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이전의 이야기
“고맙습니다. 모두 혜비 마마의 덕입니다.”
혜비의 말에, 부성은 눈가가 붉어져 감사 인사를 청했다. 혜비는 부성의 두 손을 꼭 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걸요.”
부성은 입술을 깨물고서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다 물었다.
“저…… 그러면, 지금 제 몸을 차지한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혜비는 한숨을 내쉬면서 손수건을 건넸다.
“속도 좋으십니다. 생판 남에게 몸을 뺏기고 그 고생을 다 했으면서. 그게 신경 쓰이나요?”
“처음엔 증오스러웠어요. 내 몸을 차지하고서 뻔뻔하게 내 것들을 누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어요.”
부성은 어두워진 얼굴로 혜비에게 받은 손수건을 꽉 쥐었다.
“즐거운 시간이 없었냐면, 그건 아니거든요.”
“알아요. 하지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요. 낭자의 몸이고 낭자의 신분이고 낭자의 지위였는데, 그걸 빼앗겼던 거잖아요. 낭자가 도로 찾는 게 올바른 거고요.”
“하지만…….”
“그 여자는 낭자의 인생을 도둑질한 거예요. 도둑이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해서 도둑이 아닌 건 아니랍니다.”
“제가 몸을 되찾고 나서 폐하께서 절 멀리하시면 어쩌죠?”
혜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낭자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도울 순 없답니다. 하지만 총애를 잃더라도 낭자는 첫 황손의 친모가 되는 거예요. 총애하지 않으셔도 예의로 대해 주실 테니 염려 말아요.”
부성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이 모든 일의 시작을 떠올렸다.
* * *
“멍청이. 창피하지도 않나.”
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누군가 어깨로 천소여를 퍽 밀치고 지나갔다.
천소여는 비틀거리다가, 자신을 민 상대가 영빈인 걸 알아차리고 굳었다.
영빈은 걸어가다가 힐긋 그녀를 뒤돌아보더니, 픽 웃고서 다시 걸어갔다.
“소주…….”
멍하니 서 있자니, 부성이 슬픈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대꾸하기도 전에 담 너머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러고 살고 싶을까.”
“그러니까요. 안 됐긴 한데. 참. 창피를 모르는 것 같긴 해요.”
“그만들 해요. 본인이야말로 가장 속상하겠죠. 늦게 들어온 서출 동생보다도 못났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영빈이나 연비나 얼굴들을 봐요. 하나같이 절색이잖아요. 게다가 영민하고 자신만만해요. 싸울 땐 짜증 나지만 매력적이긴 하지. 하지만 천 귀인은…….”
“하하, 너무 솔직하다.”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 존재감이 없긴 하지만, 어떻게 대놓고 누구냐 물어보실까.”
“하하.”
천소여가 훨씬 전에 먼저 나갔으니 지금쯤 밖에 없을 거라 여기고서, 남은 후궁들이 자기들끼리 천씨 가문 세 자매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천 대인이 딸을 셋이나 후궁으로 넣었다고 걱정들 하지만, 사실상 둘만 넣은 거나 다름없지요. 한 명은 유령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서출 동생 덕에 앞에선 아무도 천 귀인에게 뭐라 하지 못하잖아요?”
천소여가 우두커니 서 있자, 부성이 울면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저런 헛소리들, 들을 필요 없어요 소주. 얼른 가요.”
천소여는 부성의 부축을 받아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중얼거렸다.
“부성. 나…… 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
부성은 울면서 천소여의 팔을 꽉 잡았다.
“두고 보세요. 소주도 언젠가 총애를 받아서 영빈보다도 연비보다도 더 높게 올라갈 거예요. 그때가 되면 저것들도 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요.”
“총애? 폐하는 날 쳐다보지도 않아. 그런데 총애라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소주.”
“하지만 난 대여 언니나 천우여만큼 아름답지 않아.”
“소주…….”
첫째인 대여 다음으로 두 번째 적녀인 천소여가 입궁할 때, 후궁들과 대신들은 모두 다 긴장했다.
절색의 외모에 뛰어난 머리와 상냥한 미소로 빠르게 비의 자리에 오른 연비의 동복동생이니, 다들 연비 같은 여자가 하나 더 올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 속에 입궁한 천소여는 외모로도 머리로도 존재감으로도 연비의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 번도 시침을 들지 못했고, 본인도 늘 기가 짓눌려 후궁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장점은 언니가 다 가져가고 동생은 찌꺼기만 받았나보다’고 혀를 찰 무렵. 천소여의 서녀 동생인 천우여가 입궁했다.
사람들은 천씨 가문이 천소여의 실패로 발악을 한다며 조소했으나, 천우여는 제2의 천대여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천대여와 전혀 다른 매력을 갖추고 있어서, 누구든 그녀를 보고 나면 존재를 확실하게 외우게 됐다.
천씨 가문에 대한 조롱은 영빈이 빠르게 품계가 올라가는 걸 보며 바로 가라앉았다.
대신 그 조롱은 모두 다 천 귀인 천소여의 차지가 되었다.
언니이고 적녀이면서도 천우여보다 모든 게 못난 천소여는 후궁에서 지내는 내내 비웃음거리였고, 본인도 그걸 잘 알았다.
연비와 영빈의 눈치를 보느라, 애초에 경쟁이 안 되니까, 다들 눈앞에서만 잘 대해 줄 뿐. 뒤에서는 천소여를 비웃었다.
“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
천소여는 늘 하는 말을 다시 또 중얼거리며 힘없이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 * *
어느 날. 천소여는 혜비에게 부탁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단 소문을 들었다.
천소여는 자신의 보물 몇 가지를 챙겨가 혜비에게 주고서 부탁했다.
“소원을 들어준단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혜비 마마.”
혜비는 천소여가 비웃음을 당할 때면 늘 불쾌해하며 그만하라 말리는 이 중 하나였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도 있는 곳에서도.
천소여는 그런 혜비가 소개해 주는 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
“무슨 소원을 빌려고요?”
혜비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천소여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원웅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궁 밖에 나가고 싶어요.”
“쉽지 않을 텐데…….”
“여기 생활도 쉽지 않은걸요.”
“밖에 나가면 더 고생일 거예요, 천 귀인.”
“괜찮아요. 전 예전부터 몰래 집을 빠져나가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는걸요. 바깥의 삶에 아예 무지하진 않아요.”
천소여는 혜비를 통해 비원이란 사람을 소개받았다.
비원은 천소여의 이야기를 듣다니 잠시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리며 생각하다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소원을 들어드리지요.”
“대가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일이 잘 해결되고 나서.”
천소여는 기대에 차 물었다.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겠나?”
“먹으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약?”
“예. 자결로 위장해 궁 밖에 나가는 거지요.”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비원은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 건지, 어떻게 밖에서 깨어나게 될지를 설명한 다음 “아차.” 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그런데 소주. 그 약을 구하려면 시일이 좀 걸립니다.”
“어느 정도 걸리나?”
“음. 보름은 걸릴 겁니다.”
“보름이나?”
“어쩌면 스무 일이 걸릴지도 몰라요.”
스무 일 동안 이 모욕을 더 견뎌야 하나. 천소여는 눈앞이 깜깜해졌으나, 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안전하게 하려면 역시 스무 일은 걸릴 겁니다. 대신 확실한 약으로 구해 두지요.”
“더 빠르게는…….”
“위험합니다.”
비원은 실망하는 천소여에게 미안하단 듯 웃고서 말했다.
“오늘부터 스무일 뒤 자시에 동쪽 보서고에 꽃을 들고 서 있겠습니다. 제가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걸로 표시를 정하지요. 마마께서도 직접 안 오실 수도 있으니 이게 낫겠지요?”
천소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나도 사람을 보내겠네.”
총애를 못 받지만 그래도 후궁인 터라, 홀로 자시에 동쪽 보서고에 가기는 힘들었다.
“예. 그럼 그날, 꽃을 든 사람이 보따리를 들고 있을 겁니다. 그 보따리를 받아 가져간 다음 넉 달 뒤 축시에 드십시오.”
천소여는 힘없이 비틀거렸다. 스무 일을 기다리는 것도 힘든데. 여기서 넉 달을 더 버티라고?
“왜 넉 달을 기다려야 하는가?”
“믿을 만한 사람을 사서 시신으로 위장한 귀인을 잘 모셔야 하니까요. 이런저런 준비할 것도 많고, 또 사람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그래도 넉 달은…….”
“그러면 좀 더 빨리 준비되면 빨리 드셔도 된다고 언질을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네.”
천소여는 원웅과 부성 중 누구에게 심부름을 시킬까 고심하다가, 부성에게 맡기기로 했다.
“부성,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하면 안 돼. 우리 둘 다 죽을지도 몰라.”
비원은 넉 달이라 했으나, 그로부터 두 달째 되던 날. 뜻밖에도 비원이 ‘준비가 빨리 끝났다’며 약을 먹어도 된다고 연락해왔다.
* * *
천소여는 그날 밤. 일부러 심부름을 했던 부성을 남기고 모두 내보냈다.
축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가, 그녀는 보따리를 끌렀다.
안에는 과일처럼 생긴 게 들어 있었다.
“이걸 먹으면…….”
더는 그 비웃음을 안 받아도 된다. 천소여는 긴장했으나, 용기를 내어 과일을 집으려 했다.
그러나 막 천소여가 이걸 먹으려는데, 부성이 “잠시만요.” 하고 잡았다.
“왜?”
천소여가 묻자, 부성이 입술을 떨며 말했다.
“제가 먼저 조금 먹어볼게요, 소주.”
“어?”
“어차피 사람이 오기로 했다면서요. 제가 먼저 먹어볼게요, 소주. 먹었는데 많이 아파서 비명이 나오거나 할 수도 있잖아요. 소주는 아픈 걸 못 참으시니 분명 비명을 지를 텐데, 그러면 일을 그르치게 돼요. 어떤지 제가 먼저 확인해 볼게요.”
천소여가 주춤거리는 사이, 부성은 과일의 일부를 자른 다음 입안에 넣고 씹었다.
부성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천소여가 맥을 짚어 보니 정말로 맥이 잡히지 않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게다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어 보였다.
천소여는 용기를 내어서 남은 과일을 먹었다. 그리고 그걸 다 먹기 전. 심장에 강한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천소여는 황급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 부근이 아팠다.
그녀는 탁자를 짚고 고개를 젓고서, 남아 있는 과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쓰러져 있는…….
‘나잖아!’
자신의 모습을.
천소여는 황급히 다가가 목에 손을 대어 보았다. 맥이 없었다.
‘어떻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당황해 쩔쩔매고 있자니, 밖에서 “인시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소여는 당황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거울을 보고 소리 없은 비명을 토해냈다.
‘부성!’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부성이었다.
* * *
의원이 오고서야 천소여는 자신과 부성이 먹은 과일이 ‘용고’라는 극독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속은 것이다.
아니, 속은 게 맞나? 혹시 그 비원이란 자. 부성과 자신의 몸을 바꿔서 밖에 내보내주려 한 건 아닐까?
사가에서 데려온 측근 궁녀는 주인의 허락을 받으면 출궁할 수 있다. 비원이 의도한 게 이것일까?
천소여는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우선 자신의 몸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자신이 부성의 몸이 되었으니, 부성이 자신의 몸이 되었으리라 확신했다.
평생을 같이 산 부성을 흉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천소여는 부성처럼 행동하고 말하면서, 부성이 깨어나기를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몸이 깨어났다.
“누구? 왜 이 몸을 소주라 불러?”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몸’에게 천소여는 다급히 물으며 손을 잡았다.
“소주. 저 부성입니다. 생각나지 않으세요?”
부성이라면 이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소여는 심장이 무너지는 기분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부성은 죽었다. 그녀는 죽은 부성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