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너의 내리사랑이 필요해
안비는 믿을 만한 측근 궁녀를 불러 놓고서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측근 궁녀, 그중에서도 친정에서 데려온 궁녀들은 어차피 안비와 한배를 타고 운명을 같이할 이들이기에 이런 엄청난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다.
궁녀들은 처음에는 기겁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서 신중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천빈을 협박하는 건 절대로 안 돼요. 천빈 곁엔 진짜 폐하가 계시잖아요.”
“게다가 회임 중이니, 자칫 잘못하다간 일이 꼬이는 수가 있어서요.”
“마마. 가짜 황제를 협박하는 것도 안 돼요. 어차피 폐하께서 만든 사람일 거잖아요. 잘못 협박하면 폐하를 협박하는 꼴이 돼요.”
안비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남는 건 황후인가. 황후는 가짜 황제와 만나고 있잖아. 이걸 이용하면 어때? 폐하가 아닌 다른 사내와 놀아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 다른 사내가 폐하께서 만든 가짜잖아요, 마마.”
“다짜고짜 협박했다간 황후와 폐하, 온씨 가문까지 사방에서 공격할지도 몰라요.”
“맞아요, 마마. 어쨌든 가짜 황제는 폐하의 비호를 받고 있는걸요.”
안비는 끙끙 앓다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면 이 중요한 정보를 그냥 묻고 가란 거야?”
측근 궁녀는 안비의 화난 표정을 보며 물었다.
“마마께선 사용하고 싶으신 거예요? 꼭?”
“당연하지.”
안비는 코웃음을 치다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사실 안비는 천빈도 천빈이지만 황후도 싫었다.
천빈이 그녀가 준 독차를 마셨다는 누명을 썼을 때, 황후는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범인으로 몰아갔다.
“차 사건 때 황후가 제대로 조사해주었으면 누명을 안 쓸 수도 있었어.”
안비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황후는 당시 본궁에게 화를 냈지만, 목소리는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세히 조사해보면 내가 범인이 아닌 걸 알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넘어간 게 분명해. 그뿐이냐? 궁술 시합 때는 어떻고?”
궁녀들은 이번에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일이 안비의 심증뿐이라면, 이번 일은 궁녀들도 인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황후를 대신해 화살에 맞았다. 누가 나 대신 화살을 맞았으면 미안해서라도 잘 챙겨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도 다들 천빈 천빈!”
“다른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황후는 마마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됐습니다!”
안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황후와 한패라고 해서 황후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파벌이 나뉘다 보니 싫어도 이득이 되는 쪽에 붙었을 뿐.
황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후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비는 이번에 잡은 이 비밀을 황후를 공격하는 데 쓰고 싶었다.
한참 머리를 굴린 끝에 마침내 안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폐하께서 가짜 황제를 세우더라도, 그가 황후와 연애하라 세운 건 아니겠지.”
* * *
“천빈. 있어요?”
평상에서 부채질을 받으며 쉬고 있는데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안비?”
안비였다. 반사적으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보자, 안비는 웃으면서 들어왔다가 덩달아 표정을 구겼다.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안비 마마는 나랑 안 친하잖아요. 올 일이 없는데 오니까 이상해서요. 심지어 상냥하게 말했어…….”
중얼거리자, 안비의 표정이 대번에 썩어들어갔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안비는 호통을 칠 거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억지로 미소를 짓더니, 내 곁으로 사뿐사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날도 더운데 회임해서 힘들 것 같아 왔죠. 줄 것도 있고.”
말을 마친 안비가 손짓하자, 그녀의 궁녀가 예쁜 바구니를 가져와 내밀었다.
“좋은 바구니네요.”
멍하기 그걸 보고 중얼거리자, 안비는 웃더니 바구니를 받아 들고서 바구니를 덮어둔 하얀 천을 들췄다.
“어?”
안에 든 건 알록달록한 예쁜 아기용 옷들이었다.
아니, 이걸 옷이라 하나? 뭐라 하지? 포대기……치고는 작고. 하여튼 아기를 싸는 천 같은데.
어쨌든 아기용 물건은 확실하다.
용도는 태후 마마가 알 테니 나중에 가서 물어봐야지. 부성도 원웅도 아기를 낳은 적이 없으니 용도를 모를 거야.
“이거 선물이에요?”
어쨌든 날 주는 것 같기에 좋아서 묻자, 안비는 거들먹거리며 제일 위에 놓인 한 장을 내밀었다.
“자 봐요. 얼마나 멋지게 수를 놓았는지.”
“이야, 안비 마마. 자수 잘 놓네요.”
“그렇죠?”
“근데 나한테 왜 시켰던 거예요? 난 자수 잘 못 하는데.”
“…….”
뭐지? 그냥 질문했을 뿐인데, 안비가 얼굴이 붉어져서 괜히 평상 아래를 째려보고 있다.
“밑에 뭐 있어요?”
개미라도 지나가나 싶어서 같이 아래쪽을 보자, 안비는 이를 우드득 소리가 나게 갈더니 콧김을 뿜었다.
‘왜 저러지?’
* * *
“마마를 괴롭혔는데 이제 와서 생색내려니 민망해서 그런 거죠, 뭐.”
안비의 심경은 그녀가 돌아간 후 원웅이 해석해주었다.
“아, 그런 거야?”
“네.”
그 사이. 부성은 안비가 주고 간 아기옷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면서 매의 눈으로 살펴댔다.
귀자 역시 마찬가지로 옷의 바느질선을 한 땀 한 땀 살피는 건 물론 옷을 두 손으로 툭툭 털어대기까지 했다.
저건 또 뭔가 싶어서 보고 있자니, 원웅이 또 해석해주었다.
“안비는 마마를 싫어했잖아요. 그런데 선물을 주고 갔으니, 이게 잘 지내잔 뜻으로 주고 간 건지, 아니면 꿍꿍이를 부리는 게 아닌지 살피는 거예요.”
“꿍꿍이?”
“저주를 쓴 부적을 넣는다거나, 실밥이 나오게 해서 아기씨가 입었을 때 느낌이 안 좋게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부성이 옆에서 유심히 들여다보던 노란 옷을 내려놓으며 말을 더했다.
“아니면 이상한 글귀나 그림을 수 놓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오늘 준 물건 중엔 그런 게 없어요, 마마.”
귀자도 열심히 살피던 옷을 내려놓고서 인정했다.
“제가 볼 때도 옷에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마마. 게다가 안비는 자수 솜씨가 대단합니다.”
“그래?”
“네.”
나는 사람이 아니라 거북이한테 입혀야 할 정도로 조그만 옷을 들어 보고 앞뒤를 확인하다 내려놓았다.
나는 이런 데 안목이 없으니 이게 좋은지 아닌지 모르겠어. 하지만…….
“잘 보이고 싶으면 나도 굳이 싸울 마음은 없어. 내가 싸워댔다가 나중에 불똥이 계란이한테 튀면 어떡해?”
“그럴 리는 없어요, 마마. 계란 아기씨는 이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분이 되실 텐데요.”
“맞아요. 다른 후궁들도 다 아이가 있으면 모를까, 현재로선 유일한 황손이신 걸요.”
“계란 아기씨가 잘못되면 궁궐 전체에 피바람이 불 테니, 아기씨를 싫어하는 분은 차라리 곁에 오려고도 하지 않을걸요?”
그런가? 멀뚱히 배를 쳐다보고 있자니, 참. 이 아이는 나와 시작부터 다른 운명을 타고났구나 싶다.
음…… 하지만 떡돌이가 약속했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계란이를 가장 중히 여겨도, 떡돌이한테 가장 중요한 건 나일 거라고.
* * *
“너는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는 계란이를 가장 사랑하고, 계란이는…… 계란이도 날 가장 사랑하면 되겠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 이틀 만에도 훌쩍훌쩍 바뀌나 보다.
계란이보다 날 더 소중히 여기겠다던 떡돌이는, 내가 다짐을 이야기해 주자 당황해서 물었다.
“그럼 짐은 누가 가장 사랑해 주느냐?”
“태후 마마.”
“!”
내 논리가 틀렸나? 아주 뛰어난데? 떡돌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멍하게 쳐다본다.
“왜 그래?”
그게 어리둥절해 묻자, 떡돌이는 당혹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짐이 너를 가장 사랑하면 너도 짐을 가장 사랑해주어야지. 왜 네 사랑은 계란이한테 가는 거지?”
“내리사랑이라잖아.”
“그럼 짐도 계란이를 가장 사랑해야 하지 않나?”
“……내가 떡돌이 너보다 나이가 어려. 그러니 날 사랑하는 것도 내리사랑이야.”
“그 내리사랑이 아닐 텐데. 그리고 네가 나보다 어리다니? 그거 확실한 게냐?”
“암!”
“몇 살인데?”
“…….”
내가 멀뚱히 쳐다보자 떡돌이가 눈썹을 들어 올린다. 나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난 폐하보다 한 살이 어려.”
하지만 떡돌이는 여전히 불신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몇 살인데?”
“계란이 볼래?”
내가 배를 보여주어도, 그는 한 손으로는 배를 만지면서도 눈은 가자미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결국 나는 떡돌이의 손등을 찰싹 쳐서 치우게 한 다음 솔직하게 고백했다.
“부모도 모르는데 나이를 어찌 알아? 난 내 나이를 몰라.”
“!”
“떡돌이 네가 연상이 좋으면 한 살 위라 생각하고 동갑이 좋으면 동갑이라 생각하고 연하가 좋으면 한 살 아래라 생각해.”
“아. 짐이 골라도 되는 게냐.”
떡돌이는 떨떠름하게 나를 보더니,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두 손 사이에 넣고 조물조물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한 살 연상이라 하자.”
“진짜 고르네.”
“짐보다 네가 한 살 많은 거로 해라. 그리고 내리사랑으로 짐을 가장 사랑해다오.”
“!”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다니.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떡돌이는 웃으면서 내 턱을 위로 올려 입을 닫아주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좀 기분이 좋아졌다. 흠흠. 흠흠흠.
“떡돌이는 내 사랑이 그렇게 궁해?”
“표현을 참. 듣는 사람 묘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고마워.”
“칭찬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다니 다행이다.”
떡돌이는 내 양 뺨을 붕어처럼 만들고서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내 코에 자기 코를 문지르고서 웃었다.
“폐하는 날 너무 사랑해서 큰일이네.”
“이 도도한 낭자가 대체 어느 집 낭자지?”
“난 부모를 모른다니까.”
“…….”
웃고 있던 떡돌이 표정이 일그러지자, 승언이가 뭐라고 작게 구시렁거린다.
자세히 들어보니 ‘분위기가 좋아질 만하면 깬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분위기를 깨는 건가 싶어 조금 후회가 된다.
나는 무거운 분위기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결국 떡돌이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계란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폐하를 가장 사랑할게.”
“계란이가 태어나면?”
“떡돌이랑 계란이를 똑같이 사랑할게.”
“짐은?”
“나를 좀 더 사랑해줘. 손톱만큼이라도 더.”
승언이가 또 뒤에서 편파적이라고 마구 구시렁거린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상해서, 나는 오랜만에 그를 끌어들여 주었다.
“하지만 괜찮잖아. 승언이가 폐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니까.”
승언이와 떡돌이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진다. 둘 다 그건 싫은 모양이다.
물론 나도 승언이 얘기는 농담한 거다. 하도 저놈이 구시렁거려서.
그렇지만…… 정말로 떡돌이가 손톱만큼은 계란이보다 반숙이를 더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떡돌이는 자기를 가장 사랑해주는 태후 마마가 계시잖아.
계란이는 그야말로 만백성의 사랑을 받을 운명을 타고났고.
하지만 나한텐 정말 떡돌이 뿐인걸.
떡돌이가 아니면 이 세상에 나를 첫째라고 해주는 사람은 없단 말이야. 이런 마음은 가지면 안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