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내일이면……!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나가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나가면 되지, 왜 그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가는 거지? 게다가 하필 불똥은 왜 이 방향으로 튀는 거야?
“황후 마마. 알려드려야 할 게 있어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황후가 책을 설명하려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일말의 희망도 가지지 않도록 딱 잘라 알려주었다.
“전 학문과 사이가 좋지 않아요.”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
뭐야 저 사람. 눈 저렇게 뜨니까 무섭잖아.
“정말이에요. 이런 건 확실하게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황후는 책에서 손을 떼면서 물었다.
“사이가 좋아지려는 노력은? 해 보았고?”
“저는 했지요. 하지만 이런 건 쌍방이 노력해야 하잖아요, 마마. 저는 하는데 학문 쪽에서 저를 멀리하네요.”
“그렇군. 그러면 본궁이 중간에서 다리를 잘 놓아주면 되겠구나.”
이를 어쩌지.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황후가 궁 밖에 나갈 때까지 내내 공부만 하며 지내게 생겼다.
황후는 변명을 한다고 해서 술렁술렁 넘어가 줄 것 같지도 않은데!
“하기 싫은가 보구나.”
내가 입을 뻥긋거리자 황후가 실망한 것처럼 말했다.
“이 자리는 단순히 폐하와 첫 번째 줄에서 연애하는 자리가 아니다. 네 손으로 네 연적들을 살피고, 내명부 내의 수많은 궁인을 살피고, 장차 태어날 황손들과 태후 마마에 대한 일도 챙기고, 외명부도 챙기고, 황실 재산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사소하게는, 후궁들의 공부도 네가 맡아 가르쳐야 하지.”
아이고 머리야. 뭐라고?
“재산…… 많아요?”
그 이상은 머리에 들어가질 않아 멍하게 묻자, 황후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고장 난 것처럼.
잠시 그녀는 나를 그 상태로 바라보다가 이마를 손을 짚었다.
얼마나 그렇게 어색하게 있었을까.
황후가 이마에서 손을 떼더니, 철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루에 세 시진씩 공부시키려 했는데. 안 되겠다. 네 시진으로 늘리자.”
뭐라고! 그러면 그게 뭐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공부하고 밥 먹고 공부하고 밥 먹고 자는 수준이잖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나는 황급히 황후 마마에게 말했다.
“마마. 마마. 꼭 아셔야 하는 게 두 가지가 있어요.”
“말해보아라.”
“일단 하나. 왜 폐하가 절 황후로 삼을 거라 여기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에요. 폐하가 저는 황후감이 아니라 그랬어요.”
그 말에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심하게 하시는군.”
“어쨌든 그러니까 저는 이런 공부를 하지 않아도 돼요, 마마.”
그러나 황후는 어림없었다.
“그래도 해 두는 게 좋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네가 황후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 황귀비는 될 테니까. 네가 황귀비가 되었을 때 황후가 아프거나 일이 많거나 하면 옆에서 도와야지.”
이럴 수가! 소름이 돋는다. 황후는 떠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학문으로 고문할 마음이 틀림없었다.
“천빈.”
“네?”
“태어나면서 황후 재목인 사람은 없다.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고 연습을 하고,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면서 갖추어지는 것이지.”
심지어 황후는 굉장한 낙관론자였다.
나는 당황해서 괜히 사방을 살폈으나, 이 안에 날 도울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나는 평소 스스로도 절대로 거부하려고 하는 진실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마마. 꼭 아셔야 하는 두 번째를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잖아요.”
“……말해보아라.”
아아. 이 얘기는 정말 하기 싫은데…….
하지만 해야 한다. 아니면 정말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게 생겼으니.
나는 눈을 딱 감고 고백했다.
“저는 똥멍청이예요!”
“…….”
잠시 찬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옆쪽에서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옆을 보자 황후의 측근 궁녀인 영영이 정색한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자기가 웃고서 자기가 놀라 일부러 정색하는 게 틀림없었다.
평생 마음속으로도 부정하며 살아온 사실을 사이도 안 좋은 황후에게 고백해야 하는 내 심정은 참으로 괴로웠다.
나는 영혼이 사라진 것처럼 나를 쳐다보는 황후에게, 한숨을 내쉬고서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마마. 제가 날 때부터 이런 건 아니었어요. 제가 어릴 땐 조기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예요. 황후 마마도 아시죠, 조기 교육 중요성? 조기 교육의 조기가 먹는 조기가 아닌 건 아세요?”
“……알지.”
“네. 저는 조기도 못 먹었고 조기 교육도 못 받았어요. 황후 마마도 아시다시피 우리 연비 언니가 너무 똑똑해서 모두 그쪽만 신경을 썼거든요. 덕택에 저는 그 뭐야.”
천소여가 집에서 뭐 하고 지냈다더라? 아. 흙놀이.
“맨날 집에서 흙만 가지고 놀았답니다. 덕택에 몸은 아주 건강해졌는데요, 대가리, 가리, 머리에 뭘 집어넣지 못했어요.”
슬그머니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황후는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쨌든 내 말을 안 믿는 기색은 아니어서, 나는 안도하고 웃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이것들을 공부할 수 없어요. 마마.”
하지만 말이 끝나는 순간. 황후는 돌아서며 영영에게 지시했다.
“영영. 소학문 책부터 구해오너라.”
“네, 마마.”
뭐야? 소학문이 뭐야?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황후가 내 의문을 알아차리고 먼저 알려주었다.
“내가 열 살 때 익힌 서책이다.”
열 살! 지금 내 머리 수준을 열 살로 생각한단 건가!
“전 열 살 아닌데요, 마마.”
“내가 열 살 때 익혔지만 남들이 열 살 때 익히지 않으니 안심하거라. 보통은 열다섯 살 정도에 익힐 테니.”
“그건 수준이 너무 높을 거 같아요. 마마.”
자신감이 사라져 중얼거리자, 황후는 자기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천빈은 자존감이 높은 건지 낮은 건지 모르겠군. 어쨌든 학문은 놓지 않는 게 좋아. 그대가 황후가 안 되더라도 다음 황제의 친모가 될 사람인 건 확실하니까.”
“자신감이…….”
“염려 마라.”
“네?”
“싫어도 기억날 수밖에 없게 머리에 다 집어넣어 줄 테니.”
“!”
* * *
촛불이 흔들거릴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흔들거리는 듯하다. 그리고 내 몸도…….
“마마. 공부하면서 춤추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그래, 원웅아.”
원웅은 웃으면서 내 앞에 다듬은 대추 접시를 밀어주었다.
“이것 드시면서 하시고요.”
대추를 씹어 먹으면서 나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대추는 씹을수록 맛있는데 상황은 곱씹어도 쓰다.
황후는 내게 수업을 할 거란 예고를 하더니, 영영이 ‘소학문’이란 책을 가져오자마자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황후 마마께서 피곤하실 듯하니 보름 뒤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일부러 황후를 위하는 척 이렇게 말해 보았으나, 황후는 단호하게 끊어냈다.
“괜찮다.”
솔직하게 말해도 보았다.
“실은 지금 제가 하기 싫어서 그래요, 마마. 일주일 뒤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하지만 황후는 단호하게 또 끊어냈다.
“천빈. 서책. 펼치거라.”
그렇게 맛보기로 한 시진을 공부한 다음, 황후는 기진맥진한 내게 복습할 거리, 예습할 거리, 숙제 거리까지 내어주고 돌려보냈다.
덕택에 돌아와서도 쉬지 못하고 이렇게 책을 펼치고 있는 거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황제 폐하 납시오!”
문밖에서 오 공공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떡돌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공부하느라 바빠 멍하게 책상에 앉아 있기만 했더니, 떡돌이는 들어오다 말고서 웃음부터 터트렸다.
기운 없이 바라보자, 그는 “진짜구나.” 하고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서 곁에 와 앉았다.
“뭐가.”
“황후가 나갈 준비를 하면서 널 교육할 거라 했거든.”
“꼭 해야 해?”
“해서 나쁠 건 없지.”
“해서 좋을 것도 없어 보여.”
“아는 만큼 보는 세상도 넓어질 거다, 반숙아.”
“난 남들이 모르는 걸 이미 많이 알잖아. 그런데 꼭 이런 것도 배워야 해?”
“남들이 모르는 거?”
“단도로 목을 찌르면 사람이 죽기까지 얼마나 걸리나 같은 거.”
귀자가 떡돌이 앞에도 대추 접시를 놓아 주다가 날 향해 고개를 슬쩍 저어 보였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서 침상으로 엉거주춤하게 다가가 드러누웠다.
“떡돌아. 네가 황후한테 말 좀 잘해주면 안 돼?”
“뭐라고?”
“나는 이런 거 가르쳐도 못 알아먹는다고 해줘.”
“그건 잘 말해주는 게 아닌데. 흉보는 거지.”
내가 시들시들한 채 그를 쳐다보자, 떡돌이는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말했다.
“짐은 우리 반숙이가 잘할 거라 믿는다.”
손에 조금 묻은 먹물을 그의 이마에 그어 버렸다.
“나빠.”
“그런데 연금이가 네가 짐에게 보여주려고 무슨 춤을 연습 중이라던데.”
“다 잊어버렸어. 저 소학문을 머리에 집어넣고 나니 춤이 날아갔다고.”
* * *
그로부터 며칠간 나는 황후궁을 들락거리면서 공부하게 되었다.
나와 황후가 매일매일 만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또 제멋대로들 소설을 써서 수군거렸고, 원웅은 그 소문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소문이야 늘 이렇게도 나고 저렇게도 나는 것이기에 그리 신경 쓰이진 않는다.
어쨌든 그렇게 며칠을 네 시진씩 공부한 덕에 소학문을 반 정도 뗄 수 있었다.
후궁 기초 서적이라는 ‘양의억’ 어쩌고 하는 걸 익히는 데 걸린 시간을 떠올린다면 정말 큰 발전이었다.
심지어 ‘양의억’ 어쩌고는 다 읽자마자 홀라당 까먹었는데.
이번에 익히는 소학문은 황후가 매일 시험을 쳐서 그런가. 다 까먹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밀리고 밀렸던 내 책봉식 날도 하루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 * *
“오늘은 공부하러 안 가세요, 마마?”
아침에 일어나 씻자마자 다시 침상에 드러누웠더니, 부성이 오늘 내가 입을 옷을 꺼내 챙기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침상에서 발만 까딱거렸다.
“응. 오늘이랑 내일은 안 와도 된다고 했어.”
“다행이에요. 오늘은 잠도 푹 주무시면서 얼굴에 혈색도 좋게 해야죠.”
부성은 기뻐했고, 나도 기뻤다.
나는 제법 나온 배를 손으로 쓸어주면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하루 종일 잠만 자려고.”
하지만 막상 눈을 감으려니, 문득 내일 책봉식 절차가 떠올라 다시 눈이 번쩍 떠졌다.
“내일 준비는 완벽히 다 됐지?”
“그럼요. 예복도 준비됐고, 신발도 준비됐고, 책봉식을 할 장소도 먼지 한 톨 안 나오게 쓸고 닦고 했어요. 마마께서도 절차는 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응.”
기억나지 않을 리가 있나. 황후가 하루에 반 시진씩은 책봉식 연습을 시켰는데.
움직이는 속도부터 절하는 방법, 배 때문에 절하기 어렵다고 거절할 때 쓰는 말, 실수했을 때 처리하는 방법까지 죄다 배웠다.
“완벽하게 준비했어.”
“네. 다행이에요.”
부성은 히죽 웃고서 희망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내일이면 천비 마마가 되시는 거네요.”
* * *
“내일이면 낭자가 천비 마마가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