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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44화 (244/283)

##  244화. 왜 결론이……?

황후가 준비했던 아기 옷들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영영이 좀 화난 얼굴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황후는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영영은 작게 고했다.

“마마. 그자가 왔습니다.”

“그자?”

황후는 ‘그자’가 연금임을 알아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찌할까요?”

영영은 쫓아냈으면 하는 투로 물었다.

하지만 황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기 옷을 꽉 움켜쥐며 지시했다.

“들어오라 해라. 각오는 들어야지.”

“예.”

영영이 나가자, 잠시 뒤 태감 복장을 한 연금이 들어왔다.

황후는 그 옷차림을 힐긋 보고서 건조하게 미소지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다행이다. 평생 입어야 할 텐데.”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연금이 몇 걸음 다가와 청했다.

“함께 나가길 원합니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 황후는 일부러 띠었던 무서운 미소를 지우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창백한 그녀의 모습과 그 옆에 선 이의 손이 보였다.

황후는 거울 너머로 연금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함께 나가자고? 이제 와서?

“본궁이 우스워 보이느냐.”

연금은 굳게 대답했다.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본궁이 우스워 보이느냐.”

“마마를 행복하게 해드릴 겁니다.”

“본궁이. ……우스워 보이느냐 물었다.”

황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혹시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걸까? 연금은 황후의 서늘한 태도에 다짐하고 온 마음이 잠시 흔들렸으나,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계산하지도 분석하지도 말자. 그가 느낀 황후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는 다시 한번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후 마마는 우습지 않습니다. 마마는 제게 늘 어렵습니다. 그래서 답을 잘못 선택하였습니다.”

연금을 노려보던 황후의 눈동자가 그 말에 처음으로 흔들렸다.

“하여…… 이젠 제대로 선택하고 싶습니다. 제가 마마와 아기님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흔들리던 시선은 아기 이야기에 다시 매서워졌다.

그녀는 쥐고 있던 아기 옷을,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그 옷을 집어 던지며 눈가가 벌게져 외쳤다.

“어떻게! 이미 죽은 아이를 어떻게 지킨다고!”

“…….”

황후는 말을 잇지 못하는 연금을 보다가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지켜?

“너도 나도 우리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다 큰 우리 둘이서 그 작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다음 아기는 지키겠느냐.”

“그러니 다음 아기는 반드시 지키겠단 겁니다.”

“가라.”

황후는 돌아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설령 더이상 아이가 없다 해도.”

“…….”

“저는 황후 마마를 지킬 겁니다. 저와 함께 나가주시길 청합니다.”

그러나 이전이라면 바로 갔을 연금은, 오늘은 무슨 각오를 하고 온 건지 딱 버티고서 비키지 않았다.

황후는 그의 대답에, 서글프게 웃고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이미 상처가 났다. 이미 살이 패어 버렸어.”

“그 상처에 새살이 나게 할 겁니다.”

“새살이 나도 흉터로 남을 거다. 우리는 그걸 계속 보아야 해. 그걸 견디자고?”

“흉터로 남아도 고통스럽지 않을 겁니다.”

연금의 결연한 표정에 황후는 자꾸만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모습을 아기를 지우기 전에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황후가 아까보다는 진정된 듯하자, 연금은 천천히 다가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 손수건은 전에 황후가 준 손수건이었다. 잘 간직하고 보관한 덕에 좋은 향이 나고 있었다.

그가 이걸 계속 간직했을 줄은 몰랐던 황후는 놀라서 그와 손수건을 번갈아 보았다.

연금은 손수건으로 황후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다짐했다.

“이젠 절대로 마마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마마를 외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황후궁에서 마마를 시중드는 수많은 사람들 이상으로 제가 마마를 행복하게 해드릴 겁니다.”

“나는…… 자신이 없다. 널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마마가 제게 행복입니다. 제 손을 잡아주시는 거. 이미 마마께서 치르는 큰일입니다. 이후는 제가 할 겁니다.”

“내가 네게 부담이 될지도 몰라.”

“행복은 원래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황후는 연금을 울면서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배에 얼굴을 기대었다.

연금은 이전보다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부러질 듯 약해진 황후의 어깨를 가까스로 끌어안았다.

그때. 좋은 분위기를 뚫고 온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황후 마마께 내가 왔다 일러라!”

온원이 황제의 말 한마디로 인해 절벽에 몰린 채 황후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황후에게, 황제에게 싹싹 빌라고 말하러 온 거였다.

연금이 흠칫하자, 황후는 괜찮다고 그의 등을 쏟으면서 재차 외쳤다.

“몸이 좋지 않으니 돌아가시라 해라.”

그러고서 황후는 연금의 배에 계속 이마를 대고 있으려 했으나, 밖에서 쿠당탕탕 하는 소리와 ‘안 됩니다!’ ‘대인!’ 하는 비명이 연달아 터지자 연금을 놓아주었다.

연금은 세 걸음 뒤로 물러나 섰다.

잠시 뒤, 온원이 멋대로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나가십시오!”

호위가 온원을 끌어내리려 했으나, 황후의 부친이자 좌칙승상이다 보니 완전히 힘을 주어 끌어내기는 쉽지 않은 듯했다.

호위가 그래도 온원을 끌어내보려 하자, 황후는 되었다 손짓하고서 온원을 쏘아보았다.

호위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차갑게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황후 마마. 방금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그러다가 온원은 갑자기 연금을 쳐다보더니, 대번에 그가 황후의 연인이란 걸 눈치채고 표정이 험악해졌다.

“너! 너구나!”

잘생긴 태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연금의 수려한 외모뿐만 아니라 넓은 어깨, 우뚝한 키 등은 일반 태감들에게서는 잘 없는 체형이었다.

이런 사건이 없다면 그래도 ‘저렇게 근골이 좋은데 태감이라니 아깝군.’ 하고 넘길 텐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바로 연금이 황후의 연인이란 걸 알아챈 것이다

“오호라. 오호라. 네놈이구나. 네놈이었어!”

온원은 처음에는 삿대질하며 비웃듯 말하다가, 연금의 외모가 황제와 비슷하단 걸 알자 분노가 더욱 빠르게 솟아났다.

그는 황후의 책상에서 벼루를 집어 연금에게 던졌다.

“!”

연금은 놀라긴 했으나 옆으로 잘 피했다.

“이게? 피해?”

하지만 온원은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나서 이번엔 붓 통을 들어 올렸다.

황후는 황급히 온원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아버지! 뭐 하는 겁니까? 그만하세요!”

”그만하라고요? 그만하라고요? 이놈 때문에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인 줄 아십니까?“

“목소리가 큽니다.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기길 원치 않으시면 언성을 낮추세요.“

”이미 큰 문제가 생겼다. 폐하가 아까 내게 뭐라 하셨는지 아느냐? 네가 아이를 일부러 지웠다고 한다. 네가 자기 아이를 지웠다고, 적자를 지운 거라며 죄를 묻겠단다. 억울해서 부정하면 너는 사통한 게 되어 버리지. 우리는 궁지에 몰렸다. 이도 저도 못해. 이 상황에서 언성을 낮춰?“

온원은 다시 연금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놈. 이놈 때문에 우리 가문이 위험해졌다. 이놈 때문에 네가 이상해졌단 말이다!“

황후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절 이상하게 만드는 것도, 절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이 사람입니다.“

“네가…… 진짜 미쳤구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그만하고 돌아가세요. 저는 이 사람과 나갈 겁니다. 폐하께서도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지어주실 겁니다.”

“네가 나가면. 가문은? 널 여기까지 밀어준 우리 가문은?”

“그토록 원하는 아버지가 직접 후궁이 되시지요.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겁니다.”

“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온원은 더 참지 못하고 의자를 들더니, 그걸로 연금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하세요! 그만해!”

황후가 뒤에서 잡았으나, 온원은 그조차 뿌리쳤다.

“놔라! 내가 이놈을 죽여버려야 네가 제정신이 돌아올 거다!”

황후는 안 그래도 몸에 힘이 없던 터라, 온원을 뿌리치려 했지만 뒤로 밀려나 탁자에 부딪혀 굴렀다.

연금은 상대가 황후의 아빠란 이유로 참아주다가, 황후가 구르자 분노해서 더 참지 못하고 온원을 세게 밀쳐냈다.

“마마!”

달려간 연금이 황후를 감싸는 사이, 온원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침상에 부딪혀 멈추고는 더욱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연금을 아예 죽여버리겠단 각오로, 아까 자기가 집어 던진 벼루를 다시 집었다.

그 순간. 월요의 명령으로 근처를 맴돌던 황제의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와 온원의 팔목 잡았다.

“그만하시지요.”

“놓아라! 네놈은 뭐냐! 놓아라!”

“폐하의 그림자입니다.”

소리를 지르던 온원은 황제의 그림자란 이야기에 멈칫했다.

황후가 싸늘하게 충고했다.

“제가 목소리를 낮추라 하지 않았습니까.”

* * *

“좌칙승상이 황후가 유산하자 미쳤나 봅니다.”

거울을 보며 왜가리 춤을 연습하는데, 귀자가 난데없이 이상한 말을 한다.

“왜?”

“아까 낮에 황후 마마 방에 가서 난동을 부리다가 끌려갔답니다.”

하지만 듣고 나니 이상한 건 좌칙승상이었다. 귀자가 아니라.

“진짜? 아니, 왜 그랬대?”

“모르지요. 폐하께서 안 그래도 유산해서 몸이 약해진 황후 마마를 괴롭혔다고 화가 나서 삭탈관직시키라 했답니다.”

“와.”

바로 삭탈관직이라니. 떡돌이. 벼르고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제일 큰 문젯거리인 온원이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고 승상 자리에서 나갔으니, 온씨 가문이 여전히 건재해도 황후에게 당장 문제가 생기진 않겠네.

“떡돌이도 마음이 편해졌겠어. 그럼 난 다시 춤 연습해야지.”

“그게 춤입니까……?”

그런데 저녁 무렵. 뜻밖에도 황후궁 궁녀인 영영이 찾아와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천빈 마마와 식사하고 싶다 하십니다.”

부성과 원웅은 내 배를 보더니 얼굴이 파래졌다. 안 갔으면 하는 표정들이었다.

영영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는 불쾌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황후 마마와 함께 식사하다가 일이 생기면 모두 다 황후 마마의 탓이 됩니다. 황후 마마께서 설마 불러놓고 이상한 걸 먹이시겠습니까.”

그건 그렇기에 나는 영영을 따라 황후궁에 갔다.

좌칙승상이 난동을 부리고 갔다더니. 황후는 의외로 의연한 모습으로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탁상에는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데, 태아에게 해가 될 만한 재료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신경을 써 주는 건가…… 생각하면서 꾸벅 인사를 올리자, 황후가 내게 앉으라 눈짓했다.

얼른 앉자, 황후는 바로 말을 꺼냈다.

“내가 나가면 폐하께선 천빈, 그대를 황후로 삼으시겠지.”

나는 음식 종류를 살피다가 놀라 되물었다.

“나가시게요?”

결국 그렇게 됐나? 그거 때문에 날 부른 건가?

황후는 대답 대신 옆에 선 자기 궁녀를 불렀다.

“영영.”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영영이 커다란 보따리를 가져와 내 옆에 내려놓았다. 뭐지?

“풀어보아라.”

시키는 대로 일단 슬그머니 풀어 보자, 안에서 수북하게 쌓인 책이 나왔다.

“이게 뭐예요?”

놀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벗어날 거다. 하지만 바로 나가진 않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게 준비물이에요?”

“그래.”

그렇구나. 이게 준비물이구나. 나가면서 돈과 패물 대신 책을 챙기시다니. 멋지긴 한데 이해는 안 가는 분이네.

“근데 준비물을 왜 저한테 주시는지…….”

“솔직히 천빈. 그대가 황후가 된다면, 나는 전 황후로서, 이 나라 백성으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네?”

“그래서 나가기 전까지, 내가 그대에게 황후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교육시키고 나가려 한다. 이게 황후로서, 내가 마지막에 준비해야 할 거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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