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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43화 (243/283)

##  243화. 흑심도 사심도 야심도 없다

나는 떡돌이의 손을 누르며 항의했다.

“왜 질문을 해놓고 말을 막아?”

하지만 손은 계속 잡고 있자. 좋으니까.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며 부탁했다.

“대답 좀 온건하게 해다오.”

“알았어. 나는 그냥 목을 뚝-.”

뚝 소리가 떡돌이 입에서 들린다. 뭐 씹었나. 설마 이 씹었나.

“똑 부러뜨리는 건 과격한 거고 뚝 부러뜨리는 건 온건한 거냐.”

자꾸 목 부러뜨린다고 해서 화났나 봐. 안 되지.

“어휴 농담을 못 하겠네. 네가 왜 네 목을 부러뜨려? 이렇게 예쁜데.”

나는 얼른 떡돌이의 예쁜 목을 살살 쓸어주면서 호호 부는 시늉을 해주었다.

떡돌이는 그래도 코웃음을 쳤다.

“그 예쁜 목을 두 번이나 부러뜨리겠다고 말한 분이 누구냐.”

그러고는 내 배에 손을 얹더니, 계란이에게 이 일을 고자질한다.

“계란아. 네 엄마가 벌써부터 이렇게 말을 마구 바꿔댄다. 사기꾼이다 사기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혀 반대인 감정 두 가지가 들었다. 하나는 그의 허벅지를 찰싹 두드리고서 꾸짖고 싶은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떡돌씨. 떡돌아. 나라면 너랑 나갔을 거야.”

달래주고 싶은 마음.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지, 떡돌이가 흠칫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쥐고서 의지가 될 만큼 멋지게 말해주었다.

“나는 너랑 갔을 거야. 네가 널 못 믿어도 내가 널 믿고 데려갔을 거야. 나는 강하거든. 아주 많이.”

“!”

떡돌이는 내 말에 입을 벌리고 나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갑자기 너무 멋지게 보이기라도 하나?

맞다. 나는 멋진 악적이다. 떡돌이는 연약한 샌님이지. 무공은 익혔지만.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너는 연금이가 아니야.”

어쨌든 마지막까지 그를 위로해주자, 떡돌이는 잠시 나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두 팔을 벌려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짐은 가끔 무섭다.”

“뭐가.”

“이렇게 내 편을 들어주는 네가, 어느 순간 마음이 식으면. 그러면 짐의 편은 누가 있을까.”

“뭐래. 태후 마마.”

“…….”

“내가 또 분위기 깬 거야?”

떡돌이는 나를 타박하는 대신, 웃으면서 내 뺨에 자기 뺨을 비볐다.

“우리 반숙이. 짐의 반숙이.”

떡돌이는 머리가 좋아. 머리가 좋아서 생각도 많아.

그래서 나는 떡돌이가 뭘 생각하고 사는 건지, 가끔 오히려 이해가 안 가.

그렇지만…… 그래도 얘가 좋아.

하지만 이러는 걸 보니, 떡돌이가 날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걱정은 좀 된다.

난 개원이가 날 죽여도 꿋꿋하게 살았는데. 떡돌이는 반대 상황이 되면 꿋꿋하지 못할 거 같아서.

“내가 더 오래 살아야겠다.”

“응?”

“넌 몸도 마음도 떡 같아서.”

“?”

“휴우. 연약해 연약해.”

떡돌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연약하다는데 뭐가 좋다고. 어휴 근데 이뻐. 이쁘니까 뽀뽀나 해주자.

* * *

연금은 우두커니 서서 작은 연못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폐하의 말처럼 내가 너무 충동적으로 굴었던 걸까.

사실 그는 뭐가 옳은지 잘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연금은 인생에서 스스로 뭘 결정해 본 적이 드물었다.

그는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다 온전히 자신은 물론 황후의 일까지 결정해야 할 상황이 되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위쪽에서 “이런 얼굴이구나.”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쳐다보니, 담벼락에 천빈이 앉아 있었다.

“천빈 마마?”

놀란 연금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부르자, 천빈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어, 신경 쓰지 마. 그냥 좀 구경하러 왔어.”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연금은 황당해서 입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여기 오셔도 됩니까?”

“오지 말란 말은 없어서.”

그걸 말로 해야 아는 건가! 연금은 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반면 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 너랑 황후 마마 일로 떡, 폐하가 걱정하고 있다. 알아?”

“…….”

“둘이서 지지고 볶아대니까 폐하가 덩달아 심란한가 봐.”

천빈이 거침없는 표현에, 연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폐하를 위해 소인을 꾸짖으러 오셨습니까. 참으로 고귀한 사랑이로군요.”

연금은 그 해맑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다가, 뒤늦게 아차 싶어 천빈을 보았다. 이건 천빈을 탓할 게 아닌데.

“하하. 쑥스럽게.”

하지만 천빈은 그가 돌려서 빈정거린 걸 전혀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돌려 말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구나. 연금은 뒤늦은 깨달음에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못 알아들어서 다행이겠지. 이런 상황에서는.

그러다 연금은 천빈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서 힘없이 물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닮긴 닮았구나 싶어서. 폐하랑.”

“그러니 뽑힌 거겠지요.”

“응. 근데 애매하게 폐하가 더 잘생긴 거 같아.”

연금의 이마에 다시 파랗게 힘줄이 올라왔다.

한없이 내려갔던 기분이 천빈과 대화를 나누자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시비를 걸러 온 건가? 연금은 화를 누르며 천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천빈은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밝게 물었다.

“내가 뭐 보여줄까?”

그 말에, 연금은 천빈이 본인의 말과 달리 그냥 온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온 거였다. 지지부진한 상황에 조언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연금은 순순히 대답했다.

“소신에게 깨달음을 주시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경청하겠습니다.”

“그럼 봐봐.”

천빈은 연금의 대답을 듣자, 빼지 않고 목을 왜가리처럼 앞뒤로 꾸벅거렸다.

“이거 봐.”

연금은 충고나 조언, 혹은 경고가 나오리라 여기고 집중해서 천빈을 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저게 뭐지?

그는 멍하게 천빈의 목짓을 바라보다가 결국 묻고 말았다.

“무슨 뜻이신지…… 소신의 머리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천빈이 ‘이걸 모르겠어?’ 하는 얼굴로 알려주었다.

“아, 이거. 왜가리 흉내.”

“예?”

“아니, 너는 폐하랑 오래 지냈잖아. 이거 보면 폐하가 좋아하실까?”

연금은 얼빠진 채 천빈을 멍하게 보다가, 설마 설마 싶어서 재차 물어보았다.

“혹시…… 왜 오셨습니까?”

“아. 구경하러.”

진심이었나! 진짜로 그냥 구경하러 온 거였다고!

천빈이 무언가 경고나 충고, 조언, 혹은 협박을 하러 왔다 짐작한 연금은 충격을 받아 휘청였다.

뒤늦게 그는 분노가 솟았다. 사람이 심란해 죽겠는데. 진짜로 구경하러 온 거였다고!

그는 화가 나서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담벼락에 앉아 있던 천빈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마마! 뛰지 마세요!’ 하는 태감의 목소리…….

연금은 담벼락을 뜨악해 올려다보다가 이마를 짚고 나무에 기대섰다.

아니, 세상에 뭐 저런 사람이. 저 사람은 눈치란 게 없는 건가?

궁전에서 살면 높은 자리에 있든 낮은 자리에 있든 상대의 눈치를 읽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게 기본인데. 세상에 어떻게…….

“!”

그러다 연금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저런 사람이라 폐하께서 마음을 주셨는지도.’

그가 방금 생각한 것처럼, 이 궁전 안의 사람들은 신분이 높든 낮든 모두 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게 나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궁전이 굴러가는 거니까.

이 궁전 사람들이 모두 다 천빈 같다면 그 나라는 얼마 못 가 망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보폭으로 걸어가는 궁전 안에서, 혼자 저렇게 뛰다가 기다가 하기는 정말 힘들었다.

‘흑심도 사심도 야심도 없는 사람.’

연금은 멍하게 연못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천빈이 의도하고 간 건 절대로 아니겠지만, 그 태연한 태도에 불현듯 자신과 황후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천빈 정도로 생각을 비울 순 없겠지만…… 나나 황후 마마, 둘 다 너무 머리만 굴렸다.’

황후나 그는 닮았기에 서로에게 끌렸지만, 닮았기에 둘 다 제자리에 머물려고만 했다.

딱 한 번 선을 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그 후에는 도로 멈춰 버렸으니, 일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선을 넘지 말던가, 섬을 넘었으면 계속 앞으로 가야 했는데.

황후는 지금 충격과 증오심으로 서로를 망치는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가 태감이 되어 황후 곁에 남아봐야,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그가 황후를 위해 궁전에 남길 권한 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선택이었으나, 황후가 원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후는 이를 거절하고 속내를 말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 역시 온전한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는 먼 미래에 황후가 후회할 걸 염려해 황후를 밀어낼 게 아니라, 다 함께 행복해질 거란 각오로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가야 했다.

왜 처음부터 불행만 각오하고 있었을까. 그 앞에 놓인 게 뭔지도 몰랐으면서.

‘모시고 나가자. 나가서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자.’

연금은 굳게 다짐하고서, 그를 지키고 있는 그림자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황후 마마를 뵙고 싶습니다.”

* * *

“좌칙승상은 남으라.”

회의가 끝나고 대신들이 나가려 할 즈음. 황제가 한 사람을 지목했다.

아마 황후의 유산 문제겠지. 대신들은 속으로 생각하며 자기들끼리 어전을 빠져나갔다.

온원은 무거운 얼굴로 황제 쪽을 보고 섰다.

그는 황제가 이 일을 묻으려 할지, 아니면 유산한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님을 밝히려 할지 짐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황제가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며 이 일을 묻을까?

아니면 ‘황후가 유산한 아이는 짐의 아이가 아니다’라며, 황후와 그 시기에 동침한 적이 없다고 밝히려 들까?

황제가 아이를 지우면 황후 자리에 있게 해주겠다고 한 건 어디까지나 조용히 아이를 지울 경우이지, 이렇게 떠들썩하게 지울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황제는 공식 시침 기록이 없는 걸 내세우겠지.’

그러면 이쪽은 낮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한 시기에 황제가 황후 방에 오래 몇 번 머물렀단 걸 내세우자.

황제도 이 일로 체면이 상하긴 싫으니, 일을 더 들쑤시는 대신 묻고 가려 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철저히 대비해야겠지만.

온원은 할 말을 고르며, 허리를 숙이고 긴장감을 감추었다.

“황후의 궁녀가 홍우약을 구입했더군.”

그런데 황제가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온원은 순간 당황해 황제를 쳐다보았다.

“예?”

홍우약은 임신 초기에 아이를 지우는 약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가 화를 누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후가 짐의 적자를 지워버리다니. 참으로 안타까워. 이렇게 불충한 일이 있을까.”

온원은 멍하게 황제를 보다가 입을 벌렸다.

설마……! 처음부터 그 아이가 자신의 친자인지 아닌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었나!

온원은 얼굴이 파래졌다.

‘설마 황제가 이렇게 나올 줄은!’

황제는 아이가 친자인지 아닌지를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는 황손을 스스로 없앤 게 황후란 걸 알리며, 이를 온씨 가문 탓으로 돌리려는 거였다.

“황후가 주기적으로 어의에게 진맥 받는 걸 거부하기에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 그런데 설마 아이를 지우려 했을 줄이야. 황후가 최근에 승상을 만났던데. 혹시…… 승상이 사주한 일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선 온원을 향해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설마 정말인가?”

온원은 멍하게 있다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폐하, 폐하! 그 아이는……!”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황손이라고 주장하면, 황후는 황손을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그 아이가 황손이 아니라 주장하면, 황후는 다른 사내와 사통한 게 되어버린다.

사방이 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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