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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38화 (238/283)

##  238화. 평소라면

“그럼!”

오히려 이 쉬운 방법을 왜 떡돌이가 모르는지 모르겠는걸?

내가 당당하게 바라보는데, 떡돌이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그리 미더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표정을 보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뭐야. 나한테 신세 지는 게 그렇게 싫어?”

“음…….”

떡돌이는 침음했고, 옆에서 승언이 작게 구시렁거렸다.

“못 미더워하시는 겁니다.”

베개를 그 방향으로 집어 던지자 바로 조용해졌지만.

나는 떡돌이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날 봐라. 날 봐.

“우리는 부부잖아. 내 도움을 받는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 없어, 떡돌아.”

“아니, 그래서는 아니지만. 그래, 그 쉬운 방법이 무엇이냐?”

“도움을 주십시오 마마, 라고 열 번 외치면-.”

“자자, 계란아. 엄마가 안 졸린단다.”

계란이한테 자자면서 끌어당기긴 왜 날 끌어당긴대? 어쨌건 떡돌이는 농담이 안 통하는구나. 그냥 한 말인데.

“황후가 직접 선택하게 해, 떡돌아.”

떡돌이가 내게 팔베개를 해 주다가 흠칫했다.

“직접 선택하게 하라니?”

“회임을 했는데 네 아이가 아니란 걸 밝히게 하라고. 그러고서 위장해서 내보내. 그러면 나중에 황후가 마음이 바뀌어도 이용할 수 없잖아?”

“…….”

“더 쉬운 방법도 있어.”

“더 쉬운 방법?”

“쥐도 새도 모르게 온원을 죽여줄 수 있어.”

“!”

* * *

하루 내내 깊게 생각한 월요는 다시 황후를 찾아갔다.

황후는 이틀 사이에 안색이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폐하.”

다급히 일어나는 황후에게, 월요는 편안히 앉으라 하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좌칙승상이 황후에게 뭘 요구하는지 알고 있소.”

황후는 힘들게 숨을 쉬다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폐하! 신첩은-.”

“아오. 황후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거. 황후는 그럴 사람은 아니지.”

“!”

“하지만 황후를 이대로 병사로 위장해 보내려니 불안해졌소.”

월요의 말에 황후의 눈동자가 떨렸다.

“불안해지다니요?”

월요는 천빈의 말을 깊게 생각했다.

온원을 죽일까. 아니면 황후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란 걸 일찍이 밝히고, 폐위해 냉궁에 보낸 다음 빼내 줄까.

처음엔 전자가 끌렸다.

그러나 황후가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있으리란 걸 떠올리자, 온원을 죽이더라도 마음속 불안감을 어쩌진 못하리란 걸 깨달았다.

병사로 위장해 나간 황후가 온원이 죽었단 소식을 듣고 원한에 차서 아이를 낳은 다음 ‘이 아이는 사실 폐하의 아이다’라고 주장하며 나타나면?

연금이 황제와 닮았으니, 아이도 월요를 닮았을 터였다.

황후가 그렇게 주장하며 나타나면 궁 전체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 아이를 적자로 만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황후의 주장을 믿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고, 황실의 체면은 바닥에 뚝 떨어질 터.

차라리 천빈의 말처럼,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란 걸 모두에게 지금 알려버리는 게 나았다.

온원도 처리를 해야겠지만, 그가 죽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시기에 처리해야 하고.

“황후가 다른 사내의 아이를 회임했단 걸 밝히시오.”

“!”

“그 일로 황후를 냉궁에 가두라 지시한 뒤 빼내 주겠소. 황후의 체면이 있으니 사람들 앞에서 심문을 받는 일은 없도록 하겠소. 다만 승상은 그 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요. 다른 흉계를 꾸미지 못하도록.”

황후는 창백해져서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사내의 아이를 회임했단 걸 밝히고 나가라고?

이 경우 황후의 체면은 완전히 바닥에 내려갈 것이다. 병사로 조용히 나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황후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천천히 뜨며 말했다.

“연금과…… 의논하게 해주세요.”

“그러지. 연금이 오면 황후를 내 서재로 부르겠소.”

* * *

황제가 나가자 황후는 관자놀이를 짚고서 멍하게 탁자를 바라보았다.

겁이 났다. 그냥 이대로 사라지듯 여기서 떠나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얽히자 무서워졌다.

황제의 마음속엔 온원으로 인해 이미 불안이 싹텄다. 그런데 황제가 과연 그녀를 내보낸 뒤 자유롭게 살게 풀어줄까?

아버지는? 그녀 때문에 승상직에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 그대로 순순히 조용히 살려 할까?

황제는 온원을 승상직에서 물리는 것만으로 용서할까? 이미 황제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그의 적자로 둔갑시키려 계책한 아버지를?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여기에 운명을 맡기는 건 폭풍우 치는 밤바다를 조각배만 타고 흘러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영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마. 저…… 아기씨를 꼭…… 낳아야 할까요?”

“!”

황후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영영을 보았다. 영영은 창백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마마, 이대로는 마마께서 위험하십니다. 저는, 저는 제가 고생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위험해지는 건 싫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영은 온원의 뜻대로 하는 것도, 황후의 뜻대로 하는 것도, 황제의 뜻대로 하는 것도 위험하게 여겨졌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아기씨를 지우는 게 나았다. 아직 회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약 한 그릇으로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영영의 생각이었다. ‘나리’의 생각이 아니라.

영영은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일로 황후의 화를 사서 쫓겨나더라도, 그녀는 황후가 무사하길 원했다.

* * *

황제가 되면 이것저것 생각할 게 참 많구나. 떡돌이가 늘 떡 먹는 이유를 알았다.

생각하느라 떡을 먹는 거였어. 아무 생각 없이 뭘 씹고 있으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던가.

나는 가엾은 떡돌이에게 속으로 위로를 보내며 열심히 산책했다.

요즘은 본격적으로 수련할 수 없으니, 이렇게 산책이라도 열심히 하면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열심히 걸어 다니고 있자니, 누군가 다급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사자 친왕이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군요.”

사자 친왕은 내 바로 앞까지 와서는 숨을 고르면서 입을 열었다.

원웅이 의아한 얼굴로 나와 사자 친왕을 번갈아 보았다.

“원웅?”

“네, 마마.”

내가 고개를 저어서 ‘잠시 거리 좀’ 하고 신호를 보내자, 원웅은 얼른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자 친왕이 데리고 다니는 시종도 얼른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주위에 다른 이들이 사라지자, 사자 친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전에 일 때문에 계속 만날 기회를 찾았습니다.”

“전에 일이 뭔진 모르겠지만 비연궁에 오면 언제든 절 볼 수 있는데요, 전하.”

“제가 너무 자주 비연궁에 찾아가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 거 아닙니까.”

“난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요.”

“쓰셔야 합니다.”

단호하게 말한 사자 친왕은 목이 타는지 몇 번 가슴을 두드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제가 황후가 되고 싶다고 한 거 말입니다. 절대로 폐하의 옆자리가 탐난단 뜻이 아니라, 그냥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태후마마를 존경해서 한 말입니다. 당시 태후마마가 황후 마마셨거든요.”

말을 그렇게 빠르게 하니까 목이 타지!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전하.”

내가 멀뚱히 말하자, 사자 친왕은 입을 벌리고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제 말이 이해가 안 가십니까?”

“태후마마를 존경한단 건 알았어요.”

“그 앞에 건요?”

“?”

“제가 황후가 되고 싶었다고 한 말이 농담이란 말 말입니다.”

“아아.”

“그런 표정을 하지 마시란 뜻입니다.”

“제 표정이 어떤데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입니다.”

그 말에 멍하게 사자 친왕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사자 친왕이 방금 저 말을 하기 전까지, 그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달려와서 저렇게 말하다니…….

“전 입이 무거워요, 전하.”

그의 고민을 너무 가볍게 취급한 것 같아 속삭이자, 사자 친왕은 자기 이마를 손으로 짚고 가만히 섰다가 괴로워하며 말했다.

“아니, 입이 무겁고 말고를 떠나서 그 말이 제 본심이 아니었단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말해주려는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무슨 본심 말이냐.”

사자 친왕과 나 둘 다 황급히 같은 방향으로 돌아섰다.

언제 온 건지, 떡돌이가 뒷짐을 지고서 아주 불쾌하단 표정을 풀풀 드러내며 서 있었다.

“짐 빼고 둘이 뭐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었나 봐?”

내가 진짜…… 저 기척 없이 다니는 발 솜씨가 뭔 일을 낼 줄 알았지!

사자 친왕은 절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

* * *

지금 분위기는 아주 좋지 않다.

천빈과 월요 황제, 사자 친왕은 비연궁 방 원형 탁자에 삼각형 구조로 앉아 있고, 황제는 천빈과 사자 친왕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번갈아 보고 있다.

사자 친왕은 골치 아프다는 듯 깃털 부채를 살랑살랑 부쳐대고 있는데, 한 번 부채질을 할 때마다 한숨을 한 번씩 내쉬어댔다.

승언은 자기가 다 마른침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대체 천빈과 사자 친왕이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황제가 두 사람을 보았을 때 상황이 아주 묘하긴 했다.

사자 친왕은 자꾸 쩔쩔매면서 ‘본심이 아니었다’ 말하고 있고, 천빈은 자기는 입이 무겁다 말하고 있고.

승언은 후우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천빈이 이 와중에 혼자 과자를 잘 먹어대는 걸 보고 좀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먹어라, 천빈.”

결국 천빈이 과자 접시를 빼앗기자, 승언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잘하셨습니다, 폐하.

하지만 천빈에 한해서는 상당히 마음이 약해지는지, 황제는 우물거리다가 접시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천빈에게 도로 내밀었다.

“자.”

승언은 기가 막혔으나, 천빈은 그거라도 아쉬운지 받아서 먹었다.

여기서 혼자 아무렇지 않은 건 천빈 뿐인 듯했다.

승언은 천빈이야 그렇다 쳐도, 머리 좋은 사자 친왕은 대체 뭔 일에 연루된 건가 싶어 원망스레 사자 친왕을 바라보았다.

천빈은 원래 저런다지만, 사자 친왕은 좀 행동을 조심해야 하지 않나?

공교롭게도 승언은 천빈에겐 기대치가 없다 보니 화도 나지 않았다.

사자 친왕도 나름 사정이 있긴 한지, 한참 갑갑해하다 입을 열었다.

“정말로 오해입니다, 폐하. 별 얘기 안 하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폐하.”

황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그 오해가 무슨 오해인지 알려달란 건데. 별 얘기 아니라면 알려줘도 되지 않나?”

“…….”

“…….”

“별거 아니라면서 왜 둘 다 입을 꾹 다무는지 모르겠군.”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승언도 황제와 같게 생각했다. 정말 오해가 있다면 그냥 여기서 밝혀버리지.

아무리 하기 힘든 말이어도, 황제에게 ‘혹시 연모의 고백을 주고받았어?’라고 의심받는 지금보단 낫지 않은가.

승언은 사자 친왕이 천빈에게 정말로 연모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던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사자 친왕이 부채질만 할 뿐 말을 아끼는 데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을까.

황제가 이실직고하기 전엔 절대로 이 자리를 파하지 않을 듯하자, 마침내 사자 친왕이 한숨을 뱉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천빈 마마께 농담을 했는데, 천빈 마마께서 농담을 앞만 듣고 뒤는 안 듣고 가셔서 해명하고 있던 겁니다, 폐하. 앞만 들으면 이상한 농담이어서요.”

“무슨 농담이었기에 본심 이야기가 나오지?”

“무슨 농담이었으니 본심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폐하.”

“설마 농담처럼 했단 말이 천빈에 대한 고백은 아니겠지.”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말해라, 사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건지.”

승언은 초조하게 사자 친왕을 보았다.

천빈은 여전히 혼자 태연하게, 황제 앞에 놓인 그릇에서 과자를 가져다 먹고 있었다.

폐하. 과자 못 먹게 말리셨잖아요. 계속 말리세요. 계속 빼가고 있잖아요. 승언이 속으로 생각했으나, 황제는 사자 친왕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가 못 견디겠다 싶을 즈음. 사자 친왕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황후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승언은 한숨을 내쉬다 뒤로 비틀했고, 황제는 사자 친왕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사자 친왕은 소중한 부채를 내려놓고 절규했다.

“그러니까, 그게 농담이었는데 마마께서 자꾸 안 믿으신단 말입니다!”

그 억울한 표정에, 뒤늦게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자. 짐이 천빈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짐이 믿을 리 없잖아? 뭘 그렇게 진지하게 정색해?”

승언도 뒤늦게 아차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천빈의 망상에 몇 번이나 희생된 적이 있었기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사자 친왕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그럼 이제 가도 됩니까?”

월요 황제는 웃으면서 그러라 했고, 천빈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이 무겁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월요는 천빈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내내 웃고 있던 월요의 표정은, 비연궁 밖으로 나오자 서늘하게 굳었다.

“폐하? 아직도 오해가 안 풀리셨습니까?”

그 모습에 승언이 걱정스레 묻자, 황제가 아까보다 더욱 무거워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의 사자라면 이 일을 먼저 내게 말하며 오히려 천빈을 놀려댔을 거다.”

“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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