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네가 제정신이냐!
“마마. 마마.”
일기장을 시집 사이에 끼워 놓고서, 내 기억 속 개원이와 운호 새끼를 구분해보고 있을 때였다.
소란스럽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니, 황후궁에 보낸 귀자가 바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왜 그래?”
떡돌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황후궁에 갔다더니. 정말로 뭔 일이 있나?
‘아차, 일기장.’
나는 시집을 일기장째 덮어 책꽂이에 넣었다.
귀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내 귀에 대고서 작게 말했다.
“절대로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무슨 일인데 그래?”
“황후 마마께서 연금의 아이를 가지셨답니다.”
“뭐야?!”
“목소리요!”
귀자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서 다급히 ‘쉿 쉿’ 하고 신호했다. 나는 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와. 이건 정말 놀라운 소식이잖아? 내가 웬만하면 이런 일엔 잘 안 놀라는데.
세상에. 황후와 연금이가 아이를 만들었다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연금이는 공식적으로 폐하를 대리했잖아. 사통이라 하기도 애매하지 않아?”
“다른 후궁분들이 그러면 사통이 아니지요. 하지만 황후 마마는 연금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사통이 아니라 하기가 더 애매합니다.”
“그런가? 그럼 어떻게 돼?”
황후가 연금의 존재를 알았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
귀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보통은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겠지만…….”
“만?”
“폐하께선 황후 마마께 병사로 위장해 내보내주겠다 제안하셨습니다.”
“그래?”
“그래도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내오셨으니까요.”
귀자는 나를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무슨 반응을 원하고 저러는 건지 몰라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귀자는 나중에는 불편해하는 표정이 되더니 방긋 웃으며 갑자기 밝게 말했다.
“아, 또 있습니다.”
“뭐가?”
“폐하께선 황후 자리가 공석이 되면요, 마마를 황후 자리에 올리고 싶으신가 봐요.”
그 말에는 나도 확실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와! 내가 황후가 된다고?”
“확실한 건 아니고요. 그냥 그런 얘기도 나왔더란 거지요. 하지만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럼! 내가 입 하난 무겁지!”
그런데 확실한 거야?
* * *
“확실한 건 아니다.”
어실로 돌아온 황제에게 오원요가 슬쩍 ‘천빈 황후설’에 대해 묻자, 월요는 애매하게 답했다.
“아니옵니까? 소인은 그 때문에 황후 마마를 내보내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황후가 떠나면 누구를 황후로 올리긴 해야지. 하지만 연비를 황후로 올릴지, 천 귀인을 황후로 올릴지는 정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나온 연비의 이름에 오원요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연비 마마요?”
월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비를 황후로 둔다면 천빈을 황귀비로. 천빈을 황후로 둔다면 연비를 황귀비로 삼고 내명부를 통솔하게 해야겠지.”
오원요는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황제는 천빈에게 내명부를 통솔하게 두고 싶진 않은 것이다.
평소 천빈의 말과 행동을 떠올린 오원요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확실히. 내명부를 통솔할만한 사람은 아니긴 했다.
“마음이야 천빈을 황후로 삼고 싶다. 좋아서 펄쩍펄쩍 뛰겠지. 좀 거들먹거릴 테고.”
“그렇지요.”
“하지만 황후 자리는 그저 즐기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으냐. 실수를 하나라도 했다간 온갖 대신들이 물어뜯으려 들 거다.”
“그렇지요.”
빈 자리에 있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회의 시간이 되면 천빈에 대한 안건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황후가 되면 그 빈도가 대체 어떻게 될까.
월요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천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황후의 재목은 아니야.”
오원요는 차마 천빈을 두둔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승언은 아예 대놓고 맞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월요는 팔을 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선하고 무지한 권력자는 나라에 해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가 그 증거였고.
심지어 천빈은 어질고 선하지도 않았다. 구김 없고 사랑스러운 거지.
오원요는 그런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쨌든 연비 마마가 황후가 되든 황귀비가 되어 내명부를 통솔하든, 천빈 마마께는 좋은 의지가 되겠습니다, 폐하.”
“연비라면 그렇겠지.”
“네. 동복 언니시지 않습니까.”
천빈이 아이를 낳으면, 연빈은 그 아이의 적모 혹은 서모가 되는 동시에 이모였다.
천빈의 아이가 잘 크면 연비 자신과도 영광을 같이 할 테니, 그녀는 굳이 아이에게 해코지할 필요가 없었다.
월요가 연비의 품계를 같이 올리기로 한 건 좋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오원요는 영빈이 조금 걱정되었다.
“하면 영빈 마마는 어찌되는 겁니까, 폐하?”
“짐도 그게 걱정이다.”
“아…….”
“천씨 가문은 야심이 넘치지. 그 와중에 하나는 황후, 하나는 황귀비, 하나는 비 자리에 오르면 천씨 가문 위세는 온씨 가문을 누를 게 아니냐.”
“그렇지요.”
“그 위험함도 커질 테고.”
오원요는 황제가 영빈에 관해서는 이미 결론을 확고히 내린 걸 알아차렸다.
영빈에 대한 부분은 고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결정을 내린 게 확실했다. 품계를 더 올리지 않기로.
* * *
저녁 시간.
일기장을 원래 자리에 숨겨 두고서 간단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자니, 오늘도 떡돌이가 찾아왔다.
“부성. 천빈의 식사를 제대로 준비했겠지?”
떡돌이는 오자마자 내 궁녀에게 물었고, 원웅은 얼른 대답했다.
“그럼요, 폐하. 말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떡돌이가 내가 냉국을 연달아 마시는 걸 보고 기겁해서 이렇다.
떡돌이가 원웅과 부성에게, 낮까지는 더우니 그렇다 쳐도 밤에는 배앓이 할 음식을 주지 말라고 해서.
“너무해.”
“네가 한 그릇씩만 먹었다면 짐도 안 이랬을 거다.”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야. 계란이가 먹고 싶다고 그러는 거야, 폐하.”
떡돌이는 내 양 뺨을 잡고 늘리더니, 그 위에 입을 쿵 한 번 찍고서 툴툴거렸다.
“빨리 계란이가 나와야지 사실인가 물어볼 텐데.”
“계란이는 내 편일걸?”
“왜. 계란이가 짐을 더 좋아할 수도 있지?”
“왜, 계란이는 나를…….”
더 좋아할까? 떡돌이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니 사랑도 잘 주겠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내가 말을 하다가 멈추자 떡돌이는 끙 소리를 내며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비볐다.
“네가 이러면 짐이 난처해지는데. 왜 여기서 자신감이 사라지는 게냐.”
뭐라고 대답을 하려 했는데. 떡돌이 눈을 보는 순간 귀자가 낮에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떡돌이가 나를 황후 자리에 올리려 한다고!
그 생각을 하자 코에서 저절로 콧김이 나온다. 세상에. 황후라니. 악적 천년비가 황후가 된다니!
황후가 된다면 나를 악적이라고 욕하던 이들에게 내 근황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면 다들 배를 잡고서 ‘아이고 황후라니!’ 하고 싫어하겠지.
이래도 나를 싫어하고 저래도 나를 싫어할 이들이라면, 배나 아파지라 하고 싶다.
“반숙아.”
“응?”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내가?”
“목소리도 올라갔다.”
그야, 네가 나를 황후로 삼고 싶어 한다니까!
하지만 귀자가 이 얘기는 비밀로 하라 했지. 비밀로 하자.
그래야 나중에 떡돌이가 ‘반숙아, 짐은 너를 황후로 삼겠다!’라고 했을 때 제대로 놀라지.
“?”
* * *
‘떠나자.’
천년비가 홀로 즐거운 상상에 젖은 시각. 황후는 배를 만지다가 굳게 다짐했다.
여기서 머리 아프게 버티느니. 그냥 훌훌 털고 가버리자.
평생 안락하게 먹고살 재물은 충분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연금과 셋이서 살아가는 거다.
아이는 연금이나 그녀와 달리,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며 살 수 있겠지.
게다가 연금도 온화하고 좋은 사내였다. 함께 여생을 보내기 나쁘지 않다.
자신 없는 게 있다면, 그녀나 연금 모두 궁궐 안에서만 살아와서 바깥일에 대해 모른단 건데…….
이 점도 황제에게 부탁하면 신경 써 줄 것 같았다. 어차피 황제도 감시자 역할을 할 사람을 붙이고 싶어 할 테니.
결심을 내렸지만 한편으로 황후는 모든 걸 내려놓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지금은 그녀를 보내주지만, 나중에라도 마음이 변할지도 몰랐다.
온씨 가문과 황제는 사이가 나쁘지 않던가.
온씨 가문을 싫어하게 되면, 황제가 그녀를 약점으로 삼아 가문을 협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용하지 않더라도 황제의 약점을 하나 쥐고 가야 했다.
그녀와 연금, 아이를 차후에라도 건드리지 않도록.
“영영.”
“네, 마마.”
“수사청에 심어둔 심복에게, 천소여에 관련해 조사했던 사건 기록들을 모두 다 가져다 달라 해라.”
“네?”
영영은 황후가 비장하게 부르자 아이와 관련된 내용이라 여겨 덩달아 무겁게 대답했다가 어리둥절해졌다.
“천빈은 왜요?”
“천빈은 죽었다 깨어나기 전엔 존재감이 아예 없었지.”
“그렇지요.”
“하지만 이후엔 성격도 완전히 달라지고, 폐하의 총애까지 얻었어.”
“성격이 달라져서 그런 게 아닐까요?”
“개 답응도 죽었다 깨어났지만 성격이 달라지진 않았다. 폐하도 며칠간 의식이 없었지만 성정은 변하지 않았고. 성격이 달라진 거. 그게 이상해.”
“수사청에서 그걸 알진 않을 텐데요……. 차라리 어의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수사청에도 다녀오고 어의에게도 다녀오너라.”
천소여는 죽었다 살아난 이후, 연이어 몇 가지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청의 조사를 받았다.
즉, 수사청에는 천소여가 죽었다 깨어난 직후와 관련된 일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그걸 다 정리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어서 가거라. 그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한다. 꼭.”
* * *
이후 황후는 부친인 좌칙승상 온원을 불러 아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버지. 제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온원은 요즘 들어 영 마땅치 않던 황후가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왔다가 기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회임하셨다고요? 이런 기쁜 일이 있나! 경하드립니다, 마마!”
“폐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 미소는 황후의 덤덤한 말에 바로 사라지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온원은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이다가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의 아이가 아니라니요?”
“다른 사내의 아이입니다.”
황후는 가짜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가짜 황제에 대해 말하면, 아버지는 이 일을 가지고서 황제와 문제를 만들 사람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온씨 가문을 증오하게 만들고 싶지도, 아버지가 이 일로 황제와 문제를 일으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충돌이 어떻게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해라. 제발!”
“폐하께서 절 용서해주는 대신,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하셨습니다. 아이를 지우던가. 병사로 위장해 밖으로 나가던가.”
온원은 너무 화가 나서 탁자 위 찻잔을 깨부술 뻔했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고서 치를 떨었다.
“그래서 나가기로 했습니다.”
“온후안! 네가 제정신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