하다 실패하기를 여러 번. 결국 나는 활을 들고 호숫가로 가서 그냥 활시위나 다듬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바스락 소리가 들리더니 사자 친왕이 나타났다.

나는 그를 모른 척하려 했으나, 사자 친왕은 굳이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천 소저. 전에 타천천이 얼핏 말한 거 같던데. 그거 아시오? 나는 평소 천 소저를 아주 흠모했소.”

누가 사자 친왕을 여기에 들여보낸 거야? 속으로 구시렁거렸으나, 사자 친왕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바위에 걸터앉으면서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봐서는 제 동생을 배신하려는 사람 같지 않았다.

“날 흠모했다고요?”

빈정거리듯 물었는데도, 사자 친왕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이오. 늘 소문으로 들으면서 참 대단하다 생각했지. 천 소저는 늘 적들을 혼자 무찌르고 다니지 않소. 게다가 거침없이. 들려오는 그대 이야기는 그야말로 영웅 같았소.”

“전하한테 제 얘길 하는 사람들이, 영웅 얘기라고 들려준 건 아닐 텐데요.”

“그렇지. 하지만 그 이야길 어떻게 받아들일진 내 자유 아니오.”

말은 잘하는구나. 떡돌이랑도 저렇게 아부하다 친해졌겠지. 그래놓고 배신하려 하고.

“…….”

그 생각을 하는데, 문득 사자 친왕의 양심을 자극해보고 싶어졌다.

그가 자기가 얼마나 떡돌이랑 친한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하게 하면 마음을 좀 고쳐먹지 않을까?

좋아. 해보자.

“흠모한 사람이 또 누구 있어요?”

“없소.”

“거짓말. 나 하나만이 아닐 거잖아요.”

“하난데.”

거짓말쟁이. 개원이도 좋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거 때문에 묻는 게 아니니 넘어가자.

“안 믿어요. 더 있을 거예요.”

“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해요.”

“왜 중요한지 전혀 모르겠는데.”

“대답해봐요.”

“음…… 개원?”

“말고 다른 사람.”

사자 친왕은 신발을 벗고 호수에 발을 담그다가, 짧게 웃더니 물었다.

“소저, 혹시 원하는 답이 있소?”

“네.”

“그러면 질문을 왜 하는 거요? 그냥 말을 해주면-.”

“말해봐요. 이런 건 혼자 깨달아야 해요.”

“거 참. 듣던 거보다 이상한 소저로군.”

하지만 사자 친왕은 더 생각하는 시늉을 하긴 했다. 그러다가 결국 같은 대답을 내놓았지만.

“음. 역시 없는데.”

“동생이 있잖아요.”

전혀 갈피를 못 잡기에 결국 답을 알려주자, 사자 친왕은 당황해서 반박했다.

“친하긴 하지. 하지만 흠모하진 않는데.”

“어쨌든 친하죠?”

“친하지.”

그래, 맞아. 그쪽은 떡돌이랑 친해.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나는 눈에 힘을 주고서 사자 친왕을 쳐다보았다. 그가 내 눈을 보고 마음을 바꾸길 바라면서.

하지만 사자 친왕은 멀뚱히 나를 쳐다보다가 웃으며 이렇게 묻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동생을 말하는 거요? 이복동생이 하나둘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알려주었는데도 사자 친왕은 조금도 떡돌이에게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더 말을 섞어봐야 내 손해다 싶어서, 나는 그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다음날. 날씨가 유난히 차가웠지만 강시 몸은 이전보다 추위를 덜 탄다.

이 때문에 나는 밖을 돌아다니다가, 어제의 그 호수로 가서 신발을 벗고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수영을 하고 있으려니, 오늘도 사자 친왕이 나타났다.

“안 춥소?”

그는 강물 안에 들어와 있는 나를 보고 놀라 묻더니, 어제 자기가 앉았던 그 바위에 걸터앉아 물었다.

“왜 이 날씨에 그러는 거요?”

모른 척할까 하다가, 그가 떡돌이 생각을 한 번 더 하길 바라서 나는 그가 조카를 떠올릴 법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기가 걱정돼서요.”

“아기? 아, 회임했소?”

“네.”

“축하하오! 그래서 요즘은 조용했군. 늘 요란하게 소문이 몰려다니더니.”

“고마워요.”

“그런데 이 추운 날에 찬물에 있어도 되오? 회임했는데?”

“이 배에 든 건 아니어서 괜찮아요.”

“호오. 그렇군.”

사자 친왕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고서 어제처럼 신발을 벗다가, 갑자기 신발을 뚝 떨어뜨리며 물었다.

“그럼 어느 배에 들었소?”

“다른 사람 배에요.”

사자 친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 또 물었다.

“그럼 회임한 게 아니잖소?”

“꼭 내가 내 배로 회임해야만 회임한 건 아니잖아요?”

“보통은 그걸 회임이라 하지 않소?”

“내 배에 든 거 아니지만 회임한 건 나예요.”

사자 친왕은 떨어뜨린 신발을 도로 주워서 먼지를 떨며 계속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좀 심각한 표정이 된다.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곧 태어날 자기 조카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계속 호수 안에서 참방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눈이 마주치기에 나는 한 번 더 말해주었다.

“그 아이가 너무 걱정돼요. 잘 지내야 할 텐데. 아기들은 약하잖아요.”

사자 친왕은 잠시 자기 발치를 내려다보다가, 반 다경 정도 흘러가자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요?”

“내 아기요.”

왜 자꾸 같은 말이 반복되는 거야? 내가 의도한 대로 떡돌이 걱정을 하고 있긴 해?

의아해서 쳐다보자, 사자 친왕이 주저하다 말문을 열었다.

“혹시…… 소저, 내가 이런 질문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

“소저가 아빠 쪽이오?”

“!”

* * *

사흘째 되는 날은 사자 친왕과 만나지 못했다. 그가 감기에 걸렸단 말만 들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나는 타천천의 명령으로 그에게 약을 가져다주는 사람에게 부탁해 내가 대신 약그릇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사자 친왕은 침상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가 웃으면서 말했다.

“날 싫어하는 거 같더니. 약은 왜 들고 왔소?”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려고요.”

“독약이오?”

“농담이에요.”

하지만 사자 친왕은 내가 약사발을 건네자, 그걸 받아 들기만 하고 마시진 않았다.

“진짜 농담한 건데.”

너무 겁을 주었나 싶어 묻자, 그는 웃더니 비밀이라며 알려주었다.

“소저 때문에 안 마시는 게 아니오. 계속 여기서 주는 약은 안 마시고 있었소.”

“왜요?”

“여기 문제가 아니오. 나는 원래 밖에서는 뭐든 잘 안 마시오.”

사자 친왕은 그러더니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 앉은 채 사자 친왕이 계속 콜록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감기약조차 안 받아 마시는 거 보면, 사자 친왕도 완전히 사하비단을 믿진 않는 건가?

그런데 왜 사자 친왕은 여기에 와서 머무르고, 타천천과 비밀리에 대화를 나눌까? 떡돌이랑도 친하면서 왜?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전에 사자 친왕이 내게 고민이 있다고 한 게 떠올랐다.

황후가 어쩌고저쩌고 한 건데. 혹시 그건 그냥 둘러댄 말이고, 이 일을 고민한 걸까?

“전하.”

“응?”

“고민 중인 게 있으면, 돌이킬 수 있는 쪽으로 선택해요.”

사자 친왕은 병상에 누운 와중에도 부채를 챙기고서 깃털을 가다듬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돌이킬 수 있는 쪽을 선택하라고요.”

“돌이킬 수 있는 쪽이라니?”

“죽은 가족은 돌아오지 않아요, 전하.”

“!”

* * *

사자 친왕은 이틀 더 병석에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음날에는 돌아간다고 했다.

그가 와 있는 동안 결국 나는 사자 친왕의 마음을 바꾸지도, 그의 속내를 알아내지도 못했다.

그 생각을 하자 너무 화가 나서, 나는 사자 친왕이 타고 가야 할 마차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갔다.

“누구십니까?”

놀란 마부를 점혈해서 꽁꽁 묶어 옆에 놓고서, 나는 마차 바퀴를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바퀴를 뗀 다음, 그가 천천히 걸어 돌아가면서 자기가 지금 누구를 배신하려 하는지 잘 고민해보게 할 생각이었다.

“천 소저?”

사자 친왕이 도착해 내 모습을 보았지만, 숨지 않고 그의 눈앞에서 나는 계속 마차 바퀴를 분해했다.

그렇게 작업을 반쯤 마쳤을 즈음.

이제 됐다, 싶어서 일어나 손을 터는데, 작업 내내 조용하던 사자 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가 미친 건지 모르겠는데.”

‘맞아. 미쳤지. 떡돌이를 배신하려 하다니.’

나는 코웃음을 치고서 그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자 친왕은 같이 손을 흔드는 대신, 부채로 나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천 소저. 왜 이리 천빈 마마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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