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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39화 (239/283)

##  239화. 연금의 선택

승언은 황제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거다. 사자 친왕이 평소와 상태가 다르다는 것.

“황후 이야기가 황제 이야기로 번져나가는 걸 두려워하다 보니, 과하게 천빈의 입을 다물게 하려던 거겠지.”

승언은 자기 형제도 아닌데 충격에 빠졌다. 월요 황제의 이복형제자매 중 가장 사이가 좋은 게 사자 친왕이었다.

그런데 사자 친왕이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

“폐하…….”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닐 거다. 아직은.”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오히려 오늘 같은 실수를 안 할 사람이다.”

월요 황제는 사자 친왕이 능구렁이처럼 다니지만, 형제 중 가장 머리가 좋단 걸 알았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실수를 한 거겠지.”

하지만 흔들렸단 것만으로도 월요 황제에겐 꽤 충격이 큰 듯, 그는 이후로 돌아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승언은 저도 모르게 비연궁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다.

* * *

“폐하를 위로해 달라고?”

태후 마마가 보내준 석류를 까먹고 있는데, 뜬금없이 승언이 찾아와 이렇게 부탁했다.

“왜?”

의아해서 묻자, 승언은 주저하다 털어놓았다.

“폐하께서 편하게 마음을 여는 분은 천빈 마마뿐이시니까요.”

“그래?”

“예.”

“하지만…… 난 지금 좀 바쁜데.”

“예? 뭐 하신다고요?”

“석류 맛있어.”

“!”

“그대도 줄까?”

새 석류를 하나 내미는데, 승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석류 싫어하나.

“지금 이깟 석류가 폐하보다 더 중요하단 겁니까?”

“폐하도 국무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만 국무를 더 가까이 하시잖아.”

“!”

“나도 폐하를 더 사랑하지만 석류를 더 가까이할 뿐이야.”

승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왜 이럴 때만 말을 잘 하시냐고요!”

* * *

승언이 엄청난 속도로 석류를 까서 놓아주는 바람에, 결국 석류를 빨리 먹고 비연궁 밖으로 나가야 했다.

“느긋하게 먹고 싶었는데.”

“나중에 드세요. 늘 드시고 계시잖아요. 폐하와 전하가 싸우는 도중에도 내내 드시고 계셨고요.”

“우리 아가가 먹고 싶어해서 그래.”

“아기님이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계실 겁니다.”

무어라 더 말하려는데, 승언이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긴. 마마께서 이리 나오니 전하 속내를 빨리 발견할 수 있던 거겠지만요.”

“사자 친왕 전하 말이야? 본인이 폐하를 좋아한 게 아니라고 질색하는데. 그만 믿어주지그래?”

“…….”

떠드는 사이에 어느새 떡돌이가 머무는 심궁 어실 앞에 도착했다.

오원요는 옥수수 담은 접시를 들고 들어가려다 우리를 보더니, 승언이에게 놀라 물었다.

“옥수수 찐 거 알고 마마를 모셔왔나?”

“그런 거야 승언아?”

반색해서 묻자, 승언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쪼그려 앉았다.

“저 먹을거리 내가 진짜!”

“?”

오원요는 승언을 이상하게 내려다보면서도 내게 옥수수 접시를 건네며 부탁했다.

“마마께서 들고 들어가셔서 폐하와 드시지요. 제가 가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실 겁니다.”

“본궁도 같이 먹어도 되나?”

“하하. 폐하께 여쭈어보시지요. 하지만 당연히 괜찮다고 하실 겁니다.”

“응. 고맙소 오 공공.”

나는 신이 나서 옥수수 접시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떡돌이는 의자에 똑바로 안 앉고 옆으로 앉아 멍하게 천장을 보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웃으면서 한 손을 뻗었다.

“밖에서 네 목소리가 들리기에 네가 올 줄 알았다.”

“자세 멋있네.”

“생각할 게 있어서.”

“그 자세로 있으면 생각이 더 잘 돼?”

“시도해 본 거지.”

떡돌이가 의자를 잡고 몸을 일으킨다.

나는 접시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도 되냐고 묻기도 전에 떡돌이는 바로 말했다.

“짐은 입맛이 없으니 계란이랑 나누어 먹거라.”

“이런. 정말이네.”

“뭐가 말이냐?”

“승언이가 폐하를 위로해 달라고 찾아왔거든. 왜 저러나 했는데. 정말로 기운이 없어 보여서.”

“승언이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자, 떡돌이가 제대로 앉더니 픽 웃었다.

“승언이 이 자식. 겉으론 내색하지 않더니. 속으로는 내 걱정을 많이 하는군. 부끄럼쟁인가.”

“?”

“라고 생각하는 웃음이네.”

떡돌이 미소를 해석해주었더니. 그가 입을 벌리고 다물지를 못하다 끙 소리를 내며 항의했다.

“남의 표정을 그렇게 이상하게 해석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내 해석이 이상했어?”

떡돌이는 빙그레 웃더니, 옥수수 알을 빼내 내 손에 쥐여 주면서 툴툴거렸다.

“승언이 이 자식. 겉으론 걱정하는 척하더니. 속으론 짐에게 화가 났나.”

내 말을 뒤집어 따라 하는 모양새가 귀여워서 웃자, 그는 옥수수 알을 하나하나 내 입에 모이처럼 넣어주면서 따라 웃었다.

“우리 반숙이는 이럴 때 보면 새 같다.”

“평소엔 뭐 같은데?”

“곰.”

곰?

“왜?”

“귀엽게 생겼는데 사실은 아주 강해서?”

좋은 건가? 칭찬인가? 떡돌이가 ‘곰’이라고 말할 때 풋 웃는 걸 보니 다른 의미도 있어 보이는데.

어쨌든 나도 곰이 좋기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곰 좋지.”

내가 이렇게 시원스레 나오자, 떡돌이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곧 크게 웃으면서 남은 옥수수를 알알이 뜯어주었다.

그러고서 둘이서 옥수수알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였다.

“폐하.”

내게 옥수수를 들려 보낸 오원요가 문밖에서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오원요.”

떡돌이가 옥수수를 먹다 말고서 묻자, 곧 오원요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꾸벅 허리를 숙였다 펴고서 말했다.

“폐하. 말씀하신…….”

오원요는 뒷말을 흐렸다. 하지만 떡돌이는 바로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가보라 신호했다.

멀뚱히 그 모습을 보자, 떡돌이가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옥수수는 비연궁에 가서 먹거라. 괜찮지?”

“그러지 뭐.”

고개를 끄덕이고서 접시를 받고서 밖으로 나가는데, 문 앞에 예전에 떡돌이처럼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삿갓을 쓴 사람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기척이라 힐긋 쳐다보자, 삿갓을 쓴 사람이 내 쪽으로 꾸벅 인사를 올렸다. 내 얼굴을 아는 것처럼.

‘누구지?’

* * *

천소여가 멀어지자, 오원요를 따라 들어온 삿갓 쓴 사내는 월요의 앞에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폐하.”

월요가 일어나라 지시하자, 사내는 몸을 일으키고서 삿갓과 면사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월요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황후 일로 불려온 연금이었다.

월요는 연금에게 앉으라 손짓하며 오원요에게 지시했다.

“황후를 데려오라.”

황후 이야기에 연금이 몸을 움찔 떨었다. 태도를 보니,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황후가 여기에 올 때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미리 사태를 알려주자 싶어서, 월요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후가 네 아이를 회임했다.”

연금은 멀뚱히 앉아 있다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역시. 예상대로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월요는 연금에게 다시 앉으라 손짓했다.

연금이 그래도 일어나지 못하자, 월요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재차 손을 휘저었다.

연금은 그제야 억지로 일어났으나 다시 의자에 앉진 못했다.

“그렇게 떨 필요 없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지금은 가라앉았으니.”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너도 짐도 황후도 네가 불임인 줄 알았던 게 문제지.”

“그것뿐만이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소신은-.”

“그 얘기는 되었다. 꺼내봤자 화만 다시 날 뿐이니. 그보다, 황후를 데려오라 한 건 배 속 아기의 문제 때문이다.”

“……예.”

연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여전히 황후 회임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눈치여서, 월요는 미리 이야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황후를 병사로 위장해 네게 보내려 했다.”

연금이 그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월요를 보았다. 이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하지만 황후의 친부인 온원이 황후의 회임을 알게 되면서 일이 까다로워졌어. 그는 황후의 아이가 짐의 아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적자로 만들고 싶어 한다.”

“폐하! 소신은 절대로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안다. 황후도 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온원이 그런 마음을 먹은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월요는 이후 황후와 나눈 대화, 황후가 연금을 불러달라고 청한 경위 등을 다 말한 뒤 착잡하게 말을 맺었다.

“네가 아이 아빠이기도 하니, 황후가 너와 얘기해보고 싶은 눈치였다. 잘 대화해 보거라.”

마침 황후가 도착해서, 연금은 무어라 더 말하지 못했다.

월요는 어실 안으로 들어와 연금을 보고 충격에 젖은 황후에게, 어실 구석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라 권했다.

두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붓을 쥐었다.

그러고서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상소문 세 개가량을 보았을 즈음. 뜻밖에도 울음소리가 나더니, 황후가 밖으로 홀로 걸어 나왔다.

“황후?”

황후가 왜 혼자 울면서 나오나? 황제가 의아해 묻자, 황후는 벽 앞으로 걸어가더니 눈을 질끈 감고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지금 나가면 다들 이상하게 볼 터라…… 눈물이 그칠 때까지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그러시오.”

월요는 대답하고서 책상 앞에서 일어나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연금은 입구 부근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괜찮으냐.”

그 모습을 보고 월요가 묻는데, 문밖에서 “폐하. 신첩은 이만 물러갑니다.” 하는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금은 손을 움찔했다.

월요는 밖을 향해 “그래.” 하고 크게 대답했다.

마침내 황후가 완전히 나가는 소리가 나자, 월요는 연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했는데 황후가 울면서 나간 게냐.”

연금은 고개를 숙이고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월요가 계속 쳐다보자, 결국 순순하게 털어놓았다.

“꼭 나가야겠다고 확신이 서는 게 아니라, 나갈지 말지 망설일 정도라면 나갔을 때 후회하실 거라 하였습니다. 고귀하게 자란 황후 마마께서 숨어 사는 생활을 감당하진 못하실 거라고요.”

“그 말만으로 울 황후가 아닌데.”

“황후 마마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도 너무 위험한 방법이니, 차라리…… 고민되신다면 아기님을 지우는 게 낫다 하였습니다.”

“!”

“그러면 승상 나리의 계책도 아예 무너뜨릴 수 있고, 마마의 명성도 유지할 수 있고, 마마께서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월요는 연금을 내려다보다 물었다.

“황후를 아내로 맞이하긴 싫은 거냐.”

“그럴 리가요. 너무 좋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연모합니다. 황후 마마 같은 분이 제 곁에 올 거란 생각만으로도 간이 움츠러드는 거 같습니다. 이곳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마마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폐하.”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연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마는 저 드높은 곳에, 저는 저 낮은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폐하.”

“!”

“마마께선 아직 망설이고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마마를 부추겨 곁으로 모셔왔는데, 뒤늦게 후회하시면요? 그땐 이미 마마는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으실 겁니다. 나가는 건 언제든 가능하지만 돌아오는 건 평생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 * *

“소신의 생각엔…… 마마께서 아기를 지우는 게 가장 나을 듯합니다.”

연금은 황후에게 모험을 하지 말라며, 아기를 지우고 황후로 태후로 안락하게 살라 조언했다.

황제는 이대로 황후를 내보내도 언제든 온원이 그 아이로 간계를 꾸밀까 걱정하는데.

아예 아이가 없다면 황제의 온원에 대한 그런 염려도 사라지지 않겠냐고.

“마마. 왜 그러세요?”

연금과 황후가 나눈 대화를 모르는 영영은 걱정스럽게 옆에서 황후를 불렀다.

황후는 차마 연금이 한 말을 그대로 들려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젓고 가마 손잡이에 머리만 기댔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연금이 그렇게 나오리란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마음이 상했다.

연금은 그녀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지만, 황후의 눈에는 그가 그저 귀찮은 일에 얽히고 싶어하지 않는 거로 보였다.

황후를 곁에 두면, 언제든 황제의 마음이 바뀌어 그들 부부를 해치려 할지도 모르니까. 이걸 피하고 싶어서.

‘나는…… 대체 나는……!’

그때. 황후의 시선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녀보다 먼저 ‘진짜’ 황손을 회임한 천빈이었다.

그녀와 달리 아무 고민도 아픔도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즐겁게 웃으며 자기 궁인들과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행복한 미소를 보는 순간. 황후는 마음 한구석에 까맣게 불길이 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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