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네
뒤를 돌아보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황후였다.
“천빈?”
황후는 나를 보고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가짜 황제를 보았다.
나는 황후에게 얼른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서 고개를 들어 보니, 황후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가짜 황제를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좀 미묘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폐하를 뵙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황후는 휙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 버렸다.
‘뭐지?’
의아해하는 사이, 가짜 황제는 바로 그 뒤를 쫓았다.
‘응?’
순식간에 청적에 남겨진 사람은 나뿐이었다. 뭐야. 왜 이래? 뭐. 나야 좋지만.
하지만 편하게 바위에 앉으려니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든다.
황후는 가짜 황제가 있는 걸 아나? 얼핏 보니 가짜 황제가 황후를 쫓아가는 것 같았는데
아니, 뭐 모르면 모르는 대로 상관없을 테고. 알면 아는 대로 상관이 없긴 하겠지만…… 아아! 몰라!
결국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서 나는 가짜 황제와 황후의 뒤를 쫓았다.
가짜 황제가 황후 뒤를 바로 쫓아가는 모습이 신경 쓰여서 그렇다.
개원이랑 개운호한테 속아 넘어간 내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래서.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청적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드문 후원에서 마침내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은신술을 펼쳐 최대한 내 흔적을 지운 다음,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아. 저기 있네.
나는 사람이 팔을 완전히 뻗어도 안을 수 있을 둥 말 둥 할 굵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가짜 황제와 황후는 그 나무에서 스무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뭐, 사실 가짜 황제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고 있어서 표정이 다 보이지 않긴 한데. 그래도 눈이 슬퍼 보인다.
황후 쪽도 표정 변화가 그리 크지는 않다. 평소와 흡사하게 무표정에 가깝다.
평소와 다른 것은 입이었다. 입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평상시보다 한 세 배는 빠르게 하는 것처럼.
‘황후도 가짜 황제가 가짜란 걸 아나? 그래서 저러나?’
의구심을 품고 지켜보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낮은 데다 아주 가까운 곳에 숨어 있는 건 아닌지라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쨌건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조급하지 않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연금은 황후에게 변명하는 중이었다.
“천빈과 일부러 따로 만난 게 아닙니다, 황후 마마. 제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천빈이 갑자기 나타나서…….”
“변명할 필요 없다.”
잠시 그 말을 들어주었으나, 황후는 곧 딱 잘라서 변명을 끊어냈다.
“천빈은 폐하께서 가장 아끼는 후궁이니, 만났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등 없지. 본궁에게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해.”
말은 저렇지만 목소리 가득 불신이 가득했다. 연금은 다급하게 청했다.
“절 믿어주십시오, 황후 마마. 저는 폐하를 대신할 뿐, 폐하의 연애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연모하는 여인을 함께 연모해야 하지.”
“마마. 제가 연모하는 분은…….”
“본궁에게 변명할 필요 없다. 따라올 필요도 없다.”
단호하게 말한 황후가 휙 몸을 돌려 걸어갔다.
연금은 그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았으나, 결국 따라갈 수 없었다.
* * *
‘폐하의 손등에 상처가 왜 그리 빨리 사라졌을까.’
비원은 멀끔한 황제의 손등을 아주 빠르게 훑어보며 오늘도 이 생각을 했다.
몇 달 전. 그는 황제가 손등 다치는 걸 보았다.
그런데 얼마 뒤 황제의 손등은 깨끗하게 상처가 나아 있었고, 심지어 흉터도 없었다.
그 뒤로부터 비원은 황제의 손등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물론 지금은 황제의 손등에 난 흉터가 다 낫고도 남을 시간이긴 했지만.
‘폐하가 설마 두 사람이라거나 그런 건 아닐 텐데. 아니, 두 사람일 수도 있지 않나? 매번 얼굴에 면사를 두르고 다니시니?’
그러다가 황후에게 가져다줄 책을 챙겨 황후궁에 들른 비원은, 황후에게 문안 온 후궁들이 줄지어 돌아가는 걸 보고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그렇게 하면 알 수 있겠군.’
그날 저녁.
비원은 후궁들이 문안할 때 쓰는 지붕 위에 아주 납작한 물그릇을 올려두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는 한 떨어지지 않도록 방향도 잘 조절했다.
‘이러면 되겠지.’
* * *
‘회임을 했으니 문안을 안 다녀도 된다’고는 하지만, 산책을 잘만 다니면서 문안만 안 다니면 너무 눈에 띄게 속내가 드러난다.
이 때문에 매일은 아니어도 나 역시 황후와 태후 마마에게 문안을 가고는 있었다.
태후 마마는 장공주 전하가 죽은 후로 몸이 안 좋아서, 태후 마마 쪽에서 문안을 거절하고 있다지만.
어쨌든 며칠째 황후에게 문안을 가지 않았지만, 슬슬 한 번 얼굴을 비칠 때가 되어서 나는 문안 갈 채비를 하고 가마에 올라탔다.
회임을 한 몸이란 걸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장식도 최소화하고 옷차림 역시 편안하게 입은 상태다.
덕택에 옷 안에 무기도 감추었지.
“천빈. 어서 와요.”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는데 괜찮아요?”
문안에 가 보니, 다른 후궁들은 이미 대다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안 도착한 건…… 영빈이네.
나는 인사를 걸어오는 친한 후궁들에게 대답하면서 내 자리로 가 앉았다.
황후는 힐긋 나를 보았지만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러고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때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밖에서 이런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후궁들은 다 같이 일어섰고, 나 역시 일어나야 했다.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앉으라.” 하고 명령을 내리고서 황후의 맞은편 상석으로 가 앉았다.
그러고서 이 각 정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반 각 정도 되었을 즈음 그 황제가 가짜 황제란 걸 알아차렸다.
‘가짜 황제는 황후한테서 시선을 못 떼네.’
가짜 황제의 시선만 보면 티가 났다.
가짜 황제도 이따금 날 보면서 따뜻하게 웃어주긴 하지만, 그 시선의 대부분은 황후에게 닿아 있었으니.
아주 노골적이었다.
“폐하랑 싸웠나요?”
눈치 좋은 촉비가 작게 물어볼 정도로.
“난 안 싸웠는데. 폐하는 싸웠을 수도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그냥 내 몫으로 나온 차만 마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폐하는 혼자 잘 삐지시잖아요.”
“……고 주둥이는 폐하를 상대로도 멈추지 않는군요.”
“난 남 눈치를 안 봐요, 촉비 마마.”
“자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문안이 끝나고 친한 후궁들끼리 뭉쳐서 밖으로 나갈 때였다.
태감들이 가마를 가져올 동안 잠시 지붕 아래에 그늘에 다 같이 모여 햇빛을 피하고 있는데,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나는 그것을 주먹으로 내리쳐 버렸다.
혹시 내공 실린 무기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도 내공을 실어 내리쳤더니, ‘그것’은 완전히 허공에서 부서져 박살 났다.
“악!”
“깍!”
“뭐야!”
주위 후궁들은 뒤늦게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허리를 조금 숙여서 떨어진 게 뭔지 확인하고 알려주었다.
“그릇이네요. 물이 든 그릇.”
뭐. 이 정도는 허리를 안 숙여도 알 수 있겠지만.
혹시 안에 독이 들었는지도 모르니까 냄새를 멀리 맡아보려 한 거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는 별 냄새도 나지 않았다. 세상에는 무색무취 독도 있긴 하지만.
“그냥 물인 게 맞아요?”
“독 같은 거 아니에요?”
몇몇 눈치 좋은 후궁들이 내가 염려한 바를 바로 물어왔다.
“아, 독인지 아닌지는-.”
따로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의외의 장면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떨어진 그릇에 정신이 쏠렸던 다른 후궁들도 모두 내가 보는 방향을 똑같이 보았다.
황제가 황후를 보호하려는 듯 자신의 품으로 감쌌다가, 사태가 끝난 걸 알자 뒤늦게 놓아주는 중이었다.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짜 황제가 다급한 척 물었다.
“천빈. 괜찮으냐?”
“거 참 빨리도 물으시네요.”
“!”
* * *
‘역시 황제가 두 명이었나.’
비원은 의심에 확신이 생겨 흐뭇하게 웃었다.
그릇을 천빈의 머리 위로 떨어뜨린 건 그가 한 짓이었다. 물론 비원이 천빈을 공격하기 위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고수인 천빈이 당연히 그릇을 피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비원이 원한 건 다급한 상황에 황제가 보일 행동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 찰나의 순간 누구를 감쌀지는, 마음먹는 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비원이 원하는 걸 보여주었다. 뭔가가 ‘퍽’ 소리를 내면서 깨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황후를 감싼 것이다.
비원이 아는 황제라면 당연히 천빈을 감쌌을 텐데.
심지어 황제는 제정신이 돌아온 후에도 황후가 괜찮은가 먼저 살피고, 그 후에야 천빈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비원은 히죽 웃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단주님께 보고해야겠어. 이건 또 예상 못 한 일이로군. 아. 혜비에게도 말해주어야 하나?’
* * *
그로부터 이틀 뒤.
“난 폐하께서 정말 그러실 줄 몰랐어요. 사람들 다 그래요. 역시 폐하께서 아무리 천빈을 아껴도 천빈은 첩이고 아내는 황후 마마라고요. 맞는 말이긴 하지요.”
“우리도 모두 후궁이니 천빈과 처지가 같죠. 슬픈 일이네요.”
“뭐. 좀 씁쓸한 사실이긴 해요. 그렇게 천빈을 아끼던 폐하께서, 위급한 상황이 되자마자 바로 황후 마마를 챙기시는 건. 하지만 그게 올바른 거잖아요?”
안비는 혜비를 만나 이틀 전 일에 대해 떠들다가, 그녀로부터 이상한 말을 듣게 되었다.
“실은 그 일 말인데, 안비. 내가 그와 관련해서 아주 이상한 걸 본 적이 있어요.”
“이상한 거라니요?”
“천빈이 폐하와 함께 호숫가를 거니는 걸 보았는데, 황후 마마와 폐하가 또 다른 곳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죠.”
“정말인가요?”
물론 혜비의 말은 거짓이었다. 황제가 가짜 황제와 그렇게 엉터리로 동선을 짤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혜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거짓말했다.
“그래요. 그런데 이번엔 천빈이라면 끔찍이 아끼는 폐하께서, 천빈 머리 위로 그릇이 떨어지는데 황후 마마를 감쌌잖아요? 그 두 개를 보고 나니 뭔가 이상해요.”
“세상에. 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안비는 눈을 놀라서 커다랗게 뜨다가 빠르게 깜빡였다.
안비는 황제가 천빈은 그냥 첩으로 아끼는 거고, 아내로 대하는 건 황후라서 그런 거라고만 여겼는데.
혜비의 말을 듣고 나니 꼭 황제가 둘인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안비의 눈이 공포로 하얘졌다.
“하지만 그 말이 맞는다면…… 정말 위험한 거잖아요? 이 일은…….”
“그래서요. 실은 그걸 알게 된 후에, 어느 쪽이 가짜인가 확인하고 싶어서 약을 하나 구했어요.”
“약이요?”
“한 방울은 자기 코에 묻히고, 다른 한 방울은 상대에게 묻히는 거예요. 각기는 무색무취지만, 두 개 향이 합쳐지면 목화향이 난다지요. 그걸 이용하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있잖아요?”
“어떻게요?”
“그야, 국무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이 진짜일 테니까요. 어전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그, 그러네요. 두 사람 구분만 하면 가짜와 진짜 구분도 가능하겠어요.”
“그렇죠. 하지만 무서워져서 그냥 관두려고요.”
“왜요?”
“한쪽이 가짜라 해도, 어쨌든 폐하께서 묵인하셨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아무 추궁도 안 당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구분해서 뭘 하겠어요.”
안비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그 말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혜비. 그 약…… 안 쓸 거면 나한테 줄래요?”
“위험할 텐데.”
“뭐가 위험해요? 혼자 구분하겠다는 건데. 그냥 가짜 황제와는 얽히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혜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에게 조그만 약병을 주었다.
약병을 받은 안비가 나가자, 혜비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