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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32화 (232/283)

##  232화. 황제와 황후의 거래

“회임이 맞습니다.”

의가에서 새로 데려온 궁녀는 황후를 진맥하고 손을 떼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황후가 기뻐하기는커녕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궁녀는 어리둥절해졌다. 황궁에서는 회임하는 게 좋은 일 아닌가?

궁녀는 힐긋 다른 궁녀들을 보았다. 놀랍게도 다른 궁녀들 역시 안색이 새파랬다.

새로 온 궁녀는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겁이 났다.

“나가보거라.”

황후는 새로 온 궁녀를 내보내자 한 손을 배에 얹고 눈을 감았다. 설마 설마 했지만…….

영영은 창백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황후 마마. 이게 무슨 일인가요? 회임이라니요?”

영영과 궁녀들은 황제가 여기서 황후와 동침한 적이 없단 걸 알았다.

그런데 황후가 회임했다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고개를 젓고서 측근 궁녀들도 내보냈다. 측근들이 나가자, 황후는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연금에 대해 계속 함구한다면, 황제 역시 이 아이의 부친이 자신이 아니란 걸 묻어줄 것이다. 그리고 죽이려 하겠지.

이 아이는 복중에서부터 태어난 이후에도 언제든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아이가 장성해 궁전을 나와 살게 되면 가문에서 어떻게든 지켜 주겠지만, 그러기 전에 궁중에서 살해당할 확률이 높았다.

아니, 그녀가 낳으면 적장자가 되는데. 과연 아이가 궁전에서 나와 살 수 있긴 할까?

‘어쩌지?’

황후인 그녀가 죄인의 몸이 되지 않고 황후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죄인의 몸이 되면 황후 자리에선 물러날 수 있겠지만, 이 아이에게도 지장이 간다.

아이뿐만 아니라 가문에도 흠이 생긴다.

기껏 자유를 찾더라도 아이와 자신, 그들을 지켜줄 가문이 쇠사슬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것 역시 끔찍했다.

‘어쩌지? 아아.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복잡하지 않은 건 스스로 아이를 빨리 지우는 것이었다.

이제 막 회임했으니, 지금이라면 약을 한 사발 먹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연금과 그녀가 만든 아이였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아이.

* * *

“여기, 알아보라 하신 자료들입니다.”

승언이 품 안에서 종이 묶음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월요는 그걸 받아 펼쳤다. 점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침내 월요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회임이 맞군.”

오원요가 깜짝 놀라 월요를 보았다.

“그럼 연금의……?”

“그런 모양이다.”

월요는 골치가 아파 관자놀이를 엄지로 눌렀다.

연금과 황후가 선을 넘지 않았나 의심하게 된 이후, 월요는 황후에게 그림자를 이전보다 여럿 붙여두었다.

그 덕에 황후가 뜬금없이 궁녀 하나를 새로 들인 걸 알았고, 바로 그 궁녀에 대해 조사했다.

그 궁녀가 의원의 여식이며, 제 부친을 따라다니며 보조할 정도로 의술을 익혔단 걸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의가 여럿인데 굳이 의술 익힌 궁녀를 데려온다? 이런 시기에?

이에 월요는 심상치 않다 여겨 황후가 내무부에서 찾아가는 물품들에 이상한 점은 없는지, 황후가 어의에게 제때 건강을 확인받는지를 알아보라 지시했다.

그게 승언이 조사해 가져온 종이들이었다.

종이에는 황후궁 궁녀들이 이전에는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만 식재료를 받아갔으나, 최근부터 다양한 식재료를 받아갔단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반면 향료는 이전보다 훨씬 적게 받아갔으며, 옷감을 좀 더 많이 받아갔다.

이것들만으로 회임을 의심하자면 조금 모자란 감이 있으나, 월요는 연금이 황후와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날짜를 알았다.

그 날짜를 계산한 월요는 황후가 회임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연금이 불임이라 확신했는데.”

월요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뱉었다. 설마 마지막에 이렇게 거하게 사고를 치고 갈 줄이야.

월요뿐만 아니라 오원요도 난처해서 연신 인상을 구겼다 펴기를 반복했다.

승언은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폐하?”

“처리?”

“황후든 아이든 연금이든 모두요.”

철저하게 황제를 위해 사고하는 승언은 황후와 연금이 선을 넘었을 때부터 아주 화가 난 듯하더니.

이 일로 그 분노가 더욱 머리끝까지 치솟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월요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기만 할 뿐, 승언이 기대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답답해진 승언이 몸을 몇 번 뒤틀 즈음. 월요가 몸을 일으켰다.

“황후에게 간다.”

* * *

“마마, 마마.”

가을 과일을 먹으면서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원웅이 급히 달려오더니 내게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황후궁에 가셨대요.”

“그래?”

“네. 이 시간에요!”

이 시간이 무슨 시간이냐면 점심시간이다. 평소 떡돌이가 황후를 찾아가는 시간은 아니지.

떡돌이는 그래도 주기적으로 황후를 찾아가 식사를 같이하긴 했는데, 보통은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저녁 식사를 한 다음에는 내게 왔고.

점심때는 가끔 나한테 오긴 하지만, 보통 떡돌이도 자기 서재나 어실에서 식사하는 듯했다.

그런데 웬일로 이 시간에 황후에게 갔을까?

“뭐 별일이 있겠지.”

궁금하긴 하지만 원웅처럼 허둥거릴 건 아닌 듯해서,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서 침대에 늘어져 기댔다.

요즘 들어 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잠이 늘어났다. 과일도 먹었겠다, 이대로 한숨 자고 싶었다.

하지만 원웅은 이불을 덮어 주면서도 여전히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긴 한데요, 마마. 폐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대요.”

“폐하 표정은 언제 봤는데?”

“어휴, 요즘은 보는 사람들마다 다 말해줘요. 이젠 다들 마마께서 가장 귀한 분이신 걸 아니까 얼마나 정보를 잘 물어다 주는데요.”

그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들긴 하네. 떡돌이가 무슨 일로 무서운 표정을 하고 황후에게 갔을까?

“…….”

음. 궁금하긴 해. 혹시라도 내게 불똥이 튀진 않으려나 걱정도 되고. 하지만…….

배를 바라보았다. 조금 나오긴 했지만 아직 움직이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훈련도 적당한 선에서 매일 계속하고 있으니, 몰래 황후궁에 가서 무슨 일인지 보고 오는 건 일도 아냐.

그렇지만 문안 때 보니, 황후궁 쪽엔 요즘 숨어 지내는 그림자들이 많은 거 같았는데.

떡돌이가 직접 찾아갔으니 그림자들 수가 더 늘었겠지. 그자들을 다 피해서 대화를 들을 수 있나?

고민하다가 나는 귀자를 불러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 * *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황후는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영영이 알리는 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옷에서 혹시라도 배가 나온 부분은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런 부분은 없었다.

황후는 월요가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그에게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면사를 벗어던진 월요는 이젠 연금과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어 보였다.

궁녀들은 월요가 아름다운 외양을 드러내자 기쁜 듯했으나, 황후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연금의 부재를 떠올리게 해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황후는 상석을 비워주었다.

“앉으시지요. 오늘은 평소와 다른 시간에 오셨습니다.”

월요는 그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황후는 야망을 바라시오, 평화를 바라시오?”

황후는 차를 타 오라고 영영을 부르려다가 흠칫해서 황제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요. 그대가 아이를 높은 곳에 올리고 싶은 야망이 있는 건지, 아이를 데리고 연금에게 가고 싶은 건지 묻는 거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황후의 눈꺼풀이 떨렸다. 아이라니. 아이라니! 마치 월요는 그녀가 회임한 걸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황후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고 태연하게 웃었다. 아주 재밌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러나 황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황후의 표정 역시도 점차 굳어갔다.

“뭘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황후는 월요가 이미 그녀의 회임 소식을 알고 왔단 걸 짐작했다. 굳이 입 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그대가 짐작하는 게 맞을 거요, 황후.”

“!”

“연금의 아이겠군.”

황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다급히 내렸다. 주먹을 꽉 쥐다가, 그녀는 각오한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협박하러 오신 겁니까?”

황제에게, 약점을 쥐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란 걸 알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내와 아이를 가진 걸 황제가 들추려면, 후궁들에게 그 사내를 보낸 게 황제 본인이란 것도 들추어야 한다는 걸.

“짐은 오자마자 본론을 꺼냈는데.”

월요가 덤덤하게 말했다.

“본론이라니요?”

“야망을 원하는지 평화를 원하는지.”

“?”

황후는 미간을 찡그리고서 황제를 보았다.

“야망이라면, 제가 이 아이를 이용해 뭔가를 할 건지 물으시는 건지요?”

“맞소.”

“글쎄요. 설령 그런 야망이 있다 해도 신첩이 대답할까요?”

“그렇군.”

월요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재차 물었다.

“그럼 평화를 원하는지만 대답하시오.”

“제가 평화를 원한다면 뭘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그 평화 속에, 아이가 살아 있소?”

“!”

황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이를…… 보는 앞에서 없애라 하는 건가? 황후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기서 월요는 대답을 읽었다.

“있나 보군.”

“…….”

“황후가 원한다면, 병사로 위장해 내보내 줄 수 있소.”

황후는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게 무슨…….”

“연금에게 보내주겠단 말이오. 아이와 함께.”

황후는 황제 쪽에서 먼저 이렇게 나오리란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황제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황제가 품고 있는 한 여인을 떠올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신첩을 조용히 내보내고, 그 자리에 천빈을 올리고자 하시는군요. 그걸 원하십니까? 제가 병사로 조용히 사라진다면 천빈은 온씨 가문의 반발 없이 황후 자리에 자연스레 오를 수 있으니까?”

“황후가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걸 선택한다면, 황실에 대한 일도 온씨 가문에 대한 일도 황후와 관련이 없어지지.”

묻지 말란 뜻인가. 황후는 무거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다 물었다.

“만약 싫다고 한다면…….”

“우리는 서로 아픈 길을 가게 되겠지.”

“!”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생각해보시오. 다시 대답을 들으러 오겠소.”

그 말을 끝으로 나가려는 황제를,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붙들었다.

“폐하.”

황제가 고개를 돌리자, 황후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여기면서도 묻고 말았다.

“천빈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녀가 사랑하는 건 연금이었다. 그녀도 이젠 알고 있었다. 황제의 사랑을 새삼 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다. 대체 어떤 점이, 이전에는 천 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황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대체 얼마나 천빈을 연모하면, 이 남자는 자기 아내가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졌다는데 기분 나빠하지조차 않는 건가?

천빈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아예 관심이 없는 건가?

“그게 황후와 무슨 상관이지?”

“이상하니까요.”

“천빈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지. 거기에 이상한 점이 있나?”

당연히 이상했다. 용고를 먹고 죽었다 깨어난 후 천빈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성격이 변했고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장공주 사건 때 보니, 그 무공 실력 역시 몹시 출중했다.

죽었다 깨어나서 성격이 변할 수도 있다지만, 죽었다 깨어나서 무공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질 수도 있나?

모든 변화가 그녀의 죽음을 기점으로 찾아왔는데.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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