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떠나는 연금, 그가 남기고 간 것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사랑을 나눈 후.
연금은 황후의 이마 위에 자신을 새기듯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서 천천히 옷을 주워입었다.
황후는 그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으나 속은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떠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떠나고 싶었다.
여기에 머물러봐야 뭘 한단 말인가. 천빈이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다고 해서, 다른 후궁들 사이에 암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기에, 가만히 있어도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존재도 몰랐던 먼 친척이 잘못해도 사람들은 황후를 탓했다.
황후는 차라리 연금과 함께 이곳을 떠나, 어린 시절처럼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었다. 복잡한 권력을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러나 연금은 그녀를 빼낼 재주가 없었고, 그녀는 죄인이 되지 않고서 이곳을 나갈 방법을 몰랐다.
연금은 그녀의 앞에서 천천히 절을 올리고 떠났다. 문이 닫히자, 황후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자신도 옷을 입었다.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고 창문을 연 다음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밖에서 “황후 마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금이 돌아왔나? 황후는 부푼 마음에 “그래.”하고 대답했다.
“안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찾아온 이는 연금이 아니었다. 황후는 실망스러움에 표정이 구겨졌다.
게다가 안비라니. 자신과 별문제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천빈에게 붙어버린 박쥐가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황후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들어오라 해라.”
* * *
안비는 연금이 황후에게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다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로 들어오지 않은 건, 연금이 떠난 직후에 찾아가면 황후가 들여 보내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조금 시간을 두고 온 건데. 이럴 수가 있나.
안비는 황후의 붉어진 얼굴과 목덜미, 땀이 고였다 마른 흔적이 남은 잔머리 등을 보고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후가 가짜 황제와 선을 넘었구나.
* * *
저녁 시간이 되자 월요는 일을 멈추고 천빈에게 가기 위해 붓을 내려놓았다.
회임하기 전에도 잘 먹던 천빈은 회임을 한 후에도 아주 잘 먹었다.
문제는 너무 찬 음식을 잘 먹다 보니, 옆에서 잔소리를 해야 한단 점이었다.
본인은 먹던 걸 못 먹게 하면 서러워했지만, 그래도 찬 음식을 마구 먹다 보면 배앓이를 하게 된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을 텐데 거기에 배앓이까지 할까 염려되다 보니, 때마다 달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월요에게 믿기지 않는 보고를 했다.
“연금이 황후에게 다녀왔다?”
월요가 중얼거리자, 곁에 서 있던 오원요와 승언이 흠칫했다.
“예.”
그림자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월요에게 작게 속삭였다.
월요의 표정이 굳자 오원요와 승언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래. 계속 살펴보아라.”
그림자가 나가자, 월요는 한숨을 내쉬고서 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대어 앉았다.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월요가 멍하게 그 상태로 있자 오원요가 걱정되어 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더라.”
월요의 대답에 오원요는 딸꾹질이 나올 정도로 놀랐다. 승언은 인상을 구기고 험악하게 권했다.
“연금을 죽이고 황후를 처벌해야 합니다, 폐하.”
“왜. 함께 바둑을 두었을 수도 있지 않으냐.”
월요의 빈정거리는 소리에 승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원요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 일을 어쩌나’ 하고 혀만 찼다.
연금은 늘 차분하고 조용조용하게 굴더니.
왜 떠나기 직전에 일을 치른단 말인가? 황제가 황후에게는 동침 때에도 그를 보내지 않았는데. 왜 멋대로…….
“어찌하실 겁니까, 폐하?”
오원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답은 하나지요.”
승언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이 일로 아주 화가 난 눈치였다.
그러나 오원요는 황제가 매정한 답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이전에 온 귀인이 회임했을 때도, 황제는 자기 아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물론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거나 높은 직책을 주거나 하진 않을 거라 했지만, 그래도 다른 황제들이라면 이조차 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화난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이번 ‘한 번’은 놔둘 생각이다.”
역시나. 한참을 생각하던 월요가 뱉은 말에는 아량이 가득했다.
“폐하!”
승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놀라 외쳤다.
“연금은 폐하의 명을 어기고 감히 황후 마마를 넘보았습니다. 황후 마마께선 연금의 존재를 아시면서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가신다니요!”
월요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지금까지 연금은 날 대신해 후궁들에게 찾아갔지. 황후와 동침했단 이유로 연금을 처벌한다면, 연금을 대신 보낸 짐이 뭐가 되느냐.”
“그건…….”
“되었다. 짐은 평생 황후와 동침할 마음이 없고, 연금은 아직 대역 상태이다.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놔두어라.”
딱 잘라 지시한 월요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오원요와 승언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월요의 뒤를 따라 나갔다.
* * *
“왜 멀쩡하지?”
안비가 수를 놓다 말고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른 궁녀들이 의아해 물었다.
“뭐가요, 마마?”
“수에 문제가 생겼어요?”
“아니…….”
안비는 다시 바늘을 잡고 움직이며 툴툴거렸다.
“그건 아니야.”
그녀는 황후를 보고 온 후, 일부러 황후궁 근처에서 ‘황후마마께서 얼굴이 붉고 땀을 흘리시더라’면서 ‘이리 더운데도 폐하와 두 분이 꼭 붙어 있었나 보다, 부럽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궁궐에는 담벼락에도 귀가 있다고 하니, 황제의 그림자 중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듣길 바라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림자가 거기 없었나? 못 들을까 봐 일부러 황후궁 근처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 얘기를 떠들고 다녔는데?
아니, 들었을 거다. 황제가 다음날 조례 때 ‘이젠 면사를 쓰지 않으려 한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황후와 가짜 황제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치운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아무 반응이 없을까? 화가 나서 펄펄 뛰어야 하지 않나?
“왜 그냥 눈감아주신 걸까. 분명 일이 커져서 둘 다 머리가 날아갈 줄 알았는데.”
무시무시한 말에 궁녀들이 겁을 먹고서 뒤로 물러났다.
안비는 씩씩거리면서 수틀을 옆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천빈 옆에서 일부러 붙어 다니며 만든 기회를 이렇게 넘겨야 한다니!
* * *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떡돌이는 면사를 벗었고, 이제부터는 면사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무슨 핑계를 대려나 궁금했는데.
그는 이제 면사 없이도 대신들을 마주할 수 있다고 둘러댔단다. 이전에도 잘만 마주 보았으면서.
어쨌든 덕택에 면사에 가려진 황제의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걸 온 궁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일기장으로 충격을 주고 간 개운호는 무슨 명령을 받고 간 건지, 그날 이후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나중에 떡돌이에게 슬그머니 물어보니, 사하비단을 없애란 명령을 받고 갔단다.
“그럼 몇 해가 걸릴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대답을 하면서도 떡돌이는 나와 이 이야기 나누는 걸 썩 좋아하는 내색이 아니었다.
개운호가 개원과 흡사하게 생긴 걸 보아서 그런 걸까? 내가 개운호 얘기 꺼내면 개원이 얘기 꺼내는 것처럼 여겨져서?
어쨌든 사하비단 일도 타천천 일도, 개운호 일도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갔다.
연금은 떡돌이가 면사를 벗으면서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고.
“그 다른 곳이 저승이야?”
“이승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태후 마마 역시 이제 장공주의 여파에서 조금 벗어나서, 문안을 받거나 산책하러 다닐 정도로는 회복되었다.
물론 산책하다가도 어느 지점을 지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셨지만.
나 같은 경우는, 한 달의 시간이 모두 다 배로 찾아왔다.
“배가 이제 조금씩 무게가 느껴지는 거 같아.”
전에는 속이 안 좋다거나 배가 살살 아프다거나 하는 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던 계란이가 이제는 제법 존재감이 생긴 것이다.
딱 보아도 배가 동그랗게 나와 있어서 안에 아기가 든 티가 났다.
게다가 내 심장, 정확히는 천소여의 심장이 느리게 뛰는 외에는 몸 역시도 아무 문제 없이 잘 보존하는 중이었고.
“다섯 달째지요?”
“응.”
“아기님은 겨울쯤에 태어나시겠네요.”
“그러게. 추울 텐데. 봄이나 가을에 나오지.”
초가을이라지만 아직도 더워서, 나는 오늘도 궁녀들을 데리고 평상으로 나와 앉았다.
배를 앞으로 내밀고 등을 뒤로 쭉 뻗어 편안하게 앉자, 궁녀 둘이 양옆에서 부채질을 해주었다.
나는 그에 맞춰 배를 문지르면서 계란이가 나와 떡돌이 중 누구를 닮는 게 좋은가 생각해보았다.
음…… 떡돌이가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손도 예쁘고 배도 예쁘지. 그렇지만 날 안 닮으면 좀 서운할 것도 같고.
그런데 또 이게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천소여를 닮는 거라 서운할 게 없는 것도 같고?
* * *
그 시각.
황후는 난감한 기분에 머리를 짚었다.
‘월경이…….’
시기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월경이 시작되지 않았다. 황후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배에 손을 얹었다.
배는 평소처럼 홀쭉했다. 물론 회임이라 추정될만한 증상도 없다.
그런데 내내 규칙적이던 월경이 갑자기 끊기다니.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침상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기쁨보다 공포심이 몰려왔다.
그녀가 태어나서 단 한 번 사랑을 나눈 인물은 연금뿐이었다. 그리고 연금은 불임이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아니, 오해일 수도 있다. 그냥 요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 일단 어의를 불러서……’
아니. 안 된다. 어의를 불렀는데 만약에 정말로 회임한 거라면?
임신 초기에는 유산하기 쉬웠다.
황제가 온 귀인이 회임했을 때는 봐주었지만, 그건 그녀가 후궁이기 때문이었다.
온 귀인이 낳은 아이는 이름뿐인 황자나 황녀로 두는 것도, 낳자마자 빼돌려 다른 가문에 보내 다른 가문의 아이로 자라게 하는 것도 쉬우니까.
그러나 그녀는 황후였다.
그녀가 낳는 아이는 적자가 되는 거였고, 가장 정통성 있는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황제는 황후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란 걸 아니, 자신이 아이를 가진 걸 알면 초기에 지우게 할 게 틀림없었다.
이미 치워버린 대역의 존재를 밖으로 끄집어올리는 것보단 그게 편할 테니까!
‘어의에게 진단받아선 안 된다.’
황후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자신이 사가에서부터 데려온 궁녀 영영을 불렀다.
그녀는 장공주의 팔이 빠진 사건으로 수사방에 끌려갔지만, 지금은 다시 황후의 곁에서 지내고 있었다. 일반 궁녀로 강등되긴 했지만.
물론 말만 일반 궁녀일 뿐, 황후는 그녀를 상궁처럼 취급했으며, 황후궁의 그 누구도 영영을 일반 궁녀도 대하진 못했다.
“영영. 영영.”
“네, 마마. 왜 그러세요?”
황후가 창백해져서 부르자, 영영이 다급히 다가와 황후를 부축했다.
“또 머리가 아프세요?”
“영영. 궁녀를 하나 새로 들여야겠다.”
“궁녀요?”
“의술을 할 줄 아는 궁녀로.”
“네?”
영영은 어리둥절해서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입을 뻐끔거렸으나, 자신이 회임했을지도 모른단 말은 꺼내지 못했다.
연금과 그녀가 딱 한 번의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녀는 곁에 없었다.
정말 회임이라면 영영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지만, 확실치 않은 지금은 함구해야 했다.
그녀는 영영의 팔을 두드렸다.
“의방을 연 여인을 데려와선 안 된다. 가문 대대로 의원을 한 집안 여식들을 살펴보거라. 의방을 열지 않아도 의술을 배운 여식들이 있을 거다. 그중에서 궁녀로 들일 만한 아이를 찾아 데려와. 아무도 모르게 확인할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