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안비, 알아채다
“대신들은 이 일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회임한 천빈 마마를 챙기는 게 옳다고 그러고, 어떤 이들은 정실인 황후 마마를 챙긴 게 옳다 합니다.”
“폐하께서 천빈 마마를 먼저 감쌌다간 대신들이 비난했을 테니,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오원요와 승언, 다른 그림자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월요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천빈보다 황후를 더 아끼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천빈은?”
귀자가 대답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십니다.”
천빈이 가짜 황제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들었는데도 월요의 표정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연금을 불러오라 지시했다.
잠시 뒤 연금이 불려오자, 월요는 차갑게 꾸짖었다.
“문안 자리에서 있던 일을 들었다.”
“송구합니다.”
“천빈은 회임한 몸이었는데, 너는 황후를 감쌌다. 물론 황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황후를 감싸야겠지. 하지만 그릇이 떨어진 것도 천빈의 머리 위였다 들었다.”
연금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리 송구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황제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더욱 깊게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황후 마마를 두고 후궁을 감싸면 이상해 보일 거라 여겼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판단을 내렸는가.”
“!”
연금은 황제의 꾸짖음에 덤덤히 눈을 내리깔았다.
월요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물러나라 손짓했다.
하지만 연금이 사라지자마자 월요의 표정은 몹시 애매모호하게 변했다.
그 변화를 눈치챈 오원요가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연금이 황후 마마를 구한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가 황후를 구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게 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꽤 쓸모 있는 대역이었는데. 슬슬 대역을 없앨 때가 되었나.”
월요의 중얼거림에 오원요와 승언이 시선을 주고 받았다.
황제가 대역을 만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신들이 후사를 이어야 한다며 강제로 여러 후궁들과의 합방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천빈이 회임을 했으니, 대신들의 그 동침 요구는 이전보다는 줄어들긴 할 터였다.
아직 아이가 하나이니 완전히 없어지진 않겠지만.
오원요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말씀은 연금을 죽이시려는……?”
“죽이고 할 것도 없다. 내가 면사를 벗고 다니고, 이제 면사를 쓰지 않겠다 한마디 말만 하면 될 일이니.”
오원요는 조금 안심했다.
비밀을 지키기 가장 쉬운 방법은 죽여서 함구하는 거라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대역을 맡아오며 이래저래 얼굴을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던가.
이대로 죽는다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이다.
그러나 승언은 월요의 안전이 우선이라 여기기에 냉정하게 물었다.
“입을 막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 * *
‘입을 막으려 들지도…….’
황후는 꽃 줄기를 자르면서 생각했다. 그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감쌌을 때, 일순간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위급한 순간, 누군가 그녀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행동해준 건 난생처음 겪은 일이었다.
그의 품 안에서 황후는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도 좋겠다고, 아주 짧게 생각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오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연금은 대역이었다.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되 진짜 황제는 아니었다.
연금이 황제의 대역을 오래 할 수 있던 건 체형이나 목소리, 나이, 눈과 입이 흡사하고 성품 역시도 온순한 데다 입이 무거운 덕이었다.
그런 연금이 황제의 방향과 전혀 다른 행동을 저질러 버렸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천빈의 머리 위로 그릇이 떨어지는데, 생판 다른 곳에 있던 황후를 감싼 것.
황제가 과연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흘러내리려 하는 대역을 이전만큼 가치 있게 여길까? 연금이 이 일로 혹시 ‘치워지는’ 건 아닐까?
* * *
안비는 어떻게 이 ‘무색무취 목화향’ 한 방울을 황제에게 묻히나 고민하다가, 곧 자신의 생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이걸 이용하면 되겠다.’
안비는 궁녀들에게 아름다운 꽃다발을 준비하게 한 다음, 꽃다발을 손으로 쥐는 부분에 교묘하게 무색무취 목화향을 한 방울 묻혀두었다.
그러고서 황제를 찾아가,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곧 제 생일이오니, 부디 이걸 받아주십시오 폐하.”
월요는 탐스럽게 피어난 꽃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생일인데. 가지고 싶은 걸 말하지 않고 이걸 짐에게 준다고?”
“폐하께서 이 꽃을 화병에 넣어 가까이 두시고, 이걸 보실 때마다 신첩을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곧 생일인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애매했던지라, 월요는 손을 뻗어 안비가 건네는 꽃다발을 직접 받아들었다.
“그러지.”
안비는 그가 꽃다발을 쥐면서, 그녀가 묻혀둔 향 한 방울이 황제의 손에 닿는 걸 보았다.
잠시 뒤. 정말로 황제에게서 희미하게 목화향이 나기 시작하자, 안비는 뛸 듯이 기뻤다.
어쨌든 혜비의 말처럼 황제가 둘이라면, 이걸로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진짜 황제와 가짜 황제를 구분하게 된다면 뭘 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게 나을 것이다. 뭘 하더라도.
생각을 마친 안비는 흐뭇하게 웃고서 어전을 빠져나왔다.
* * *
“안비도 이제 여기 와?”
떡돌이를 만나러 어실로 가는데, 뜻밖에도 안비가 어실 앞에서 가마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나는 안비가 탄 가마가 옆을 지나가자마자 슬쩍 귀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게요. 제가 알기로는 처음 오셨습니다.”
“그래?”
“마마께서 어실에 자주 찾아가면서 폐하와 정을 쌓으셨으니, 다른 후궁 마마들도 따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어느새 내가 탄 마차가 어실 앞에 도착했다.
나는 가마에서 내려 남들 보란 듯이 별로 부풀지도 않은 배를 감싸고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부성과 원웅은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었지만 괜찮다. 나는 계란이가 자랑스러운걸.
나중에 계란이가 태어나면 계란이를 안고서 이러고 다녀야지.
계란이가 머리가 좀 굵어진 다음 부끄러우니 제 발로 다니겠다고 하면 충격이겠지만.
열 살 때까지는 들고 다니고 싶은데. 열 살이면 키가 어느 정도일까?
“폐하, 폐하.”
“반숙아.”
“열 살이면 키가 어느 정도예요? 못 들고 다녀요? 웬 꽃이에요?”
“질문 좀 끊어서 하거라.”
어실 안에 들어가며 질문을 연거푸 던지자, 떡돌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젓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가라 손짓한다.
귀자와 원웅, 부성, 오원요가 나가자 나는 얼른 떡돌이의 옆으로 가 그를 반 정도 엉덩이로 밀어내고 앉았다.
“…….”
떡돌이는 반쯤 밀려난 채 당황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웃음을 터트리기만 할 뿐 쫓아내진 않았다.
“차라리 짐의 무릎에 앉거라.”
“3인분이라 무거울걸?”
“반숙이는 무겁지만 아직 계란이는 가벼워서 괜찮단다.”
“뭐야?”
째려보자,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 척하다 말했다.
“열 살이면 아마 키가 이 정도쯤일걸.”
“들고 다닐 만하네.”
“……들고 다니긴 크지 않을까?”
떡돌이는 내 머리 높이를 한 번, 열 살배기 아이의 키 높이를 한 번 손으로 짚어 보더니 다시 중얼거렸다.
“들고 다니긴 클 텐데. 갑자기 그건 왜 물은 게냐?”
“계란이가 태어나면 열 살 때까지 들고 다니고 싶어서.”
“……계란이는 보따리가 아닌데.”
“하지만 들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싶어.”
“자랑하고 다니지 않아도 다들 네 자랑거리라 여길 거다.”
“그래도. 들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싶어. 내가 가진 최초의 가족…….”
최초의 가족이라고 말하려다 보니, 떡돌이가 나를 무섭게 쳐다보고 있어서 얼른 말을 바꿨다.
“은 떡돌이지만, 나랑 이어진 최초의 혈연이잖아. 게다가 생각해보니까, 널 닮으면 정말로 똑똑할 것 같아.”
떡돌이는 잠시 미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 같이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떡돌이의 호위란 이유로 아직 안 나가고 우리랑 같이 있던 승언이가 말했다.
“마마. 열 살 때까지 아기씨를 안고 다니시면 역사서에 기록될 겁니다.”
“상관없는데.”
“특이하단 쪽으로요.”
“아, 난 괜찮아.”
“수달이십니까…….”
“수달이 왜?”
승언이가 이마를 짚는 걸 보니 내가 뭐 말을 잘못했나? 열 살 때까지 안고 다니는 게 그리 이상한가?
어리둥절해서 떡돌이를 보자, 떡돌이는 애매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갑자기 휙 몸을 돌리며 화병에 꽂힌 꽃다발을 가리켰다.
“이게 뭐냐고 물었지?”
말을 급하게 돌리는 거 같은데…….
“안비가 와서 주고 갔다. 자기 생일이라고.”
“자기 생일인데 왜 떡돌이 너한테 꽃다발을 줘?”
“나야 모르지.”
어깨를 으쓱하는 떡돌이를 보는데, 아주 아주 연하고 희미한 향이 느껴진다.
나는 떡돌이의 손을 잡아가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서 킁킁거리자, 승언이가 뭐라고 막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잡음처럼 들려왔다.
“천빈? 왜 그러느냐?”
“무슨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
“먹물 냄새인가?”
“모르겠어. 너무 희미해서.”
“?”
혹시나 싶어 나는 떡돌이의 다른 손을 가져다가 코에 대고 맡아보았다.
“이쪽에선 안 나.”
하지만 그 희미한 향은 떡돌이의 다른 쪽 손에서는 나지 않았다.
얼굴에 대고 맡자, 얼굴에서도 안 난다. 딱 오른손에서만 나고 있다.
“짐은 모르겠는데.”
떡돌이는 자기 손에 대고 날 따라서 냄새 맡는 시늉을 했지만, 결국 고개를 기웃거리며 손을 내려놓았다.
나도 뭔가…… 뭔가 냄새가 난단 느낌만 있을 뿐이라, 결국 더 설명하지 못하고 조언만 했다.
“혹시 모르니 어의를 불러서 괜찮은지 물어봐.”
“독 같으냐?”
“아니, 독은 아닌 거 같은데. 이건 내 전공이 아니니까.”
* * *
며칠 동안 안비는 문안도 열심히 다니고 황제가 출몰하는 곳에 한 번씩 가보았다.
그 결과 그녀는 정말로 황제가 둘인 걸 알게 되었다. 어떨 때는 목화향이 풍겼고, 어떨 때는 풍기지 않은 것이다.
씻어내도 열흘간 효과가 간다더니. 정말로 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엿새쯤 되었을 때. 안비는 ‘진짜 황제’와 ‘가짜 황제’의 행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목화향이 나는 황제는 주로 천빈과 있거나 어실에 있었다.
목화향이 없는 황제는 문안 때 오거나, 가끔 후궁들이 머무는 구역에 찾아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그중에서도 ‘목화향 없는 황제’가 가장 많이 만나는 상대는 황후였다.
8일째 되는 날. 안비는 진짜 황제가 천빈과 가까운 사이이고, 가짜 황제가 황후와 가까운 사이란 걸 알아차렸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실쭉 웃으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 어마어마한 정보를 어떻게 사용해야 유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