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
개원이든 개운호든 누구라도 좋으니 불러다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다.
분노로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저절로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젠장. 내가 등신이지!”
지금까지 나는 공부를 못하는 거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생각했는데. 혹시 나, 정말 머리가 나쁜 걸까.
어떻게 개원이랑 개운호 구분을 못 하지? 물론…… 둘이 많이 닮긴 했지만.
“…….”
아냐. 역시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야. 그 둘이 머리를 잘 굴려서 사기를 친 거지!
호흡을 골라야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배를 붙잡아 보지만 통증은 점점 강해지면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원웅. 부성. 귀자야.”
결국 끙끙 앓으면서 내 궁인들을 부르자, 바로 문이 열리면서 원웅과 귀자가 뛰어들어왔다.
“마마?”
“마마! 왜 그러세요?”
“배가…… 배가 아파.”
“마마?”
“마마!”
* * *
잠시 정신을 잃었나보다.
깨어나 보니 나는 침상에 누워 있고, 원웅과 부성, 귀자와 탕 궁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서 있는 태후 마마와 면사 쓴 떡돌이, 황후 마마, 연비, 촉비, 영빈, 기타 등등등. 뭐야. 왜 다 몰려왔어?
무슨 영문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탕 궁의가 내 손목에서 손을 치우고 손목을 덮었던 천을 개면서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마마?”
“내가 기절했는가?”
“예.”
“아. 배가 좀 아파서. 지금은 괜찮네.”
말하다 보니 갑자기 내 일기장 생각이 난다. 내 일기장. 어디 갔지? 분명 그걸 읽다가 배가 아팠던 거 같은데.
일기장을 꺼낸 기억도 본 기억도 있는데 치운 기억은 없다.
당황해서 열심히 눈을 굴리고 있자니, 책상 한편에, 다른 책들과 함께 있는 일기장이 보였다.
다급하게 궁의를 부르고 하느라 그냥 옆에 치워뒀나 봐. 다행히 안을 본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안도가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른 여기 모인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저 일기장을 치우고 싶어졌다.
“마마.”
“어. 으응? 왜 그러는가?”
“마마께서는 원래도 몸이 약한 편이십니다. 심장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하고 느리게 뛰지요. 그런 데다 회임까지 하셨으니,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는 일기장 치울 생각에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궁의는 느릿하게 이런 충고를 해준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는 일부러 베개에 머리를 깊게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혹시 잠 오는 약을 먹였는가. 잠이 오는 거 같은데.”
이러면 눈치껏 다들 나가주겠지.
하지만 탕 궁의만 물러서고, 궁의가 물러서자 떡돌이와 태후 마마, 황후 세 사람은 내 침상 곁으로 다가와 섰다.
속으로 꽥 비명을 뱉으며 쳐다보자, 떡돌이가 내 손을 자기 손 사이에 집으며 물었다.
“천빈. 몸은 좀 어떠하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고-.”
“탕 궁의!”
“할 줄 알았는데 괜찮아요.”
몸이 안 좋다고 하면 나가줄 줄 알았는데 떡돌이가 궁의부터 불러오네.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떡돌이가 다시 내 손을 톡톡 두드리며 몹시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보냈다.
내가 진짜로 아픈 건지 꾀병을 부리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불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조금 말을 바꿨다.
“피곤해서 자고 싶어요, 폐하.”
떡돌이는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듣겠는지, “아아.” 하고 탄식했다.
“막 깨어나서 아직 피곤한가 보군.”
“네.”
* * *
떡돌이가 눈치 좋게 알아들은 덕분에, 내 방 침소에서는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장공주를 잃은 태후 마마도 오랜만에 슬픔을 무릅쓰고 나와 주었다가, 내가 괜찮아 보이자 조심하라 당부하고는 돌아갔다.
나는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있다가,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들고 있던 이불을 내려놓았다.
“괜찮으냐?”
떡돌이가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다.
“갑자기 네가 쓰러졌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난 내가 쓰러진 걸 몰랐어.”
“보통은 모르지?”
“내가 어쩌고 있었어?”
“궁녀들 말로는 배를 움켜잡고 있었다던데. 그러다가 부축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배가 아프다 하고 쓰러졌다더라.”
“다른 얘기는?”
떡돌이가 고개를 젓는 걸 보니, 역시 상황이 급해서 다들 내 일기장에는 시선도 안 준 게 맞나 보다.
또다시 그쪽으로 시선이 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중에 혼자 남았을 때 챙겨야지.
나는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는 대신 떡돌이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눌렀다.
“이 낭군은 대체 누구 낭군이기에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까.”
“짐을 탓하는구나. 미안하다. 널 혼자 둘 때가 아닌데.”
내 어깨에 기대서 울던 떡돌이가 떠오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떡돌이 너 때문에 이런 거 아닌걸.”
그러고서 온화하게 웃다가, 말실수를 깨닫고 얼른 고개를 돌려야 했지만.
이 멍청이 천년비! 여기서 ‘너 때문에 이런 거 아니야’라고 말하면…….
“그럼 누구 때문에 이런 건데?”
이렇게 묻는다고! 속으로 절규하며, 나는 대답 대신 배 위에 손을 올리고서 얼굴에 힘을 줬다.
“윽. 배가 아프다!”
* * *
떡돌이는 여전히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지만, 그래도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내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가까스로 안심했다.
하지만 다시 일하러 가진 않았다.
“요 며칠 미친 듯이 일만 했으니 괜찮다.”
떡돌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꼭 쥔 채 곁에 머물러 주었다.
내가 목이 마르다 하면 마실 걸 가져오라 하고, 배가 고프다 하면 간식을 가져오라 하고, 내 배를 문지르면서 노래도 불러주고, 다리가 부으면 안 된다고 발도 문질러주었다.
얼마나 친절하고 달콤하던지, 꿀에 찍어 먹어버리고 싶은 떡돌이였다.
안타깝게도 지금 내가 떡돌이에게 원하는 건 당장 다른 곳에 가줬으면 하는 거였지만. 젠장. 난 일기장을 숨겨야 한다고!
“태후 마마는 아까 왜 오셨던 거야?”
“네가 쓰러졌다고 하니 그렇지.”
“다른 사람들도 다?”
“다.”
“전에 진짜 천소여가 독 먹고 죽을 때는 아무도 안 왔던데.”
“…….”
떡돌이는 내 손을 여기저기 눌러 지압해주다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회임한 몸이기도 하고. 그러니 다들 더 놀랐겠지. 우리 계란이가 황실의 첫 아이가 아니냐.”
내 탄생은 누구에게도 기쁨이 아니었는데. 내 아이의 탄생은 만인의 기쁨이 되는구나.
기분이 이상하다. 기쁜 동시에 씁쓸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내가 가지지 못한 사랑을, 우리 계란이는 듬뿍 받을 수 있겠어.
어색한 기분에 배를 쓸어보고 있자니 조금 겁이 난다.
나는 제대로 된 부모나 보호자 없이 혼자 컸는데. 우리 계란이를 다른 부모님들처럼 예뻐해 줄 수 있을까?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될 계란이를 보면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아온다.
얼결에 같이 손을 깍지 껴 잡고서 쳐다보자, 떡돌이가 내 곁으로 오더니 내 뒤로 가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자기 다리 사이로 끌어안았다.
완전히 몸이 그에게 파묻힌 채 쳐다보자, 떡돌이가 다른 한 손은 내 배를 쓸면서 물었다.
“우리 계란이가, 아빠는 계란이보다 엄마가 더 좋다고 하면 섭섭해할까?”
“!”
눈에 힘을 주고 올려다보자, 떡돌이가 내 손을 조물조물 문지르면서 물었다.
“계란이한테 물어봐라, 반숙아.”
떡돌이가 내 속마음을 읽었나? 어떻게 딱 이때 저런 말을 하지?
수상해서 쳐다보다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배에 귀를 기울였다.
계란이는 자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란이가 상관없대.”
괜찮아. 계란이가 자고 있단 건 나밖에 모르니까.
떡돌이는 활짝 웃더니 내 볼에 자기 입술을 누르고서, 내 머리에 자기 이마를 비볐다.
* * *
약을 먹고 나니 잠이 쏟아지려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어떻게 해서든 떡돌이를 내보내고 일기장을 감춰야 했으니까.
하지만 떡돌이는 자기가 충격에 빠진 동안 나를 챙기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지, 내 옆에서 떠나려 들지를 않았다.
하필 황제라 떨구기도 힘들었다.
먹을 것도 궁인들이 가져다줘, 마실 것도 궁인들이 가져다줘, 세숫물도 궁인들이 가져다줘, 옷도 궁인들이 가져다줘. 나갈 일이 없잖아!
게다가 이 와중에도 떡돌이는 내가 스치듯 말한 ‘너 때문에 이런 거 아니다’는 걸 기억하는지, 한 번씩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왔다.
“반숙아. 아까 짐 때문에 배 아픈 게 아니라 했는데. 그러면 누구 때문이라 생각한 거였지?”
그럴 때면 나는 떡돌이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고서 그가 책임 회피를 하고 있다고 호통쳤다.
나는 떡돌이 때문에 배가 아픈 건데, 떡돌이가 자아 성찰을 하기 위해 자꾸 책임을 회피한다고 말이다.
너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인지 떡돌이는 “자아 성찰?” 하고 되물었지만, 나는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내가 연애에 그리 능숙하지 않다지만, 전 연인 일을 지금 연인에게 말해선 안 된단 건 안다.
물론 그 전 연인 이야기가 된통 배반당한 거라 해도 그렇다.
물론 떡돌이는 내가 개원이랑 사귀었단 걸 알고 있지만…….
젠장. 그런데 정말 개운호나 개원이를 불러서 사정을 물어볼 방도는 없나?
예전이라면 개시시 도움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개시시랑 사이도 안 좋으니.
* * *
다음날.
내가 재촉하자, 하루 더 옆에 있겠다던 떡돌이도 마지못해 일하러 갔다.
“내가 언제 또 갑자기 배가 아플지 알고? 아플 때 일이 바빠서 못 오면 그것도 그렇잖아? 안 아플 때 가서 일해 둬.”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득한 덕이었다.
어쨌든 그 덕에 떡돌이는 일하러 갔고, 나는 일기장을 무사히 감춰둘 수 있었다.
다행이야. 하루가 지나는 동안 아무도 이걸 못 보다니!
그러고서 점심 식사를 한 뒤에는 혹시나 싶어 청적에 가보았다.
청적에서 개운호를 보았으니까. 혹시 또 그자가 거기로 왔나 싶어서.
개시시가 사경을 헤매다 일어났으니, 사촌 동생이 걱정되어서 또 왔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청적에 가 보니 개운호는 없고 면사를 쓴 떡돌이가 있었다.
“일하러 간다더니. 여기서 땡땡이를 치고 있어?”
아침에 보고 또 봐도 반갑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나는 다가가며 떡돌이를 놀렸다.
그런데 떡돌이는 내가 다가오는데도 멀뚱히 보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 혹시 연금인가? 그걸 보고 있자니 전에도 여기서 연금을 본 생각이 나서, 떡돌이와 만든 비밀 신호를 불러보았다.
“원앙.”
뒤에도 뭐가 있긴 했지만 생각이 안 나.
가짜 황제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일으키더니, 어제처럼 고개만 까딱했다.
그래. 내가 저거 보고 가짜가 가짜란 거 알아차렸지.
오늘도 가짜구나. 떡돌이가 미리 뭐라 해 두었나? 굳이 내 앞에서 진짜 흉내를 내진 않네?
어쨌든 오늘도 그냥 지나쳐 가려는 듯, 그러고서 가짜 황제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데,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