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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30화 (230/283)

##  230화. 작별 인사를 하러 와서

요즘 들어 안비가 자꾸 나한테 뭘 주려고 한다.

게다가 이전에는 내가 무슨 말만 했다 하면 화가 나서 꽥꽥 오리처럼 변하더니.

요즘은 날파리처럼 파르르 떨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다.

“재밌네요.”

“그러게. 구경하는 재미가 있네.”

그 모습이 은근히 내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아져서, 촉비와 연비는 심심하면 찾아와 안비를 놀려대고는 그녀가 인내를 수양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물론 안비는 그때마다 더욱 열불이 나는 듯했지만, 놀랍게도 그조차 다 흘려 넘겼다.

“득도하려고 수행하는 거 아닐까요?”

“득도하려면 속세를 떠나야지.”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연히 떡돌이가 내 방에 왔을 때 안비가 죽치고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승언과 오원요는 처음에는 안비가 날 이용해 총애를 나누어 받으려는 거라 주장했지만, 안비는 또 그 정도로 오래 죽치고 있진 않았다.

일식경, 길어도 이식경을 넘기지 않고 돌아갔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보니 시기가 딱 맞아떨어져서, 안비와 떡돌이, 나 이렇게 셋이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반숙아. 너무 차가운 것만 먹지 말고. 따뜻한 국물을 마셔야지.”

“이렇게 더운 날엔 차가운 걸 먹어야 해요, 폐하.”

“감기 걸리지 않느냐.”

“차가운 거 조금 먹는다고 감기 걸리지 않아요.”

“조금이 아니잖느냐. 벌써 다섯 그릇째인데.”

얼음을 띄운 냉국을 마시려는 나와 말리는 떡돌이가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식사하던 안비가 돌연 “하아아아.” 하고 길게 한숨을 뱉었다.

쳐다보자, 그녀는 젓가락을 툭 내려놓으면서 장난치듯 투정을 부렸다.

“정말로 부럽네요. 폐하는 황후 마마와 천빈, 이렇게 딱 둘만 어여삐 여기시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떡돌이가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나는 그사이 떡돌이가 못 먹게 말리던 냉국을 가져다 황급히 입으로 가져갔다.

떡돌이는 뒤늦게 발견하긴 했지만 이미 입에 들어간 거라 말리진 못했다.

“체한다 천빈. 천천히 마셔라.”

이렇게 말할 뿐.

안비는 내가 냉국을 마시는 걸 지켜보며 아까 떡돌이가 한 질문에 대답했다.

“왜 그리 생각하긴요. 눈에 훤히 보이는걸요, 폐하.”

“보인다고?”

“하하, 폐하. 일부러 그러시나요? 후궁전 사람 모두에게 물어도 다 같이 대답할 거예요. 폐하께선 늘 천빈 아니면 황후 마마 곁에 계시는걸요.”

나는 냉국을 다 마시고서 탁자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떡돌이를 보니, 면사 위로 보이는 그의 눈매가 평소보다 삐쭉했다.

* * *

“황후는 대역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자와 가까이 지내지. 연금도, 짐이 일부러 황후와의 시침 때 그를 보내지 않는 걸 알면서도 후궁전에 갈 때마다 황후 곁에 있다 한다.”

월요는 은밀하게 안비의 말이 정말인가 확인했다.

그 결과 안비가 조금 과장을 하긴 했으나, 아주 틀린 말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황후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연금이 황후에게 가장 많이 찾아가는 건 맞았던 것이다.

한 방에 있진 않았으나 산책을 하거나 경치를 보거나 하는 등으로.

“이제 내보내야겠다.”

어쨌든 대역을 내보내면 이전보다는 행동이 불편해지는 건 맞다.

이 때문에 대역을 그만 쓰기로 결정을 내리고서도 꾸물거리던 월요는, 완전히 마음을 다잡았다.

“연금을 불러오라.”

* * *

“이제 대역은 그만 쓸 작정이다.”

불려온 연금은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다가 놀라서 황제를 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다급히 무릎 꿇었다. 안색이 새파란 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 듯했다.

월요는 고개를 젓고서 일어나라 손짓했다.

“뭘 상상하는지 훤히 보이는구나. 하지만 그건 아닐 거다.”

연금은 그래도 일어나지 않고서 월요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오랫동안 날 대신해 많은 일을 해주었다. 네가 궁전에서의 일을 함구한다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게 해줄 거다. 평생 즐겁게 먹고살 만한 재물과 도와줄 사람을 붙여주마.”

월요가 웃으면서 그 말을 하고서야, 연금은 안도해서 천천히 일어섰다.

하지만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평생 이렇게 살 거란 예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은 더 하게 될 줄 알았다.

혹은 몇십 년 정도. 그런데 이렇게 한순간에 자유를 얻게 되자 어리둥절했다.

황제가 붙여준다는 ‘도와줄 사람’이 감시자란 건 알았으나,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었기에 나쁘지 않았다.

죽여서 함구시킬 생각만 아니라면야.

“언제 떠나야 좋을지 말씀해주십시오, 폐하.”

“준비할 게 필요하니 열흘 정도는 여기 더 머무르도록 해라.”

“준비할 거라면…….”

“예상보다 급히 보내게 되지 않았느냐. 네가 지내기 좋은 집을 알아보마. 마음에 들지 않거든 추후 이사 가도 좋다. 하지만 당장 지낼 곳은 구해야지.”

“예.”

“단, 금아.”

“네, 폐하.”

“앞으로 칠 일간은 네 방에서만 지내도록 해라. 답답하면 방 주위 마당은 산책해도 좋지만, 그 이상 나가진 마라.”

“예.”

* * *

연금은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면사를 벗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면사를 쓰면 황제와 흡사한 얼굴이지만, 면사를 벗으면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모르는 사람이 나란히 선 둘을 본다면 친척이나 형제로 여길 순 있겠지만, 동일인이라 헷갈리진 않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코를 손바닥으로 가려보다가, 손을 내리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면사를 쓰지 않고 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 모습으로.

-아주 훤칠하네!

연금은 자신이 면사 벗은 모습을 보고서 승언이 외치던 말이 떠오르자, 민망해져서 거울을 돌렸다.

하지만 곧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궁전을 떠나면 평생 황후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살 것이다.

그는 궁궐 대문조차 넘지 못하고, 아주 먼 곳에서 황후의 소식 정도나 간간이 접할 터.

그 소식조차도 황후가 지금처럼 조용히 살아간다면 접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천빈이 아이를 낳으면, 앞으로 수십 년은 아이와 천빈 이야기뿐일 테니.

연금은 초조하게 탁자를 두드리다가 하늘을 보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몇 시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딱 한 번만.’

연금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칠 일간 방에서 지내라 했지만, 그게 설마 오늘도 포함한 건 아닐 거다. 아마 내일부터겠지.

그러니 내일부터는 황후를 볼 수 없다.

내일부터 평생 동안. 오늘은 괜찮을 거다. 설마 오늘부터 셀 리야 있겠는가.

‘딱 한 번만 뵙고 가자.’

떠나기 전, 황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 * *

황후는 뿌연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사이의 하늘은 새파란데, 그 주위는 어두운 안개 같은 것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황후는 안비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우정을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배를 탔다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비가 천빈의 처소에 문지방이 닳도록 다닌단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문안 때에도 안비는 천빈의 옆에서 무어라 속삭이며 웃어대고 있었다.

촉비에 이어 안비까지 천빈에게 간 것이다.

안비를 마음에 들어 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는 자존심 상하고 속상한 일이었다.

앞으로 몇 해, 아니 한 해만 지나도 이런 게 더 뚜렷해지겠지.

그때였다. 창밖에 보이는 나무 뒤에 황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연금?’

아니, 연금이었다. 황후는 연금과 황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저건 분명 연금이었다.

황후는 밖으로 나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역시나. 그녀가 가까이 가자 황제 복장을 한 이가 소심하게 인사를 건넸다.

“황후 폐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곁에서도 잘 안 들릴 만큼 작았으나, 황후는 누가 들을세라 연금을 자신의 방에 끌어들였다.

“어? 마마, 폐하 아니십니까?”

“차를 가져와라.”

황후는 소란스러운 궁인들에게 지시하고서, 연금을 긴 의자에 앉혀 놓고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게냐?”

방 안에 아무도 없게 되자 연금은 황후에게 절을 올렸다.

“폐하!”

황후는 놀라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작게 항의했다.

“이런 행동을 하지 말라니까?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연금은 그제야 일어섰다.

황후는 연금을 일으켜 세우느라 닿았던 손을 내렸다.

손끝에서 열이 오르는 듯해서, 그녀는 오히려 평소보다 딱딱하고 무서운 어조로 말했다.

“얼른 돌아가라.”

연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 저는 이제 여길 떠나게 되었습니다.”

황후는 단호하게 돌아서다가 흠칫해서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폐하께서 이제 대역이 필요 없으시다 하십니다. 앞으로 칠 일 후면, 저는 이곳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황후는 당황해서 평소만큼 차갑게 묻지 못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연금을 보았다.

어느 순간, 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하자 갑자기 꿈에서 깨버린 느낌이었다.

“왜?”

황후는 아까 이유를 들었으면서도 얼결에 또 물어보다가,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단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연금은 황후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황후 마마께 제 얼굴을 보여드려도 괜찮을까요?”

“!”

“이젠 황후 마마를 평생 뵙지 못할 겁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모르셨겠지만, 저는…….”

연금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하고 싶은 말을 감추었다.

“황후 마마를 많이 존경했습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금은 천천히 면사를 벗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는 탁자를 손으로 잡고 거기에 기대선 채 아직도 혼란한 감정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평생 그냥 거기에 있을 거라 여겼던 연금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하자 생각보다 상실감이 컸다.

연금이 천천히 면사를 다시 쓰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느리게 흘러갔다.

황후는 그 광경을 보며, 자신도 연금을 좋아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황제가 자신에게만 대역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을 때 기쁘기보다는 ‘왜?’라는 생각만 들었던 일.

영영이 임신한 후궁이 없는 건 황제의 문제가 아니냐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낸 일.

온 귀인이 연금과 동침할 거란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일.

연금이 자신의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자 술을 한 모금 마신 듯 기분이 좋던 일.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약한 마음을 털어놓게 되는 일……

같은 복색을 하고 있어도 면사를 쓰고 있어도 연금은 바로바로 구분이 가던 일까지.

“폐하.”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연금을 붙잡고 말았다. 나가려던 연금이 고개를 돌리고 멈춰 섰다.

황후는 연금의 소맷자락을 잡고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마?”

“언제 떠난다고?”

“떠나는 건 칠 일 후이지만, 내일부터는 처소 밖으로 나가지 말란 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인사를 온 것입니다.”

“…….”

“마마?”

황후가 소매를 잡고 계속 쳐다보자, 연금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황후는 손이 떨려와 그의 소매를 놓았다.

대신 다른 쪽 손으로 그의 면사를 벗기고 천천히 뒤꿈치를 들어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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