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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36화 (236/283)

##  236화. 여기서 나가야 한다

누군가 사자 친왕에게 ‘황제가 되고 싶냐’고 대놓고 묻더라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레가 들려서 기침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혹시 날 떠보는 겁니까?’라고 말하다니!

그 말 탓에, 사자 친왕이 여기서 ‘아니. 난 황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눈치 좋은 사람은 뒷말이 위험하단 걸 유추해 낼지도 몰랐다.

황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그럼 황제가 되고 싶단 뜻으로 한 말인가?

그의 의도가 실제로 그런 게 아니어도,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면 골치 아파지지 않던가.

사자 친왕은 억지로 미소지었다. 이를 어쩐다.

천빈이 보통 사람들과 상식이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이런 데만 상식적일 수도.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천빈에게 이 일을 전해 듣고서 그가 흑심을 품었다고 의심할지도 몰랐다.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그가 사하비단에게 위험한 제안을 받고 고민 중인 건 맞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은 일 아니던가.

제안을 받아들인 뒤라면 모를까, 지금 오해를 사는 건 억울하다.

사자 친왕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하하하하, 조금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으니 마지못해 단 대답이었으나, 사자 친왕은 대답을 하면서도 피부가 간지러워졌다.

그는 오해를 살세라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사정이 있습니다. 물론 내 동생이 황제이니, 지금의 황후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요. 예전에 어릴 때 그냥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그러나 억지로 털털한 척 웃으며 고개를 든 사자 친왕이 본 건, 텅 빈 주위였다.

변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야 할 천빈은 그새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천빈은 사자 친왕의 그 사정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서 보니, 저만치 빠르게 멀어지는 천빈의 등이 보인다. 사자 친왕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마마? 마마! 끝까지 듣고 가셔야지요! 그걸 거기서 끊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 * *

이 심장이 두근두근해. 이게 바로 금단의 사랑이란 건가!

사자 친왕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 자리에 버티고 있기 힘들었다.

사자 친왕이. 이렇게 슬픈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이야!

‘사자 친왕은 내 연적이었구나. 언제부터였지? 처음 봤을 때부터?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고래를 설레설레 젓고 있자니, 비밀을 쥔 자의 무게가 느껴진다.

내가 사자 친왕의 이 비밀을 끝까지 보호해 줘야지!

* * *

하지만 사람 일이란 참 묘한 것으로, 사자 친왕의 비밀을 비밀로 해주기로 결심한 그 날 저녁 나는 사자 친왕, 떡돌이와 함께 있게 되었다.

사자 친왕이 직접 비연궁에 찾아와 내게 볼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 뒤로 떡돌이가 나타나 “무엇이지?”라고 물어본 탓에 이리된 거였다.

“아, 폐하. 저는 그게…….”

당황한 사자 친왕에게, 떡돌이는 친근하게 제안했다.

”사자. 식사하지 않았다면 오래간만에 함께 식사하자. 사자도 천빈과 친하였지?“

사자 친왕은 나를 힐긋 보더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잠시 뒤. 우리는 동그란 탁자에 셋이 둘러앉아 식사하게 되었다.

음식은 맛있었으나, 사자 친왕은 내게 비밀을 털어놓은 것 때문인가. 떡돌이만큼도 영 뭘 먹지 못했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도 연신 나를 힐긋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그를 향해서 ’난 전하 비밀을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아요‘라는 표시로 웃어주자, 사자 친왕은 그제서야 안도해서 고개를 돌렸다.

* * *

사자 친왕은 불안해서 시선을 돌리며 젓가락을 힘들게 움직였다.

그가 비연궁에 찾아온 건, 천빈에게 그녀가 듣지 않고 가버린 뒷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황후가 되고 싶던 건 맞지만 그건 오래전 아무것도 모를 때, 지금의 태후 마마, 즉 당시의 선황후 마마를 존경해서 한 생각이고, 이제는 황후가 무슨 자리인지 알기에 원하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마저 말할 생각이었다.

딱 적당하게 둘러댈 말 아닌가? 그런데 설마 이 자리에 황제가 나타날 줄이야.

그 탓에 식사하는 내내, 사자 친왕은 저 괴상한 천빈이 ’아참 폐하, 내가 전하한테 들었는데요‘라고 자기 이야기를 할까 봐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천빈은 황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는 듯, 그런 쪽으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눈이 마주치면 그윽하거나 아련한 표정을 짓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훤히 드러나는 얼굴이라, 그럴 때마다 더욱 화가 났다.

당장 머릿속에서 그 상상을 꺼내 뱉으라 하고 싶었다.

반면 월요는 월요대로, 사자 친왕은 자꾸만 천빈을 곁눈질하고, 천빈은 사자 친왕을 향해 슬픈 표정을 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이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자신만 혼자 방치되는 기분이었다.

결국 월요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은근슬쩍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천빈. 슬슬 책봉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책봉식 이야기가 나오자 천빈이 또 그윽한 표정을 짓다 말고 반색했다.

“책봉식이요? 이제 할 거예요?”

“오히려 말이 나오고 너무 미뤘지.”

사자 친왕은 천빈의 관심이 완전히 책봉식으로 흘러가자, 그제야 안심했다.

하지만 단시일 내로 천빈의 오해는 풀지 못할 듯했다.

‘이를 어쩐다. 천빈이 이상한 말을 꺼내기 전에 오해를 풀어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한순간. 좋아하던 천빈이 갑자기 사자 친왕 쪽을 쳐다보더니 또 그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폐하. 우리 그런 얘긴 전하가 없는 데서 해요.”

사자 친왕이 자기를 부러워할 걸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여기서 해도 상관없습니다!’

사자 친왕은 속으로 외쳤다.

천빈은 꽤 노골적으로 동정심을 보였으나, 남들은 이 와중에 나오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감정인지라 월요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응? 왜? 왜 그래야 하느냐?”

사자 친왕은 억지로 얼굴 근육을 올려 미소지었다.

“저는 아무 상관 없으니 그냥 얘기하시지요, 마마. 폐하.”

* * *

그 시각.

황후는 영영이 의부와 수사청에서 가져다준 천빈 관련된 보고서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집중력을 발휘해, 보고서 내에서 이상한 점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황후는 천빈의 심장이 느리게 뛰긴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건강한 편’이란 보고서를 보다가, 전에 장공주에 대한 일을 떠올렸다.

영영이 실수로 장공주의 팔을 뽑은 일 때문에 고초를 겪을 때, 황후는 수시로 장공주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때 장공주도 심장이 느리게 뛴다고 들었다.

혹시라도 장공주가 죽을까 염려하느라, 아직도 황후는 그때 보고를 들으며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생히 기억났다.

그런데 천빈도 심장이 느리게 뛴다고?

‘게다가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부터 심장이 느리게 뛴다. 장공주도 죽었다 돌아온 후에 심장이 느리게 뛰었는데.’

황후의 심장은 반대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장공주는 죽었다 돌아온 후 성격이 변하다 못해 미쳐 날뛰게 되었고, 천빈은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황제의 총애를 얻게 되었다.

황후는 의방 보고서를 읽다가, 이번에는 아까 얼핏 보고 덮어둔 수사청 보고서를 한 번 더 살폈다.

생사 고비를 넘기기 전 천 귀인은 존재감 없이 지냈기에 별다른 일에 얽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천 귀인은 성격도 변하고 온갖 일에 말려들어 수사청에도 한동안 들락날락하게 되었는데, 다른 보고서야 다 외부에서 일어난 일들에 천빈이 얽힌 거라고 쳐도, 보고서 하나는 유별나게 이상했다.

‘천빈이 쓰러졌을 때. 수사청에선 왜 천년비란 무림인에 대해 조사한 걸까.’

황후는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장공주를 제압하던 천빈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제의 그림자들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던 장공주를 가뿐하게 상대했다.

그림자들은 장공주가 공주의 몸인지라 조심하고 있었고, 천빈은 그런 걸 가리지 않고 뛰어든 탓도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무술을 잠깐 배운 이가 보일 만한 실력은 분명 아니었다.

황후는 천천히 책상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뭔가…… 잡힐 듯 말 듯 하면서 잡히지 않아 간지러웠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단서가 이 사이에 흩어져 있는 듯한데.’

그때. 황후에게 영영이 다가오더니 작게 접은 서신을 내밀었다.

“황후 마마. 나리께서 마마께 은밀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가서 두 번 다시 얼굴도 안 볼 것처럼 굴더니 왜? 황후는 인상을 찡그리고 서신을 펼쳤다.

-네 아이를 적자로 만들 방법이 있다면. 그래도 나갈 터이냐?

서신에 적힌 건 이 한 구절이었다. 황후는 손에 힘이 쭉 빠져 서신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서신을 전하긴 했으나 읽어보진 않은 영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황후는 황급히 서신을 박박 찢은 다음 초에 태워버렸다.

서신이 다 타버린 뒤에도 황후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돌려서 표현했으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녀는 바로 알아들었다.

황제의 아이가 아닌 아이, 심지어 황제가 본인의 아이가 아닌 걸 인지하고 있는 아이를 적자로 만든다는 건…….

‘폐하를 습격해 입을 막으려 하시는가!’

“마마?”

황후가 창백한 낯빛으로 주먹을 떨자 영영은 겁이 나서 황후를 재차 불렀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네?”

황후는 주먹을 쥐었다 피면서 호흡을 빠르게 정리한 다음, 최대한 차분하게 사태를 정리했다.

아버지가 말하는 건 황제 시해나 다름없다.

일이 잘 되면 아버지 말처럼 이 아이는 황제의 적자가 될 것이다.

적자 신분이라면 천빈의 서장자와 겨루어 볼 만도 하다.

그녀의 아이가 황제가 되고, 그녀가 황제의 친모가 되어 태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일가 전체가 몰락할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일 아닌가.

아이는 적자가 되기는커녕,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할 어린 나이에 죽을지도 몰랐다.

황제 시해 목적이 아이를 적자로 만들고자 하는 거라면, 이 아이가 중심이 되는 것이니 당연히 이 아이부터 죽이려 들 게 아니던가.

‘폐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실 리 없다.’

황후는 아이를 안은 배를 끌어안았다.

자신이 아버지의 곁을 탈출하려 하자마자 바로 이런 일에 그녀와 아이를 이용하려 하다니.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황제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비록 그녀가 꾸민 일이 아니어도, 황제는 마음을 바꿔 불화의 씨가 될 아이를 죽이고자 할 테니.

“영영.”

“네, 마마.”

“폐하께 내가 급히 전할 말이 있으니 급히 오시라 해라.”

“네?”

영영이 어리둥절해 황후를 바라보았다.

“어서!”

황후는 설명하는 대시 서둘러 영영을 내보냈다.

“네, 네!”

영영은 일단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

영영이 나가자, 황후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덮었다.

‘아버지가 이 아이를 이용하려 들기 전에 황궁에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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