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꿈이 하루 만에 깨어졌다
“제정신입니다. 지금은요. 하지만 언제까지 제정신일진 모르겠습니다.”
“온후안!”
황후는 온원이 집어던지려다 멈춘 찻잔을 빼앗아 벽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찻잔이 부서지자 온원은 입을 쩍 벌리고 딸을 쳐다보았다.
“네가 정말…… 네가 진정 미쳤구나. 벌써 제정신이 아니야.”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황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궁들은 돌아가며 총애를 차지합니다. 거기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새 후궁이 들어옵니다.”
“모두 그렇게 산다.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다.”
“내 편이어야 할 가족들은 내 동생을 내 연적으로 밀어 넣습니다. 한쪽에서는 ‘황후는 후궁들의 암계에 휩쓸리지 말고 중심을 지켜야 한다’ 하고, 한쪽에서는 ‘황후가 후궁들을 통솔하지도 못하면서 황후냐’고 빈정거립니다.”
“그 중심을 지켜야 하는 게 황후 자리다. 황후가 아니어도 그 중심을 찾기 위해 살아간다. 너만 그런 거 같으냐. 모두 마찬가지다.”
“나는 총애 한 자락 받은 적이 없는데. 모든 후궁들은 총애를 받을 때마다 나와 비교됩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수시로 욕을 먹어요. 나는 잘하면 당연한 거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황후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조차 안 되고 잊혀, 산 채로 존재가 지워지는 이들도 많다.”
“가문이 없으면 내가 흔들리는데, 가문이 있어서 온 황실 식구들이 절 경계합니다.”
“네가 잘했더라면 태후 마마께서도 널 더 어여삐 여기셨겠지. 그건 네 성격이 차가운 탓이다.”
“천빈의 아이가 태어나면 어쩔까요? 내가 그 아이를 신경 쓰면 다들 천빈 아이를 경계한다 할 겁니다. 내가 그 아이를 못 본 척하면 천빈 아이라 경계한다 할 겁니다.”
“중요한 건 그 아이의 마음이지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다. 친부모보다 다른 보호자를 좋아하는 아이도 많아.”
“아이가 크면 절 경계할 겁니다. 내가 황후니까요. 그 아이는 언제가 날 밀어내겠지요. 제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되면 그 아이도 패륜 소리를 들을 거다. 쓸데없는 걱정을 미리 하지 마라.”
“……늘 이런 식이시지요.”
황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다들 그렇다, 다들 힘들다, 그러니 참아라.”
“그게 사실이다.”
“다들 힘들면 내가 힘든 게 사라지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가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아버지.”
“…….”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요!”
황후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온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넌 수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자리에 올라갔다. 밥 한 끼 못 먹고 죽어가는 여인들이 수두룩해.”
“하. 아버지는 승상 자리에 올라가서도 더 높이 올라가려고 딸을 팔아 치우면서. 나는 힘들다는 소리조자 못 한다고요?”
“나도 네게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데, 왜 너는 그렇게 매일 혼자 힘든 척 혼자 약한 척 혼자 처연한 척 구는 게냐.”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 어떤 기분인지 아십니까? 여기서 보이는 게 뭔지 아십니까? 아래입니다, 아버지. 아래라고요!”
“그 자리가 좋은 자리다!”
“그럼 아버지가 오르세요!”
“할 수 있다면 했을 거다!”
황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애초에 그녀와 대화할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래요.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버지를 첩으로 받아달라고.”
온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온후안!”
“가세요. 더이상 얼굴 마주하기 싫습니다. 태교에 방해됩니다.”
“!”
“길 가다가 절 닮은 아이가 아버질 보며 침을 뱉거든 아버지 손주인 줄 아십시오!”
* * *
온원이 황후궁 밖으로 나가자 궁인들이 모두 다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다 보니 소리가 밖까지 들린 것이다.
아버지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할 거란 예상을 한 황후가, 믿을 수 없는 이들은 훨씬 더 멀리 떨어뜨려 두긴 했지만, 측근들이라 해도 저런 대화를 들으면 민망해지기 마련이었다.
온원은 괜히 더 표정을 굳히고서 밖으로 나갔다.
온원이 나가자 영영이 안으로 들어와 다급히 황후를 부축했다.
“마마…… 울지 마세요.”
“너도 내가 이상한 거 같으냐?”
“아닙니다. 저는 마마의 편입니다. 마마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나리가 나빠요. 나리가 무조건 나쁜 겁니다.”
“…….”
황후는 눈시울이 붉어져 눈가를 닦았다. 영영은 자기가 더 마음이 아파져 황후를 꽉 감싸고 훌쩍였다.
* * *
사가로 돌아온 온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나서 헛웃음을 뱉었다.
늘 순종적으로 ‘네, 네’ 하던 자식이 그렇게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는 걸 보고 나자 뒷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화가 났다. 대체 어느 놈팡이가 순진하던 그의 딸을 저렇게 만든 걸까.
그의 딸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착한 딸이었다.
그의 딸이 저렇게 된 건 분명 지금 아이 아빠란 작자가 못된 술수를 써서일 터.
온원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정말로 황후가 병사로 위장해 출궁하기 전에, 그 상대를 죽여버려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온원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아니지. 어쩌면…… 잘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 황제가 죽으면 황후의 아이는 자연스레 적자가 된다.
서장자는 천빈의 아이이지만, 황후의 아이는 적자였다.
그리고 황후의 아이가 황제의 아이가 아니란 건, 결국 황제가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온원은 자기가 한 생각에 자기가 등골이 쭈뼛해졌다. 확실히. 이 일이 성공한다면, 대번에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된다.
황후는 태후가 될 테고, 황후의 아이는 황제가 될 테고, 자신은 황제의 할아버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게 엎어질지도 모르는, 아니, 가문 자체가 몰락할지도 모를 위험한 일.
‘좀 더 생각을 해보자. 신중해야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온원은 황제가 사하비단이란 무림인 집단 때문에 내내 골치 아파하던 걸 떠올렸다.
* * *
“쓸모없는 건가.”
중얼거린 타천천이 머리카락을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아유정이 의아해서 그를 보았다.
“황제의 머리카락이 소용없는 겁니까?”
“그런가 봅니다.”
타천천은 혀를 찼다.
황제의 영혼을 불러와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살아 있는 몸, 심지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이다 보니 되지 않았다.
천년비 때는 다른 몸에 가 있는 영혼을 자기 몸에 부르는 것이라 ‘원래 몸에 돌아오라’는 주문이 먹혔는데. 황제는 상황이 전혀 다른 탓이었다.
“쉽게 갈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타천천은 고개를 젓고서 황제의 머리카락을 도로 상자에 넣었다.
그때,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상자를 서랍 안에 넣으며 말하자, 곧 문이 열리고 총관 상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유정은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서 벽 쪽으로 붙어 섰다.
상락이 타천천의 근처로 오자, 타천천이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개원 말입니다, 단주님.”
“그자가 왜.”
“사하비단이 새로 이사한 데가 어디인가 찾아다니고 있답니다.”
“개원 그자가?”
타천천은 입은 웃으면서 이마만 찡그렸다.
“예.”
“그자가 왜? 아유정이 천년비가 아니란 걸 알고선 이쪽에 별 관심을 안 두더라니?”
“황제가 그자 동생을 입궁시켰다던데. 관련이 있을까요?”
“흐음…….”
타천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가, 아유정을 힐긋 보았다.
아유정은 개원의 이름이 나왔을 뿐인데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무표정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있지만, 타천천이 그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정말로 영혼이 몸의 영향을 받는 건가.’
천년비 몸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개원에게 관심도 없던 아유정이 저러다니.
하지만 타천천은 저런 증세가, 개원이 천년비의 껍데기를 쓴 아유정을 그 잘생긴 얼굴로 잘 대해 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영혼의 작용인지, 복합적인 건지 헷갈렸다.
잠시 생각하던 타천천은 히죽 웃고서 아유정에게 지시했다.
“아유정. 네가 가서 개원 그자를 만나 보아라.”
“네? 제가요?”
아유정은 대화에 완전히 배제된 채 서 있다가 어리둥절해서 타천천을 보았다.
“따로 시키실 일이 있는 겁니까?”
“아니.”
“?”
“그냥 만나보고 오거라.”
“!”
* * *
늦은 밤이었다.
오늘도 떡돌이는 내 방에 왔고, 나는 그의 팔을 베고서 눈을 감았다.
그의 팔을 베고 그의 배에 손을 올리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잠들면 좋은 꿈이 꿔진다.
요즘은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였다.
그런데 푹 자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눈을 뜨자, 떡돌이가 자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그 부드러운 눈동자를 보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손가락 끝으로 떡돌이의 배에 사랑한단 글자를 쓰며 물었다.
그런데 웬일로 떡돌이가 내 이마나 볼에 입을 맞추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 표정이 평소와 달라 재차 묻자, 떡돌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쳤다.
“왜? 왜? 왜?”
그 태도가 이상해서 연달아 묻자, 떡돌이는 그제야 망설이다 물었다.
“음. 반숙아.”
“응.”
“혹시…… 황후가 되고 싶으냐?”
뭐지? 드디어 내게 황후가 되라 말하려는 건가! 순간 얼굴이 환해질 뻔했지만, 나는 모른 척 새침하게 물었다.
“그런 건 왜 묻지? 이유를 모르겠구먼.”
떡돌이는 아랫입술을 씹으면서 나를 보더니, 재차 물었다.
“솔직하게. 아무 생각이 없는 게냐?”
“암. 없어. 왜 그래?”
내가 큰 소리로 외치자, 떡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
그러고는 눈을 감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말에 신경 쓰여서 얼른 그의 눈꺼풀을 잡았다.
떡돌이는 눈을 감으려다 강제로 못 가게 되자, 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이 무엄한 손은 대체 뭐지?”
“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
“그거라니?”
“내가 황후 자리에 관심 없는 게 왜 다행이야?”
떡돌이는 내 손을 밀어내 자기 배 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야, 네가 자면서 계속 황후 황후 노래를 불렀으니까.”
“!”
이럴 수가! 꿈속에서 황후가 되었는데 그게 입 밖으로 나간 건가!
입을 쩍 벌리고 보자, 떡돌이는 나를 힐긋 보면서 잠시 생각해보더니,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얼결에 덩달아 일어나자,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아주 조심조심 물었다.
“반숙아. 혹시…… 정말로 황후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
“그럼! 아니지!”
나는 재차 발뺌했다.
“꾸, 꿈속에서 황후랑 춤을 췄어. 그래서 그래. 그래서 노래를 부른 거야.”
떡돌이는 그 말에 눈에 띄게 안심하며 웃었다.
“그래, 다행이다.”
또다시 다행이래! 나는 그가 누우려는 걸 막아냈다.
“떡돌이 너는 왜 자꾸 다행이라 하는데?”
귀자가 그랬는데. 떡돌이가 날 황후로 삼으려 한다고. 그런데 왜 내가 황후 자리에 관심 없는 게 다행이란 거야?
떡돌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너는 황후 자리엔 맞지 않으니까.”
“왜?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리 직접적으로 물으면…….”
“대답해줘!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래?!”
“아니, 짐의 말은. 우리 반숙이는 황후가 되기엔 음. 너무 음. 자유로운 성격이 아닐까, 이런 뜻이지.”
귀자! 이 자식! 말이 다르잖아!
지붕 위에서 누군가 달아나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분명 귀자다.
나는 천장을 노려보다가 창문을 열고 귀자를 잡으러 뛰쳐나갔다.
“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