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황후가 다시 제안하는 거래
“…….”
“왜 그러십니까, 마마?”
내가 차를 마시려다가 인상을 찡그리고서 찻잔을 멀리하자, 부성이 의아해 물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
나는 찻물을 그대로 흙에 부어버렸다.
“독, 독이 든 건가요?”
부성은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야 독을 먹어도 어찌어찌 견딜 수 있지만 계란이는 힘들 테니까.
부성과 원웅은 창백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겁이 나는 듯했다.
귀자도 인상을 찡그리고서 상황을 보다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무부에서 찻잎을 가져온 사람은 누군지, 담당자는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방으로 돌아가 긴 의자에 편안히 앉았다.
전에 연금이 다녀간 지도 어느새 보름 정도 지났다.
그리고 보름 정도 지났을 뿐인데, 그새 배는 더 무거워졌다.
뭐랄까. 배의 무게만으로 치면 아주 무겁진 않은데, 이게 몸에 달려 있는 데다 워낙 약하단 걸 알다 보니 느낌상 더 무겁게 여겨진다고 해야 할까.
차라리 배에 공을 묶고 다니면 그냥 편히 움직이기라도 할 텐데.
내가 조금만 세게 움직여도 계란이가 배 속에서 어지러울 거란 생각을 하면 성질대로 행동하기 힘들었다.
내 친부모님은 이렇게 고생해서 날 낳아 놓고 대체 왜 버린 건지 모르겠다.
“나 같으면 억울해서라도 옆구리에 끼고 다닐 텐데.”
“네? 뭐가요 마마?”
“아기 말이야.”
“예? 아기님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신다고요? 안 돼요 마마!”
“왜?”
“목이 부러지니까요!”
“사람 목은 그렇게 쉽게 안 부러져, 부성아.”
“으악 마마! 절대 절대 절대로 옆구리에 아기님을 끼고 다니지 마세요. 아셨죠? 아기님 목은 연약해요!”
“그래?”
“예!”
“…….”
이거 참. 어렵네. 내가 아기를 본 적이 있어야지. 아니, 본 적은 있지만 들어본 적은 없으니까.
내가 떨떠름하게 배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원웅이 차 대신 시원한 과일즙 음료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마마. 유모를 고용할 거잖아요. 유모가 이것저것 다 알려줄 거예요.”
“꼭 유모가 있어야 해?”
“그럼요. 마마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고 아기를 길러본 적이 없잖아요. 꼭 필요해요.”
“그런가.”
배를 손으로 문지르자, 부성도 얼른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곧 책봉식인데. 떨리지 않으세요 마마?”
“응. 떨리지 않아. 나는 아주 담대하거든.”
“대단하세요 마마. 전 제가 다 떨려요.”
“저도요. 마마는 타고나길 아주 마음이 넓으신 게 분명해요.”
“암!”
나는 흐뭇하게 웃고서 다시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우리 비연궁은 책봉식 준비로 아주 바쁘다.
떡돌이가 아이를 낳기 전에, 배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얼른 책봉식을 치르자고 재촉하기 시작해서 그렇다.
‘왜 그렇게 재촉하냐’고 떡돌이에게 물어봤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야 아이를 낳고 나서 한 번 더 품계를 올릴 게 아니냐.”
날 황후로 만들 마음은 없다더니. 그래도 귀비까지 만들 생각은 있나 보다.
이번에 천비가 되고 나면 다음에 남은 건 귀비 아닌가.
어쨌든 품계야 높아져서 나쁠 건 없기에, 나도 그러자고 했고, 덕택에 비연궁 궁인들은 몹시 바쁘다.
나는 여전히 할 게 없지만. 요즘은 배가 무거워서 수련도 운기조식 위주에 간단히 몸 푸는 정도만 하니까.
그런데 하품을 하고 있자니, 원웅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마마.”
“응?”
“요즘 황후 마마께서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황후 마마가? 왜?”
“내무부에서 들었는데요.”
“응.”
“황후 마마께서 타가시는 물품이 마마랑 거의 흡사하대요.”
“응?”
“마마께선 복중 아기씨께 해로운 걸 멀리하고 도움 될 만한 걸 많이 드시잖아요. 회임하셨으니까요. 그런데 회임하지 않은 황후 마마는 왜 굳이 마마와 비슷하게 드실까요?”
“…….”
이거 참. 진실을 알지만 말을 할 수가 없으니 갑갑하구먼.
왜긴 왜겠어. 황후도 나랑 똑같이 회임 중이니 그렇지.
하지만……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온원이 황후 아이를 황제 아이로 만들려 하는 바람에, 떡돌이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잖아.
그러고 나서 왜 소식이 없을까?
* * *
황제는 보름을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보름이 지났다. 황제가 대답을 들으러 올 것이다.
황후는 긴 의자에 앉아 의미 없이 수를 놓다가, 창밖을 힐긋 보고는 수틀을 내려놓으며 지시했다.
“치우거라. 오늘은 폐하께서 오실 거다.”
영영은 수틀을 치우며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곁에서 지낸 영영조차 지금 황후의 속내를 알 길이 없었다.
연금이 다녀간 후. 황후는 처음에는 슬퍼하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다가, 그다음에는 아예 기진맥진해서 지냈다.
영영이 위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후궁들이 문안을 올 때면, 황후는 이전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가 태연히 문안을 받았다.
하지만 후궁들이 돌아가고 홀로 남으면 다시 괴로워하며 웅크리는 것이다.
영영은 황후가 마음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단 걸 알았지만, 도움이 될 수 없어 안타까웠다.
평소와 달리 황후가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녀가 영영과 연금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지, 아니면 황제의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열린 문 너머로 황제가 앉은 가마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영영은 수틀을 옆에 선 하급 궁녀에게 건넸다.
“제자리에 가져다 두어라.”
“네, 소저.”
문앞에 시립하고 있자, 곧 황제가 탄 가마가 안으로 들어왔고, 앞에 선 오원요가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영영은 혓바닥이 간지러워져 침을 꿀꺽 삼켰다. 황후가 홀로 고민한 게 무엇이든, 오늘 그 결론이 나올 것이다.
* * *
황후는 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서 주먹을 연거푸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긴장으로 배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자신의 제안을 황제가 받아들일지, 제대로 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하지만 자신과 아이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 용기를 가지고 해치워야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반쯤 넋이 나간 채 서 있자니, 마침내 문이 열리고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면사를 쓰지 않고 들어오는 황제는 겉에서부터 표정이 굳어 있어서, 황후는 조금 더 초조해졌다.
그래도 표정을 철저하게 관리한 채 그녀는 황제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앉았다.
황제는 황후가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은. 정했소?”
“정하였습니다.”
“어떻게 할 거요?”
“여러모로 생각해보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더군요.”
“…….”
“연금은 저와 아이를 원하지 않으니, 그에겐 가지 않겠습니다.”
“…….”
“제 아이도 폐하의 아이로 인정해 주시지요.”
월요는 ‘황후가 아이를 유산시키기로 한 건가?’ 생각하다가, 뜻밖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황후의 반응을 여러모로 예상해 보긴 했으나,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연금의 아이를, 내 아이로 인정해 달라?”
월요는 황후를 빤히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건 좌칙승상이 요구한 바와 똑같지 않나?”
“다릅니다. 아버지는 이 아이를 폐하 몰래 적자로 만들고자 하시는 거고, 신첩은 폐하의 허락 아래에 데리고 있으려는 거니까요.”
월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짐은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아이가 적출로서의 권한을 누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데리고 있게만 해 주세요.”
월요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황후의 대답을 예상해보고 그에 따라 할 말을 골라보았지만 이건…… 이건 정말 의외였다.
월요가 예상한 것 중 가장 최악의 행보는, 온원이 황후가 아이를 유산시키게 하고는, 그걸 천빈의 탓으로 돌릴지도 모른단 거였다.
“황후는…… 그런 요구를 짐이 들어줄 거라 기대했나?”
월요는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다.
“아니요.”
황후는 고요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어째서?”
“그래야 신첩도 천빈의 약점과 연금에 대한 일을 평생 비밀로 지키고 살아갈 테니까요.”
“!”
월요는 천빈의 약점이란 말에 놀랐으나,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한 시선을 받으며 황후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장공주 전하께서 죽었다 깨어난 뒤 심장이 느려지듯, 천빈도 죽었다 깨어난 뒤 심장이 느려졌습니다. 장공주 전하께선 결국 미치셨지요. 사람들은 천빈도 장공주 전하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여길 겁니다.”
“!”
“원래 천소여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직접 보니 무공 솜씨가 아주 출중하더군요. 폐하께선 천년비란 무림인에 대해 조사를 지시하셨지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두 사람. 혹시 동일인은 아닐까요?”
“…….”
“천년비란 무림인. 악명이 자자하던데요, 폐하. 폐하의 후궁이 그런 악귀란 게 알려지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천빈의 평판은 얼마나 떨어질까요?”
월요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황후는 예전에 그가 한 것과 비슷한 추측을 하는 듯했다.
천소여가 입궁 전에 천년비란 가명으로 무림에서 활동했다고.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황후는 천년비가 미칠 가능성까지 하나 더 제안하고 있었다.
“무공을 전혀 모르던 장공주 전하도 미치고 나니 그렇게 위험해지셨는데. 무공을 익힌 데다 원래도 악명 높던 천빈은 미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할까요, 폐하. 그렇게 위험한 사람을 대신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두고 볼까요?”
황후는 고개를 젓고서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아니요. 매일같이 상소문이 빗발치겠지요. 천빈을 곁에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폐하는 암군이란 소리를 들을 겁니다.”
월요가 가볍게 웃었다.
“황후가 짐을 협박하려 들 줄은 몰랐는데.”
“온 귀인의 아이는 이미 받아주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아이라고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온 귀인은 귀인이었고 황후는 황후요. 이유를 정말 모르시오?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요?”
“폐하께선 원치 않는 여인과 동침하는 게 싫다면서, 다른 사내를 후궁들에게 대신 보내셨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사내를 폐하로 위장해 보내셨습니다. 동침은 연금에게 시키시면서,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는 책임지지 않으시겠다고요? 그런 행동을 하실 때는, 그 사내가 낳은 아이까지 책임질 각오를 하신 게 아닌가요?”
“그래서 온 귀인까진 책임을 지려 했소. 하지만 황후에겐 짐이 연금을 보내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보내신 건 아니지만, 연금이 아직 폐하의 대역일 때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도 폐하의 아이로 대해주셔야 합니다.”
월요는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고서 황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연금이 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의로 동침한 황후의 아이까지 짐이 품어야 한다? 황손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적출로 대해야 한다?”
황후는 보름 동안 굳게 다짐한 듯,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출로서의 권한까지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이유를 들어 적출로서의 권한을 박탈해 가셔도 괜찮습니다. 거기까진 신첩도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온원은-.”
“신첩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이상 바라지 않게 막겠습니다.”
“…….”
“여기까지가 신첩이 양보하는 선입니다. 폐하께서도 한 발은 뒤로 양보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신첩도 죽기 살기로 천빈을 끌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자꾸 천빈을 건드리는지 모르겠는데.”
“천빈이 폐하의 약점이니까요. 제가 폐하 때문에 천빈을 해치게 된다면, 이는 모두 폐하의 탓입니다.”
황후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표정으로 월요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